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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6 June 2016 · Shared with Public
“친일파 김연수”에 관한 백승종의 변론
0. “친일청산문제”에 관하여는 대다수 시민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아래는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등법원 및 대법원에서 다뤄진 “김연수”에 관한 친일반민족행위결정취소 사건(사건번호: 2012두3934)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가 증인으로서 제출한 <진술서>의 일부입니다.
이 사건은 제1심과 제2심에서 원고(김연수 자손)가 연달아 패소하였습니다. 대법원 역시 2013년 7월 12일 자로 본 건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요컨대 사법적으로는 김연수의 유죄로 이미 결론이 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사법부와는 견해를 달리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가운데는 제 의견에 동의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반대하는 분들도 적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친일파 청산”에 관심이 깊으신 분들은, 시간이 되시는 대로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백승종의 증인 진술서
[증인의 약력 등] (생략)
[증인의 진술]
1. 증인은 국내외에서 한국학연구에 종사해왔습니다. 한국근현대사 분야도 증인의 연구 대상입니까.
저는 독일의 튀빙겐대학교, 베를린자유대학교 및 보훔대학교 재직시절 한국근현대사를 연구하고 강의하였습니다. 서강대학교에서 재직하던 시절에도 학부 및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및 한국근현대사를 지도하였습니다. 제 책 <그 나라의 역사와 말>은 일제시기 농촌지식인 이찬갑의 고뇌를 연구한 것입니다.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은 6.25전쟁 직후의 북한사정을 알려주는 사진자료를 발굴, 소개한 책자입니다. 또한 <아버지 난 누구예요>는 서강대학교 학생들을 지도하여 그들 나름으로 현대사를 쓰게 한 결과물입니다. 은사 이기백 선생이 강조하셨듯이 모든 역사가는 자신의 전공에 관계없이 또한 현대사가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역사가는 결코 현실을 외면할 수도, 떠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2. 증인은 이른바 좌파신문이라고 하는 ‘한겨레신문’에 5년째 매주 역사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로 증인은 “좌파 진영”의 역사가입니다. 그런 증인이 친일파로 낙인찍힌 망인(김연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와 <조선의 통치철학>의 연구에 망인이 설립한 하서학술재단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하서재단의 연구지원을 받은 일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 일과 망인에 대한 제 관심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망인과 같은 역사적 인물의 업적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망인이 걸어간 길은 한국근현대사의 고뇌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알다시피 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미시사(microhistory) 연구에 매달려왔습니다. 국가와 민족 중심의 거시사(macro history)가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극복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 제 입장에서 망인에 대한 재판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족합니다. 한 개인의 삶을 국가/민족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가령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런 재판은 그 자체가 국가권력이 개인을 상대로 저지르는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증인의 주장은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습니까. 차이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저는 이른바 ‘뉴 라이트’ 계열의 학자들과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릅니다. 이른바 보수 우파는 물론 뉴 라이트나 이른바 진보적 좌파라는 역사가들과도 다릅니다. 방금 말씀드린 그들 학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지나치게 국가/민족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는 역사적 행위를 평가하는 기준이 국가/민족의 이익입니다. 그들은 근대민족국가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개인이나 단체가 어떠한 행위를 할 때 국가/민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19세기의 ‘내셔널리즘’이란 낡은 이념에 따른 판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망인이 활동하던 20세기 전반에는 현실적으로 망인 같은 한국인을 보호해줄 한국이란 국가가 없었습니다. 물론 한국민족이란 개념은 존재하였지만, 그 역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다면적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국가를 상실한 한국민족이 현실적으로 그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보호나 강제를 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망인을 포함하여 그 시대의 대다수 한국인들은, 한민족이란 관념을 공유했습니다. 그러한 민족적 감정이 그들의 역사적 선택과 결단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때로 상당한 불이익을 자발적으로 감수하였습니다. 망인과 망인의 형 김성수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한국이란 국가도 한국민족이란 관념의 공동체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에게 부담과 짐이 될 때가 많았던 한국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 개인이 단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민족정기를 살린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여러 개인의 명예가 함부로 실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못한 곳에서조차 일방적인 의무만이 강제될 수 있는 것일까요. 망인처럼 삶의 전 과정에 걸쳐서 사실은 민족/국가적 이익을 위해 다방면(교육, 사회, 기업, 문화 등)의 노력을 기울인 경우조차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뒤늦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망인의 일생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으로 폄하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4. 망인은 친일행위를 통해 막대한 기업이익을 냈다는 것이 해당 위원회의 결론입니다. 망인이 자발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고 봅니까. 이윤을 얻기 위해 망인이 자발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고 보는 견해를 증인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순수하게 논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말해, 망인은 1920년대 초반부터 기업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런데 1937년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친일반민족’의 혐의를 받을 만한 행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극히 논리적인 물음을 가지게 됩니다. 1937년 이후 망인에게 이른바 친일의 혐의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발적, 주도적 친일행위였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상세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당위원회와 법정이 망인의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하여 판단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답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망인이 과연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망인의 ‘친일행적’을 입증하려는 그간의 노력은 유감스럽게도 충분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은 가설이 우선 검토되어야 합니다. 가령 망인이 친일행위를 거부하였을 경우 정상적 기업 활동이 불가능하였다면, 그의 친일행위를 자발적 친일행위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까. 기업가인 망인으로서는 국가도 유지하지 못하는 관념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사업을 반드시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망인이 자신의 직업인 기업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비유컨대 일제에 곡식을 공출 당하는 것이 친일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농업을 그만둔 농민이 있었다면, 그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아 마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농부가 계속 농업에 종사했다고 하여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점은 종사하는 직업이 공업이든 상업 또는 교육이나 기업 활동이라 해서 달라질 이유가 없다고 믿습니다.
5. 증인은 규탄 받아 마땅한 친일행위란 일제시기에 전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그런 주장입니까.
분명히 비난받아야 할 친일행위가 있기는 하였습니다. 반인륜적 행위가 그에 해당합니다. 인권을 유린하고 나아가 침략전쟁을 직접 수행한 행위는 누가 보아도 범법행위였습니다. 그에 관하여는 마땅히 사법적 처리가 뒤따랐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반국가 또는 반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할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을 규탄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념과잉이 빚은 감정적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민족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의 관념적인 공동체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이 한민족의 전부를 포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국가가 단 하나의 민족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닙니다. 민족이란 이름으로 어떤 행위를 미화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역사적 현실에 부합되지 못하며, 바람직한 미래상도 결코 아닙니다.
5. 망인은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훈포장을 받았습니다. 해당 위원회와 법정에서는 그런 사실들이 모두 망인의 친일행위를 증명한다고 봅니다. 증인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훈포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망인이 친일행위를 적극적으로 하였을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만으로 ‘친일반민족행위’가 입증된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럴 가능성이 높아질 뿐입니다. 훈포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함부로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으로 망인의 훈포장 관련 사실을 검토해보았습니다. 피고는 훈포장 사례를 가지고 망인의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실체적 진실의 광맥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주장합니다. 하지만 훈포장에 관한 기록을 엄밀하게 따져 보면, 피고가 내린 결론이 부정될 수 있습니다.
우선 피고는 1915년 망인이 조선총독부에 도로부지와 용지를 기부한 대가로 목배(木杯)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친일반민족행위와 무관한 것입니다. 총독부체제 하에서 저들은 도로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으레 유지들에게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망인은 당시 십대 청소년으로 일본에 유학중이었습니다. 목배는 망인의 친일행위와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이런 훈포장조차도 1937년까지는 망인에게 다시 주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피고는 오히려 이런 사실에 주목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다가 1937년부터 망인이 총독부에 기부한 횟수와 금액이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것은 물론 모두 중일전쟁 발발이후의 전쟁분위기, 즉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1937년 총독부가 산업장려관을 만들면서 신축비를 모금하자, 망인은 1천원을 기부했습니다. 기부금의 성격상 ‘친일반민족행위’로까지 문제 삼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1942년에는 공립심상소학교를 신축할 때 망인은 1천원을 기부했고, 그로 인해 포상(褒賞)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 역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아동들이 다닐 공립학교 건설에 약간 금액을 기부한 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1939년 조선총독부가 박물관을 건설할 때도 망인은 1만원을 기부했고, 그 바람에 ‘감수포장(紺綬襃章) 식판(飾版)’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친일반민족행위로 보기에는 부적절합니다. 또 1943년 망인은 방적공업의 선구자로 인정받아 녹수포장(綠綬襃章)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친일반민족행위’라고 강변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1937년 이후 망인이 총독부에 기부금을 내게 된 자체가 반드시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일반 시민들조차 가지각색의 명목으로 총독부에 돈을 뜯겼습니다.
만일 망인에게 문제되는 행위가 있었다면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1944년 망인이 징병제 실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본군 조선참모장이 감사장(感謝狀)을 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감사장’ 하나를 가지고 망인에게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심한 과장이고 비학문적 태도입니다. 또 하나 남은 문제는 1940년 망인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3만원을 기부했다고 하여 감수포장을 받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망인이 과연 총독부에 거액의 기부금을 바친 것이 자발적인 결정인지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948년 특별재판소에 망인이 참고자료로 제출한 서류 가운데 총독부의 협박장이 있었고, 이를 입증하는 각종 진술이 존재하였습니다.
요컨대 망인의 훈포장 수여사실은 표면상으로는 마치 중요한 범죄행위처럼 보이지만 내실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억지춘향이나 다름없이 훈포장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망인이 특별재판정에서 그 점을 일일이 진술하지 않았다고 해서 피고가 대단한 위증혐의라도 확보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입증되지 않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특별재판소의 재판기록과 판결자체를 조사대상에서 간단히 배제하는 것은 심히 부당합니다.
6. 망인의 친일반민족 행적을 논하면서 피고는 일제에 많은 성금/헌금 및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을 거론하였습니다. 증인은 이 문제를 검토해 보았습니까.
그 내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현행법은 일정금액 이상을 기증했을 경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법의 취지를 고려할 때 금액만 가지고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한 일로 생각됩니다. 재산규모에 따라 기부금액이 갖는 의미는 달라져야 옳습니다. 망인과 같은 굴지의 재산가의 10만원과 일반인의 10만원은 비중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부금의 성격도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망인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자발적으로 기부한 적이 있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습니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사실상 식민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성금/헌금 따위를 강요하였습니다. 농부와 학생들까지도 헌납을 강요당하였습니다.
지위에 관계 없이 조선인에게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생산과 소비도 완전히 저들의 통제 아래 놓였기 때문에 특별세와 이른바 헌납마저 저들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조선총독부는 “1944년 2월부터 ‘농업책임생산제’를 실시하여 쌀, 보리 등 주곡은 물론 축산물까지 목표량을 생산토록 강요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각 부, 군, 읍, 면, 부락 단위로 세분, 각 개인에게 책임량을 돌렸다.”고 하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저들이 임의로 정한 “책임생산제는 농축산물 분야에만 그치지 않았다. 총독부는 1944년3월부터 광산과 공장에 대해서도 이를 적용하고, 육, 해군 후원 아래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광산연맹, 각 도 광산연맹 등과 공동으로 중요 광물생산 책임 완수 총궐기운동을 벌이며 군수물자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으로 통합니다.
심지어 조선 “총독부는 전쟁에 가장 필요한 전투기를 마련하기 위해 각 군마다 1개 비행기를 바치게 하는 이른바 일군 일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여 돈을 거두었다.”는 것이 ‘전시총동원체제’의 실상이었습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조선총독 “고이소는 통치비용도 조선인에게 부담시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941년 조선인들로부터 군사비특별회계 조입금이라는 명목으로 9,456만 8천 엔의 세금을 받은데 이어 1942년 ...엔을 거둬들였다.” 이것이 당시의 실정입니다.
심지어 조선 총독 “고이소는 모자란 군비를 충당하고자 저축도 강요했다.”고 하였습니다. “고이소는 자원동원으로 말미암은 불만을 줄이기 위해 황민화 구호 아래 조선인들에게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극도의 절제 생활을 강요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입니다. 악질적인 총독 “고이소는 민족저항운동 단속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심지어 해외 단파방송을 듣는 것조차 처벌했다.”는 것이 당대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피고는 과연 무슨 근거로 망인이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이상의 인용문은 정일성, <<인물로 본 일제 조선지배 40년. 1906-1945>>, 384-390쪽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망인과 같은 기업가에게 저들이 거액을 요구했을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낙인찍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자발성과 적극성이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추측이요 하나의 가정에 그칠 뿐입니다. 사인이 중대할수록 법의 적용은 더욱 엄격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망인이 일제 및 일본인을 위해 자발적인 성금/헌금을 한 적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금액은 얼마나 되는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망인이 한국인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기부금을 낸 일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사해보자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충격적입니다. 특별재판소의 판결문에서도 망인이 교육(중앙중학교 보성전문에 대한 출연과 그 외 학교에 대한 기부 등), 재해규휼, 체육보급, 종업원복지증진을 통한 사회사업, 양영회 등을 통한 장학사업 등 사회방면에 끼친 공적을 인정하였습니다. 여러 자료를 참조해 보면 일지시기부터 1949년까지 망인이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위해 현금으로 지원한 금액이 무려 1천만 원을 초과합니다. 그에 비해 망인이 일제에 헌금 또는 성금 명목으로 준 돈은 1-2십 만원에 불과합니다. 금액의 다과만 놓고 본다면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진상규명법 제2조 제14호에 따라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위하여 10만 원 이상의 금품을 헌납하였으므로 망인이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고 결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조사한 결과, 망인은 강요성이 전혀 없는 성금 따위를 일본인 개인이나 단체에 제공한 적이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하여 한국인을 위해서는 수백만 원 씩이나 쾌척하였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도 체면에 구애되어 마지못해 기부한 경우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한 사실상의 강요 또는 강탈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그럴만한 강제력을 제도적으로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을 위한 망인의 기부에도 모종의 경제적 동기가 작용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강요된 것으로까지 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일제에 망인이 협력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7. 친일의 대가로 망인이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망인은 오직 일신상의 영달을 위해 일제와 협력했고, 과연 그 대가로 높은 관직도 얻었고, 사업상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망인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틀림없는 없는 셈입니다. 증인도 그렇게 판단합니까.
망인의 모든 행위를 친일이냐 또는 민족을 위한 노력과 희생이냐, 하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의 행위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동인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필 그것을 국가/민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이고 사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망인에게는 기업가로서 자신의 활동자체가 중요하기도 하였을 테고, 그 가문과 시대의 영향으로 애국애족적인 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밖에도 자신의 개인적 취향이나 자녀의 장래를 위한 배려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을 것은 물론입니다. 이른바 친일행위라는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강요되었다고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하여 중요한 시금석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망인이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갑자기 친일적인 행적을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객관 타당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아무래도 그것이 강요된 친일행위라고 판단하는 편이 옳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전시총동원체제’가 얼마나 혹독했는가에 관하여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3의 자료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시총동원체제’의 폭력성을 입증하는 진술/기록은 흔합니다. 그러므로 증인은 망인에게 하필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만 친일행적이 나타나는 이유를 내적 변화라기보다는 외적 변화로 이해합니다. 그 시기는 망인에게도 가혹한 시기였다는 판단인 것입니다.
8. 증인은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법률을 부분적으로만 찬성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증인의 호오(好惡)와 무관하게 실정법입니다. 증인의 학문적 견해와는 무관하게 이 법에 따라 망인에게는 범법행위가 인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학계 일각의 주장이요, 법원의 지금까지 판단입니다. 망인의 유죄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현재의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특별법은 그 효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21세기는 이 법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린 바지만 더 이상 민족/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을 단죄할 수 없는 시대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더욱이 며칠 전 우연히 읽은 신문기사(문화일보 2012년 4월 13일자)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과거사 규명작업이 사실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일종의 정략적인 계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주장이 확고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망인의 후손들을 비롯한 기득권세력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으로 낙인찍는 행위는 현실정치에서 이용가치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언제나 역사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그들의 뜻대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것이 결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서도 다각적인 해석을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역사적 혼란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단견입니다.
저는 이른바 망인의 친일행적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파든 “뉴 라이트”든 좌파든 다양한 접근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에 관해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잘못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런 협의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만, 역사는 연구를 통해 밝힐 일입니다.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이미 사망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법률적 판단까지 내리는 작업은 도를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망인의 활동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연구대상입니다. 역사가들의 활발한 토론에 맡길 일이지, 법을 적용하여 왈가불가할 사안은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9. 그러나 후세에 역사적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도 친일행위에 대한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 법의 취지입니다. 망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법정의 판결문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대적 사정을 일일이 고려하게 될 것 같으면 이 법에 저촉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없어진다. 그러면 후세에 비슷한 문제가 또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증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위험천만하다는 것입니다. 법적 판단은 개인의 행적에 심각한 잘못이 있다는 뚜렷한 증거를 전제로 삼아야 것입니다. 설사 명백한 범죄행위가 있다 하여도 민족/국가의 후세 역사를 위해 그들 개인의 명예를 함부로 희생하여서도 안 됩니다. 더욱이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같이 중대한 범죄행위의 책임을 명백한 증거도 없이 개인에게 들씌울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망인은 이미 사망한지 오래입니다. 그는 현행법의 적용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할 아무런 기회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법의 적용은 더욱 신중해져야 할 것입니다.
10. 증인은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일제의 심한 강압을 이기지 못해 많은 친일행위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고가 지적하는 망인의 ‘친일행위’에서도 자발성과 주도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망인에게 당연히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전시총동원체제’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각급학교는 사실상 휴교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학생들마저 매일같이 강제노동에 징발되었습니다. 자유언론도 완전히 마비상태였습니다. 한국어로 간행되는 신문은 1940년대 초반에 모두 폐간되고 맙니다. 징용과 징병은 일상사가 되었고, 심지어 종군위안부까지 양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망인이 거액의 성금/헌금을 냈고, 동원된 행사에 참여한 것을 문제 삼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날마다 학생들에게 ‘진충보국’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교사들은 또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 것입니까.
이른바 진보진영의 대표적 인물인 리영희 선생조차도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학생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였던가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상태였습니다. 웬만해서는 일제의 강압을 이길 방법이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전략)전쟁 시기에는 (중략) 온통 군대식이 되어버렸어. 그때에는 조선인 고등교육의 경우 보성전문(지금의 고려대학교)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연희전문(해방 후의 연희대학, 그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합병해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됨)은 ‘공업경영전문학교’로 그리고 일본인들은 무슨 의도에서인지 모르지만 이화여전(이화여대)과 숙명여전(숙명여대)은 망측하게도 ‘농업지도원 양성소’로 이름을 바꿨어. 그렇게 해서 조선인 고등교육의 기능을 박탈해버린 거지. 그래서 학생들의 호연지기라는 것도 전쟁기에는 찾아볼 수 없게 돼요.”(리영희, 임헌영,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대화>>, 한길사, 2005, 55)
“학교의 수업은 3학년 말로 사실상 중단되고, 4학년부터는 ‘전시학도 동원령’으로 아예 군관계의 노동에 징발되어 나날을 보내게 됐어. 전 조선의 중학교 3학년 이상은 그 뒤 다시는 학교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1945년 8월15일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온갖 종류의 노동으로 날을 보냈지. 비행장 건설, 포탄 또는 소총탄 깎기, 군수용품 만들기, 미군 폭격에 대비한 서울의 초가집 소개(화재에 연소되지 않게 하기 위해 주로 가난한 조선인의 초가집들을 몽땅 헐어서 경성 시내 여기저기에 빈 지역을 만드는 것)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어요. 이때에 소개된 것이 지금의 아현동, 공덕동, 마포, 중림동, 청량리, 왕십리 등으로, 가난한 조선인들의 거주지였어. 전쟁 말기에 집이 헐린 조선인들의 생활이란 비참했지.”(리영희, 임헌영,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대화>>, 2005, 59)
11. 증인은 모두가 한 시대의 희생양이고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인의 독립과 안위를 지켜 줄 국가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도리어 국가를 탓하는 꼴입니다. 그럼 이런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은 바보였다는 말입니까. 그들의 희생과 죽음은 과연 누가 보상해야 합니까. 증인과 같은 논리를 택한다면 친일파의 척결은 완전히 불가능 한 일이 아닙니까.
모두가 시대의 희생자라고 저는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사안에 따라 실상은 조금씩 달랐을 것입니다.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일어난 불행한 일들은 개인의 책임으로 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일제로부터 높은 감투를 얻어 썼다 해도 그것이 해당인물이 꼭 감투를 좋아해서 기꺼이 한 일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일이든 개인이 압박을 견디지 못해, 마지못해 한 일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해당 인물을 흉악한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마구 몰아붙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망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문제가 되어 있는 중추원의관 따위의 관직이 그랬습니다. 중추원에서 망인이 한 역할이 거의 없었습니다. 문서로 답한 적이 두 번 정도 인데 그나마도 한국인의 처우개선에 관한 질의 정도가 전부입니다. 이런 관직활동을 가지고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부당합니다.
‘전시총동원체제’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에 나선 분들도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참으로 훌륭한 분들입니다. 여간해서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기 때문에, 저로서도 무척 존경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악질친일파 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속한 역사공동체의 존립에 심각한 타격을 준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그들은 반인륜적 범법행위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들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한 연구조사가 필요합니다. 만일 그 연구에 미비점이 있다면 서둘러 법률로 단죄할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철저한 연구가 최우선이자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12. 증인은 단순한 “친일행위자”와 “반민족행위자”는 서로 구별될 수가 있다고 봅니까. 친일행위에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했다고 믿습니까.
친일의 개념이 더욱 세분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어를 무어라 정하든지 간에 “협일”, “친일”, “부일” 등 여러 단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친일”이면 “반민족”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의 주요 국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본, 중국, 미국 등 많은 나라와 한국이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친미”, “친중”, “친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친일”이란 용어도 나쁜 개념으로만 간주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가령 일본사람이 “친한”인 것은 좋지만 한국 사람은 “친일”하면 “반민족”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식민지기간에도 한국 사람이면 누구든지 매사에 “반일”적이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와의 관계, 즉 식민지 지배권력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알다시피 망인은 1920년대 초부터 제도권 안에서 각종 사업을 하였습니다. 식민지 지배권력과 표면적으로 적절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직업상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의 한국인들은 대개가 식민지 지배권력과 노골적으로 대립할 수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식민지 당국와 한국인들의 관계는 “친일”, “협일”, “부일”등으로 당야하게 나뉘었습니다. 이것은 당사자들의 세계관과 입장 차이에 따라 결정될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더욱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을 대하는 식민지 지배권력의 태도였다고 봅니다. 한국인과 식민지 지배권력은 결코 평등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식민지 권력은 동시대의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비할 수 없이 강압적이었습니다.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는 그 폭력성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한국의 해방1세대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의 근본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이기백(<한국사신론>), 한우근(<한국통사>) 선생 등은 망인을 비롯하여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친일을 강요당한 인사들을 친일파 또는 민족반역사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한 적이 없었습니다. 해방 후의 반민족특위의 검사와 재판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진보적 국회의원들을 대표하는 조봉암 선생 등도 그러하였습니다.
감히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여러 학자들에게 저는 방향전환을 촉구하고 싶습니다.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연구도 중요하지만, “친일”, “협일” 또는 “부일”의 문제를 아울러 깊이 연구 조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치 문제를 연구하는 독일 뮌헨의 ‘현대사연구소’도 나치주의자들만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반 나치주의자들의 활동도 연구합니다. 그들의 역사연구에서는 국가/민족주의(내셔널리즘)의 시각이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점도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망인에 관한 위원회의 조사결과나 법정의 1. 2심 재판은 모두 국가/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평가된 것입니다. 이처럼 특정이념에 따라 망인의 범죄사실 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13. 증인은 망인의 행적을 탈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증인과 같은 관점이 국내 학계에도 존재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당연히 그런 흐름이 존재합니다. 앞으로는 더욱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세계사적 대세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국문학자들 가운데는 특히 저와 유사한 견해를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뒤늦게나마 친일이 곧 민족배신행위라는 주장의 위험성을 인식한 학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 현상에 대한 통찰을 위해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한 인식의 단초는 사실 진즉부터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일제 지배권력이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이 한국인의 완벽한 일본화를 바라지는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인의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되고, 일본화 된다는 미래상은 엄청난 혼란이며 자국민의 불이익을 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억지로 강요한 창씨개명 따위는 하나의 형식적인 조치였습니다. 이런 점들은 오래 전에 밝혀진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선일체’와 ‘황민화’, ‘징병제’ 찬성 발언을 하였던 한국인들 역시 한국인의 이익에 반대되는 반민족행위를 하였다고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제에 협력함으로써 그들은 일본제국의 구도 안에서 한국인의 지위상승을 바랐다고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제국주의 통치행위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자치능력이 함양되기를 바랐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주장 같지만 그 속내는 다를 수가 있었습니다. 강압적인 식민통치가 강요되던 시기, 한국의 지도층이 보인 “반민족적 행위”를 제대로 깊이 연구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깊은 뜻은 영영 밝히지 못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 몇 가지만 가지고 “친일반민족행위”여부를 단정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14. 끝으로, 한 번 더 묻습니다. 증인은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망인이 식민지 당국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사실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은데, 사실입니까.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었을까요.
물론입니다. 신용하 선생 같은 분들도 ‘전시총동원체제’의 폭력성을 철저히 파헤친 적이 있습니다. 주제를 몇 가지로 분류하여 필요한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아래 인용문은 신용하의 <<일제 식민지 정책과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문학과지성사, 2006, 406-411쪽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가. 일제는 한국인 지도층의 학살 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제7대 총독 남차랑이 취임하자 식민지 통치에 군사 특무대의 점령지 정보통치방식을 도입하여 독립의식 또는 민족의식을 가진 한국민족 간부급 인사들을 정보망으로 일거수일투족 철저히 감시하고, 일제 침략전쟁 선전에 강제 동원하며, 필요하면 ‘예비검속’을 단행하여 ‘학살’할 체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나. 일제는 한국인 지도층을 철저히 감시하였다: “일반 한국인 유지와 명성 있는 인사들에 대해 신변, 주변, 가정, 교우, 자산, 약점에 관한 정보를 철저히 수집하여 정리해서 침략전쟁과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민족 가운데 주위에 영향력을 가진 유지들을 모두 일제의 정보망이 철저히 파악하여 일제의 침략전쟁, 식민지 정책, 선전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활동은 철저히 감시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다. 한국인 지도층은 어쩔 수 없이 선전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정보정치 공작 탄압에 의하여 한국의 명사들이 일제의 ‘중, 일전쟁’ 도발, 중국침략의 정당성 선전에 총동원되었다.”
라. 일제의 공작정치로 한국인 지도층은 민중의 신뢰를 잃었다: “‘강연회’와 ‘시국간담회’는 청중에 대한 효과보다도 지조를 지키던 한국민족 명사와 유지들을 대중 앞에서 ‘친일적 인사’ ‘친일파’로 인식케 하여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도록 분리시키고, 결국 한국민족을 간부가 없는 민족으로 만드는 정보정치 공작의 효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종래 민족적 지조를 지키며 살던 명사들도 그들의 그물망에 한 번 걸려들면 벗어나지 못하고 친일 논설, 친일 강연, 친일 작품을 강요당하여 지조를 잃고 민중들에게 외면당하는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다.”
요컨대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망인이 명예를 지키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일 수 있습니다만, 그런 이유로 그에게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심히 적합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피고와 제1, 2심 법정은 망인의 행적에 관하여 조사가 불충분하였고, 판정 또한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이하 다른 증인들에 관한 제 논평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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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김원천
그럼에도 김 성수 실제 김 연수는
아주 적극적인 찬일 인사 아닐까?
그 아들 김 상협 양육만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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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말씀하신 부분은 제가 모르는 사실입니다. 사실인가요, 아니면 소문인가요?
· Reply · 4 y
김원천
김 상협이 제2 고보 나의 경복 선배라 칭송 받는 이 중 하난데
일찌기 독선생 놓고 3학년인가 4 학년 때 일본 고교 가네자와?
유학 루 동경제국대 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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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그것하고 친일인사하고 무슨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Reply · 4 y
김원천
일본어를 안하면 매로
일상이
· Reply · 4 y
김원천
김 연수 아들이 다 제2 고보
· Reply · 4 y
백승종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어를 거부한 분은 물론 훌륭한 분이지요. 그러나 열심히 배웠다는 것, 그 자체야 법으로 처벌까지할 사안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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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섭
언제 진술한 건가요? 어디서?도.
· Reply · 4 y
백승종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게시는군요. 사건번호가 있으니까, 한선생님은 아마 직접 찾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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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저평가 되신분이 인촌 김성수 선생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수당 김연수 선생에 대해서도 알수있는 기회가 되었읍니다^^
근데 망인에 대해서 학계의 논쟁이 아닌 법정진술이 있다는 게 아이러니컬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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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학문적 논의가 앞으로 많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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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이 글을 대충 읽고 화가 머리 끝까지 쏟고 치가 떨리고 분합니다. 이런 이를 내 눈앞에 보다니오.
이이 주장은 일제의 폭압앞에 살기위해,혹은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으니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김연수가 갖다바친 일제의 비행기가, 그가 갖다 바친 돈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가의 피를 요구하는데 쓰였는데 아무 죄가 없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일경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의 자금과 옷,편의를 제공하면서 활동하시며 고생하시다 나름 있는 재산 말아먹고 자식 지지리 고생시킨 그런 사람은 김성수, 연수처럼 적극 협조하면서 살지 뭐하러 그런
쓸데 없는 짓을 했느냐는 것 아닙니까?
그럼 우리가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백승종 교수는 어떻게 행동할겁니까? 우리 대한민국 백성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하러 나가는 것이 영광이다라고 얘기하러 다니고 당신이 일제에 협력하여 벌은 돈을 일제를 위해 돈을 갖다 바치겠다는 겁니까? 당신은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칠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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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나는 김연수처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견해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할 수 있지요. 복잡한 사안일수록 역사적 해석은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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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증언을 볼때 그렇게 사는것이 별 문제가 없다는것으로 증언까지 하고 있잖습니까. 역사적 해석 충돌 운운은 당연한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 충돌하고 있는것입ㄴ다.
· Reply · 4 y
백승종
김씨 일가는 자신들의 공과를 반성하는 것이 옳지요.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후세의 입장은 당연히 갑론을박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 Reply · 4 y
백승종
오선생님은 차분하게 이 문제를 저와 논의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열내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에서 "친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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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괜히 열 내다니...이 무슨 망발을...백교수같은 사람보고 열을 안낸다면 누구에게 열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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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이후로는 오선생님의 댓글을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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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도 병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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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오홍석 저는 김성수를 친일파라고 생각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사실 자세하게는 들여다 보지 않아서 그럴거라고 생각하는 거지만요) 오선생님의 답글이 너무 공격적이네요.. 백교수님의 판단에 반대하시는건 알겠지만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레벨입니다. 기분상하신건 알겠으나 근거를 가지고 백교수님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시면 저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설득될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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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박옥진님께
저는 저런 친일파 변호 논리에 공격적이 아닌게? 분개하지 않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근거를 갖고 이아기하지 않는 것 처럼 말씀하시는데 모욕이올시다. 그 근거는 백교수의 변호논리와 김성수, 김연수를 검색해보시면 당장나옵니다.… See more
· Reply · 4 y · Edited
Okjin Park
저도 역사에 관해서 논쟁을 많이 했었고 분개한적도 많습니만 그런 감정을 앞에 세우고 논쟁하려는건 피하려고 노력을 적쟎이 했었습니다. 지나치게 감정을 세우면 이미 논쟁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으니까요.. 물론 오홍석 선생님이 근거를 가지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다는건 아닙니다. 그건 제가 너무 글을 짧게 써서 생긴 오해이니 사과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저도 알고 있고 근거자료를 통해 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논쟁을 해주십사 하는 부탁으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읽어보면서 느낀건 오선생님의 글이 논쟁을 할 레벨을 넘어서서 감정이 많이 섞여 있어서 백교수님이 답변할 맘 자체가 사라질 레벨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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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으흠~ 내 수준이 그러합니다.. 글에 감정이 실려있지요. 그럼 님이 백교수와 토론 해 보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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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오홍석 제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너무 흥분만 하시지 말고, 사리를 가지고 차분하게 이야기해보십시다. 지고 이긴다는 생각은 우리 모두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무찔러야할 "적"이 아닙니다. 같은 고민을 가지고 사는 이땅의 시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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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 김성수가 친일파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긴 하나 그렇게 깊게 김성수에 대해서 알아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교수님의 논지를 반박할 능력까지는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김성수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고 저도 약간 참가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김성수는 친일파라는 의견쪽으로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때도 그렇게 깊이 아는건 아니라서 깊게 관여한건 아니고 백교수님과 비슷한 의견을 내세웠던 역사학도의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백교수님의 논지는 이해하고는 있습니다. 물론 백교수님이 좀더 내용이 더 깊이있게 들어가고 있습니다만.. 다만 그때 제가 논쟁중에 했던 이야기는 이런게 있긴 합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기업인들에게 돈을 강압적으로 챙겼고 그에 반대하다가 국제그룹이나 몇개의 기업들이 날아간적이 있습니다. 전두환에게 돈을 바친 기업인들중에는 싫어도 어쩔수 없이 준 사람도 있고 특혜를 기대하고 신이나서 준 사람도 있을겁니다. 싫어도 어쩔수 없이 줬던 특혜를 기대하고 신이나서 줬든 아무튼 그 사람들이 나중에 전두환으로부터 사업상의 특혜를 받았다는건 많은 사람들이 압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했던 내용은 전두환에게 싫어도 어쩔수 없이 줬는지 아니면 신이나서 줬는지 사람 속마음은 알길이 없지만.. 그 후의 사업전개상에 전두환에게 사업특혜를 받은 흔적이 있다면 전두환에게 영합한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성수가 일제말에 사업을 전개하면서 총독부나 일제에게 사업상의 특혜를 받았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부를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주장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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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Okjin Park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다만 제 생각은 일제말가의 정황과 전두환 시대는 직접 비교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전두환의 요구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겠습니다만, 일제의 강압에 저항한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성폭력과도 유사한 점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여성이 저항의지만 있으면 어떤 강간도 막을 수 있다. 저항의 증거를 대라! 이렇게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과연 적극적으로 매춘했다는 증거가 있는가를 찾아야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앞세워 속단할 일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세밀하게 접근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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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백승종 저도 전에는 일제시대와 그 이후 이승만과 군사독재시대를 비교할때 일제시대가 무조건 더 폭압적이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역사전공자의 글을 읽었을때 사상의 자유라던가 몇가지 부분은 일제시대보다 이승만-군사독재 시절이 더 폭압적이라고 볼 수 있는 자료를 봤던 기억이 있어서 말이죠. 물론 일제시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말도 안되던 폭압자들인건 맞는데 그런 일본군국주의 문화를 이어받은 한국 군사독재자들도 별 다를 차이가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일제시대와 이승만-군사독재시대 누가 더 폭압적이었나 하는 체계적인 연구비교성과를 본적은 없어서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전두환 초기나 박정희시대말은 지금와서 보면 상당히 상상을 초월해서 일제시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심한 부분들도 있겠다고 해서 이상할거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말씀 해주신데로 그래서 좀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할것이라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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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Okjin Park 말씀에 공감합니다. 일제시대 검사를 지낸 최대교란 이가 있는데, 그이가 이승만 정권에 크게 반발하면서 일제 때보다 못하다고 극단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분명히 박정권이나 기타 군사정권이 인권이란 측면에서 오히려 일제시대보다 후퇴한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이른바 전시체제 하에서의 일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판단합니다. 그 역시 단언할 것은 못되지요. 그러니까, 함께 연구를 해보자는 말씀이고요. 김씨들의 경우는 제 판단으로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들의 민족주의란 것이 계급갈등을 도외시한 점에서 군국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기는 해도, 동아일보와 고려대(보성전문) 드으이 역할을 부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 Reply · 4 y
DaeJoon Kang
증인진술에 따르면 무슨 말장난도 아니고 김연수나 김성수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건지 아니라는건지...
· Reply · 4 y
DaeJoon Kang
친일인명사전에 나오는 사실관계내용을 보았을텐데도 저렇게 반대진술하는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장난을 해서 시민들을 노리개로 취급하는듯...
· Reply · 4 y
백승종
제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관점이 다르니까요.
· Reply · 4 y
DaeJoon Kang
백승종 무슨 공부를 많이 했는지 어떤책을 많이 보았는지 모르나 남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대학교수라면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이 우려됩니다. 어떤건 친일을 인정하고 어떤건 어쩔수 없다고 하는식의 양다리걸치기 식의 변론이 무슨 의미를 갖겠습니까?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우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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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4. 가령 망인이 친일행위를 거부하였을 경우 정상적 기업 활동이 불가능하였다면, 그의 친일행위를 자발적 친일행위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까. 기업가인 망인으로서는 국가도 유지하지 못하는 관념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사업을 반드시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망인이 자신의 직업인 기업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그 기업활동이 우리의 적국 일제를 크게 돕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치부를 위한 행위밖에 되질 않았지요. 적국을 크게 돕는자...반역자이지요. 이런 자를 백교수는 옹호하는 것입니다.
· Reply · 4 y
백승종
오선생님 같은 의인은 세상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렇게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김연수는 증인 진술서에 적은 대로 많은 점에서 "민족"을 위하여 거금을 기부한 사람이지요.
· Reply · 4 y
의산
거금을 기부했는지를 좀 더 읽어보고 답하겠습니다.
· Reply · 4 y
백승종
처음부터 남의 글을 잘 읽어보시지도 않고, 감정을 내세우면 피차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 Reply · 4 y
의산
차례대로 읽어보며 제 생각을 밝히지 않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 Reply · 4 y
백승종
오홍석 흥분부터 하시지 말고 차분히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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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민족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의 관념적인 공동체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이 한민족의 전부를 포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국가가 단 하나의 민족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닙니다. 민족이란 이름으로 어떤 행위를 미화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역사적 현실에 부합되지 못하며, 바람직한 미래상도 결코 아닙니다.
= 민족이란 네이버 사전에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 인종이나 국가 단위인 국민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정의 돼 있습니다.
공동체 사회집단의 평화와 안정을 깨뜨리는 적에 대한 저항은 지극히 당연하고 우리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의무인데 백교수는 그 의무를 저버린 사람을 옹호하고 하물며 적을 도운 자를 변호까지 하고 있다니오.
· Reply · 4 y
백승종
그 의무를 저버린 사람이라. 그것은 오선생님의 판단이고, 저는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압에 의해 꺾인 것입니다. 불행한 일일뿐,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처벌한다는 발상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 Reply · 4 y
의산
많은 사람들이 강압에 꺾였다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자신이 살기위해 동족을 위해하는 행위가 그 정도를 넘으면 처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동의 안되십니까?
· Reply · 4 y
백승종
그 "정도"를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법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또한 그 "정도"를 후세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은 물론 자유지만, 엄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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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5. 망인은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훈포장을 받았습니다. 해당 위원회와 법정에서는 그런 사실들이 모두 망인의 친일행위를 증명한다고 봅니다. 증인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훈포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망인이 친일행위를 적극적으로 하였을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만으로 ‘친일반민족행위’가 입증된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럴 가능성이 높아질 뿐입니다. 훈포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함부로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으로 망인의 훈포장 관련 사실을 검토해보았습니다. 피고는 훈포장 사례를 가지고 망인의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실체적 진실의 광맥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주장합니다. 하지만 훈포장에 관한 기록을 엄밀하게 따져 보면, 피고가 내린 결론이 부정될 수 있습니다.
우선 피고는 1915년 망인이 조선총독부에 도로부지와 용지를 기부한 대가로 목배(木杯)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친일반민족행위와 무관한 것입니다. 총독부체제 하에서 저들은 도로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으레 유지들에게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망인은 당시 십대 청소년으로 일본에 유학중이었습니다. 목배는 망인의 친일행위와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이런 훈포장조차도 1937년까지는 망인에게 다시 주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피고는 오히려 이런 사실에 주목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다가 1937년부터 망인이 총독부에 기부한 횟수와 금액이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것은 물론 모두 중일전쟁 발발이후의 전쟁분위기, 즉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1937년 총독부가 산업장려관을 만들면서 신축비를 모금하자, 망인은 1천원을 기부했습니다. 기부금의 성격상 ‘친일반민족행위’로까지 문제 삼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1942년에는 공립심상소학교를 신축할 때 망인은 1천원을 기부했고, 그로 인해 포상(褒賞)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 역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아동들이 다닐 공립학교 건설에 약간 금액을 기부한 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1939년 조선총독부가 박물관을 건설할 때도 망인은 1만원을 기부했고, 그 바람에 ‘감수포장(紺綬襃章) 식판(飾版)’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친일반민족행위로 보기에는 부적절합니다. 또 1943년 망인은 방적공업의 선구자로 인정받아 녹수포장(綠綬襃章)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친일반민족행위’라고 강변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1937년 이후 망인이 총독부에 기부금을 내게 된 자체가 반드시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일반 시민들조차 가지각색의 명목으로 총독부에 돈을 뜯겼습니다.
만일 망인에게 문제되는 행위가 있었다면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1944년 망인이 징병제 실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본군 조선참모장이 감사장(感謝狀)을 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감사장’ 하나를 가지고 망인에게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심한 과장이고 비학문적 태도입니다. 또 하나 남은 문제는 1940년 망인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3만원을 기부했다고 하여 감수포장을 받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망인이 과연 총독부에 거액의 기부금을 바친 것이 자발적인 결정인지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948년 특별재판소에 망인이 참고자료로 제출한 서류 가운데 총독부의 협박장이 있었고, 이를 입증하는 각종 진술이 존재하였습니다.
요컨대 망인의 훈포장 수여사실은 표면상으로는 마치 중요한 범죄행위처럼 보이지만 내실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억지춘향이나 다름없이 훈포장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망인이 특별재판정에서 그 점을 일일이 진술하지 않았다고 해서 피고가 대단한 위증혐의라도 확보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입증되지 않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특별재판소의 재판기록과 판결자체를 조사대상에서 간단히 배제하는 것은 심히 부당합니다
= 1.
백교수는 일왕의 목배가 무의미하다고 평했는데 그 근거가 뭡니까? 옛날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때는 그 자들과 사진 한 번찍고 시계받아 온 걸로도 지역사회 유지 행세하면서 살았는데 하물며 조선인이 일왕 목배 받은 것이 무의미하다니오. 게다가 일본에 있는 자가 그 이름으로 목배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집안이 문제가 있는 행위를 했다는 반증 인것입니다.
2. 1937년 1천원, 1942년 1천원 기부. 그 당시 물가, 화폐가치가 어느정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름 거금이겠지요. 님은 약간의 돈이라고 표현했지만요. 나중에 한 번 찾아 보겠습니다.
심상소학교를 지을 때 낸 돈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말씀하시는데 그당시 교육은 일본제국주의의 충실한 신민을 키워내기 위한 교육기관이었지요. 님은 아마 문맹퇴치를 위해 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듯한데 분명 그런 면도 있으나 일제가 왜 우리 조선에 학교를 세웠는지를 아시면서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 식의 인식엔 어이가 없습니다.
3. 1939년 1만원, 1943년 녹수포장 - 가관입니다.
이런 자를 님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그에게 면제부를 주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하군요. 어느 노미 자기 재산 축 내는 일에 기꺼이 내겠습니까. 불이익을 받을까 낸다는게 상식적이지요. 저항해야할 때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하여 그 돈이 어떻게 쓰일지 뻔히 알면서 자신과 일족의 안위만을 도모하고 중국에서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을 외면한게지요.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말씀은 제 주장과는 던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일일이 답하는 대신, 이 말씀을 드립니다. 대한민국의 훈장을 받을 공헌이 계신 분들이야 두 말할 나위가 없이 우리가 영원히 그 공을 기억해야 하겠지요. 이완용과 같은 배신자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은 무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공과 공이 반반인 경우도 있고, 평가에 세분화가 없을 수 없다고 봅니다. 훈장감 아니면 사형감으로 이분될 수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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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6-1 재산규모에 따라 기부금액이 갖는 의미는 달라져야 옳습니다. 망인과 같은 굴지의 재산가의 10만원과 일반인의 10만원은 비중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맞습니다. 부자가 죄인이겝니다. 김연수가 가난했다면 그리 큰 돈도 낼 여유가 없을 것이고 일제가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권세를 누리는 만큼 그에 마땅한 의무와 책임이 따르는 겝니다.
6-2 일지시기부터 1949년까지 망인이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위해 현금으로 지원한 금액이 무려 1천만 원을 초과합니다. 그에 비해 망인이 일제에 헌금 또는 성금 명목으로 준 돈은 1-2십 만원에 불과합니다.
= 뜬금없이 1949년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1천만 원 초과한다고요? 광복이 되니 '이제 죽었다 싶어 돈으로 처발란'거겠지요. 무슨 이런 엉뚱한 비교를 합니까? 그리고 당시 물가는요? 화폐가치는요? 아까 말씀한 것이 거금을 기부했다는게 이겁니까? 이걸 말씀이라고 합니까?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오선생님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어요. 1949년이 등장하는 것은 뜬금없는 일이 아니라, 반민재판이 진행되던 시점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화폐의 단위야 일제시대는 당연히 당시의 "엔"이고, 우리화폐가 발행되기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환"이 되는 것입니다.
· Reply · 4 y
의산
백선생님,
10만~20만원이 맞을듯한데 엔이라니 잘 모르겠습니다.
저 글만 볼 때 단순 돈 액수로 일제와 광복후를 비교해서 일제에 비해 광복 대한민국에 돈을 많이 기부한 사람이라는 뜻이 있었지 않나요?
· Reply · 4 y
백승종
그런 뜻이 아니고요. 일제시대부터 광복 직후까지 김씨 일가가 기부한 금액은 엄청나지만, 일제에 헌납/기부한 것은 극히 소액이다는 점을 말했습니다. 게다가 그것도 1937년 이후의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에 국한되다시피한다. 그럼 점에서 자발적으로 그들이 일제에 바쳤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 Reply · 4 y
의산
난 백승종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다만 어떤 글이 마음에 들어서 페친이 됐겠지요.
아무 생각없이 페친하다가 김인후선생 글 끝단락에 친일파인 그들을 칭송하는것 같아 열받은게지요.
백교수가 그런 자들을 옹호한다면 그 그 시기 아무것도 모르고 경제인으로 잘 먹고 잘 살다가 어떤 계기로 독립운동관련, 각성하여 고초를 겪고 재산을 제대로 회복못해 자식 들 거지 꼴을 만든 울아버지 같은 사람은 뭐가 됩니까 ? 국민학교 1학년 때 들은 "내가… See more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오홍석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과 제 이야기는 별개의 것입니다만, 선생님의 집안에 그런 일이 계셨다니...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반드시 국가의 포상이 있기를 바랍니다. 관련 서류가 있다면, 그리고 혹시 아직도 포상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면, 저도 있는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 Reply · 4 y
의산
제가 관심을 좀 가지고 보니 저희 아버지는 유희 수준이고 정말 공이 크고
고생하신 분들이 아직도 선정되지 못했습디다. 그 어른들을 일화를 보니 울 아버지야...그런 말씀이 이해가 됩디다.
그리고 성공한 로비여서 재판까지 안갔으니 무어...… See more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오홍석 애처로운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김씨들이 그렇게 단죄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른 댓글에서도 적었지만, 그분들은 도리어 민족주의적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민족주의가 계급갈등의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성장 위주의 경제관념을 앞세운 군국주의와 유사했다는 역사적 한계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봅니다.
· Reply · 4 y
의산
사실 우리도 이야기 하기를
처음엔 애국 행위를 하다가 가난 등의 이유로 나중에 훼절한 분들을 보면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장지연 선생처럼요.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오홍석 그야 당연한 말씀이지요. 너무 쉽게 공을 인정하는 것도 불안한 일이고, 너무 서둘러서 비난하는 것도 마땅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시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그렇게 선명하게 선과 악이 나뉘는 그런 장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했던 세상을 너무 쉽게 재단하지 말고, 깊이 살펴서 그 굴곡을 이해하고, 거기서 개인의 인생에 교훈을 찾고, 우리 시민사회의 나아갈 바를 성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Reply · 4 y
백승종
오홍석 선친의 일기를 좀 공개해 주실 수 없으실지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끝이 없는 이야기인데요. 김씨들의 삶을 오선생님은 단죄하시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나쁜 점도 있지만, 그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있다고 봅니다. 가령 동아일보와 보성전문은 쉽게 파묻을 수 없는 업적입니다. 이런 일들은 경성방직이 잘 운영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판단합니다.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 See more
· Reply · 4 y
의산
맞습니다.
그래서 공과를 제대로 사실 그대로 기록하자는거지요.
일기 해봤자 별거 아니고요. 아버지의 고통스런, 그리고 공개하기 부끄러운, 집안 사정이 그대로 적혀있어서요. 곤란합니다.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오홍석 잘 알겠습니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Reply · 4 y
의산
아니, 아니 정말 괜찮답니다. 그냥 나라가 잘 돼 그런 불행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데...걱정이 많답니다.
KEI 센터장...어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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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n Caleb Jinyeol
장문을 끝까지 꼼꼼히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백선생님의 고뇌에 찬 인권과 인간애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친일 부왜 종왜가 싫고 부끄러워 나라를 버릴 수 밖에 없었고 죽음을 불사한 분들도 수 십 수 백만인 것을 감안하면 저렇게 배우고 의식이 있던 사람들이 부왜를 했다는 것은 작은 부분이라할지라도 부끄러워해야할 일인 것만은 분명하지 싶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부왜세력, 독재부역세력에 대해 차단을 주장하는 것은 그들 개인이 미워서가 아니질 않습니까. 단죄가 없이는 지금 우리 민족이 단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발목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단 한 놈도 반성의 기회도 갖지 못한 분함이 깊은 것이기도 하고 세상에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백선생께서 가려서 봐야한다는 취지를 백분 이해하면서도 가슴 한켠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숙제는 일단 친일, 부왜세력들에 대한 종합적인 단죄와 척결이 우선이고 그 다음 개개인에 대한 선별적 구제는 다음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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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글입니다.
· Reply · 4 y
백승종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문제를 애매하기 짝이 없는 국가/민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저는 의심을 품고 있지요.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제 관점이 설 자리가 좁은 것 같습니다.
· Reply · 4 y
김원일
페이스북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시각과 글입니다. 러시아의 한국학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있는 깊이 있는 자료입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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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김원일 감사드립니다. 제가 증언에서 말하고 있듯, 이른바 악질적 "친일"과 적극적 "독립운동"사이에는 세분화된 여러 단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 점을 무시하고 친일파 아니면 독립투사로 2분화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서 스스로 멀어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Reply · 4 y
김원일
이부분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철학적이해가 되어야 견해가 설 수 있습니다.
· Reply · 4 y
백승종
김원일 지당합니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적으로 지목해도 안 되고, 처음부터 누군가를 감싸서도 논의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할 것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더라도 "민주"와 "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힘을 모아 토론도 하고, 연구도 해야할 귀중한 분야라고 믿습니다.
· Reply · 4 y
김원일
저도 동감합니다. 역사의 지체가 역사연구의 지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Reply · 4 y
백승종
김원일 이것이 결국 가치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 Reply · 4 y
김원일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치를 논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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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Yeong Yoon
백교수님의 깊이있고 논리정연한 변론의 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사상이나 개인적 삶의 히스토리를 판단함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이분법적로만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어느 분이 흥분하여 흑백 이분법으로 칼 자르듯이 개인의 삶을 판정하는 주장함과 백교수님의 합리적인 논거를 비판 하는점에 대하여 넓으신 맘으로 양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저급한 극단주의자, 편협된 극우. 극좌 사상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 근.현대사 역사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 죽이고 억압하고 어둡고 아픈 부분이 너무나 많다고 봅니다. 수많은 외세 지배를 받았고 사상이 다른 세력간 투쟁도 있었지만 서로 죽이지 않은 나침반의 가르침으로 민족을 이끈 베트남 "호치민"같은 영웅. 김구 같은 어른이 이 나라에 참 많이 있었다고 보는데 그 빛을 잃어 너무나 아쉽습니다. 학자로서 백교수님 같은 분께서 이 나라를 위하여 참 역사 해석에 지대한 공헌 있으시기를 축원하고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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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학문이 너무 편협하고, 주장만 내세울 뿐, 이것이 인간과 사회를 위한 일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 Reply · 4 y
Ahn Caleb Jinyeol
백선생님의 가르침과 역사관은 태평시대나 나왔으면 저 역시 대단히 공감과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전혀 흠잡을데가 없을 만큼 논증적이시니까요. 그러나 지금 오늘의 우리 한국은 여전히 과거가 풀리지 않은 나라 오히려 더 꼬여만 가는 나라 아닙니까? 그 이유가 이 왜정시대와의 단절과 통일이라는 과제 두 가지 올습니다. 역사학대로 백선생님의 시각을 전적으로 존중합니다만 역시 역사학자로 내용 중에 하신 단죄가 우선이라 해주시는 것이 현시점에선 더욱 절실하다… See more
· Reply · 4 y
Man Yeong Yoon
그렇습니다. 특히나 나라 잃고 어떤 희망도 꿈도 잃은 국민으로 그시절 인간적 삶의 여정이 그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쉽게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편협하게 남을 쉽게 판단하고 죽이는 행위를 하는 부분을 염려합니다. 어느 집안도 그러리라 보는데요. 저희 집안도 어르신들 중에 독립운동 하신분도 계시고 그런 일을 하시다 생을 마친 분도 계시고. 쫘익이라고 호도되어 고통받고 사신 분도 계시고. 강제집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희생당… See more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Man Yeong Yoon 그렇습니다! 제 소망은 사실 아주 소박합니다. 이완용과 같은 악인의 후예들이 전재산을 내어놓고, <이완용재단>이란 이름으로 애국지사의 후손들을 돌봐주고, 연국기금으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복잡해서 그렇게 될 이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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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 Lee
친일문제는 옹호할수록 더렵혀 지는 기름주머니를 만지작 거리는 형국입니다.
처리할 시기가 올 때도 된것 같습니다.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암이지요. 암을 수술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할 것입니다. 진단부터가 정확해야하구요.
· Reply · 4 y
Kh Lee
약만 먹어도 낳는 병입니다. 친일 문제는 앞으로 그렇게 되거나 자율로 처리 될 것입니다.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이관희 그럴까요? 독일사람들 보니까, 나치에 관한 연구를 참 많이 합니다. 나치주의, 나치주의자, 반 나치주의자, 반 나치운동, 나치시대 그자체... 이렇게 철저하게 연구할 때만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날 전망이 서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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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많은 관심과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토론은 일단 이것으로 종결합니다.
· Reply · 4 y
Sung Deuk Oak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 Reply · 4 y
백승종
제가 더 감사합니다.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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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송
깊이 읽게하고 단순했던 생각을 순리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는 내용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Reply · 4 y
백승종
이른바 친일파에 관한 논쟁은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시작되지 못한 채, 늘 구호에 그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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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태
좋은 관점인 것 같습니다. 댓글에서 보는 것과 같이 무조건적 반응에 대한 우려를 같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나 사람의 행적을 볼 때는 그 공과 과를 같이 평가하여야할 것이고, 그 공과가 후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고려하여야하는 것이 바른 역사 연구가 아닐까 하는 것에서 용기있는 글이라 여깁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분법적 구분만이 존재하고, 소위 (현재)이익에 반한 비역사적이고 비정당한 방법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어 오히려 비열한 부류들이 할거하는 토대를 제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비루한 친일파들, 그와 같은 상황이 다시 닥친다면 언제든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버릴 인간들이 저지른 짓이 친일행위에 대한 재 정의이고, 그들이 노리는 것이 근자에 회자되는 일본용어인 불가역적인 고착화를 뜻하는 것이라 여긱에 이 글에 더욱 공감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근현대사에서도 잃어버린 것이 얻은 것보다 많다고 여깁니다. 즉 화합 대신 분열 대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여기고, 오히려 매국매족의 정신이 더욱 확고히 들어버린 결과를 가져와서, 지금의 정부와 같이 몰염치의 상식화를 당연히 저지르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그 해당자를 둘 모두 서로 비난하고 서로 책임을 떠 넘기고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면을 해소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논조의 글이 많아졌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다만 은사이신 이기백 교수 등의 한국사에 관점이 식민사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을 거론한 것은 유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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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옳은 견해이십니다. 공과 과를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함부로 몰아쳐서 현실적 이해관계와 결부시키면 당파싸움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부분은 선생님과 의견을 같이합니다. 다만 댓글의 말미에서 말씀하신 이기백 선생님의 역사학에 관한 의미 규정은 제가 동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기백 선생님은 "민족"과 "진리"를 위해 평생을 애쓰신 분이었고, 학문적 능력 또한 남다르셨지요. 그분의 역사학은, 제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민족 중심"이었습니다. 또한 지나치…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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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태
스승이신 이기백교수에 대해 문외한인 제가 경솔하게 언급한 면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역사기술의 대개가 민족적인 것에 기초한 것도 제가 아는 한(한때 그 분의 저술을 탐독하였지만 전공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이나, 이병도 등의 실증사학에 얽매여 상고사를 도외시한 것으로, 오히려 이병도의 학설을 뒷받침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급하기엔 건방진 면이 있으나, 실제 기록이나 고고학적으로만 고찰하기엔 사라진 상고사 기록이 많은데(저는 분서갱유와 만리장성-축조 당시엔 2천리 정도 밖에 안되었고 그 후 2000여년에 걸쳐 건설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등의 지나화하면서 북방의 역사 중 3황5제의 기록 외는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실증사학의 약점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너무 그것에 집착한 것이라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제 글에서 언급한 공과와 영향을 감안한 것으로, 나쁜 영향을 남긴 것이라 그러하였습니다. 이 기백교수에 대한 논의를 기대하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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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ria Ryu
한 가지만 질문 드립니다.
이분이 독립 운동에 관심이 있거나
기여를 하거나 참여를 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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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분법으로 유도하시려는 것은 아니지요?
· Reply · 4 y · Edited
Alexandria Ryu
국민들이 알아야될 사실 아닐까요
이분법이 아니고 정의의 문제 아닐까요…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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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역시 2분법으로 가시는군요. 제 대답이 궁금하시면 여기에 올라 있는 모든 댓글과 제 글을 자세히 읽어보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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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ria Ryu
다 읽어보았습니다
전 식민사관은 자세히 읽고샆지
않습니다
전 이글을 읽으면서
호위호식하며 유학중인 한 소년과
만주벌판에서 피 흘리던 그리고 고국에 돌아오자도 못한
후손은 가난에 시달리는 한 소년이 떠 올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재판이 이렇게 오래 진행되는 아유가 궁금했는데
오늘 알게되어 아무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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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유경희 참고로, 이 재판은 진즉 종결되었습니다. 김연수 측의 패소. 그것이 법의 대답이었지요. 그런데 제 생각은 ... 이런 문제를 2000년대에 와서 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연구할 문제이지 사법적 판단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아마도 유 선생님으로서는 동의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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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ria Ryu
네 결과 알려주셔서 감사드리구요
저도 뭐 교수님과 싸우려는건 아니구요 친일파 후손은 부귀와 명예를 누리고 독립 유공자 후손이 너무 불공평하게 대우 받는거 같아서 드려본 말씀입니다
아무튼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되어 감사드립니다
· Reply · 4 y
백승종
유경희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복지와 인정이 수십배 나아져야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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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ria Ryu
네 우리모두가 함께 노력해야될 부분인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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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유경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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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반민족 친일파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볼 때 기가 막힙니다.
여러분은 불 탄 집을 앞에두고 통곡하는 집주인을 두고 방화범의 개인사를 논하며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인에 동조하고 있는걸로 보입니다.
단순하십시오. 복잡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인간으로 보일것 같습니까?
그가 왜 불 질렀는지 어떤 정신이상 유전자를 가졌는지 조사한 결과는 방화범 형량에 참조 사항일 뿐입니다.
그가 불 질러 집을 태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난 백교수와 논쟁을 통해 여러분의 견해를 보아 통탄하면서도 기쁩니다.
우리 국민세금으로 월급받아 처먹고 사는 환경정책평가원 센터장인가 하는 공직자가 덴노이까반자이 하는 거에 여러분은 무심합니다. 이러는 여러분은 누구보다도 애국을 말하고 화합과 통합을 말할 것입니다.
난 50~60대가 보수화 됐다는 것을 보고 늘 왜 그럴까 생각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의 폭압을 지켜보고 종말을 본 그 세대가 어떻게 저렇게 수구화가 될 수 있느냐고 생각했지요.
이런 생각의 바이러스가 이 나라를 망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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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오선생님의 이견을 존중합니다. 그것은 오선생님에게 일종의 신앙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지는 마십시오! 이곳은 제 페이스북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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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저어기 늘 궁금한데요.
토론이 벌어지면 그냥 토론하면 되는거 아닙니까? 혹시 그럼 제 페북에 와서 토론 하실래요?…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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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그리고 이런 이견을 존중한다하시니 이 또한 인품일터 그 인내에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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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워낙 복잡한 사안이라서 이견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일방의 강압으로, 의견의 일치를 볼 수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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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단순한 사안이라고 보는데 복잡하게 생각하시면서 새끼줄 꼬듯 꼬시니까...
헷갈리는 사람은 헷갈리는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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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Yeong Yoon
단지 사상이 다르다고 삶의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같은 사상을 가진 부류끼리도 단지 정치성향이 쪼금 다르다고 수백만의 생명을 서로 죽이고 학살을 자행했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무지하고 저급하고 사악한 짓입니까.
오흥석님께서 주장하시는 바를 이해를 합니다만, 님의 주장하시는 바가 마치 위와 같이 미치광이 처럼 광기서리고 편협한 단죄 행위가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것 처럼 비쳐질까 걱정스럽습니다.주장은 하시되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고 말꼬리를잡는 저급한 토론은 삼가해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지켜보니 님의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글은그렇게 좋게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백선생님의 올리신 연구 주제는 미래를 나아가야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매우 필요하고도 올바른 논제라고 보여집니다
누가 누굴 단죄합니까? 우리에게는그러한 권리가 없지않습니까? 그러니 생각이 틀리다는 이유로 남을 죽이는 말과 행동을 했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역사학자도, 좌도,우도, 치우치지 아니한 평범한 한 엔지니어로 나라일에 도움 될까하고 대부분 평생을 외국회사밑에서 종노릇 하며 외국돈 벌려고 노력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오홍석님의 가벼운 생각처럼 제가 무슨 시니어. 보수(?) 조직에 활동한적도 없고 하지도 않으며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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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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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곽대원
카뮈도 나치부역죄를 처벌하려는 드골에 반대했지요
독일군과 애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독일군에게 빵을 팔거나 평소 사이가 안좋았단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같은 레지스탕스들끼리도 정치성향이 다르다고 서로 죽이자 (우리도 남북한 모두 반동분자 청산을 구실로 무의미한 학살을 자행했지요) 뒤늦게 드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백선생님의 연구는 미래를 나아가야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매우 필요한.. 올바른 연구로 보여집니다 저는 까뮈의 시각으로 봐야한다 봅니다 누가 누굴 단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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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현실정치가들에게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우선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 한 발짝 떨어져있는 지식인의 입장은 좀 다를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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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곽대원
맞는 말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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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송
친일문제에 대한 역사관에 새로운 빛을 발견한 느낌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국가/민족주의적 역사관을 강요당해 왔으며 또한 그런 일방적인 논리에 세뇌되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무엇을 판단하기에 앞서 절대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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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김씨들의 경우, 그 시대의 이념인 민족주의, 문명근대화론에 포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을 민족논리로 처단하는 현실이 좀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이 매를 맞는다면, 젠더와 계급의 이름 또는 생태주의의 가치로서여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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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익렬
백 교수님의 일제 식민지 시절, 당시 한국인들의 활동에 대한 견해를 논평하는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친일행위자라고 무조건 그 말로써 한 인간을 매도할 수는 없고 당시 환경과 그의 행동 행위를 찬찬히 살핀 후에 그렇게 말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백 교수님도 그렇게 역사학자로서 논평을 내시는군요. 감사드립니다. 이 참에 한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사실 내가 동시대 군인이기도 한데, 우리가 미국의 힘에 의해 월남에 파병을 했는데, 거기에서 우리 병사들이 정말 수많은 베트남인을 무조건 살상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직도 우리 정부차원의 사죄는 없지만, 언젠가 베트남에게 진정한 사과와 함께 배상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제의 잔학상에는 사과와 배상을 일본에 요구하면서 우리가 행한 만행에는 국가도 또한 대부분의 시민들도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베트남의 국력이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고 얕보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백 교수님의 논평을 언젠가 듣고 싶군요. 친일문제에 대한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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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명백합니다. 나치독일과 마찬가지로 반 인륜적 폭력을 행사한 모든 개인과 집단은 사죄와 보상을 해야합니다. 저는 추호도 반인륜적 범죄행위자를 편들 생각이 없습니다. 이글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그런 판단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판단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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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익렬
답변감사합니다. 물론입다. 결과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고 매도해선 안되지요. 그래서 제가 한번 살펴봐줍시사한 내용도 우리가 우리의 만행을 잘 살펴보고 판단하여 마침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Reply · 4 y
백승종
베트남에서 일어난 불행한 여러 사건들을 철저히 조사하고, 사과하고, 보상해서 우리는 일본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야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가로막고 있어, 유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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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hoo Lee
일전, 대통령께서 폐션쇼만 하고 오셔서 정말 안타깝고 부끄럽습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고 기록으로 남겨야죠.
· Reply · 4 y
진익렬
저의 제안에 동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창후님의 동의도 감사드립니다. 내 제자중 베트남학생이 있어 처음 봤을 때 큰 절을 하면서 사죄했습니다. 내용을 잘 알고 있더군요. 그리고 저와 같은 한국인이 많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귀국하여 국가연구기관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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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정말 귀한역할을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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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n Caleb Jinyeol
토의를 멈춘다 하셨는데 계속 이어지고 있군요? ^^ 백선생님께 다소 우호?적인 댓글만 허용하는 것은 아닌지 좀 그렇습니다만 저 역시 백교수님의 이 글에 이의를 다는 것이 아닌지라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 일반 개개인도 그 살아 온 길이 온갖풍상이라 자서전을 쓰면 책 한권은 나올만큼 고난에 가득 찬 인생일 것입니다. 그 안에는 선한일 악한일이 뒤섞여 있을 것입니다. 백선생님께서 말씀 하신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왜정시대의 친일, 부일행각은 우리가 아직 청산을 전혀 못한 것이지요. 그 안에서 못된 짓을 한 사람 한 사람을 골라내려면 선생님 말씀마따나 지난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하세월에 그걸 다할 수 있을까요? 그 작업을 다한 다음에 청산하시자는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지난 70여년의 세월 동안 그러면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그 기간 우리 백선생님처럼 음으로 양으로 이렇게 노력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학계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친일을 이어 어용생활을 해왔습니다. 지금 백선생님께서는 또 다시 친일청산을 늦추시는 본의 아닌 오류를 범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왜척결은 일단 통사로 전 인물에 대해 단죄를 해야할 시기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 후 저런 재판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 구제하고 복권 시키는 일이겠지요.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다시는 댓글을 달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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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토론을 멈추려고 했지만... 댓글이 계속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계속하고 있네요. 의견이 다른 분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의견도 받고, 답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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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종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식민제국사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는 지적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만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입장에서 공동체에 해악을 가한 이들에 대한 정당한 징벌은 필요합니다. 혹이나 기여라는 이름으로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방법론적인 반성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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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감사한 말씀입니다. 사법적 처리는 해방 직후에 했어야한다고 봅니다. 유감스럽게도 불발했지요. 당사자들이 죽고 없기 때문에 이제는 역사논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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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미시사 연구가 얼마나 많은 주의와 노력이 필요한지 알것같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 Reply · 4 y
백승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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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Ho Lee
며칠을 열심히 댓글까지 읽었습니다.
리버럴의 문제가 아닌건 알지만 미시사란 것이 우리가 지금 시대를 구분한 것인지, 인류 진화론적 역사를 구분한 것인지 고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현대사에서도 시대를 앞서가 핍박받는 마*수와 장*일도 있고 시대와 거래하자는 박*하도 있지요. 마.장 사안과 박의 사안도 다르고 둘 모두 법률이나 개인적 관점에서는 다를 수 있어요.
그러나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하는 관점 외에도 과거에대해 책임을 다하는 자세는 근현대사를 푸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논리로서야 뭘 증명 못하고, 또 뭘 부정 못하겠습니까.
역지사지, 그것 마저도 잊어버린 디아스포라의 방황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김연수 선생의 행적은 개인적 궤도에서는 교수님의 주장이 지극히 당연할 수 있겠지만, 그 분이 보낸 성금이 총알을 만드는데 보태졌다면, 그걸 알고 보냈다면 실정법에서도 위법인 것은 당연합니다.
역사와 인문은 이런 법률을 초월할 수 있어아 한다는게 학계의 대세란 것도 압니다. 그러나... 공과 사의 선에서 사실의 직시를 넘어선 변론은 백교수님답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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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우리는 지금 칼끝 위에 서있습니다. 총알 내는 돈을 냈으니까 처벌받아야한다. 만약 이렇게 윤리적으로 주장한다면, 징병을 나가서 총을 쏜 우리의 청년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또, 국방헌금을 강요당한 식민지 조선의 모든 농가들, 쇠붙이를 빼앗기고, 곡물을 공출당한 농민들, 고아부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단순하게 주장해도 좋은 걸까요?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의지와 무관하게 빼앗긴 것입니다. 하필 부자라고 해서 유죄, 농민이라고 해서 무죄라고 말할 수가 있겠씁니까? 깊이 고민할 문제입니다. 제가 김씨 일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그들이야말로 실상 민족주의자였다는 점 때문이죠. 귿르은 일제에 빼앗긴 것보다 수백배나 되는 재산을 민족을 위해 내놓았거든요. 그래서 문제가 복잡한 것입니다. 전느 박유하씨와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박씨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해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칼끝에 서있습니다. 양심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 Reply · 4 y
Soo-Ho Lee
복잡한 사안이고 쉽게 결론을 내기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합니다.
박의 사안과도 구분되고 교수님께서 말씀하고자하는 부분도 이해됩니다.
그러나 또다른 그 시대적 상황인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개인으로 돌려 버릴수 밖에 없어질 수 있다는 반대논리도 가능해진다는 점이 가슴 아픕니다.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슴아파해야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봅니다. 일상에서 그렇습니다만,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이유는 결코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제가 지금 김씨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다른 댓글에서 강조하였듯, 제 생각에 그들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근대적 민족주의"에 의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계급과 젠더, 생태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얼마든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필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그들을 비판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밖에 한상룡이라든가 박흥식 같은 이들은 김씨와는 많이 달랐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물론 그들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연구한 바가 없어서 자신있게 말씀드릴 것은 못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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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섭
백교수님의 글 못지 않게, 토론도 가치있습니다. 토론을 멈추지 마시길...
· Reply · 4 y
백승종
실질적으로 토론은 계속되고 있지요. 감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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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아
댓글까지 꼼꼼히 다 읽었어요. 다 이해한건 아니지만 생각의 문을 하나정도 열어놓아야 한다고 느꼈어요.
· Reply · 4 y
백승종
감사합니다!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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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soon Chang
저는 선생님의 많은 글을 재밋고 읽어왔습니다. 저에게는 많은 자극과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글 만큼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꽤 있네요. 후에 시간을 두고 꼼꼼히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 Reply · 4 y
백승종
그럴 수도 있습니다. '친일파'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현안이고, 관점에 따라 판단도 차이가 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이글에서 강조하는 것은 민족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처단하는 것, 그것도 사후에 그렇게 처단하는 일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주장입니다.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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