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1

일본 드라마는 왜 마쓰모토 세이초를 사랑했을까 - 오마이스타

일본 드라마는 왜 마쓰모토 세이초를 사랑했을까 - 오마이스타





일본 드라마는 왜 마쓰모토 세이초를 사랑했을까

[기획] '점과 선' '얼굴' '역로' 등 문학과 드라마로 느끼는 세이초 소설의 '검은 안개'
김혜연(godflash)
13.10.09 12:45최종업데이트13.10.09 12:45

<오마이스타>는 스타는 물론 예능, 드라마 등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리뷰, 주장, 반론 그리고 인터뷰 등 시민기자들의 취재 기사까지도 폭넓게 싣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노크'하세요. <오마이스타>는 시민기자들에게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말

*이 글에는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KBS < TV 문학관 >은 한국문학의 잘 알려진 소설을 각색하여 단편 드라마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시청률은 낮아도 꾸준한 고정 팬의 사랑을 받고 해외에서도 여러 번 상을 탔다. 그러나 제작비 문제로 2011년 12월 이후 제작 소식이 없다. 드라마도, 영화도 문학에서 갈라져 나온 서사매체인데, 한국은 영화감독도 드라마 감독도 이상하리만큼 한국 문학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에 반해 일본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확실히 문학과 연극에 탄탄한 바탕을 두었다는 느낌이 든다. 가부키와 노 등 일본 전통 연극과 순문학은 물론 폭넓은 장르문학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떠받치고 있다. 내용이야 어찌됐든 문학을 꾸준히 영상화해온 일본 드라마는 평균적으로 형식적 완성도가 높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 마쓰모토 세이초는 1955년에 데뷔하여 활동한 작가지만 지금까지 그의 작품은 꾸준히 영상화돼왔다. 분기별로 방송되는 일본 드라마는 분기 사이마다 단편 드라마를 편성하는데, 단골 원작이 마쓰모토 세이초다.

요즘 젊은이들은 마쓰모토 세이초를 드라마로 먼저 접하는 사람이 많다. 탄탄한 줄거리와 생생한 인물, 구조적으로 등장하는 일본 사회의 비리 등으로 지금도 팬층이 많다. 지금도 일본 TV 업계는 그의 작품을 주기적으로 영상화하는 것으로 경의를 바친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을 읽으면서 드라마와 비교하는 것도 재미가 상당할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에 늘 깔려 있는 '검은 안개'




▲ 일본드라마 <점과 선>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2007년 만들어졌다. ⓒ 아사히TV
<점과 선>은 1958년 발표된 장편소설이다. 기차와 비행기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이 독자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유명한 작품이다. 2007년 아사히TV는 <점과 선>을 드라마로 제작하면서 감독으로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와 다카하시 카즈노리를 도리이 형사와 미하라 형사로 캐스팅했다. 캐스팅 단계부터 화제가 된 드라마 <점과 선>은 상당한 호평을 받았는데, 연기뿐만 아니라 당시 전후 일본에 대한 고증이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도리이 형사에게 결정적인 힌트를 주는 딸의 비중이 높아져서 역시 이름 있는 조연급 배우 우치야마 리나가 캐스팅되었다. 원작에서 도리이 형사의 딸은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지만, 드라마에서는 전후 가난의 짐을 지고 묵묵히 살아가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마쓰모토 세이초 소설은 밤새 기차를 타고 다니며 고생스럽게 수사하는 형사를 자주 묘사하는데 드라마는 그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딱딱한 기차 좌석 칸에서 밤새 새우잠을 자다 일어나는 두 형사의 모습에서 파괴당한 전후 일본의 당시 상황이 느껴진다.

드라마 <점과 선>은 이제까지의 세이초 원작을 현대 상황에 맞추어 각색했던 경향을 벗어나 당시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고증하는 새로운 분위기를 일으켰다. 세이초 드라마가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오락거리'에서 '역사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추리소설의 고전'으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호평을 받은 아사히TV는 생전 세이초가 영화로 만들었던 장편소설 <모래그릇>(1960)을 더욱 고풍스럽고 세련된 고증에 방점을 찍어 2011년에 단편 드라마로 새로이 제작했다. 2009년 NHK도 단편소설 <얼굴>(1956)을 드라마화 했다.

<얼굴>은 영화배우가 살인범으로 등장하는데, 최적의 캐스팅으로 찬사 받은 타니하라 쇼스케와 당시 연극무대에 흑백 필름까지 되살린 고증은 상당한 수준의 앙상블을 보여준다. 드라마 <얼굴>은 맨 마지막에 약간의 각색을 덧붙이는데 원작을 읽지 않은 시청자는 소설 그대로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세이초적'인 터치였다. "역시 남녀관계는 모르겠다니까"라는 마지막 대사를 기대해도 좋다.

세 작품은 되도록 원작에 충실했다. 특히 <점과 선>은 복잡한 플롯을 통해 세이초가 전달하는 메시지에 다가가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원작소설 <점과 선>은 지방의 한미한 경찰 도리이와 경시청의 엘리트 형사 미하라의 우정으로 끝맺어진다. 일본 사회의 엄격한 위계에 비추면 두 사람의 우정은 비현실에 가깝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일본의 '검은 안개'와 싸우고 좌절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에는 언제나 검은 안개가 깔려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전쟁을 일으켜 사회의 최상층부로 단숨에 올라선 이들은 건재하다. 그 검은 안개와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약점이 맞물리면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탐욕에 눈 먼 존재, 지식인에게 침을 뱉어라




▲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 미스터리 걸작선 <잠복> ⓒ 모비딕세이초 소설에는 지식인 범죄가 많이 등장한다. 교수·관료·변호사·예술가 등 살인사건에서 가장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범인이다.

<모래그릇>과 <얼굴>도 마찬가지이다. 소설 <얼굴>은 아예 범인의 관점에서 소설이 진행된다. 한 무명배우가 '니힐리즘(허무주의)적인 얼굴'로 스타가 될 기회를 잡는다. 영화에 출연하지 않으면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잡힐 위험은 없다. 그러나 출세욕을 버리지 못한 배우는 끝내 영화에 출연하고 자신이 만든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요즘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란에 관심이 있다면 <잠복>에 수록된 단편 <카르데아네스의 널>을 추천하고 싶다. 소설 속에서 교수 구무라는 전쟁이 끝난 뒤 진보 유물사관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여 상당한 돈을 번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관련 참고서를 판매한 돈으로 새 집을 짓고 몰래 애인까지 둘 정도이다.

구무라의 스승인 오쓰루는 전쟁 전 국가주의적 역사 강의를 하다가 쫓겨나 시골에서 근신 중이다. 구무라는 옛 스승을 돕는 기분으로 오쓰루의 복직을 성사시키지만, 오쓰루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구무라처럼 진보 유물사관 책을 써서 돈을 벌려 애쓴다. 때맞춰 역사 교과서의 좌편향을 눈에 거슬려 하던 정부에서 우익 성향 교과서를 새로 집필할 계획을 발표하자 오쓰루는 새 교과서를 발표할 꿈에 부푼다. 이에 구무라는 스승 오쓰루에게 공포를 느낀다.

역사교과서 집필이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논란의 초점은 대개 이념적인 면에 맞추어진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처럼 학벌이 생애 전체를 좌우하는 나라에서 교과서 집필은 상당한 이권을 품고 있다. 교과서가 바뀌면 문제집과 참고서, 학원과 인터넷 강의 등의 내용을 뒤바뀌기 때문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액수는 얼핏 생각해도 상상을 초월한다.

<카르데아네스의 널>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펼쳐 보이면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헛기침하는 지식인을 탐욕과 질투에 눈먼 추한 존재로 그려낸다. 대학에서 조금만 몸담은 사람이라면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이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여전히 음침한 검은 안개가 사회를 뒤덮고 있다. 이러한 쓴맛이야말로 세이초 소설이 계속 읽히고 끊임없이 드라마로 제작되는 이유이다.

세이초의 세계에서 지식인과 회사원, 정치인과 여관 종업원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인간이다. 지식인과 정치인은 사회를 위해 공헌한다는 말을 일삼지만 실은 월급을 위해 일하는 회사원과 똑같은 동기를 지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게 세이초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 생각은 <짐승의 길>(1962)의 고타키를 통해 들려진다. 고타키는 여관 종업원 다미코를 향해 "당신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성 사업가들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인간이다. 그 자리에 가면 당신도 비슷하게 해낼 수 있다. 그들과 당신은 다르지 않은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지금 사회 최상층부의 인간들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도달한 게 아니라는 뜻이 된다.

'여성혐오 작가'?...세이초의 눈에 비친 '여성'

세이초는 때때로 여성혐오의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세이초가 활동했던 1950~60년대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잠시 '여직원'으로 일하다가 맞선을 보아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며 죽을 때까지 집안에 갇혀 지내는 여성들을 세이초는 진심으로 동정했던 것 같다.

세간에서 말하는 좋은 남편을 만나 일생을 평탄하게 지낸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여성들은 불행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폭력을 당하지 않더라도 애정에 인색한 남편과 살아가는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일생의 모든 것이 남편에 달려 있고, 남편에게 의지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삶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 추리소설의 장르적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썼다고 밝히는 단편 <잠복>은 세이초의 눈에 비친 여성의 삶을 그대로 그려낸다. 추리소설의 관습적 시각에서 이 작품은 별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잠복을 거쳐 잡아내는 것이 전부인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복하는 형사는 범인이 아니라 범인이 사랑하던 여자에 더 주목한다. 아이가 셋 딸린 집에 후처로 들어간 그녀는 하루 종일 하녀처럼 일만 하며 죽은 나무처럼 말라간다. 그랬던 그녀가 옛 애인을 만나자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잠복하던 형사는 그녀가 과거에 상처받지 않을 방법을 고민한다. 그러나 과거에 상처받지 않더라도 그녀의 삶은 여전히 죽은 나무와 같다.

여성이 살인범으로 등장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남편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길 위기에 놓인 여성들은 위험한 결심에 이른다. 단편 <옅은 화장을 하는 남자>와 <일 년 반만 기다려>의 주인공 여성은 괴롭히는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최후의 방법을 선택한다.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에서는 소련에 포로로 잡힌 남편을 기다리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에 남편을 빼앗긴 여자는 또 다른 남자의 희생물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쓰며 가정이라는 어항에서 안온한 삶을 누리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법과 언론도 닿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세이초의 눈에 그녀들은 잘난 척 뻐기는 남편들보다 훨씬 영리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용히 숨죽이고 모자란 척 하며 살아야만 한다.

장편소설 <짐승의 길>은 사회 밑바닥에서 살아가던 다미코가 일본 정계와 재계를 은밀히 지배하는 노인 기토 고타를 모시게 되는 이야기이다. 다미코는 기토 노인의 육체적 노리갯감이 되는 대신 더 나아진 미래를 꿈꾼다. 2006년 드라마화 된 <짐승의 길>은 오락적인 분위기를 한껏 살려냈다.

세이초를 모르더라도 그 음험한 분위기는 충분히 재미있고 그동안 격상된 여성의 사회적 분위기도 십분 반영되었다. 예를 들면 원작에서 여주인공 다미코는 집에만 갇혀 지내지만 드라마속의 다미코는 보석 부티크를 경영하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기까지 한다. 다미코의 라이벌 격으로 등장하는 여성 요네코도 훨씬 자기주장이 강한 인물로 변신했다.

엄청난 권력자 기토 고타는 실존인물이다. 고다마 요시오라는 이 인물은 당시 일본 언론도 '흑막'이라고 불렀다. 경제와 정치를 한 손에 쥐락펴락했던 고다마 요시오는 1960년 한일협정에서도 실력을 발휘했다. 그야말로 '밤의 천황'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세이초는 고다마 요시오가 모델이 된 기토 고타가 소유하는 '도구'에 불과한 다미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다미코의 눈에 기토는 그저 색을 밝히는 노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미코가 자유를 얻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미스터리한 살인이 일어난다. 살인의 범인을 명확히 밝히는 것은 작품의 목적이 아니다. '흑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관찰하는 것이 세이초의 목적이었다. 권력을 목표로 달려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부리기 쉬운 노예이며, 여성의 육체만큼 손에 넣기 쉽고 여러 가지로 이용하기 좋은 도구도 없다는 걸 <짐승의 길>의 다미코의 종착점이 보여준다.




▲ 영화 <제로 포커스> 스틸컷 ⓒ 거원시네마㈜
2009년 영화화 된 <제로 포커스>는 1959년 발표된 <제로의 초점>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세이초가 전후 일본 여성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쓴 작품으로 보인다. 맞선을 보아 결혼한 데이코는 신혼 첫날밤을 치르자마자 신랑이 실종되는 사건을 맞는다. 남편의 실종을 추적하면서 데이코는 사건이 패전 후 미군과 관계를 맺은 일본 여성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국도 양공주가 사회적 천대를 받는 비슷한 과거를 갖고 있지만, <제로의 초점>은 정반대의 관점을 보여준다. 미군과 사귄 일본 여성들은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일본 바깥의 세계를 내다보았던 것이다. 논란이 일어날 법한 부분이지만, 세이초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여성들은 세간에서 생각하는 그런 여자만 있는 게 아니야. 교양 있고 똑똑한 여자들도 많아."

영화 <제로 포커스>는 한때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히로스에 료코와 일본 영화계의 명배우 나카타니 미키가 주연을 맡았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한국의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했다. 이에 대해 <제이피뉴스>에 여배우이자 에세이스트 구로다 후쿠미가 '제로의 초점 무대가 한국이 된 까닭?'이라는 칼럼을 썼다. 관심 있다면 찾아봐도 좋을 듯하다.

전쟁의 욕망과 파시즘을 품은 일본에서 탈출하기

군국주의 일본이 (조선인까지 포함한) 온 국민을 천황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전쟁용사로 만들려다가 다행히도 패전했지만, '흑막'은 다시 한 번 살아남은 국민을 경제 전쟁 전사로 만들었다. 인생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돈과 권력 외에는 아무것도 욕망할 수 없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쉴 새 없이 쳇바퀴 돌리듯 달리도록 내몰았다. 회사에서 승진하고 집과 차를 사고,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행복이자 사회에 공헌하는 유일한 길이다.

단편 <역로>는 그렇게 국가가 꽉 짜놓은 국민의 삶에서 탈퇴하려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은행에서 일벌레로 불리며 승진을 거듭한 주인공은 정년을 하자마자 거액을 들고 자취를 감춘다. 아름다운 부인과 남부럽지 않게 자리 잡은 자식들, 상당한 재산과 사회적 출세 등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실종된 것이다. 그러나 행적이 밝혀지면서 주인공이 누구나 부러워하는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세이초 소설에서 불륜은 매 작품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또 좋게 그려지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세이초는 <역로>의 불륜에 대해서는 고갱의 삶을 언급하는 것으로 입을 다문다. 말년의 고갱은 모든 구성원의 삶을 틀에 맞춰 규격화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이티로 떠난다. <역로>의 주인공이 사라진 이유는 흔해빠진 불륜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짜놓은 구조에서 궁극적으로 탈퇴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비해 2009년 드라마화 된 <역로>는 아름다운 풍경을 입혀 어두운 로맨스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답답한 사회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제는 제작진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칠 대로 지친 형사 야쿠쇼 코지가 읊조리는 마지막 대사는 오랫동안 단련된 일본 드라마의 힘을 느끼게 한다.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안개 깃발>은 2010년 니혼TV에서 드라마화 되었다. 일본 드라마 팬이라면 익숙한 얼굴의 아이부 사키와 유명한 가부키 집안 후계자 출신 배우 이치카와 에비조 주연이다.

<안개 깃발>에서 변호사 오츠카는 명성을 날리는 변호사이다. 그에게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오빠를 구해 달라는 여성 야나기다가 찾아온다. 오츠카는 절박한 야나기다를 문전박대하여 내쫓고, 야나기다의 오빠는 교도소에서 죽는다. 복수를 결심한 야나기다는 오츠카에게 접근하고 치정과 불륜, 살인사건이 뒤섞인다.

줄거리만 나열하면 흔해빠진 복수극이지만 신기하게도 오츠카는 몰락하고 나서야 자신이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츠카의 파멸은 구원으로 이어지고 야나기다의 복수는 허무를 남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고 복수를 통해 출세욕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스토리는 그야말로 '업'이라는 말이 아니고는 표현되지 않는 탄성을 자아낸다.

세이초는 역사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고 훌륭한 역사소설을 여러 편 써냈다. 그냥 읽어도 훌륭한 오락거리지만 세이초 특유의 역사적 관점을 이해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세이초는 논픽션 <쇼와사 발굴>에서 상세한 자료 조사를 통해 실은 당시 일본 국민 개개인이 파시즘의 욕망을 품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은 국가와 국민이 한데 공모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국민 개개인도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이초 문학 세계가 결백한 자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일본이 극우의 절벽으로 엑셀을 밟기 시작한 지금이야말로 세이초의 문학이 한국에서 조명 받을 적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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