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1) 국제적 요인
첫째, 지정학적 관점이다. 유라시아 중앙을 차지해야 패권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크라이나가 바로 그 대상국가다. 인구·영토·자원 3요소를 갖췄고, 유럽과 아시아주·발트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교차로다. 러시아에게는 전략·안보·경제·역사·종교의 핵심지역이며 미국의 입장에서도 러시아의 ‘제국적 부활’을 견제할 급소다. 특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역사적 정체성을 공유하며, 소련 붕괴 후에도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간주했다. 친서방 국가로 선회하는 것을 안보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둘째, NATO의 동진정책이다. 1990년 통독과정에서 미국과 서독은 소련측에 NATO가 동진하지 않겠다고 구두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99년에는 중동유럽 비세그라드 3국(체코, 헝가리, 폴란드)이, 2004년에는 발칸주변 4국(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및 발트3국이, 2009년, 2017년, 2020년에는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등이 NATO에 가입했다. 이제 남은 것은 우크라이나뿐이다. 러시아로서는 어떤 희생을 치루고 라도 양보할 수 없는 레드라인이다.
셋째, 러시아의 공세적 방어전략이다. 중심에서 변방까지의 거리를 최대한 넓혀서 완충지대를 확보해 안보불안을 해소하는 팽창전략이다. 1990년대 신생러시아가 서방으로 부터 현상변경을 강요당한 수모를 겪었던 ‘수세적 방어전략’과 대비된다. 2000년대 이후 러시아는 국력 회복과 함께 스스로 설정한 핵심 국익의 침해를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군사력을 포함한 적극적인 수단을 동원해 강대국으로 부활하겠다는 전략이다. 우크라이나의 영토점령보다는 NATO 확대 저지 및 옛 소련국가들의 이탈 방지 등이 국가안보의 핵심과제다.
(2) 국내적 요인
첫째, 미 바이든 행정부의 동맹 중시정책이다. 대서양에서 동맹을 복원하고 중동부 유럽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국내정치가 혼란스럽고 남태평양에서 미중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러시아와 같은 패권국가 출현을 저지해야 한다. 유럽의 안보위기를 고조시켜 NATO의 응집력을 강화해 독일과 프랑스의 이탈을 막아야 한다. 이것은 세계지배 원천인 군산복합체 이익에도 부합된다. 러·독간 노드스트림2를 저지하고 대러 제재를 통해 유럽 에너지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야 할 입장이다.
둘째, 러시아 푸틴 정부의 ‘위대한 강국’ 부활정책이다. 냉전 당시 슈퍼파워의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것이 푸틴의 노골적 야심이다. NATO의 동진정책은 이러한 대외정책에 반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다. 2003년 조지아 장미혁명을 필두로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 및 2005년 키르기스스탄 레몬혁명 등 색깔혁명이 대표적인 사례다.
셋째,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정부의 정치적 미숙성이다. 젤렌스키는 집권 후 NATO 가입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했다. 러시아를 적으로 설정해서 국내적 응집도를 높혀 국정운영 동력확보와 정치적 기반을 다진다는 계산이다. 심지어 그는 2021년 4월 돈바스 분리주의자들과의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NATO 가입뿐이라고 선언했다. 아마추어적 외교정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3) 개인적 요인
첫째, 미국 바이든의 푸틴에 대한 사적 감정이다. 그는 지난 2020년 대선과정에서 러시아에 대해 중국보다도 더 큰 적개심을 드러냈다. 푸틴을 경멸했고 악마화했다. 푸틴이 정보기관을 동원해 두 차례에 걸쳐 미 대선에 개입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였다. 말하자면 라스웰의 ‘사적 동기의 공적 전위’로 해석된다. 2021년 1월 바이든은 취임하자 트럼프 때와는 달리 대러 봉쇄정책을 강화했다. 우크라이나에 첨단무기를 제공하고 NATO 가입을 서둘러 추진했다.
둘째, 러시아 사회의 소위 ‘푸틴 패러독스’다. 푸틴은 2000년 집권 후 미국의 단일패권을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는 ‘미국이 국제경제를 좀먹는 바퀴벌레와 같다’고 맹비난했다. 푸틴에 대한 지지율은 서방을 때릴수록 높아졌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때는 85%의 지지율을 보였다. 러시아 레바다센터의 발표(2월 4일)에 의하면, 최근 장기집권을 위한 헌법개정 등으로 60%대에 머물던 지지율은 70%로 올랐다.
셋째,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코미디언 출신으로서 정치력이 부족하다. 그가 집권 후 2019년 총선에서 동부지역 주민 다수가 친러시아 성향 정당인 ‘야당 플랫폼-삶을 위하여’를 지지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반러시아 태도는 하나의 통합된 여론이기보다는 분열적 성향을 띤다. 최근 그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25%대에 머물러 있다.
2. 과정
(1)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2014.3)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혁명(2013.11) 이후 수립된 친서방 정권에 맞서 크림반도를 전격 병합하고 서방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2017년 6월 외교안보정책의 우선목표로 NATO 가입을 재천명했고 2019년 2월에는 이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2021년 미국이 ‘NATO의 문호 개방’과 ‘안보협력 및 군사지원’ 등을 제기함으로써 미·러 갈등이 본격화됐다. 2021년 봄과 9월 우크라이나-NATO 연합훈련이 진행됐고 러시아는 임계점을 넘었다고 강력히 항의했다. 우크라이나가 2021년 10월 러시아의 서부권역 정례 군사훈련인 ‘자파드’를 문제 삼고 미 정부도 이에 가세했다. 러시아가 이를 유럽안보체제를 논의하는 기회로 활용하면서 본격적인 안보쟁점으로 비화됐다.
(2) 러시아의 안전보장안 제시(2021.12)
러시아는 2021년 12월 15일에는 미국에게, 다음날 16일에는 NATO에 협정문 형식의 안전보장안 초안을 발송했다. 러시아가 요구한 안보견적서는 첫째, NATO가 우크라이나 포함 구소련 6개국에 회원국 자격을 부여하지 말 것. 둘째, 러시아 인근 중동부 유럽 NATO 회원국의 타격용 공격무기를 철수시킬 것. 셋째, CIS 국가에 무기지원을 금지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지 말 것. 넷째, 러시아 근역에서 나토의 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할 것. 마지막으로 이 내용을 법적 구속력 있는 문서로 보장할 것 등이다. 그러나 워싱턴이 크렘린의 요구를 묵살함으로써 미·러간 팽팽한 기싸움이 시작됐다.
(3) 미·러간 하이브리드전쟁 개막(2022.2)
지난 1월 러시아군 10만여 명이 우크라이나를 삼면으로 포위하자, 미국과 NATO가 협상 테이블로 나왔다. 러시아는 회담을 통한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1월 11일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서 3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2월 16일을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무력공격일로 기정사실화하면서 국제여론전에 나섰다. 미·러간 ‘엄포놓기(bluffing)’와 ‘오기대결(contest of nerve)’이 지속됐다. 독일과 프랑스는 셔틀외교를 전개하면서 싸움 말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3. 전망
(1) 예상 시나리오
첫째, 독일의 학술정치재단이 전망한 3가지 시나리오다. 러시아군의 우크라 접경 집중배치 압박공세로 NATO의 ‘유럽안보구조’ 변경유도, 러시아군의 벨라루스 영구주둔으로 강압외교 전선 확대 및 우크라 침공위협 고조, 반군 돈바스 지역 자치권 부여로 우크라이나 정부내 불안 야기 등이다.
둘째, 영국 BBC방송이 2월 12일 보도한 5가지 시나리오다. 미·러간 외교적 타협, 러-NATO간 신안보협력 체결, 민스크협정 복원, 우크라이나 중립화, 미·러간 대치 장기화 등이다.
셋째, 주한 카자흐대사가 전망한 크림반도 합병 방식의 단계적 시나리오다. 돈바스 자치정부 독립선언→러시아와 합병 찬반 주민투표 실시→돈바스 자치공화국 대표와 푸틴 대통령 간 합병조약 서명→러시아 의회의 합병 조약 승인 등 절차다. 지난 2월 15일 러시아 하원은 돈바스 지역을 독립국가로 공식 인정할 것을 푸틴 대통령에게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푸틴은 2월 21일 루간스크와 도네츠크의 독립을 승인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2) 전쟁 발발 가능성
첫째, 과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선제공격할 것인가. 가능성이 높지 않다. 왜냐하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일방주의와 군사적 전횡을 맹비난해왔던 푸틴의 비판이 정당성을 잃게 된다. 역사적 뿌리가 같은 동슬라브 공동체의 인적·물적 피해와 문화예술유산 파괴에 대한 비난도 피할 수 없다. ‘지옥의 제재’를 예고하는 서구의 고강도 압박도 무시할 수 없다.
둘째, 미·러간 정치적 타협 가능성은 있는가? 러시아의 안전보장 요구에 대한 법적 문서 합의는 난항이 예상된다. 미중 패권경쟁 상황에서 러시아와의 전선 확대 및 러시아 천연가스에 대한 EU의 높은 의존도(40%) 등은 미국·EU에게도 부담이다. 따라서 ‘새로운 NATO 2030 개념에 우크라이나 관련내용 채택 여부’를 결정하는 6월 NATO 정상회담 및 11월 미국 중간선거 시기까지 갈등이 지속될 수 있다. 다만 미·러간 INF 협정 협의 재개, 민스크 협정 이행 등 정치적 선언 수준의 명분 있는 봉합에 의한 출구전략을 모색할 수도 있다.
셋째, 최악의 상황으로서 전쟁이 발발할까? 크렘린의 군사적 투사 결단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이 거의 확정된 단계에서나 실현 가능하다. 러시아는 미국의 역대급 초강력 제재를 고통스럽겠지만 견뎌 낼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레닌그라드 900일 봉쇄’에 맞서 결국 전세를 역전시켰다. 2014년 서방의 대러 제재 이후 러시아의 제조업이 괄목상대할 정도로 발전하고 외환보유고도 금으로 대체(달러 16%)하는 등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왔다. 현재로서는 크림반도 병합방식을 답습할 수도 있다.
4. 시사점
(1)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미·러 관계 악화, 중·러의 전략적 협력 강화로 한반도에 신냉전적 대립 구도인 한·미·일 對 북·중·러 형성 가능성이 증대된다. 러시아와 서방이 상호 제재로 수출을 제한할 경우 에너지·광물·곡물 가격 급등, 공급망 혼란 등이 우려된다. 유연탄·무연탄 수입에서 러시아산 비중은 각각 16.4%와 40.8%이다. 국제금융결제망(SWIFT) 배제 등 금융제재시 대금결제 문제로 인한 거래 제약, 수출 대금 회수 애로 등 경제협력이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러시아가 동방과의 경제협력을 더욱 촉진할 가능성이 있어 우리에게 기회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2)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
한국도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미·중과 미·러 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중간국’이다. 자국이 처한 외교·안보적 상황을 제로섬(Zero-Sum)의 시각보다는 포지티브섬(Positive-Sum)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강대국 세력이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분단과 분할은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에 대해 취할 가능성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지난 2015년 공론화됐던 유사시 중국의 북한 분할 시나리오도 예의주시해야 한다.
(3) 명실상부한 자강외교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한 미·러 협상에서 우크라이나 자리는 없다. 스스로 힘을 키우지 않으면 주변 강대국들의 위세에 휘둘리는 것이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이다. 우리에게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지속적인 국방력의 강화와 함께 동맹 의존도를 줄이는 전시작전권 환수다.
(4) 국익 우선의 실용외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정권은 미·러간 전략적 이해관계가 직접 충돌하고 민감하게 교차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대외정치적 입지를 좁혔다. 동맹관계인 미국, 전략적 동반관계인 중국과 러시아가 21세기 한국의 생존과 국가적 번영을 좌우하는 글로벌 강대국이다. 이분법적 냉전식 외교 선택지는 한국의 국익과 안보에 이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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