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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8 February 2015 · Shared with Public
김교신의 고뇌... 그 가운데서 얻은 내면의 결실. 그것을 네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렵니다. 죄송하게도... 지금까지도 그랬고요. 아래의 글에는 제가 붙여둔 각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각주를 원하시는 분들은 나중에 출간될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백승종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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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반(反) 제국주의, 반(反) 식민주의자의 고뇌
20세기의 세계 각국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있었다. 강대국들은 이미 오랫동안 군사, 외교, 경제 및 문화적 우위를 바탕으로, 자국의 지배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혈투를 벌여왔다. 식민지쟁탈전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 등이었고, 그들은 이제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민족자결주의의 물결이 고조되어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 나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식민주의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흥 강국인 일본과 독일은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팽창정책을 폈다.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및 히틀러 치하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년) 등은, 그 시대를 지배한 공기가 총칼의 제국주의였음을 입증한다.
침략의 제물로 전락한 약소민족의 지식계층은 충격과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1930년대 후반, 식민지 한국의 사회지도층이 ‘친일’ 또는 ‘협일’의 대열에 휩쓸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일제가 침략전쟁에서 승승장구하자, 식민지 한국의 지도층은 독립의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고 침략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였다. 기독교를 통해 구미세력과 연대하기를 바랐던 교회지도자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는 1936년부터 신사참배를 이유로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선교사들을 하나 둘씩 쫓아내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 문제로 70여 명의 목회자와 2천 명 가량의 신자들이 투옥되었다. 한국의 기독교회는 위축되었고, 교회지도자들 가운데는 일제에 협력하는 경우도 많았다. 1930년대 말부터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친일파’의 등장, 이것은 한국현대사의 고뇌이자 미해결의 역사적 과제이다.
때는 위기의 시대였다. 시대의 격랑은 김교신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교단생활이 좌절되더니, 이윽고 성서조선 사건(1942년)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일본에서 돌아온 1927년 봄부터 그는 교사로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제말기의 고난은 그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사실상 붕괴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김교신은 자신이 지향한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의 노선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 역시 완강히 거부하였다.
아래에서는 자신의 반제, 반식민주의 노선은 김교신에게 많은 고뇌를 안겨주었다. <<성서조선>>에는 내적 고통의 혈흔이 곳곳에 낭자하다. 기왕의 연구를 토대로, 필자는 고뇌 속에서 김교신이 얻은 내면의 결실을 다음의 네 가지로 집약해 본다. 유교문화전통의 중시, 한국적 기독교신앙의 추구, 비폭력 평화사상의 전개 및 식민주의 사관 특히 지리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아래에서는 그 점을 차례로 약술할 것이다.
첫째, 기독교신자 김교신은 전통사상과의 조화를 꾀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태도는 20세기 초한국사회의 일반적인 풍토와는 확실히 달랐다. 당시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전통사상을 대표하는 유교를 망국의 종교로 간주했다. 그들 가운데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근대’의 종교라는 소신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교신은 재래의 유교적 전통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유교적 바탕 위에서 기독교 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평소 그와 친밀했던 유영모(柳永模, 1890∼1981)와 함석헌의 태도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약간의 차이점도 존재하였다. 김교신은 유교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함석헌은 유교 및 도교의 정신적 유산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유영모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의 전통에 충실하였다.
김교신이 유교적 가치관에서 긍정적 요소를 재발견하였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의 눈에 비친 공자(孔子)는 여전히 인류의 큰 스승이었다. 그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도 유교의 가치를 구현한 선비들이 적지 않다고 인식했다. 정몽주와 사육신의 충절, <<춘향전>>과 <<심청전>>에 나타난 도덕심을 그는 기독교 신앙과 접목시키고자 하였다. 그와 달리 함석헌은 한국민족의 역사적 고난에 주목하고 장차 세계사상의 창조적 수고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함석헌이 설파한 한국인의 문명사적 사명을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김교신의 기독교신앙은 깊이를 더하였다.
둘째, 김교신 한국적 기독교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정열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를 비롯한 <<성서조선>> 그룹은 서구적 교단으로부터 한국의 기독교가 분리 독립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졌다. 이것은 스승 우치무라 간조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19세기말부터 서구 열강은 한반도에서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선교정책을 폈다. 한국을 포함한 ‘동양’세계에 대한 서구열강의 인식은 부당하였다. 동양은 이질적이고 낙후된, 미개한 세계를 뜻했다. 제 역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는 나약함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은둔의 나라 조선>>을 저술한 미국인 선교사 그리피스(W. E. Griffis)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피스는 조선의 역사를 평가하기를, “그 역사라는 것은 단지 민담에 불과하며,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와 같이 민족적인 허영심과 동물 신화에 근거하여 전통적이고 지역적인 가치의 차원에서만 어림잡은 연대기”일 뿐, 근대적 의미의 역사라는 범주에 속하지도 못한다고 못 박았다. 그리피스는 20세기 초의 한국사회는 서구의 기독교 근대문명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고대’에 정체되어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과도한 서구 중심주의는 한국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송두리 채 부정하는 것이었다.
김교신은 미국식 기독교회를 모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확신했다. 서구우월주의에 빠진 서양선교사들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판단이었다. 김교신이 중시하는 기독교의 진리는 형식적인 교리, 교회조직 또는 예배의 절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리는 인간의 주체를 확립하는 동시에 상대화하는 하나님을 믿고, 그에 대한 신앙을 ‘하향적 아가페’의 행위로 표현하는 데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신앙의 진리는 시공간에 따라 각기 다른 형식을 택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인의 감성과 기호와 역사의식을 반영하여 한국적 형식을 구축해야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한국기독교인의 사명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천박한 상업주의’에 오염된 미국인의 신앙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은밀히 덕을 쌓고 은밀히 보는 하나님에게 보답 받기를 기다리”는 한국의 전통적인 ‘은덕(隱德)’을 중시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정복지향적인 서구적 인간상을 부러워하지 말고, “선을 행하지는 못해도 선을 행할 것이라는 도(道)는 알았고, 이를 두려워 할 줄은 알았”던 조선선비들의 ‘위선’을 차라리 그리워하자는 것이었다.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김교신의 기독교신앙을 다년간 연구해온 양현혜는 이렇게 주장했다. 김교신의 신앙은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란 하나의 축과 “역사 현실 안에서 고난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불의를 정화해 나가는 '창조적 자기수고(自己受苦)'라는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며 창조”하는 길이었다.
셋째, 그는 제국주의가 자행하는 폭력과 불의를 거세게 비판하였다. 노골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은유와 풍자의 힘에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38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때의 일이다. 김교신은 <일기>에, “돼지 물먹는 것을 관찰하니 그들 세계에는 강대자(强大者)가 정의자인 듯하다”라는 말로서 침략을 일삼는 제국주의 국가들을 ‘돼지’라고 은유하였다. 이러한 비판의 이면에는 하루빨리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침략이 사라지고, 비폭력평화의 새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엿보인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이른바 ‘삼국동맹조약’(1940.9.27)을 체결하기 직전에는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1940년 6월 6일자 <일기>에서 김교신은 불안한 세계정세를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근래 셰퍼드 광견 하나가 북쪽 아이도 물고 서쪽 어른도 찢어서 야단인데, 또 불독 하나가 거의 미치기 시작한다고 해서 이웃들이 매우 불안 중에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을 거론하는 것처럼 꾸미면서 제국주의의 연대를 비판한 것이다. <일기>에서는 ‘셰퍼드’로 나치 독일을 빗대었다. ‘북쪽 아이’는 독일의 침략으로 고초를 겪는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를 상징하였고, ‘서쪽 어른’은 프랑스를 뜻했다. ‘거의 미치기 시작’하는 ‘불독’이란 두말 할 나위 없이 1940년 6월 10일 참전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가리키는 것이다. 더욱 까다로워진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며 제국주의자들의 비행을 꾸짖으려니, 은유와 상징에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박상익의 견해처럼, “김교신의 글은 이런 의미에서 ‘행간’을 읽어야 흥미가 배가(倍加)된다.”
끝으로, 김교신은 일제 식민주의 역사가들이 강변한 ‘지리적 결정론’을 반박하였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반도라고 하는 지리적 한계 때문에 한국은 대륙(중국)과 섬(일본)의 지배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영구히 한반도를 떠나지 않는 한 피지배민족의 운명을 청산할 수 없다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운명론이었다. 이에 김교신은 지리학자로서 냉철하게 한국의 지리적 특성을 검토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결정론’을 철저히 부정하였다. 다만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의식하여, 일제 식민주의 역사가들의 실명과 그들의 거짓된 주장을 명시하지는 못하였다.
우선 국토의 면적이나 인구는 국세의 강약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밝혔다. “덴마크,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나라는 대략 조선반도의 5분의 1, 또는 6분의 1에 불과하면서도 남에게 신세지지 않는 살림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 열강의 선망을 받고 있다.” 동시에 “2000만 명이라는 조선 인구가 적지 않은 식구인 것을 다시 인식하고자 한다.”라고 하여 한국은 결코 약소국가가 아님을 천명하였다.
김교신은 한반도의 자연환경에 대해 강한 자긍심을 표현하였다. “우리는 온화한 기후와 안정된 자연환경의 반도에서 나고 자람을 못내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자랑거리가 있으니 반도 강산의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다. 이에 대하여는 거의 세계 유일의 아름답고 균형 잡힌 산천이라 하여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하물며 산세와 평야의 배열과 균형의 아름다움을 논하자면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화에다 비할까? 뉴욕 부두에 높이 솟은 자유의 여신상에다 비할까?”
한반도는 자연조건이 다소 불리한 점도 있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과학기술이 발전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놓치지 않았다. “강수량이 다소간 모자란 경향이 있었던 까닭에 서구 제국보다도 200년이나 앞서서 조선시대 초기에 벌써 측우기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세계 최초로 과학적으로 강우량을 계산했다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은 우리 조상들이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는 일에도 비상하였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하늘에 구름이 적은 것이 일찍이 천문학이 발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으니, 경주와 개성에 첨성대 옛 터가 남아있어서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맑은 하늘은 그 하늘 아래 백성의 마음을 맑게 하였으며, 맑은 마음이 어찌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 이 강산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에 감사할 것은 있어도 불만할 것은 없다.”
식민주의자들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치명적 약점인양 매도하였다. 그러나 김교신의 견해는 정반대였다. “조선은 극동의 중심이다. 심장이다.”라고 주장하고,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반도의 국가로써 한 세계 한 시대의 심장 역할을 담당한 여러 나라를 예시하였다. 그리스 반도, 이태리 반도, 덴마크 반도가 차례로 소개되었다. 결론적으로, 김교신은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지리적 단원으로 보나 그 면적과 인구로 보나 산악과 해안선의 지세로 보나 기후로 보나 극동의 중심적인 위치로 보나 조선의 지리적 요소에 관한 한 우리가 불평을 하기보다 만족과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넉넉히 한 살림살이를 꾸려갈 만한 강산이며 넉넉히 인류 사상에 큰 공헌을 제공할 만한 살아있는 무대이다.”
이상에서는 반제, 반식민주의로 압축되는 김교신의 내면적 지향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인은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이 강요하는 민족적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민족의 활로를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전통의 미덕을 되살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정서와 풍토에 적합한 산업과 신앙을 자율적으로 가꿔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폭력을 배제하고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구현하는 일대사업이 될 것이다. 김교신은 이처럼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는 한국이 또 하나의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 곧 군사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국가의 독립을 위해 일정한 물질적/경제적 성장이 필수적이었을 테지만, 김교신이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도리어 정신/종교적 성장이었다.
일찍이 그는 한국의 장래 소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극히 높은 사상, 즉 신의 경륜에 관한 사상”인 종교는,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 당하고, 유린당하여, 타고난 교만의 뿌리가 뽑힌 자에게만 특별히 계시되는 듯하다.” 역사의 이치가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위탁하”려고, “저들에게서 온갖 것을 빼앗고 갖은 부끄러움과 모욕을 지워 주었다.” 김교신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급하는 가운에 한국의 역사와의 중첩을 꾀하였다. 그의 결론은 자명하였다. 한반도의 사정을 살펴볼 때, “맑은 마음을 이 백성에게 두신 이” 곧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 지를 우리는 그윽이 기다리고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아마도 <<성서조선>> 그룹 일반의 공통된 소망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대다수 구성원들도 기꺼이 동의할만한 견해였다.
Comments
Changhoo Lee
당시 현실에서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존과 자긍심을 자각하고 지킨다는건 엄청난 일이었겠습니다. 다음 글 기다리겠습니다 백선생님. 넘치는 일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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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Changhoo Lee 맞습니다. 웬만한 자존감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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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hee Bennett
이렇게 긴 글을 준비하시느라 애 쓰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 Reply · 5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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