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9

남양 섬에서 살다 | 조성윤 | 알라딘 2017

남양 섬에서 살다 | 조성윤 | 알라딘
남양 섬에서 살다 - 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
조성윤 (지은이)당산서원2017-11-07






책소개

1세대로 남양군도 여러 섬에서 생활한 전경운의 회고록. 그의 회고록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남양군도 시절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1945년 수용소 캠프 시절부터 1951년 티니언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적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티니언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이야기였다. 세 시기가 모두 특징이 있고, 각각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던 이야기들이 넘친다.

전경운이 회고록을 적어가는 태도를 보면, 자신이 맡아서 했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들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일들에서 부딪친 문제, 또는 자신이 나서서 해결한 일들을 아주 상세하게 적어갔다. 특히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가 문제를 해결했던 일들은 마치 소설을 쓰듯이 실감나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어떤 국면에 처하든지 부딪치는 일을 적극 해결해 나갔다. 매우 열정적인 자세를 보이지만, 때로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가족을 돌보는 일은 물론 자신의 건강마저 해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특히 농업과 관련한 부분을 보면 그가 어떤 시도를 했고, 어떤 부분에서 실패하고, 또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했는지를 잘 읽을 수 있다.


목차


남양군도 연구에서의 회고록의 가치
회고록 서문(1981년)
회고록 서문(1995년)
어린 시절 회고
만주로 가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는 단기대학으로 가다
동경고등척식학교
만주의 꿈은 수포가 되고 귀향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남양무역에 입사
사이판 지점으로 전근사령(轉勤辭令)을 받고
사이판섬에 상륙하여 상하(常夏)의 나라를 구경하다
파간섬으로 첫 부임사령(赴任辭令)을 받음
파간도(島) 상륙과 남양무역사무소
도민 인부들과의 충돌
파간섬에서 6개월 동안
자살한 오키나와 사람을 목격
일본인 하라(原))라는 자의 가면(假面)
사리간섬에서 3년을
사사모토는 관리인일 뿐 나는 남양무역회사 사원 견습인
사리간의 실태
양돈과 면화 재배의 실태
들쥐(野鼠) 퇴치(退治)
사사모토(笹本) 가족의 반목을 해소
인부들에게 오락을, 자녀들에게 간이초급 교육을
3년에 한 번인 귀성(歸省)이 연기되어 한 달 동안 사이판 지점에서 휴가, 돈 10 일여에 바닥
섬사람은 섬에서 먹고 살아갈 수가 있다.
아라마간섬으로 영전(榮轉)
신임(新任)된 후 새 출발을 구상
전쟁 시국 하에서 벗어난 이도(離島)는 평화의 나날이다
年中行事로 오락과 위안을
낚시와 쏠창 대회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종자 돼지 새끼 도살 사건
정사(情事) 혐의(嫌疑) 소동
손손 부락에서 일어난 감독 가족과 다른 가족의 항쟁
마리아나군도(群島)는 적군 점령이 되려는 날만 가까워
육군 조사대 아라마간섬 상륙
시라미 함대(艦隊) 유인(誘引)으로 대환영하는 밤
드디어 예상했던 징용령이 내렸다
파간 섬에서 14개월 동안 생애 처음의 전쟁 경험
파간섬 미 기동대(機動隊)의 공습 하에서 생사의 투쟁(斗爭)으로
매일(每日)이 비행장 폭탄 맞아 뚫린 구멍 메우기 작전
야간작업(夜間作業)
돼지 잡이 일대 사건
비행장 수리작업을 포기하고 해군 진지 구축으로
1944년 9월이 아닌가. 설부대 소량배급도 종말(終末)
파간섬 남단(南端)으로 이동작전
만사는 오케이. 야마다와 나, 카누 선장 오하라, 일체감
바리야르 격절지(隔絶地)에서의 희비극
육군 내부의 갈등과 카누 1대 변상의 말다툼
현재의 처와의 애정, 드디어 결혼
아라마간섬 인부들을 위해 운명을 같이 해
만사(萬事)는 실패로 나는 송송으로 출두, 군법 재판을
일개인으로 전락(轉落) 생활에서 가지가지
일본 육군과 해군의 차이점과 기질
해방(解放)이 온다, 복잡했던 심경
파간 일본군 백기 게양(揭揚), 선상에서 항복서명
LST 미선(米船)으로 도민(島民)들 사이판으로 인양(引場)
사이판섬 상륙의 초보(初步)까지
백여 일 동안 민간 포로(捕虜)로서 사이판 한인캠프(Saipan Korean Camp)에서 지내던 기억.
캠프 자치 행정 조직
사법주임(司法主任)이란 감투를 쓰고
사법주임 행세(行勢) 중 기억이 나는 몇 가지
Camp 속의 인물들
우리 한민족은 해외에 살아도 단합(團合)이 힘들어
우리 캠프에서 보고 들은 소감(所感) 몇 가지
본국으로 인양(引揚)하는 교포들과 작별 후 이도(移島)
마쓰모토 라는 성으로 된 삽화
일제시대하 보고 들은 소견
회고록 소감
접기


책속에서


본문: 전경운의 회고글

- 저는 일본말로 쓰는 게 쉽지만 그럴 수도 없어 한글로 써 보았습니다. 이 글은 일본말, 한자가 많이 들어있고 더구나 일제강점기의 섬 이름이나, 일본인을 대상 했던 만큼 일본말로도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위해서는 약도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읽기에 매우 힘들 것입니다.
원래 저는 문필가는 아닙니다. 또 고향을 떠난 이후 우리말을 쓸 수도 없었고 듣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잊어 버렸습니다.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휘도 매우 변한데다 한국 표준말도 아니고 평안도 정주 방언이 섞여 있습니다. 그뿐인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회고록이니 만큼 문법에서도 많이 틀리고, 오자 탈자도 많아서 읽기에도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양해하고 천천히 읽어가며 전후가 맞지 않는 점을 미루어가며 이해하십시오.


-저를 소개한다면 1915년에 출생하여 당시 을묘생이라 하였습니다. 학력은 오산고보 24기(고교)를 졸업, 1935년 일본 동경으로 가서 2년간, 단기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만주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아서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중국어와 기초 지식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일제는 우리말을 말살하는 정책을 폈지만, 오산학교만이 비밀로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쳐 준 것이 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양에 나와 있어서 60여 년을 우리말을 별로 써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조건 하에서 우연히 기회가 찾아와, 1975년, 36년만에 처음으로 서울에 갔습니다. 남하한 우리 가족들과 친지는 물론 모교 오산학교의동기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재회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과 대화에서는 알아듣기는 했으나 말문이 막혀 진땀을 흘린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후 부터는 한글 책자와 신문 등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겨우 말문이 열린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의 이야기를 써 보려 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을 빕니다.

-내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육성동이다. 생년월일은 1915년 10월 15일 을유생이다. 그때는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합병되어 식민지로서 수탈이 본격화 될 때요,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설되어 있었고, 정주에는 철도기관 수리정비 기관이 설치되어 다른 곳보다 개화의 물결이 빠르게 진전되었다. 내가 난 시골은 정주 읍에서 20 리 정도 떨어져 있고 어느 읍이건 20 리를 걸어야 할 만큼 한촌 그대로여서 내 나이 네 살 때까지 삭발을 하지 않고 검은 댕기 머리털을 땋았던 기억도 난다.

-나는 척식과(拓植科) 소속이었다. 주로 야자원(椰子園)으로 간다고 했다. 포나페, 사이판 이 두 지점 어느 쪽이 될 것이다. 그러는 어느 날 사장이 나를 부른다기에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은 초면인데 대략 내 신분내력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엔 포나페 섬으로 보낼 것이었는데, 그 섬은 일본사람이 적게 사는 섬이고 신입 사원이라 사이판 섬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러나 사이판은 동경 시다마치와 다름없고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많다고 했다. 특히 임(林)모는 조선인은 남무(南貿)에서 매우 인기있는 인물이라며, 나도 우리 회사를 위하여 분발하여 달라는 격려의 말씀을 들었다.

- 회사에 입사하여 초봉이 46엔이었다. 수당 가산을 하면 약 70엔 정도로 매달 말에 봉투에 들어있다. 이것을 두 번 받았다. 전근을 가게 되니 사이판 지점에 도착하기까지 체재비와 월급 외에 지도금(支度金)으로 본사에서 70엔, 지점에서 70엔이 지불된다고 하였다. 나는 여름의 나라로 가는 고로 서둘러서 마로 만든 하복을 준비하였다.

-당시는 중일전쟁이 터진 지 1년 남짓, 일본 동경에서는 계란 배급이 시작되었다. 사이판은 항구도시로서 남양청이 있는 팔라우, 얄트, 포나페, 축, 얍 섬 등으로 가는 현관이었다. 5,000톤 선박이 매주 2-3회 사이판에 들렀다. 사탕수수 제당회사가 티니안, 코타까지 들어서 있어서 상주인구는 3만 이상이었다. 출입인구를 합쳐 5만이 넘었고 일본해군 23만(2-3만?)이 주둔하고 있어 명목상 항구도시로서 번창했다. 특히 환락설비가 불야성으로 네온싸인이 손님들을 유혹하고 물건과 식품이 풍부해 어디서도 전쟁 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육상교통은 버스와 경편철도로 섬 전체가 활기에 넘쳐 언제나 여름인 곳. 바닷물은 맑고, 산호가 넓어 고기떼 노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 지상천국에 왔다고 생각했다.

-조그맣고 초라한 일본식 숙사, 차모로식 생활, 먹는 것도 야채는 없고 물고기와 코프라 요리 뿐이니 자취하는 것도 문제가 많다. 처음으로 사사모토(笹本) 가족 일원이 되어 차모로 식사를 먹게 되었다. 숙소와 취사장은 떨어져 있었다. 저녁밥을 먹자고 사사모토가 안내하였다. 집은 야자 잎으로 지붕 벽이 되어 있다. 우리나라 돼지우리 크기 정도의 12척 곱하기 12척 정도의 크기에 마루만이 일본 목판으로 깔려 있을 뿐, 재료는 전부 섬에서 얻은 나무로 지어졌다. 외모는 보기 싫었으나 안은 매우 신선하였다. 조그마한 탁자상이 놓여 있다. 앉아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놀란 것은 밥상이 더러운데다 새까맣다. 칼로 긁은 것처럼 밥그릇 녹슨 것이 조심스러웠다. 반찬은 코프라 요리로 된 생선국이다. 야채는 없고 밥뿐이다. 시장한지라 먹긴 했지만 내 맛이 아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가 해가 지는 무렵이었다. 야서군(野鼠群)의 습격(襲擊), 대형 쥐 대열이 기둥으로 올라가 밥상으로 떨어졌다. 놀랍게도 그 수가 100마리이다. 잠시만 눈을 팔면 태연하게 밥상으로 올라와 생선찌꺼기를 가로챈다. 그러므로 한 손을 단단한 회초리를 들고 쫓아 내지 않으면 손가락이 물린다. 나는 겁이 났다. 쥐를 쫓지 않으면 제대로 밥을 못 먹는 곤궁에 빠졌다. 그제야 밥상 위가 칼로 된 것이 아니고 쥐 발톱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가 지는 무렵 우리는 모닥불로 사무실 앞뜰을 밝히고 축음기에서는 군가가 연달아 울렸다. 부대(部隊)들은 황홀한 기분으로 먹고 싶은 대로 먹었다. 감독은 능숙한 일본말로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었다. 야자주가 나오고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인부들이 노래를 시작했다. 남양 고유한 나체 춤이 나오는가 하면 일본유행가가 나온다. 병대(兵隊)들은 깜짝 놀랐다. 노래와 춤이 다양했다. 군데군데에서 밤늦도록 담소가 이어져 밤 가는 줄을 몰랐다. 군인들은 이런 섬에서 인품 좋은 우대는 처음이라며, 다시 사이판으로 돌아가 불편한 식량으로 단일하게 먹게 될 터이니 애석하다고 말을 한다. 그들은 우리들의 환영에서 본선(本船)에 오르기까지 손수건을 흔들며 석별을 슬퍼했다. 그들은 4개월 후 사이판에서 옥쇄했을 것이다.

-제1차 징용 8명이 티니언섬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못 되었는데 체격 좋은 그들이 돌아올 때는 뼈만 남았다. 징용 고역(苦役)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인부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하루 12시간 중노동을 해야 했고 휴일도 없다. 거기에다가 일본말이 능숙하지 못한 데다 소수이다 보니 일본인 노무자의 행패가 심했다 한다. 때리고 차고, 죄수 이상으로 취급(取扱)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도저히 체력유지를 못할 식량배급 하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비행장 공사장으로 갔다. 아직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일을 빨리 하여 성적을 올리자, 그런다면 우리는 몇 달 후면 섬으로 돌아갈 수 있다. 모범을 보이자. 누구나 힘들다. 불평을 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 뒤에서 무슨 문제도 타개(打開)할 것이다. 이런 훈화(訓話)를 하였다. 비행장 공사의 책임은 육군이다. 오전 7시 현장사무실을 찾아, 코지마 부대 대장과 면접하여 작업용구(삽,곡괭이 등)을 받아가지고 지정된 장소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오전 8시였다.

-해가 질 무렵 숙소로 돌아왔더니 시가지는 그대로 남았다. 사상자가 50여 명이라 했다. 격납고에서 신음하던 군인 환자들이었다. 그 외는 별고가 없었다. 그러나 식량은 전부 타버렸다고 했다. 다음날은 비행장 파괴 수습작업을 하라는 설부대의 명령으로 우리들의 일이 시작되었다. 매우 무서웠다. 매일 한 차례씩 강습(强襲)한다. 하루 3차례 습격(襲擊)을 하고 연 280기가 습격을 가했다. 견디다 못해 산 속으로 모두 피난하여 하루종일 보냈다. 저녁에 돌아왔는데 식수가 불결한 탓으로 무서운 배앓이가 나서 식사를 못했다.
-너희들은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가 기다리고 있지만, 도민(島民)이 죽으면 소나 말, 개처럼 길가에 묻거나 팽개친다. 도민(島民)들은 소나 말과 다름없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지. 기억해 둬. 도민도 인간이야. ... 나는 미친놈이 되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두 달 동안 일본인이라며 행세하는 통에 나 역시 조선인이라고 멸시를 받았다. 고만(高慢)한 그들의 태도에 화가 났다.

-장인은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인부 모집에 응해 남양의 섬에 왔다. 1917년 일본 해군은 세계 제1차 대전 시에 남양군도를 독일로부터 점령, 유엔신탁으로 99년 동안 위임통치권을 얻었고 남진정책을 펼쳤다. 당시 시모노세키시에는 마구로 어업회사가 니시무라(西村)척식을 만들었는데, 이 회사는 사이판, 티니안, 로타섬에다 사탕수수, 면화 재배를 하며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회사의 총주임이었던 야마시다(山下) 씨는 광주 형무소 경관이기도 하였다. 그는 광주를 중심으로 인부 모집을 했고 장인은 그 제1진 70명 중 한 사람으로 마리아나군도에 왔다. 장인은 처음에는 사이판섬, 다음에는 로타섬에서 주로 면화 재배 인부로서 5~6년을 일하며 지냈다.

-파간섬에는 군인이 2,500여 명이 있었다. 처가 아무리 정숙을 지킨다 해도 오래 못 간다. 벌써 십여 명의 일본인 처녀들이 군인과 성관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동물이다. 일본 패망은 틀림없다. 다시 살아 고국으로 돌아갈 리가 만무하다. 미군하에서 살든지 죽든지 앞은 암담하다. 나는 애정의 맛에 사로잡혔다. 결심을 했다. 장인이 반대해도 당 본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우리 처를 포옹하고는 너와 나 전쟁시에 죽어도 같이 죽다고 하였다. 처는 아무 말없이 나를 두 손으로 끌어안지 않는가.

-1945년 12월, 차랑카노아 성당에서 세례식이 거행된다. 그 의식에서 나는 어린애로 돌아간다. 나를 하나님 나라에로 이끄는 두 교부(敎父)와 한 敎母(God Father, God Mother. 토어로 발리누, 말리나)와 동반(同伴)하여 성단(聖段)에 무릎을 꿇었다. 먼져 신부가 나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기에 한국 성명 그대로 전경운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때 전입니다 하였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크게 잘못되어 버렸다. 신부는 나이 많은데다 귀가 멀어 나는 큰 소리를 내야 했다. 그러나 이 서반아(西班牙,스페인) 노신부는 우리말 발음이 어려워 졍경경 ? 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이다. 그러자 많은 신자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상기되어 수습할 바를 잃고 멍하여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러자 옆에 앉은 敎父(발리누) 한 분이 마쓰모토 라고 하였다. 그 당시 일본말로 나를 젠 이라고도 하고, 마쓰모토 라는 두 이름으로 불러왔던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교명(敎名)은 '헤수수, 마쯔모토'로 등록부(登錄簿)에 올려졌다.
그 당시 내 이름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자녀들을 낳고 기르면서 자식들이 성인이 되자, 먼저 내 자식들이 마쓰모토 라는 성이 싫다며 나무람을 받았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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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수집 (2)

일제시대에는 티니언에 원주민이 거의 살아 있지 않아 사이판 정부는 소와 돼지를 방목해 두었는데 종종 사이판에서 큰 연회가 있을 때는 반드시 티니언의 소와 돼지를 사냥해 잡아 갔다고 전해진다. 남양흥발회사가 무인도 섬에서 사탕수수를 심어서 제당공장이 들어서자 인구는 2만에서 2만 5천명으로 육박했으나, 20년 살다가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이 패전하자 1946년에는 다시 무인도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mj**** | 2018-08-16 | 신고/차단

우리 조선인이 사이판에 입주하게 된 것은 거의가 사탕수수 재배 소작인이고 다음이 짐나르는 일꾼으로 7-80명 정도다. 유선회사가 운영하는 5,000톤 화물선 배 5,6 척이 매주처럼 남양군도를 운항학 되어 있었다. 개인사업으로는 제주도 출신 장사꾼 고모 씨와 칠복루 라는 기생집 있었다.
mj**** | 2018-08-16 | 신고/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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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조성윤 (지은이)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살다가 1982년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제주 사람이 되었다. 공부하고 싶은 것, 연구해야 할 것들이 많아 오랫동안 논문 발표에 열중했으나 최근에는 자신의 연구를 여러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공부한 것들을 책으로 출판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논문으로 「임오군란의 사회적 성격」, 「조선후기 서울 주민의 신분구조와 변동」이 있으며, 저서로 <제주지역 민간신앙의 구조와 변용>(공저), <일제 말기 제주도 일본군 연구>(엮음),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 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공저)가 있다. 2014년 현재 ‘오키나와 전쟁의 기억’, ‘남양군도’, ‘일본 신종교의 평화운동’ 등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남양 섬에서 살다>,<남양군도> … 총 14종 (모두보기)


조성윤(지은이)의 말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시절에 지금은 미크로네시아Micronesia라고 부르는 태평양 섬 지역으로 이주했던 한국인들을 조사해 왔다. 그 시기 일본은 그 지역을 남양군도(南洋群島)라고 불렀다. 우리에게 남양군도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노동자로, 병사로, 위안부로 끌려갔고,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된 지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남양군도에서 죽어간 이들을 잊고 있었다.

-티니언섬에서 나는 몇 명의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90년 이후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 분들은 10년 이상 현지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 사정에 밝았다. 일단 그분들로부터 정보를 얻은 다음 한 분씩 집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남양군도 시절에 이주해 와서 1945년 전쟁이 끝난 다음에 돌아가지 않고 남은 한국인 남성은 모두 원주민 여성과 결혼한 경우였다. 1세대로 남양군도 여러 섬에서 생활한 전경운(全慶運)의 회고록 필사본은 읽기 시작하자 손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인생이었구나, 감동과 연민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마쓰모토라는 이름을 쓰는 조선인을 재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어졌다.

-그의 회고록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남양군도 시절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1945년 수용소 캠프 시절부터 1951년 티니언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적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티니언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이야기였다. 세 시기가 모두 특징이 있고, 각각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던 이야기들이 넘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 번째의 농업 이야기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전경운이 회고록을 적어가는 태도를 보면, 자신이 맡아서 했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들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일들에서 부딪친 문제, 또는 자신이 나서서 해결한 일들을 아주 상세하게 적어갔다. 특히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가 문제를 해결했던 일들은 마치 소설을 쓰듯이 실감나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어떤 국면에 처하든지 부딪치는 일을 적극 해결해 나갔다. 매우 열정적인 자세를 보이지만, 때로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가족을 돌보는 일은 물론 자신의 건강마저 해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특히 농업과 관련한 부분을 보면 그가 어떤 시도를 했고, 어떤 부분에서 실패하고, 또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했는지를 잘 읽을 수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36년 동안,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삶은 어땠을까. 어떤 이는 친일파로 살며 일신의 안위를 꾀하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청춘을 빼앗기고 아까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여기에 그 시절을 살아냈던 어느 조선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전경운이다.
한때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평안도의 오산고보 24기 졸업생이었는데 중학 시절에는 홍준명, 이중섭과 함께 임파 임용련 선생의 그림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그림은 취미에 그쳤다. 이중섭은 그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화가가 되었다. 그 또한 일본으로 유학하였지만 동경고등척식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생 전경운은 스물 다섯이 되던 1939년에 사이판섬으로 간다. 태평양의 섬들을 남양군도라고 칭하며 세력을 넓혀가던 일본 제국은 태평양의 섬을 개간할 회사로 남양무역주식회사를 지원했고, 그 회사에서는 그곳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전경운은 남양무역주식회사의 사이판 지점에서 야자원 관리인이 되었다.
전경운은 일본 회사에 입사한 조선인이면서, 야자원에서 일하는 원주민 인부들에게는 일본인 관리자였다. 하지만 그는 조선인 또는 일본인이라는 입장에서보다는 어떤 조직의 관리자로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한 열중한다. 그는 사이판섬 북쪽 5도에서 근무하며 야자원 관리에서의 효율화를 꾀한다. 그의 방법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주변은 빠르게 변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사이판섬 또한 전쟁터로 변했다.
그가 있던 사이판의 주변 섬에는 미군이 상륙하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은 그를 포함한 농장 인부들을 동원하여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려 한다. 그는 징집 명령을 받게 되었고, 일본 회사의 사원이었다가 일본군의 명령을 받는 존재가 된다. 그는 야자원에서 일하던 인부들을 인솔하여 일본군을 도우러 나갔고, 비행장 공사와 일본군의 식량조달 등의 일을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미군은 그를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분류한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의 결혼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후로 그는 티니언섬으로 이주해 갔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친다.
1939년에 조국을 떠난 이후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은 그로 하여금 지난 삶을 기록하게 한다. 1981년에 쓴 그의 회고록의 제목은 <남양살이 40년을 회고>였다.
10여 년이 지난 후, 자신이 쓴 첫 회고록을 잃어버린 그는 두 번째의 회고록을 쓴다. 그 10여 년 사이 그는 조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고, 6.25 때 월남하여 한국에서 살고 있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 만남 이후, 그는 첫 번째의 회고록에서는 쓰지 못했던, 평안북도 정주에서 살던 시기, 오산학교에 다니던 때의 추억을 덧붙인 두 번째의 회고록을 쓰게 된 것이다.

그가 볼펜으로 쓰고 여러 번 복사해 묶은 회고록은 그 후 한국의 방송이나 역사가들에게도 전해졌고, 그가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정착해 살았던 티니언섬에도 일부 지인들에게 남아 있었다. 남양군도 연구, 특히 일제 강점기에 남양군도에 갔던 조선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조성윤 교수가 전경운이 남긴 회고록을 입수하였고, 내용을 편집하여 <남양 섬에서 살다, 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를 살던 어느 조선인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그가 묘사한 사소한 장면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의 노동자 임금이나 물자의 가격, 일본군과 일본 회사의 경영 행태, 남양군도에 가게 된 조선인들과 그에 수반하는 모집책, 일본과 조선, 태평양 섬을 이동하는 교통편이나 남양군도에 살던 현지 주민의 삶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그의 자필 회고록은 개인사 속에 펼쳐진 역사가 구체적이고 생생하기에 마치 어제 일을 보는 것처럼 잘 읽힌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개인이 보고 느낀 남양군도의 사회와 문화 및 역사를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전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살던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자기 정체성의 혼란이나 인간적인 모습 등은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의 삶이 모여 역사가 되고, 개인의 기록이 모여 역사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해야만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후세로 이어진다.
그의 회고록은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백성이었던 조선인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다양한 모습에서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간, 그리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한다. 어떤 사람의 개인사 속에서 사람을 보고, 그 너머의 역사를 보는 경험을, 이 책에서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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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글쓰기, 누구라도 자기식의 자서전을 쓸 수 있다. 부모님의 이야기도 역사가 된다. 내 이야기도 역사가 될 것이다. 읽어보고 드는 생각!
자몽책방&당산서원 2018-07-2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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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년에 태어난 주인공의 삶을 1990년에 태어난 내가 엿보면서 동화되고, 교감을 이룬다는건 참 경외로운 일이다.
나다나짱 2023-06-27 공감 (0) 댓글 (0)

마이리뷰


소중한 기록, 어설픈 편집`

이 책은 일제 시대 '남양 군도'라고 불렸던 태평양의 섬에 개발 회사의 직원으로 파견된 한 조선인의 삶에 대한 회고록이다. 저자는 차모로족이라는 현지인들을 데리고 일을 시키면서 문화적 차이에 따른 갈등을 체험하면서, 그들과의 간격을 좁히고 진정으로 그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려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피지배 민족인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슬퍼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서 여생을 살기로 결심을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우습게 묘사되고 있다.

일본의 남방 진출사에 있어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조선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이 책은 태평양의 섬에 군인이 아닌 개척 회사의 직원으로 파견을 나갔다가 눌러앉게 된 한 조선인의 삶에 대한 진기한 기록으로서, 이러한 기록은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발견해서 책으로 만들어주신 분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가신 분들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이러한 개인사를 많이 남겨 주시면 좋겠다.

이 책과 비슷한 책으로는 '어느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가 있다. 그 책은 말 그대로 매일의 일기를 그대로 책으로 만든 것이어서 정확성은 높겠지만 지루한 편인데, 이 책은 저자의 회고록이므로 저자의 머릿속에 재구성된 기억을 글로 적은 것이므로 재미있고, 전체적인 스토리가 있다.

도서로서의 책의 완성도는 많이 떨어지는 편이어서, 편집을 하다가 만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옮겨 적으신 분도 무슨 뜻인지 몰랐는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도 있고, 오자 등도 눈에 띈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이 읽는 것을 크게 방해하지는 않고, 또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점이 실제로 누군가가 써내려간 글을 읽는 느낌을 주어서 그 나름대로 맛이 살아나게 하는 면도 있다.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던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이 곁들여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저자가 그림에 적은 설명에는 읽기 어려운 한자나 일본어로 적힌 것들도 있어서, 이런 것들은 번역을 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궁금한 것: 원 저자께서는 사망하셨는데 그 가족분들께는 인세가 전달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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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har 2021-12-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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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리뷰
종이책du*****|2018.08.16|신고/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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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돼요
남태평양은 영화로 보던 낭만적인 섬만은 아니었다.
평화로운 그 곳에도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 살아가던 사람들-한국인들이 있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기업에 적을 두었기에 해방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 이북 출신이라 6.25이후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사람.

이 책은 마쓰모토라는 일본 이름으로 평생을 살다 간 한 사람이 일본어와 한국어 그리고 그림을 곁들여 기록한 개인사이지만 그것이 결코 개인의 신변잡기에 머물지않고 여러가지로 생각케하는 면이 참 많다.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이 국가의 비극과 맞물려 태평양을 떠돌게 만들었기에 부초같은 그 운명에 위로의 말을 전하고싶다.

현지인과 결혼을 하고 그 후손이 아버지의 유고를 잘 간직을 하였기에
늦게나마 그의 삶에 한걸음 더 들어가 그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게되었다.
고된 나날속에서도 포기보다는 도전을 택한 그의 용기도 부러웠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을 그의 이름을 다시금 불러주신 저자 조성윤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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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답글 0
종이책hc****|2018.07.18|신고/차단
10
/집중돼요
마치 소설처럼, 영화처럼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0답글 0
종이책ko***|2018.07.17|신고/차단
10
/집중돼요
우리 근대사의 또 다른면을 개인기록(자서전)을 통해 볼수있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0답글 0
종이책mj****|2018.05.26|신고/차단
10
/도움돼요
개인사가 역사를 만듭니다. 개인의 이야기에서 역사를 읽습니다. 일제 때 태평양 섬에 갔던 조선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던 책, 소설처럼 잘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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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남양 섬에서 살다,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
by전영웅
Sep 1. 2018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에는 처절함과 극단이 배어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공식적인 책을 읽고 학교에서 공부한 내용 안에서는 그렇다. 역사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주었지만, 시대를 살아간 보통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보통의 범주에 들지 않는, 피지배 역사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악인이거나 위인이거나 하는 인물들의 삶을 조금씩 들추어 주었을 뿐이다.

시대나 상황의 묘사에는 극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선동한다. 한반도의 근대사에서는 반일과 반공이 대표적이다.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 간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곧고 바르고 결연했다. 최근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활발해지면서, 우리가 열사나 의인이라 부르던 이들의 솔직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봉창 열사인데, 그는 일본 식민지 사회에서 일본인들과 어울리며 좀 더 풍요로운 개인의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식민지 국가의 국민이라는 현실이 그 희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때, 그는 돌연 상해로 가서 김 구를 만나 거사를 계획했다. 그의 결연함이란 배신당한 삶 때문이었지, 처음부터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는 그런 의식이나 사상은 없었다. 열사의 이미지는 이 순간 김이 쭉 빠지며 쪼그라들지만, 인간 내면의 솔직함은 그를 더욱 인간답고 가깝게 만든다.

조선인 마쓰모토의 삶은 우리가 쉽게 만나지 못했던 그 시대의 평범한 식민지 국민의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동시에, 쉽게 생각하지 못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동선을 알게 해 준다. 너무 평범하고 솔직한 기록이 그와 우리를 가까이 연결해준다. 일제 강점기이지만, 자신의 삶을 시대에 맞추어 열심히 살려했던 모습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어 마쓰모토의 삶은 거부감이 들거나 반감이 생기지 않는다.

그는 민족주의 교육으로 유명한 오산학교를 나왔지만,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본어를 제대로 배운 일 없는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 남양 무역 주식회사에 입사한 것은 단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려는 소박한 마음 때문이었다. 성실함을 인정받아 사이판 지점 관리인이 되고, 북 마리아나 제도의 파간, 사리간 섬 등등을 다니며 원주민들을 관리한다. 원주민을 관리하는 능력 역시 뛰어나고 상황 파악과 수습능력이 뛰어나 그는 유능하고 성실한 관리인으로서 인정받는다. 그에게는 일본에 대한 충성심 같은 건 없었다. 단지, 회사의 한 직원으로 맡은 바를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었다. 조선이라는 식민지 국가의 국민이라는 결점? 은 있었지만,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의 작은 섬들 사이에서 일본인들과 일을 하는데 그것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 그런 것이었다. 그가 회사의 직원으로 열심히 일을 하는데 끼어든 현실적 상황은 단지, 미국의 공습과 일본의 패망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가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나에게 이로울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었다. 오랜 섬 생활에서 혼혈 원주민과 결혼한 그는 결국 사이판에 남았고, 티니안 섬으로 건너가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

식민지 국가의 국민임에도 그는 그저 평범했다. 그리고, 시야에 보이지 않는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갔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교육이 정규 교육이 되고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을 때, 사람들은 순순히 일본어를 공부하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으면서 굴곡 없는 삶을 살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마쓰모토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친일 부역자라는 낙인을 씌우기엔 그는 너무도 평범해서 친일이라는 말 자체가 어색할 정도이다. 의식 없음을 비난하기엔 그의 삶은 풍랑 위의 배처럼 열악하고 아슬아슬했다. 그는 그저, 과거에나 현재에나 우리 모두가 그러하고 그러했듯, 삶의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다.

식민지 시절의 그의 행보를 가지고 의식을 덧씌우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이 기록의 발굴은 그 시절 조선인들의 삶은 어떠했는가를 구석구석까지 찾아 들추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기록을 찾자면 마쓰모토같이 사이판이나 티니안 섬에서 삶을 살아온 조선인이 있는가 하면, 싱가포르가 일본에 함락되었을 때 현지 관리인으로 건너가 활동했던 조선인도 있었다. 식민지 시절, 위안부나 징용으로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조선인들의 기록도 많지만, 그저 평범하게 그 시절의 상황에서 다양한 곳으로 건너가 일을 했던 조선인들도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인으로 기록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공표하기 이전에 조선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 출신이었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 국가 안으로 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관적임을 감안해도 기록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시간이 오래된 기록일수록 우리는 잘 알지 못했던 과거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이 가지는 자체의 시각과, 그것에 유도당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 좀 더 사실적인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삶에 충실했던 식민지 조선인 마쓰모토의 삶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지 못했던 북 마리아나 제도의 작은 섬들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그 모습은 시대의식이나 사상을 덧씌우기엔 어색한, 자체가 치열했던 삶이었다. 그래서 그저 담담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그의 회고를 읽어 내려갔다. 이미 여정의 마무리를 다한 그의 삶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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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군도에서 눈 감아야했던 그의 발자취
문준영 기자입력 2017.10.10 16:28댓글 1
https://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95891

제주대 조성윤 교수 엮은 전경운 회고록 ‘남양 섬에서 살다’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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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속 굵직한 흐름들을 사회학적 시선으로 풀어냈던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가 이번엔 일제강점기 일본 회사의 관리인이 된 조선인에 주목했다. 오는 27일 발간되는 ‘남양 섬에서 살다-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이다.

1915년생인 전경운은 스물다섯이 되던 해 남양무역주식회사의 사이판 지점 야자원 관리인이 됐다. 일본이 태평양의 섬을 남양군도라고 칭하며 세력을 넓혀가던 시기였다. 우여곡절을 겪은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태평양 티니언 섬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회고록에서는 80여년 전 태평양 섬에서의 사람들의 모습, 출가 노동자들의 현황, 태평양 섬을 식민지화하는데 동원된 일본 회사와 군대의 모습을 생생히 만나볼 수 있다. 혼돈의 시대 속 일상부터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까지 다루는 만큼 개인의 기록을 넘어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훌륭한 통로가 된다.

일제강점기 남양군도에 갔던 조선인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조 교수가 전경운이 남긴 회고록을 입수한 뒤 편집해 이번 책을 출간하게 됐다.
이 책을 엮은 조성윤 교수는 제주참여환경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으며 <제주지역 민간신앙의 구조와 변용>, <일제말기 제주도의 일본군 연구>,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 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 <남양군도: 일본 제국의 태평양 섬 지배와 좌절> 등을 펴냈다.



슬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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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나요  2
 
문준영 기자
moonsoyo@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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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요청하신 <남양 섬에서 살다 - 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에 대한 요약과 평론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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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섬에서 살다: 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 요약 및 평론

1. 도서 요약: 경계에 선 한 인간의 궤적

가. 남양군도로 향한 여정 이 책은 1915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전경운의 자필 회고록을 사회학자 조성윤이 엮은 결과물이다.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었던 전경운은 1939년, 남양무역주식회사의 사원으로 채용되어 사이판 지점의 야자원 관리인으로 부임한다. 당시 일본 제국이 남양군도라 칭하며 식민 지배를 넓혀가던 태평양의 섬들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자, 평생 돌아오지 못할 유배지가 된다.

나. 식민지 관리자로서의 삶과 전쟁 전경운은 사이판 주변의 파간, 사리간, 아라마간 섬 등을 돌며 원주민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업무 능력과 성실함으로 일본 회사 내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관리자로 성장한다. 회고록 전반부에는 80여 년 전 태평양 섬들의 풍광, 노동자들의 임금 체계, 물가, 그리고 현지 주민들의 생활상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평화로웠던 섬 생활은 지옥으로 변한다. 그는 일본군에 징용되어 비행장 건설과 식량 조달 임무에 투입되며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든다.

다. 정체성의 혼란과 정착 전쟁이 끝난 후, 미군은 그를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분류한다.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그는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결혼과 가족을 이유로 티니언 섬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는 세례를 받는 과정에서 발음 문제로 인해 본의 아니게 <마쓰모토>라는 일본식 성을 교명으로 등록하게 되는데, 이는 식민지 시대가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이자 그의 복잡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사건이 된다. 이후 그는 티니언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1946년 무인도가 된 섬을 다시 일궈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2. 평론: 거대 서사 밖에서 발견한 평범한 인간의 진실

가.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생존의 기록 이 회고록의 가장 큰 미덕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보통 사람>의 시선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일제강점기 서사가 항일과 친일, 혹은 피해와 가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함몰되어 있었다면, 전경운의 기록은 그 경계 어디쯤에서 오직 <생존>과 <일상>을 위해 분투했던 개인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민족의식을 앞세우기보다, 주어진 환경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이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보다 개인의 정체성을 우선시하는 현대적 인간상과도 맞닿아 있다.

나.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와 세밀한 묘사 저자는 문필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소설을 쓰듯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특히 쥐떼의 습격을 받으며 식사하던 풍경이나, 일본군 내부의 갈등, 전쟁 통에 피어난 사랑 등은 공식 기록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역사의 민낯이다. 또한, 그가 직접 그린 약도와 삽화는 텍스트가 줄 수 없는 시각적 구체성을 더해준다. 맞춤법이 틀리고 일본어와 평안도 방언이 뒤섞인 문체는 오히려 그가 겪은 오랜 세월의 풍파와 단절된 고립감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다. <마쓰모토>라는 이름이 갖는 비극적 상징성 그가 사후에도 <조선인 마쓰모토>로 기억되는 지점은 일제강점기가 한 개인의 내면에 남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시사한다. 세례식에서 이름이 잘못 등록되는 해프닝은 단순한 실수를 넘어, 식민지 백성이 자신의 주체성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웠던 시대적 비극을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그 이름에 갇히지 않고 티니언이라는 낯선 땅을 자신의 새로운 터전으로 만들며 삶을 긍정했다.

결론적으로 <남양 섬에서 살다>는 제국주의의 야욕이 뻗친 태평양의 외딴섬에서, 국가라는 거대 서사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 했던 한 세계인의 기록이다. 전경운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역사는 누구의 기록인가? 그리고 우리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존엄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그의 회고록은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한반도 너머 태평양 전역으로 확장하며,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를 가능케 한다.


전경운 옹의 삶의 궤적을 훑어보니, 15세에 한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거치며 세계인으로 살고 계신 세진님의 모습과도 묘하게 겹쳐 보이는 지점이 있네요. 혹시 이 회고록의 내용 중 특별히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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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남양 섬에서 살다 – 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에 대한 <1,000 단어 요약+평론>입니다.


<남양 섬에서 살다> 요약 + 평론

1. 요약

이 책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전경운(마쓰모토)이 남태평양 남양군도에서 살아온 삶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개인의 삶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복잡한 현실, 특히 “조선인으로서 일본 제국의 일부로 살아야 했던 인간의 모순적 위치”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회고록은 크게 세 시기로 구성된다. 첫째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남양군도에서 일본 회사 직원으로 일하던 시기, 둘째는 일본 패전 이후 미군 수용소와 혼란기, 셋째는 티니언 섬에 정착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살아간 시기이다 .

(1) 식민지 청년의 선택: 일본으로, 그리고 남양으로

전경운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고, 이후 남양무역회사에 취직하여 사이판으로 파견된다. 그의 선택은 민족주의적 결단이라기보다 생계를 위한 현실적 판단이었다. 이 지점이 이 회고록의 핵심 출발점이다.

그는 일본 회사의 직원으로서 남양군도에서 야자원 관리자로 일하며 현지인 노동자들을 관리한다. 이때 그는 조선인이면서 동시에 일본 제국의 관리자로서, 이중적인 위치에 놓인다. 즉, 식민지 피지배자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피지배자를 통제하는 중간층이었다.

(2) 남양군도의 일상: 낭만과 폭력의 공존

사이판과 주변 섬은 겉으로는 “지상천국”처럼 묘사된다. 따뜻한 기후, 풍부한 자원, 활기찬 항구도시, 오락과 소비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식민지 노동 착취, 인종적 위계, 문화적 충돌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현지 생활 묘사에서는 음식 부족, 위생 문제, 쥐떼 습격 같은 열악한 조건이 등장하며, 동시에 일본인과 조선인, 원주민 간의 위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일본 노동자들이 조선인과 현지인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장면은 식민지 권력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

전경운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문제 해결과 조직 관리에 몰두하며 자신을 “유능한 관리자”로 인식한다. 그는 노동자들의 갈등을 해결하고 생산성을 높이려 노력하는 실무적 인간으로 그려진다.

(3) 전쟁의 파국: 강제동원과 생존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그는 일본 회사 직원에서 일본군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고, 비행장 건설, 군수 작업 등 전쟁 노동에 동원된다.

미군 공습, 식량 부족, 질병,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삶은 급격히 붕괴한다. 공습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산으로 피신하거나, 매일 폭격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장면들은 전쟁의 비인간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 시기 중요한 인식은 “조선인의 위치”이다. 일본군 내부에서도 조선인은 차별받으며, 인간 이하로 취급되는 현실이 반복된다. “도민은 소나 말과 같다”는 표현은 식민지 인간의 비참한 위상을 집약한다 .

(4) 전후: 귀환하지 못한 인간

전쟁이 끝나고 그는 미군에 의해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분류된다. 이론적으로는 귀국할 수 있었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현지에서 결혼하고 삶의 기반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티니언 섬에 정착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생을 마친다.

이 과정에서 그의 정체성은 더욱 복잡해진다. 세례 과정에서 ‘마쓰모토’라는 일본식 이름이 공식화되고, 자녀들은 이 이름을 거부하는 갈등을 겪는다. 이는 식민지 경험이 개인과 가족의 정체성에 남긴 흔적을 상징한다 .


2. 평론

(1) “친일 vs 저항”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기록

이 회고록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식민지 시대를 단순한 도덕적 구도로 환원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전경운은 친일파도 아니고, 독립운동가도 아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 움직인 평범한 인간이다. 일본 회사에 취직하고, 제국의 확장 속에서 일하며, 전쟁에 동원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어떤 이념적 충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책은 묻는다:

→ 식민지 시대의 “대다수 인간”은 무엇이었는가?

답은 명확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적응한 사람들”이었다.

이 점에서 이 회고록은 한국 근현대사의 도덕적 서사를 근본적으로 흔든다.


(2) 식민지 중간자 계층의 존재

전경운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원주민 노동자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었고, 때로는 식민 권력의 일부로 기능했다.

즉, 그는 다음과 같은 구조에 위치한다:

  • 일본 제국 → 조선인 관리자 → 원주민 노동자

이 구조는 식민지 권력이 단순히 “지배 vs 피지배”가 아니라, 다층적 위계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 역사 서술에서 이 “중간자 계층”은 거의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3) 개인의 삶이 드러내는 제국의 구조

이 회고록의 또 다른 가치는 “거대한 역사”를 개인의 체험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 노동 조건 (임금, 식량, 노동시간)
  • 교통망 (남양군도 해상 연결)
  • 일본군과 기업의 관계
  • 현지 문화와 충돌

이 모든 것이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으로 제시된다.

즉, 이 책은 “미시사(microhistory)”의 전형적 사례이다.


(4) 정체성의 붕괴와 재구성

전경운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정체성 문제이다.

그는:

  • 조선인으로 태어나
  • 일본 회사 직원으로 살고
  • 일본 이름을 갖고
  • 남태평양에서 가족을 이루고
  •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 “제국이 인간의 정체성을 어떻게 해체하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그의 자녀들이 ‘마쓰모토’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장면은, 식민지 경험이 세대 간 갈등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상징한다.


(5) 한계: 개인의 시선과 편집 문제

이 책에는 몇 가지 한계도 있다.

  1. 개인 회고의 한계
    기억에 의존한 기록이므로 객관성에 제약이 있다.
  2. 정치적 성찰의 부족
    그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깊은 구조적 비판을 하지 않는다.
    즉, “왜 이런 구조가 생겼는가”에 대한 분석은 없다.
  3. 편집의 미완성
    오탈자, 번역 문제 등 텍스트 완성도가 낮다는 지적이 있다 .

그러나 이 한계는 동시에 이 책의 “생생함”을 유지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3. 결론

『남양 섬에서 살다』는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책이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 역사는 영웅과 악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대부분의 인간은 “그 사이”에서 살아간다

전경운은 영웅도, 배신자도 아니다.
그는 그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은 식민지 역사 이해에 필수적인 자료가 된다.


원하시면 다음으로
→ <조총련 vs 민단 vs 남양군도 조선인: 디아스포라 3유형 비교>
→ <식민지 중간자 계층: 조선인·인도인·중국인 비교>
로 확장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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