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일
최근 수정 시각: 2023-01-16 18:23:10
분류 여행가
중국의 외교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대한민국의 종교학자
인문과학 교수
남파 간첩
북한이탈주민
1934년 출생
연일 정씨
중국계 한국인
용정시 출신 인물
베이징대학 출신
카이로 대학교 출신
단국대학교 재직
북한으로 귀화한 인물
인터넷 밈/기타 인물/대한민국
정수일 鄭守一 | Jeong Su-il | |
출생 | |
국적 | |
종교 | |
본관 | |
학력 | 연길고급중학[4] (졸업) 베이징대학 (아랍어과 / 학사) 카이로 대학교 대학원 (아랍어문학 / 석사) |
약력 | |
수감일 | |
출소일 | |
소속 |
1. 개요[편집]
과거 외국인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서 신분을 숨기고 아랍인 '무함마드 깐수(Muhammad Kansu)'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입국, 이슬람 문화에 대한 박식함과 유창한 아랍어로 단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학과 교수직을 맡아 가르쳤으나 1996년 국가안전기획부 조사 도중 북한의 간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이후 당국에 전향서를 내고 간첩죄로 복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술적 성과와 적극적으로 간첩행위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인정되어 2000년 특별사면되었으며, 2004년 복권되었다. 복권된 이후에는 다른 북한이탈주민처럼 본명인 정수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면서 왕성한 연구를 하고 있다.
2. 생애[편집]
2.1. 무함마드 깐수로서[편집]
1946년생 역사학자인 무함마드 깐수는, 필리핀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모국어는 아랍어이며 원래 아버지를 따라 필리핀 국적이었으나 7살 때 레바논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레바논 국적으로 귀화했다.
1984년 말레이시아 말레이대에서 있던 중 「동아시아에로의 이슬람 문화 전파사」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다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에 처음 입국했다. 1984년 4월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9월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해 1989년 9월 <신라와 아랍·이슬람 제국 관계사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한국과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인연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할 수 있도록 단국대 측에서 배려를 많이 해 주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눌러앉게 되었다.
동서 문명 교류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로 1990년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1994년에는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서 문화 교류사에 대한 강의를 계속했다. 80년대부터 KBS 3TV(지금의 EBS) 등의 교양 역사 프로에 고정 자문 위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신문에 사설도 게재하고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대한민국의 문명 교류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1990년부터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시통역대학원(현 통번역대학원)에도 출강하였다. 그러면서도 매우 연구를 열심히 해서 항상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공부하였다. 논문. RISS에 깐수로 검색해 보면 꽤 많이 나온다.
워낙 유명한 연구자이다 보니 그의 글이 1991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의 업적을 능가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는 내용의 수필이다.
아랍어, 필리핀어, 한국어, 영어 외에도 불어, 독일어, 일본어, 한문까지 구사할 정도로 어학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한국어를 처음 배운 게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서였는데 불과 5년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한국어를 잘 했다.
매주 금요일[6]마다 기도를 드리는 등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고[7] 레바논과 한국이 축구 경기를 할 때는 늘 레바논을 응원했으며,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할 때에는 미국에 비판적인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에 따르면 깐수 교수는 "된장국까지 좋아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했다고 한다. 아내와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아랍어 통역을 하다가 만난 인연으로 1988년 11월 결혼했는데, 당시 깐수는 42세, 아내는 26세였다. 무려 16살 연하의 아내는 서울시내 종합병원 간호사로 재직하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1992년 인터뷰에서 귀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그는 『내가 귀화하면 「20세기 처용」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크게 웃었다.
그를 처음 만난 한국인은 그의 완벽한 한국어 구사와 거침없는 매너에 그가 외국인임을 눈치채지 못하기 십상이다. 콧수염을 기르기는 했지만 한국 남성의 평균 신장과 몸무게를 벗어나지 않는 그의 체구와 튀지 않는 피부색, 평범한 의상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한다. 게다가 고향을 충청도쯤으로 짐작게 하는 구수한 말투와 소탈한 웃음은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이다.
1992년 중앙일보
성품도 선량한 사람으로, 사학과 석사생은 "성격이 밝고 쾌활해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외국인 선생님이었다"고 평하였다. 이웃들은 "자상한 '간디' 교수"라고 평하였다.
학부에서도 성적이 후하기로 유명한 교수였기에 수강신청이 몰리는 교수였으며 별명은 '에이쁠 폭격기'였다. 일례로 당시의 단국대학교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학점을 주는 시기였는데[8] 수업 시간에 면학 분위기를 심하게 해치는 학생에게 "자네는 이번 학기 B+야!!!"라고 말한 것은 당시 단국대생들에게 매우 유명한 일화다. 가수 성시경이 마녀사냥에 출연해 이 일화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2.2. 정체[편집]
그러나 사실 그의 정체는 중국 조선족 2세 출신의 북한 간첩 정수일이었다. 기존에 알려진 이름, 나이, 국적, 종교, 출신지, 경력, 모국어, 구사 가능한 외국어, 학력, 기혼 여부 및 자녀 유무까지 모두 거짓이었다.
1934년 11월 12일(현재 88세) 만주국 지린성 허롱(길림성 화룡, 1940년에 연길에 편입된 지역)에서 중국 조선족 2세로 태어나고 자랐다. 중국 조선족 최초의 고급중학인 연길고급중학(현 룡정고급중학)에 입학해서 역시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했다.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주 모로코 중국 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외교관의 일종으로, 한국에서 외무고시(5급 공무원)를 통과하면 2등 서기관이 된다.)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를 눈여겨본 주은래(저우언라이) 총리가 인사담당관을 통해 혼담을 주선하기도 했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던 듯하다.[9]
모로코 국왕과 중국 고위직 사이의 통역을 맡았던 사진도 남아있다. 이렇듯 중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왔고, 그 스스로도 그대로 살아간다면 부와 명예를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963년 6월에 중국 국적에서 북한 국적으로 귀화하였다. 당초 중국 내 소수민족 차별에 실망하여 귀화했다고 알려졌으나, 본인은 2018년 신간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 가출판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각한 뒤에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자 내린 결심이었다고 밝혔다. # 본인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인 부모의 영향으로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직속 상관이었던 중국의 제1부총리 겸 외교부장 천이(1901-1972)와 대판 싸우고도 북한으로의 귀화를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편지로 탄원해서 북한 국적으로 귀화하는데 성공했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도망갔던 조선족들은 대부분 종파 분자로 몰려서 숙청당했는데, 정수일은 저우 총리가 공식 발급한 허가증을 받고 귀화한 덕분에 이후 살벌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저우 총리도 정수일과 같은 엘리트 인재가 떠나는 게 아까워서 직접 여성을 소개해 줄 테니 결혼해서 중국에 남아달라고 권유했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북한으로 가게 된다. 중국 소수민족 출신 일개 5급 공무원 외교관이 자신의 혈통상 모국으로 가겠다고 자진 사표를 냈는데 중국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이 거절해서 격하게 싸우고, 중국의 국무총리가 직접 중매까지 서 주겠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직해서 귀화한 셈이라는 점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비범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중국의 2인자인 저우언라이에게 직빵으로 편지를 넣어 탄원을 할 수 있었고 그 사람이 허락해 주면서도 아쉬워했다는 것에서도 능력도 비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북한으로 귀화한 후 1974년까지 평양 국제관계대학 교수와 평양외국어대 동방학부 아랍어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아랍어과 학과장까지 맡았다. 정수일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회의를 품어 넘어온 북한에서 자신을 일개 어학 교수로 대접하며 매주 1, 2일씩 막노동을 강요하고 매주 25시간, 강의 외의 아랍어 방송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에 힘들어 했으며, 심지어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귀의 미로염(전정신경염)을 앓았다고 한다. 1963년 9월 8일자 로동신문에는 아랍 대표단 방북 시 김일성의 통역을 맡는 사진이 보도되기도 했다.
평양외국어대 아랍어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정수일의 뛰어난 능력에 관심을 가진 조선로동당에 의해서, 1974년 9월부터 4년 5개월에 걸쳐 간첩 교육을 받으면서 남파 간첩으로 변신하게 된다.
1979년 1월 공작금 1만 달러를 가지고 "레바논 국적을 취득해 남한에 잠입해 주요 정세 정보를 수집하라"라는 지령을 받았고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당시 전쟁으로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운 레바논 베이루트로 향했다. 친북 단체인 '레바논 조선친선협회'와 북한 대사관의 도움으로, 1979년 11월 '무함마드 깐수'(유럽으로 이주했던 실존 인물로 당시 33세.)[10]란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레바논 국적으로는 남한에서의 활동이 힘들다는 판단 하에 튀니지에 입국해 튀니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회 경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기회를 모색하였다. 튀니지는 호적 관계법이 잘 정비되어 있어 국적을 취득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말레이 대학 이슬람 아카데미 강사(1982.7)를 거치는 등 호주,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국적 취득 기회를 모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9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 1984년 2월에 필리핀 아버지와 레바논 어머니 사이의 아들인 '무하마드 깐수'로 국적을 세탁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 들어와서 한국어를 배운 것도 당연히 전혀 배울 필요 없는데 위장을 위해서 배우는 척한 것이다.
사실 더 일찍 잡힐 수도 있었다. 1984년 5월에 방을 구할 때 한국의 화폐 단위를 원화가 아닌 구 화폐 "환"으로 착각하여[11] 용산구 한남동의 복덕방 주인에게 의심을 샀고, 은연중에도 북한 사투리가 강하고 연락처가 없다는 점에서 수상함을 느낀 복덕방 주인이 신고를 했으나 대한민국의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 보증을 해줘서 풀려났다. 이 사실은 수사 기록에도 남지 않은 채 오랫동안 잊혀졌고, '깐수'가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본 복덕방 주인은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1984년 6월부터 단파라디오 수신기(1993년까지 개인이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었다.)를 이용해 1996년 7월까지 161차례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신했다.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상부에서는 구체적인 첩보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월간 잡지에 나온 '신상옥 · 최은희의 최근 소재지', '클린턴의 방한', '남조선 학생 운동권의 최근 동향'[12], '최신형 전차 생산 및 첨단 첩보기 도입' 같은 기사들을 편집, 분석하여 중국 베이징시와 선양으로 보냈다.
1987년 2월부터 1995년까지 4차례 밀입북하여 김일성 부자 충성 맹세문과 "조국 통일상"을 수상하고, 단파수신기, 암호표, 독약앰풀, 공작금 19,000달러 등을 받기도 했다. 흔히 생각하는 첩보 방식과 비교하면 원시적인 행위였지만, 그 당시 이 방법은 굉장히 안전했다. 1996년 2월까지는 암호 편지를 이용해 약 75회 정보를 보냈고 안기부에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겉으로는 영어로 쓴 편지지이지만, 뒷면에 특수 잉크로 정보 보고문이 작성되어 있었다. 이 잉크는 작성 뒤 20분 정도 지나면 육안으로 절대 확인할 수 없으며, 특수 약품 처리를 해야 글씨가 나타난다.
그러다 1996년 3월부터 팩스로 전송 수단을 바꾸는 바람에 잡혔다. 1996년 3월 안기부는 도청을 통해 '서울 시내 특급 호텔 비즈니스센터 팩스'를 통해 남한의 군사 정치 정보가 외국으로 전송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팩스의 수신지는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이었다.
그래서 안기부는 시내 각 호텔 근처에 CCTV를 설치해 감시했고, 그 결과 비즈니스센터를 이용해 특정 시간대에 북경으로 팩스를 전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안기부는 몽타주를 만들어 시내 각 호텔에 돌리면서 신고를 부탁했고, 결국 1996년 7월 호텔에서 팩스를 발송하려고 시도하던 중 호텔 직원 김 모 양(26)이 팩스 고장을 가장해 전송을 지연시키면서 간첩신고를 해 체포하게 된 것이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바에 따르면 첩보 내용만 보면 북쪽에서 도움이 될 만한 가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판결문에도 그런 점이 반영되어 구형인 사형에서 12년형으로 선고되었다. 사실 그가 보낸 잡지나 신문 기사 따위는 정보 분석자의 손을 거쳐 유용한 정보로 사용할 수 있으나, 그런 것들은 일본 혹은 제3국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획득은 어렵지 않아서 북한한테는 있으나 마나 한 정보원이었다. 인간 정보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아무래도 대학 교수보다는 군 간부나 고위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훨씬 유용하다. NL운동권에 대한 정보도 전하긴 했지만, 1990년대 중반이 되면 대학가에서도 현실감각이 없다는 평을 들으며 여론 주도 능력을 상실하는 등 기세가 꺾이던 상황이었고 국회에서도 한 명의 당선자도 못 내던 상황이었는데,[13] 이를 그대로 올려보내자 북한 측 정보 담당자에게 "우리가 원한 건 이런 정보가 아니다"라며 외려 쪼인트를 까였다고.
위장이 철저하다 보니 아내조차도 정수일이 검거되기 전까지는 간첩인 줄 전혀 몰랐는데, 잠꼬대도 아랍어로 했다고 한다.[14] 그리고 철저히 정치적 발언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가끔 가다 무슬림들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코스프레까지 하는 등 정말 철저했다. 또한, 교수로 활동할 당시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과 아랍권 국가가 축구 경기를 할 때면 늘 아랍 국가를 응원했다고. 교수 임용을 할 때도 신원 조회 절차가 있었지만 워낙 치밀하게 위장해 놔서 걸리지 않았으며, 앞서 나왔듯 복덕방 주인의 신고로 조사를 받았을 때도 대한민국의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을 보증해 줘서 별다른 의심 없이 풀려났다. 사실 1980년대는 한국에서 이슬람권으로 가서 일하던 노동자는 상당히 많았지만 반대로 이슬람권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외국인 노동자는 별로 없던 시절이었고, 있어도 사실 그들이 무함마드 깐수라는 인물을 의심할 이유가 딱히 없다. 레바논이라는 나라 자체가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고 또한 레바논인 이민자들이 중동은 물론이고 중남미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상당한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데다가, 필리핀도 민다나오 섬에 모로족이라 해서 이슬람을 믿는 민족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리핀 출신의 레바논계라는 배경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레바논이 한창 전쟁 중이었던 나라인 데다다 굴지의 산유국도 아니기에 이미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건설노동자나 출장차 오가던 사우디,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리비아 등의 국가들과 다르게 오가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들 사이에서 레바논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은 내전으로 개판이 된 나라라는 인식이 고작이었고,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시기라 외국인을 실제로 접하는 상황도 드문 시절이었기 때문에 필리핀에서 온 레바논인(아랍인)이라고 하면 굳이 의심을 하기도 어려웠다.
정수일은 남한에서 한 결혼이 초혼이 아니었고 북한에 아내와 세 딸이 있었다. "간첩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이 알고 있었나?"라는 질문에 북한의 조강지처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당시 정수일이 62세로, 아내 박광숙(61, 당시 평양 모란봉극장 안무지도자), 장녀 정미란(33, 김일성종합대학 프랑스과 졸업 후 당시 평양시당 선전국 홍보원), 차녀 정달미(31, 김일성종합대학 문학과 졸업 후 중앙통신사 기자), 삼녀 정소나(30, 평양무역대 졸업 후 당시 무역회사 근무)가 북한에 있었다.
처음에는 무하마드 깐수라고 극구 주장하다가 안기부 수사관이 서류상 고향인 필리핀 민다나오 섬 사투리[15]를 물어보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후 그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한 듯 자백하기 시작했다.
서류상으로는 필리핀 국적이었다가 레바논 국적으로 귀화했으므로 정수일은 국제법상 국외 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수감된 곳도 구치소가 아니라 출입국 관리법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국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밝혔다. 체포되었을 당시에는 약간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외국인으로 행세 중이었는데, 체포된 이후부터는 취조부터 재판까지 아주 멀쩡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간첩 혐의를 수사하던 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재판에서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체포 당시, 방대한 자료와 주석을 붙인 《동방교역사(가제)》[16]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던 상태였는데, 검사는 그를 취조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형이 구형(求刑)된 후 선고 전날, 검사가 압수당한 원고가 저장된 컴퓨터를 가져다 주어, 검사실에서 몇 시간 동안 정리하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전향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북한의 아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해서였다. 남한에서 만난 후처에게도 '나를 잊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뜻밖에도 후처는 매달 2번씩 면회를 오면서 편지를 계속 교환했다. 둘의 부부 관계는 투옥 이후 새롭게 시작된 것과 다름없었으며, 지극한 옥바라지에 흔들렸다고 한다. 결국 1996년 11월 전향서를 제출했다.
초기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물론 재판부도 사연과 그 동안의 연구 성과, 전향 의사, 그리고 조사 결과 '언론 보도 사실만 북측에 전달했기 때문에 국가 기밀 탐지 혐의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2000년 광복절 특사로 4년 만에 출소한 후 2003년에 특별 사면 및 복권을 거쳐 학계로 돌아왔다.
체포된 뒤 단국대에서도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 정수일이 구속되는 바람에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강좌가 폐강되는 등. 제자 대학원생들이 법정에 방청하러 왔는데, 정수일은 그들을 보고 담당 교수로서의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17] 단국대 대학원에서는 그의 박사학위를 취소해 버렸는데, 무함마드 깐수라는 위장 신분으로서 받은 학위였고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 불가피한 처사였다 해도 학문을 평생의 업으로 하여 살아온 뼛속까지 학자인 정수일에겐 가슴 아픈 일이었음을 본인은 후일 회고했다. 이 때 취소된 박사학위는 복권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네이버에서 정수일을 검색하면 '베이징대학교 동방학부 학사'까지만 학력이 표기되어 있다.
2.3. 언어[편집]
2.4. 근황 및 연구 활동[편집]
석방 후인 2008년에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해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간첩이었던 과거 때문에 이전만큼 방송에 많이 나오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다큐멘터리에는 꽤 나오는 편이다.
뉴스위크에서는 그를 가리켜 "분단 시대의 불우한 천재 학자,"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황석영도 극찬했다.
# 수감 중 편지도 명문에 옥중에서 한 학문적 연구까지 담겨있다. 반북 성향이 강한 조선일보마저도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였다. 게다가 수감 중 남한의 아내도 그를 버리지 않았고, 계속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정수일' 본래 이름으로 돌아와 아랍 연구와 실크로드나 유라시아 관련 연구 책을 쓰며 활동 중이다. 아직도 일부 사람은 그가 간첩이라고 하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위에 언급한 대로 그가 진짜 간첩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북한으로 전달한 문건도 아랍의 역사 및 연구 관련 정보를 많이 보냈기에 북한에서도 "이딴 걸 뭐 하러 보내느냐?"고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22]
북한의 아랍 분야 인문학 연구가 남한보다 뒤쳐져 북한 학계가 연구에 참고하길 바라면서 보냈다고 했고, 실제로 북한에서도 아랍 교류에 나름 관심을 가져 시리아, 리비아, 이집트 등과 교류하고 아랍어 학생들을 정책적으로 육성하긴 하지만 북한이 정수일에게 원한 정보는 그런 종류의 정보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나 외교 전문가가 아닌 사학자였으니 군사 정보 취득을 목적으로 한 간첩으로 부적합했다. 사람을 잘못 골랐던 것이다. 북한이 그를 남파한 뒤 그로부터 얻은 정보와 남파된 그가 전향을 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학계에서 공유 · 발전시킨 정보를 비교해 본다면 북한이 압도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냥 북한이 아랍 분야의 천재 학자 한 명을 공짜로 남한에 퍼준 셈이다.[23]
더 나아가서 정수일 교수가 한국과 중동 국가(특히 이란)의 관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이 북한 정보를 얻는 중요 라인 중 하나가 이란이다. 특히 북한 무기를 직접 사 주는 몇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정수일이 직접 북한에 준 남한 정보보다[24] 간접적으로 남한에 준 북한 정보가 훨씬 더 양도 많고 가치는 비교가 안 된다.
정수일은 아랍어에 능통한 데다 그쪽 지리 및 여러 지식도 매우 많아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아랍 및 이슬람 관련 전문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이슬람 분야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석방 이후의 저술을 보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측면[25]이 종종 드러나기는 하나, 역사학자로는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정수일은 세계적으로도 권위 있는 이슬람권 역사학자로 극진하게 대접을 받고 있다. 만일 정수일이 계속 북한에 남아서 북한의 중동외교 자문역할을 시켰더라면 북한-중동, 그리고 북한-이란 관계가 훨씬 견고했을지도 모른다.
- 쿠란의 표기(코란, 쿠란, 꾸란)에 대해서도 한 방에 논쟁을 종결시킨 것이 이 사람이다. 이것이 얼마나 이 사람이 대한민국의 아랍 학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인데, 자세한 내용은 쿠란 문서를 참고할 것. 대한민국의 아랍 학계에서는 이 쿠란 표기법 때문에 매우 심한 논쟁이 일어났다. 쿠란이 필수 아랍어 단어이기는 한데,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들이 가장 중요한 발음들 - q, r, ء 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때문에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가 크게 곤욕을 치렀다. 체포 당시 단국대학교 초빙교수였기 때문. 연세대는 어학당에 다녔던 정도지만 현직에서 교펀을 잡고 학문 활동을 했던 곳인 만큼 단국대학교 측이 훨씬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교내 역사학 교수들 중에서 정수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교수가 종종 있다.
정수일 교수는 동아시아사, 특히 이슬람 관련 역사를 다루는 학문 분야에서는 반드시 전문가로 꼭 언급된다. 실제로, 단국대 사학과[26] 교수들은 당시 한남동 서울캠퍼스와 천안캠퍼스를 오가면서 강의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특히, 정수일 교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꽤 나이가 많으신 사람들이다. 만약에 1984년 이후부터 단국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거나 석/박사 과정을 밟은 사람이 아직도 학교에 있다면 100%다.
2011년에는 중국으로 가서 조카 쪽 가족들과 50년 만에 재회하기도 했으며 모교 방문 등의 활동을 했다. 모교 측에서는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북경대에 진학한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27]이라는 사실을 알고 바로 정수일과 다른 학생의 사진을 확대해서 학교의 역사 자료관에 걸어뒀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과 재회해서도 정수일의 조카들과 조카 손자들이 중국어만 하고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자 굉장히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
여담으로 정수일 교수의 이슬람 관련 한국어 번역은 중국 내의 중국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인 회족들이 이슬람 종교 용어 관련하여 사용하는 한자어 어휘들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비교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쿠란을 한국어로 완역한 최영길 교수의 경우 한국어 필력이 별로 좋지가 못해서 한국어 번역 성경에 나오는 어휘들을 어정쩡하게 사용하는 것을 비판받는 것에 비해, 정수일 교수가 사용하는 아랍어 번역 문구는 깔끔하고 명료한 것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한국에서 잘 쓰지 않는 중국 회족들이 쓰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정수일 교수의 아랍어 번역문이 더 읽기 어려워야 정상인데, 오히려 최영길 교수의 번역문이("읽어보시요". "파라오족을 익사케 했나니" 등등) 읽기 어색하고 더 어렵다.
2013년에는 2013 경주-이스탄불 세계문화엑스포와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고령의 나이에도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현재에는 자서전 편찬에 주력하고 있으며, 건강상 외부 활동은 삼가고 있다.
3. 저서와 역서[편집]
연도 | 서명 | 출판사 | 비고 |
1994년 | |||
1995년 | 기초 아랍어 | ||
세계속의 동과 서 | |||
2001년 | 고대문명교류사 | 옥중 저작. | |
씰크로드학 | 옥중 저작. | ||
이븐 바투타 여행기1, 2 | |||
2002년 |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 ||
이슬람 문명 | |||
문명 교류사 연구 | |||
중국으로 가는 길 | [역서] | ||
2004년 |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 옥중 에세이. | |
[역서] | |||
2005년 | 한국 속의 세계 상·하 | ||
2006년 | 실크로드 문명기행 | ||
2008년 | 시대와 소통 | 공저. | |
2009년 | 문명담론과 문명교류[28] | ||
2010년 |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 창비사 | |
2013년 | 실크로드 사전 | [역서] | |
2014년 | 실크로드 도록 : 해로편 | 창비사 | |
해상 실크로드 사전 | 창비사 | ||
2016년 | 문명의 요람 라틴아메리카를 가다 | 창비사 | |
2018년 |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 창비사 | |
2019년 | 실크로드 도록 : 초원로편 | 창비사 | |
2020년 | 우리 안의 실크로드 | 창비사 | |
민족론과 통일담론 | 통일뉴스 | ||
2021년 | 문명의 모자이크 유럽을 가다 | 창비사 | |
2022년 |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 아르테 | 회고록 |
정수일
정수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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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출생 | 1934년 11월 12일(88세) 만주국 간도 용정 명천촌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역사학자, 이슬람학자, 남파간첩 |
학력 | 중화인민공화국 북경대학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연구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
장르 | 저술 |
배우자 | 북한의 전처, 남한에서 결혼한 후처 |
정수일(鄭守一, 1934년 11월 12일 ~ )은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의 학자이자 대한민국에 파견된 간첩이다. 간첩임이 발각된 후 복역했다가 출소하였으며, 대한민국의 문명교류학을 최초로 개척한 역사학자, 이슬람학자이기도 하다. 원래는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이었다. 12개의 언어를 구사한 다중언어화자(폴리글롯)이다.
이력[편집]
만주국 간도의 용정 명천촌에서 태어난 조선족 출신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북경대학에 1952년 학번으로 입학했으며 1955년 12월에 졸업한 후 중공 국비학생으로 파견되어 이집트의 카이로대학에서 연구생으로 유학하였다. 중국 외교부 및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 등에서 활동하다가, 1963년에는 조선족 아내와 함께 북한으로 들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후 평양국제관계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평양외국어대학 교수직으로 재임하고 1974년부터 대남 특수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교육을 받았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타갈로그어, 말레이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의 12여개 언어를 구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출국하여 튀니지대학의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 등을 거치면서 10년에 걸쳐 해외에서 활동하였고, 마지막은 필리핀에 거주하는 레바논 출신의 무하마드 깐수라는 아랍인 신분으로 대한민국에 1980년대 기발한 방법으로 신분을 속인 채로 입국해 활동하였다.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고, 1990년 〈신라와 아랍·이슬람제국 관계사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후 단국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강의하였고, 많은 저술 활동 및 대외 활동을 하여 저명 인사가 되었다.
그러다 1996년 7월 3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었으며, 1996년 7월 21일, 법정에서의 자백으로 본명과 신원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단국대학교에서는 그의 교수직 및 박사학위를 박탈했다. 이후 12년형을 선고 받고 약 5년간 복역하다가 2000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출소하였다. 2003년 4월 30일 특별사면 및 복권되었고, 5월 14일에는 국적회복을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2004년에는 불교인권상을 받았다.
2008년 11월,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창립하였다.[1]
옥중서신[편집]
다음은 1996년 10월 21일에 보낸 옥중편지 중 일부이다.
“이방어의 여신에 사로잡혀” - 오늘은 당신이나 주위에서 못내 궁금해하는 한 가지, 내가 어떻게 해서 여러 외국어를 습득하게 되었는지 더듬어 보겠오. 법정에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게 무슨 자랑거리는 아니오. 남들이 궁금해 하고 내 인생역정의 한 단면을 짐작해 볼 수있을 것이오. 내가 용정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처음으로 접한 글자는 중국 한어가 아니고 일본어였소. 소학교 때 일어를 배우고 해방후에도 줄곧 일본서적을 읽었고 지금도 일어책을 놓지 못하오. 다음으로 고등학교에서 중국어, 러시아어를 배웠소. 중국외교부에 근무하면서 중국말을 할만큼 했소. 러시아어는 대학 때 교재로 채택되어 자연스럽게 익혔고 북녘땅에 들아가서 교수를 하다보니 학계에 러시아어가 보편화되어있어 러시아 원전을 수없이 독파해야 했소. 영어는 대학에서 익혔지만 이집트 유학중 공용어로 쓰였기에 더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소.
아랍어는 전공이었고 10년을 아랍어권에서 살았으니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몸에 익었소. 남한에 와서도 단국대, 외대, 명지대에서 아랍어를 강의했소. 독일어와의 인연은 좀 의외지만 카이로대학 유학시절 아랍어 고전을 연구하다 보니 필요해, 여럿의 도움으로 어느정도 익혔소. 프랑스어는 구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 등에서 근무하면서 업무상 습득하지 않을 수 없었소. 프랑스어는 매력있는 언어로 왜 자기 언어를 사랑해야하는 지 알게 했소. 스페인어와도 접촉할 기회가 있었소. 모로코에서 있을 때 스페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 호기심에 익혀나갔소.
향학열에 불타던 시절, 아랍어와 많이 뒤섞인 페르시아어에도 도전했오. 이란 동무들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웬만한 대화는 가능해졌오. 지금 문명교류학에 천착하고 보니 이도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소. 또, 말레이 대학의 교수로 지내면서 말레이어를 해야했고, 필리핀 국적을 따야했기에 필리핀어에도 몰입했었소. 이렇게 보면 동, 서 12개어와 씨름해본 셈이오. 자율적일 때도 있었고 타율적일 때도 있었으나 현재 문명교류학을 개척하는 마당에 인도 고대어를 비롯한 두 세개를 더 배워야 할 것이오. 아무튼 60평생 녹록찮은 외국어의 여신에 사로잡혀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소. 어찌보면 비운이기도 하고 행운이기도 하겠지. 이 모든 것은 나의 꿈과 더불어 시작된 기구한 인생역정과 관련된 일일 것이오. 동분서주하며 부대기는 세파속에서 그 딱딱한고 무미건조한 이방어를 낚느라고 시간과 정력을 많이도 소진했소. 그러나 예정된 일이었고 운명으로 여기고 신명을 다했기에 추호도 후회는 없소. 오히려 이제라도 그결실을 하나씩 맺고 있으니 큰 보람을 느끼오. 사실 외국어는 아는만큼 세계로의 지평이 한없이 넓어지는 것이니 큰 자산이오. 이상, 내 경험이 후학들에게 무슨 보탬이 될는지 모르겠으되 한 사람이 뜻을 두고 부딪혀 보고 도전했다는 것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오.[2]
“스승과 제자가 한 포승줄에 묶여” 1997년 1월 20일 - 나는 분단 비극의 체험자로서, 산증인으로서, 그 희생자로서 이나라 이겨레의 운명과 전도에 관해 많은 고민을 했으며 때론 뼈에 사무치도록 몸부림쳤소. 남한에 와서는 허리잘린 강토의 비운을 더욱 절감하고 어떻게 하면 통일을 이룰 것인가 골몰했소. 세상에 수많은 나라가 있지만 우리민족처럼 오랫동안 하나로 살아온 나라가 별로 없소. 이것은 우리의 크나큰 자랑이고 저력이오. 그래서 하루빨리 두동강 난 이강토를 하나로 잇고 막혔던 피와 얼이 소통하도록 해야 할 것이오. 누가 뭐래도 이땅은 우리가 나서 자라고 묻힐 보금자리고 묏자리오.
이시대에 우리들이 불신과 반목으로 얼룩지게 했으니 뼈를 깎는 자성으로 어서빨리 화해와 통일로 가야할 것이오. 이것이 지성인의 자세고 양심이라 믿소. 민족은 주, 객관적 요소를 두루 갖춰야 하지만 주관적요소, 민족의식이 없으면 참 민족이라 할 수 없소. 민족 성원이 상호일체감과 연대의식을 발휘해서 민족을 위하는 마음, 즉 하나되어 함께한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오. 민족은 우리에게 엄연한 실체요.민족사랑과 공동체의식은 보편적 가치로서 시대가 변해도 달라질 수 없소. 버려야할 것은 민족배타주의, 허무주의일뿐이오. 세상이 아무리 초민족이니 세계주의니 떠들어도 아직은 허구고 가상에 불과하오. 나는 격리된 옥중에서 분단의 아픔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고 있소.
며칠전 한 학생과 한 포승에 묶여 법정에 출두한 적이 있었소. 그는 내가 재직했던 단국대 재학생이었소. 내 수업을 들은 바가 있어 나를 한눈에 알아봤소. 그와 일렬로 묶여 갈때 그가 머리숙여 인사를 했소. 나는 접근이 제한되어 있어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다시 볼 기회가 생겼을 때, 그는 수갑을 찬채로 나의 입에다 알사탕 하나를 기어이 넣어 주는 것이었소. 구치소에서 당과류를 파는데 법정에서 긴장을 달래려고 가지고 온 모양이었소. 그 순간 나는 목이 메었소.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있지만 감옥에서는 사탕 하나가 귀하고 누구나 마음대로 줄수도 없는 것이오. 나는 구속된 학생들을 만날때마다 말하곤 했소. “남북의 우리 기성세대가 제구실을 못해서 젊은 자네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고있네”라고. 그는 잠시 보고 돌아서면서도 “교수님 건강하십시오”라면서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주었소. 이때의 심정이 어떠한지는 설명을 할 수가 없소. 스승과 제자가 한포승에 묶이는 이 희한하고 비정한 분단 현실! 사도나 사표가 깡그리 증발된 이 답답한 현실! 분명 이건 우리민족의 비극이요 아픔이오. 분단이 없었던들, 우리의 사랑스런 젊은이들이 감옥에 올 일없이 활기차게 미래의 역군으로 구김살없이 살아갈 것 아니오. 또, 법정에서 내가 가르쳤던 대학원생들이 방청석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소. 나는 일부러 그들의 눈을 피하고 싶었소. 내가 구속되는 통에 학부나 대학원에 개설된 강좌가 폐강되었소. 갓 출범한 문명교류사호는 조타수를 잃고 바로 난파되고 말았소. 함께 승선한 학생들은 표류할 수밖에 없게 되었소. 난 그들을 보는 순간 담당교수로서의 죄책감에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소. 한스런 분단의 비참과 불행은 나같은 기성세대가 업보로 감수하는 것으로 족하고, 더이상 우리의 후대들에게 전가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절절하오. 바로 이 소망때문에 나는 젊은 시절에 내앞에 펼쳐진 양양한 전도와 영화를 주저없이 버리고 나름대로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것이오. 세계사에서 높은 자존과 존엄을 지켜온 민족치고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허리잘린 채로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이 나라, 이 땅밖에 없소.
'이땅의 분단이 지속되는 한, 그 누구도 그 어떤 나라도 우리민족을 우러러 보지 않을 것이오. 우리 역시 그 누구에게도 우리 자신을 자랑할 자격과 면목이 없는 것이오.'[3]
평가[편집]
김정남 전 청와대 수석은 정수일을 정약용과 비교하여, "다산이 겪은 고난은 우리를 연민에 빠지게 한다. 다산의 18년 유배 생활이 없었다면 과연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5백여 편의 저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참으로 오묘한 섭리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힘이랄까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에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이 당시에 겪어야 했던 고난의 기록들은 우리를 안타깝고 또 슬프게 한다."라는 말과 "인생의 기구한 것이 그러하고, 나라와 겨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그러하며, 고난 속에서도 불태우고 있는 학문적 열정이 또한 그러하다"라는 말로써 두 인물의 공통점을 제시하며 그의 학문에 대한 집념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저서[편집]
- 《신라 서역 교류사》, 1994
- 《기초 아랍어》, 1995
- 《세계속의 동과 서》, 1995
- 《고대문명교류사》, 2001
- 《씰크로드학》, 2001
-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2002
- 《이슬람 문명》, 2002
- 《문명 교류사 연구》, 2002
-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2004
- 《한국 속의 세계 상·하》, 2005
- 《실크로드 문명기행》, 2006
- 《시대와 소통》, 2008, (공저)
- 《문명담론과 문명교류 (한국문명교류연구소 학술총서 1)》, 2009
-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010, (창비사)
-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2018
- <우리 안의 실크로드>, 2020
역서[편집]
- 《이븐 바투타 여행기 1, 2》, 2001
- 《중국으로 가는 길》, 2002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2004
- 《오도릭의 동방기행》, 2012
기타[편집]
시인 고은은 《만인보(萬人譜)》에서 ‘북으로 돌아갈 수 있어도/가지 않고’ 그냥 ‘대한민국 국민의 하나로/굽은 소나무같이 살아가’는 ‘깐수’ 정수일이라고 표현하였다.
-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http://www.kice.ac/, 2013년 기준으로 연구소장으로 재직 중)
각주[편집]
- ↑ 간첩 깐수에서 실크로드 박사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진식기자 손동욱기자, 영남일보(2013-12-14) 기사 참조
- ↑ 정수일, 위의 책 40, 45쪽
- ↑ 정수일, 위의 책 76, 81쪽
참고 문헌[편집]
- 《신라 서역교류사》, 정수일(학자) 저, 단국대학교출판부(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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