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9

[위안부] 5강 후기 '불량 병사'와 제국(1) (2)- 강좌자료 - [수유너머104] 지식공동체

[위안부] 5강 후기 '불량 병사'와 제국(1) - 강좌자료 - [수유너머104] 지식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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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5강 후기 '불량 병사'와 제국(1)

김요섭 2017.08.30 15:18 조회 수 :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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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에 던지는 '다른' 질문들] 5강 후기

불량 병사와 제국

카케모토 츠요시 선생의 「어떤 일본병사의 논리 – 후루야마 고마오의 전장소설에서」는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을 중심으로 제국의 논리를 내면화는 않으면서 병사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방식을 주목한다.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은 전쟁 기간 내내 군인 다운은 자세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일등병으로 진급하지 못한 불량군인이었던 자신의 시선에서 전쟁을 바라본다. 카케모토 츠요시는 후루야마의 전쟁 문학에서 병사로서의 주체성을 내면화하지 않는 지점들을 주목한다.

후루야마는 ‘운’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태평양전쟁이라는 사건과 일본 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교차 속에 배치된 인간들을 우연적 상황에 지배되는 무기력한 존재로 설명한다. 병사들의 생존은 운의 결과일 뿐이며 이는 국가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판단한다. 카게모토는 ‘운’의 논리가 병사를 포함해 제국의 모든 성원들을 국가의 주체에서 역사와 시간의 객체로 위치이동 시킨다는 점에서 제국이 요구한 주체화된 병사의 논리에 균열을 가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우연의 지배 속에 놓여있는 객체적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필연성의 논리를 통해서 병사들을 동원하는 제국의 시선과 합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후루야마의 ‘운’의 논리가 전쟁에 대한 책임과 반성의 사유를 회피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목하는 것은 바로 제국의 세계와는 분열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주체화를 거부하는 자기 정립 방식이기 때문이다.

‘운’의 논리는 전쟁의 주체들을 오히려 객체로 뒤바꿔 평가함으로써 제국의 논리를 빗겨나가는, 판단의 영역이라면 ‘페니스’에 대한 후루야마의 태도는 병사되기라는 제국적 주체화의 과정을 거부하는 실천의 영역이다. 카게모토는 일본 병사되기 속에는 성적 가해의 주체라는 폭력적 남성성의 실천이 결부되어 있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위안소제도였다는 히코사카 다이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병사되기와 (콘돔인 ‘돌격 일번(突擊 一番)’을 착용한 병사의 ‘무기’인) ‘페니스’를 사용하는 ‘성 능력 - 성적 착취’가 결합되어 있었음을 지적한다. 제국의 병사로 거듭나기는 곧 위안부를 성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페니스’의 사용을 통해서 남성다움을 증명하는 일이며 이러한 관점은 안연선의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삼인, 2003)에서 ‘위안부’와 일본군이 각자 위안소 제도를 통해서 제국의 신민(국민)으로 훈육된다는 설명과 유사하다.(위안소 제도의 목적을 ‘정신적 위안’에서 찾음으로써 성적 착취의 존재를 주변화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의 관점도 병사와 ‘위안부’가 천황의 안배 아래 의사가족적 관계로(천황제 가부장의 구조로) 결합됨으로써 제국의 국민이 된다고 설명하여 위안소 제도를 통한 병사와 ‘위안부’ (제국적)주체화의 문제를 인지하고는 있다.)

후루야마는 일본군의 페니스 집착을 조롱하면서 위안소를 가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제국의 병사되기를 회피한다. 그는 페니스로 체중을 견디는 병사를 상상함으로써 일본군의 남근주의를 조롱하며 위안소를 이용하는 대신 자위를 통해서 성욕을 해소한다. 카게모토는 ‘자위’와 ‘화류병’을 금기시하는 당시 일본의 성교육의 성격을 지적하면서 화류계를 즐기던 경험을 통해 위안소를 바라보고 자위하며 위안소를 거부하는 태도가 (병사로서의)젠더 재생산을 거부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후루야마의 소설은 이처럼 제국의 논리에 빗겨서 있는 지점에서 병사들의 시선을 재현한다. 그의 접근은 한 편으로 제국이 만들어내려고 했던 병사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불량 병사’의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제국에 의해서 관념화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필터링 되지 않은 목소리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병사’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카게모토 선생의 연구에서 주목할 점은 후루야마의 소설이 제국의 논리에서 빗겨 서려는 ‘불량 병사’의 재현이자 동시에 제국의 프로파간다와 연합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전후 일본국가의 담론 어디에도 수용되지 않는 ‘병사’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음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즉 후루야마의 ‘불량 병사’는 일본 ‘제국’이 만들어 내려고 했던 병사-주체도, 전후 일본 국가의 기억과 담론 속에서 (재)구성된 병사도 아닌 우연히 전쟁터의 공간 위에 배치된 ‘병사’의 시선과 목소리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고유함을 가진다. 국가에 동원된 주체를 설명하는 문제는 이중의 부담이 있다. 사건 속에서 동원된 개인은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적 주체의 형상에 의해 굴절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에 대한 기억과 사후의 담론속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 재현은 이러한 이중의 굴절 속에서 개별 주체의 경험을 훼손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후루야마의 ‘불량 병사’를 주목하는 카게모토의 연구가 가진 의미는 병사의 존재를 (재)구성하는 재현의 불안전성을 우회하는 방식을 일정부분 설명해준다는 점이다.

(제국의 신민으로써)병사와 제국의 규율에서 일탈한 ‘불량 병사’, 그리고 담론적 재현의 포위를 벗어난 개인인 ‘병사’라는 구분을 후루야마의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병사와 ‘불량 병사’, ‘병사’ 사이에는 끝내 빗겨 서지 못하는 연속성이 자리한다. 이는 다시 ‘나=병사’라는 공통성이다. 즉 그 재현의 양식과 심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전시에 이들이 놓여있던 자리가 제국의 병사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때 병사를 동원했던 제국의 전쟁은 별다른 오작동 없이 수행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불량 병사’와 전쟁 수행 사이의 연속성은 카게모토 선생이 인용한 후루야마 소설의 한 부분에서 불길하게 암시된다. “군대에서, 나는 어떠했는가. 운이 좋게도 나는, 포로를 죽이라, 라고는 명령받지 않았다. 그러나, 가령, 명령을 내렸다면…….” 후루야마의 전쟁문학 삼부작 중 한 편에서 인용한 이 부분에서 주인공 ‘나’의 독백은 ‘불량 병사’가 제국의 군대에서 행동할 수 있는 일탈의 한계영역을 정확히 그어준다. ‘불량 병사’는 위안소를 가지 않고 병사들의 남성성을 비웃을 수 있지만 명령이 내려온다면 그는 전쟁 속에서 인간을 살해할 수 있으며 전쟁포로에 대한 불법적인 살인도 마찬가지다. ‘불량 병사’가 제국의 전쟁 범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지 좋은 ‘운’을 통해서 다른 업무를 배정받는 것뿐이다. 후루야마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데 그는 운이 좋게도 전선의 잔혹행위에 직접가담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포로수용소의 관리자로 복무함으로써 그의 불량한 태도와 일탈 여부는 제국의 전쟁 수행 과정에 어떤 저해요인도 되지 않았다.

인민을 동원의 대상으로써 주체화하는 제국 혹은 국민국가의 규율 속에 일탈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조건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특정한 정치적 주체로써의 국민을 창출하고자 하는 국가는 단순히 일회적으로 국민됨의 조건을 선포함으로써 이를 달성할 수는 없다. 실상 국가에 의해서 선포된 국민됨이란 지속적인 국가의 규율의 수행 속에서 달성되는 일시적 상태에 가깝다.(이승만 정권시기 반공국민의 형성을 연구한 김득중은 ‘반공국민’이란 국가의 규율 속에서 계속 실천해가는 수행성의 성격이 강하다고 지적한다.『빨갱이의 탄생』(선인, 2009), 국민됨과 수행성의 문제는 국가에 불만을 드러낸 상이군인들에게도 적용된 빨갱이 담론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김봉국, 「이승만 정부 초기 애도-원호정치」, 『애도의 정치』, 길, 2017)) 국민의 입장에선 자신의 국민됨을 끝없는 자기 실천 속에서 증명해야하며 국가의 입장에선 국민됨에 대한 지속적인 규율과 감시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일탈하는 주체들의 존재를 전제하고 국민을 창출해야만 한다. 후루야마 고마오와 같은 불량 병사의 존재는 제국에게 있어 예외적인 상황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니다.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불안이며 동시에 관리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물론 어떤 일탈은 국가의 규율을 초과하며 오히려 국가의 국가됨을 의문시하고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저항과 (랑시에르적 의미의)정치로 거듭나기도 한다. 문제는 과연 후루야마의 일탈이 제국에게 있어 어떤 것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전체주의적 체제 속에서도 일탈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며 어떤 일탈은 국가의 주요한 정치적 목표에 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일본의 사례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제한적이므로 같은 시기 독일의 사례를 통해서 전체주의 체제의 국가가 감내해야 했던 일탈, 특히 나치국가의 핵심적인 정치적 목표였던 ‘유대인 없는 유럽’과 ‘인종적 순수성의 유지’에서 국가가 직면한 일탈의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인종적 순수성’과 ‘유대인 없는 유럽’이라는 나치 국가의 핵심적 목표는 흔히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극단적인 수단, 즉 제노사이드(지그문트 바우만은 제노사이드를 특정한 사회를 구성하려고 하는 국가의 전망을 실천하는 극단적 사회공학이라고 규정한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새물결, 2013)까지 용인했다. 인구절멸과 같은 극단적 수단을 동원할 만큼 이 문제에 대한 나치 국가의 목표는 확고했지만 동시에 이를 향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국민/병사의 일탈을 직면한다. 독일인들이 반유대주의 나치집회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예외적이고 선량한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끊기를 거부한다는 하인리히 힘러의 불평처럼(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개마고원, 2009) 반유대주의라는 국가적 목표를 심정적으로 외면하는 독일인의 일탈 사례가 존재하며 보호받을 유대인을 외면하게 하려는 압력은 나치국가 초기에 유대인 규정에 대한 혼란으로 나타났고 일부에서는 총통의 특정 유대인에 대한 ‘해방’조치로 이어지기도 한다.(힐베르크, 같은 책)

유대인 ‘이웃’에 대해서 독일들이 보였던 정서적 태도의 문제는 나치 국가가 유대인에게 가한 공개적 폭력이었던 ‘부서진 수정의 밤’에서 극명하게 들어난다. 1938년 나치 돌격대가 감행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린치는 1회적 사건으로 그치고 마는데 유대인 ‘이웃’에 대한 가시적 폭력에 대한 독일인들의 거부감 때문에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힘러가 불만스럽게 토로하던 나치의 이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일탈적 태도는 나치 국가로 하여금 ‘유대인 없는 유럽’을 실현하는데 있어 행정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부서진 수정의 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독일사회에서 제거하려는 행정적 조치들은 흔들림 없이 지속되어 학살수용소와 같은 극단적 수단까지 고도화되어간다.

나치국가의 국민됨(인종적 순수성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신념)을 내면화하지 않은 독일 국민들의 ‘일탈’은 행정적 부담이었으나 동시에 행정적으로 극복 가능한 문제였다. 독일 국민은 이웃 유대인이 폭행당하는 상황을 지켜보기 힘들어 했지만 유대인들의 법적 권리가 제한되는 일련의 흐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독일의 지식인 사회조차 유대인들이 겪은 직업적 차별과 금지 조치에는 침묵했다.(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의 일상사』, 개마고원, 2003) 독일인들의 일탈은 린치에 대한 심정적 불만에 머물렀을 뿐 ‘유대인 없는 유럽’이라는 나치 국가의 목표를 되묻지 않았다. 유대인들을 제거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독일 국민과 병사들의 심정적 불만은 새로운 행정적 조치와 기술적 대안을 통해서 극복되어갔다. 즉 가시적 폭력에 대한 불만은 동유럽 식민지 게토로의 강제이동으로, 유대인 총살에 대한 병사들의 정서적 충격과 불안은 가스실을 통해서 관리해나간 것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물론 일부 일탈사례가 나치국가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한 사례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유대인 없는 유럽’이라는 목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존재하지 않았다.(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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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5강 후기 '불량 병사'와 제국(2)
 김요섭  2017.08.30 15:19  조회 수 : 186

아래 글에 이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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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핀 사례가 일탈이 저항이 되지 못하고 국가의 관리 아래 놓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독일 병사들의 태도는 일탈이 언제든 국가의 폭력과 공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관계와 남성성, 병사다움을 결합하는 남근중심적 군사주의는 일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독일 병사들 사이에서도 성관계, 특히 강간과 같은 강압적 성관계는 군사 문화 속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성 집단에서 가장 선호하는 대화의 주제였다.(쥥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민음사, 2015) 성적 착취를 정당화하고 심지어 권장하기도 했던 독일의 군사문화는 나치 국가가 추구한 ‘인종적 순수성’을 위협하는 일탈을 부추기기도 했다. 나치 국가는 법률적으로 다른 인종간의 성관계를 금지해왔지만 점령지 주민들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력수단을 가진 독일 병사들이 그런 착취의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 여성에 대한 성 착취가 만연했는데 이는 엄연히 나치국가가 금지한 불법이었기에 병사의 일탈 행위였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나치국가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성관계 이후 유대인 여성을 살해하는 경우가 흔히 빈번했는데 이런 살인은 국가에 의해 결정된 유대인의 운명(예정된 절멸)을 통해 정당화되었다.(쥥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같은 책.)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병사의 일탈 행동은 국가가 자행한 폭력을 일종의 기회로 삼아서 자신의 이득을 취할 수 있으며 국가와 자신 사이의 타협점을 설정함으로써 공모할 수 있다.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공모가 아니더라도 병사의 일탈은 국가의 폭력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장애 요인이 되지 않았다. 쥥케 나이첼의 지적대로 전쟁이 평시와 구분되는 사회적 상태라고 할 때(쥥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같은 책.) 사회적 일탈, 심지어 범죄가 한 국가의 사회적 작용에 동원되듯이(푸코가 근대 경찰국가에서 범죄가 관리되고 때로 동원된다고 지적하듯 말이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 2003) 병사의 일탈 혹은 범죄조차 국가의 외부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이렇게 국가의 목표를 거부하는 행동들이 어떻게 다시 국가로 회수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분석이 유의미한 참조점이 되어준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대인 희생자들이 홀로코스트의 제도 속으로 어떻게 동원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는 유대인 사회가 자신들을 보존하기 위한 기존의 방식, 즉 유대인 집단의 사회적 유용성을 국가로 하여금 인지하게 하려는 노력이 어떤 효과도 보지도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나치국가의 국가적 목표에 협력하고 그 실행의 필수적 단계로 자리함으로써(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부 유대인들의 희생을 허용함으로써) 전체의 생존을 도모했다. 그러나 파괴의 단계가 가속화될수록 유대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희생의 범위는 확대되었으며 자신들을 파괴하려는 체제의 일부에 더 긴밀하게 결합되어 갔다. 유대인의 유용성(특히 군수산업 분야에서의 전문 인력의 필요성)은 특수한 직능을 수행 가능한 집단 중 일부의 희생을 늦추고 그렇지 못한 집단을 제거대상으로 선명하게 나누었다. 바우만은 독일과 유대인 사이의 사회적 동원의 목표를 설정하는 주체에서 유대인들이 배제되었기에, 즉 ‘유대인 없는 유럽’이란 국가의 목표는 결코 조금의 수정도 없었기에 유대인의 유용성은 이를 달성하는 과정에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회적 목표를 설정하는 어떤 집단과도 연결될 수 없었으며 그들의 합리성은 나치 국가의 단일한 목표에 종속되었다. 바우만이 사회공학으로서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해결의 방안을 “다른 사회적 전망”을 주장할 수 있는 사회적 다원성의 영역에서 고민했던 이유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즉 국가의 목표, 혹은 이를 설정하는 정치집단 자체를 상대화할 수 없을 때 동원의 바깥이란 없다. 앞서 살핀 일탈의 사례들 속에서 나치국가의 목표는 언제고 암묵적으로 승인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탈과 저항의 경계선은 아마도 이 지점에 놓여 있으리라.

다시 후루야마 고마오의 ‘불량 병사’로 돌아와 일탈과 저항 사이의 좌표 속 어디에 그가 자리했는가를 살펴보자. 후루야마는 운의 논리를 통해서 병사로서 주체화되지 않는 자기 논리를 전개한다. 전쟁 속의 모든 사건을 선택이 아닌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 즉 책임질 필요 없는 우연의 산물로 여긴다. 병사로서의 책임 없음은 제국이 병사에 요구하는, 전쟁의 필연성과 희생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일탈이다. 그러나 한편 책임 없음은 국가의 요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정당화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유대인 학살에 갑작스럽게 동원되서 혼란스러워했던 독일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음(모든 책임은 결정권자, 즉 상부에 있음)을 강박적으로 확인했고(크리스토퍼 R.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책과함께, 2010) 스탠리 밀그램의 심리학 실험에서 증명되었듯 가혹행위를 정당화는 핵심적인 심리적 기제였다.(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에코리브르, 2009) 실행자와 결정권자를 분리하고 실행의 단계를 세분화하여 책임을 분산하는 것이 제노사이드를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한 근대의 제도적 조건(관료제)이라는 바우만의 지적(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을 생각하더라도 ‘책임 없음’을 뒷받침해주는 사유에서는 어떤 위험성을 느끼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군대에서, 나는 어떠했는가. 운이 좋게도 나는, 포로를 죽이라, 라고는 명령받지 않았다. 그러나. 가령, 명령을 내렸다면…….”는 후루야마의 소설 속의 무기력한 주체의 발화는 책임 없음의 사유가 가진 무력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 ‘불량 병사’는 책임지지 않음으로써 결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명령이 내려오던, 그게 포로에 대한 살인일지라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운에 대한 후루야마의 사유는 관료제적인 태도와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바우만이 설명한 관료제적 구조는 실행자의 책임은 분산되고 최종결정권자에게는 책임이 집중된다. 반면 후루야마의 ‘운’ 개념에서는 일본 제국의 지도자들조차 책임을 질 수 없다. 지도자조차 운에 좌우되는 개인일 뿐이다. 그는 인간을 개인의 층위에서 평등화하고 다시 그 개인은 운이라는 외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 존재로 객체화한다. 이러한 개인화는 국가의 가부장인 천황 아래 위계화 된 국가의 국민이란 규정을 교란한다는 점에서 일탈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국가를 인간의 선택에서 분리하여 고정된 실체로 만들어 놓는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지도자들을 규탄하겠다고 흥분조로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나타났지만 어떤 기준으로 전쟁지도자를 정한단 말인가. 나라를 저주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라는 기구이기 때문에 저항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기구인 국가는 저항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후루야마의 언명은 그의 일탈이 끝내 저항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라는 기구이기 때문에 저항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언술에서 국가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대상으로, 저항을 통해서 변형될 수 없는 고정적 실체로 분리되어 나간다. 즉 그는 국가를 인간의 바깥에 둠으로써 동원의 외부를 상상할 수 없게 한다.

후루야마가 국가를 인간의 행동 바깥에 자리하도록 한다는 의심은 병사의 운에 대한 서술에서도 암시된다. 그는 전장에서 병사가 마주하는 여러 상황 뿐 아니라 명령도 ‘운’의 문제로 치부한다. 운이라는 인간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에 국가의 명령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명령은 권력자의 결정이며, 특히 일본군에 만연했고 후루야마가 근심했던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는 외적 조건 속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현장 지휘관들의 권한 아래에 놓여있던 것이었다. 명령이 내려오는 일은 병사 개인으로써는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 명령하는 지도자에게는 결정의 문제이며 ‘국가라는 기구’ 역시도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 일본 지도부 사이의 지속된 혼란이 보여주듯 인간의 투쟁 속에서 결정된 결과였을 뿐이다.

국가와 명령을 운으로,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외부로 환원시키는 사유는 현실을 선험적인 조건으로, 자연화 한다. 후루야마는 불량 ‘병사’로서 군과 병사의 태도를 의문시하고 조롱할 수 있지만 병사로 동원되었다는 사실,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전쟁과 국가의 동원, 그 거시적 사건 속에 자신이 편입된 것은 운, 즉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선험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후루야마는 (주체로서)병사되기의 규율을 일탈해서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제국의 병사라는 관념적 틀 속에서 갇히지 않은 ‘병사’의 목소리를 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재현한 ‘병사’와 ‘불량 병사’ 모두 제국의 병사로써 전쟁에 복무하고 있으며, 국가의 명령을 (내면의 불만과 갈등이 있을지라도)서슴없이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군의 정상적인 일부분이었다. 즉 후루야마의 ‘불량 병사’란 ‘불량 병사’로서 병사가 아닌 것이 될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다시 제국을 전쟁을 하지 않는 국가 혹은 이 다른 사회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닫아버림으로써 제국을 영구한 기계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자연으로써 내면화한 인간의 자리에 놓였다는 우려를 거둘 수 없다.

국가, 그리고 그 국가의 현실을 자연화하는 일을 다시 후루야마가 마주한 위안부들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되묻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후루야마는 징용을 당했다는 위안부의 입을 통해서 다시 운의 논리를 반복한다. “운이요. 위안부되는 것도 운이요. 병사, 총알에 맞는 것도 운이요. 다 운이요.” 유곽을 즐겨 이용했으면서도 위안소를 가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되묻는 후루야마는 유곽과 위안소 사이에 자신이 느낀 어떤 경계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유곽에서 경험할 수 없는 전장에서의 사건들, 「하얀 논」에서 버마인 여성에 대한 고문을 도왔던 경험조차 문학적 섹슈얼리티의 한 부분의 놔둘 뿐이다. 유곽과 전장, 유곽과 위안소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가능했던 성관계의 격차, 성적 착취와 가혹행위의 간극은 고민의 대상에서 사라지고 감각으로서의 섹슈얼리티만이 떠오른다. 징용에 대한 위안부의 증언이 가지는 유곽과 위안소의 경계, 국가가 성을 동원하는 주체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는 징용의 서사(성병 통제를 위해서 식민지의 화류계 여성의 동원을 배제하려고 했던 일본군의 정책을 고려한다면(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군대위안부』, 소화, 1998) 징용의 서사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경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그저 운이라는 사유 중단의 수사를 통해서 소거된다. 이 모든 것은 운일 뿐이며, 그 운을 통제하는 국가란 대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을 뿐이다. 평시의 유곽과 전시의 위안소 사이에 놓인 다른 국가의 모습은(화류병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교육하는 국가와 이를 제공하고 동원하며 권장하는 국가) 가시화되지 않는다.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후루야마의 재현 속에서 ‘불량 병사’는 병사이기를 거부할 가능성도, 전쟁하는 국가를 거부할 가능성도 고민하지 않는다. 불량 병사는 끝내 (제국의 규범적 병사되기의 내면화가 아니라) 직무로써의 ‘병사’이기를 거부하지 못하여서 저항이 아닌 일탈의 자리에 남는다. 일개 ‘병사’일 뿐인 그들에게 전쟁과, 제국에 맡서는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과도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병사와 제국 이외에 어떤 상상력도 남겨두지 않는, 변화에 대한 사유를 닫는 일은 위험하다. 후루야마가 참전했던 바로 그 전쟁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사유 없음은 곧 국가의 가공할 폭력이 인간을 동원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는 점이다.(‘아이히만 재판’의 재판부는 국가의 합법적 명령을 수행한 아이히만을 처벌하면서 국가의 명령을 부당하게 느끼면서도 그 임무에서 벗어나려는 어떤 노력조차 하지 않았음을 처벌의 근거 중 하나로 삼았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운을 통해서 국가와 병사가 된다는 것에 대한 사유를 멈춘 후루야마 고마오의 시선에 수긍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치룬 전쟁의 교훈을 그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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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gem  
2017.08.31 13:18

구조적으로 코멘트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주신 코멘트에 대한 대답은 이 글을 완성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책의 서지 정보도 감사합니다. 참조해보고 저의 논의를 좀 더 입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몇까지만 쓰겠습니다.

 

후루야마에게 근본적 저항이나 외부가 없다고 하면 그렇습니다. 사실 일본군 병사였던 분들 중에서 중국귀환자연락회 등 몇까지의 사례를 빼고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은 찾기 어렵습니다. 일본의 68년 전후의 학생운동이 겨우 ‘가해자로서의 일본인’이라는 관점을 제시할 수 있듯 그들보다 윗세대인 전중파 사람들에게 ‘주체’ ‘책임’을 자각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을 터입니다.

 

저는 감히 그러한 ‘주체’나 ‘책임’의 영역에 서지 못했던 병사들의 사례를 들고 ‘위안부’문제를 재구성하려고 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배울게 없는 잘못된 사람들의 글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일까? 라는 문제제기를 시도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도 그 상황에 있다면 그럴 것같다’는 느낌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저항한 병사들보다 저항하지 못한 병사들이 훨씬 더 공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후루야마를 읽으면서, 그에게서 얻을 일이 있다면, (1) ‘운’에 ‘저주’를 기입한 것, (2) 누구도 정리한 바 없는 후콩 전투에 대해 집요하게 재구성한 것을 제기할 수 있다, 고 생각했습니다. 김요섭님이 지적해주신 “그저 운이라는 사유 중단의 수사”의 영역에서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지 나름 고민을 해보면서 도달한 게 이 두 가지입니다. ‘위안부’와의 교섭 장면이나 성적인 무능함에 대해서는 이미 후루야마에 대한 논의에서 진행된 바 있기 때문에 제가 새롭게 논의한 점은 아닙니다(물론 새롭게 부각시킨 점은 있습니다만).

 

약간 추상적인 말들의 나열이 되었는데, ‘잘못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영역에서 얻을 일을 찾으려고 하고 싶었고, 그리고 그 영역에서 말이 나올 때에 와서야 겨우 우리에게 도달할 언어도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 가지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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