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6

배재희 <꽤나 쓸모있는 바보> 평화

(7) 
배재희

30 June at 23:02 ·



<꽤나 쓸모있는 바보> 평화

‘평화’라는 머릿말 하나로 수면 밑의 온갖 부조리를 유야무야하는 광경. 이제는 거의 공포에 가깝다. 주로 바쁜 입심으로 먹고 사는 이 나라 강단지식분자들의 대표적 관용어가 곧 ‘평화’다. 혹은 정치인들도 이런 ‘평화’ 옹알이를 즐긴다. 실은 닳고 닳은 주제에 자기 행적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 ‘자가발전’하는 군상들이다. 그들은 미디어 앞에 서서 비장함이며 감격 어린 갖은 표정들을 그리는데 도사들이다.

평화, 이 한 마디면 온갖 모순을 다 덮을 수 있다. 별별 종류의 도덕적 난잡을 대중의 판단에서 미뤄놓을 수 있다. 현존하는 악의 횡포와 포악성에 영합하겠다는 어리석음에 심지어 감동어린 명분까지 제공해준다. 타락한 평화(pax corruptio)의 얼굴이다. 그렇게 악은 다시 영속되고, 도덕은 악에 굽신굽신거리게 된다. 평화, 이 한 단어에 ‘의로운 싸움’의 의지는 일거 무력화된다.


레닌은 이런 자유 사회의 엉터리들을 가리켜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라고 했다. 물론 코웃음질하며 이죽거리는 표현이다. 공산주의자, 전체주의자들은 언제나 자기 모순으로 안으로부터 무너지지만, 바깥 자유사회의 이 ‘쓸모있는 바보’들 덕분에 다시 재건되고 영속한다. ‘볕을 쪼여 동토를 녹이자’는 이런 바보들의 청사진은 멋지다 못해 눈물나게 거룩하고 편리해 빠졌다.

공산주의자는 정치든 뭐든 하나같이 지저분한 경영을 고수한다. 유물론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그들은 신의, 대의, 정의, 도덕률 같은 인간사의 숭고함을 모조리 ‘허위의식’이라며 퉁쳐서 깔본다. 나라 전체가 그런 도덕에 대한 비아냥을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교습받는다. 이런 공산주의식 인간 경영이 두어 세대 정도만 이어져도 국민의 성정 자체가 비뚤어지게 된다. 인간을 그야말로 통째 타락시키는거다. 중국을 보라. 품위 있는 공자 선생의 나라가 보이스피싱으로 외화벌이나 하고, 온갖 정치인들이 첩을 두며 대대로 인민을 양껏 수탈하는 풍속. 그게 다 뭘 뜻하겠나.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와 외교는 이 비뚤어진 세계관이 깃든 최악의 난장이다. 애초에 그런 인간들만 골라잡아 관료와 지도자로 키운다. 그래서 협상이나 계약, 외교적 언약이 구조적으로 통하지 않게 된다. 온갖 허언과 배신이 일상화된다.

기억하시라. 그들이 ‘주체’라는 말을 소비할 때는 외부 사회의 보편적 통념을 배신하고 싶을 때다. 그들이 ‘평화’라는 말을 유통할 때는 자신의 타락을 용납받고 응벌받지 않고 싶을 때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파트너십이란, 아직 배신당하지 않았거나, 이미 배신당했거나, 둘 중 하나 뿐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즘의 가장 비열한 형태를 공산주의라고 바꿔 읽는다. 주변의 중국 시장 들어갔다 쪽박차고 돌아온 그 수많은 기업가들 얘기를 한번 들어보시길.

오늘 판문점은 슬프고 우울했다. ‘트럼프’라는 뻔뻔하기 이를데 없는 자와 김정은이라는 극도의 추악과 폭력성을 겸한 작자, 이 둘의 만남이라니. 우울에 젖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다. 한편으로 사람들이 참 좋아할만한 퍼포먼스를 적시에 쏴줬구나 싶다. 듣자하니 워싱턴의 야당 지도자들이 경선에 스폿라이트 받는지라 마음이 동하여 이런 질낮은 퍼포먼스를 저질렀다나.

트럼프라는 자는 한국과 자유사회의 리더들이 그간 어렵사리 지켜온 규범이며 원칙, 대의를 싸그리 헤집어놓다. 저런 질낮은 미디어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속마음이 하도 뻔하여 새삼 역겹다. 이 꼴을 보며 전국 각처의 한심한 선생들, 강단 지식인들, 엉뚱한 목회자들은 또 얼마나 예찬의 언어를 개발하느라 바쁠까. useful idiot 놀이는 해도 해도 끊이지 않을거다.

아마 가관일거다. 참으로 가관일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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