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교수, 백낙청 선생
한국문학과 문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던 내가 백.낙.청. 세 글자를 생각해볼 기회가 왔다.
얼마 전 백교수의 D.H.로런스에 관한 책을 감명깊게 읽은 데다, 때 마침 고은의 문단복귀로 새롭게 고은과 백교수의 인연이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최근에 발표된 ‘2023년 백낙청 신년칼럼’의 얼토당토 않는 시국관에 많은 사람들과 같이 황당해하던 참이었다.
희대의 성범죄중독자 고은이 아무런 사과와 반성도 없이 문단에 슬며시 얼굴을 다시 비추자 애먼 불똥이 백교수에게 튄 게 아니다. 백교수는 지난 세월 고은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자 파트너로서 그의 악마성을 가려주고 덮어주고 키워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백교수는 약관 27세의 나이에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후 이른바 ‘순수문학’에 반기를 든 ‘참여문학’을 주창하여 문단을 양분하여 지금은 거의 삼켜버린 거목이다.
고은과 손을 잡은 이후로는 거의 모든 문화권력을 자신의 발 아래 놓고 현실정치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거목 중의 거목이다.
그런 백낙청교수와 고은의 만남은 1994년에 발표된 이문열의 대표작 <사로잡힌 악령>에 상세하게 그려져있다. 얼마 전 페친 주동식선생 포스팅을 통해 다시 읽을 기회를 가졌는데, 최영미시인의 미투 함성이 터지기 이십오년 전에 그 대단한 문단권력 고은을 고발한 이문열의 용기와 귀기 어린 문체에 다시한번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자신의 천박한 허영심과 이름값을 부풀리기 위한 전략으로 ‘명사 사냥’을 일삼아왔던 고은의 주도면밀한 기획하에 이루어졌다.
”’명사 사냥’시절과는 동떨어지게 그쪽에서 적극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도 있었다. 전 같으면 스스로 찾아가 교유를 구했던 어떤 명사의 출판기념회에 찾아가 시비를 걸고 행패를 부린 일이었다. 그 명사는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당시만 해도 이 나라에 몇 없다는 철학박사를 따온 장안 명문가의 자제일 뿐만 아니라 ‘사상계’의 정신적인 적장자를 지향하는 어떤 문학 전문지의 발행인이었다. 그런데 그 명사가 서구에서 갈고 닦은 새 이론으로 바야흐로 첫 평론집을 펴내고 자축하는 자리를 그가 뛰어들어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철학박사라고 슬쩍 뺑끼칠을 했지만 글 속의 명사가 백낙청임은 삼척동자라도 알 것이다.
작중 화자는 이 문장 다음에 ‘내게는 완전한 파탄을 느끼게 하는 그의 실수였다’라고 이 장면을 회고했지만 문단사정에 밝은 소식통을 빌어 그 이면을 들추어낸다.
”그런데 그게 바로 그 사람식의 접근방식일 수도 있지. 나는 너희와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우두머리인 너는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는 강경한 의사표시와 함께 사과를 통해 새로운 친분관계의 구축을 모색할 수도 있으니 양수겸장 아니겠어? 내가 그를 나쁘게만 보아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실제 그 뒤의 진행도 그랬지. 술 깬 다음 그는 그 발행인을 찾아가 공손하게 사과했고 곁들여 간곡한 전향선언도 한 모양이라.어쨌든 그 뒤 발행인은 그를 평론에서 언급하게 되었고 그는 아무 잡지 발행인 아무개와 친구라고 떠벌일 수 있었으니까”
당시 고은은 더러운 성범죄 행각과 거짓된 행실로 문단과 대중의 인내수위를 넘어가 철저히 고립된 처지였다.
그렇다면 그런 평판을 알고서도 운동의 대의에 부담이 될 수 있었던 고은을 받아들인 백낙청의 셈속은 무엇이었을까. 문단소식통의 고변은 계속된다.
“그래도 그보다는 당장의 이익이 크지. 모든 운동은 세력다툼이야. 그런데 그 발행인, 외국서 갓 돌아와 포부만 거창하고 깃발만 화려하지 그 쪽에 제대로 이름 얻은 사람 몇 돼? 만들어낸 작가나 시인은 아직 어리고……그런 상황에서 다소 하자가 있는 것이라도 그만한 지명도는 쉽게 외면하기 어렵지. 더구나 저쪽 순문단에서 하나 빼와 이쪽에다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니 문단판도에서 보면 둘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고. 뿐인가. 앞으로 그가 행실만 자제해준다면 과거의 그의 개별적인 과오가 아니라 순문단의 병폐로 돌려버릴 수있 으니 금상첨화고. 두고 봐.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둘은 좋은 짝이 될 거야. 공생의 조건으로는 거의 갖춘 셈이니까.”
이쯤 되면 백낙청교수는 세력확장을 위해 고은이라는 희대의 허섭쓰레기 악마를 창비로 끌고들어와 살려준 꼴이 된다. 더구나 창비와 손을 잡은 후 고은은 그 빽으로 민주투사, 민족문학을 이끌 위대한 시인의 호칭까지 넘겨보고 언감생심 노벨문학상까지 노리는 거대괴물로 자라난 것이다.
그는 가장 진솔하고 거짓됨 없이 우리 민족의 영혼과 정신을 노래해야 할 문학계에 거짓대마왕을 끌어들여 권력을 쥐여준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백낙청교수의 그리고 그가 지분을 갖고 있는 이 땅의 진보운동의 가장 치명적이고 근원적인 업보라고 생각한다. 악마가 양지 높은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는 골에 어떻게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피어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은 그가 불가피하게 악에 잘 못 말려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그의 책임이다. 그는 힘을 원했고 힘을 주겠다는 악마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대학시절 그의 책을 읽고 자랐던 86세대가 모든 사유를 미루고 정권획득, 권력투쟁에만 능한 진영정치기술자로 웃자란 것도 넓게 보면 그의 책임범위에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백낙청교수의 악업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경칭없이 부르기를 주저하면서 백교수와 백선생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첫번째로는 그가 없이는 반독재민주화투쟁과 민중중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우리현대사의 절반이 성립되지 않을만큼 그 시대 그의 역할과 공훈이 크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그냥 투사가 아니라 거대한 사상가였고 그의 천재는 역사의 흐름에 순기능을 할 때만큼이나 역기능을 하는 지금에서조차도 빛을 발하고 있다.
백낙청이 펼친 '근대극복과 적응의 이중과제론', '분단체제론과 과정으로서의 통일론' 등은 지금에 와서는 그 시대적 부적합성으로 많은 현실적 폐해를 일으키고 있다지만 아직도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을 모색하는 이들에게는 자기정체성을 새로이 확립할 수 있는 강력한 반면교사의 준거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분단체제를 그대로 놔둔 채 남쪽 사회만 개혁해서 우리 사회문제를 풀어보겠다는것은 불가능하므로 통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백낙청교수의 통일론에 대해 인문운동가 이남곡선생님은 이런 반론을 제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해결방식이 왜 ‘통일’이어야 하는가? 남과 북은 국가적과제가 상당한 시간차를 두고 현격히 달라져 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 ‘통일’을 전제로 분단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미 낡은 것이라고 나에게는 보인다.오히려 통일을 강조할수록 통일에서 멀어지며, 오히려 남남갈등만을 키워 ‘다수의 결집’을 어렵게 하는 현실을 보지 못하면 ‘변혁적 중도주의’는 환상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남과 북이 각각의 국가과제를 ‘통일’이라는 ‘고정관념’에 방해받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진로에 맞게 개혁해감으로써 그 공유하는 가치가 커질 때 통일을 시도하는 것이 민족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다.”(이남곡 페북, 2021년 12월 10일, 2022년 4월 27일)”
그리고 또 하나 백교수의 로런스론을 읽으면서 그가 ‘근대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동시에 해결해나갈 사상적 방법론으로서 우리민족 고유의 ‘개벽사상’을 지목한 것은 역시 대가답다고 느꼈다.
하지만 구체적 현실로 돌아와보면 그의 정치적실천이 지난 세기 반민주투쟁의 잔영을 벗어나지 못하고 진영놀음에 철저히 복무하는 편벽된 것인데다 ‘신념칼럼’에서 현 정세를 분석하면서 구사하는 용어의 수준이나 인식이 김어준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
그 깊은 원론적 사유와 실천방침으로서의 천박한 각론 사이에 골 깊게 패어있는 수준차이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개인주체성과 책임성이 기본이 되는 근대화과제 성취가 아직도 너무나 요원한 이 사회에서 근대적응보다는 근대극복을 섣불리 강조하는 그의 논리는 결국 전근대성으로의 퇴행이 그 논리적귀결이 아닐까. 고작 중국혁명사나 들여다보고, 조선시대의 사유를 뒤적이며 개벽과 근대극복을 말한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하다.
새로운사상은 새로운 과학적발견에 의해서만 굳건한 토대를 얻게 되는 법. 양자이론과 불교이론의 접목을 통해 개벽사상을 이해하려는 여류 이병철선생님을 비롯한 진보운동 일각의 흐름에 희망을 거는 이유다.
대학시절 벗들과 함께 한 문학세미나는 백교수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거의 교과서로 받들다시피 했고, 그가 번역한 아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비록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 척박한 시절 지적 목마름에 한 줄기 단비와도 같았다. 그 시절 창작과 비평이 한 권 나올 때마다 계절의 흐름을 실감했으니, 백낙청교수는 결코 나와도 무관한 이름이 아니다.
오랜만에 그의 글을 읽고 그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백교수가 고은을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세대가 비록 권력을 잡지 못했다하더라도 좀 더 아름다운 사람들로 남기를 택했다면 우리의 젊음과 우리의 진보운동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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