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해결에 있어 김대중의 역사적 공헌
제주 4.3사건은 광주항쟁과 달리 정치권이 먼저 사건 해결에 대한 공론화를 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광주항쟁은 해외에서 그리고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세력들이 항쟁 직후부터 진상규명 운동을 전개했고 당시 야당은 여기에 호응한 형태였다.
그런데 제주 4.3은 한국전쟁 시기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어서 오랜 기간 금기시된 사건이어서 제대로된 공론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재일교포 소설가 김석범이 1957년에 쓴 ‘까마귀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최초의 문제제기라고 볼 수 있는데, 국내에선 전혀 알려지지도 않았고 최초의 의미 이상의 공론화가 없었고 그러다가 현기영이 1978년 ‘순이삼촌’을 써서 국내에서 최초로 공론화의 시도가 나타났으나 당시 상황에서 제대로 알려질 수 없었던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평민당 후보 김대중이 1987년 11월 30일 제주도 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공약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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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은 4.3의 비극을 겪었다. 나는 제주인의 한과 고통과 희망을 같이 하겠다. 나도 용공조작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내가 집권하면 억울하게 공산당으로 몰린 사건 등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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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에 대한 최초의 정치적 공론화였다. 이때 비로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정치적 공론화가 이뤄졌고 이에 힘입어 1989년에 제주도 11개 단체가 ‘제주 4.3사월제공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공식적인 위령제가 최초로 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족들은 1990년에 가서야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유족회가 주최한 위령제는 1991년 가서야 처음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 제주4.3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1987년이면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정도 살벌한 시기였다. 그때 제주도 4.3유족회 등이 조직되어 있어서 이들이 정치권에 호소한 것도 아니고, 사실상 제주 4.3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알아도 모른척 하던 시절에, 이것을 일부로 선거 유세에서 공식적으로 공론화했다는 것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 4대국안전보장론, 3단계통일론, 향토예비군 폐지론, 대중경제론 등을 제시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용기의 산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971년이면 1968년 1.21 사태, 푸에블로로 나포, 울진 삼척 무장공비사태, 닉슨독트린, 미군 일부 철수 등이 있었던 시기로서 안보위기감이 심화되었을 때였다.
그에 비견할 정도로 1987년 제주 4.3에 대한 공약은 대단한 용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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