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가 사랑한 남자... 그 '우상화'의 함정[나가사키 평화기행①]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과 여기당
13.04.22
전은옥(malg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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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2009년 3월부터 2011년 2월까지 나가사키에 체류하며, 전쟁과 원자폭탄, 핵 피해자 문제 그리고 일본의 평화운동 등에 관하여 연구했다. 일본의 침략과 가해의 역사를 전시하며 지역의 평화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의 객원연구원을 지낸 기자는 2년 가까운 나가사키에서의 현장 답사 및 자료연구에 더하여, 지난 4월 1~5일, 추가로 나가사키 현장취재를 다녀왔다. 이를 바탕으로 '나가사키 평화기행'을 주제로 한 기사를 약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자 말>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에서였다. 원폭자료관 전시 코너 한 곳에 한 남성을 기념하는 코너가 있었다. 자신도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큰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부상자와 원폭증 환자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구호와 치료활동에 임하고 원폭증 연구보고서도 낼 만큼 필사적으로 노력한 위인으로 기려지고 있었다.
내가 그를 두 번째 만난 것은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에서였다. 거리상으로 원폭자료관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이곳의 관장은 나가이 박사의 손자가 맡고 있는데, 마침 그날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미안하게도 팸플릿까지 선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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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폭탄 투하와 패전 후의 나가이 박사. 백혈병과 싸우며 그는 병상에서 인류 평화를 기원하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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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물과 팜플렛, 그리고 박사의 저작물도 하나하나 꼼꼼히 뜯어보다가 순간 멈칫했다. 나가이 박사는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부터 이미 의사로서 뢴트겐 방사선을 너무 많이 쬐어서 백혈병에 걸렸다. 나가이 박사가 원폭 피폭 직후에도 원폭증과 그 치료 방법의 연구, 또 전쟁과 원폭의 비극 위에서 인류 평화를 기원하는 수많은 저작을 집필하며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가 그를 찾아왔다.
바로 전쟁을 일으키고, 어린아이부터 어른, 외국인까지 강제로 전쟁에 동원하여 무고한 희생을 낳은 그가 나가이 박사의 건강을 빈다고 말한 일에 대해 나가이 박사는 굳이 책 속에까지 담아서 이렇게 썼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가"라고. 이 대목이 목구멍에 돌멩이처럼 콕 박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가이 박사의 책을 구입해놓고도 책장을 펼쳐들고 읽는 데까지는 수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나가이 박사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문장을 읽어보자고 생각하는 자체가 가볍지 않았다. 최근에야 나가이 박사의 책 <나가사키의 종> <로사리오의 구슬>등을 읽었다. 또 얼마 전 다시 한 번 나가이 박사가 살았던 집터 '여기당(如己堂)'과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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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만년에 기거했던 집. 그는 이 집을 '여기당(如己堂)'이라고 이름 붙였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을 담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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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당'은 병상에 눕게 된 박사를 위해 1948년 봄, 우라카미의 이웃들이 지어준 2첩 단칸방의 나무집으로, 전쟁과 원폭 투하 후 폐허가 되어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게 살던 그 당시 십시일반 온 정성 다해 집을 지어준 이웃들의 마음에 감사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남긴 성서 속 한 말씀에서 따와 붙인 이름이라 한다.
나가이 박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우라카미는 그리스도교 박해와 수난의 긴 역사 속에서 신앙을 지켜온 유서깊은 마을이다. 동시에 우라카미는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로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동행해주신 한 일본인 선생님이 나가이 박사가 생전에 남긴 저술 등에서 뽑아낸 명구절들을 전시해놓은 코너 앞에서 돌연 내게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질문을 던지셨다. 우리가 멈춰선 그 앞에는 나가이 박사가 남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었다.
"아름다웠던 나가사키를 이런 잿빛 언덕으로 바꾼 것은 누구인가? (줄임) 우리들이다. 어리석은 전쟁을 일으킨 것은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그 활기 넘치던 동네를 거대한 화장터로 만들고, 묘지로 바꾼 것은 누군가? 우리들이다. 열심히 군함을 만들고 어뢰를 만들었던 우리 시민들이다." - <꽃피는 언덕>에서
"글쎄요. 좋은 말을 많이 했군요"라며 적당히 대답하려는 나에게 선생님이 자신의 의견을 말씀하셨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에요. 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따로 있죠. 그리고 시민들은 열심히 '군함을 만들고 어뢰를 만들도록 강요를 당한 것'이지, 즐거워서 열심히 그것을 만든 것이 아니에요. 이건 바로 전쟁과 원폭의 책임을 '일반 시민'과 '우리 모두'라는 대상에게 돌려서 가해자,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하지 않고 얼버무리고자 했던 당시 전쟁 책임자들이 원했던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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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 내 전시물에 소개된 '히로히토 천황'의 나가이 다카시 박사 방문 사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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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나가이 박사가 책임자를 정확히 언급한 적 없이, '우리들 시민들 모두'에게 책임을 돌린 데 대하여 위화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가이 박사가 원폭으로 아내를 잃고 또 백혈병 환자로서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점이나 남겨진 아이들을 돌보며 병상에서도 최후까지 필사적으로 저술을 했던 것은 분명 인간으로서 안타깝고 애절한 사연이며, 의료와 구호활동 등에 있어 그의 삶의 업적은 분명히 평가할 만한 부분이지만, 그 업적과 함께 한계점도 분명히 봐야 한다는 게 선생님의 의견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선생님도 나가사키 원폭의 피해자였다.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전쟁의 책임은 일본 천황과 당시 전쟁을 일으키고 주동하고 적극 협력한 권력집단에 있죠. 이 경우 분명한 책임자와 가해자를 지목하고 처벌하는 것이 전후 청산이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도 역시 당시의 아시아 침략전쟁과 가해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책임자를 정확히 규명하는 것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적 성찰과 반성은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그 뒤 선생님에게 다시 한 번 이메일로 짧은 서신을 보냈지만,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대립하거나 상충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선생님도 내 생각을 인정해주시시라 확신한다.
전쟁의 최고 책임자는 천황이다. 그리고 전쟁을 주동했던 전범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민중을 전쟁에 동원하고 억압하고, 타민족을 학살하고 강제동원하고 억압했던 책임자와 가해자는 엄연히 존재한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전쟁과 원폭을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돌려버리면, 진정한 책임주체를 은폐하고 역사를 더욱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것을 분명히 하면서, 각자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반성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나가이 박사는 어느 쪽이었을까.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돌려버린 쪽일까. 아니면 전쟁과 원폭의 책임이 일본천황과 군부, 권력층과 미국 등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전쟁 체제의 일부였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무래도 후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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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의 전시코너 일부. 나가이 박사는 의학자였지만 문장을 쓰는 작가로서의 능력 외에도 서예, 그림 솜씨에도 탁월해 많은 글씨와 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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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이 박사가 남긴 수많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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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나가사키 의과대학 조교수로 일하던 중, 원자폭탄을 만났다. 이 재난 속에서 부인을 잃었고, 어린 두 아이를 홀로 키우게 되었다. 자신도 중상을 입었고 백혈병에도 걸린 몸이었지만,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원자폭탄 재앙 속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하여 구호활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원폭 피해의 특수한 증상과 그 치료법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는 또한 부인과 결혼하기 직전 가톨릭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는데, 전후 가톨릭 신자로서도 주옥같은 글을 남겨 나가사키에게 성인처럼 숭앙받고 있었다.
그를 만나러, 헬렌 켈러와 일본 천황, 로마 교황의 특사까지 방문했다. 1951년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는 의학의 발전에 공헌하기 위하여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는 데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가 얼마나 나가사키시와 우라카미의 가톨릭 신도들의 사랑을 받았는가 하면, 그의 장례식이 나가사키 명예시민장으로 치러지고, 2만 명의 추모객이 참여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나가사키의 모든 교회와 사찰에서 종을 울려 조의를 표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지금 그는 인근의 사카모토 국제묘지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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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이 박사가 숨을 거둔 1951년 5월.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우라카미교회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2만 여명의 추모객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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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히 인류애가 넘치고, 책임감과 의학자로서의 사명감이 투철한 의사이자 연구자였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부터 전쟁의 어리석음을 말하며 세계 평화를 염원하고 기도했던 한 사람의 가톨릭 신자였고, 주옥같은 문장을 그 짧은 세월 동안 엄청난 정신력으로 저술해낸 작가였다. 다만, 그것은 전쟁이 끝난 뒤의 일이다.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특히 아무래도 나는 천황의 병문안에 황송해하며 감사해했던 것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분명히 일본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천황의 방문을 받았다면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일반적 대다수 일본 시민이 천황을 대하는 자세는 그러하지 않을까. 나가이 박사도 그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황이야말로 바로 이 전쟁과 원자폭탄 피해를 불러일으킨 침략전쟁의 책임자요 전범이라고 생각할 때는 도저히 그의 방문도 반가울 수가 없고, 그가 이제 와서 몸은 괜찮으냐 회복을 빈다고 말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더욱 가증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피폭자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마땅하거늘.
그러나 현실에서는 달랐다. 지금도 일본 뉴스에서는 천황의 어린 손녀조차 '~사마(님)'로 불리고, 각종 전시관의 안내판이나 팜플렛이나 공식문서에서도 천황 뒤에는 '폐하'라는 말이 붙는다. 패전 후에 천황은 실질적 권력은 잃었지만 지금도 '상징적'인 천황제의 국가이니, 천황은 '폐하'로 불리고 신성하고 황송하고 고마운 존재인 것일까. 그것도 문화와 전통의 차이로서 인정해야 하는 부득불한 일인 것일까. 지금의 천황은 그렇다치고, 70년 전 일본의 최고 군수통치권자이고 국가대원수였던 그 천황이 바로 전범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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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 전시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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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의 나가이 다사키 박사 기념 전시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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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박사 개인을 매도하고 비판할 뜻은 없다. 아프고 힘들었을 삶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도 느낀다. 중요한 것은 나가이 박사가 그러했고, 나가이 박사를 사랑하고 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한 그 천황의 전쟁책임 문제를 비롯하여, 전쟁과 원폭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을 각자가 스스로에게 던지고 사회적으로 묻고 답하는 과정 속에서 적당히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거나, '모두가 피해자'라거나,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가이 박사의 종적을 따라 나가사키를 여행하는 이들에게도, 원폭의 잔혹함과 비참함, 나가이 박사의 헌신적인 구호활동과 그 애절한 삶과 더불어, 누가 전쟁을 일으켰고, 누가 원자폭탄을 투하했으며, 그로 인한 희생과 그 책임은 누가 졌는지, 가해자는 그후 어디서 무얼했고, 피해자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깊은 추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자폭탄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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