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감축(1970년대)[편집]
1960년대에 결속강화되었던 한·미 군사동맹은 1970년대 접어들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한국과 미국이 공동목표와 공동이익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동맹이 결속되었지만, 1970년대에는 한국과 미국의 외교정책수행에 있어서 견해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견해 차이의 시발점은 닉슨 독트린이었다. 이 원칙의 일환으로 1970년 7월 미국은 주한미군의 감축계획을 한국정부에 공식적으로 통고했다. 한국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대안으로 제시한 채 상당수 감축시켜 왔다.[68] 한국은 이 시기부터 자주국방을 정책목표로 설정하게 되었다.[69]
1972년 미국이 중국과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동북아시아의 냉전체제에 모종의 변화가 오리라고 예상하는 가운데 7·4 남북 공동 성명이 있었고, 이어 10월 17일 한국내에서는 유신 체제가 성립되었다. 닉슨과 키신저 시대에 비롯한 한국에서의 유신체제는 당분간 한미 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채 안보·경제·대 유엔 외교상의 협조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다가 1974년 닉슨이 사임하자 그 뒤를 이은 포드는 긴급조치로 인하여 미국회에서 한국내 문제에 대한 약간의 비판이 있음에도 방한(訪韓)하여 한·미 유대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유엔에서의 제3세계권의 발언권 강화와 세계적인 화해 분위기로 유엔군 사령부와 언커크(UNCURK)의 해체가 이루어졌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거듭 논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은 한국의 방위산업 육성과 자주국방을 위한 국군현대화에 차질이 없도록 유신 이후에 적극 지원해 주었다.
1976년에 터진 박동선 사건은 인권문제와 함께 한미관계에 치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로 인해 카터의 주한미국 철수정책을 촉진시켰고, 한미관계는 최악의 사태로 진입하였다.(→박동선 사건) 한·미 관계에서 1970년대 후반기 이후 1980년대에 가장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은 역시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정책이었다. 1976년 주한미군 철수를 선거 공약으로 한 카터 대통령이 당선이 되자 잠시 한·미 관계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의 대한 지원정책 비판론과는 달리 카터 행정부는 시종 한국의 군사 및 경제 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계속하여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큰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었다.[70] 그러나 1977년 카터의 취임후 미국·일본을 비롯한 태평양과 동북아시아 전역의 중대한 관심사가 되어 논의를 거듭하고 있으나 선보완(先補完) 후철수라는 기본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71]
제5공화국[편집]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다. 당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어서 미국의 승인 없이는 군대의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를 알고서도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고, 이는 1982년 3월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을 통해 학생·재야에서는 반미운동이 가속되었고 정부간에는 통상마찰이 심화되어 급기야 국민적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미국 정부는 1988년 열린 광주청문회에서 성명서를 통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으며,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고 해명했다.[72]
이 시기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계엄령 발동에 대해서 견제하는 태도를 유지해왔다.[73] 양국간의 위상조명과 관계 재정립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바, 이는 한국현대사를 돌아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즉 군사적으로 한국이 미국의 보호 아래 있다고 지금까지의 정치적·경제적 대미 의존성이나 불평등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한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74]
김영삼 정부[편집]
1993년 7월에 한미 관계가 처음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존경하며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이 남한을 배제한채 직접 핵 협상을 하면서 김영삼과 클린턴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과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론이 충돌한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남한을 제외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을 때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명의로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보장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북한에 보냈지만 미국은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안 김영삼은 상당히 화를 냈다. 1994년 미국의 영변 폭격 계획과 더불어 제네바 합의 체결을 둘러싸고 한미간 갈등이 나타났다.[75] 1996년 10월 북한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간첩단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는데(→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 당시 미국 해군정보국 컴퓨터분석관으로 근무하던 김채곤(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군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돼 미 연방교도소에 9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처리 과정에서 클린턴과 김영삼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김영삼정부는 임기 말 외환위기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76] IMF 구제금융사건 당시 IMF 외환위기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이권다툼에 한국이 희생양이었다는 칼럼이 게제되기도 했다.[77]
국민의 정부[편집]
역대 한미 정부간 관계에서 가장 관계가 좋았던 시절은 클린턴 정권과 김대중 정권으로 평가되고 있다.[78] 1999년 페리 프로세스(클린턴 행정부에서 대북 포용 기조의 대북정책을 제안한 보고서)가 작동되어 한국의 햇볕정책과 보조를 맞췄다.[79]
그러나 그 이후인 2000년 2월 9일 용산 미8군 기지 영안실에서 군무원이 독성을 가진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를 무단으로 한강에 방류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맥팔랜드에 대한 처벌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한민국 사법부에 대한 무시 행위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미감정을 고조시켰다.
2002년 6월 13일 여중생인 신효순, 심미선이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 대대 전투력 훈련을 위해 이동 중이던 부교 운반용 장갑차에 깔려 현장에서 숨진 사건(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에게 불리하고 미국에게 유리하게 체결된 주한 미군 지위 협정의 불평등성에 대한 문제의 논의와, 주한 미군 측의 제대로 되지 않은 법적 처리 및 사과로 인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하는 결과까지 이르게 된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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