2023-01-12

동아시아 공동체론과 '지역적 자본주의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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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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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보면 1980~90년대도 그렇고 2000~2010년대도 참 재밌는 시대였던 것 같다. 전자가 냉전적 구도가 끝나는 시기의 좌파 담론의 마지막 활성기였다면 후자는 신자유주의 담론과 함께 동아시아 공동체론과 같은 비非사회주의적 좌파담론이 경쟁하던 시기였던 듯하다. 이제는 다시 신新냉전적 대립구도로 너무나도 쉽게 담론들이 빨려들어가는 바람에 대안적 담론들이 무언가를 논하기 어려운 시대로 가고 있다. 너무나도 익숙한 '해양문명 대 대륙문명', '자유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같은 대립구도로 쉽게 회귀해버리는건데 돌파하기가 쉽지 않다. 2010년대 무렵에 그래도 아직 동아시아 공동체론이 기능하고 있을 때 좀더 열심히 공부하고 관련 논자들한테 더 많이 질문했으면 좋았을텐데..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그때도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끝내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그것이 유럽연합에 대항하는 보다 확대된 내셔널리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런 측면이 강했다. 윤해동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국민국가를 그토록 격렬하게 부정하면서 어떻게 아시아주의 같은 양적인 차이밖에 존재하지 않는 내셔널리즘을 긍정할 수 있는건지 의아스럽게 느껴졌다. 동아시아 공동체론 자체도 너무 갈래가 다양해서 하나로 수렴되기도 어려웠다. 예컨대 호리 가즈오 등이 견지하는 "동아시아 자본주의론"에 입각한 경제공동체론과 와다 하루키가 사회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제시하는 '동북아 공동의 집' 프로젝트는 그 자체로도 내적 정합성이 거의 없었다. 임지현, 윤해동 식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서 일부 논자들이 제기하는 것도 내셔널리즘의 일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고,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일본 민주당의 외교정책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에 '일본적 담론'으로 많이 느껴졌다.
 중국 측의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론도 살펴보았지만 중국의 논의들은 대부분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전제로 하고 있어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들 뿐이었다.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 내부에서 헤게모니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전제로 느슨하고 점진적인 형태의 지역적 통합을 주장하는 것이고 다분히 일본 의식적이라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를 민주화하고 지역적 원심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지 않는 이상 압도적인 규모의 차이로 중국 헤게모니의 일방적 관철밖에 되지 않을 것이 뻔해 보였다. 다케우치 요시미 등의 일본의 아시아주의의 논의를 경유해서 가라타니의 <제국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논의들이 있었지만 다들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비판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폐기처분의 대상이었다. 왕후이가 아무리 중국공산당의 투명화, 민주화 등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 또한 본질적으로는 공산당 독재체제를 전복하지 못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무리 "부르주아적"인 것이라 해도 민주적 공화정을 경유하지 않고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적 계급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적이다. 레닌의 일당독재도 마찬가지다. 일국적 내셔널리즘을 고수하겠다는 중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애당초 실패할 것으로 보였다.
 엄밀하게 동아시아 공동체의 형성을 논하려면 역사적 경험에 의존해야 하는데 사실상 동아시아 공동체의 물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건 일본과 중국밖에 없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지역적 규모의 자본주의를 형성한 건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 대만, 동남아 등을 잇는 대동아공영권과 중국과 홍콩, 싱가포르, 동남아 화교, 대만 등을 잇는 중화경제권, 이렇게 두 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역적 자본주의가 형성된다면 이 두 역사적 자본주의의 재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튀르키예가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재현하려 하듯이, 러시아가 구소련의 영역을 재현하려 하듯이, 독일이 생활권을 구현하려 하듯이 계속해서 그런 역사적인 경험에 기초해서 상상을 하고 실현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중화경제권에 예속되는 것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재림인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론'을 추종하는 것도 어렵다. 그렇다고 고립되어 일국적인 상황에서 미국에 의존하기만 할 수도 없다. 
 내가 보기에 문재인을 비롯한 한국 민주당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이승만의 <독립정신>, 유길준의 <중립화론>과 유사한 발상을 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를 통일과 연결시켜서 중립화시켜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의 기제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한미관계를 축으로 한국의 중립지대화를 지향했던 것과 유사하게, 그리고 유길준이 청왕조의 영향력을 전제로 한국의 중립화를 상정했던 것과 유사하게 한국 민주당은 한미동맹에 기초한 통일 및 중립화를 고려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유길준은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위스보다도 불가리아나 벨기에에 주목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자신의 논의를 "지워버리려" 했다. 제국주의적 경쟁으로 나아가고 있는 19세기 후반의 세계사적 흐름에서 한국의 중립화론이 현실화되기 어려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박태균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아이젠하워도 유엔군의 북진에 의한 통일 이후의 한반도를 중립화하여 아예 미군을 전면 철수시키려 했다. 특정국가가 한반도를 장악하면 동북아에서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인식은 이미 카이로 선언 이전부터 미국이 갖고 있었다고 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이 문제는 백지화되고 한미동맹 체결로 이어졌지만 아이젠하워는 신탁통치와 같은 일종의 공동분점에 따른 영구중립화를 고려했던 듯하다.
 한국의 중립화 시도는 대한제국 이래로 면면히 이어져 온 흐름인데 1991~2021년까지의 30년의 세월이 딱 그걸 구현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세계사의 흐름은 이제 보다 분열하여 더 대립적으로 가는 방향으로 세차게 흐르고 있다. 중국의 중화경제권과 일본의 인도-태평양전략라는 지역적 패권주의 대립과 유라시아를 놓고 벌어지는 미중대립이라는 세계사적인 패권대립 속에서 한국은 계속해서 일국적인 입장을 고수하다가 일본의 인태전략 쪽에 굴욕적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좌파들이 좀 잘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동아시아 공동체론과 '지역적 자본주의의 형성'이라는 내 입장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누가 물어봐서 한참 대답해주면서 든 생각. 지역공동체론의 형성을 비판하면서도 일본과 연방제 수준으로 협력하고 통합해서 지역적 자본주의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다소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지역적-세계적 패권 대립이 심화되어 어쩔 수 없이 한일이 서로 힘을 합치게 되었을 때는 정말 더 좋지 않은 비용지불의 형태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보는지라 그나마 이렇게 평화(?)로울 때 좀 시도를 해야 되는데.. 개혁이 망하는 건 잘되고 있을 때 개혁을 해야 실패해도 잘되는 힘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데 잘되면 잘된다고 안하고, 망할 때는 뭘해도 망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개혁을 실패하게 된다. 좋은 방향으로 가기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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