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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 욤비 토나.박진숙 | 알라딘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은이)이후201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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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욤비 토나 씨는 용케 294명의 문턱을 넘은 난민 가운데 한 명이다. 2002년 여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정부의 박해를 피해 한국에 왔고 난민 신청을 했다. 난민 인정을 받고 가족들을 다시 만나기까지,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6년 동안 욤비 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욤비 씨의 싸움에 동참하는 이들이 생겼다. 욤비 씨를 만나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난민 지원 단체를 설립하고, 난민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냈다. 이 책의 또 다른 저자 박진숙도 욤비 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난민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을 설립했다. 욤비 씨가 구술을 하면 그 내용을 토대로 박진숙이 질문을 던지고 살을 붙였다.
통역 없는 인터뷰, 난민에게 적대적인 난민 담당 공무원, 심사가 언제 끝날지 몰라 대책 없이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 일할 자격 없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곤란함까지……, 책 한 권에 빼곡히 담긴 욤비 씨의 삶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난민의 삶을 대변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구성원들의 삶을 웅변하고 있다.
목차
■ 이 책이 나오기까지
난민이 내 삶을 바꿨다
■ 여는 글
나는 대한민국 난민이다
1부 내 이름은 욤비, 콩고에서 왔습니다.
1장 아버지, 나를 버리지 마세요
2장 킨샤사의 단벌 고학생
3장 권력의 꽃은 금세 시든다
2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4장 제3국은 어디인가?
5장 사방이 막힌 벽
6장 공장에서 보낸 나날
7장 천사는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3부 닫힌 문을 열다
8장 한국에서 찾은 피난처
9장 당신을 대한민국 난민으로 인정합니다
10장 다시 찾은 삶
11장 한국에서 만난 또 다른 정글
■ 닫는 글
욤비 씨와 함께한 시간
■ 부록
난민과 함께하는 환대의 공동체를 꿈꾸며―김종철
접기
책속에서
국내 거주 난민 가운대 1/4에 해당하는 24.4%가 심리적 불안과 답답함을 겪고 있다. <난민인권센터> [난민을 위한 심리 상담 및 실태 조사] - 공중제비
한국의 난민 제도나 난민에 대한 대우는 유럽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한국 전체가 그런 건 아니었다. (201쪽)
영종도 난민 지원 센터는 행정 편의상 발상. 진정 난민의 사회적 통합을 원한다면 난민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좀 더 면밀한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215쪽) - 공중제비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조선일보
- 조선일보 북스 2013년 1월 4일자 '북카페'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3년 1월 5일자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3년 1월 4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욤비 토나 (Yiombi Thona)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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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출생. 콩고 킨샤샤 대학 경제학 학사를, 캐나다 오타와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 중이다. 한국에서 난민 지위 인정받아 거주하고 있다. 2017년까지 광주대학교에 조교수로 재직해 인권과 다문화, NGO를 가르쳤으며, 현재는 전남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있다. 아시아태평양난민인권네트워크(Asia pacific Refugee Rights Network)에서 의장을 맡아, 국제 망명객 및 난민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사회 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공저한 책으로 『내 이름은 욤비』(2013)가 있다.
최근작 : <용기와 시 : 유동성 시대의 난민과 예술>,<내 이름은 욤비> … 총 2종 (모두보기)
박진숙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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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 고려대학교 불어불문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아동가족학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 6월 ‘세계 난민의 날’에 콩고 난민 여성 ‘미야’를 만나면서 난민들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후로 미야를 비롯해 네 명의 콩고 엄마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친구가 되었다. 2009년 콩고 난민 엄마들과 문화·경제 공동체 ‘에코팜므’를 세웠다. 현재 난민 문제를 생각하는 책을 쓰거나 번역하고 강의를 한다.
최근작 : <잠깐! 이게 다 인권 문제라고요?>,<세계 시민 수업 1~10 세트 - 전10권>,<우리는 통계 삼총사> … 총 1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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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오늘도 차별, 그래도 삶>,<이런 말, 나만 불편해?>,<퀴어 히어로즈>등 총 78종
대표분야 : 여성학/젠더 14위 (브랜드 지수 12,810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에 난민이 산다고?|
‘난민’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렇다. 구호물품을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앙상하게 뼈마디만 남은 아이와 그 아이를 안고 눈물 흘리는 어머니, 얼기설기 만들어진 텐트 아래에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젊은이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이미지에 갇혀 우리는 우리 곁에 살아가는 난민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무관심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야 하는 한국의 난민, 『내 이름은 욤비』는 바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92년 “난민협약”을 비준한 이래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인정해 달라고 신청한 이는 모두 4,516명이었다. 그 가운데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겨우 294명이다. 30년 동안 한국이 받아든 ‘난민 성적표’는 이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다. 2012년 현재, 심사가 종료되지 않은 난민 신청자 수는 1,264명, 이들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지금까지 추세대로라면 1,264명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은 결국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제3국으로 떠나거나 아니면 목숨이 위협당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본국으로 강제 송환될 것이다. 콩고인 욤비 씨가 한국에 와서 난민 인정을 받기까지 고군분투의 시간을 담은 『내 이름은 욤비』는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이러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다.
|여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난민의 목소리를 듣자|
욤비 토나 씨는 용케 294명의 문턱을 넘은 난민 가운데 한 명이다. 2002년 여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정부의 박해를 피해 한국에 왔고 난민 신청을 했다. 난민 인정을 받고 가족들을 다시 만나기까지,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6년 동안 욤비 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욤비 씨의 싸움에 동참하는 이들이 생겼다. 욤비 씨를 만나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난민 지원 단체를 설립하고, 난민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냈다. 이 책의 또 다른 저자 박진숙도 욤비 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난민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을 설립했다.
욤비 씨가 구술을 하면 그 내용을 토대로 박진숙이 질문을 던지고 살을 붙였다. 통역 없는 인터뷰, 난민에게 적대적인 난민 담당 공무원, 심사가 언제 끝날지 몰라 대책 없이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 일할 자격 없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곤란함까지……, 책 한 권에 빼곡히 담긴 욤비 씨의 삶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난민의 삶을 대변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구성원들의 삶을 웅변하고 있기도 하다.
|콩고 비밀 정보 요원에서 대한민국 난민이 되기까지|
『내 이름은 욤비』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난민의 이야기다. 욤비 씨는 콩고비밀정보국(ANR)의 정보 요원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다가 정부 비리를 묵과할 수 없다는 정직한 성격 탓에 비밀 감옥에 투옥된다. 목숨을 건 탈출 끝에 도착한 곳은 한국 땅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몸에 익지도 않은 육체노동을 견뎠다. 탈장으로 쓰러지고, 기계에 팔이 끼이고, 월급도 숱하게 떼였다. 난민 신청을 하고 수십 차례 불려 나가 길게는 여섯 시간이 넘는 인터뷰에 응했지만 받아든 건 불허 처분이었다. 이의 신청도 했지만 기각되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정글에 숨어 지내는 아내와 아이들 때문이었다.
『내 이름은 욤비』는 또한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 사회의 이야기다. 법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이기기까지, 욤비 씨에게 한국에서 보낸 6년은 외국인 노동자로, 불법 체류자로, 그리고 ‘깜둥이’로 살아야 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욤비 씨의 눈을 통해 우리는 한국 사회의 편협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이 책에서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난민을 ‘걸러 내기’ 위해 존재하는 난민 심사 제도,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이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적대적인 태도, 합법적으로 체류할 자격만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정부의 무책임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또한 『내 이름은 욤비』는 한 인간이 자기 앞에 놓인 장애물을 하나둘 넘어서는, 고단하지만 아름다운 극복의 과정을 담은 드라마이기도 하다. 공장을 나와 난민 지원 단체 활동가로 일하면서 느꼈던 희열, 아버지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아이들과 6년 만에 만나는 순간의 기쁨, 마흔 넘어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어 조국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열정이 담겨 있다. 콩고에서 날아와 자기 삶을 용감하게 개척하며 한국 사회와 소통하려는 욤비 씨의 진지한 노력을 통해, 한국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더불어 구호만 요란한 다문화 담론에서 벗어날 기회도 얻게 되었다.
|나에겐 두 가지 꿈이 있습니다|
욤비 씨는 밤샘 노동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한국 사회에 난민 문제를 알릴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두 팔을 걷고 나섰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욤비 씨에겐 최근 새로운 직함이 생겼다. <아시아태평양 난민권리네트워크> 국제회의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어드바이저로 선출된 것이다. 2012년에는 난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난민법”이 제정되어 시행을 앞두고 있는 만큼, 욤비 씨는 한국 사회가 변화해 가는 모습을 지켜볼 꿈에 부풀어 있다.
한편으로 욤비 씨는 또 다른 꿈을 꾼다. 욤비 씨는 콩고와 한국이 식민 지배를 거쳐 쿠데타와 독재, 내전으로 이어진 비슷한 역사적 아픔을 공유하고 있지만, 오늘날 두 나라의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의 ‘데모크라시’를 공부해 콩고에 알리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욤비 씨는 오늘도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에 흩어진 콩고인들에게 그런 자신의 꿈을 실어 나른다.
재일조선인 학자 서경식 씨는 난민을 가리켜 탄광 속의 카나리아라고 부르고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씨는 난민을 이중의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부르든, 조국에게 버림받고 다른 나라에 가서도 온전히 통합될 수 없는 난민들의 불안한 지위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난민의 삶은 한 사회 인권의 척도다. 한국 사회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욤비들’을 꿈을 외면하지 않기를 그리고 난민과 이방인의 삶을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자원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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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가족의 힘든 탈출에 대해 알고, 시각을 넓히게 하는 책입니다. 중학생 시절 둘의 학교에서 추천도서였어요.
청소년 즈음 아이들이라면 꼭 읽기를요.
해피클라라 2024-09-24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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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만 봤을땐 달리기 잘하는 흑인 난민소년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난민`의 뜻을 확실하게 알게 해 준, 또한 우리나라의 과거와 많이 닮아있는 콩고라는 나라를 알게 해 준 유익한 책이었다. 욤비 가족이 콩고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길...
엘리자베스 2014-10-0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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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을 대하는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
수나기 2017-04-1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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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비 토나씨의 개인적인 난민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난민에 대한 특히 대한민국의 난민에 대한 이야기이다. 욤비씨 가족들 모두 대한민국의 난민으로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미리내 2013-09-1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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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처지에 처한 난민들을 보듬어안기는 커녕 이렇게 박대할 수 있는 건지... 읽는 내내 화나고 죄송스러웠다.
감기군만쉐 2014-06-2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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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리에 떠오른 책이 있었으니, 그것은 홍세화가 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다. 오래 전에 나와 많은 사람에게 읽힌 책. 우리나라와 프랑스를 비교한다기보다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프랑스로 망명한 홍세화의 삶 이야기에서 느낀 바가 많았다.
그만큼 우리나라도 민주화가 되기 전에는 탄압을 받고 이 땅에 살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도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독재시대만이 아니다. 6.25전쟁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남과 북에 남기를 거부하고 제3국을 선택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망명자들은 난민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살던 땅을 벗어난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간 사람들 이야기에는 공감하면서도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망명신청을 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여 난민으로 인정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난민 숫자도 많지 않고.
이 책을 읽어보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난민이 되면 자기 나라에서 누렸던 지위를 누리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최소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욤비 씨의 경우는 난민으로 인정받는데도 몇 년이 걸렸고, 그 동안에는 취업도 제대로 하지 못해,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박해를 받아 탈출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에 왔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소송을 해서 결국 난민 지위를 얻고, 가족들까지 우리나라에 오게 했지만, 이는 욤비 씨가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가 없다. 그는 우연히도 좋은 사람들, 또 법에 능통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욤비 씨와 같이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난민 심사에 통역관조차 제대로 배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또한 심사 기간 중에 거처할 장소나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없다면? 암담하다.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왔는데, 그 나라에서 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 차별이 겹친다면?
욤비 씨가 겪은 일 가운데 초반은 이런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는 무척 힘든 일을 겪었다. 다행히 큰부상을 당하지 않았고,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어서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욤비 씨의 경우가 특별한 경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다른 난민들을 위해 일을 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운이 아니라 자기 나라에서 탄압을 받아 살기 힘든 사람들은 당연히 난민 지위를 받아야 하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우리나라로 난민 신청을 해서 지금은 난민 지위를 얻고 난민으로 살아가는 욤비 씨.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한 순간부터는 자국 사람으로 인정하고 함께 살도록 해야 하지 않나.
비록 지구가 여러 국경으로 나뉘어 각 나라마다 일정한 벽이 있지만, 그 전에 우리는 인류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류다. 그러니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이동했을 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그 나라에서는 제공해야 한다. 억지로 막고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나라는 난민 인정에 인색하다. 그러나 난민에 대한 인식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세계의 일원이기 때문이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한때 이런 난민 생활을 겪은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욤비 씨는 다시 콩고로 가서 콩고의 민주화를 이루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우리나라에서 더 열심히 살아간다. 이 책에 나온 욤비 씨의 삶을 통해 난민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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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ye91 2022-04-06 공감(2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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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난민이?
부끄럽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과거에 보트 피플들이 우리 나라에 왔다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간혹 신문으로 접해보기는 했지만 욤비씨처럼 난민으로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게다가 난민이라는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이 자리를 빌어 욤비씨와 같이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두산백과 사전에서 난민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
난민의 일반적 의미는 생활이 곤궁한 국민,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곤궁에 빠진 이재민을 말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로 인종적, 사상적 원인과 관련된 정치적 이유에 의한 집단적 망명자를 난민이라 일컫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난민이 발생한 사례를 보면 러시아 혁명 기간에 약 150만의 난민이 러시아를 떠났고, 1934년 독일에 나치정권이 수립되자 반체제 인사들과 유대인을 비롯한 나치의 피해자 약 250만의 난민이 독일을 등지고 각지로 흩어졌다.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1947년 인도의 분열과 팔레스타인 분열,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1975년의 캄보디아와 라오스 및 베트남 등지에서 "보트 피플"로 유출된 인도차이나 난민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98년부터 시작된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군의 인종청소 때에는 78만에 달하는 주민이 학살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였다.
이러한 난민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출과 원조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난민이 발생하자 국제연맹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을 난민구제판무관으로 임명하여 외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신분증명서(난센여권)를 발급하였고, 1939년에는 국제연맹에 독일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를 두어 난민보호에 나섰다. 또 1946년 유엔은 산하에 국제난민기구를 설치하여 제2차 세계대전 때 피해를 당한 난민, 정치적 추방자의 보호와 구제를 행하여 난민을 자유의사에 따라 원하는 나라에 정주시키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그 역할이 끝나자 1951년에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를 설치하여 난민보호를 위한 유엔의 보조기관으로 삼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위에서 보듯이 난민 문제를 그 역사가 꽤나 오래 되었다. 물론 위에 기록된 난민은 현대적인 의미의 난민일 뿐이지, 역사상 난민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난민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 부분이 거의 무시되어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외국에서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에서 난민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한국에 욤비씨가 입국했다는 것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더군다나 그가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더 안타깝다. 그가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애를 썼던 이유가, 직장의 문제와 자녀 교육의 문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음이 더 짠하다.
도대체 왜 한국에서는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이렇게도 지난한 일일까? 특별히 정치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그들에게 난민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까다롭게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이유는 난민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게 마음이 더 아프다. 난민에 대해서 무관심한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보는 견해로는 크게 2가지가 아닐까 한다.
첫번째는 글로벌을 외치지만 우리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로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국어를 잘 배우기 전에 우리는 먼저 영어를 배우고, 일본어를 배우고, 중국어를 배우려고 애를 쓴다.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면 아이에게 수술까지 시키는 나라가 우리 나라다. 오렌지를 어린쥐로 발음해야 맞다고 하는 나라가 우리 나라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 수준은 아직 글로벌하지 않다. 우리의 사고 방식은 아직도 60년대 7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어떻게 잘 먹고 살 것인가, 어떻게 수출해서 4만불 시대를 이룰 것인가는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국제 사회 속에서 한국이 감당해야할 몫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정치인들은 오로지 경제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지, 국제 사회와의 공조에는 무관심하다. 온실가스 줄이기 위한 협약을 하면서 이산화가스를 입에 담는 대통령이 있던 나라가 우리 나라다. 그러다보니 아직 외국에서 원조를 받던 그 시절의 수준에서 한발도 못나가고 있다. 그러니 약자를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리가 없다. 의무와 권리는 함께 가는 것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배우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약자에 대한 책임, 더군다나 난민같은 최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을리가 없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오는 사람과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통역관을 넉넉하게 배치하지 못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둘째로 단일민족이라는 환상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살아왔다. 시험문제의 답에 단일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적던 것이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니,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그들이 오늘날 이 사회의 허리라는 것이 비극이겠지)이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난민은 우리가 보호해야할 약자가 아니라 단일함을 깨뜨리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가능하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런 껄끄러운 존재, 그것이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역설적이게도 욤비씨의 자녀들은 자신들을 한국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콩고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싶은 욤비씨에게 꽤나 씁쓸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난민에 대해서 무관심한 한국에서 욤비씨의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방법이 아니겠는가?
이 두가지는 결국 폐쇄성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사고의 폐쇄성, 구성원의 폐쇄성! 그러니 편가르기와 패거리 의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 싶다. 아직은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어렵지만 1~2년 정도 지나서 고학년이 되면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혀주면서 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기꺼이 감당하고 돌아보아야할 몫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이것이 난민들에게 시혜와 같은 불편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우리의 자녀들이 내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난민! 신문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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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8-02-01 공감(13)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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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난민 욤비 토나의 이야기이다. 그는 2002년에 콩고민주공화국을 탈출했고, 2008년 소송까지 가서 난민으로 인정 받았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웃길때 웃었고, 탈출할 때와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기나긴 시간에 손에 땀을 쥐었고, 그가 울었을 때 울었다. 그만큼 책이 생동감있게 서술되어 있고, 지루함 없이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책을 읽기 위해선 콩고민주공화국이 어떤 나라인지, 역사적 배경과 사전 지식이 좀 필요한데, 그만큼 알지 못하고 우리의 관심 밖에 있던 나라이다. 이 책에서 지적하던 데로, 미국, 중국, 일본, EU 같은 투자 교역국(역시 돈에 관심이 많은)이외의 나라의 국제 사회 소식은 무관심한데, 콩고민주공화국 역시 우리의 관심에 한참 벗어나 있다. 그 나라의 지도자 로랑 카빌라, 모부투 정도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모부투는 최장기 장기집권 독재자의 하나로 자주 언급되던 이전 대통령이고, 로랑 카빌라는 성공한 반정부 세력의 지도자로 이름 정도는 듣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얼마나 단편적인지. 그 이웃 나라인 콩고공화국 과도 헷갈릴 지경이니.
전반부는 저자 욤비 토나의 태어나서 자란 가정 환경과 고등 교육 받기까지 어려운 환경과 정보국에 들어가고, 가정을 꾸리고, 정치적 어려움에 휘둘리게 되고, 부정한 정권을 고발하게 되고, 이 때문에 자신의 나라에서 가족을 놔두고 혼자 탈출하는 한 편의 소설같은 이야기로 이루어 진다. 가난하고 먼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정도이다.
중반부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입국하고, 정착하고, 난민으로 인정받고 가족을 불러 들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난민으로 인정 받기 어려움과 그 긴 과정에 대해, 그 불합리함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데, 내용이 상당히 따끔하다.
후반부는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정착하는 이야기이다. 역시 예상한 대로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흑인으로서, 후진국 출신의 외국인이 더군다나 난민으로서 한국에서 생활하는데 정체성과 그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주변에 외국인 노동자들과 새터민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들이 겪는 또다른 어려움이 피부 깊숙이 느낄 수 있었다.
세계 수 많은 국가 사이에서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위치나, 주로 경쟁의 대상으로 삼는 OECD 국가들에서도 우리는 베푸는 쪽에선 후진국에 속한다. 내국민들의 인권이나 복지에서도 후한 편이 못되는데, 다른 나라 출신, 특히 후진국 출신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우리 자체에 대한 평가는 아주 저렴하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누렸던 대접보다, 우리가 지불하는 댓가는 아주 저렴하다. 그 이유는 그 나라는 우리에게 단순히 돈이 안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천민자본주의의 중심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주머니를 두둑히 채워주는 주제가 아니라면, 그 문제가 인권이 됐던,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가 됐던, 어려움을 피해 긴급피난 나온 난민이 됐던, 그 이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성숙하기도 전에 늙어 버린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배타적이고, 남에게 베푸는데 인색하다. 또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다고 희망이 아주 없는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난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몇몇이라도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큰 숙제를 던져 주는데, 그 해결책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책에선 나오지 않았지만, 욤비 토나 씨는 지금 광주대 기쵸교양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다. 가족들도 TV에 간간히 나와 소식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 지금도 열심히 살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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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준다 2017-02-0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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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은...... '내 이름은 욤비'
상술의 달인 화교가 아시아권에서 정착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이 있다. 동남아권에서 화교가 각 나라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과 비교해 보면 과히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이는 이민족에 대한 우리의 배타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화교 자체의 현금동원력과 GDP(국내총생산) 세계 2위의 중국을 모국으로 둔 그들이 이정도라면,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피부색 다른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받은 설움과 차별은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니 말이다.
인정하기 껄그럽지만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 우리는 그리 대해 왔다. 돈벌러 왔다며 우습게 여겼고 불법 취업이라며 의도적으로 홀대하거나 박대했다. 한때 우리도 달러를 벌고자 독일로, 베트남의 전쟁터로, 중동으로 나간 적이 있음을 잊은 것 같은 행태였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도 나라를 잃고 중국의 만주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하와이로, 일본으로 가지 않았던가. 설사 그런 아픔을 겪지 않았다해도 타인의 형편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텐데, 해도 너무했다.
이 책은 우리의 야박함을 몸으로 겪은 이방인 욤비 토나의 자서전이다. 욤비 토나는 자국인 콩고민주공화국의 정치적 박해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온 난민이다.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그가 우리나라에 오게 된 건 2002년이다. 연고라고는 중국에서 알게 된 이웃국 콩고인을 통해 주소지만 아는 실낱같은 인연뿐이었다. 조국을 탈출해 나왔으니 그에겐 동포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뼈까지 시려오는 고독과 두려움을, 그는 하루빨리 자리잡아 가족을 데려오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콩고에서 욤비 토나는 비록 작지만 왕가의 자손이었다. 국립대를 나와 콩고비밀정보국에서 일하던 엘리트였고, 정보국에서 일하면서부터는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내던 특권계층이었다. 그러던 중 임무 수행에서 알게된 정권의 비리를 야당에 전달하려다 발각돼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상황에서 탈출하게 된 것이다. 한국말도 못하는 그가 삭막하기 짝이 없는 이국의 도심에서, 그 막막한 순간들을 어떻게 헤쳐왔을지 가슴이 짠해진다.
욤비 토나는 불법체류자들이 거치는 모든 과정을 몸으로 겪었다. 인쇄, 사료, 직물공장을 비롯 각종 공장들을 전전했고, 숱하게 월급을 떼였으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들었고, 때론 일을 못한다며 맞기도 했다. 탈장으로 쓰러지기도 했고, 기계에 팔이 끼는 등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시간들을 보내야했다. 그럼에도 고된 일상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부치는 돈으로 가족이 생계를 꾸려간다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플 수도 없었고 아파서도 안되는 모진 시간 속에서도 그는 난민 신청을 꾸준히 했다. 일하다 말고 인터뷰하러 가느라 사장의 눈총도 받고 같이 일하는 공원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국에 온 이유가 이였기에 수십 차례라도 응해야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늘 불허처분이었고 나중엔 이의신청 또한 기각되었다. 마침내 그를 도와주던 난민센터의 한국인 친구가 콩고에 가서 심문기록을 비롯 관련 자료를 가져왔지만 난민 신청은 또 불허되었다. 마지막 법무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드디어 승소판결을 받아 2008년 2월 욤비 토나는 난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도 데려올 수 있었다. 어릴 때 헤어져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아빠지만 아이들은 반가워했다. 자랄 때 곁에 없던 아빠지만 자신들을 위해 애쓴 것을 안 것일까, 아이들은 착했고 한국에서도 잘 적응했다. 이곳에 올 때 셋이었던 아이는 이제 넷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보다 더 한국말을 잘 한다. 욤비 토나는 그간 난민구호단체와 인권운동단체, NGO 및 대학에서 난민과 관련된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이제 그는 한국에서 난민관련 전문가이다. 그의 이런 노력들이 인정을 받아 이번 학기부터는 광주대 자율융복합전공학부 조교수로 강단에 서게 되었다.
사진 출처: 동아일보
때론 '깜둥이', 때론 '새끼야'라며 인격적 모독을 당하고, 그럼에도 대꾸 한 번 못한채 참아야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분노하기보다 자신의 인격적 성숙을 위한 질료로 삼았고, 비록 떠나왔지만 언젠가 돌아가야 할 모국을 위한 배움의 시간으로 인식하고 달려왔다.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냐는 친구들에게 왜 난민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면 안 되며, 배움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느냐고 묻고 싶었던 그였다. 그런 그가 화교들도 정착하지 못했다는 이 땅에 보통 사람보다 몇 배의 어려움을 갖고도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욤비 토나의 발걸음은 이제 한 개인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작은 성취들은 이 땅에 거주하는 난민에게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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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Stranger 2013-09-1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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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과 싸우며 나라를 떠나다
푸른책과 함께 살기 102
독재정권과 싸우며 나라를 떠나다
― 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박진숙 글
이후 펴냄,2013.1.4./16500원
나는 언제부터 하늘 올려다보기를 좋아했을까 하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국민학교에 처음 들어가던 1982년에도 하늘을 즐겨 올려다보았고, 중학교에 들어가던 1988년과 군대에서 흰눈 멧자락 바라보던 1995년∼1997년에도 하늘을 즐겨 올려다보았습니다.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할 수 있는 너덧 살 아이였을 적에도 하늘을 즐겨 올려다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두어 살 아이였을 적에도 아장걸음 걸으면서 골목동네에서 하늘을 곧잘 올려다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어린 날, 충청남도에 있는 외가집에서 밤하늘 별을 쏟아질 듯 보았습니다. 외가집 형과 누나는 늘 보는 별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나는 저렇게 쏟아지는 별을 늘 보고 싶었습니다. 그무렵, 1980년대 첫머리에는 인천에서도 별을 제법 볼 수 있어, 이럭저럭 별자리를 그릴 만했지만,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별자리를 이야기하거나 달빛을 이야기하는 동무는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한낮에 소나기 쏴아 지나가고 찾아드는 무지개를 좇는다며 달리기를 하던 동무는 몇 없습니다. 소나기가 쏴아 지나갈 때면 소나기가 빠른지 내가 빠른지 땀 줄줄 흘리며 달리기를 했습니다. 언제나 소나기한테 따라잡히지만, 꼭 한 번,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비를 안 맞고 앞서 달린 적 있어요. 그날, 빗물에 안 젖은 몸으로 바라본 무지개는 몹시 싱그러웠습니다.
중학교라는 데에 들어가서 밤늦게까지 붙잡히느라 낮도 저녁도 모르던 하루에 시달리기 앞서까지, 국민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으레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한여름에는 뭉게구름과 소나기와 무지개, 이 세 가지는 내 벗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공장마다 굴뚝에서 끝없이 매연을 쏟아내지만, 그런 인천 하늘에서도 뭉게구름과 소나기와 무지개를 보았어요.
내 마음이 이들 세 벗, 뭉게구름과 소나기와 무지개를 바랐기 때문일까요. 나한테만 이들 세 벗이 보였을까요. 다른 학교동무나 동네 놀이동무는 이들 세 벗을 바라거나 생각하지 않았기에 뭉게구름도 소나기도 무지개도 얘기를 안 하며 어울렸을까요.
.. 콩고는 내전과 독재를 거치며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나는 초원과 정글을 뛰어다니는 철부지에 불과했다 … 밤늦게 기숙사로 들어가면 한 벌뿐인 티셔츠를 열심히 빠는 게 내 일과의 끝이었다. 그래도 거리낌이 없었다. 고향에서도, 기숙사에서도 금욕적인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 킨샤사 국립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 패인 갈등의 골은 깊었다. 킨샤사를 비롯한 도시 출신의 부유한 학생들과 나 같은 지방 출신 고학생 사이에는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 (19, 40쪽)
국민학교 3학년이던 1985년은 나로서는 열 살이 되는 나이입니다. 그해 인천에는 가을비가 어마어마하게 퍼부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서울 아닌 인천 이야기를 퍽 오랫동안 들려준 적은 그때 빼고는 거의 없었지 싶습니다. 이제는 아파트가 높직하게 들어선, 예전 인천 시외버스역에는 찰방찰방 물결치는 빗물에 잠긴 버스들이 수두룩했고, 시외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어른들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는데, 나는 동무하고 이 앞에서 ‘공짜 헤엄터 생겼다!’고 여기며 물장구 치고 놀았습니다. 빗물에 잠긴 버스 지붕에 올라타 앉은 버스 일꾼 멍한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물놀이를 그쳤어요.
그리고 이해 팔월이었나 구월이었나, 또는 칠월이었나, 아버지 사진기를 살짝 빌려서 구름 사진을 열 장 남짓 찍습니다. 모처럼 집에서 하늘바라기를 하며 놀다가, 저 하늘 어여쁜 구름을 먼먼 뒷날에는 못 볼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앞으로는 우리 나라가 더욱 지저분해지고 매캐한 바람이 불며, 이 어여쁜 구름은 내 마음속에만 남으리라 느낍니다.
좋은 사진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완전자동으로 찍는 사진기 단추를 찰칵찰칵 누릅니다. 아무튼 누르면 찍을 수 있는 사진기였어요. 이 구름도 예쁘니 찍고, 저 구름도 예쁘니 찍습니다. 5층짜리 나즈막한 아파트 4층집에서 구름을 올려다보며 한 장 두 장 찍습니다.
그러고서 스물아홉 해 지난 2013년 오늘, 참말 나는 어릴 적 보던 어여쁜 구름을 좀처럼 다시 보지 못합니다. 열 살 어린이가 인천 바닷가 공단 가까이에서 보던 구름조차, 고흥 시골마을에서도 잘 찾아볼 수 없어요.
.. 과거 로랑 카빌라는 모부투에 대항하는 세력을 모으면서 무력의 상당 부분을 콩고 인근의 르완다와 우간다에서 빌려 왔다. 그러면서 대통령궁에 입성하게 되면 콩고 영토 일부를 르완다와 우간다에 떼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분할을 약속한 지역은 각종 천연자원의 보고였다. 그곳을 떼어 준다는 것은 황금알 낳는 거위를 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로랑 카빌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르완다와 우간다 세력이 들고 일어난 게 그 유명한 제2차 콩고 내전(1998년∼2003년)이다. 4천 명에 이르는 투치족 군인들이 킨샤사 시내까지 침입해 들어오기도 했다 .. (67쪽)
늘 고흥 시골집에서 네 식구 오순도순 지내다가, 때때로 도시로 볼일을 보러 마실을 합니다. 인천에도 가고 부산에도 가며 순천에도 갑니다. 서울에도 가다가는 청주에도 갑니다. 크고작은 도시에 가는 길에 으레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가까운 시골인 장흥에 갈 적에도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고흥자락에서 돌아다닐 때에도 마을마다 어떤 하늘을 누릴 수 있는가 헤아리며 하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너무 마땅한 노릇인데, 어느 마을에서 바라보더라도 구름이 다릅니다. 구름빛이 다르고 구름무늬가 달라요. 햇살이 다르고 햇볕이 달라요. 바람이 다르고 바람내음이 다릅니다.
제아무리 자동차 북적거리며 시끌벅적한 서울이라 하더라도, 달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서울이나 부산 같은 데에서는 달빛이 스밀 틈 거의 없지만, 가녀린 달은 숱한 등불과 전깃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밉니다. 드높은 건물 사이에서 달을 찾을 때면 ‘이야, 반갑네.’ 하고 인사를 합니다. 손을 들어 달한테 ‘잘 있었니?’ 하고 말을 걸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달을 살짝 보고 더는 못 보기 일쑤입니다. 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이 건물에 가리고 저 건물에 막혀 안 보이거든요. 시골에서는 하염없이 걸어도 해하고 속닥속닥 이야기꽃 피울 수 있지만, 시골에서는 이 들길 저 멧길 걸어도 달이랑 도란도란 이야기잔치 벌일 수 있지만, 조그마한 도시에서마저 달하고 벗삼기는 꽤 힘듭니다.
도시사람은 달을 안 좋아할까요. 도시사람은 달이 안 반가울까요. 어쩌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달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지 몰라요. 도시살이란, 달하고 등지는 삶일는지 몰라요. 도시에서 돈벌이 하느라 바쁘고, 도시에서 일자리 지키느라 바쁩니다. 도시에서 자가용 모느라 바쁘고, 도시에서 자가용 댈 빈 구석 찾느라 바쁩니다. 도시사람은 달이고 별이고 해이고 무지개이고 구름이고 찾아볼 틈이 없어요.
.. 마리는 콩고민주공화국 옆에 있는 콩고공화국 사람이었다 … 외국인들이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공화국’을 헷갈리듯, 나 역시 ‘북한’과 ‘남한’을 헷갈렸던 것이다 … 마음에 입은 상처는 쉬 사라지지 않았다. 상처를 치유할 힘이 모두 바닥나 버린 것 같았다. 모멸감 섞인 시선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늘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으로 일하고 생활했다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아프리카 노동자’ 아니면 그냥 ‘깜둥이’일 뿐이었다 .. (87, 100, 190, 200쪽)
아침이면 파르스름한 빛이 살며시 걷히며 노르스름한 하늘이 열리고 이내 불그스름한 햇덩이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나 또한 이 새 아침을, 이 새 햇살을, 도시에서는 거의 못 느꼈어요. 다만, 어릴 적 인천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는 날마다 보기는 했어요. 나는 국민학생 때에도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나 학교로 걸어갔어요. 중·고등학생 때에는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학교로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갔어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삶터를 옮겨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니고 그만두기까지 신문배달을 하며 아침해를 봅니다. 대학교 그만두고 신문배달을 잇는 내내 으레 아침해를 봅니다. 신문배달은 그만두고 출판사 일꾼으로 들어갈 적에도 새벽 일찍 일터로 가는 버릇을 이으며 언제나 아침해를 봅니다.
구름이 짙게 끼어 해가 보이지 않더라도 해가 뜰 자리를 바라봅니다. 햇살 기운이 어떻게 스미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부는가를 눈을 감고 살갗으로 느껴 봅니다. 하늘이 밝게 열리며 내 눈자위를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느낌을 즐깁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어디에서나 어떤 건물에 깃들어 일을 해야 하니, 어느새 해를 잊고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잊어요. 사무실에서는, 또 지하상가나 지하철에서는, 낮도 밤도 잊습니다. 네 식구 함께 고즈넉한 고흥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살아가면서 바야흐로 새벽·아침·낮·저녁·밤이 흐르는 결을 살핍니다. 먼저 내 몸으로 받아들이고 내 마음으로 아로새깁니다.
.. 침대에 누워 서울이 콩고의 정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빌딩과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정글 말이다 … 한국 사람들은 왜 자기들 좋은 문화를 외국인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나중에 나이지리아 친구를 만났을 때 들었던 얘기가 정답인지도 모른다. “한국 공장에서 바뀌지 않는 게 있어. 한국 사람은 무조건 왕이야. 그 다음이 조선족이고, 그 다음이 필리핀이나 베트남에서 온 사람들이지. 아프리카? 아프리카 사람은 사람도 아니야.” 내 경험에서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한국 공장의 카스트 제도는 국적에 따라, 피부색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했다 .. (109, 155쪽)
집안에 텔레비전을 안 들이고, 신문을 끊은 지 열 해가 넘는 우리 집에서는, 사회 흐르는 이야기를 거의 모릅니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들을 값이 없고 알아야 할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어느 정치꾼이 어떤 말을 했건,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터졌든, 우리 삶하고는 참으로 동떨어집니다. 수출이 얼마요 새 대통령이 누구요 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습니다. 주식시세표나 연예인 뒷이야기를 왜 들어야 할까요.
우리 식구한테는, 올겨울에도 우리 집 마당 한켠 동백나무에서 몇 송이쯤 일찌감치 피어날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언제부터 봄꽃을 논둑과 밭둑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올봄에는 제비가 몇 월 몇 일에 처마 밑으로 돌아와서 반가운 인사를 건넬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큰아이는 얼마나 씩씩하게 뛰놀고, 작은아이는 얼마나 말문을 환하게 틀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그런데, 2013년 1월 겨울 한복판에 한국땅 크고작은 도시에 ‘스모그’가 덮쳤다고 하는군요. 1월 한복판에 청주로 마실을 와서 밥집에서 밥 한 그릇 먹다가 옆에 놓인 신문을 문득 바라보니 1쪽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어요. 중금속 잔뜩 머금은 스모그라 하는데, 도시사람은 어른도 아이도 모두 이런 바람을 마시며 살아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흥에서 청주로 오는 동안, 어둑어둑 뿌연 밤하늘이었지만, 하늘이 꽤 칙칙했어요. 왜 하늘이 이토록 뿌옇거나 칙칙하지 하고 고개를 갸웃했어요. 달이 어슴푸레 보이기는 하지만, 흐리멍덩한 빛이었어요. 그렇구나, 스모그로구나.
그나저나, 도시사람 가운데 스모그 낀 하늘이 얼마나 아슬아슬하며 끔찍한가를 살갗으로 느낄 사람이 있을까요. 스모그가 왜 생기는 줄 알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스모그 끼는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거나 즐거운가를 돌아볼 사람이 있을까요.
.. 콩고에서 받은 경제학 석사 학위와 정보요원 경력 따위는 한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면 남은 선택지는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뿐이었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해야 하는 그런 삶을,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난민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면 안 되는가? 왜 난민은 배움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가 .. (280쪽)
욤비 토나·박진숙, 두 분이 일군 이야기책 《내 이름은 욤비》(이후,2013)를 읽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그만 한국(남한)이라는 나라로 ‘정치 망명’을 해야 했다던 욤비 토나라고 하는 아저씨가, 한국에서 겪은 일을 찬찬히 되새기는 이야기책입니다. 망명은커녕 이주노동자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슬프고 힘겹게 살아야 하던 나날을 담은 이야기책입니다.
책을 다 읽고 한참 생각에 잠깁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도 지난날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피울음 뱉으며 이 나라 떠난 사람이 퍽 많습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도 지난날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다친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아니, 어떤 이들은 벌건 대낮에 총을 맞아 죽었어요. 어떤 이들은 훤한 대낮에 몽둥이를 맞아 죽었어요.
2013년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일까요. 한 해가 더 흐르면 자유 물결이 넘실거린다 말할 수 있을까요. 한 해 새로 찾아오면 평화 날갯짓 춤출 만할까요. 한 해 새삼스레 찾아들면 평등 꽃노래 흐드러질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민주요, 자유요, 평화요, 평등인지, 참말 잘 모르겠습니다. 도시 길가에도 뿌리를 내려 작은 잎사귀 틔우는 들풀 한 자락 사랑스레 쓰다듬을 겨를 없는 이 나라 수많은 사람들 가슴에 민주나 자유나 평화나 평등 같은 이야기가 얼마나 뿌리내린 채 춤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며 흐느껴 울거나 동무들을 따돌리거나 괴롭히느라 바쁜,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은 얼마나 민주와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아끼거나 보살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이름은 욤비》를 쓴 욤비 토나 아저씨는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하루’를 보낸다 하는데, 곰곰이 따지면, 한국사람 가운데 고향 살뜰히 지키거나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고향을 잊거나 등지거나 모르거나 빼앗긴 채, 돈을 버느라 힘들고 일자리 지키느라 버거우며 아이들을 대학교 보내느라 등골 휘는 쳇바퀴 삶 아닌지, 참말 잘 모르겠습니다. 4346.1.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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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1-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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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도 난민이었다
제주도 예맨 난민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는데 이 책은 필독서로 모든 국민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욤비씨야 방송에도 많이 나와서 잘 알고 있지만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왕족이지만 가난했다는 걸, 대학교 때 우연히 교수님의 지원으로 정보국요원으로 취직했다는 점, 마음속 불의에 대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고문을 받았다는 점 등 모두 새로운 내용이었다.
그의 아이들이 요즘 유투브 방송을 하던대 너무 밝게 자라서 다행이다. 한국말도 너무 잘해서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외모 때문에 차별받아서 너무 안타깝다. 무식한 건 죄가 아니지만 알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은 죄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차별금지법이 제정될까? 근본적인 차별에 대한 인식 개선 없이는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으로 남을 것이다.
역지사지라는 말을 왜 실천을 못하는 것인지?
고 김대중 대통령, 안중근, 김구, 안창호, 윤봉길 등도 모두 한때 난민이었다. 한국의 장유유서 등 좋은 문화들을 왜 외국인에게까지(특히 난민, 소수자 등) 적용한다면 정말 품격있는 나라가 될텐데....
제발 난민을 무턱대고 색안경끼고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다른 선진국처럼 난민인정 비율이 적어도 30%는 되야하지 않을까? 공무원 수도 좀 늘리고 난민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실시하자.
국내 거주 난민 가운대 1/4에 해당하는 24.4%가 심리적 불안과 답답함을 겪고 있다. <난민인권센터> [난민을 위한 심리 상담 및 실태 조사]
한국의 난민 제도나 난민에 대한 대우는 유럽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한국 전체가 그런 건 아니었다. (201쪽)
영종도 난민 지원 센터는 행정 편의상 발상. 진정 난민의 사회적 통합을 원한다면 난민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좀 더 면밀한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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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제비 2018-07-1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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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가난이 아닌 용감한 사람, 욤비>_내 이름은 욤비_욤비 토나, 박진숙
[국가가 더이상 보호하지 않는 사람들]
국가가 더이상 보호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무엇일까? 바로 난민이다. 굳이 난민의 개념을 언급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 난민은 가난한 사람, 경제적인 도움이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민들이 난민이 된 상황과 배경을 이렇게만 인식하는 건 지극히 단편적이고 부분적면이 강조된 시각이다. 나 역시 이러한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 이름은 욤비'라는 책을 만나기 전까지 줄곧 그랬다.
내 이름은 욤비의 저자 욤비 토나는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난민이다. 그의 삶과 그 궤적을 보고 있으면 난민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잘못돼 있는지 느껴진다. 욤비씨는 콩코민주공화국의 보호는 커녕 억압을 받고 그것을 피해 쫓기듯 콩고를 떠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한 사람이다. 오직 콩고의 민주화와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신념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은 고된 핍박과 탄압을 일삼았다. 그는 살기 위해 그렇게 조국을 떠나올 수 밖에 없었다.
[용감한 한 시민이 치르기엔 너무나 가혹한 대가]
욤비 토나는 조국을 위해 용기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두 번에 걸친 콩고 정보부 내의 비밀감옥에 투옥되는 것이었다. 모진 고문과 배후 자백을 강요받는 상황속에서도 그는 조국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있었다. 대통령에게 충언이 담긴 비밀밀서를 전하려했다며 끌려간 1차 투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와 반란군 사이에 수면아래의 모종 거래의 전말을 야당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2차 투옥 되었다. 또 다시 투옥 될 위험을 인지하고서도 그는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비밀 거래의 전말을 대통령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혹여 대통령이 알고서도 진행하려는 것이라면 야당쪽에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은 모든 대비나 계책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투옥과 고문의 두려움, 가족이 느낄 위험과 공포, 소리소문없이 제거 될 수도 있는 상황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일어난 행동이다. 그것은 조국의 미래와 발전을 위한 순수한 의분 같은 것이었다. 내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한다는 마음. 그는 콩고 키토나 왕국의 왕자이면서, 콩고 정보국 내의 요원으로서 충분히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왕자로서의 정체성 그득권으로서의 안주 그런 건 없었다.
2차 투옥 후 욤비의 신변에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그의 친구들과 정보국 동료들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탈출을 감행했다. 그에게 남은 선택은 조국 콩고를 쫓기듯 떠나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욤비씨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떠날 때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 여행의 끝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2002년 7월 콩고를 떠나 중국을 거쳐 그해 한국에 들어왔다. 콩고대사관으로부터 쫒기는 신세이기에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 자체도 무척 어려웠지만 그 이후 사료공장과 직물 공장 등을 전전하며 난민이자 외국인노동자로서의 차별과 시선을 모두 겪어야 했다. 그가 난민으로 인정되기 까지는 무려 6년이란 시간이 소요됐고 가족들도 고스란히 그 인고의 시간을 견더내야만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나라에서 욤비씨 같이 누구하나 옳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콩고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나라이다. 이를 증명이라도하듯 그는 여전히 그의 나라로 돌아갈 수 없다.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하나로 한 개인이 행한 용감한 행동의 결과와 대가가 너무 끔찍할 정도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콩고로 돌아가는 순간 살아남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난민이다. 국가가 보호하지 않는. 그러나 그는 결코 가난하거나 부끄러운 삶을 산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도 하기힘든 용감한 일을 한 사람이다.
[그의 간절한 꿈, 콩고로 돌아가는 것]
욤비 토나는 2019년 현재까지 그는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키토나 왕국의 왕자로 출생. 킨샤사 대학 경제학과 졸업, 콩고 민주공화국 정보국 근무. 2차에 걸친 감옥 투옥. 콩고 탈출. 2002년 한국입국, 난민 허가 신청중인 외국인 노동자신분으로 체류. 2008년 난민인정, 그리고 가족들의 입국 허가. 2013년 대학교수.
욤비 토나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고 있으면 결코 평범한 한 개인의 삶 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다. 2019년 현재 그는 광주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상태이며 한국으로 들어온 부인과 세자녀 그리고 한국에서 얻은 두자녀까지 더해 7명의 가족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 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조국으로 돌아가는 미래를 그린다. 한국에서 겪었던 알듯 모를듯한 차별(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이 느낄 문제성과 별개로)과 문화적 이질성이 주된 이유는 아니다. 그는 바로 콩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로서의 그리고 기득권으로서의 정체성은 벗어던진지 오래지만 조국 콩고인이란 정체성은 그를 더욱 더 조국을 꿈꾸게 만든다.
난민이라는, 외국인 노동자라는, 흑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으로 욤비 토나씨를 생각해 보자. 그는 가난한 사람인가? 한국에 눌러앉아 우리의 지원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인가? 그는 우리가 무시해도 되는 사람인가?
난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좁고 단순한 의미의 개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난민이 우리와 거리가 먼 개념이 아니며, 우리도 난민이 될 가능성에서 배제 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불과 70여년 전까지 20세기 전반부 내내 난민 발생국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를 전전하던 독립투사들, 일제의 탄압앞에 정상적인 삶을 영외할 수 없었던 사람들,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해 망명했던 망명가들, 우리민족의 비극이자 참극인 6.25전쟁으로 생겨난 피난민들. 이들 모두가 난민이다. 이들을 모두 가난한 사람 혹은 구호, 모금등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치부 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6.25의 진짜참극은 우리가 그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행방 된 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위험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도 어느 한순간 난민이 될 수 있다. 인생은 누구도 믿기 힘든 장난같지만 그런 장난 같은 일들이 곧잘 일어나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 난민을 도와 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의 인식에 오해와 편견은 없는지 우리가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이다. 욤비씨의 삶은 그 자신에게는 지독한 고난과 역경이 많은 삶이지만 그의 삶이 그의 경험들이 우리에게는 소중한 성찰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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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토민 2019-08-3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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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별 점수는 정확하게 별4개반. 반점은 줄수가 없어서 5개로 했다.
이 책의 장점
1. 특별한 배경지식이 필요하지 않아, 일반인은 물론 중고등학생이 읽어도 가능하다.
2.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인해 지루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3. 보통 사람들에게 생소한 난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재미와 정보(혹은 교훈)를 둘 다 갖춘 책은 드문데, 그걸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주인공의 극적인 삶 외에도 그 주변사람의 희생이 인상적이었다. 미사어구없이 서술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감동을 주었다. 어떤 취향인지 별로 고려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 줄 수 있을 만한 책이다. 이후의 이야기가 인간극장을 통해 방송되어서, 그것까지 보면 재미가 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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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2013-12-2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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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내 이름은 욤비
잼남. 티비에서 라비남매들 매력에 매료돼서 빌려 읽었는데 재밌게 읽어서 하나 구매함. 지은이가 외국인인데 번역이 완벽에 가까운 우리말로 돼있어서 읽기가 편함. 주인공의 경우 난민으로 들어와 불법체류 노동자에서 지금은 인권교수까지 되어 굉장이 운이 좋은 난민인 편이다. 제일 마지막장에서 그는 다시는 자신처럼 운 좋은 난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사회가 운이 좋은 난민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 가진 권리를 편안히 누리며 살 수 있는 건강한 사회로 발전하길 희망한다는 말이다.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 부분이 굉장히 인상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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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짱47 2016-04-0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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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름은 욤비를 읽고나서..
'내 이름은 욤비'를 읽고 나서 처음 알게 되었다. 한국에도 난민이 있다는 사실을.
티비에서나 보았던 주로 공장에서 일하는 제 3국의 노동자들이 자국으로부터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한국에 난민 신청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저 불법 체류자라고만
생각했고, 악덕 공장주를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 거라고 알고 있었다.
읽는 동안 공장에서 적절한 안전장비 하나 없이 위험한 작업을 하며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산업재해 피해보상 한 푼 받지 못한 채 본국으로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것을 다룬 TV 프로그램들로 인하여 막연하게 나마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며, 보기 안쓰럽다고 동정을 할 뿐이었다.
욤비 토나, 그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정부요원으로 있었던 엘리트였지만 정부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야당에 전달하려다 정치사범으로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콩고를 탈출하여 한국으로 건너온 남자이다.
늘 머리를 쓰는 일을 하며, 대학교육까지 받은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한국에서 난민신청을 하여
통과되기까지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그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난민신청을 기다리는 동안 가족들은 콩고에서 허름한 건물에 숨어 지내며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난민 신청이 통과되어 다시 만나게 된 재회의 순간에 그들이 느꼈을 감정은 그동안의 고생을
잊게 해줄 만큼 감동적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욤비가 되었다. 때로는 부당하게 대접받는 것에 화가 나기도 하고 가족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 늘 걱정과 불안속에 살았으며, 언제쯤 힘든 시기가 지나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져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까 그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장시간 이어진 고된 육체 노동으로 온 몸이 쑤셨고,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로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졌다.
그래도 한국에서 만난 좋은 친구들과 끝까지 힘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도와준 친구들이 있기에
버틸 수 있었으며 마침내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졌고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현재 우리 나리의 난민 시스템이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현실과 맞지 않는지 알 수
있었으며 여전히 고통 받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너무 앞만 보고 정신 없이 달려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걸음을 늦추고 주위를 둘러 보아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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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yLee 2016-11-0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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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왕자' 조나단 한국 귀화 결정 "난민 받아준 한국에 보은"
202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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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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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출신으로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출연해 유명해진 '콩고 왕자' 욤비 토나(55) 씨의 둘째 아들 조나단(21)이 한국 귀화를 결정했다.
조나단은 26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최근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늘 마음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 재작년부터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말했다.
귀화를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조국에서 보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8살에 한국에 오게 됐는데 조국 대신 가족들을 받아주고 보호해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간극장'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정말 많은 관심을 받았다"면서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루라도 감사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가 국민이 돼서 사회의 일원으로 보은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다짐이 귀화 결정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조나단은 입대 결심도 밝혔다.
그는 "고등학교 때는 놀리듯 친구들이 '나단이 군대 안 가냐'고 했지만 이제 친구들이 진짜 입대하고 휴가 나오더니 '나라는 우리가 지킬 테니 나단이는 군대 가지 마'라며 진심으로 생각해주더라. 그 말이 한국과 나의 친구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감동으로 다가와 반대로 제가 친구들과 한국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나단은 현재 귀화 서류를 준비 중이다. 귀화가 확정되고 주민등록증이 나오기까지는 짧게는 1년, 길게는 1년 반 이상 걸리고 시험도 쳐야 한다.
조나단은 "저에게 한국은 삶의 터전 그 이상의 의미"라며 응원을 부탁했다.
조나단의 아버지 욤비 토나 씨는 콩고민주공화국 내 부족국가 왕자 출신이다. 토나 씨는 2002년 한국으로 들어왔고, 2008년 재판을 통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토나 씨의 둘째 아들인 조나단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이며 유튜브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YTN digital 최가영 (weeping07@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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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brain177.com/jonathan-brother-rabi-story
조나단 친형 라비 근황, 그냥 논란인 줄만 알면 정말 후회할 겁니다
연예소식16일 전조회 27
요즘 TV만 틀면 나오는 조나단, 워낙 유쾌하고 한국말도 잘해서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문득 예전에 인간극장에서 봤던 그의 가족들, 특히 형 라비는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솔직히 그냥 잘 지내겠거니, 아니면 형도 유튜버 활동했었다니 방송 쪽 일 하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죠. 근데 이거 모르고 지나갔으면 정말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습니다. 우리가 알던 그 '콩고 왕자' 형제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었거든요.
저처럼 그냥 '조나단 형도 있었지' 정도로만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오늘 이야기에 아마 많이 놀라실 겁니다. 저도 자료를 찾아보면서 '아니, 이게 정말이라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단순한 가십거리를 넘어, 한 가족의 비극과 우리 사회가 생각해 볼 문제까지 담겨있는 이야기, 지금부터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조나단 친형, '라비'는 원래 누구였을까?
많은 분들이 조나단을 먼저 떠올리시지만, 사실 미디어에 먼저 얼굴을 알리고 '콩고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건 조나단 친형 라비였어요.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옛날 '인간극장' 영상을 다시 찾아봤는데, 그때 그 시절의 라비는 정말 총명하고 똘똘한 아이 그 자체였더라고요.
인간극장 시절의 '콩고 왕자'
2013년에 방송된 KBS '인간극장' 5부작 '굿모닝, 미스터 욤비' 편을 기억하시나요? 당시 욤비 가족은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난민으로 한국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어요. 아버지가 콩고의 작은 부족 국가 '키토나'의 왕자였지만,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오게 된 사연이 소개되었죠. 이 방송에서 유창한 한국어로 동생들을 챙기고, 아버지의 든든한 아들 역할을 하던 라비의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솔직히 그때 방송 보면서 '어린 나이에 타국 와서 적응하느라 힘들 텐데 참 대견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조나단보다 더 유명했던 형
지금이야 '방송 천재' 조나단의 시대지만, 그때만 해도 인지도는 형 라비가 압도적이었습니다. 방송에 나온 이후 라비는 '콩고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여러 매체와 인터뷰도 하고,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어요. 조나단은 그저 말썽꾸러기 동생 이미지였죠. 라비는 똑 부러지는 말투와 어른스러운 태도로 가족을 대표하는 얼굴마담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셈입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팬들과 소통하기도 했었는데, 갑자기 활동을 중단해서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었죠. 그게 바로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가족의 한국 정착 스토리
그들의 아버지가 한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5년 만에 가족들이 한국으로 오게 되는 과정은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았어요. 낯선 땅에서 난민으로 정착하며 겪는 어려움, 문화적 차이,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가족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죠. 라비는 그런 가족의 구심점 같은 존재였어요. 동생들을 돌보고,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며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터진 사건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아요. 그 밝고 건강해 보였던 청년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조나단 친형 라비 근황, 그냥 논란인 줄만 알면 정말 후회할 겁니다
모든 것을 바꾼 그 사건의 전말
그렇게 대중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가던 라비의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정말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였습니다. '콩고 왕자'라는 타이틀 대신 '특수강도 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말이죠. 저도 처음엔 동명이인인 줄 알았어요. 설마 인간극장에 나왔던 그 라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특수강도 혐의, 도대체 무슨 일?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라비는 2019년에 7명의 일당과 함께 조건만남을 미끼로 남성들을 유인한 뒤, 폭행하고 금품을 빼앗은 혐의(특수강도)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채팅 앱을 통해 '조건만남'을 할 것처럼 남성을 모텔로 유인한 후, 약속 장소에 나타난 남성을 집단으로 폭행하고 수백만 원을 빼앗았다고 해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죠. 솔직히 범죄의 죄질이 너무 나빠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조건만남을 미끼로 한 범죄 수법
범죄 수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치밀하고 악랄했습니다. 10대 여학생을 내세워 남성들을 유인하고, 약속 장소에 피해자가 나타나면 다 같이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었어요. 피해자들은 성매매를 하려 했다는 약점 때문에 신고조차 꺼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악용한 거죠. 라비는 이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긍정의 아이콘이었던 청년이 어쩌다 이런 범죄에 연루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지만, 범죄 자체의 심각성 때문에 동정의 여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법원의 판결과 징역 4년
결국 라비는 특수강도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원심이 유지되었고, 대법원에서 형이 최종 확정되었어요. 재판부는 범행 수법이 매우 불량하고, 피해자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점을 양형 이유로 밝혔습니다. 징역 4년이라는 실형은 결코 가볍지 않은 처벌이죠. 이 판결로 인해 라비는 천안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고, '콩고 왕자'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배경에 대한 추측들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나면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죠.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방송 출연으로 인지도까지 있었던 그가 왜 이런 극단적인 범죄의 길로 빠져들었을까요? 물론 어떤 이유로도 범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탈선의 시작점
주변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라비의 탈선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으로 얻은 인지도와 관심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많아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유명세, 그리고 '콩고 왕자'라는 이미지에 대한 부담감이 컸을 거라는 추측이죠.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에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범죄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실제로 조나단도 형이 졸업 후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언급한 바 있거든요.
주변 환경의 영향은 없었을까?
솔직히 환경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난민 가정이라는 특수한 배경, 한국 사회에 완벽히 녹아들기까지 겪었을 보이지 않는 차별과 어려움도 있었을 겁니다. 겉으로는 밝고 유쾌해 보였지만, 내면에는 남들이 모르는 상처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다른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성장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모든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선택이니까요.
난민으로서 겪었을 심리적 압박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난민으로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심리적 압박입니다. 콩고인도, 그렇다고 완전한 한국인도 아닌 경계인으로서의 삶. 특히 청소년기에 이런 정체성 혼란은 더 크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쉽고 빠른 길, 즉 범죄의 유혹에 빠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성공한 난민'의 모습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좌절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동생 조나단의 반응과 대처
형의 범죄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은 아마 동생 조나단이었을 겁니다. 당시 조나단은 조금씩 방송 활동을 넓혀가며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던 시점이었거든요. 형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정말 끔찍한 상황에 놓인 셈이죠.
충격과 침묵, 그리고 공식 사과문
처음 MBN에서 관련 보도가 나왔을 때, 조나단은 한동안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아마 엄청난 충격과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비난의 화살은 조나단에게로 향했습니다. '형이 저런 짓을 했는데 동생은 방송에 나오냐'는 식의 악플이 쏟아졌죠. 결국 조나단은 자신의 SNS를 통해 장문의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조나단의 사과 전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콩고 왕자' 조나단 한국 귀화 결정 "난민 받아준 한국에 보은"
202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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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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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출신으로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출연해 유명해진 '콩고 왕자' 욤비 토나(55) 씨의 둘째 아들 조나단(21)이 한국 귀화를 결정했다.
조나단은 26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최근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늘 마음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 재작년부터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말했다.
귀화를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조국에서 보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8살에 한국에 오게 됐는데 조국 대신 가족들을 받아주고 보호해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간극장'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정말 많은 관심을 받았다"면서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루라도 감사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가 국민이 돼서 사회의 일원으로 보은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다짐이 귀화 결정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조나단은 입대 결심도 밝혔다.
그는 "고등학교 때는 놀리듯 친구들이 '나단이 군대 안 가냐'고 했지만 이제 친구들이 진짜 입대하고 휴가 나오더니 '나라는 우리가 지킬 테니 나단이는 군대 가지 마'라며 진심으로 생각해주더라. 그 말이 한국과 나의 친구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감동으로 다가와 반대로 제가 친구들과 한국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나단은 현재 귀화 서류를 준비 중이다. 귀화가 확정되고 주민등록증이 나오기까지는 짧게는 1년, 길게는 1년 반 이상 걸리고 시험도 쳐야 한다.
조나단은 "저에게 한국은 삶의 터전 그 이상의 의미"라며 응원을 부탁했다.
조나단의 아버지 욤비 토나 씨는 콩고민주공화국 내 부족국가 왕자 출신이다. 토나 씨는 2002년 한국으로 들어왔고, 2008년 재판을 통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토나 씨의 둘째 아들인 조나단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이며 유튜브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YTN digital 최가영 (weeping07@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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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brain177.com/jonathan-brother-rabi-story
조나단 친형 라비 근황, 그냥 논란인 줄만 알면 정말 후회할 겁니다
연예소식16일 전조회 27

요즘 TV만 틀면 나오는 조나단, 워낙 유쾌하고 한국말도 잘해서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문득 예전에 인간극장에서 봤던 그의 가족들, 특히 형 라비는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솔직히 그냥 잘 지내겠거니, 아니면 형도 유튜버 활동했었다니 방송 쪽 일 하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죠. 근데 이거 모르고 지나갔으면 정말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습니다. 우리가 알던 그 '콩고 왕자' 형제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었거든요.
저처럼 그냥 '조나단 형도 있었지' 정도로만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오늘 이야기에 아마 많이 놀라실 겁니다. 저도 자료를 찾아보면서 '아니, 이게 정말이라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단순한 가십거리를 넘어, 한 가족의 비극과 우리 사회가 생각해 볼 문제까지 담겨있는 이야기, 지금부터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조나단 친형, '라비'는 원래 누구였을까?
많은 분들이 조나단을 먼저 떠올리시지만, 사실 미디어에 먼저 얼굴을 알리고 '콩고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건 조나단 친형 라비였어요.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옛날 '인간극장' 영상을 다시 찾아봤는데, 그때 그 시절의 라비는 정말 총명하고 똘똘한 아이 그 자체였더라고요.
인간극장 시절의 '콩고 왕자'
2013년에 방송된 KBS '인간극장' 5부작 '굿모닝, 미스터 욤비' 편을 기억하시나요? 당시 욤비 가족은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난민으로 한국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어요. 아버지가 콩고의 작은 부족 국가 '키토나'의 왕자였지만,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오게 된 사연이 소개되었죠. 이 방송에서 유창한 한국어로 동생들을 챙기고, 아버지의 든든한 아들 역할을 하던 라비의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솔직히 그때 방송 보면서 '어린 나이에 타국 와서 적응하느라 힘들 텐데 참 대견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조나단보다 더 유명했던 형
지금이야 '방송 천재' 조나단의 시대지만, 그때만 해도 인지도는 형 라비가 압도적이었습니다. 방송에 나온 이후 라비는 '콩고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여러 매체와 인터뷰도 하고,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어요. 조나단은 그저 말썽꾸러기 동생 이미지였죠. 라비는 똑 부러지는 말투와 어른스러운 태도로 가족을 대표하는 얼굴마담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셈입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팬들과 소통하기도 했었는데, 갑자기 활동을 중단해서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었죠. 그게 바로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가족의 한국 정착 스토리
그들의 아버지가 한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5년 만에 가족들이 한국으로 오게 되는 과정은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았어요. 낯선 땅에서 난민으로 정착하며 겪는 어려움, 문화적 차이,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가족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죠. 라비는 그런 가족의 구심점 같은 존재였어요. 동생들을 돌보고,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며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터진 사건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아요. 그 밝고 건강해 보였던 청년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조나단 친형 라비 근황, 그냥 논란인 줄만 알면 정말 후회할 겁니다모든 것을 바꾼 그 사건의 전말
그렇게 대중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가던 라비의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정말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였습니다. '콩고 왕자'라는 타이틀 대신 '특수강도 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말이죠. 저도 처음엔 동명이인인 줄 알았어요. 설마 인간극장에 나왔던 그 라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특수강도 혐의, 도대체 무슨 일?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라비는 2019년에 7명의 일당과 함께 조건만남을 미끼로 남성들을 유인한 뒤, 폭행하고 금품을 빼앗은 혐의(특수강도)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채팅 앱을 통해 '조건만남'을 할 것처럼 남성을 모텔로 유인한 후, 약속 장소에 나타난 남성을 집단으로 폭행하고 수백만 원을 빼앗았다고 해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죠. 솔직히 범죄의 죄질이 너무 나빠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조건만남을 미끼로 한 범죄 수법
범죄 수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치밀하고 악랄했습니다. 10대 여학생을 내세워 남성들을 유인하고, 약속 장소에 피해자가 나타나면 다 같이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었어요. 피해자들은 성매매를 하려 했다는 약점 때문에 신고조차 꺼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악용한 거죠. 라비는 이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긍정의 아이콘이었던 청년이 어쩌다 이런 범죄에 연루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지만, 범죄 자체의 심각성 때문에 동정의 여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법원의 판결과 징역 4년
결국 라비는 특수강도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원심이 유지되었고, 대법원에서 형이 최종 확정되었어요. 재판부는 범행 수법이 매우 불량하고, 피해자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점을 양형 이유로 밝혔습니다. 징역 4년이라는 실형은 결코 가볍지 않은 처벌이죠. 이 판결로 인해 라비는 천안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고, '콩고 왕자'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배경에 대한 추측들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나면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죠.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방송 출연으로 인지도까지 있었던 그가 왜 이런 극단적인 범죄의 길로 빠져들었을까요? 물론 어떤 이유로도 범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탈선의 시작점
주변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라비의 탈선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으로 얻은 인지도와 관심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많아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유명세, 그리고 '콩고 왕자'라는 이미지에 대한 부담감이 컸을 거라는 추측이죠.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에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범죄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실제로 조나단도 형이 졸업 후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언급한 바 있거든요.
주변 환경의 영향은 없었을까?
솔직히 환경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난민 가정이라는 특수한 배경, 한국 사회에 완벽히 녹아들기까지 겪었을 보이지 않는 차별과 어려움도 있었을 겁니다. 겉으로는 밝고 유쾌해 보였지만, 내면에는 남들이 모르는 상처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다른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성장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모든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선택이니까요.
난민으로서 겪었을 심리적 압박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난민으로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심리적 압박입니다. 콩고인도, 그렇다고 완전한 한국인도 아닌 경계인으로서의 삶. 특히 청소년기에 이런 정체성 혼란은 더 크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쉽고 빠른 길, 즉 범죄의 유혹에 빠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성공한 난민'의 모습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좌절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동생 조나단의 반응과 대처
형의 범죄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은 아마 동생 조나단이었을 겁니다. 당시 조나단은 조금씩 방송 활동을 넓혀가며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던 시점이었거든요. 형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정말 끔찍한 상황에 놓인 셈이죠.
충격과 침묵, 그리고 공식 사과문
처음 MBN에서 관련 보도가 나왔을 때, 조나단은 한동안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아마 엄청난 충격과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비난의 화살은 조나단에게로 향했습니다. '형이 저런 짓을 했는데 동생은 방송에 나오냐'는 식의 악플이 쏟아졌죠. 결국 조나단은 자신의 SNS를 통해 장문의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조나단의 사과 전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조나단의 사과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형의 잘못을 감싸거나 변명하지 않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형의 잘못은 어떠한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형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과 슬픔, 그리고 배신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죠.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감싸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의 연좌제, 조나단이 짊어진 무게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연좌제' 문제를 여실히 보여줬어요. 범죄를 저지른 것은 형 라비인데, 비난과 책임은 고스란히 동생 조나단에게 전가되는 분위기였죠. '가족이면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 '인성이 똑같을 것이다'라는 식의 무분별한 비난은 명백한 2차 가해였습니다. 조나단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 대중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고, '범죄자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를 평생 안고 가야 할지도 모르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사과문을 보면서 정말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 조나단 공식 유튜브 채널 바로가기
그래서, 조나단 친형 라비의 최근 근황은?
많은 분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일 겁니다.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갔던 라비,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이미 출소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추방당했다는 소문도 무성하더라고요. 제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한 내용을 정리해 드릴게요.
출소 시점과 이후 행방
라비는 2019년에 구속되었으니, 4년의 형기를 채우고 2023년에 만기 출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소 이후의 행방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요. 조나단을 비롯한 가족들도 형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출소 후에도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나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입니다.
추방 가능성과 법적 절차
이 부분은 법적인 쟁점이 좀 있습니다. 대한민국 법에 따르면, 외국인이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석방되면 강제 추방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라비는 징역 4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강제 추방 대상에 해당되죠. 하지만 라비는 단순한 외국인이 아니라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상태입니다. 난민의 경우, 본국으로 돌아가면 박해를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강제 추방을 쉽게 결정할 수 없다고 해요. 아마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라비의 범죄 심각성과 난민 지위 유지 여부 등을 다시 보면 심사하여 추방 여부를 결정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그 결과가 외부에 공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온라인에 떠도는 근황 루머 팩트체크
온라인 커뮤니티나 유튜브 댓글을 보면 라비의 근황에 대한 여러 '썰'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미 추방당해서 콩고에 있다더라', '이름 바꾸고 조용히 한국에서 살고 있다더라' 등등. 하지만 대부분은 명확한 근거가 없는 추측성 루머일 뿐입니다. 한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라비가 이미 한국을 떠났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이것 역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에요. 현재로서는 '2023년 출소했으며, 이후 행보는 불분명하다'가 가장 정확한 팩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
단순히 한 개인의 범죄 사건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이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콩고 왕자'의 추락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비추는 거울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난민 인정과 사회적 책임
욤비 가족의 사례는 우리 사회가 난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국 사회에 건강하게 정착하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특히 청소년기에 한국에 온 난민 2세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이나 교육 문제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죠.
미디어 노출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
라비는 어린 나이에 '인간극장'을 통해 유명해졌습니다.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는 그에게 '콩고 왕자'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주었지만, 동시에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족쇄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과도한 관심과 기대감, 그리고 그 이미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청소년기의 그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까요? 이 사건은 준비되지 않은 청소년을 미디어에 노출시키는 것의 위험성과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범죄자 가족에 대한 2차 가해
앞서 언급했듯, 이 사건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지점 중 하나는 조나단을 향한 무분별한 2차 가해였습니다. 형의 잘못이 왜 동생의 책임이 되어야 할까요? '가족이니까'라는 논리는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범죄는 범죄자 개인이 책임지고 처벌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활동에 제약을 받는 것은 명백한 연좌제이며, 또 다른 인권 침해일 수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 같아요.
앞으로 조나단과 그의 가족은 어떻게 될까?
이제 라비의 이야기는 과거가 되었고, 남은 가족들은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조나단은 이 모든 풍파를 겪고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죠. 앞으로 그의 활동과 가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조심스럽게 전망해 봅니다.
조나단의 방송 활동 전망
다행히 조나단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그 이후의 성실한 방송 활동을 통해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 성숙하고 단단해졌다는 평가도 받아요. 특유의 유쾌함과 지적인 매력으로 이제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로 자리 잡았죠. 아마 앞으로도 조나단은 지금처럼 꾸준히 활동하며 시청자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믿습니다. 형의 과오는 평생의 짐이 되겠지만, 그 짐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내길 응원하게 되네요.
가족을 향한 응원과 비판 사이
욤비 가족을 향한 시선은 앞으로도 응원과 비판이 공존할 겁니다. 큰아들의 잘못은 분명 뼈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은 가족들까지 모두 죄인 취급을 해서는 안 되겠죠. 특히 어린 여동생들이 상처받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아버지 욤비 씨 역시 한국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 만큼, 가족 전체를 매도하기보다는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인 생각 정리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다시금 깨닫게 됐어요. 라비가 저지른 범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남은 사람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부디 조나단과 그의 가족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꿋꿋하게 한국에서의 삶을 이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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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친형 라비 사기범죄에 사과 "마땅히 벌 받아야"김지원
기사승인 : 2021-05-14 16:45:52
방송인 조나단이 친형 라비의 조건만남 사기 범행에 대해 사과했다.
▲ 조나단 [조나단 SNS]지난 13일 조나단은 자신의 SNS에 장문의 글을 게재했다. 그는 "제 입장을 말씀을 드리기 위해 글을 작성하게 됐다"라며 "최초 보도가 된 이후, 자세한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고 다급한 마음에 입장을 표현했다가 오히려 실수를 하게 될까 봐 많이 두려웠다"라고 밝혔다.
이어 "2018년 말부터 형이 재학 중이던 학교에 형의 출석 문제와 몇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한국말이 서투르신 어머니를 대신해 여러 번 방문했었고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동생이지만 형에게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정신 차리고 학교생활에 충실하게 임할 것에 대해 권유하고 또 강하게 타일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후 형의 방황은 더 심해졌고, 급기야 집에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 많아지게 됐다"라며 "졸업 이후 연락이 되지 않기 시작했다. 급기야 가족의 연락을 차단하며 연락을 끊어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몇 달이 지나 경찰서를 통해 형이 구속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했다.
그는 "사건 해결을 위해 상황을 파악할수록 제가 형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다르게 죄목이 계속 추가되고 있었고 상황들을 확인하며 처음 듣게 된 사건들에도 연루돼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도 말했다.
이어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분의 도움을 통해 우리 가족들이 이곳에서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감사한지를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라며 "형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도 없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마땅하게 벌을 받아야 하며 이 사건으로 인한 어떠한 처벌과 조치에 대해서도 무조건 수용할 것"이라고 썼다.
글 말미에 그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형의 이름이 제가 하는 활동이나 콘텐츠에서 언급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형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더 깊은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며 받은 것들을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매사에 노력하며 솔선수범하며 살아가겠다"라고 전했다. "저 조나단을 응원해 주셨던 많은 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라고 사과했다.
조나단의 친형 라비는 지난 1월 조건만남을 미끼로 수천만 원을 빼앗은 혐의로 덜미를 잡혔다. 라비는 10대 여학생과의 조건 만남을 하려는 남성을 유인한 뒤 자동차로 도주로를 막고 폭행·협박한 것으로 밝혀졌다. 7회 범행을 저지른 라비가 빼앗은 돈은 2000여만 원에 이른다. 법원은 라비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해 현재 복역 중이다.
형 라비의 이같은 혐의에 방송, 유튜브 등을 통해 얼굴을 비췄던 조나단 역시 곤욕을 치렀다.
KPI뉴스 / 김지원 기자 kjw@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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