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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4 July at 13:07 · Shared with Public
- '민족말살정책' 용어의 문제 -
한국사 개설서나 교과서를 보면, 다소 무리한 개념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들이 간혹 보인다. 그 중의 하나가 일제강점기의 이른바 '민족말살정책'이다.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병합한 직후부터 일관하여 동화정책을 추진했고,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미나미 지로 총독이 중심이 되어 내선일체를 내세우면서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황국신민화 정책은 구체적으로는 창씨개명, 신사참배, 지원병제도 실시, 일선인 공학과 학교 이름 통일, 학교에서의 조선어 사용 금지, 일본어 강화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우리 교과서나 개설서에서는 '민족말살정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민족말살정책'이라는 표현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1960년대부터 일본의 박경식 선생이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국내에 전파되어 국내 학자들도 역시 같은 표현을 쓰기 시작했고, 결국 개설서와 교과서에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자칫하면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다. '민족말살정책'은 (조선인들을 인종청소하듯이 모두 멸종시킨다는 것은 아니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최근 일부 논자들은 일제 말기에 이르러 일본이 조선인들을 대등하게 대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과연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을까. 당시 황민화 정책은 문자 그대로 조선인을 '황국의 신민'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일본 천황의 신민, 일본에 충성하는 국민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인을 일본인, 혹은 일본민족으로 만든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미나미 총독이 창씨개명 정책을 추진했을 때, 이를 적극 제안하고 지원한 것은 총독부 학무국장인 시오바라 도키사부로였다. 그러나 당시 총독부 경무국이나 재조선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일본인과 같은, 혹은 비슷한 이름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그들은 일본인과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경무국의 반발에 의해, 총독부 법무국 쪽은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을 일본풍으로는 하지 말라고 조선인들에게 권유하게 된다.
총독부 관리들은 대부분 조선인과 일본인들을 모든 점에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1943년경 만들어진 총독부 내부 자료를 보면, "내선일체의 이념이 내선평등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미나미는 1942년 총독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는데, 추밀원 연설에서 "조선은 최근까지 수천 년에 걸쳐 한 국가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사상, 인정, 풍속, 습관, 언어 등을 달리하는 이민족인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인식 위에서 정책을 세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이러한 내용은 이미 미야다 세쓰코 선생이 1980년대에 쓴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이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미나미는 총독 재임 시기에 일선동조론을 끌어들여 일본인과 조선인은 '동조동근'의 관계에 있다고 강조했지만,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식민사관의 중요 논리의 하나로서 '일선동조론'이 항상 거론되지만, 사실 총독부 당국이나 동경제대와 경성제대의 교수들은 '일선동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선동조론'은 주로 재야 학자들이 주장하는 논리였고, 관학의 학자들은 이를 비학문적인 주장으로 간주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총독들 가운데에서도 미나미 총독만 이를 끌어들여다가 '내선일체론'에 이용했을 뿐, 그 이전의 총독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인은 신성한 야마토 민족을 계승한 민족'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조선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미개한 민족이라는 차별의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조선인들을 일본 민족 안에 받아들일 생각이 거의 없었다.
결국 황민화정책이란 문자 그대로 조선인을 일본제국, 일본천황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황국신민'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가진 것이었지, 조선인을 일본인, 일본민족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조선인은 여전히 일본인들과 비교하여 차별대우를 받아야 할 존재였다. 이런 생각은 1910년대부터 추진된 동화정책 속에서도 일관된 것이었다. 즉 일본의 동화정책은 '차별을 전제로 한 동화' 정책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황국신민화정책을 '민족말살정책'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황국신민화 정책은 조선인을 황국의 신민, 그것도 차별을 받는 '2등 신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Comments
Daeseong Jeong
조선지식인들이 역으로 활용하려 한것을 또 총독부측에서 역으로 이용하며 문화정치하야 아주 복잡한 양상 띠게 된 부분이 교수님 원래 전문이신데 그 부분은 어떤 결론이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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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차별을 전제로 한 동화'정책
또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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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Choi
중요한 내용 배웠습니다 선배님. 공유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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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예. 좋습니다.^^
· Reply · 3 d
Michael Choi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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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n Kim
당시의 정책적 의도는 그렇지 않아도, 조선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요소 (이름, 언어)를 바꾸려고 했으니 결과적으로 말살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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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민족'의식과 '국민'의식을 나누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황국신민화 정책은 주로 '국민'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지요. 창씨개명에서 '조선풍' 일본식 이름을 지으라고 권유한 것이 이를 잘 보여주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국민의식'과 '민족의식'이 쉽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 Reply · 3 d
박찬승
언어 정책과 관련해서는 1940년에 조선인들의 일본어 해독 능력이 15%밖에 안 되었고, 1942년경에 징병검사에 앞서 실시한 체력검사에서 청년층도 일본어 가능자가 6할 정도밖에 안 되어, 총독부에서 부랴부랴 1940년경부터 국어강습소를 개설하여 청소년층과 일반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들에게 조선어를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이가 20%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까요.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여전히 조선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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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n Kim
문맹율과 함께 '조선어의 계속된 사용'이 있다하더라라도 조선인들이 결국 그 정체성을 잃게 된다는 결과는 같습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Carlisle Indian School의 학생이었던 Tom Torlino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원래 이름이 톰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톰은 나바호 부족 출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문자를 몰랐지요. 그러나 그의 교육을 담당한 백인 관리들은 그를 '문명화 교육'의 효시로 삼고자 하였고 그에게 톰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미국식 교육을 시켰습니다. 3년후 양복을 입고 긴 머리를 자른 톰의 모습은 소위 인디언도 문명화될 수 있다는 사례로서 제시되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미국화 정책은 가속됩니다. 톰이 영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여 그가 나바호 언어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나바호인들의 권리보장에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그러나 그의 아들은 프랜시스와 그의 손자들은 나바호 언어에 서툴렀습니다. 그리고 계속 시간이 지나면서 혼혈이 진행되고 언어를 잊어가면서 결국 그들은 정체성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톰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례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하여도 모든 동화정책은 결국 정체성의 말살로 이어진다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결국 아무리 일제에게 '말살'의 명확한 의도가 없었다하여도 일제가 시행한 동화정책은 2등시민이든 뭐든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체성의 말살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민족말살'이란 용어가 오류라고 볼 수 없는 이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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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김선생님,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동화정책이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1931년에 조선에서 <조선통치신론>이라는 책을 낸 마치다 초사쿠라는 인물은 이 책에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동화시키려면 20배 정도 되는 인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다른 나라 사례들을 참고한 것 같은데요. 당시 조선 민족 1800만을 동화시키려면 조선에 일본인 3억 6천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그런데 당시 조선에는 겨우 40만 정도의 일본인밖에 없었죠. 나중에 70만까지 늘어어나지만). 이 설에 따른다면 아이누나 류큐 사람들은 숫자가 소수였기 때문에 일본에 쉽게 동화될 수 있었지만, 조선인들은 그렇게 되기 어려웠다고 볼 수 있겠지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미국 문화에 결국은 동화되어 간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화정책보다는 생활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어쨌든 마치다는 조선인을 동화시킨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이토 총독도 부임 초기에 조선인을 문화적으로 동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인식을 보였지요. 그래서 자치권을 주는 방안도 모색을 했던 것이고요. 1930년대까지 총독부는 학교에서는 일본어 교육을 열심히 시켰지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어 강습 같은 것은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1940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반인들에 대한 일본어 강습에 적극 나서고요. 그런 점에서 보면, 그 전에는 동화정책에 소극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어떤 교수님은 아예 중일전쟁 이전에는 동화정책은 사실상 시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차별정책이 중심이었다고 주장하시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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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새롭게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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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곤
일본이의 홋가이도를 점령하고 아이누족을 대한 정책을 '차별을 위한 동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차별을 위한 동화정책은 왠지 식민지정책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듯한 어감이 드는군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한국은 일본땅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한 생각이 듭니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 대한 정책과 다른 일본의 식민지정책은 민족말살정책이 오히려 더 좋은 표현인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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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일본 '내지'에 포함시킨 홋카이도나 오키나와에 대한 정책은 '외지'라고 부른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에 대한 정책과는 달랐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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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곤
박찬승 예! 교수님 책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동화'라는 어감은 좀...!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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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성
고런따위 비열한 사고방식을 물려받은 자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3D 비슷한 업장 담벼락에
"가족으로 모시겠습니다"고
종업원 모집광고 상시 걸어두는 업주들
일의 경계는 무한정 확대 지향
보수의 경계는 축소지향으로
지급날짜는고무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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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2등 국민'이라고 해서 나름 상당한 대우를 해주려 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차별을 받는 사람은 바로 '모욕감'을 느끼게 되어 있고, 이 모욕감은 '2등국민'의 자부심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당시 징병, 징용, 일본군위안부로 전장에 동원된 많은 분들은 '우리 처지가 노예와 같았다.'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2등 국민'이란 말에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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