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4

패전 후 일본이 '국립국회도서관'을 세운 이유 - 야마베 겐타로 ①, 2

패전 후 일본이 '국립국회도서관'을 세운 이유 - 오마이뉴스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 21화

패전 후 일본이 '국립국회도서관'을 세운 이유[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도서관의 기인, 야마베 겐타로 ①
21.08.08 19:54l최종 업데이트 21.08.08 19:54l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세 사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누가 좋은 놈, 나쁜 놈이고, 이상한 놈인지 따져보는 재미도 있지만, 영화 제목처럼 세상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영화 속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는 어떤 사람일까?

야마베 겐타로는 1905년 5월 20일 도쿄시 혼고구(本鄕區) 다이마치(台町) 51번지에서 태어났다. 1912년 규슈(九州) 벳푸(別府)에서 신조(尋常)소학교를 졸업한 야마베는, 1919년 마루젠(丸善) 오사카 지점에서 견습 사환으로 일했다. 마루젠 서점에서 일하면서 그는 영어와 한문, 독일어를 배웠다.

마루젠에서 시작한 사회생활


▲ 1910년 무렵 마루젠 츠타야, 키노쿠니야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서점이다. 마루젠(丸善)은 1869년 문을 열었다. 설립자는 하야시 유데키(早矢仕有的)다. 2015년 준쿠도서점과 합병하여, 현재는 ‘마루젠준쿠도서점’이 되었다. 마루젠은 야마베 겐타로의 첫 직장이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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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젠에서 1년 반 직원으로 일한 후, 야마베는 노동 운동을 하기 위해 서점을 그만뒀다. 1920년 그는 양말(버선)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21년 5월 1일 오사카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에 야마베가 참여했을 때, 그의 나이 불과 열다섯이었다. 이 무렵 그는 "작은 틈도 아껴서 공부했다"라고 할 만큼, 책과 사회주의 잡지를 탐독했다.


1923년부터는 고이와이 기요시(小岩井淨)가 운영한 자유법률상담소에서 일했다. 고이와이 법률상담소는 당시 좌익의 거점 같은 곳이었다. 노동자로 일하면서 야마베는 월급이 생기면, 사회과학 및 사회주의 서적을 구입해 읽으며, 공산당과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야마베는 1920년대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사회주의 문헌 대부분을 읽었다. 사회주의 문헌을 '독파'한 그를 두고,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를 비롯한 일본 사회주의 이론가 사이에 '천재가 나타났다'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스물한 살이었던 1925년, 야마베는 일본 노동조합평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했다. 이 과정에서 야마베는 '지도부'로, 일본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1926년에는 하마마츠(浜松) 일본악기 쟁의에 참여했다. 오사카에서 공산청년동맹 재건 운동을 벌이던 그는, 1929년 4.16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야마베는 복역 중 전향을 거부하고, 1933년 12월 만기 출소했다. 출소 후 다시 노동조합 운동을 벌인 그는, 1941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도쿄 도요타마(豊多摩) 형무소 안에 있는 예방 구금소에 갇힌 그는,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야마베는 일본 패전으로부터 두 달 후인 1945년 10월 10일에야 출소할 수 있었다.

야마베는 왜 '전향'하지 않았을까? 일본 역사 연구자인 기쿠치 마사노리(菊地昌典)가 야마베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이 질문에 야마베는 이렇게 내뱉었다.

"그건 성격이야. 타고난 성격이지. 이론 따위가 아니야. '이 빌어먹을' 하는 근성이 없으면 안 돼."

타고난 반항 기질이 그를 '비전향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 실제로 야마베는 자신이 사회주의 운동가가 된 이유를 <사회주의 운동 반생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타고난 반골과 시대 풍조 탓에 사회주의의 길로 내달렸다."

일본인인 그가 한국 근대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


▲ 도요타마 형무소 정문 도요타마 형무소는 김지섭(金祉燮), 박열(朴烈), 이강훈(李康勳) 같은 조선 독립운동가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관련자가 옥고를 치른 곳이다. 현재 일본 교정(矯正)연구소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시 정문과 담장 일부가 남아 있다. 야마베 겐타로는 1941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이곳에 투옥되어, 1945년 10월 출소했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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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야마베는 소문난 '골통'이었다. 여름에는 죄수복을 입지 않고 알몸으로 지냈고,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아 간수들이 직접 나서 청소를 해줄 정도였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야마베는, 김천해(金天海)라는 재일 조선인을 만난다. 이 만남은 야마베가 한국 근대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김천해를 만난 것이, 나중에 나의 한국사 연구의 원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자본주의 연구에 있어서 식민지 수탈을 빼놓을 수는 없지요."

야마베의 표현처럼, 김천해는 '재일 조선인으로 전향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야마베는 감옥에서 극도로 쇠약해진 김천해가 용변을 볼 수 있도록 부축해주고, 용변을 본 다음에는 그의 엉덩이를 직접 닦아 주기도 했다. 감옥에서 우유를 따로 받아, 김천해에게 먹이기도 했다. 민족과 국적을 떠나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야마베와 김천해는 '동지'였다.

1898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난 김천해는, 경성 중앙학림을 졸업했다. 고향에서 야학과 농민 운동을 하던 그는, 1920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천해는 1923년 간토대지진(關東大震災) 과정에서 터진 '조선인 학살'을 접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유학 중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김천해는,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과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를 맡아 활동했다. 출소와 체포를 거듭하던 그는 도쿄 도요타마 형무소 예방 구금소로 옮겨져, 야마베 겐타로와 함께 수감 생활을 했다.

일본 패전 후 출소한 김천해는 일본공산당 서열 3위까지 올랐다. '재일 조선인의 빛나는 별'이었던 김천해는 1950년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로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고위직으로 일했다.

사회주의 혁명가에서 역사 연구자로


▲ 1950년대 일본공산당 본부 일본공산당은 1922년 7월 15일 창당했다. 1945년 일본제국 패망 후 합법화되었다. 현재 자민당, 입헌민주당, 공명당에 이어, 원내에 진입한 제4당이다. 1945년 출소한 야마베는 일본공산당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본부 입구에 "전쟁 반대"라는 구호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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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전 후 감옥에서 출소한 야마베는, 일본공산당 재건 활동에 뛰어들었다. 일본공산당 서기국원과 통제위원, 잡지 <전위>의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46년 3월 1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조선독립 3.1 혁명운동 기념일 인민대회'가 열렸다. 일본공산당을 대표해서 이 행사에 참석한 야마베는, '조선 인민과 연대한다'라는 인사말을 했다.

마흔넷이었던 1948년, 야마베는 여성 지질학자 후지와라 다카요(藤原隆代)와 결혼했다. 그의 반려자인 후지와라 다카요는, 도쿄고등사범학교 도서실 사서와 게이센(惠泉)여학원 도서관 분관장을 지냈다.

1949년 5월 15일 야마베는 역사학 연구대회에 참가했다. 정식 교육과정을 거쳐 역사를 공부하진 않았지만, 그는 역사학 연구대회에서 당당하고 신랄하게 발언했다.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역사학 연구대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역사 연구와 공산당 활동을 병행하던 야마베는, 1958년 일본공산당을 탈당했다. 그 이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가'가 아닌 '역사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1959년 그는 조선사연구회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역사를 연구하면서 야마베는, 일본 근대사 연구에 중대한 결함 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 자본주의 체제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타이완과 조선, 만주를 침략했다. 일본 식민지 경영은 일본 자본주의 체제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이 부분이 간과되고 있다는 점을, 야마베는 간파했다. 이 통찰이 일본과 한국 근대사를 '함께' 연구하게 된 중요 계기였다. 야마베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일본의 근대사를 이해하려면, 조선 문제 연구가 필수적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 문제, 이것을 빼놓고는 일본의 근대사를 알 수 없다.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이다."

일본사뿐 아니라 한국 근대사를 연구한 야마베는, 한국과 인연이 있다. 벳푸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무렵 그는, 어머니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살았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경성에 머문 이 시절은, 그에게 조선을 실체적으로 체험한 기억으로 남았다.

소학교만 졸업한 그가 연구자로 명성을 날린 이유


▲ 야마베 겐타로와 나카츠카 아키라 텐리대 도서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이 야마베 겐타로다. 야마베에게 큰 영향을 받은 나카츠카 아키라는, 교토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나라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나카츠라 교수는 근대 한일관계사를 연구한 지한파(知韓派)다. 일본 식민지배 책임을 철저히 추궁한 그는, 일본 양심을 대표하는 학자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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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 졸업이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야마베는 조선 근대사 분야를 개척한 일본인 연구자로 이름을 날렸다.

"학문에 학력은 필요 없지만, 노력은 필요하다."

야마베가 한 말처럼, 그는 이렇다 할 교육기관을 거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노력해서 뛰어난 학자, 역사가가 되었다. 그가 1966년에 쓴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와 1971년 펴낸 <일본 통치하의 조선>(日本統治下の朝鮮) 역시, 이와나미서점을 통해 신서판으로 출간되었다.

<일한병합소사>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하는 과정을 쓴 역사서로는,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30쇄 넘게 발간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립국회도서관 건립과 운영에 기여한 하니 고로(羽仁五郞) 참의원 도서관운영위원장은, 루쉰(魯迅)의 말을 인용하며 <일한병합소사>를 높이 평가했다.

"붓으로 쓴 거짓은, 피로 쓴 진실을 감출 수 없다."

일곱 권으로 발간한 <현대사자료 - 사회주의 운동편> 역시 야마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소학교 졸업에 그쳤지만, 그가 연구자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기반은, 다름 아닌 '도서관'이었다.

서점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역사 연구에 몰두한 후로 도서관에 기거하다시피 했다. '책에 파묻혀 산 삶'이라 할 수 있다. 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사회주의 운동 반생기>에 야마베는 이렇게 썼다.

"소학교에 들어갈 때 벌써 중학생이 읽을 만한 책을 읽고 있었다."

도서관에 살며 파고든 한국 근대사


▲ 야마베 겐타로 감색 보자기를 들고, 게다(나막신)을 신은 모습이다. 야마베가 터줏대감처럼 머문 국립국회도서관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옷차림과 집안 정돈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치밀한 고증을 거친 그의 글은 늘 정갈했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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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안에서 '거짓'과 '속설'로 이뤄진 한국 근대사를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 야마베는 자료를 철저히 파헤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국립국회도서관을 매일 드나들며 살다시피 했다.

국립국회도서관뿐 아니라 옛 우에노(上野) 제국도서관, 도쿄대학과 와세다대학 도서관, 도요문고(東洋文庫), 세이카도문고(靜嘉文庫), 아치다가키치문고도 자주 드나들었다. 야마베는 <일한병합소사> 머리말에 자신이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한 기관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저자는 도요문고, 세이카도문고,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외무성 기록 등 수많은 자료를 면밀히 조사 검토한 후, 사실에 입각하여 본서를 기술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던 중요 문헌인 산조 사네토미 문서, 이토 히로부미 문서, 이노우에 가오루 문서, 무쓰 무네미쓰 문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문서, 가쓰다 다로 문서를 '섭렵'하며, 사료를 통해 자신만의 역사적 사실을 구축했다.

야마베가 살다시피 한 국립국회도서관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새롭게 문을 연 일본의 국가도서관이다. 1948년 6월 아카사카(赤坂) 이궁(離宮)을 임시청사로 개관했다. 1961년 나가타쵸(永田町)에 도서관 공사를 끝내고, 옛 제국도서관이었던 우에노 도서관 장서까지 합쳐, 일본 최대 도서관으로 거듭났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법 전문은 "국립국회도서관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확신 위에서, 헌법이 서약하는 일본의 민주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여기에 설립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진리'가 아닌 '반지성'에 근거한 일본 정치가 국민을 전쟁과 패전으로 몰아넣었다"라는 반성 속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국립국회도서관을 건립한 것이다. 국립국회도서관 본관 2층 목록홀 벽면에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헌정자료실은 1949년 9월 국립국회도서관 분관에 개설했다. 헌정자료실의 창설과 운영을 주도한 사람은 오쿠보 도시아키(大久保利謙)다. 일본 근대사 연구자인 오쿠보 도시아키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함께 '유신 3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손자다.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 정치인의 각종 사료와 문서를 방대하게 수집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정치인의 공문서와 사문서를 체계적으로 모아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던 '문서 아카이브'가 탄생했다.

- 2편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 평생 한국 근대사 연구한 일본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태그:#야마베겐타로, #조선침략, #도서관이용자, #국립국회도서관,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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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8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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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패전 후 일본이 '국립국회도서관'을 세운 이유에서 이어집니다.

야마베 겐타로는 역사 연구에서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이 차지하는 위상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벌써 12, 13년 헌정자료실에 다니고 있는데, 실제로 매일매일 읽고 있어도 잇따라 중요한 사료가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정자료실에 다니는 것이 즐겁습니다. (중략) 헌정자료실이 일본의 근대사 연구 발전을 위해 하고 있는 역할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직원으로 일한 유이 마사오미(自井正臣)는 야마베에 대해 이런 회상을 남겼다.

"그 무렵은 정말 날마다 즐거워 보였다. 규칙적으로 아침 10시 30분경, 감색 보자기에 2, 3권의 책과 원고용지, 필통에 연필을 몇 개나 준비해왔다. 또 조간신문을 한 부 반드시 가지고 왔다. (중략) 10시 30분경부터 오후 4시 무렵까지는 사료를 베끼거나 차 준비를 하면서 정말 자유롭게 공부하고 있었다. 완전히 자신의 연구실 같은 느낌이었다. 스스로 헌정자료실 감옥의 감방장이라 칭했지만, 종종 열람하러 온 사람을 붙잡고 "너, 사료를 만년필로 베끼면 안 된다. 연필로 해라"라거나 "너는 무엇을 하고 있나. 그렇다면 그 책을 읽었는가. 사료 읽기 전에 저것을 먼저 읽어라" 라는 식으로 주의를 주거나 가르쳐서 도서관 직원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명물이자 기인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입법부에 속한 국가기관으로 국립국회도서관은, 입법활동 보좌를 위해 세운 의회도서관이다. 1948년에 개관했다. 국가도서관 기능을 겸하고 있다. 국립국회도서관은 도쿄에 본관을 두고, 간사이관과 국제어린이도서관을 분관으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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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야마베는 '재야 연구자'로서 독특한 위상을 지녔다. 재야 연구자라는 위상은,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다. 강덕상(姜德相) 같은 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이니치'(在日) 강덕상이 '우리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야마베 겐타로와 만남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강덕상을 처음 만난 야마베는 이런 말을 건넸다.

"너는 조선 사람인데 왜 중국사를 하나? 일본의 근대는 조선 식민지 지배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이니, 일본에 있는 너희 조선인이 조선사를 해야 의미가 있다."

1989년 재일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국립대(히토츠바시대학) 교수가 된 강덕상의 이어지는 회고다.

"우리(강덕상과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는 둘 다 야마베 겐타로의 제자다. 도서관에서 야마베를 따라다니며 자료 모으는 것을 배웠다."

야마베가 도서관에서 어떻게 자료를 수집했길래, 훗날 이름난 학자가 되는 두 사람이 그로부터 자료 수집을 배웠다고 할까? 김효순이 쓴 야마베 겐타로에 대한 글을 옮겨 보자.

"그는 사료 수집의 대가였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사료 수집의 노하우를 배웠다는 후학들이 적잖다. 날마다 국회도서관에 딸깍거리는 게다를 신고 가서 수없이 문헌 대출을 신청했다. 결국 도서관 직원들이 질려서 아예 서고 출입을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했다. 나아가 도서관 한구석에 개별 공간을 마련해줘 개인 서재처럼 쓰도록 했다. 그에게 우편물을 보낼 때 주소 칸에 '국회도서관 야마베 겐타로'라고 쓰면 배달이 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히 국회도서관의 명물 대접을 받은 셈이다."

1차 사료로 증명한 역사적 진실


▲ 야마베 겐타로 조선 근대사 연구의 개척자로 알려진 야마베 겐타로는 기인이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사회에 나와서도 청소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택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야마베의 기인 같은 풍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 서해문집 <역사가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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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후배들에게 '공짜'로 자료 수집 노하우를 전한 건 아니다. 야마베에게 푼돈을 '뜯긴' 후배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서관에 관련 문헌을 조사하러 나온 젊은 연구자들은 그에게 수시로 잔돈을 뜯겼다. 미야타 세쓰코(宮田節子)의 회고에 따르면, 야마베는 귀가하려고 도서관을 나서기 전에 차비가 없다며 10엔을 요구하곤 했다. 사는 데까지 가려면 20엔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얻어 쓰는 주제에 어떻게 다 타고 가느냐, 중간쯤에 내려서 걸어간다"라고 답했다. 그러다 <일한병합소사> 출판 기념회 자리에서 의외의 사실이 공개됐다. 야마베가 자신은 옷 안주머니에 항상 1만 엔을 갖고 다닌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평소에는 수중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쓰지 않는다고 밝혔다. 연구자란 언제, 어디서, 어떤 사료를 마주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비상금으로 갖고 다닌다는 것이다. 1만 엔은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수시로 대선배에게 푼돈을 뜯겼던 후학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자료 수집의 대가인 야마베는, 특히 1차 사료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1차 사료를 찾아라. 살아 있는 사료, 손대지 않은 사료를 찾아 공부하라!"

'논문은 사료로 말해야 한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던 야마베는, 자신의 지론처럼 엄격한 연구자였다. 그는 이런 엄격함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던 모양이다. 자신이 애써 모은 사료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거나 공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서관의 기인'답다.

앞서 감옥에 있을 때 야마베가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출소 후에도 야마베는 자신의 집을 전혀 치우지 않았다. 도쿄 요요기(代々木)와 쵸후(調布)에 살았던 그는, 온갖 쓰레기 더미 속에서 고양이 30마리와 함께 살았다. 손님이 오면 방 한구석을 치우고 DDT를 뿌리고 앉으라고 했다. 머리와 수염을 다듬지 않았고, 옷차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미스즈서방(みすず書房) 편집자 오비 도시토(小尾俊人)는, 이 시절 야마베 겐타로를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수염은 깎지 않고, 손에는 보자기, 늘 게다(나막신)를 신은 차림으로 나타나 자료조사에 몰두하는 야마베 씨, 처음으로 아사가야(阿佐ケ谷)의 댁을 방문했을 때 인상이 선명하다. 책은 선반이 아닌 거실 바닥에 잔뜩 깔아놓고, 그 위에 침구와 식기도 놓여 있었다. 고양이가 십여 마리 그곳에 동거하고, 야릇한 냄새도 풍겼다. 그런 생활의 연상과는 전혀 대조적으로 원고의 글자는 한 칸 한 칸 단정하게 아름답고 멋있었다. 사실(事實) 앞에서의 겸허함, 명쾌한 판단, 산뜻한 문장, 순간의 유머, 그런 야마베 씨였다."

혹자는 야마베가 쓰레기 집에서,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진실을 추적해, 누가 '역사의 쓰레기'였는지 끝내 증명했다.

고양이와 어린이를 사랑한 미식가


▲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야마베 겐타로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韓國倂合)에서 중전 민씨 사체 능욕설을 언급했다. 1895년 10월 8일 중전 민씨는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당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 낭인은, 중전 민씨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에 있는 녹산에서 불태웠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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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그는 당뇨와 폐결핵으로 도쿄 구기야마 병원에 입원했다. 2년 후인 1977년 4월 16일 오후 9시 20분, 야마베는 구기야마 병원에서 회맹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7년 4월 28일 오후 2시, 그가 살던 히가시(東久) 구루메(留米) 단지 집회소에 300여 명이 모였다. 열흘 전 세상을 떠난 야마베 겐타로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언뜻 사회성 없어 보이는 야마베였지만, 많은 사람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그가 고양이를 30마리나 거두어 키웠다는 점도 이채롭다. 또한 야마베는 '미식가'였던 걸로 알려져 있다. 하루에 아이스크림을 40개나 먹었다는 일화가 있고, 말년에 구기야마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찹쌀떡을 먹기 위해 병원을 몰래 빠져나가기도 했다. 야마베가 세상을 떠난 후 추모 문집으로 출간된 책은, 야마베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구 지껄이는 잡담 속에서도 사실과 인간에 대한 면도날 같은 날카로운 경구(警句)를 날리고, 지식과 책을 사랑하고, 등산을 유일한 취미로 삼고, 고양이를 사랑한 그 품격을 그리워하며 기억할 것이다."

야마베 겐타로는 일제가 행한 조선통치의 실태를, 자료와 통계를 바탕으로 규명했다. 일제가 공표한 자료 중에는 '분식'(粉飾)된 자료가 많아, 통치자가 사용한 자료와 비밀사료를 주로 활용했다.

을미사변 당시 '중전 민씨 시체 능욕설'도 야마베 겐타로의 연구로부터 조명받았다. 야마베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韓國倂合)에서 한국통감부 고위 관료가 쓴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蔵) 보고서>를 인용하며, 부랑배들이 왕비의 시체를 능욕했던 내용을 언급했다.

야마베는 '중전 민씨 시해가 일제가 조선에서 범한 죄악 중 가장 엄청난 행위'이며, '을미사변에 대해 지금까지 적힌 것은 전부 거짓투성이라고 해도 좋다'라고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했다.

그가 폭로한 일제의 만행과 바보짓


▲ 산행을 앞둔 야마베 겐타로 1977년 4월 16일 야마베는 도쿄 구기야마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책과 고양이를 사랑한 그가, 유일한 취미로 삼았던 것이 등산이다. 나카츠카 아키라의 오사카 집에서 기이산지로 산행을 떠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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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한일 교류사를 연구한 이수경 교수는, 야마베 겐타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1977년 타계한 야마베가 남기고 간 역사학자의 '양심'이야말로 진정한 한일 관계의 얽힌 역사를 풀어나갈 수 있는 내일을 위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식민통치에 직접 관여한 대다수 일본인 고위 관료는, 일본 패전 후에도 조선 통치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라는 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한 적이 없다.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하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한 것뿐이다."

야마베 겐타로는 일본이 조선 통치 과정에서 '선의(善意)의 악정(惡政)을 했다'라거나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을 "참으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했다.

야마베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조선인의 생활이 같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일본이 통치 과정에서 행한 '바보짓'도 낱낱이 나열했다. 군인 출신의 조선총독 임명, 신사 참배 강요, 군사비 부담, 조선인 징병과 창씨개명... 결국 일본의 '선의'는 증명할 수 없고, '악정'만이 남았다는 것이 야마베의 '결론'이다.

한국의 불행은 조선의 식민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야마베는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인에게 조선 통치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그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를 썼다.

그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일까?


▲ 야마베 겐타로와 후지와라 다카요의 묘비 야마베는 세상을 떠난 다음, 후지와라 가문 묘소에 묻혔다. 후지와라 다카요는 야마베의 아내다. 야마베와 후지와라 두 사람의 묘비는, 히로시마시에 있다.
ⓒ 씨알누리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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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전반기를 '사회주의 운동가'로 산 야마베는, 생애 후반부는 도서관의 책과 사료에 파묻혀 '역사 연구자'로 살았다. '도서관'에 많은 신세를 졌기 때문일까? 후학 중 한 사람이 야마베에게 이런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선생님만큼 평생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일제 때는 감옥에 들어가 보호받고, 전후에는 국회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고, 돈이 없으니 세금을 낸 적도 없으니까요."

'도서관 인물사'는 도서관장이나 사서처럼, 도서관에서 '일한 사람'만의 역사일까? '이용한 사람' 이야기는 '도서관 역사'에 포함되지 않는 걸까?

야마베 겐타로 이야기는 일본인이, 일본 도서관에 남긴 이야기다. 일본의 치부를 들췄다는 점에서, 그는 일본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할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한국인보다 우리 근현대 역사를 뜨겁게 연구했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도서관을 열렬히 이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야기는 강렬한 흥미를 일으킨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에게 그는 '진상 이용자'였을 수 있다. 그런 그가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사서도 놀랍다. '도서관'이 없었다면, 야마베는 역사 연구자로서 자신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다. 도서관 서가를 헤매며 수많은 자료를 뒤진 그의 이야기는, 국적을 떠나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자료를 통해 그는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 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파장을 가져올까? 야마베는 진실을 추구했으되, 외면받는 삶을 살았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의 잘못을 낱낱이 규명한 야마베는 어떤 사람일까? '도서관의 기인'으로 살았던 야마베는 상당수 사람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일본의 보수 우익은 일본의 치부를 드러낸 그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우리에게 야마베는 어떤 사람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태그:#야마베 겐타로, #조선침략, #도서관이용자, #국립국회도서관,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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