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 조세이
도다 조세이 戸田城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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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도다 조가이 |
| 출생 | 1900년 2월 11일 |
| 사망 | 1958년 4월 2일(58세) |
| 성별 | 남성 |
| 국적 | 일본 |
| 경력 | 창가학회 제2대 회장 |
| 소속 | 창가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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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 조세이(일본어: 戸田城聖, 1900년 2월 11일 ~ 1958년 4월 2일)는 창가학회의 제2대 회장이다. 본명은 도다 조가이(戶田城外).
생애
홋카이도에서 교사 생활을 보내고 도쿄로 상경해 교사로 생활하던중 교육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 이후 1928년에 스승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함께 니치렌 불법에 입신. 당시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자신의 교육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편린의 메모를 해왔는데 그 양이 상당하였고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그것을 하나의 논문으로 발간하고 싶었으나, 원고자체가 종이가 부족한 시절에 쪽지, 이면지 등에 작성해 왔기에 편집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에 제자 도다 조세이가 스승의 원을 실현하고자 직접 원고를 편집하고, 자비로 '창가교육학체계'를 발간한다. 창가교육학체계 발간일인 1930년 11월 18일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교육자를 중심으로 창가교육학회를 설립하였다.
1930년 창가교육학회는 '대선생활'실험증명 좌담회를 실시 한다. 일반 가정집에 모여 각자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철학을 실천한 후 그것의 현실에서의 체험을 서로 교류하는 회합이었고 현재 SGI의 좌담회의 시초가 된다. '대선생활'이란 크게 선을 베푸는 것을 말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니치렌 불법을 믿게 하여 행복하게 인도(절복) 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했다.
1942년 6월일본 제국주의 국가신도 체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국민 총동원과 더불어 사상통일정책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려한다. 이 여파는 창가교육학회에도 미치게 된다.
국가의 탄압에 일련종 승려측은 신도단체인 창가학교육학회측에 신찰을 받으라고 강요했지만 창가교육학회 초대회장 마키쿠치 쓰네사부로는 그 자리에서 단호히 거부하였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회장은 "신찰을 받는것은 한 종파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국가가 망하는 길이다"라며 신찰을 거부하고 일련종으로부터 등산 및 참배 거부 징계를 받는다.
그 이후 군부정부 특별고등경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마키쿠치와, 도다 조세이를 비롯한 창가교육학회는 니치렌 불법의 정의를 주장하며 좌담회를 계속했고 1943년 7월에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후 군국주의 정부의 일방적 불평등 취조와 불합리한 재판으로 계속 감옥생활을 했으며 검사의 취조가 있을 때 조차도 니치렌 불법의 정의를 굽히지 않았다. 계속되는 취조와 부실한 영양, 노쇠한 체력으로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회장은 1944년 11월 18일 감옥에서 순교했다. 나중에 도다 조세이는 이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1943년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이사장 도다 조세이가 구속될 당시 21명의 간부들도 같이 감옥에 가지만, 모두 신앙을 포기하고 석방된다. 오직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도다 조세이 두 명만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다 조세이는 1944년 1월부터 법화경 독파를 결심하고 그 해 봄무렵 불가사의한 옥중 오달을 하고 난해한 법화경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후 한번 더 불가사의한 체험을 통해 생애동안 이루어야 할 사명을 자각했다.
1945년 7월3일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즈음 도다 조세이 혼자 살아서 출옥하였고 창가학회 재건에 온 정열을 쏟는다. 본인이 옥중에서 깨달은 법화경 강의를 시작했는데 거듭되는 강의를 하는 도중 1947년 8월에 운명의 제자 이케다 다이사쿠를 만난다.
이후 이케다 다이사쿠를 훈도하며 제2대 창가학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취임식에서 약속한 75만세대 포교의 위업을 달성한다.
1957년 9월 8일에는 창가학회의 평화 운동에 관한 원리를 명시한 지구민족주의의 이념과 원수폭금지선언을 제창하였다. 1958년 3월 다이세키사에 대객전 낙경식을 계기로 광선유포 후계의 기념식을 3월16일에 치르고 1958년 4월 2일에 58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같이 보기
戸田城聖
戸田城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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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肩書き | 第2代 創価学会会長 |
| 個人情報 | |
| 生誕 | 1900年2月11日 |
| 死没 | 1958年4月2日(58歳没) |
| 配偶者 | 戸田幾枝 |
| 出身校 | 中央大学経済学部中退[1] |
| 地位 | |
| 就任日 | 1951年5月3日 |
| 退任理由 | 在職中に死去 |
| 過去の地位 | 初代 創価学会理事長 |
戸田 城聖(とだ じょうせい、1900年〈明治33年〉2月11日 - 1958年〈昭和33年〉4月2日)は、日本の宗教家、教育家、実業家、数学者。
創価教育学会理事長(初代)、創価学会会長(第2代)、法華講総講頭などを歴任した。
出生名は、戸田 甚一(とだ じんいち)。数度の改名を経て「城聖(じょうせい)」と名乗る。戒名は、大宣院法護日城大居士。
略歴

- 1900年(明治33年)2月11日 - 石川県江沼郡塩屋村(現:加賀市塩屋)に、北前船の仲買商の父「甚七」と母「すえ」の七男「甚一」として誕生。
- 1902年(明治35年) - 一家で北海道厚田郡厚田村へ移住。
- 1908年(明治41年) - 厚田尋常小学校に入学する。
- 1917年(大正6年)
- 1918年(大正7年)
- 1920年(大正9年) - 上京、牧口常三郎を訪ねる[2][信頼性要検証]。開成中学夜間部(のちの昌平高校)に入学する。
- 1921年(大正10年) - 「博方」と改名。入所前に「城外」と改名。戦前は「城外」で通す。戦後「城聖」と改名。
- 1925年(大正14年) - 中央大学予科入学。
- 1928年(昭和3年) - 牧口が日蓮正宗の法華講員三谷六郎(素啓)に折伏されると、戸田も牧口とともに日蓮正宗に入信した。中央大学経済学部入学。
- 1930年(昭和5年) - 牧口が創価教育学体系を著す。
- 1943年(昭和18年)
- 1945年(昭和20年)7月 - 豊多摩刑務所(後の中野刑務所)から[2][信頼性要検証]出所したという説もあるが、戸田自筆の書簡に「拘置所を出所しました」とある[4]ので、巣鴨の東京拘置所から出所した。
- 1946年(昭和21年)5月3日 - 創価教育学会の名を創価学会に改称。
- 1949年(昭和24年) - 東京建設信用組合を設立。
- 1950年(昭和25年) - 東京建設信用組合が多額の負債を抱えたため、大蔵省から業務停止を命じられる。
- 1951年(昭和26年) - 創価学会第2代会長に就任する。
- 1952年(昭和27年)9月8日 - 創価学会が宗教法人化される。
- 1953年(昭和28年) - 東京都新宿区信濃町にあった元イタリア大使館武官邸を購入し、創価学会本部とする。
- 1958年(昭和33年)4月2日 - 急性心不全により、駿河台日本大学病院で死去。58歳没。
- 1999年(平成11年)12月1日 - 厚田村(現石狩市厚田区)議会より、厚田村栄誉村民授与。
来歴
教員として
教職者として戸田は現場教育に必要なものをまとめ上げ、文部大臣に建白書を提出する。20歳の時に上京。牧口常三郎に出会い、東京市立西町尋常小学校の代用教員として採用された。その後、一時期は教職を退き職を転々とする傍ら、院外団に身を投じ、犬養毅の側近であった立憲政友会所属の衆議院議員古島一雄の知遇を得る。
入信と事業経営
妻子を病気で失い、自らも肺結核を患う中、日蓮正宗信徒になった牧口常三郎の折伏によって戸田も入信。前後して、受験準備のための学習塾「時習学館」を主宰[5]、学習参考書の走りともいえる『推理式指導算術』を出版する。『推理式指導算術』は評判を呼び、100万部を超えるベストセラーとなった。当時の受験生からは「受験の神様」と呼ばれる。
これをきっかけにして本格的に出版事業に乗り出し、「日本正学館」を設立。牧口の教育理論である『創価教育学体系』や、同郷の作家子母澤寛の小説などの出版を手がける。この『創価教育学体系』の初版が発刊された1930年(昭和5年)11月18日を創価教育学会の設立日としている。なお、牧口の著作は「創価教育学会」が出版した。戸田は出版業以外に金融業や証券業にも乗り出し、事業家として一定の成功を収める。1940年(昭和15年)の第2回総会で正式に創価教育学会理事長に就任し、学会の活動を主に財政面で支えた。
1943年6月、牧口とともに日蓮正宗総本山大石寺に呼ばれた戸田らは、第62世管長・鈴木日恭と堀日亨同席の下、庶務部長から「学会も一応、神札を受取けるようにしてはどうか」と申し渡されたがこれを拒絶する(「神札問題」)[6][信頼性要検証]。その後、創価教育学会は登山を禁止された。宗教統制策に反対したことで7月に戸田、牧口をふくむ幹部21名が検挙[7]。


(東京都新宿区左門町)
創価学会インタナショナル(SGI)の本部が置かれている。
創価学会会長に就任
終戦後、戸田は日本正学館の通信教育と出版事業に取り組む傍ら、創価教育学会を「創価学会」に改め、組織整備を開始する。前身の創価教育学会は牧口の創価教育学を中心とした教職員による集まりであったのに対し、創価学会は日蓮正宗の信仰を中心に据え広く一般人を受け入れたため、会員数は増大した。
しかし、事業経営における戦前の主力だった算術書が学習指導要領の全面改正で無意味なものになり、事態打開のために参入した雑誌も売れ行きが低迷するなど、経営は悪化。1949年(昭和24年)10月、日本正学館は倒産する。戸田は東京建設信用組合を設立し営業を始めるが、多額の負債があるために今度は大蔵省から営業停止の命令を受け、破綻。1950年(昭和25年)8月24日、戸田は、創価学会理事長を辞任する。同年10月、大蔵商事(現:日章)を設立し、顧問に就任。
1951年(昭和26年)5月3日、東京・向島の常泉寺で式典を開き、後の大石寺65世法主堀米日淳臨席の下、第2代創価学会会長に就任する。
創価学会会長として
戸田は、事業家としての経験をもとに創価学会の運営を行った。戸田は就任演説において、7年間で75万世帯を折伏することを目標に掲げ、大規模な布教運動を行った[8]。しかし、強引な勧誘方法は各地で社会問題化した[5]。
日本全国に創価学会の組織を整備し、創価学会の政治進出を正当化する理論を説き、これは後の公明党の基盤となった[9]。戸田会長時代に雑誌『大白蓮華』や機関紙『聖教新聞』が創刊された。1954年(昭和29年)には国会や地方議会の選挙に学会員を出馬させ、政治進出を果たした。また、日蓮正宗の外護という創価学会本来の目的を果たすべく、大石寺への大講堂の建立・寄贈などを行った。宗門とは、第59世管長堀日亨、第63世管長秋山日満、第64世管長水谷日昇、第65世管長堀米日淳、第66世管長細井日達(会長在任当時は庶務部長・総監、戸田の没後に登座)らと良好な関係を築き、とりわけ第65世日淳とは縁が深かった。
酒好きで[10]、しばしば酒を飲んで酔っぱらいながら説法をしていた[11]。仏教には不飲酒戒があるが、日蓮系教団の教義では問題にならない(末法無戒)。
御本尊の書写に関しては、「ただ御本尊の真似はしてはいけませんよ。 御本尊を書くことは法主様以外にはできないんだから。 それでこれをやると罰が出る。 御本尊を書いた者でろくな死に方をした者はいない。これだけは危ないからやるなよ。」と指導している[12]。また、和光社刊の『戸田城聖全集』には、「だからご法主猊下だけが、御本尊様をしたためることのできる仏様なのです。」とある[13]。しかし、聖教新聞社刊の『戸田城聖全集』では、「だから御法主上人だけが、御本尊様をしたためることのできる方なのです。」となっている[14]。
大阪事件
1957年(昭和32年)、参議院大阪府選挙区の補欠選挙をめぐって、青年部参謀室長池田大作と一部の学会員が選挙違反事件を起こす(大阪事件)。戸別訪問と買収の容疑で、青年部参謀室長池田大作、理事長小泉隆の最高幹部を含め、数十人が逮捕・起訴された。公判では創価学会最高幹部による指示の有無、証拠採用された自白の信用性が争われた。池田と小泉は無罪判決を得たが、2人以外の会員には有罪判決が下され、池田も拘留段階で戸別訪問と買収容疑を認め自白し署名したことから無罪判決を得るまで5年近い年月がかかっている。戸田は両幹部の無実を信じ擁護したものの、違反を犯した会員に対しては起訴後、即除名などの厳しい処分を下した[15][信頼性要検証]。
原水爆禁止宣言
1957年(昭和32年)9月8日、神奈川県横浜市神奈川区の三ツ沢競技場において開催された創価学会第4回東日本青年部体育大会「若人の祭典」において、いわゆる「原水爆禁止宣言」を発表する。
創価学会第4回東日本青年部体育大会「若人の祭典」(横浜市・三ツ沢グラウンド)で発表した。この宣言がマスメディアなどで報道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が、戸田はこの宣言を遺訓として会員たちに託し、以後、創価学会が行っている、第二次世界大戦体験者の証言を集めて出版する「反戦出版」や、パネル展の巡回などの反核運動、反戦平和運動活動の淵源となる[要出典]。
大講堂竣工と突然の死
1958年(昭和33年)に入ると、寄進していた大講堂が竣工するのを受けて学会員に大石寺へ参詣するよう指示。3月16日には、大講堂で「広宣流布の模擬試験」を行う。青年部員6,000人が参加[注釈 1]、学会では「記念式典」と呼ばれている。戸田は広宣流布の一切の後事を青年部全体に託した。しかし、この式典をもって戸田の後継となる学会会長候補者を具体的に指名していない[16]。このため戸田の死後、2年間にわたって会長は空席となる。
翌月4月1日に急性心不全を起こし、大石寺を離れて東京に向かうが、東京駅に着くころには戸田の体調は悪化の一途を辿っていた[17]。東京駅から駿河台日本大学病院に直行し緊急入院したものの、翌4月2日の午後6時30分、死去。58歳没。学会では死因を「急性心衰弱」と発表した。戸田の遺言通り戸田の遺体は一週間何もされないままだったが、遺体が腐ることはなかった。4月8日、東京・南池袋の常在寺で営まれた告別式には、12万人が焼香に訪れた。4月20日、青山葬儀所で営まれた葬儀には25万人が参列した[18]。
役職歴
著作・論文
- 『生命論』(『大白蓮華』創刊号、1949年6月)
- 『日蓮大聖人御書十大部講義』 1-4 創価学会、1953年 - 1955年
- 『人間革命』 上下2巻(精文館書店、1957年7月
- 『方便品寿量品精解 : 日蓮正宗』精文館書店、1958年3月13日。NDLJP:2971244。(編:多田省吾)
- 『戸田城聖先生巻頭言集』創価学会、1960年5月3日。NDLJP:2978775。
- 『戸田城聖先生論文集』創価学会、1960年8月23日。NDLJP:2978776。
- 『戸田城聖先生講演集 上』創価学会、1961年5月3日。NDLJP:2978773。
- 『戸田城聖先生講演集 下』創価学会、1961年10月12日。NDLJP:2978774。
- 『戸田城聖先生質問会集』創価学会、1963年。
- 『戸田城聖全集』
- 『戸田城聖全集』 全5巻(1965年 - 1966年、和光社)
- 『戸田城聖全集』 全9巻(1981年 - 1990年、聖教新聞社)
参考文献
戸田城聖を演じた人物
脚注
注釈
出典
- 『評伝 戸田城聖 上』
- 小説『人間革命』より
- 池田大作著『人間革命』第11巻 204-205頁
- 戸田城聖『若き日の手記・獄中記』青娥書房, 178-181頁, 1971 (戸田城聖著, 加清蘭編『信仰への覚悟 人間革命の原形』青娥書房, 164-167頁, 2021)
- しまね・きよし『社会学大事典14巻』p.86-「とだじょうせい 戸田城聖」1970年
- 池田大作著『人間革命』第11巻 204-205頁
- https://kotobank.jp/word/%E5%89%B5%E4%BE%A1%E5%AD%A6%E4%BC%9A-89159
- 島田裕巳著『神サマのつごう 終末のフィールドワーク』(1992年、法藏館) ISBN 978-4831871992
- しまね・きよし『社会学大事典12巻』p.70-「そうかがっかい 創価学会」1970年
- 映画「人間革命」で再現場面あり
- 【中田考の近未来、世界はこうなる!講座 第2回】【対談】中田考×島田裕巳 未来の宗教はどうなるのか? これから世界はどうなるのか? - Ohta Collective 太田コレクティブ
- 『戸田城聖先生の教え』の中の可延定業書講義の後の質問会
- 和光社『戸田城聖全集』第四巻 28頁
- 聖教新聞社『戸田城聖全集』第二巻 37頁
- 池田大作著『人間革命』第11巻
- 和光社『戸田城聖全集』第二巻 580-583頁・聖教新聞社『戸田城聖全集』第四巻 595-599頁
- 池田大作筆「随筆・人間世紀の光 128 桜花の『4・2』に恩師を思う」(聖教新聞 2007年4月1日付)[信頼性要検証]
- 『大白蓮華』 2010年4月号 28頁 「会長就任50周年記念企画 永遠に師と勝利を共に」[信頼性要検証]
- 創価学会初代会長らの墓 79基荒らされる 骨ツボまであばく 集団の犯行無残に倒壊『朝日新聞』1970年(昭和45年)1月19日朝刊 12版 15面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 創価学会公式サイト:第二代会長 戸田城聖
- ある教祖さまの死(戸田城聖葬儀の様子)1958年(昭和33年)4月23日 - 日本映画新社(朝日ニュース)の映像。
- 30万人のお葬式(戸田城聖葬儀の様子)1958年(昭和33年)4月20日 - 中日映画社(中日ニュース)の映像。
- 戸田城外著『中等學校入學試驗の話と愛兒の優等化』
도다성 성
도다성 성 | |
|---|---|
![]() | |
| 직함 | 제2대 창가학회 회장 |
| 개인정보 | |
| 탄생 | 1900년 2월 11일 |
| 사망 | 1958년 4월 2일 (58세) |
| 배우자 | 도다 다리 |
| 출신 학교 | 중앙대학 경제학부 중퇴 [ 1 ] |
| 지위 | |
| 취임일 | 1951년 5월 3일 |
| 퇴임 이유 | 재직 중 사망 |
| 과거의 지위 | 초대 창가학회 이사장 |
도다 성성 (토다 조세이, 1900년 < 메이지 33년> 2월 11일 - 1958년 < 쇼와 33년> 4월 2일 )은 일본 종교가 , 교육가 , 실업가 , 수학자.
창가교육학회 이사장(초대), 창가학회 회장(제2대), 호화 강총강두 등을 역임했다.
출생명은 도다 진이치 (토다 진이치). 몇 번의 개명을 거쳐 '성세이'라고 자칭한다. 계명은 대선원 법호 히로시로 대거사.
약력

- 1900년 ( 메이지 33년) 2월 11일 - 이시카와현 에 누마군 시오야 무라 (현: 카가시 시오야)에, 키타마에선 의 중매상의 아버지 “진칠”과 어머니 “수에”의 칠남 “진이치”로서 탄생.
- 1902년 (메이지 35년) - 일가에서 홋카이도 아쓰다군 아쓰다무라 로 이주.
- 1908년 (메이지 41년) - 아쓰다 심상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 1917년 ( 다이쇼 6년)
- 1918년 (다이쇼 7년)
- 1920년 (다이쇼 9년) - 상경, 마키구치 토모사부로 를 방문한다 [ 2 ] [ 신뢰성 요 검증 ]. 개성 중학교 야간부(나중의 창평고등학교 )에 입학한다.
- 1921년 (다이쇼 10년) - '박방'으로 개명. 입소 전에 「성외」라고 개명. 전전은 「성외」로 통과한다. 전후 「성성」이라고 개명.
- 1925년 (타이쇼 14년) - 중앙대학 예과 입학.
- 1928년 ( 쇼와 3년) - 마키구치가 니치렌 마사무네 의 호화 강원 미타니 로쿠로(소계)에 절복되자 도다도 마키구치와 함께 니치렌 마사무네에 입신했다. 중앙대학 경제학부 입학.
- 1930년 (쇼와 5년) - 마키구치가 창가교육학 체계를 두드린다.
- 1943년 (쇼와 18년)
- 1945년 (쇼와 20년) 7월 - 토요타마 감옥 (후의 나카노 감옥)에서 [ 2 ] [ 신뢰성 요 검증 ]출소했다는 설도 있지만, 도다 자필의 서한에 「구치소를 출소했습니다」라고 있다 [ 4 ] 때문에, 스가모의 도쿄 구치소 에서 출소했다.
- 1946년 (쇼와 21년) 5월 3일 - 창가 교육 학회 의 이름을 창가 학회 로 개칭.
- 1949년 (쇼와 24년) - 도쿄 건설 신용 조합을 설립.
- 1950년 (쇼와 25년) - 도쿄 건설 신용조합이 다액의 부채를 안고 있기 때문에, 대장성 으로부터 업무 정지를 명할 수 있다.
- 1951년 (쇼와 26년) - 창가학회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한다.
- 1952년 (쇼와 27년) 9월 8일 - 창가학회가 종교법인화 된다.
- 1953년 (쇼와 28년) -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쵸 에 있던 전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 저택을 구입하여 창가학회 본부로 한다.
- 1958년 (쇼와 33년) 4월 2일 - 급성 심부전 에 의해, 스루가다이 일본 대학 병원 에서 사망. 58세몰.
- 1999년 (헤세이 11년) 12월 1일 - 아쓰다무라 (현 이시카리시 아쓰다구) 의회로부터, 아쓰다무라 영예촌민 수여.
내력
교사로서
교직자로서 토다는 현장교육에 필요한 것을 정리하고 문부대신 에게 건백서를 제출한다. 20세 때 상경. 마키구치 소조로 를 만나 도쿄 시립 니시 마치 심상 초등학교 의 대용 교원으로서 채용되었다. 그 후, 일시기는 교직을 물리치고 직을 전전하는 옆, 원외단 에 몸을 던져, 개양인 의 측근이었던 입헌정우회 소속의 중의원 의원 후루시마 이치오 의 지우를 얻는다.
입신 및 사업 경영
처자를 병으로 잃고, 스스로도 폐결핵 을 앓고 있는 가운데, 니치렌 마사무네 신도가 된 마키구치 토모사부로 의 절복 에 의해 토다도 입신. 전후로, 수험 준비를 위한 학습학원 「시습학관」을 주재 [ 5 ] , 학습 참고서 의 주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추리식 지도 산술」을 출판한다. 『추리식 지도 산술』은 평판을 불러 100만부를 넘는 베스트셀러 가 되었다. 당시의 수험생에게서는 「수험의 하나님」이라고 불린다.
이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출판 사업에 나서 「일본정학관」을 설립. 목구의 교육이론인 '창가교육학체계'나 동향의 작가 자 모자와 히로시 의 소설 등의 출판을 다룬다. 이 『창가교육학체계』의 초판이 발간된 1930년 (쇼와 5년) 11월 18일 을 창가교육학회 의 설립일로 하고 있다. 또한 마키구치의 저작은 '창가교육학회'가 출판했다. 도다는 출판업 이외에 금융업 이나 증권업 에도 나서 사업가로서 일정한 성공을 거둔다. 1940년 (쇼와 15년)의 제2회 총회에서 정식으로 창가교육학회 이사장에 취임해, 학회의 활동을 주로 재정면에서 지지했다.
1943년 6월, 마키구치와 함께 니치렌 마사무네 소모토야마 오이시 지에 불린 토다 등은 제62세관장 스즈키 닛쿄 와 호리 닛 테이 동석 아래 서무부장으로부터 「학회도 일단, 신찰 을 받을 수 있게 해서는 어떨지」라고 신고되었지만 [ 신뢰성 요 검증 ]. 그 후, 창가교육학회는 등산을 금지되었다. 종교통제책에 반대한 것으로 7월에 도다, 마키구치를 포함하는 간부 21명이 검거 [ 7 ] .


( 도쿄도 신주쿠구 사토 몬초 )
창가학회 인터내셔널 (SGI)의 본부가 놓여 있다.
창가학회 회장으로 취임
종전 후, 도다는 일본 정학관의 통신 교육과 출판 사업에 임하는 가운데, 창가 교육 학회를 「창가 학회」로 바꾸어 조직 정비를 개시한다. 전신의 창가교육학회는 목구치의 창가교육학을 중심으로 한 교직원에 의한 모임이었는데, 창가학회는 니치렌 마사무네 의 신앙을 중심으로 넓게 일반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회원수는 증대했다.
그러나 사업 경영에 있어서의 전전의 주력이었던 산술서가 학습 지도 요령 의 전면 개정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사태 타개를 위해서 참가한 잡지도 판매가 침체하는 등, 경영은 악화. 1949년 (쇼와 24년) 10월, 일본 정학관은 도산 한다. 도다는 도쿄 건설 신용조합을 설립해 영업을 시작하지만, 다액의 부채가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대장성 으로부터 영업 정지의 명령을 받아 파탄. 1950년 (쇼와 25년) 8월 24일, 도다는, 창가학회 이사장을 사임한다. 같은 해 10월, 오쿠라 상사(현: 일장 )를 설립해, 고문에 취임.
1951년 (쇼와 26년) 5월 3일 , 도쿄· 무카이지마 의 상천사 에서 식전을 열고, 후의 오이시지 65세법주 호리 미일순 임석하, 제2대 창가 학회 회장에 취임한다.
창가학회 회장으로
도다는 사업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가학회를 운영했다. 도다는 취임연설에서 7년간 75만 가구를 절복 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고 대규모 포교운동을 했다 [ 8 ] . 그러나 강한 권유 방법은 각지에서 사회 문제화되었다 [ 5 ] .
일본 전국에 창가학회의 조직을 정비하고, 창가학회의 정치진출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설교하였고, 이것은 나중의 공명당의 기반이 되었다 [ 9 ] . 도다 회장 시절에 잡지 ' 대백련화 '와 기관지 ' 성교신문 '이 창간되었다. 1954년 (쇼와 29년)에는 국회 나 지방의회 의 선거에 학회원을 출마시켜 정치 진출을 완수했다. 또, 니치렌 마사무네의 외호라는 창가학회 본래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오이시지에의 대강당 의 건립·기증 등을 실시했다. 종문이란, 제59세관장호리 히토미, 제63세관장 아키야마 닛만, 제64세관장수곡일승, 제65세관장호리 미일준, 제66세관장 호소이 히타치(회장 재임 당시 서무부장 총총, 도다의 몰후에 등좌) 등과 양호한 관계를 쌓아, 특히 제65세일 아츠시와는 인연이 깊었다.
술을 좋아하고 [ 10 ] , 종종 술을 마시고 술취하면서 설법을 하고 있었다 [ 11 ] . 불교 에는 불음주 계명이 있지만, 닛렌계 교단의 교리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법 무계 ).
미모토존의 서사에 관해서는 “단지 미모토존의 흉내는 해서는 안 됩니다 . 미모토존을 쓰는 것은 법 주님 이외에는 할 수 없으니까 . 또, 와코사간의 『도다성 성전집』에는 「그러므로 법주 쿠라시타만이 미모토존님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부처님입니다」라고 있다 [ 13 ] . 그러나, 성교신문사간의 『도다성 성전집』에서는, 「그러므로 법주 상인만이, 오모토손님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분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 14 ] .
오사카 사건
1957년 (쇼와 32년), 참의원 오사카부 선거구 의 보결 선거를 둘러싸고, 청년부 참모실장 이케다 다이사쿠 와 일부 학회원이 선거 위반 사건을 일으킨다( 오사카 사건 ). 호별 방문 과 인수 혐의로 청년부 참모실장 이케다 다이사쿠, 이사장 고이즈미 타카시 의 최고 간부를 포함해 수십 명이 체포·기소됐다. 공판에서는 창가학회 최고 간부에 의한 지시의 유무, 증거 채용된 자백의 신용성이 다투었다. 이케다와 고이즈미는 무죄 판결을 얻었지만, 2명 이외의 회원에게는 유죄 판결이 내려져, 이케다도 구류 단계에서 호별 방문과 인수 혐의를 인정해 자백해 서명한 것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얻을 때까지 5년 가까운 해가 걸리고 있다. 도다는 양 간부의 무고를 믿고 옹호했지만 위반을 저지른 회원에 대해서는 기소 후 즉 제명 등의 엄격한 처분을 내렸다 [ 15 ] [ 신뢰성 요 검증 ].
원수폭 금지 선언
1957년 (쇼와 32년) 9월 8일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시 가나가와 구의 미쓰자와 경기장 에서 개최된 창가 학회 제4회 동일본 청년부 체육 대회 「젊은이의 제전」에 있어서, 이른바 「원수폭 금지 선언」을 발표한다.
창가학회 제4회 동일본 청년부 체육 대회 “젊은이의 제전”( 요코하마시 ·미쓰자와 그라운드)에서 발표했다. 이 선언이 매스미디어 등에서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도다는 이 선언을 유훈으로 회원들에게 맡기고 이후 창가학회가 실시하고 있는 제 2차 세계대전 체험자의 증언을 모아 출판하는 '반전출판'이나 패널전 순회 등의 반핵운동 , 반전평화운동 활동의 연원 이 된다.
대강당 준공과 갑작스런 죽음
1958년 (쇼와 33년)에 들어가면, 기진하고 있던 대강당이 준공하는 것을 받아 학회원에게 오이시 지에 참배하도록 지시. 3월 16일 에는, 대강당에서 「광선류 천 의 모의 시험」을 실시한다. 청년부원 6,000명이 참가 [ 주석 1 ] , 학회에서는 '기념식전'으로 불리고 있다. 도다는 광선류포의 일체의 후사를 청년부 전체에 맡겼다. 그러나, 이 식전을 가지고 도다의 후계가 되는 학회 회장 후보자를 구체적으로 지명하고 있지 않다 [ 16 ] . 이 때문에 도다의 사후 2년간 회장은 공석이 된다.
다음달 4월 1일 에 급성심부전을 일으켜 오오이시지(大石寺)를 떠나 도쿄로 향하지만, 도쿄역 에 도착할 무렵에는 도다의 컨디션은 악화의 일도를 추적하고 있었다 [ 17 ] . 도쿄역에서 스루가다이 일본 대학 병원 에 직행해 긴급 입원했지만, 다음 4월 2일 오후 6시 30분, 사망. 58세몰 . 학회에서는 사인을 '급성 심쇠약'이라고 발표했다. 도다의 유언대로 도다의 시신은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되지 않았지만, 시신이 썩지 않았다. 4월 8일 도쿄· 미나미이케부쿠로 의 죠젠지 에서 경영된 고별식 에는 12만명이 야키카에 방문했다. 4월 20일 , 아오야마 장의소 에서 경영된 장례에는 25만명이 참렬했다 [ 18 ] .
묘지는 도쿄도 하치오지시 의 창가학회 다카오 묘원의 특별 구획에 세워졌다. 다만 유골은 들어 있지 않다 [ 19 ] .
직업 경력
저작·논문
- 『생명론』(『대백 연화』 창간호, 1949년 6월)
- 『일련대성인 고서십대부 강의』 1-4 창가학회 , 1953년 - 1955년
- 『인간혁명』 상하 2권( 정문관 서점 , 1957년 7월
- 「방편품 수량품 정해 : 니치렌 마사무네」정문관 서점, 1958년 3월 13일. NDLJP : 2971244 . (편:타다성고)
- 『도다성 성선생 권두언집』 창가학회, 1960년 5월 3일. NDLJP : 2978775 .
- 『도다성 성선생 논문집』창가학회, 1960년 8월 23일. NDLJP : 2978776 .
- 『도다성 성선생 강연집상』 창가학회, 1961년 5월 3일. NDLJP : 2978773 .
- 『도다성 성선생 강연집 아래』 창가학회, 1961년 10월 12일. NDLJP : 2978774 .
- 『도다성 성선생 질문회집』 창가학회, 1963년.
- 『도다성 성전집』
- 『도다성 성전집』 전 5권(1965년 - 1966년, 와코샤)
- 『도다성 성전집』 전 9권(1981년 - 1990년, 성교신문사 )
참고문헌
도다성을 연기한 인물
각주
주석
출처
- 『평전 도다성 성상』
- 소설『인간혁명』보다
- 이케다 대작 저 「인간혁명」 제11권 204-205페이지
- 도다성성 『젊은 날의 수기·옥중기』 칭다이 서방, 178-181쪽, 1971 (도다성성저, 가청란편 『신앙에 대한 각오 인간혁명의 원형』
- 시마네·키요시 “사회학대사전 14권” p.86-「토다죠세이 도다성성」1970년
- 이케다 대작 저 「인간혁명」 제11권 204-205페이지
- https://kotobank.jp/word/%E5%89%B5%E4%BE%A1%E5%AD%A6%E4%BC%9A-89159
- 시마다 유미 저 「신 사마의 츠고 종말의 필드 워크」( 1992년 , 호에칸 ) ISBN 978-4831871992
- 시마네·키요시 “사회학대사전 12권” p.70-「그렇게 실망하는 창가학회」1970년
- 영화 '인간혁명' 으로 재현장면 있음
- 【나카타 고의 가까운 미래, 세계는 이렇게 된다! 강좌 제2회】【대담】나카타 고×시마다 유미 미래의 종교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 세계는 어떻게 될까? - Ohta Collective 오타 컬렉티브
- 『도다성 세인트 선생님의 가르침』안의 가연 정업서 강의 후의 질문회
- 와코샤 “도다성 성전집” 제4권 28페이지
- 성교신문사 “도다성 성전집” 제2권 37페이지
- 이케다 다이사쿠 저 「인간혁명」 제11권
- 와코샤 『도다성 성전집』 제2권 580-583페이지
- 이케다 대작필 「수필・인간 세기 의 빛
- 『대백 연화』 2010년 4월호 28페이지 「회장 취임 50주년 기념 기획 영원히 스승과 승리를 함께」[ 신뢰성 요 검증 ]
- 창가학회 초대회장들의 무덤 79기 거칠어지는 뼈츠보까지 아바쿠 집단의 범행무잔에 도괴『아사히신문』 1970년
관련 항목
외부 링크
- 창가학회 공식 사이트:제2대 회장 도다성성
- 한 교조님의 죽음(도다성 성장의 모습) 1958년 (쇼와 33년) 4월 23일 - 일본 영화 신사 (아사히 뉴스)의 영상.
- 30만명의 장례식(토다성 성장의 모습) 1958년 (쇼와 33년) 4월 20일 - 중일 영화사 (중일 뉴스)의 영상.
- 도다성 외저 『중등학교 입학시사의 이야기와 애칭의 우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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