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7

백승종 친일

18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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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독재자 중심의 한국역사 지난 2011년 11월 8일, 중학교용 새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이 발표되었다. 새 교과서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같은 독재자들의 압제행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독재자들에 대해 일종의 면죄부를 발부하겠다는 속셈이 아니고 무엇인가. 비슷한 조치가 박근혜 정권 때도 거듭되었다(교학사 역사 교과서 사건). 또, 새 교과서는 세계 각국의 민주시민들이 경탄한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서술을 간략히 하라고 주문한다. 민주화운동의 꽃이라 할 5ㆍ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은 언급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기득권 세력인 보수우파의 정치적 편견을 드러낸 편향적 조치였다. 게다가 새역사교과서는 시민사회의 관심거리인 친일파 청산 문제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이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설로 인정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명박 정부가 주도한 교과서 개정작업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뚜렷이 알 수 있다. 보수 우경화였다. 고작 이런 것이 교과서 개정의 목적이었다니 어이가 없지 않은가. 이명박 정부는 역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부활시켰다. 이는 본래 박정희 독재정권이 애용한 정치구호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사라져 간 독재정권의 슬픈 유산이었는데 이명박 정권이 되살려낸 것이다.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고 둘러댔으나 설득력이 없는 일이었다. 또, 그들은 국가적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대한민국이야말로 유엔이 인정하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점을 교과서에 명시하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가 세운 교과서 집필기준은 ‘한국현대사학회’의 주장을 따른 것이었다. 이른바 한국현대사학회는 2011년 5월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이 창립한 보수학술단체이다. 그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퍼뜨리며, 박정희 독재정권의 산업화 정책을 미화하였다. 반면에,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화해와 평화통일을 향한 남북한 당국의 노력도 비방하였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정치적 코드가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이처럼 편파적이고 그릇된 주장을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라고 고집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다.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이후 서로 국체를 인정하여 기본합의서를 작성하였고, ‘정상회담’까지 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고집하면, 그것이 국가적 정체성의 확립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유치한 주장이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당초에 이승만을 비롯한 보수 정치세력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쓴 적도 없었다. 이것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반공주의를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억지로 만든 용어였다. 그들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는 미명으로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적이 많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향하는 정치체제를 하필 ‘자유민주주의’라고 명명할 이유가 없다. 불명예로 얼룩진 괴상한 용어를 현대 한국사회가 굳이 고집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친일’과 ‘독재’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는 근현대사의 중심과제였다. 많은 시민과 양심적인 학자들이 줄곧 이 문제와 씨름하며 힘겹게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시민사회에 역사적 정체성을 부여한 쾌거였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은 이를 무시한 채 역주행만 고집하였다. 두 정권(이명박근혜 정권)이 역사 교과서를 멋대로 뜯어고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시민은 크게 실망했다. 첫째, 권력자들의 미성숙한 자세가 문제였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은 왜, 시민과 전문가들이 상의하여 자율적으로 새 교과서를 만들 수 없게 제한하는가? 자신들의 정치적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교과서를 함부로 뜯어고친다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정권이 바뀌면 또 바뀌고 말 것 아닌가. 보수 정권의 몰상식이 학문의 자유를 억누르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철면피함을 후세는 무어라 비판하겠는가.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다. 누구든지 역사해석을 독점할 권리는 없다. 왜 한국사회는 이렇게 기본적인 상식마저 지키지 못하는가? 역사적 사실관계를 잘못 서술한 것이 아니라면, 역사해석은 다양할수록 좋다. 다양한 해석이 담긴 여러 종류의 교과서가 있다면, 시민사회의 문화적 역량은 한층 커질 것이다. 정권 차원에서 특정한 견해를 고집하며 역사 교과서의 저술지침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말로는 다종다양한 검정교과서를 허용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한 가지로 사관을 강요하는 것은 유감이다. 끝으로,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개정작업은 구시대의 악습을 되풀이하였다. 역사책을 온통 국가와 민족 위주로만 서술하는 것은 낡은 관행이다. 시민의 삶이 전개되는 주요 무대는 가족과 마을이라는 실명(實名)의 소집단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면 역사적 진실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한국의 역대 정권은 교과서의 집필기준을 마련할 때 시민들의 일상을 역사서술의 중심으로 삼고자 노력한 흔적이 별로 없다.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시민 중심의 사회여야 하고, 그렇다면 시민의 일상이 역사기술의 핵심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해방된 지가 70년도 넘었는데, 역사교육은 아직도 깜깜한 밤중이다. 출처: 백승종, <<생태주의 역사강의>>(한티재, 2018,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약간 변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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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Dec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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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 -------------------------------------------------------------- 친일 검사인가? 2005년 5월 9일 검찰은 ‘이준 검사상’과 ‘최대교 검사상’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서울신문>, 2005. 5. 10.) 이준은 헤이그 밀사로 시민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뿐, 그가 구한말의 검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실제로 그가 검사로 재직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나날이 국운이 기울어 가던 그 당시에 검사로서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었다. ‘대쪽 검사’ 최대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법조계는 물론이고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최대교란 이름 석 자는, 검찰의 독립을 거론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검찰의 계획이 발표되고 거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검사상’ 시상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 계획 자체가 무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준은 검사로서의 활동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고, 최대교는 친일파 논란에 휘말려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준의 경우는 그렇다 하자. 최대교의 친일문제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시대의 질곡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역사 앞에 숙명적인 존재다. 2005년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사전의 1차 수록 대상으로 309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최대교의 이름은 바로 그 안에 포함되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친일행위를 하였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다만 그는 일제강점기에 검사로 봉직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름이 친일파 명단에 끼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파를 선정한 기준은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1) 일제의 국권침탈에 협력한 자, (2)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에 참여한 자, (3) 항일운동을 방해한 자, (4) 일제의 황민화 정책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 (5) 기타 친일행위자가 그것이다. 그런데 (2)의 세부사항을 보면 ‘판사 검사로 재직한 자’와 ‘친일행위가 현저한 일반 사법관리’라는 항목이 있다. 이 기준에 따라 최대교는 ‘검사로 재직한 자’라서 무조건 친일파로 규정되고 만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으로서 판사나 검사로 활동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무조건 독립투쟁에 나섰어야만 옳고, 그 외의 직업에 종사한 것은 범죄적 행위일까?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과거를 단선적 또는 결과론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역사적 평가는 시대 상황과 개인의 처지를 고려하여 신중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정 2004.3.22 법률 제7203호; 일부개정 2006.4.28 법률 제7937호]의 제2조에서 최대교와 관련되는 부분을 찾아보자. 법은 ‘친일반민족행위’ 중 하나로서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기 전후시기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사법부내의 판사 또는 검사로서 주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의 감금·고문·학대 등 탄압에 앞장선 행위(2004년)”를 반민족 행위라 정의하였다. 일부 개정된 내용에 따르면, ‘사법관리’로서 같은 행위를 한 사람도 포함시키고 있다.(2006년) 해당 규정을 적용해보면, 일제강점기에 검사를 역임한 최대교는 일단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혐의를 쓰게 된다. 그러나 그가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의 감금·고문·학대 등 탄압에 앞장선 행위’를 하였다는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어야만 ‘친일반민족행위자’ 곧 ‘친일파’라 말할 수 있다. 아직은 최대교가 ‘민족탄압’에 앞장섰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친일인명사전의 수록대상에 포함되었다. 해당 사전의 수록 대상으로 선정된 상당수 인사들의 처지 역시 최대교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장차 사전편찬위원회가 어떠한 조사활동을 벌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시공을 초월하여 사법기관은 체제유지의 중추적인 기관이다. 일제강점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도 사법기관이 식민지지배체제의 유지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사법부 관리로 근무하였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라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작위적인 판단이다. 친일파 청산문제에 있어 비교적 철저했다고 평가되는 북한의 경우에도 총독부에서의 지위나 직책 보다는 구체적인 친일행위를 우선으로 판단하였다. 1946년 2월에 구성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심의 채택하였다. 해당 규정의 제4항에는, “일제 경찰 및 헌병의 고급관리와 사상범 담임 판사와 검사”라 하여 ‘사상범’을 취급한 판사와 검사로 제한하였다. 또한 제11항에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부문의 관리로서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악질분자”라고 규정하여, 민족의 ‘원한’을 산 구체적인 행위를 범한 경우에 국한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사전편찬위원회’의 친일파 규정은 너무 단순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제는 일제강점기 일반 사법 관료들에 대한 총체적인 검토와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다행히도 그 시절의 행정관료에 관하여는 몇 편의 연구가 있다.(박은경 1994; 장신 2002; 장신 2007.) 사법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제 막 시작단계이다.(문준영 2004) 최대교는 일제강점기의 검사생활을 회고하는 글도 남겼고, 말로 표현한 적도 많았다. ‘해방 후보다 일제시기가 검사로서 일하기가 쉬웠다’고 주장하였다. ‘그때는 상부의 압력이 없어 소신껏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일본인 검사들뿐인 직장이었지만 거리낌 없이 검사장의 일처리를 욕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라고까지 말했다.(최대교 1984b, 74.) 이러한 최대교의 진술을 토대로 어떤 학자들은 “그의 말은 사실을 전하는 것”이라며 일제강점기 검찰 및 법원 일반의 공정한 분위기를 호평하는 경우도 있다. 나로서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일제는 군국주의의 기치 아래 권위주의적 국가체제로 운영되었다. 설사 삼권분립의 원칙을 존중했다 하더라도 그 한계는 명백하다. 또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법 자체가 이미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독소조항으로 가득했다는 점은 부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최대교의 회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마치 최대교가 일제강점기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 것처럼 오해할 여지가 있다. 그의 단편적 회고담은 식민지라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애착심의 발로로 읽힐 가능성도 있어, 독자의 경계심을 요구한다. 최대교가 일제 때의 검사 생활을 호평한 것은 왤까. 해방 뒤 법정에서 그가 몸소 겪은 외부의 압력과 상부의 변칙적 처리에 대해 그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썩어빠진 네놈들보다는 차라리 왜놈들이 더 나았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일제를 두둔해서 나온 말이 아니다. 해방 뒤 우리의 일상을 장악한 부정부패 세력에 대한 최대교의 처절한 항변이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어떤 연구자는 최대교가 일제사법제도 전반에 대해서 아낌없는 신뢰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최대교는 1919년의 3.1운동 관련자에 대한 일제의 판결을 분석한 적이 있었다. 일제 검찰은 내란죄를 적용하자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그보다 가벼운 보안법, 출판법 위반을 적용했기 때문에,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한국인들 가운데 최고형이 3년에 그쳤다고 최대교는 말했다. 아울러 재판이 진행될 당시 조선총독에 재임한 하세가와(長谷川)나 사이토오(齋藤)총독이 간섭한 흔적이 없다고 했다. 즉, 삼권분립의 원칙이 지켜졌기 때문에 법관의 소신대로 재판이 이뤄졌다고 본 것이다. 일제의 삼권분립에 관하여 최대교는, 1891년에 발생한 일본의 ‘오오쯔(大津) 사건’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 해 5월 11일, 일본시찰 중 오오쯔에서 러시아의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훗날 니콜라이 2세)가 일본인 순사 쯔다 산조오(津田三藏)의 칼에 상해를 입은 사건이다. 러시아 황태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잠시 일본에 들른 거였다. 의외의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강대국 러시아의 비위를 맞추려고 대심원(大審院, 당시 일본의 최고 법원)을 압박하였다. 쯔다에게 사형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심원장 코지마 코레키타(見島惟謙)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법권은 독립이다. 정부의 지시는 받지 않는다.” 최대교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일본은 약 백 년 전부터 이렇게 문화가 발전되어, 사법이 행정부의 간섭 없이 독립되어 공평하게 집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최대교 1984a, 85.) 이와 같은 최대교의 주장은 일제하의 권력분립을 칭찬한 것이지만, 속내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신생대한민국의 정치적 굴곡과 보다 깊은 관계가 있는 발언이었다. 여러 가지 사건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처럼 제1공화국 행정부는 입법과 사법부의 독립성을 부정하였다.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면 사법부의 요인이 가차 없이 현직에서 축출되거나 지위 강등을 겪었다. 가령 1950년 6월 12일 검찰총장 김익진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좌천되었다. 상식을 벗어난 정치적 탄압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정치 풍토 속에서 최대교는 자신이 생명처럼 여긴 사법부 독립의 소신이 무너지고 훼손되는 것을 되풀이하여 겪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현직에서 완전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964년). 1950-60년대 한국의 사법부는 최대교 뿐만 아니라, 김병로와 김홍섭 같은 양심적 법조인들에게 크나큰 좌절을 안겨주었다. 최대교가 일제 때를 운위한 것은, 유감이다. 하지만 구미의 다른 여러 나라의 법조현실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논의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언제나 낙후된 신생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현실을 직접 간접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회고담에는 양심적 법조인의 비애와 처참한 심정이 절절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혹자는 그가 일제강점기 동안 몇 안 되는 한국인 판검사였다는 사실 때문에, ‘엘리트 의식’이 강한 사람이라고 의심할 지도 모르겠다. 일제 때는 일본인 판검사와 어깨를 나란히 법정에 들어서는 한국인이 극소수였다. 최대교가 검사로 발령을 받은 1935년 당시 조선총독부 소속의 검사는 총88명이었고, 그 가운데 한국인은 7명뿐이었다.(김이조 2002b, 885.) 1937년에 그 수가 11명으로 늘어났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한 시대의 엘리트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검사 최대교의 행위에는 ‘엘리트 의식’의 부정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없다. 검찰의 올바른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할 때 그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서만 움직이지 말고, 정부를 법률 면에서 선도, 보좌할 책임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최대교 1984c, 95.)라고 하였다. 검찰은 한국사회의 엘리트로서 행정부를 선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최대교가 생각하는 엘리트는 다분히 도덕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존재였다. 정치 또는 경제적 특권에 연연해하는 것은 결코 최대교가 가슴속으로 그리는 엘리트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그의 회고담에 등장하는 일본인 판사, 검사들도 고상한 품위를 견지한 도덕적인 존재들이었다. 법에 따라 지인의 구속을 허용한 함흥의 이와키 검사장만 해도 자신을 슬며시 속여가며 법대로를 주장하는 최대교의 원칙주의를 격려하는 사람이었다. 최대교는 원고와 피고 모두에게 공정하다는 믿음을 심어준 일본인 판사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최대교 1963, 82.) 또한 어느 일본인 판사가 피고인에게 보석 결정을 했는데, 시계를 뇌물 받은 사실이 밝혀져 10개월의 실형을 받은 실례를 언급했다.(최대교 1984c, 95.) 그만큼 일제 때 법조인에게는 엄격한 자기관리가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최대교의 동경어린 회상은 근대적 법치주의에 대한 그의 열망을 반영한다. 그와 동시에 최대교의 세계관에 있어 토대가 되는 성리학적 도덕관념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제 때의 검사들을 이렇게 평하였다. “당시의 검사는 (중략) 예의가 바르고 사리가 분명했으며, 검사장들마저도 그러한 상하 선후배 관계를 무시한 인사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최대교 1984b, 73.) 그 당시의 모든 검사가 그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대교 자신의 진술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에는 한국인 검사를 차별하는 불공정한 관행이 적지 않았다. 다만 그가 회고담을 통해 애써 강조한 것은, ‘기개도 원칙도 없는 대한민국 검사들아, 제발 정신 차려라!’는 그 한마디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 법조계의 잘못된 관행을 꼬집어 비판하였다. ‘오전에 법정에서 피고인의 변호인과 법관으로 서로 다투던 두 사람이, 점심식사를 위해 휴정한 직후 서로 거리낌 없이 요정으로 함께 식사하러 가는 관행이 있다. 이것은 관련자들의 의심을 자아내는 일이다’.(최대교 1963, 81.) 물론 최대교에게도 약점이 없지 않았다. 대개의 법률가들이 그러하였듯, 그 역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한 흔적은 없다. 한국의 법조인들은 민족의식에 충실하기보다 검사로서 일상의 직무에 충실하였다. 대한제국 시절부터도 국운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 법률가는 극히 드물었다. 예외적인 존재로는 안병찬(安秉贊, 1854-1929)과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등이 있었을 뿐이다. 안병찬은 안중근 의사를 변호했고, 이시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투신하여 독립운동에 힘썼다. 초기의 법률가들은 법관양성소 출신이거나 일본에 유학해 법학을 공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정치적으로 출세한 경우는 별로 없었고, 대개는 변호사로 생을 마감하였다.(최종고 1990, 87.) 구한말 한국의 개화세력은 서구의 근대적 법률 체계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롭게 정립된 일본의 법제는 하나의 표준이었다. 일본에 직접 유학해서 배웠거나, 국내에 있으면서 일본인을 통해 획득한 법률지식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한국을 꿈꾸었다. 그들은 일본이란 존재를 긍정하였고, 그것이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초석이 될 것으로 믿었다.(정긍식 2002, 160-173.) 일제강점기의 법률가들에게는 또 다른 세속적인 목표도 중요했다. 김홍섭의 경우에서 확인되듯, 식민지의 백성으로서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변호사 자격의 취득이었다. 보다 적극적인 기대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일본법의 전문가가 되어, 식민지 통치체제에 가담함으로써 입신양명(立身揚名)이 보장될 것으로 믿었다. 이러한 법조인들에게는 법률과 법률가의 사회적 위상만 존재하였을 뿐, 민족이란 존재는 아득히 먼 구름과도 같았다.(정긍식 2005, 4.) 일제강점기 법률가들 가운데서도 민족의 현실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일부러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가 그러하였다. 김병로는 청년시절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문하에 들어갔고, 일찍부터 의병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의병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신식공부의 필요를 느꼈다. 1910년 3월, 김병로는 일본유학길에 올라, 1915년 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한 뒤 그는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의 강사가 되었다. 전문지식을 활용해 총독부의 관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강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법제가 바뀌어 그는 판사로 임용되었지만, 민족독립운동자를 재판하게 되자 서슴없이 현직을 떠났다. 이후 김병로는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는 일제시기 최고의 양심적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였다. 김병로가 걸어간 길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특별한 인생행로였다. 대개는 이런 저런 일신상의 이유로 법조계에 뛰어들었다. 엄상섭(嚴詳燮, 1907-1960)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9세에 부친을 여의는 등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고생 끝에 전남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사가 되었다. 영문학 공부를 더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여의치 못해 포기하고 대신에 자유업을 할 요량으로 법률학을 공부하였다. 최대교의 경우처럼 그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그리하여 사법관시보가 되었고, 끝내는 검사에 임명되어 식민지의 관리가 되었다.(엄상섭 1957, 483-485.) 이처럼 법조계의 대다수 인사들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와 자유를 얻기 위해 법률가란 직업을 선택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판사나 검사 또는 변호사가 되었다. 이렇다 할 민족의식은 없었고, 대신에 일신의 안일과 영달이 보장된 전문가로서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최대교는 일제강점기에 자신이 검사의 직책을 수행한 사실을 친일의 문제로 인식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의 동료였던 엄상섭은 좀 달랐다. 엄상섭은 자신의 검사경력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도 자신이 계속 검사로 일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를 자문하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된 뒤에는 ‘민족정기의 앙양을 위해 반성하는 마음으로 자신은 현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하며 검사직을 자진사퇴하였다.(엄상섭 1957, 485.) 최대교에게는 민족의식 자체가 아예 없었다거나 그가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명백한 사실은, 민족의식보다는 검사로서의 직업정신이 최대교에게는 더욱 투철하였다는 점이다. 전문가로서 이러한 직업정신도 중요한 것이다. 해방 후 아직 사법제도가 정비되지 못한 격변기에 그것은, 사법부의 독립과 정치적 중립성을 세우는 과정에서 중요한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45세의 최대교는 해방을 맞았다. 그 당시 한국의 법조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일제가 길러낸 전문가들이 그 전부였다. 최대교는 그들 가운데서도 최고 수준의 교육과 실무경험을 쌓은 사람이었다. 일본 호오세이대학에서 받은 근대적 법률 교육과 조선총독부에 속한 일본인 검사들과의 경쟁과 협력 관계 속에서 연마된 실무 능력은 과소평가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법률가로서 그의 높은 소양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강직한 그의 성품을 통해 더욱 빛났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최대교는 검사로서의 실무능력과 활동력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의 검사 직무수행능력이 신생 대한민국에 과연 어떤 식으로 기여하게 될지는 그 자신으로서도 몹시 궁금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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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ug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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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선생을 생각하며 — 72번째 ‘광복절’을 맞는다. 1.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은 그분의 호를 따라 “심산(心山) 선생”이라 불리지요. 사람의 일생을 한 마디로 말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 분의 경우에는 두 번 생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 어른은 참된 선비셨다!”,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2.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습니다.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르셨지요. 1919년, 전국에서 3.1 독립만세 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선생은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가지고 중국의 상하이[上海]로 가셨습니다. 이 문서를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보내, 국제사회에 대한독립의 보장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여러 차례 국내와 중국을 오가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셨지요. 그러다가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국내로 송환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선생은 대전형무소에서 갇히셨습니다. 3. 옥중에서 광복을 맞은 심산 선생은 출옥하기가 무섭게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였습니다. 선생은 성균관장이 되어 친일에 골몰하던 악질 유림을 소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산 선생은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하여 “하야(下野)”를 촉구하였고, 그로 인해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심산과 같은 분을 옥에 가두는 독재자 이승만이라니! 실로 애통한 일이었습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은 정치파동을 일으켜 독재 권력을 더욱 강화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선생은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하고, 독재에 항거하였습니다. 그러자 독재자의 주구들은 감히 선생에게 테러를 저질렀습니다. 4. 양심적인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선생을 존경하였습니다. 1962년 5월 10일, 심산 선생은 한 많은 이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한국사회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선생과 영결하였습니다. 5.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보잘 것 없는 저희 집안도 심산 선생과 무연(無緣)하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1947년 겨울, 심산 선생이 성균관장으로 계실 때였습니다. 선생은 전국의 “친일 유림”을 소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뜻 있는 분들을 골라내어, 각 지방 향교의 중임을 맡기셨지요. 그때 제 조부 백남룡(白南龍, 호는 淸溪) 공에게는 전주향교의 “장의” 곧 유생 대표의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 하나를 소개합니다. 단기 4280년(1947년) 연말, “성균관장 김창숙”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백남룡을 전주향교 장의에 임명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문서는 전주향교를 통해 당사자(백남룡)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관행이었겠지요. 임명장이 담긴 흰색의 문서봉투가, 70년 전에 일어난 역사의 편린(片鱗)을 온전히 전하고 있습니다. 6. 그때 신산 선생을 비롯한 전국의 유생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이 나라를 폐허에서 다시 일으키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친일의 잔재를 청산하고, 하늘의 도를 따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그분들의 꿈은 교활한 정상배와 잔악한 매국노들에게 유린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70년도 더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적폐”를 쓸어내지 못하고 있지요. 그 사이에도 미국과 북한은, 잊을 만하면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한반도 전쟁위기설을 퍼뜨려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질곡으로 유도하며, 자기네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묻노니, 이 나라의 주인은 진정 누구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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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ik Kim, 이권희 and 31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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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Oc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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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국정교과서 문제 이 문제에 관하여 저는 그간 몇 차례 입장을 밝혔지만 다시 한 번 반대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그간 <백승종의 역설>(한겨레신문 연재)에서도 제 입장을 천명했고, 수년 전 교학사 역사교과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녹색평론>>에서 그 문제를 자세히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궁금하게 여기는 분이 계실까 봐, <<녹색평론>>에 실었던 제 글의 일부를 다시 옮겨 적어봅니다. 국정교과서에 대한 제 입장은 단순히 “친일미화”, “독재정권미화”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현재의 교과서들이 국가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만능주의”로 요약되는 자본주의적 관점을 지나치게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역사교육 전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습니다. (제 주장은 《녹색평론》제133호, 2013년 11-12월호에 <생태주의자가 본 역사교과서 문제>라는 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 ‘역사전쟁’을 넘어 ‘문화전쟁’으로 우파는 지금 역사 논쟁의 폭을 확대하는 데 몰두한다. 무슨 까닭일까? 우파들의 타격 목표가 되다시피 한 주진오(상명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 북’에서 말했다. “역사교과서가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었던 시비 가운데 이번 싸움이 가장 치열한 것 같다. 당연히 그 이유는 단지 교학사 교과서 때문이 아니라 이 정권이 작정하고 역사전쟁을 벌이려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체로 미온적이었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2013. 9. 29.) 주진오는 현재 전개되고 있는 좌우파의 대립을 우파들이 기획한 ‘역사전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민주당의 유기홍 의원 등은 2013년 9월 27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검정의 취소를 외치는 동시에,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 임명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유 위원장은 이미 과거에 일제의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대안 교과서를 감수한 전력이 있고,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현대사학회’의 고문이기도 하다. 그런 인사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기용하였기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결국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들이 모두 폐기되고 국정교과서 체제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의 목소리가 들린다(도면회 및 한철호). 한국사회 전반에 권위주의적 사고가 날로 강화되고 있기 형편이라, 이런 추측까지 나오게 되었다. 김육훈(역사교육연구소장)은 교학사의 새 교과서를 편들고 나선 정치세력이 하나의 ‘역사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학교 현장을 이념투쟁의 장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이번의 교과서 논란은 그 본질이 문제의 교과서에 혜택을 주려는 권력기관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다. 그 말대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문제는 그 핵심이 국가권력에 의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의 훼손에 있는 것도 같다. 권오현(경상대 교수) 역시 한일 양국의 사례를 분석한 논문에서, 두 나라 모두 우파 성향의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적이 많았다며, “정부는 역사교과서 논쟁 문제에 대해 공정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역사서술에 대한 부당한 개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바른 지적이다. 교학사 교과서의 필자 이명희(공주대 교수)는 단순한 ‘역사전쟁’을 넘어 ‘문화전쟁(문화투쟁)’으로 나가자고 외친다. 한국의 문화계에 대한 그의 진단은 이러하다. “좌파 진영이 교육·언론·예술·출판·학계의 60~90%를 장악하고 있다. 현 국면이 유지되면 10년 내 한국사회가 구조적으로 전복될 수도 있다.” 이명희는 한국의 진보진영을 곧 종북 세력으로 취급하고, 그 타도를 부르짖는 것이다. 어불성설이다. 문제는 이명희와 생각을 공유하는 기득권층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들(좌파)은 1990년대 역사해석, 문학·영화·엔터테인먼트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인문학―사회과학―언론노조―방송과 신문―인터넷 포털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문화 진지’를 구축했다. 이들이 만든 ‘문화 진지’는 ‘주류 문화’가 없던 대한민국의 ‘문화권력’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지금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공격하는 ‘어둠의 세력’과 마주하고 있다.”(박성현, 〈뉴데일리〉 주필) 이런 발언의 장본인 박성현은 ‘바른역사국민연합’의 주도적 인물로서 교학사 교과서를 수호키 위해 앞장서고 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우리가 할 일은 ‘공화’로 대변되는 주류 문화를 창조해, ‘어둠의 세력’이 만들어낸 ‘문화권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여기서 확연히 드러난 바처럼, 기득권층은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진보진영의 공세를 빌미로, 전선을 확장하여 그 개념조차 불분명한 공화(共和)의 가치로 무장한 보수 측을 이끌고 진보진영을 상대로 한 ‘역사·사상·문화전쟁’을 벌이겠다는 다짐이다. 2013년 9월 27일 오전 서울특별시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바른역사국민연합’의 창립기념식은 그런 점에서 일종의 출정식이었다. 540개도 넘는 중도·보수 성향의 시민사회단체가 총 연합하고, 그 가운데 원로 역사학자들을 비롯해 학계, 법조계, 언론계 및 종교계 인사들과 원로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섬뜩하다. 그들의 창립대회에는 참석자 수가 300명을 넘었다. 그 자리에서 권희영은 교학사 교과서의 집필자를 대표하여, “우리가 만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매도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그동안 외롭게 싸웠지만 이제 든든하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렇게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된다”고 감사의 뜻을 밝혔다. 기득권층의 결집에 고무된 주류 매체들은 교육 현장을 이념투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수만 명의 교사가 회원으로 가입한 합법조직체 전교조까지도 ‘종북’이라고 매도하며, 교학사의 새 교과서 말고는 모두 종북 좌파의 교과서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진정한 의미로 좌파와 우파를 구별하는 이념상의 편차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생태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좌파와 우파는 일란성 쌍생아로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좌우파는 모두 민족과 국가의 영광과 배타적인 이익을 내세운다. 그들 모두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매달려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잉산업화에서 국가와 사회의 보랏빛 미래를 찾는다. 그들 사이를 가르는 편차가 있다면, 친일과 독재를 바라보는 시각에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정도다. 물론 이것도 차이는 차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차이 때문에 상대를 완전히 백안시하고 발본색원하려 든다면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15년 동안 유럽에서 살았다. 저들 나라에도 좌파와 우파가 엄연히 대립하고 있지만, 그들이 서로의 이념 차이 때문에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역사전쟁’ 또는 ‘문화전쟁’을 벌이는 모양은 듣도 보도 못했다. 좌우가 어차피 한 사회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고, 정치권력은 매번 선거 결과에 따라 그들 사이를 오가기 마련이다. 사정이 이렇듯 빤한데 교과서를 둘러 싼 ‘역사전쟁’은 무엇 때문에 필요할 것인가. 더구나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그들 사이에 ‘문화전쟁’이란 아예 가당치도 않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에는 이상한 난기류가 흐른다. 나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책임이 미성숙한 우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권력의 독점을 위해 마녀사냥을 기획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건국’과 ‘산업화’를 한 축으로 삼아서, 민주화운동의 지지세력을 몽땅 ‘종북 좌파’로 매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경화다. 권위주의적인 반민주사회로의 퇴행이다. 이미 경제성장의 신화를 잃어버린 기득권층은 시민들의 입과 손발을 꽁꽁 묶은 채 전쟁공포를 확산하며 계급적 이익을 노골적으로 추구할 우려가 있다. 이런 변화는 신자유체제하의 미국과 후쿠시마 사태 이후의 일본에서도 목격한 사실이다. 생태주의의 해법 우파는 교학사의 새 교과서 논쟁을 빌미로 문화계 전반에서 벌이기 시작한 ‘문화전쟁’을 중지해야 한다. 좌우 양측은 건전한 이성의 힘을 재발견해야 마땅하다. 상대방을 ‘종북’ 또는 ‘친일 독재’로 규정하는 구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교 현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기득권층이 함부로 상정하는 ‘종북’ 성향의 위험한 교사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걸핏하면 진보진영이 공격해대는 것과 같은 식의 ‘보수 꼴통’ 교사도 쉬 발견할 수 없다. 대개의 교사들은 다소 진보적이거나 다소 보수적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사회 전반의 참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한 한국사회에는 북한에 대해 무비판적인 시민이 없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시민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에 비해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훨씬 크다. 그렇다 해도,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매국노를 드러내놓고 찬양하는 시민은 아직껏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우리 시민들의 가치관은 서로 총질을 해대야 직성이 풀릴 만큼 심각한 수준이 아니다. 따라서 우파들은 ‘문화전쟁’이란 흉기를 내려놓고 이성이 지배하는 토론의 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아울러 시민사회는 정치세력의 주구로 변질된 무책임한 언론에 대해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특히 고등학교용 한국사 교과서 문제를 한껏 부풀려 마치 한국사회에 ‘문화전쟁’이 필연적인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벌린 언론은 규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바람은 당장에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지배권력이 원하는 것은 결국 권위적인 시절로의 회귀라서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태주의의 입장에서 금번의 교과서 논쟁을 계기로 ‘녹색’ 교과서의 탄생을 더욱 간절히 염원하게 되었다. 이 순간에도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밀양 송전선 문제도 그렇고, 제주 강정 문제도 결국은 잘못된 역사인식의 결과다. 경제개발 또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결코 필요악도 아니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과잉산업화’는 인류의 본질적인 재앙이다. 많은 역사교과서는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가피한 것으로 가르치는 경향이 있지만, 전쟁은 국가권력 또는 거대자본의 이익을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가치는 대다수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는커녕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맷돌’이다. 이처럼 중차대한 사실을 속속들이 깨닫게 하는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나와야 한다. 그것이 하필 국가권력이 편협하게 재단한 한국사 교과서이어야 할 까닭은 전혀 없다.
Yuik Kim, 최종훈 and 17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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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Sep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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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국정교과서 문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 문제에 관하여 나는 그간 몇 차례 입장을 밝혔다. <백승종의 역설>(한겨레신문 연재)에서도 그랬고, 연전에 교학사 역사교과서 문제가 터졌을 때도 <<녹색평론>>에서 그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다음은 <<녹색평론>>에 실었던 글의 일부를 옮겨, 이른바 국정교과서 문제에 관한 반대 입장을 재차 뚜렷이 밝힌다.(전문은 《녹색평론》제133호, 2013년 11-12월호에 <생태주의자가 본 역사교과서 문제>라는 제목 아래서 읽을 수 있습니다.) ------------------------------------------------ ‘역사전쟁’을 넘어 ‘문화전쟁’으로 우파는 지금 역사 논쟁의 폭을 확대하는 데 몰두한다. 무슨 까닭일까? 우파들의 타격 목표가 되다시피 한 주진오(상명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 북’에서 말했다. “역사교과서가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었던 시비 가운데 이번 싸움이 가장 치열한 것 같다. 당연히 그 이유는 단지 교학사 교과서 때문이 아니라 이 정권이 작정하고 역사전쟁을 벌이려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체로 미온적이었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2013. 9. 29.) 주진오는 현재 전개되고 있는 좌우파의 대립을 우파들이 기획한 ‘역사전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민주당의 유기홍 의원 등은 2013년 9월 27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검정의 취소를 외치는 동시에,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 임명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유 위원장은 이미 과거에 일제의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대안 교과서를 감수한 전력이 있고,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현대사학회’의 고문이기도 하다. 그런 인사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기용하였기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결국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들이 모두 폐기되고 국정교과서 체제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의 목소리가 들린다(도면회 및 한철호). 한국사회 전반에 권위주의적 사고가 날로 강화되고 있기 형편이라, 이런 추측까지 나오게 되었다. 김육훈(역사교육연구소장)은 교학사의 새 교과서를 편들고 나선 정치세력이 하나의 ‘역사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학교 현장을 이념투쟁의 장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이번의 교과서 논란은 그 본질이 문제의 교과서에 혜택을 주려는 권력기관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다. 그 말대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문제는 그 핵심이 국가권력에 의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의 훼손에 있는 것도 같다. 권오현(경상대 교수) 역시 한일 양국의 사례를 분석한 논문에서, 두 나라 모두 우파 성향의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적이 많았다며, “정부는 역사교과서 논쟁 문제에 대해 공정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역사서술에 대한 부당한 개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바른 지적이다. 교학사 교과서의 필자 이명희(공주대 교수)는 단순한 ‘역사전쟁’을 넘어 ‘문화전쟁(문화투쟁)’으로 나가자고 외친다. 한국의 문화계에 대한 그의 진단은 이러하다. “좌파 진영이 교육·언론·예술·출판·학계의 60~90%를 장악하고 있다. 현 국면이 유지되면 10년 내 한국사회가 구조적으로 전복될 수도 있다.” 이명희는 한국의 진보진영을 곧 종북 세력으로 취급하고, 그 타도를 부르짖는 것이다. 어불성설이다. 문제는 이명희와 생각을 공유하는 기득권층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들(좌파)은 1990년대 역사해석, 문학·영화·엔터테인먼트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인문학―사회과학―언론노조―방송과 신문―인터넷 포털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문화 진지’를 구축했다. 이들이 만든 ‘문화 진지’는 ‘주류 문화’가 없던 대한민국의 ‘문화권력’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지금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공격하는 ‘어둠의 세력’과 마주하고 있다.”(박성현, 〈뉴데일리〉 주필) 이런 발언의 장본인 박성현은 ‘바른역사국민연합’의 주도적 인물로서 교학사 교과서를 수호키 위해 앞장서고 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우리가 할 일은 ‘공화’로 대변되는 주류 문화를 창조해, ‘어둠의 세력’이 만들어낸 ‘문화권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여기서 확연히 드러난 바처럼, 기득권층은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진보진영의 공세를 빌미로, 전선을 확장하여 그 개념조차 불분명한 공화(共和)의 가치로 무장한 보수 측을 이끌고 진보진영을 상대로 한 ‘역사·사상·문화전쟁’을 벌이겠다는 다짐이다. 2013년 9월 27일 오전 서울특별시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바른역사국민연합’의 창립기념식은 그런 점에서 일종의 출정식이었다. 540개도 넘는 중도·보수 성향의 시민사회단체가 총 연합하고, 그 가운데 원로 역사학자들을 비롯해 학계, 법조계, 언론계 및 종교계 인사들과 원로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섬뜩하다. 그들의 창립대회에는 참석자 수가 300명을 넘었다. 그 자리에서 권희영은 교학사 교과서의 집필자를 대표하여, “우리가 만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매도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그동안 외롭게 싸웠지만 이제 든든하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렇게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된다”고 감사의 뜻을 밝혔다. 기득권층의 결집에 고무된 주류 매체들은 교육 현장을 이념투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수만 명의 교사가 회원으로 가입한 합법조직체 전교조까지도 ‘종북’이라고 매도하며, 교학사의 새 교과서 말고는 모두 종북 좌파의 교과서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진정한 의미로 좌파와 우파를 구별하는 이념상의 편차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생태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좌파와 우파는 일란성 쌍생아로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좌우파는 모두 민족과 국가의 영광과 배타적인 이익을 내세운다. 그들 모두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매달려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잉산업화에서 국가와 사회의 보랏빛 미래를 찾는다. 그들 사이를 가르는 편차가 있다면, 친일과 독재를 바라보는 시각에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정도다. 물론 이것도 차이는 차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차이 때문에 상대를 완전히 백안시하고 발본색원하려 든다면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15년 동안 유럽에서 살았다. 저들 나라에도 좌파와 우파가 엄연히 대립하고 있지만, 그들이 서로의 이념 차이 때문에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역사전쟁’ 또는 ‘문화전쟁’을 벌이는 모양은 듣도 보도 못했다. 좌우가 어차피 한 사회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고, 정치권력은 매번 선거 결과에 따라 그들 사이를 오가기 마련이다. 사정이 이렇듯 빤한데 교과서를 둘러 싼 ‘역사전쟁’은 무엇 때문에 필요할 것인가. 더구나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그들 사이에 ‘문화전쟁’이란 아예 가당치도 않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에는 이상한 난기류가 흐른다. 나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책임이 미성숙한 우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권력의 독점을 위해 마녀사냥을 기획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건국’과 ‘산업화’를 한 축으로 삼아서, 민주화운동의 지지세력을 몽땅 ‘종북 좌파’로 매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경화다. 권위주의적인 반민주사회로의 퇴행이다. 이미 경제성장의 신화를 잃어버린 기득권층은 시민들의 입과 손발을 꽁꽁 묶은 채 전쟁공포를 확산하며 계급적 이익을 노골적으로 추구할 우려가 있다. 이런 변화는 신자유체제하의 미국과 후쿠시마 사태 이후의 일본에서도 목격한 사실이다. 생태주의의 해법 우파는 교학사의 새 교과서 논쟁을 빌미로 문화계 전반에서 벌이기 시작한 ‘문화전쟁’을 중지해야 한다. 좌우 양측은 건전한 이성의 힘을 재발견해야 마땅하다. 상대방을 ‘종북’ 또는 ‘친일 독재’로 규정하는 구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교 현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기득권층이 함부로 상정하는 ‘종북’ 성향의 위험한 교사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걸핏하면 진보진영이 공격해대는 것과 같은 식의 ‘보수 꼴통’ 교사도 쉬 발견할 수 없다. 대개의 교사들은 다소 진보적이거나 다소 보수적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사회 전반의 참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한 한국사회에는 북한에 대해 무비판적인 시민이 없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시민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에 비해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훨씬 크다. 그렇다 해도,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매국노를 드러내놓고 찬양하는 시민은 아직껏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우리 시민들의 가치관은 서로 총질을 해대야 직성이 풀릴 만큼 심각한 수준이 아니다. 따라서 우파들은 ‘문화전쟁’이란 흉기를 내려놓고 이성이 지배하는 토론의 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아울러 시민사회는 정치세력의 주구로 변질된 무책임한 언론에 대해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특히 고등학교용 한국사 교과서 문제를 한껏 부풀려 마치 한국사회에 ‘문화전쟁’이 필연적인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벌린 언론은 규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바람은 당장에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지배권력이 원하는 것은 결국 권위적인 시절로의 회귀라서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태주의의 입장에서 금번의 교과서 논쟁을 계기로 ‘녹색’ 교과서의 탄생을 더욱 간절히 염원하게 되었다. 이 순간에도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밀양 송전선 문제도 그렇고, 제주 강정 문제도 결국은 잘못된 역사인식의 결과다. 경제개발 또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결코 필요악도 아니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과잉산업화’는 인류의 본질적인 재앙이다. 많은 역사교과서는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가피한 것으로 가르치는 경향이 있지만, 전쟁은 국가권력 또는 거대자본의 이익을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가치는 대다수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기는커녕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맷돌’이다. 이처럼 중차대한 사실을 속속들이 깨닫게 하는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나와야 한다. 그것이 하필 국가권력이 편협하게 재단한 한국사 교과서이어야 할 까닭은 전혀 없다.
Yuik Kim, Okjin Park and 13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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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Sep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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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아래 국내에 친일 정객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친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내놓고 그런 목표를 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자신의 정치적 음모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일본 정계의 거물들은 이러한 김계조에게 기밀자금을 지원하였다. 현금 250만원과 물자설비 500만원을 비롯하여, 총 1,000만원이나 되는 막대한 정치자금이 김계조의 수중으로 흘러들어왔다. 김계조는 이 자금으로 국제문화사(國際文化社)를 조직하였다. 표면상으로는, 극장, 댄스홀, 요리집, 여관 등을 경영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실제로는 비밀정치공작을 전개할 요량이었다. (1) 우선, 그는 친일파를 몰래 미군정 당국에 포진시켜, 친일적 정책을 펴도록 할 계획이었다. (2) 국내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배일(排日) 친미파에 대하여는 암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었다. (3) 그는 미군정당국의 대한정책을 염탐하여 비밀을 캐내는 동시에, (4) 한국과 미국 사이를 이간질하고, (5) 치안교란까지 시킬 목적을 가졌다. 그리하여 다량의 무기를 확보하고 악질적 폭력단까지 양성하고 있었다. 김홍섭은 이 사건의 담당 검사로서 김계조의 각종 혐의사실을 빈틈없이 조사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높았다. 수사가 착수될 때부터 공소제기 및 공판과정까지 지속적으로 많은 시민들이 주목하였다. 공판이 열릴 때마다 법정은 일반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허일태, 2007, 69쪽) 김홍섭은 주범 김계조에게 징역 2년을 구형하였다. 선고공판에서는 김계조에게 간첩예비죄까지 적용되어, 징역 5년과 추징금 310만원이 선고되었다.(<서울신문>, 1946년 3월 20일자) 김홍섭의 사건처리는 완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명백한 증거를 입증함으로써, 유죄가 확실시 되는 김계조의 범죄행위에 대해 공소를 제기했다. 김홍섭은 피의자의 행위가 범죄구성의 제반요건을 충족하였다는 확신을 얻은 다음, 신중하게 구형하였다. 허일태는 이러한 사시을 토대로, 검사 김홍섭은 개인의 인격을 중시하는 객관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허일태, 2007, 70쪽) 검사 김홍섭의 활약이 계속되었다. 그는 이른바 ‘학병테러사건’도 취급하였는데, 그 역시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1946년 1월 18일에 발생한 이 사건도 그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배경 아래 발생하였다.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익 간에 상당한 알력이 존재했다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학병동맹 측과 이를 반대하는 이른바 반탁진영 간에 빚어진 충돌이 이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좌익과 우익 간의 유혈충돌이었던 것이다. 정치적 사건인 관계로 수사에 난항이 많았다. 그러나 세평에 따르면, 김홍섭을 비롯한 세 명의 담당 검사는 이 사건의 진상조사에 중립을 유지하였다고 한다.(허일태, 2007, 70쪽) 해방공간에서는 나날이 좌우익 간의 충돌이 빈번해졌고, 정치적 간섭도 도를 더해갔다. 검사 역할을 공정하게 수행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하여 김홍섭은, ‘정판사위폐사건’을 끝으로 검사직을 그만 두었다. 이른바 ‘조선정판사 사건’은 1946년 5월에 기소된 대형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엇갈린 주장이 있지만, 사실 위주로 사건의 전개과정을 정리해 보면 이러하였다. 조선정판사라는 출판사에는 조선공산당의 간부가 존재했다. 그들 2명의 간부 및 일부 공산당원들이 출판사의 시설을 이용하여 위조지폐를 발행하려 하였다. 위조된 지폐는 공산당 측에 제공될 것이었다. 물론 남한의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이었다.(허일태, 2007, 70쪽) 김홍섭은 이 사건의 담당검사였다. 이 사건의 처리에 탁월한 솜씨를 보임으로써, 검사 김홍섭의 명성은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다.(최종고, 1983, 72쪽)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현실정치에 대한 김홍섭의 실망은 더욱 커졌다. 그는 법의 운영에 관해 정치권력이 직접 개입하는 현실을 체험하고 좌절감을 느꼈다. 부인 김자선은 그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저희는 검찰청 옆 관사에 살고 있었는데, 검찰청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집에까지 들릴 정도였어요. [조선]정판사 사건을 맡을 땐 집에 돌멩이도 날아들고 해서, 경찰들이 항상 지켜야했어요. 그분[김홍섭]은 피신까지 한 일도 있어요. 어쨌든 그분으로서는 성격상 검사직이 맞지 않는 것 같이 생각되었고, 그분 스스로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이치백, 1999, 269-270쪽) 이 사건을 끝으로, 1946년 9월 김홍섭은 검사직을 떠났다.(최종고, 1983, 72쪽) 공정한 법 집행이 불가능하다면, 더 이상 검사직을 수행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정판사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모두 두 명이었다. 김홍섭과 그의 변호사시험 동기생인 조재천(1912~1970년)이 그들이었다. 재판이 진행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피고 측 변호인단은 법정에서 김홍섭 검사를 지목해 몇 차례나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답변을 회피하였다. 거의 모든 답변은 그의 동료인 조재천 검사가 혼자서 처리하다시피 했다.(김기협, <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 사건>, [해방일기] 1946년 8월 29일, 프레시안 2011.08.29 (월) 오전 7:40) 김홍섭은 정치적 개입으로 인하여, 자신의 사법 활동에 큰 제한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현실 앞에서 그는 실망과 좌절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에 관한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6년 9월 19일,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김홍섭은 법의 위신을 훼손하는 배후인물을 찾아내어 엄중 처벌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만일 자신의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면 동료 검사들도 사직하고 말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그는 견지하였다. 그는 미군정 당국의 사법부장 커넬 소좌에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통보하였다.(허일태, 2007, 72쪽) 조선정판사 사건에 관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웠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당시 정음사 대표였던 최해철(崔哲海)의 증언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나[최해철]는 그 전부터도 저 분[김홍섭] 같으면 돈 한 푼 없어도, 인품으로 살아갈 분이라고 생각했댔어요. 그런데 ‘재판에까지 간섭하려 하다니! 재판에까지!’하면서 [그분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어요.”(최종고, 1985, 48쪽) 오래 전에 지나간 사건이라, 정치적 간여의 실체를 이제 와서 속속들이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점만은 여실히 확인될 수 있다. 1946년 9월 10일경 김홍섭은, 남한의 유력한 경제단체의 간부 두 사람을 소환하여 심문하였다. 그런 일이 있자, 미국인 장교가 즉각적으로 개입해왔다. 미군 장교는 김홍섭에게 말하기를, 그들 간부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 김홍섭에게 어떤 보복조치라도 강구하고야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허일태, 2007, 71쪽) 좌우익 간의 치열한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군정 당국은 수사와 재판에 노골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삼권분립의 원칙이 지켜질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린 재판이라면, 그 어느 것이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진행되기를 바랄 수 없는 노릇이었다. 1946년 10월 21일, 구형 공판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김홍섭은 이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로서, 그리고 양심적인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고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소감을 간단히 말하면, 유감스럽다고 하겠다. 내가 취조한 [사람들] 중 특히 박낙종은, 50 평생 중 30년의 투쟁사를 가진 혁명 투사였으므로, 만강의 감사를 드리는 한편, 많은 감회를 느꼈[다고 고백하고 싶은 심정이](으)며, 사회 여론은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좌우익이 한층 소원하여지는 [것도 같은] 감상을 주는데, 이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민족 구성의 일인으로 매우 유감히[스럽게] 생각한다. 법률가 입장으로 [보면]는 형사사건이나, 돌이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볼 때에는 조선의 기근(饑饉)이요 민족적 비극으로 본다. 나는 김창선이 공판정에서 ‘죽고 싶다’, 말할 적에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 즉,] 예수를 은 30량에 잡아[로마 병사들에게 넘겨] 준 가롯 유다의 비극을 상기했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23일자) 이런 진술에서 보듯, 김홍섭은 일제시기 박낙종의 독립투쟁 경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건의 경위를 고발한 김창선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김홍섭은 담당검사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들에 대한 처벌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그는 좌우익 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벌어진 조선정판사 사건을 “조선의 기근” 또는 “민족적 비극”이라고 정의하였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구형 논고에서 김홍섭은, “공산당 자체가 이[사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을 잘못 감독한 것이라고 본다.”라고 판단했다. 공산당이 사건을 직접 교사한 것은 아니고, 일부 당원들의 그릇된 행위를 공산당 조직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고 분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부과된 형량은 매우 무거웠다. 사건의 주범인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1899~1950)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김홍섭은 박낙종 등 공산당 지도부가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을 뿐인데, 이러한 중형이 선고되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김홍섭과 같은 일개 검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판단이, 재판 결과를 결정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자신의 양심대로 사건을 온건하게 처리하고 싶었던 김홍섭, 그는 과연 이러한 재판결과를 납득할 수 있었을까. 1950년 여름, 6.25전쟁이 터지자, 박낙종은 총살되고 말았다. 역사가 김기협은, 김홍섭이 조선정판사 사건 직후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마저 포기한 사실로 미루어, 내심 그 재판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해석한다.(김기협, <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 사건>, [해방일기] 1946년 8월 29일, 프레시안 2011.08.29 (월) 오전 7:40) 김기협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지만, 약간의 오류가 있다. 조선정판사 사건 때문에 김홍섭이 검사직을 그만 둔 것은 맞지만, 그 때문에 변호사 자격까지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가 변호사 등록을 포기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런데 김기협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주장도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조선정판사 사건을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김홍섭은 동료 조재천과 더불어 국가공안 일선에서 투쟁하였다고 보았다.(최종고, 1985, 47쪽) 내가 보기에, 공안검사 김홍섭이라는 기왕의 평가는 상당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결국 김홍섭은 검사직에 취임한지 1년여 만에 초야로 물러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김병로는 그를 불러 야단을 쳤다. 이처럼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있을 때, 개인적인 생각에만 집착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다. 김홍섭은 결국 김병로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1946년 12월, 그는 서울지방법원의 소년부 지원장에 임명되었다. 진즉부터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차라리 고아원을 경영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부모 없는 그 애들을 내 무릎 위에 앉혀서 키워보고 싶소.”(최종고, 1985, 52쪽) 그런 김홍섭이 이제 소년부를 맡게 된 것이다. 그 때 서울지방법원에서 1년 동안 수리한 청소년범죄 건수는 약 600건 정도였다.(허일태, 2007, 72쪽) 김홍섭은 그들 사건을 분석한 적이 있었다. “절도범이 단연 많고 다음이 횡령·사기 등이다.” 라고 했던 것인데, 그는 이른바 소년 범죄를 단순히 범죄로만 취급하는데 반대하였다. “불량소년은 역시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인 것이다.” 요컨대 청소년 범죄는 일종의 사회적 질환이란 것이 김홍섭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청소년범죄에 관하여는 엄벌을 택하기보다 정책적 배려가 우선시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그의 글귀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소년을 檢事와 대항하게 하는 것은, 우리 사법의 특히 고려할 문제이며, 소년의 의무교육·징병제 실시와 더불어 소년에 대한 형사정책은 3대 소년정책이라 할 수 있으니, 좀 더 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주기 바란다.”(허일태, 2007, 73쪽에서 재인용???) 청소년 범죄가 사회문제의 일환이라는 김홍섭의 생각은 1946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쓴 그의 글 <검사정 제4호>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자신의 판사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 분명한 이 소설의 얼개는 다음과 같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피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6-7세가량 된 소년과 30세 전후의 청년이 그들이다. 소년은 국유림에서 불법으로 나무 두 그루를 베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그런데 소년의 가정형편은 극히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는 북해도로 징용을 갔다가 해방을 맞아 돌아왔으나, 몸져 누워있는 딱한 형편이었다. 한편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된 청년은, 문제의 소년이 놓인 가엾은 처지를 동정한 나머지 산감독을 만나 사건자체를 무마시키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자, 화가 나서 그를 폭행한 혐의로 붙잡혀 왔다. 사건을 조사한 작중의 H검사는 그들 두 사람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여 경미한 사건으로 취급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동료인 차석 검사만 해도 전혀 다른 입장이었다. 차석 검사는 동정심 많은 H검사를 비판한다. “우리 검사국에서 H검사의 구형이 제일 헐하단 말이오. 글쎄 형을 통일해야하지 않소.” 검찰국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중벌에 처하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차석의 주장은 동료 검사들의 공통된 의견을 대변하는 것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H 검사의 소신에 위배되는 일이다. “같은 정도의 범죄라도 그 동기라든지 정상은 천태만상인데, 그런 것을 참작 않고 일률로 처단하는 것도 법의 위신에 관계되지 않나 해서” 감형을 결정했다. 이것이 H검사의 변명이다. 그의 자기변호는 또 있다. “인간의 조직이 근본[적으로] 완전한 것이 못 되고, 게다가 사회의 제도는 또한 어떠한가.” H 검사는 차석에게 이렇게 항변하고 싶지만, 그는 이미 동료들의 눈 밖에 난 처지라서 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김홍섭은 작중의 H검사와 동일 인물이다. 다만 그 검사의 입을 빌려, 법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한 셈이다. “법률은 소년 때부터 나의 성미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학문으로서의 법률에 여전히 불만을 가진다. 역사와 특히 철학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학과였다. 대학 생활 4년을 나는 이, 내가 사랑하고 내 욕구를 채워주는 학과에 바쳤던 것이다. (중략) ‘6법전서’를 가리켜서 악마의 성전이라고 혹평한 것은, 법학사 변호사 하이네 씨의 술회이었다.” 김홍섭은 자신이 법조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 자신의 판단에 따르면, 그는 인문학도래야 좋았을 사람이다. 그는 법학이라는 것이 도무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러한 생각은 다음의 독백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그[H검사]의 책상 위에는 ‘6법전서’가 놓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동료 중에서도 유난하게 냄새를 피우는 법률가를 H는 습관적으로 경원한다. (중략) 법학에 대해서는 큰 기대는 말아야 하오. (중략) 소위 ‘해석 법학’이란 일종의 처세기술이어서, 이상에 타는 청년학도에게는 건조하고 천박한 감이 없지 않을 거요.” (김홍섭, 1946, ???쪽) 건조하고 천박한 것이, 당시 유행하던 ‘해석 법학’이었다. 그는 아마도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재판정에 설 수밖에 없었으니, 그때마다 김홍섭의 심정은 더욱 무거워졌을 것이다. 망설이던 끝에 그는 드디어 판사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1948년 전반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점은 기왕의 전기 자료와 연보에 명확히 언급된 적이 없었다. 법원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그는, 서울의 뚝섬 부근으로 아예 거처를 옮겼다.(최종고, 1985, 49쪽) 그는 당분간 농사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사법부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계기로 큰 좌절을 맛보았고, 청소년 사건을 전담하면서 범죄의 사회적 원인을 더욱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김홍섭이었다. 그래서 법조계를 떠나 농업으로 전업을 꾀하였건마는, 오래 전부터 그가 품고 있던 법의 기능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어쩔 수 없는 법조인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 김홍섭은 1948년 경 자신의 사정을 담담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재독하면서 몇 차례나 이 문제에 부닥쳐 (중략) 나는 ‘작자’와 더불어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같은 작자의 다른 소설 속의 한 주인공을 모방하여, ‘땅’을 벗 삼아 살 수 있는 지대에로 물러날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말 그대로, “흙으로 된 인간은 흙과 더불어, 흙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생각이 판사 김홍섭을 농부로 만들어 놓았다. 그이 뚝섬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무렵에 쓴 그의 수필 <전원(田園)>에서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간 김홍섭의 삶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는 농사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된 농부가 아니었다. 그가 계획한 농사일은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돼지를 치려고 벼르고 별렀지만, 그는 밭에서 퇴비를 주다가 거름독이 올랐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된 김홍섭. 그런 몸으로는 도저히 약속된 날, 약속된 장소에 가서 돼지를 데려올 수조차 없었다. 농업은 김홍섭의 천직이 아니었다. 그는 밭 천여 평을 빌려 채소를 가꾸고, 닭을 치고 나중에는 돼지도 길러 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감당하지 못했다. “오류의 하나는, 건강에 대한 지나친 불(不) 고려요, 다른 하나는 농자(農資)에 대한 무계획이었다.”(김홍섭, <한 법관의 심정>; 최종고, 1985, 262쪽) 농사에 몰두하기에는 그의 건강도 허락하지 않았다. 농사자금 역시 태부족이었다. 미련은 남았지만 그는, 이태 동안의 농사일을 접었다. 1950년경 김홍섭은 다시 법조계로 되돌아왔다. 김홍섭이 언제 뚝섬으로 들어갔는지를 두고, 연구자들 사이에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다. 혹자는 1946년 가을, 그가 검사직을 포기한 다음 바로 뚝섬에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1946년 12월, 그는 서울지방법원 소년지원장에 임명되었고, 한 동안 그 일에 전념하였다. 그가 뚝섬으로 옮긴 것은, 아무래도 그 지원장 직책을 버린 다음의 일로 봐야 사리에 맞다. 그럼 지원장을 그만 둔 것은 언제였을까? 그것은 1948년 2월 이전이었다. 그때부터 김홍섭은 변호사로서, 중앙대학교에 출강하여 법철학을 가르쳤다. 연구자들은 뚝섬 시절의 김홍섭이 농업에만 진력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지 않았을까. 그 당시 김홍섭은 변호사 등록을 마친 상태였다. 비록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개업을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농업만으로는 호구지책이 어려웠기 때문에, 생계유지에 다소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대학에도 출강하였던 것이다. 중앙대학에서 그가 담당했던 과목은 ‘법리학’이었다. 평소 그는 법 이론에 대해서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장영수, 2007, 181쪽) 법리학이란 과목은 그 본질에 있어 법철학(Rechtsphilosophie)과 동일하였다. 법의 존재근거, 법의 효력원인, 법의 이념구조 등을 다루는 학문이란 말이다.(허일태, 2007, 73쪽) 요컨대, 법에 관한 김홍섭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철학적인 것이었다. 그로부터 십년 쯤 지난 뒤, 그는 <형(刑)의 양정(量定)에 관한 소고(小考)>란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법사회학적 관심 역시 상당히 컸다는 증거일 것이다.(최종고, 1985, 53쪽) 이밖에 그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법률>이란 논문 하나를 더 남겼다. 이러한 글들을 종합해 보면, 김홍섭의 법철학적 사고의 윤곽을 대강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김홍섭이었다. 아직은 그가 법에 관하여 하나의 체계적인 이해에 도달하기는 어려운 시점이었다. 일제 식민지시기와 해방공간의 분열과 혼란을 거치면서, 그의 내면에는 지적 좌절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강한 의지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김홍섭이 체험한 인지적 확산과 숙성은 해방 뒤에 쓴 그의 수필과 시, 소설 등에서 단편적으로나마 확인된다. 그 당시 그는 극도의 자괴감과 당혹이 점철되는 가운데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김홍섭은 검사직도 사직하였고, 소년지원장이라는 직책도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따라, 톨스토이마냥 전원으로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번 맺어진 법과의 깊은 인연은 쉽사리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혼란 끝에 그는, 해방된 조국의 재판정에 한 사람의 법관으로 다시 출정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법관 임용 시기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뚝섬 생활이 이태 동안 이어졌다는 그 자신의 진술로 보아, 그의 복직은 대략 1949년경에 이뤄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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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Sep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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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하듯,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친일 정권의 방해책동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우현서루를 중심으로 전개된 애국계몽운동은, 1910년 8월에 저들이 강행한 대한제국의 병탄과 더불어 역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지고 말 운명이었다. 우현서루가 건립된 것은 1905년 초였다. 춘추시대의 지사 현고를 벗 삼아 나라를 구하자던 굳센 각오는 5년 만에 전명적인 활동중지로 마감되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무단통치가 이어진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무력으로도 저들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근대적인 문물의 수준에 있어서도 저들과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하였다. 이일우를 비롯한 과거의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일제의 지배에 맞서 어떠한 노력을 하였을까? 제2장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그들의 상당수는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거나 어느 정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일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는 가운데도 그들은 한국사회의 개량을 위해 여러 모로 노력하였다. 후세인 우리는 그들의 고뇌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 저항과 협력이라는 일종의 흑백논리로 과거를 심판하기 일쑤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그처럼 단순한 기준으로 쉽게 재단할 수 있는 것일까.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인식수준이 지나치게 안이한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을 쉽게 지울 수 없다. 일제 때 이일우와 우현서루 출신 인사들이 헤쳐나간 역사의 격랑에 관하여는 또 다른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Sung Deuk Oak and 9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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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Feb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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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의 고뇌... 그 가운데서 얻은 내면의 결실. 그것을 네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렵니다. 죄송하게도... 지금까지도 그랬고요. 아래의 글에는 제가 붙여둔 각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각주를 원하시는 분들은 나중에 출간될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백승종 드림. -------------------------------------------------------- 4. 반(反) 제국주의, 반(反) 식민주의자의 고뇌 20세기의 세계 각국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있었다. 강대국들은 이미 오랫동안 군사, 외교, 경제 및 문화적 우위를 바탕으로, 자국의 지배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혈투를 벌여왔다. 식민지쟁탈전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 등이었고, 그들은 이제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민족자결주의의 물결이 고조되어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 나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식민주의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흥 강국인 일본과 독일은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팽창정책을 폈다.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및 히틀러 치하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년) 등은, 그 시대를 지배한 공기가 총칼의 제국주의였음을 입증한다. 침략의 제물로 전락한 약소민족의 지식계층은 충격과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1930년대 후반, 식민지 한국의 사회지도층이 ‘친일’ 또는 ‘협일’의 대열에 휩쓸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일제가 침략전쟁에서 승승장구하자, 식민지 한국의 지도층은 독립의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고 침략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였다. 기독교를 통해 구미세력과 연대하기를 바랐던 교회지도자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는 1936년부터 신사참배를 이유로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선교사들을 하나 둘씩 쫓아내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 문제로 70여 명의 목회자와 2천 명 가량의 신자들이 투옥되었다. 한국의 기독교회는 위축되었고, 교회지도자들 가운데는 일제에 협력하는 경우도 많았다. 1930년대 말부터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친일파’의 등장, 이것은 한국현대사의 고뇌이자 미해결의 역사적 과제이다. 때는 위기의 시대였다. 시대의 격랑은 김교신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교단생활이 좌절되더니, 이윽고 성서조선 사건(1942년)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일본에서 돌아온 1927년 봄부터 그는 교사로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제말기의 고난은 그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사실상 붕괴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김교신은 자신이 지향한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의 노선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 역시 완강히 거부하였다. 아래에서는 자신의 반제, 반식민주의 노선은 김교신에게 많은 고뇌를 안겨주었다. <<성서조선>>에는 내적 고통의 혈흔이 곳곳에 낭자하다. 기왕의 연구를 토대로, 필자는 고뇌 속에서 김교신이 얻은 내면의 결실을 다음의 네 가지로 집약해 본다. 유교문화전통의 중시, 한국적 기독교신앙의 추구, 비폭력 평화사상의 전개 및 식민주의 사관 특히 지리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아래에서는 그 점을 차례로 약술할 것이다. 첫째, 기독교신자 김교신은 전통사상과의 조화를 꾀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태도는 20세기 초한국사회의 일반적인 풍토와는 확실히 달랐다. 당시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전통사상을 대표하는 유교를 망국의 종교로 간주했다. 그들 가운데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근대’의 종교라는 소신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교신은 재래의 유교적 전통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유교적 바탕 위에서 기독교 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평소 그와 친밀했던 유영모(柳永模, 1890∼1981)와 함석헌의 태도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약간의 차이점도 존재하였다. 김교신은 유교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함석헌은 유교 및 도교의 정신적 유산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유영모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의 전통에 충실하였다. 김교신이 유교적 가치관에서 긍정적 요소를 재발견하였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의 눈에 비친 공자(孔子)는 여전히 인류의 큰 스승이었다. 그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도 유교의 가치를 구현한 선비들이 적지 않다고 인식했다. 정몽주와 사육신의 충절, <<춘향전>>과 <<심청전>>에 나타난 도덕심을 그는 기독교 신앙과 접목시키고자 하였다. 그와 달리 함석헌은 한국민족의 역사적 고난에 주목하고 장차 세계사상의 창조적 수고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함석헌이 설파한 한국인의 문명사적 사명을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김교신의 기독교신앙은 깊이를 더하였다. 둘째, 김교신 한국적 기독교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정열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를 비롯한 <<성서조선>> 그룹은 서구적 교단으로부터 한국의 기독교가 분리 독립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졌다. 이것은 스승 우치무라 간조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19세기말부터 서구 열강은 한반도에서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선교정책을 폈다. 한국을 포함한 ‘동양’세계에 대한 서구열강의 인식은 부당하였다. 동양은 이질적이고 낙후된, 미개한 세계를 뜻했다. 제 역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는 나약함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은둔의 나라 조선>>을 저술한 미국인 선교사 그리피스(W. E. Griffis)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피스는 조선의 역사를 평가하기를, “그 역사라는 것은 단지 민담에 불과하며,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와 같이 민족적인 허영심과 동물 신화에 근거하여 전통적이고 지역적인 가치의 차원에서만 어림잡은 연대기”일 뿐, 근대적 의미의 역사라는 범주에 속하지도 못한다고 못 박았다. 그리피스는 20세기 초의 한국사회는 서구의 기독교 근대문명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고대’에 정체되어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과도한 서구 중심주의는 한국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송두리 채 부정하는 것이었다. 김교신은 미국식 기독교회를 모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확신했다. 서구우월주의에 빠진 서양선교사들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판단이었다. 김교신이 중시하는 기독교의 진리는 형식적인 교리, 교회조직 또는 예배의 절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리는 인간의 주체를 확립하는 동시에 상대화하는 하나님을 믿고, 그에 대한 신앙을 ‘하향적 아가페’의 행위로 표현하는 데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신앙의 진리는 시공간에 따라 각기 다른 형식을 택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인의 감성과 기호와 역사의식을 반영하여 한국적 형식을 구축해야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한국기독교인의 사명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천박한 상업주의’에 오염된 미국인의 신앙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은밀히 덕을 쌓고 은밀히 보는 하나님에게 보답 받기를 기다리”는 한국의 전통적인 ‘은덕(隱德)’을 중시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정복지향적인 서구적 인간상을 부러워하지 말고, “선을 행하지는 못해도 선을 행할 것이라는 도(道)는 알았고, 이를 두려워 할 줄은 알았”던 조선선비들의 ‘위선’을 차라리 그리워하자는 것이었다.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김교신의 기독교신앙을 다년간 연구해온 양현혜는 이렇게 주장했다. 김교신의 신앙은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란 하나의 축과 “역사 현실 안에서 고난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불의를 정화해 나가는 '창조적 자기수고(自己受苦)'라는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며 창조”하는 길이었다. 셋째, 그는 제국주의가 자행하는 폭력과 불의를 거세게 비판하였다. 노골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은유와 풍자의 힘에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38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때의 일이다. 김교신은 <일기>에, “돼지 물먹는 것을 관찰하니 그들 세계에는 강대자(强大者)가 정의자인 듯하다”라는 말로서 침략을 일삼는 제국주의 국가들을 ‘돼지’라고 은유하였다. 이러한 비판의 이면에는 하루빨리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침략이 사라지고, 비폭력평화의 새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엿보인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이른바 ‘삼국동맹조약’(1940.9.27)을 체결하기 직전에는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1940년 6월 6일자 <일기>에서 김교신은 불안한 세계정세를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근래 셰퍼드 광견 하나가 북쪽 아이도 물고 서쪽 어른도 찢어서 야단인데, 또 불독 하나가 거의 미치기 시작한다고 해서 이웃들이 매우 불안 중에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을 거론하는 것처럼 꾸미면서 제국주의의 연대를 비판한 것이다. <일기>에서는 ‘셰퍼드’로 나치 독일을 빗대었다. ‘북쪽 아이’는 독일의 침략으로 고초를 겪는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를 상징하였고, ‘서쪽 어른’은 프랑스를 뜻했다. ‘거의 미치기 시작’하는 ‘불독’이란 두말 할 나위 없이 1940년 6월 10일 참전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가리키는 것이다. 더욱 까다로워진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며 제국주의자들의 비행을 꾸짖으려니, 은유와 상징에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박상익의 견해처럼, “김교신의 글은 이런 의미에서 ‘행간’을 읽어야 흥미가 배가(倍加)된다.” 끝으로, 김교신은 일제 식민주의 역사가들이 강변한 ‘지리적 결정론’을 반박하였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반도라고 하는 지리적 한계 때문에 한국은 대륙(중국)과 섬(일본)의 지배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영구히 한반도를 떠나지 않는 한 피지배민족의 운명을 청산할 수 없다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운명론이었다. 이에 김교신은 지리학자로서 냉철하게 한국의 지리적 특성을 검토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결정론’을 철저히 부정하였다. 다만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의식하여, 일제 식민주의 역사가들의 실명과 그들의 거짓된 주장을 명시하지는 못하였다. 우선 국토의 면적이나 인구는 국세의 강약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밝혔다. “덴마크,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나라는 대략 조선반도의 5분의 1, 또는 6분의 1에 불과하면서도 남에게 신세지지 않는 살림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 열강의 선망을 받고 있다.” 동시에 “2000만 명이라는 조선 인구가 적지 않은 식구인 것을 다시 인식하고자 한다.”라고 하여 한국은 결코 약소국가가 아님을 천명하였다. 김교신은 한반도의 자연환경에 대해 강한 자긍심을 표현하였다. “우리는 온화한 기후와 안정된 자연환경의 반도에서 나고 자람을 못내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자랑거리가 있으니 반도 강산의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다. 이에 대하여는 거의 세계 유일의 아름답고 균형 잡힌 산천이라 하여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하물며 산세와 평야의 배열과 균형의 아름다움을 논하자면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화에다 비할까? 뉴욕 부두에 높이 솟은 자유의 여신상에다 비할까?” 한반도는 자연조건이 다소 불리한 점도 있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과학기술이 발전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놓치지 않았다. “강수량이 다소간 모자란 경향이 있었던 까닭에 서구 제국보다도 200년이나 앞서서 조선시대 초기에 벌써 측우기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세계 최초로 과학적으로 강우량을 계산했다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은 우리 조상들이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는 일에도 비상하였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하늘에 구름이 적은 것이 일찍이 천문학이 발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으니, 경주와 개성에 첨성대 옛 터가 남아있어서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맑은 하늘은 그 하늘 아래 백성의 마음을 맑게 하였으며, 맑은 마음이 어찌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 이 강산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에 감사할 것은 있어도 불만할 것은 없다.” 식민주의자들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치명적 약점인양 매도하였다. 그러나 김교신의 견해는 정반대였다. “조선은 극동의 중심이다. 심장이다.”라고 주장하고,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반도의 국가로써 한 세계 한 시대의 심장 역할을 담당한 여러 나라를 예시하였다. 그리스 반도, 이태리 반도, 덴마크 반도가 차례로 소개되었다. 결론적으로, 김교신은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지리적 단원으로 보나 그 면적과 인구로 보나 산악과 해안선의 지세로 보나 기후로 보나 극동의 중심적인 위치로 보나 조선의 지리적 요소에 관한 한 우리가 불평을 하기보다 만족과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넉넉히 한 살림살이를 꾸려갈 만한 강산이며 넉넉히 인류 사상에 큰 공헌을 제공할 만한 살아있는 무대이다.” 이상에서는 반제, 반식민주의로 압축되는 김교신의 내면적 지향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인은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이 강요하는 민족적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민족의 활로를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전통의 미덕을 되살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정서와 풍토에 적합한 산업과 신앙을 자율적으로 가꿔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폭력을 배제하고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구현하는 일대사업이 될 것이다. 김교신은 이처럼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는 한국이 또 하나의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 곧 군사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국가의 독립을 위해 일정한 물질적/경제적 성장이 필수적이었을 테지만, 김교신이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도리어 정신/종교적 성장이었다. 일찍이 그는 한국의 장래 소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극히 높은 사상, 즉 신의 경륜에 관한 사상”인 종교는,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 당하고, 유린당하여, 타고난 교만의 뿌리가 뽑힌 자에게만 특별히 계시되는 듯하다.” 역사의 이치가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위탁하”려고, “저들에게서 온갖 것을 빼앗고 갖은 부끄러움과 모욕을 지워 주었다.” 김교신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급하는 가운에 한국의 역사와의 중첩을 꾀하였다. 그의 결론은 자명하였다. 한반도의 사정을 살펴볼 때, “맑은 마음을 이 백성에게 두신 이” 곧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 지를 우리는 그윽이 기다리고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아마도 <<성서조선>> 그룹 일반의 공통된 소망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대다수 구성원들도 기꺼이 동의할만한 견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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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Dec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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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흔들리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죠. 최대교 검사. 그런 점에서 참 중요한 인물입니다. 오늘부터 그분의 일대기를 써서 올립니다. 백승종 드림. 최대교를 아시나요? “청렴하기 때문에 강직할 수 있다.” 최대교(崔大敎)는 이 말을 남겼다. 현직에 머문 오랜 기간 에 그는 항상 검사의 직책을 수행했으나, 늘 가난했다. ‘냉수도 헹구어 마시는 사람’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평판은, 그가 한국 검찰의 양심을 지킨 진정한 법조인이었음을 상징한다. 최대교는 국운이 위태롭던 1901년에 태어나서 1992년, 92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중년이후 화강(華岡)이란 아호를 사용하였다. ‘강화(江華)가 본관인 강직한 선비’라는 뜻이었다. 1932년 그는 일본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사법관시보를 거쳐 ‘식민지 조선’의 검사로 활동하였다. 그런 까닭에 2005년에 발표된 ‘친일 인사 명단’(3,095명)에 자동적으로 포함되는 결과를 낳았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그는 전주지검 검사장을 거쳐 서울지검 검사장에 임명되었다(1948년). 건국초기 최대교 검사는 외압에 굴하지 않고, 검찰의 독립을 지키려고 소신을 다하였다. 검찰의 정치중립은 그에게 지상의 가치였다. 이를 위해 분투한 나머지, 1949년 그는 제1공화국 초기 권력의 실세였던 임영신(任永信) 장관의 독직사건을 기소 처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법무장관을 통해 기소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서울지검장인 그는 굴하지 않고 임 장관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함을 입증하고 최대교는 면직되었다. 정권의 수족이라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오늘날의 검찰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의연한 검찰상을 그에게서 발견한다. 이후 감찰위원에 잠시 임명되기도 했지만, 1955년부터는 현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었다. 4.19 학생혁명이 성공하자, 여론의 중망에 힘입어 서울고검 검사장에 다시 등용되었다. 최대교는 3·15부정선거사범과 4 ·19혁명 당시의 발포책임자를 기소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 바뀌자 1964년 다시 재야로 돌아가 변호사로서 여생을 보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무렵, 검사장의 월급은 1만7천환에 불과하였다. 쌀 한가마니도 사기 어려운 소액이었다. 청렴한 최대교 검사장의 부인 최기효 여사는 가족과 함께 편지봉투를 만드는 부업에 종사했다. 자녀들의 수업료조차 납부하지 못할 만큼 가난이 극심하였다. 서울지검장이란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최대교는 도시락도 가져가지 못할 때가 있었다. 점심시간에 그는 문을 걸어 잠그고 남몰래 누룽지로 허기를 때웠다. 어느 날 직원과 법조 출입기자들에게 그 장면을 들켜, ‘누룽지 검사장’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그는 신발조차 변변치 못해, 고무신 차림일때가 있었다. ‘고무신검사장’이라는 별명이 또 붙었다. 그에게는 남다른 별명이 많았다. ‘용기의 법조인’, ‘칼날의 명 검사’, ‘원칙만 지키는 검사장’ 등이었다. 그는 권력남용을 극도로 자제하였다. 한번은 친구와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다 통행금지에 걸렸다.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었는데, 다소곳이 경찰관의 지시를 따랐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서울지검의 검사장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평소의 생활신조를 따라 분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모든 사람이 제자리를 잘 지키고 제 분수를 지키면 나라 일은 잘 될 것이다.” 작은 권세를 믿고 함부로 날뛰는 것이 그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범죄였다. 평생 청탁과 아부를 모르고 살았던 그라서 전근도 잦았다. 6남매(2남4녀)를 헤아리는 그의 자녀들은 출생지가 모두 달랐다. 중년이후 서울에 정착했으나 40년 넘게 28평짜리 낡고 비좁은 한옥에서 살았다.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던 학자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가을강(秋水)에 비유하며 최대교의 고고한 인품을 기렸다. “가을 강은 맑지만 부드러워, 배를 띄우지 못하는 얼음강과 다르다오.”(秋水之淸淸而柔 不如氷江不可舟)란 한시 일절이 전한다. 최대교에 대한 법조계의 평가는 순일하다. “대쪽처럼 곧고 깐깐한 검사,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다 사표를 던져 버린 검사장,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염결한 성품의 소유자”란 것이다. 그의 삶은 엄정한 검사상의 표본인 것이다.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년의 검사답게 형사소송법을 깊이 천착했다. 그의 《형사소송법 강의》는 개정판까지 나왔다. 대한민국은 ‘대쪽 검사’에게 청조근정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1991)으로 보답했다. “법을 지키는 것이 인권옹호입니다. 사리사욕을 앞세워 법을 무시하면, 그것이 인권유린인 동시에 국가발전을 가로 막는 저해입니다.”(1991. 12. 10) 그의 국민훈장 수상소감은 그러하였다. 최고의 권력자라도 성력은 없다. 누구라도 당연히 법질서를 지켜야한다는 확신이 대쪽 검사 최대교를 만들었다.
Paik Yonjae and 10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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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Dec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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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였다. 자연히 최운하는 친일 경력의 헌병대와 합세하여 ‘국회프락치사건’의 장본인으로 활약하였다. 특위가 문제의 인물 최운하를 체포하자, 그 해 6월 6일 친일경력의 중부경찰서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경대를 무장해제하였다. 아울러 특경대가 소지한 무기와 조사 서류를 압수하고 반민특위직원을 연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반민특위습격사건’이었다. 명백한 불법사태였다. 그러나 최대교의 서울지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태를 좌익에 대한 경찰의 반격으로 간주한 것이다. 최대교 검사장은 냉전시기 ‘반공’이란 국시(國是)에 충실한 대한민국의 검사였다. ‘국회프락치사건’을 계기로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갔다. 친일세력과 공존을 추구하는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반민법 해당자들의 공소시효는 본래의 2년에서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되었다. 반민법이 사실상 무력화된 것이다. 이에 반민특위의 간부와 특조위원들이 연달아 사퇴하였다. 이어서 평소 반민법을 반대하던 이인 법무부장관이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이제 반민법은 폐기된 것과 다름없었다. 1949년 6월 6일부터 최대교의 서울지검이 ‘국회프락치사건’에 직접 관여하였다. 이미 경찰에 체포된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의원 등 도합 5명의 피의자가 서울시 경찰국에 서울지검으로 송치되었다. 서울지검은 그해 6월 25일, 그들 가운데 4명을 국가보안법 및 법령 제19호 4조 ‘나’항 위반죄로 서울지법에 기소하였다. 그로부터 보름 쯤 지난 7월 11일에는 김약수, 노일환, 김옥주, 김병회, 박윤원, 강욱중, 황윤호 등 7명의 국회의원도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그 해 7월 30일 그들 역시 같은 죄명으로 기소되었다. 다시 두 달쯤 지난 9월 15일, 서용길, 배중혁, 신성균 의원도 같은 절차를 거쳐 전원 기소되었다. 사건을 직접 담당한 검사는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吳制道)와 장재갑(張載甲)이었다. 그 무렵 최대교는 임영신 장관 사건의 여파로 서울지검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국회프락치사건’은 최대교가 퇴임한지 두 달 가량 지나서 공판을 시작하였다. 이 사건은 해를 넘겨 1950년 3월 14일, 피고인 전원에 대한 유죄선고로 결론이 났다. 입회검사는 오제도였다. 피고인들은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6.25전쟁이 일어났고, 항소심은 1951년 12월 31일 피난지 부산에서 공소기각으로 결정이 났다. 전쟁으로 인하여 사건 관련기록이 모두 멸실되어, 검사가 법정기간 내에 본건의 공소를 유지할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본 사건에 관하여는 비판적인 의견이 많다. 혐의사실을 입증하는 물적 증거가 거의 없는데다가, 혐의자들을 고문하여 자백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이승만 정권이 반대파를 탄압하기 위해 무리하게 일으킨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있다. 실제로 남로당이 지령을 내려 국회 안에서 합법투쟁을 벌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 당시 미국 측 군사정보당국은 피의자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불충분하지만 실제로 프락치가 존재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도진순 1997, 340.) 한 마디로, 반공이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깊이 개입된 사건이었다. 반공주의자 최대교 지검장에게 엄정하고 중립적인 수사를 요구하기란 아마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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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an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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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친일 문제는 어찌 되었든 간에 임영신은 이승만과 미국 체류 당시부터 관계가 돈독하였다. 임영신은 이승만에게 국내 독립단체에서 보내는 서한을 전달했다. 관동대지진(1923년) 당시 조선인의 학살 자료도 전달하였다. 석사학위를 취득 뒤에는 이승만으로부터 청혼을 받을 정도로 가까웠다. 임영신은 그의 청혼은 거절하였으나, 그의 인격에 대한 존경심에서 이승만의 이름에서 ‘승(承)’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승당’(承堂)이라 하였다. 그 뒤로도 임영신은 이승만의 미국 내 활동을 돕기 위해 많은 물적 지원을 하였다.(이현희 1994.) 해방과 더불어 이승만이 귀국하자, 임영신은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로 자처하며 그의 집권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승만은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임영신을 초대 내각의 장관으로 임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그를 적극 지지해온 추종자들의 다수를 장관에 임명하였다.(김수자 2005, 195-196.) 그런데 임영신은 장관직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949년 1월 13일, 경상북도 안동 을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전 외무장관 장택상과 안동지역 인사인 권중순을 누르고 그는 국회에 입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독직사건이 불거졌다. 장관을 그만 둔 뒤에도 그는 국회에서 야당인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의 전신)과 대립하여, ‘일민구락부’(一民俱樂部) 또는 ‘국민당’ 소속의원으로서 내각제개헌안을 저지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늘 이승만대통령을 지지하는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한 마디로, 임영신은 이승만과 오랜 개인적 친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과 정치적 동지로 불릴만한 거물급 여류인사였다. 이승만과 임영신은 내연관계라는 소문도 있었다.(<<주부생활>>(1983년 12월호)에 실린 <이승만의 삼각관계>)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중에 프란체스카여사와 임영신 여사와의 삼각관계였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인될 수 없으나, 임영신 장관이 이 대통령으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각료였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최대교는 그러한 정치적 역학관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1949년 4월 4일, 임영신 장관의 여동생이자 선거사무장이었던 임영선(任永善)을 구속하였다. 이후 4월 25일부터 관련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임 장관에게 뇌물을 제공하였거나 업무상 횡령. 배임죄를 범하였다는 혐의로 상공부장관의 비서실장도 구속되고, 상공부를 비롯해, 경상북도청과 관련사업체의 임직원이 모두 체포되었다. 최대교의 회고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상공부장관은 임영선씨의 3세 된 어린애를 안고 경무대(대통령 관저)로 찾아갔다. 그는 우는 어린애를 달래며 “어린애가 다 죽게 됐습니다. 아이 엄마를 구속하는 것은 인도에 벗어난 일입니다.”라면서 동생의 석방을 하소연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법무부장관 이인씨를 불러 석방하도록 지시했고, 이인씨는 검찰총장 권승렬씨(동년 6월에 법무부장관이 됨)에게 석방을 명령했다. 권 총장은 난처한 표정이 되어 나를 불렀다. 그러나 석방하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명령이나 지시라기보다는 석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일종의 ‘의사타진’을 해왔던 것이다.(최대교 1984.) 자신의 동생인 임영선이 구속되자 임 장관은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서 수사중단을 요구할 정도였다. 그러나 최대교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어 임영선을 불러 다음과 같이 구속의 정당성을 재차 확인했다. 나는 임영선씨를 불러 물어보았다. “선거 때 안동에 얼마동안 가 있었소?” “20일 동안 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집에는 몇 번 다녀갔습니까?” “한 번 정도입니다.” “애를 안동에서 데리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집에 두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감옥살이 하는데도 별 지장이 없겠군요.”(최대교 1984.) 최대교는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의 구속조치를 이렇게 합리화하였다. 그리고는 검찰총장의 석방압력에 항거했다. 그는 검찰총장 권승렬의 검사로서의 자질을 신뢰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나는 권 총장에게 갔다. 선거사무로 20일간 안동에 가 있을 때에도 애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는 점과 사건의 중요성으로 보아 증거 수집을 위해 구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어제 구속해 놓고 오늘 석방한다면 검찰이 자신의 불법을 자인하는 것이 되니 석방명령을 재고하도록 경무대에 건의해 달라고 말했다.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해진 권 총장은 그 다음 날부터 아프다는 핑계로 출근을 안했다. 그때는 아무리 총장이라 해도 사건수사에 관해서 검사장에게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 지시하지 못했다.(최대교 1984.) 그러나 상관인 권승렬 총장의 난처한 입장을 그 역시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최대교는 당당검사 강석복과 그 일을 상의하였다. 그들은 임영선의 구속기간을 최대한 줄이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나로서도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총장이 저렇게 누워 계시니 ...” 나는 강 검사와 의논했다. “이것은 위에서 압력을 받아서 그렇다기보다도 총장의 입장을 생각해서요. 석방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러니 증거 수집을 부지런히 해서 풀어줍시다.” 강 검사도 찬동했다. 구속한지 9일째가 되던 1949년 4월 12일 증거수집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대통령까지 문제 삼은 임영선의 구속 건은 9일 만에 끝났다. 상공부장관 임영신 측에서는 이것으로 사태가 진정되는 것이 아닐까, 전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임영선의 석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권 총장 집에 갔다. “석방하겠습니다.” 누워 있던 총장은 벌떡 일어나며, “고맙소. 장관에게 말씀드려야겠소.”라 하고, 기뻐하며 옷을 갈아입고 이인 법무부장관에게 달려갔다. 총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 장관은 백한성 차관을 서울교도소로 보냈다.(최대교 1984.) 그래도 좀 너무했다. 아무리 임영신 상공부장관이 실세였다고 할지라도, 법무부차관을 교도소까지 보내다니 지나쳤다. 석방소식을 차관이 당사자에게 알리는 것은 아부로 여겨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백 차관은 교도소장실로 임영선씨를 모셔오도록 했다. 백 차관은 “나가시게 됐습니다.”며 출소축하의 인사를 임씨에게 전했다. 그러나 임씨는 “그래. 잘됐군...”이라며 반말로 가볍게 받아넘겼다고 한다. 아마 백씨가 법무차관인줄 모르고 함부로 한 대꾸였으리라. 그런데도 백씨는 한 마디도 못했다는 후문이다.(최대교 1984.) 실세장관의 동생의 태도가 여간 오만불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분고분한 차관은 어떤 사람인가. 요즘도 이런 사람들이 아마 없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관료사회의 분위기가 그래서였을까. 당사자인 상공부장관은 근신하기는커녕 도리어 당당하게 큰소릴 쳤다. 노련한 정치가답게 그는 입체적인 구명전술을 구사하였다. 그 점을 최대교는 다음과 같이 요령 있게 기술하였다. 감찰위원회에서 상공장관에 대한 파면을 결의하자, 상공부장관은 1949년 4월 8일 그에 불복하여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같은 날짜로 대통령은 “판결 전에는 파면을 보류하겠다.”는 내용의 담화문까지 발표했다. 또 같은 해 4월 10일에는 상공부장관이 중앙방송국에 출연해, 자신의 독직사건이 부당하다며 입장을 해명하는 방송까지 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 2면 광고란에는 ‘여성단체총연맹’의 이름으로 이 사건에 관한 성명서까지 발표되었다. “우리나라 여성계를 살펴볼 때 인물이 귀한 정도가 아니라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여도 가할 것이다. 정부의 중요인물이요, 여성의 대표적 존재의 희생은 국내적으로 또는 국제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니 법을 세우기 위하여 보다 더 큰 희생을 내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을 재삼 말해두는 바이요.”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이 상공부장관을 엄호하기 위해 <동아일보>에 낸 광고성명의 내용이 그러하였다.(최대교 1984.) 당사자인 상공부장관이 스스로 나서 북을 치자, 대통령이 나팔을 분 격이었다. 정체도 불분명한 ‘연성단체총연맹’까지 나서서 상당한 광고자금을 부담해 가며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정권 차원에서 상공부장관을 비호하겠다는 의지가 한국사회에 명확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1949년 4월 18일 오전에는 법무부장관 이인씨가 권승렬 검찰총장을 대동하여 김병로 대법원장을 방문하고 독직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동시에 차후 대책을 논의하였다.(최대교 1984.) 이인 법무부장관은 행정부를 대표하여 대법원장에게 만일의 경우를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장관은 일개 최대교 검사장을 상대로 기소중지를 강요하기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법부의 수장인 김병로의 도움을 요청한 것 같은데, 그 결과는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김병로는 누구보다도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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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Sep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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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속에 밝은 저들 과거의 친일 모리배들은 그 물건들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점은 누구라도 추측하기 어렵지 않은 문제였을 것이다. 그들 친일파가 호언장담하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역대 총독치고 나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소이다. 나와 친하지 않은 군사령관도 없었소이다. 앞으로 미군치하가 되면 미국의 장군과 영관급 장교들에게 나는 얼마든지 접근할 자신이 있고, 만약 소련군 천하가 되면 또 그 두목들과도 친근하게 지낼 자신이 있소이다.” 이런 파렴치한 말을 태연하게 동포들 앞에서 공언하는 놈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놈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런 자들에게 일정한 정견이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도 조국이 있다고 볼 수가 있는가? 이런 악질 모리배들의 눈에는 국가라는 것이 마치 초대형 회사 같이 보일 것이다. 그들은 사업하는 재미로 국가를 동반자처럼 상대한다. 과연 국가란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이런 몰상식한 소견을 가진 인간들이, 만일 한 나라의 상업계와 실업계 또는 관계를 지배하게 된다면, 장차 얼마나 큰 재앙이 초래될 것인가? 그들은 이른바 악질의 모리배가 되거나 그들의 방조자가 되고 말 것이다. 한국사회를 어지럽히는 모리배 또는 그 협조자들은 대개가 이처럼 썩어빠진 놈들뿐이었다. 나는 이런 현실이 너무도 싫었다. 그리하여 나는 우주보편의 질서를, 항구적인 윤리의 세계를 갈망하였다. 일찍이 나는 이런 내 심정을 <향수>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우직한 윤리의 산정이 멀리 흰 눈을 / 이고 있는 하늘가엔 / 또 하나 다른 내 그리움이 자꾸만 꿀벌처럼 날라 넘는다. // 왜 이렇게 외로운 걸가 (중략) 고향이란 본래 그리움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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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Dec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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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식민지 시절의 악질 친일 경관이었다. 그들은 당시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약칭 ‘반민법’)의 제정이 활발하게 논의되자 긴장하였다. 그리하여 법 제정에 앞장선 김웅진, 김장렬, 노일환 등의 국회의원을 납치 감금할 예정이었다. 강제로 납치한 뒤에는, “나는 이남에서 생활할 생각이 없어 이북으로 간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자필로 작성하도록 강요하여, 대통령. 국회 및 언론사에 전달한 다음, ‘38선’ 부근까지 끌고 가서 이들 국회의원을 살해할 작정이었다. 그리고는 마치 우익청년들이 그들을 살해한 것처럼 가장하여 발표하가로 합의하였다. 아울러, 평소 자기들의 눈에 거슬리는 정관계의 요인을 살해할 것을 공모하였다. 노덕술 등은 이를 위해 우익테러분자 백민태를 매수하고 그에게 이미 권총과 자금을 교부하였다. 검찰 조사 결과, 거사 자금의 지원자들 중에는 시민들의 지탄을 받아온 친일파의 거두 박흥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그들이 살해하기로 공모한 대상자 명단에는 김병로 대법원장과 권승렬 검찰총장도 포함 되어 있었다. 사안이 극히 중대하였기 때문에, 사건 초기에는 최대교 검사장이 직접 사건을 담당하였다. 그는 노덕술과 최난수 등을 직접 취조하였던 것이다. 그 뒤 이 사건은 서울지검의 이원희 검사에게 배속되었다. 1949년 2월, 서울지검은 조사결과를 마무리하여, 노덕술, 최난수, 홍택희, 박경림 등을 살인예비 및 폭발물취체법위반으로 기소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악덕 경찰간부들이 무더기로 구속 기소되자 시민들은 통쾌함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법원의 결정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여론의 향배와 무관하게 수도청장 노덕술은 이승만 정권의 충복이었다. 1949년 6월, 제1심법원인 서울지방법원은 노덕술과 박경림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직위가 낮은 최난수와 홍택희에 대해서만 징역 2년을 선고하였다. 서울고등법원은 그 해 12월의 항소심판결에서 더욱 더 정권의 요구에 노골적으로 영합하였다. 노덕술. 박경림에 대해서는 무죄를, 최난수와 홍택희에 대해서도 벌금형을 선고하는데 그쳤다. 이 사건은 형사 판례상으로 특기할 만하다는 견해가 있다. 서울고법은 최난수와 홍택희에 대해 ‘폭발물취체법’의 위반죄만으로 처벌하였다. 그들은 살인을 교사하고 무기까지 지급하였으나 살인은 실제로 일어나자 않았으므로, 살인교사 죄를 적용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살해에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교사자 및 그에 응한 자는 처벌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2심판결을 파기, 환송하였다. 대법원의 판결은 공정하였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러한 판례를 바탕으로, 형법 제31조 제2항의 규정이 마련된 것이다. 즉, 교사를 받은 자가 범죄의 실행을 승낙하고 실행의 착수에 이르지 아니한 때에 교사자와 피교사자를 음모 또는 예비에 준하여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비록 거물급 친일 경관 노덕술 등이 무죄방면 되기는 하였지만, 최대교 검사장은 그들과 같은 ‘권력의 주구’(走狗)도 실정법을 위반하기만하면 구속 기소한다는 원칙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들의 구속 수사과정에 정치권력의 압박과 회유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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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Ju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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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를 말한다. 1. 어제 어느 분이 요즘 문제가 되어 있는 박유하 씨의 주장을 저더러 좀 검토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마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간단히 몇 줄을 씁니다. 2. 박유하 씨는 스스로를 '사이 또는 '경계'에 세운다고 합니다. 그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따위의 담론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겠다는 거지요. 아닌게 아니라, 그의 입각점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만 하면 한일간의 해묵은 갈등도 해결될 전망이 설 것입니다. 지금까지 양국은 자기 주장만 일삼았지,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막유하 씨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이'와 '경계'를 빌미로 일본의 국가주의에 동조하였습니다. 이것이 제 판단입니다. 어쩌면 박유하 씨는 자기자신마저 속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4. 박유하 씨의 어정쩡한 타협론은, 옥석의 구별을 포기한 채 일본의 군국주의자 또는 국가주의자들 편만 들고 있지요. 예컨대, 그는 과거에 독도 문제의 해결책으로 “독도를 양국의 공동영역으로 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어요. 독도 문제에 대한 냉철한 역사적 검토를 회피한 채, 침략국가(일본)와 피해자(한국)의 요구를 대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는, "한일 양국에 모두 잘못이 있다, 내가 공정한 입장에서 보면, 양국 모두 똑같이 참회해야 한다", 이런 식입니다. 이건 말이 안되지요. 사실에 대한 엄밀한 구명을 토대로 독도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져야 맞습니다. 그러나 박유하 씨는 그러한 역사적 성찰을 포기한 채, 한일 양국의 민족주의 감정을 양비론의 차원에서 비난할 뿐입니다. 씨는 자신을 ‘지일파’라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악질적인 친일파가 분명합니다. 5. 마치 자기 자신이 대단한 이상주의자 또는 사물을 근본에서 성찰하는 냉정한 연구자처럼 말하고 있지만, 박유하 씨의 간악한 위장전술에 속아서는 곤란합니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본질과 무관한 몇 개의 에피소드를 인용하여, '살라미 전술'을 폈습니다. '일본군 가운데는 위안부를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위안부 중에도 일본군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한 사람이 있었다.' '일본이란 국가가 위안부를 강제로 붙잡아간 경우가 어디있는가, 증거를 대라!' '이런 증거가 없다면 일본이란 국가가 법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질 이유가 없다.' 이런 식입니다. 제법 냉철하게 사태를 검토하겠다는 말로 들리지요. 하지만, 이런 식의 수사에 은폐된 진실은 명약관화합니다. 이른바 박유하 씨의 위안부 '연구(?)'란 저의도 빤하고, 결론 역시 그러합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지요. 한일관계는 과거의 역사적 부담을 털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해를 향해 줄달음을 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입니다! 6. 역사적인 문제는 단 시일 내에 풀기 어렵습니다. 특히 한일 간의 문제는 일본인들이 고대로부터 <고사기>, <일본서기>는 물론 다양한 <물어>의 서사를 통해 왜곡을 일삼았기 때문에 더더욱 해결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양이 있는 일본인일수록 한일 양국의 역사를 왜곡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일본인의 한국에 관한 인식은 이미 8세기부터 심각하게 조작되고 왜곡되었습니다. 역사 왜곡의 문제가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고, 지난 1세기에 국한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박유하 씨처럼 평생을 일본문학 연구에 종사해온 사람이라면, 그러한 구조적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에게 만일 학자로서 일말의 양심같은 것이 있다면, 그는 위안부 문제가 아닌 다른문제부터 따지고 들었어야 마땅합니다. 자신이 잘 알고 있지도 못한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를 가지고 어설픈 입방아를 찧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잘못되었으니, 둘 다 반성하고 무조건 화해의 탁자로 나오라는 식의 선생 노릇은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7. 박유하 씨에게 부탁합니다. 당신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나 하십시오. 가령 과거 일본의 문학과 역사서에 드러난 잘못된 한국관을 일일이 지적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미력이나마 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조차 당신에게는 한국인의 쇼비니즘으로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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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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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회귀 남쪽에서는 “6·25 동란” 또는 “사변”이라 불러왔다. 북쪽이 자행한 반란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북쪽은 자기네 입장을 변호해 “남조선인민해방전쟁” 또는 “조국해방전쟁”이라 한다. 해외에서는 내전으로 보아 “한국전쟁”이라 일컫는다. 이 명칭이 80년대부터 남쪽에서도 호응을 얻는 바람에 요새는 “6·25 한국전쟁”이라고도 한다. 우리 정부는 최근 공식 행사에서 “6·25 전쟁”이라 했다. 사건은 하나지만 정치적 입장은 제각각이라 귀일점이 안 보인다. 천안함 사태에서 보았듯 한반도의 평화는 여전히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다. 남북 당국자들은 평화보다 대립에서 더 큰 재미를 보기라도 했던가. 6·25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조차 남북관계의 불안한 현주소를 투영한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같은 영화는 관객들의 반공애국심과 전의를 키웠다. 미국 영화 <원한의 도곡리 철교>(1954)도 비슷했다. 마크 롭슨 감독은 6·25를 “더러운 전쟁”으로 간주하면서도 아시아와 미국을 공산침략에서 지키기 위해 미국 시민에게 피 흘리기를 요구했다. 냉전 이데올로기에 젖은 미국식 애국주의는 기독교와 야합한 적도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신의 계시로 인천상륙작전을 했다고 주장한 <오, 인천!>(1981)은 너무 나갔다. 이 영화는 남쪽의 어느 신종교단체가 뒷돈을 댔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흥행에는 실패했다. 남북 사이에 평화가 오면 영화도 따뜻해진다. <웰컴투 동막골>(2005)이 본보기다. 보수언론과 극우단체는 이 영화를 반미주의의 전형이라 헐뜯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위기감만 드러낸 엉뚱한 짓이었다. 다시 6·25가 대중매체를 점령하고 있다(2010년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 해묵은 반공드라마 <전우>가 리메이크되고, <로드 넘버원>도 방영된다. <포화 속으로>는 또 어떤가. 누가 뭐라 변명하든 화약 냄새가 물씬 난다. 동족상잔이 무슨 오락인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 꼭 10년 전(2010. 6. 25)에 어느 매체에 내보낸 제 글입니다.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향한 우리의 걸음은 스텝이 꼬인 느낌입니다. 외세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남북 양측이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평화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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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ik Kim, 민속원 and 28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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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Sep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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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썼다! 1. 검찰 수뇌부와 언론사 간부들은 지금 이 시간쯤 위스키 잔을 기울이며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개돼지들이 또 발작을 시작했군!" "무뇌충들이 공산당 식으로 떠들기 시작했으니 플랜 B를 가동하자." 2. 그들이 그렇게 조롱하고 비웃더라도, 이 게임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200만 촛불시민이 일어섰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 시민들이 다시 역사의 한복판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마치 저 우람한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며 굽은 물길을 펴듯이 말입니다. 이제 굽은 것은 하나둘 씩 펴질 것입니다. 악당들은 곧 무대에서 쫓겨날 때가 되었습니다. 3. 오늘 우리는 위대한 보물을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형 민주주의"의 참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이 나라의 대의정치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라서 우리 시민들이 다시 일어선 것이지요. 백만 시민이 직접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기적의 역사를, 우리는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촛불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초대형 집회, 이것이 곧 한국형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입니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독립협회와 3.1만세를 넘어 그 멀고 험한 길을 잘도 이어왔습니다. 우리 시민들은 역사의 구비구비마다 피어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이 나라의 가장 자랑스런 보물이요, 전통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화과 노태우로 이어진 어둡고 긴 독재의 터널에 막을 내리게 한 것도 우리들 시민이었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사형선고를 내린 이 또한 우리들 시민이었습니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시민의 역사입니다. 검찰개혁, 언론개혁도 결국에는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기득권층이 제아무리 굳게 결속하여 마지막까지 발악한다 해도,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강물처럼 도도한 시민의 성난 파도를 저들이 과연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4. 불의에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잃었지요. 노회찬 의원마저 엉겁결에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쓰라린 기억들이 우리 시민들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쓰라린 그 기억이 이제는 우리 역사의 믿음직한 방부제요, 파수꾼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를 지켜낼 것입니다. 조국 장관의 검찰개혁을 초동단계부터 철저히 가로 막는 잔인무도한 여러 세력들이 존재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 시민들은 그들을 촛불로 활활 태워버리고야 말 것입니다. 오늘 밤, 서초동에 구름처럼 운집한 시민들의 눈동자에서 저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을 보았습니다. 태산도 감동을 억누르지 못한 채 울었고, 하늘과 땅도 너울너울 춤을 추었습니다. 5. 이 나라의 주인은,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는 우리들 평범한 시민입니다. 자각한 시민들, 이른바 '깨시민'이 이처럼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저는 오늘 깜짝 놀랐습니다. 허다한 종이 신문들과 방송매체들이 수없이 많은 가짜 뉴스를 생산하며 시민들의 귀와 눈을 가리려 발버둥을 쳐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민들은 속지 않았습니다.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앞에는 뚜렷한 전망이 섰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 나라는 결국 바뀌고야 말 것입니다. - 공수처를 만들어 지난 수십 년 동안 빼곡이 쌓인 적폐를 모두 털어내야합니다. - 세월호의 원통함을 반드시 풀 것입니다. - 독재권력에 기생하며 몸집만 부풀려온 검찰조직은 이제 수술대에 올라야합니다. - 마치 고무줄처럼 법을 자기네 구미대로 줄였다 늘였다 농간을 피워온 사법기관 모두가 다시 태어나야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민의 정의를 실천하는 온전한 의미의 공복이 되어야겠습니다. - 차제에 기득권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해온 각종 언론매체도 일대수술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6. 헌법에 명시한 대로 이 나라는 '민주공화국'입니다. 깨어있는 시민이 주인된 나라입니다. 시민의 정당한 요구에 따르지 않는 낡은 제도와 이기적인 집단은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종이신문_끝났다! #편파보도_울분_촛불로_풀다 #독재정권의_그늘에서_독버섯처럼_자란_검찰_시민이_응징한다 #윤석열_체포_특별검사임용_구소수사로_배후_밝혀야 #시민이_우리의_하늘이다 #한국형_민주주의의_탄생 #간접민주주의_한계봉착해_시민들_촛불로_뚫다 #우리가_조국이다 #서초동_촛불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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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Aug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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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유감 1. "광복"이 이 나라의 "해방"을 뜻한다면,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임시정부 주석이 주석의 자격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광복이 무슨 광복이었겠는가.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가 한반도 남부의 "점령"을 명시하지 않았던가. 그러고서도 무슨 광복인가. 일제가 여운형에게 "이양"을 약속했다면, 무슨 광복이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이땅에 광복은 아직 오지 않았다. "도둑처럼 온"(함석헌) 광복이 무슨 광복이란 말인가. 2. 우리의 광복절은 광복 기념절이 아니라, 광복 염원의 날이어야 한다. 이날은 눈물과 통한의 날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방에서 축포 쏘는 소리, 자화자찬의 기념사가 넘쳐난다. 나는 이런 억지가 싫다. 나라를 두 동강이 내고, 몇 년 세월을 전쟁의 포화 속에 파묻은 부끄러움을 반성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광복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다. 3. 장차 이 나라는 무엇보다도 "문화"가 강한 나라되기를 소망한다던 김구 주석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말씀이 적힌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의 고운 손길로 약간 손질된 책자이다. <<백범일지>>가 술술 읽히는 이유가 거기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서 그 책에 기록된 정신이 김구의 것이 아닌 이광수의 것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이다. 백범(김구)은 실천의 사람이었고, 춘원(이광수)는 말뿐인 자였다. 어찌 백범이 춘원의 영혼에 기대었다고 볼 수가 있을까 보냐. 주인이 백범이라면 춘원은 일개 서사였다. 장차 이 나라의 문화가 융성하기를 바란 뜻은 누가 뭐래도 백범의 뜻이었다. 아니라면 그는 얼마든지 고쳐 쓰게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몇 년 전 <<백범일지>>의 진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어, 조금 길게 언급하였음을 이해하시기 바람) 4. 길게 말할 것 없이,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배신하는 데 너무도 익숙해졌다. 공연히 내가 의사연(義士然) 하려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나야말로 비루하기 그지 없는 일개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내 눈으로 보더라도, 차마 눈뜨고 견딜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정치와 경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문화도 학술도 참 제대로 돌아간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만약 이대로 가면, 크게 망할 날이 곧 오고야 말 것이다. 제2의 청일전쟁은 기본이다. 핵무기의 재앙 역시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종전 선언도 없고, 한반도 재통일의 가능성도 아직은 미약하기만 하다. 5. 나는 민족주의자도, 애국자도 아니다. 일신의 안녕을 꿈꾸는 "하사(下士)"일 따름이다. 하잘 것 없는 일개 지식분자인 것이다. 그 썩어빠진 눈으로 둘러봐도 건질 게 없는 세상이라면, 뭐가 잘못됐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 나라가 거대한 제국이 되는 것도 싫고, 잘나가는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서는 것도 나는 싫다. 사분 오열된 이 나라가 더욱 갈갈이 찢어져서 백 개, 이백 개의 독립적인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 서로를 집어삼키려 들지 말고 오순도순 평화롭게 지내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 세상이 더 이상 제국의 질서니, 자본의 횡포에 시달리지 않는 수십만의 소공동체로 환원되어 생태적 평화를 누리는 그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광복이요, 그날이야말로 온 세상의 광복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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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Ma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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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를 거부한 시인 백석 백석 (白石, 1912~1996) 은 ‘식민지 조선’의 탁월한 시인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그는 꾸밈없는 고향 사투리로 시를 썼다. 오늘날 시인 백석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시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일제강점기의 후반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해방 뒤에는 북한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백석의 아름다운 시는 문인과 지식인은 물론 일반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비롯해, 그가 쓴 상당수의 시들이 오늘날에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젊은 시절, 그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 는 훗날 백석을 기념하기 위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던 서울 성북동의 고급요정인 대원각을 시주하여, 지금의 길상사를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하다. 한국인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생생하면서도 아름답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백석은 한 사람의 역사가요, 일제가 강요하는 억압의 근대에서 벗어나 ‘자율의 근대’를 꿈꾼 민족지식인이었다. 그는 신구 (新舊) 지식을 섭렵한 천재였다. 열아홉 살에 이미 『그 모 (母) 와 아들』이란 단편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어려서 배운 한문을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및 일본말에도 능통한 백석이었다. 고향 부자 방응모가 준 장학금으로 그는 도쿄 아오야마 (靑山) 학원 전문부 사범과 (영어) 에 입학했다. 최우등으로 졸업한 백석은 귀국길에 올라 교사 또는 기자로 생계를 꾸리며 적잖은 시를 썼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근대의 다양한 문예사조와 사상을 널리 접했지만 그는 자신의 시어에서 현학을 철저히 배제했다. 살아 숨 쉬는 고향의 입말이 아니고서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 살릴 방법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고향의 입말로 쓴 시 본명이 백기행 (白夔行) 인 그는 ‘독립시인’이었다. 1930년대에는 각종 문인단체가 있었으나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화이부동(和而不同) ’이라는 옛말대로 온갖 흐름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만의 독립적 세계를 유지했다. 여기에는 오산학교 시절의 은사였던 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같은 학교의 선배 시인 김소월 역시 그의 지향점이었다. 그래도 백석은 소월보다 한층 적극적이요, 어느 면에서는 투쟁적이었다. 백석의 시 「정주성」 (1935) 은 홍경래의 난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시어를 통해, 오래전에 좌절되고 만 민중의 꿈은 눈부시게 부활한다. “날이 밝으면 또 매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 (푸른 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고 했듯 전통은 반드시 이어질 운명이다. 백석은 33편의 시를 묶은 시집 『사슴 (1936) 』을 세상에 선보였다. 「고방」, 「가즈랑집」, 「여우난곬족」 등 수록 작품의 목차만 쓱 훑어보아도 고유문화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얼마나 깊었는지 느낄 수 있다. 33이란 숫자도 의미심장하다. 3・1 독립선언 때 민족대표의 수가 33명이었고,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33천 (天) ’이란 숫자도 있다. 또 한국 민중이 길하게 여기는 완전수 9로 노름판에서도 제일 끝수가 높은 ‘가보’다. 더 중요한 사실도 있다. ‘사슴’은 도시문명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반격이라는 점이다. 시인은 일제가 근대화 운운하며 숨통마저 끊어버리려 했던 한국의 가치와 전통을 되새기고 그 부활을 꾀했다. 그리하여 소설가 이효석은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았다”라고 찬탄했고, 시인 박용철은 “모국어의 위대한 힘”을 재삼 느끼게 되었다고 호평했다. 물론 그때도 견해 차이는 있었다. 시인 오장환은 백석의 시가 삶의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또 임화는 백석의 “야릇한 방언”을 지방주의라고 낙인찍었다. 임화도 탁월한 문인이었지만 백석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 전통의 미덕과 자율의 근대 함께 소망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백석은 1930년대 한국인이 당면한 문화적 위기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뇌했고, 그래서 끝없이 방황했다. 그때는 민족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했다. 머지않아 한글조차 노골적인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징병과 징용의 피비린내가 휩쓸 판이었다. 한국은 위기의 심연으로 침몰하는 한 척의 배였다. 그때 백석은 고향의 순수한 토속말을 가지고 그 뱃전에서 초혼가를 불렀다고 봐야 한다. 역사의식 또는 각성된 문화적 자의식, 이것이 그 시인의 생명이요, 특장이었다. 「목구 (木具) 」라는 시 몇 줄을 읽어보자. 내 손자의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 수원 백씨 (水原白氏) 정주백촌 (定州白村) 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시인은 ‘슬픔을 담는 것’이 목구, 즉 나무로 된 목기라고 했다. 아름답고 유구한 그 전통이 끝없는 슬픔에 싸여 있었기에 시인의 비애가 절절했다. 그런데 그가 노래하는 그 전통은 일제의 압박으로 박살 날 만큼 허약한 것이었던가? “힘세고 꿋꿋하고 어질고 정 많고 곰 같고 소 같고 피의 비 같고 밤 같고 달 같은” 그 전통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가. 백석이 노래하는 비운의 당사자는 얼핏 그 자신을 포함한 ‘수원 백씨’ ‘정주 백촌’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파고들면 이야기는 확 달라진다. “내 손자의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라고 했으니, 사실은 한국 사람 모두가 운명의 당사자다.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해서 그런 것이다. 그럴진대 백석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민족의 위대한 전통을 또렷이 기억하고, 부활의 주술을 걸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말해, 「목구 (木具) 」는 조선총독부가 추구하는 경성(서울) 의 근대화를 부정한 것이다. 다른 시에서도 보이듯, 백석은 식민지의 근대를 제국주의의 가면, 전통의 파괴로 간주했다. 그는 고유한 전통의 미덕을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의 날개를 단 자율적 근대를 소망한 시인이었다. ◦ 식민지에서도, 북에서도 비운의 삶 시대는 백석을 일탈과 방랑의 길로 내몰았다. 민족차별의 문제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피지배층인 한국인으로서, 그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강요하는 구조적 차별에 분노했다. 「팔원」에서 일본인 순사 집에서 식모살이하는 한국인 소녀의 얼어터진 손등에 눈물을 흘린 이유다. 식민지 사회 내부의 계급적 갈등도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여승」은 옥수수를 팔며 생계를 잇던 시골 여성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절간으로 피신한 사실을 폭로했다. 절간으로의 도피는 결국 미봉책이란 점에 시인은 고뇌했다. 한 번도 백석은 드러내놓고 민족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민족과 계급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뿌리가 깊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그였기에 함부로 카프 계열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정의와 평등의 사회개혁을 염원했다. ‘백석은 순수 민족시인이다’, ‘이념과는 거리가 먼 방랑의 시인또는 자유의 시인이다’, ‘해방 뒤 백석이 비록 북한에 눌러앉았다해도, 그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그는 아동문학에 전념했으나, 결국 문단에서 축출되었다’, 이런 식의 평가가 한동안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백석이 과연 북한의 정치적 이념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백석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해방 당시 백석은 만주에 있었다. 그가 만약 사회주의 체제를 반대했다면, 남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백석이다. 그는 사회주의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지, 평양으로 내려가 은사 조만식 선생의 통역비서를 맡았다. 은사가 숙청된 뒤에는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1959년에 백석은 함경남도 삼수의 국영협동농장으로 옮겼다. 농장생활에서 그는 공동체 문화의 단초를 발견하고 북한 체제를 찬양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후 남쪽에서는 백석의 아름다운 서정시도 금서가 되었다. 냉전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 백석의 시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 화려한 귀환에 다들 열광했다. 언어의 주술사 백석은 시로써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또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불의와 불평등이 사라진 새 세상을 꿈꾸었다. 안타깝게도 그 꿈은 식민지에서도, 북한에서도 파탄으로 끝났다. 그럼 여기서는 과연 가망이 있는 것일까. * 이 글은 제 책,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의 한 부분입니다. 신구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민족애와 절조가 있었던 시인 백석에게서 저는 선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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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ik Kim, 이권희 and 43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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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Ma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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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기 사원은 지배층의 사유 재산이었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특권지배층은 사원을 재산은닉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사원에는 넓은 경작지와 상당한 분량의 금은보화가 있었다. 특권층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11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유럽 어디서나 왕족과 귀족들은 작위를 계승하지 못할 잉여의 자식들을 고위 성직자로 만드는 것이 풍습이었다. 고위성직자들은 가문의 영광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재산도 증식할 수 있었다. 피렌체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알리브란도(Alibrando) 주교가 그 도시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주교는 십일조를 거둬들였고, 피렌체 도심에 많은 상점을 소유해 임대료가 적지 않았다. 인근농촌에는 드넓은 농지가 있어 임대료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도시에서 거래되는 상품에 세금을 부과해 넉넉한 수입이 보장되었다. 주교는 피렌체의 사법권까지 장악하고 있어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알리브란도 주교는 본래 피렌체 동남쪽에 있는 볼테라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의 왕이자 독일 황제였던 하인리히 2세(재위 1002-1024)에게 뇌물을 주고 주교자리를 얻었다. 알리브란도는 부인과 함께 슬하에 4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주교 관저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는 사제직도 돈을 받고 마음껏 팔았다. 부패한 주교의 모습에 실망한 수도사들이 불복종을 선언했다. 그러자 주교는 도리어 순교자 미니아토(St. Miniato)를 기념하는 수도원을 건설해 자신의 지위를 더욱 강화했다. 미니아토는 피렌체 최초의 순교자였다(서기 250년경). 알리브란도 주교는 자신의 개인재산을 기부해 수도회를 만듦으로써, 다른 종교단체들이 이 수도원의 운영에 간여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아들에게 수도원의 재산관리를 맡겼다. 그의 후손들은 대로 주교가 물려준 부동산에서 생기는 수익금을 챙겼다. 주교가 수도원을 세우고 자신의 기부한 것처럼 위장된 행위는 후손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알리브란도 가문은 200년 넘게 그 혜택을 입었다고 한다. 어디 이런 일이 피렌체에 국한되었겠는가. 유럽 각국은 물론이요, 이슬람지역과 동아시아 각국에서도 관찰되는 비리요, 협잡이었다. 겉으로 보면, 어디서나 성(聖)과 속(俗)의 차이는 커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도대체 어디에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출처: 백승종, <<상속의 역사>>, 사우, 2018.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이 책은 2018년 교보문고와 세게일보가 공동으로 선정한 "올해의 책"이 되었지요.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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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김재형 and 21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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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Jun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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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은 훈장이어야 한다! 1. 김종필에게 무슨 훈장인가? 이 정부가 중도 우파라는 점은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사건건 관행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이다. 아마 전직 총리도 했고, 무슨무슨 벼슬도 했으니까 예우하자는 것이리라. 그러나 훈장은 나라에 큰 공훈이 있을 때 주는 것이다. 영전에 바치는 조화 따위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2. 까마득한 옛날에는 증시(贈諡)라는 것이 있었다. 평일의 언행이 나랏일에 크게 관여되었다고 보았을 때, 중의를 물어 시호를 내린 것이었다. 가장 대접을 받은 것으로는 "문(文)" 자 시호가 있었다. 퇴계 이황에게는 문순, 율곡 이이에게는 문성이란 시호가 내렸다. 공론이 이를 마땅히 여겼다. 아마 후손들도 한 없는 자랑으로 여기며 시장을 공손히 받들었으리라. "충(忠)" 자 시호도 각별한 존경을 받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만고충신 이순신에게는 충무의 시호가 하사되었다. 3. 때때로 썩은 선비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조상에게 시호를 내려주십사, 하며 거센 청원운동을 벌였다. 그것도 한 대에 그치지 않았다. 3대, 4대 동안 정승 판서들에게 끊임없이 뇌물을 바치고, 애면글면 통사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별 공훈도 없이 백골로 누워 있는 조상의 시호를 따냈다. 조상에게 시호가 내리면, "연시(延諡)"라 해서 시끌벅적한 잔치가 열렸다. 내가 살핀 어느 집안의 고문서에 따르면, 시장(諡狀) 곧 시호가 적힌 문서를 발급받을 때, 예조의 아전들에게 300량의 뇌물을 바쳤다. 논으로 치면 30마지기(6000평)를 매입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서리에게 주는 금액이 이 정도였으니, 조정과 궁중에는 또 얼마나 많은 돈을 바쳤을까. 줄잡아 수천량, 많게는 만량도 넘는 거금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4. 나라에 큰 공적이 있어서 시호를 받는 것이야, 본인에게도 떳떳하고 후손에게도 귀감이 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수대에 걸친 청원 운동 끝에 얻은 시호라면, 도리어 부끄럽고 욕된 일이 아니었을까. 한데도 다들 이깟 종이 한 장에 목숨을 건 데는 이유가 없지 않았다. 그것이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연시"를 하고 나면 으레 "연시각" 따위의 기념관을 그럴 듯하게 지었다. 그런 다음, 사우(祀宇), 서원 또는 부조묘로 변경해 놓고는 조상치레를 하였다. 말하자면 알짜배기 양반행세를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조상의 시호였다. 문자 시호나 충자 시호가 있는 조상을 "무릅쓰면"(즉, 그 후예라는 뜻임) 큰 행운이었다. 그들은 댓수가 아무리 멀어져도 남들이 함부로 괄시하지 못했다. 그러기는 커녕, 이런 집안의 핏줄을 이어받고자 부자들의 중매가 쇄도하였다. 설사 수 대 동안 아무런 벼슬을 못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조상의 뼈다귀를 팔아먹는 것만으로도, 대대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5. 지금의 무궁화장은 그 값이 얼마인가. 그것도 옛날의 시호처럼 대대로 우려먹을 수가 있기나 한가. 나같은 평민이야 그 따위 훈장증 같은 것에는 처음부터 아무 관심도 없다. 또, 그런 물건의 소용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가지 명명백백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이제 시호니 훈장이니 하는, 그런 낡은 물건으로 사람을 놀려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한 공적이 없는 사람에게 훈장을 남발하는 것은, 국가의 기강을 스스로 어지럽히는 죄가 된다. 이 정부는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라. 생전에 국가에 무수한 죄를 지은 김종필 따위의 역적 무리에게 훈장을 주는 것은 민의에 심히 어긋난다. 적어도 촛불시민혁명을 운위하는 정부라면, 절대로 이런 멍청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6. 그럴 리 없지마는 혹시 권력에 끈이 닿는 벗이 있다면, 부디 고언을 아끼지 마시라. 평일에 정부가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들이 쌓여서, 결국 권력의 배가 뒤집힌다. 그 점을 부디 권력자들이 기억하게 하시라, 임금은 가볍고 백성은 중하다는 '군주설(君舟說)'은 만대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말로써, 이 정부의 어이없는 실책을 거듭 질책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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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ik Kim, 이권희 and 28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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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ay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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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상인의 전통 1. 이른바 ‘잭팟’의 실체는 이런 것이다. 이란의 영자신문 <이란 데일리>(현지시각 2016년 5월 3일자 21시 01분 57초)를 보라. 박대통령의 이란 방문을 보도한 이 기사의 첫 단락은 다음과 같다. South Korea’s President Park Geun-hye said on Tuesday that her country had prepared a package of loans worth a total of $25 billion for the development of Iran’s infrastructure projects.(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화요일에 말하기를, 한국은 이란의 사회간접자본 개발 프로젝트에 총 250억 달러를 빌려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다.) <이란 데일리>는 한국대통령의 방문이 그들로서는 시급하기 짝이 없는 개발자금의 대출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관련기사의 제목부터가 “Korea Offers Iran 25bn in loans”(한국, 이란에 250억 불 차관 제공)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2. 같은 기사를 제 아무리 면밀히 검토해 보아도, 한국 측이 ‘노다지’를 건졌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저 막연하게 이란과 한국 두 나라 사이에 교역량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든가, 유전을 비롯한 이란의 여러 가지 개발계획에 한국이 참여의사를 밝혔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란 데일리>의 관련보도가 궁금한 분들은 다음의 주소 창을 눌러보시기 바란다. http://www.iran-daily.com/News/150750.html 3. 이슬람의 막강한 전통은 상업에 있다. 오래 전부터 그들은 거래에 능숙하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상업국가 페르시아(현 이란)의 위용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정복국가 몽골을 도와 세계대제국을 건설한 것도 그들이었고, 그 대가로 몽골의 상위 지배층을 형성한 ‘색목인’의 주축이 다름 아닌 이란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4. 현대에 이르러 이란은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하나의 축이 되었고, 그리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이란-이라크 전쟁과 이란 핵문제가 발생했다. 오랫동안 미국의 강력한 제제를 받게 되어, 이란은 존립의 궁지로 내몰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란은 최근 이 위기를 극복하고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미국은 물론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많은 나라들이 이란에 진출하여, 이란 개발에 뛰어들 차비를 하고 있다.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음양으로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독일의 야심은 만만치 않다. 장차 이란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해도, 우리가 숟가락만 들고 가면 얼마든지 꿀을 떠먹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은 결코 아니다. 한국 대통령이 머리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이슬람 여신의 복장으로 치장하더라도, 그쯤의 선심공세에 쉽게 마음을 빼앗길 상대가 테헤란의 대통령궁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5. 대국민 사기극은 언젠가 폭로되기 마련이다. 1876년에 나라의 문호를 외부에 개방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이 나라는 어두운 구석이 많은 모양이다. 아니, 잘난 기득권층은 시민의 대다수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고 아직도 자기네 입에서 떨어지는 말만 듣고 사는 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다. 조, 중, 동만 입단속 시키면, 이 나라 시민들은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제 놈들의 못난 장단에 춤출 줄로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우리에게도 들을 귀가 있고, 우리 생각을 딱 부러지게 말할 입이 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잭 팟’ 좋아하지 마라! 그러다 너희 쪽박 찬다.
Yuik Kim, 박계태 and 39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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