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Sep 2014 · · …후원 아래 국내에 친일 정객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친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내놓고 그런 목표를 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자신의 정치적 음모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일본 정계의 거물들은 이러한 김계조에게 기밀자금을 지원하였다. 현금 250만원과 물자설비 500만원을 비롯하여, 총 1,000만원이나 되는 막대한 정치자금이 김계조의 수중으로 흘러들어왔다. 김계조는 이 자금으로 국제문화사(國際文化社)를 조직하였다. 표면상으로는, 극장, 댄스홀, 요리집, 여관 등을 경영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실제로는 비밀정치공작을 전개할 요량이었다. (1) 우선, 그는 친일파를 몰래 미군정 당국에 포진시켜, 친일적 정책을 펴도록 할 계획이었다. (2) 국내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배일(排日) 친미파에 대하여는 암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었다. (3) 그는 미군정당국의 대한정책을 염탐하여 비밀을 캐내는 동시에, (4) 한국과 미국 사이를 이간질하고, (5) 치안교란까지 시킬 목적을 가졌다. 그리하여 다량의 무기를 확보하고 악질적 폭력단까지 양성하고 있었다. 김홍섭은 이 사건의 담당 검사로서 김계조의 각종 혐의사실을 빈틈없이 조사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높았다. 수사가 착수될 때부터 공소제기 및 공판과정까지 지속적으로 많은 시민들이 주목하였다. 공판이 열릴 때마다 법정은 일반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허일태, 2007, 69쪽) 김홍섭은 주범 김계조에게 징역 2년을 구형하였다. 선고공판에서는 김계조에게 간첩예비죄까지 적용되어, 징역 5년과 추징금 310만원이 선고되었다.(<서울신문>, 1946년 3월 20일자) 김홍섭의 사건처리는 완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명백한 증거를 입증함으로써, 유죄가 확실시 되는 김계조의 범죄행위에 대해 공소를 제기했다. 김홍섭은 피의자의 행위가 범죄구성의 제반요건을 충족하였다는 확신을 얻은 다음, 신중하게 구형하였다. 허일태는 이러한 사시을 토대로, 검사 김홍섭은 개인의 인격을 중시하는 객관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허일태, 2007, 70쪽) 검사 김홍섭의 활약이 계속되었다. 그는 이른바 ‘학병테러사건’도 취급하였는데, 그 역시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1946년 1월 18일에 발생한 이 사건도 그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배경 아래 발생하였다.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익 간에 상당한 알력이 존재했다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학병동맹 측과 이를 반대하는 이른바 반탁진영 간에 빚어진 충돌이 이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좌익과 우익 간의 유혈충돌이었던 것이다. 정치적 사건인 관계로 수사에 난항이 많았다. 그러나 세평에 따르면, 김홍섭을 비롯한 세 명의 담당 검사는 이 사건의 진상조사에 중립을 유지하였다고 한다.(허일태, 2007, 70쪽) 해방공간에서는 나날이 좌우익 간의 충돌이 빈번해졌고, 정치적 간섭도 도를 더해갔다. 검사 역할을 공정하게 수행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하여 김홍섭은, ‘정판사위폐사건’을 끝으로 검사직을 그만 두었다. 이른바 ‘조선정판사 사건’은 1946년 5월에 기소된 대형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엇갈린 주장이 있지만, 사실 위주로 사건의 전개과정을 정리해 보면 이러하였다. 조선정판사라는 출판사에는 조선공산당의 간부가 존재했다. 그들 2명의 간부 및 일부 공산당원들이 출판사의 시설을 이용하여 위조지폐를 발행하려 하였다. 위조된 지폐는 공산당 측에 제공될 것이었다. 물론 남한의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이었다.(허일태, 2007, 70쪽) 김홍섭은 이 사건의 담당검사였다. 이 사건의 처리에 탁월한 솜씨를 보임으로써, 검사 김홍섭의 명성은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다.(최종고, 1983, 72쪽)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현실정치에 대한 김홍섭의 실망은 더욱 커졌다. 그는 법의 운영에 관해 정치권력이 직접 개입하는 현실을 체험하고 좌절감을 느꼈다. 부인 김자선은 그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저희는 검찰청 옆 관사에 살고 있었는데, 검찰청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집에까지 들릴 정도였어요. [조선]정판사 사건을 맡을 땐 집에 돌멩이도 날아들고 해서, 경찰들이 항상 지켜야했어요. 그분[김홍섭]은 피신까지 한 일도 있어요. 어쨌든 그분으로서는 성격상 검사직이 맞지 않는 것 같이 생각되었고, 그분 스스로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이치백, 1999, 269-270쪽) 이 사건을 끝으로, 1946년 9월 김홍섭은 검사직을 떠났다.(최종고, 1983, 72쪽) 공정한 법 집행이 불가능하다면, 더 이상 검사직을 수행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정판사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모두 두 명이었다. 김홍섭과 그의 변호사시험 동기생인 조재천(1912~1970년)이 그들이었다. 재판이 진행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피고 측 변호인단은 법정에서 김홍섭 검사를 지목해 몇 차례나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답변을 회피하였다. 거의 모든 답변은 그의 동료인 조재천 검사가 혼자서 처리하다시피 했다.(김기협, <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 사건>, [해방일기] 1946년 8월 29일, 프레시안 2011.08.29 (월) 오전 7:40) 김홍섭은 정치적 개입으로 인하여, 자신의 사법 활동에 큰 제한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현실 앞에서 그는 실망과 좌절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에 관한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6년 9월 19일,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김홍섭은 법의 위신을 훼손하는 배후인물을 찾아내어 엄중 처벌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만일 자신의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면 동료 검사들도 사직하고 말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그는 견지하였다. 그는 미군정 당국의 사법부장 커넬 소좌에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통보하였다.(허일태, 2007, 72쪽) 조선정판사 사건에 관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웠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당시 정음사 대표였던 최해철(崔哲海)의 증언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나[최해철]는 그 전부터도 저 분[김홍섭] 같으면 돈 한 푼 없어도, 인품으로 살아갈 분이라고 생각했댔어요. 그런데 ‘재판에까지 간섭하려 하다니! 재판에까지!’하면서 [그분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어요.”(최종고, 1985, 48쪽) 오래 전에 지나간 사건이라, 정치적 간여의 실체를 이제 와서 속속들이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점만은 여실히 확인될 수 있다. 1946년 9월 10일경 김홍섭은, 남한의 유력한 경제단체의 간부 두 사람을 소환하여 심문하였다. 그런 일이 있자, 미국인 장교가 즉각적으로 개입해왔다. 미군 장교는 김홍섭에게 말하기를, 그들 간부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 김홍섭에게 어떤 보복조치라도 강구하고야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허일태, 2007, 71쪽) 좌우익 간의 치열한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군정 당국은 수사와 재판에 노골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삼권분립의 원칙이 지켜질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린 재판이라면, 그 어느 것이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진행되기를 바랄 수 없는 노릇이었다. 1946년 10월 21일, 구형 공판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김홍섭은 이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로서, 그리고 양심적인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고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소감을 간단히 말하면, 유감스럽다고 하겠다. 내가 취조한 [사람들] 중 특히 박낙종은, 50 평생 중 30년의 투쟁사를 가진 혁명 투사였으므로, 만강의 감사를 드리는 한편, 많은 감회를 느꼈[다고 고백하고 싶은 심정이](으)며, 사회 여론은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좌우익이 한층 소원하여지는 [것도 같은] 감상을 주는데, 이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민족 구성의 일인으로 매우 유감히[스럽게] 생각한다. 법률가 입장으로 [보면]는 형사사건이나, 돌이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볼 때에는 조선의 기근(饑饉)이요 민족적 비극으로 본다. 나는 김창선이 공판정에서 ‘죽고 싶다’, 말할 적에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 즉,] 예수를 은 30량에 잡아[로마 병사들에게 넘겨] 준 가롯 유다의 비극을 상기했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23일자) 이런 진술에서 보듯, 김홍섭은 일제시기 박낙종의 독립투쟁 경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건의 경위를 고발한 김창선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김홍섭은 담당검사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들에 대한 처벌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그는 좌우익 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벌어진 조선정판사 사건을 “조선의 기근” 또는 “민족적 비극”이라고 정의하였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구형 논고에서 김홍섭은, “공산당 자체가 이[사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을 잘못 감독한 것이라고 본다.”라고 판단했다. 공산당이 사건을 직접 교사한 것은 아니고, 일부 당원들의 그릇된 행위를 공산당 조직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고 분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부과된 형량은 매우 무거웠다. 사건의 주범인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1899~1950)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김홍섭은 박낙종 등 공산당 지도부가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을 뿐인데, 이러한 중형이 선고되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김홍섭과 같은 일개 검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판단이, 재판 결과를 결정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자신의 양심대로 사건을 온건하게 처리하고 싶었던 김홍섭, 그는 과연 이러한 재판결과를 납득할 수 있었을까. 1950년 여름, 6.25전쟁이 터지자, 박낙종은 총살되고 말았다. 역사가 김기협은, 김홍섭이 조선정판사 사건 직후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마저 포기한 사실로 미루어, 내심 그 재판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해석한다.(김기협, <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 사건>, [해방일기] 1946년 8월 29일, 프레시안 2011.08.29 (월) 오전 7:40) 김기협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지만, 약간의 오류가 있다. 조선정판사 사건 때문에 김홍섭이 검사직을 그만 둔 것은 맞지만, 그 때문에 변호사 자격까지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가 변호사 등록을 포기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런데 김기협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주장도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조선정판사 사건을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김홍섭은 동료 조재천과 더불어 국가공안 일선에서 투쟁하였다고 보았다.(최종고, 1985, 47쪽) 내가 보기에, 공안검사 김홍섭이라는 기왕의 평가는 상당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결국 김홍섭은 검사직에 취임한지 1년여 만에 초야로 물러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김병로는 그를 불러 야단을 쳤다. 이처럼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있을 때, 개인적인 생각에만 집착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다. 김홍섭은 결국 김병로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1946년 12월, 그는 서울지방법원의 소년부 지원장에 임명되었다. 진즉부터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차라리 고아원을 경영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부모 없는 그 애들을 내 무릎 위에 앉혀서 키워보고 싶소.”(최종고, 1985, 52쪽) 그런 김홍섭이 이제 소년부를 맡게 된 것이다. 그 때 서울지방법원에서 1년 동안 수리한 청소년범죄 건수는 약 600건 정도였다.(허일태, 2007, 72쪽) 김홍섭은 그들 사건을 분석한 적이 있었다. “절도범이 단연 많고 다음이 횡령·사기 등이다.” 라고 했던 것인데, 그는 이른바 소년 범죄를 단순히 범죄로만 취급하는데 반대하였다. “불량소년은 역시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인 것이다.” 요컨대 청소년 범죄는 일종의 사회적 질환이란 것이 김홍섭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청소년범죄에 관하여는 엄벌을 택하기보다 정책적 배려가 우선시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그의 글귀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소년을 檢事와 대항하게 하는 것은, 우리 사법의 특히 고려할 문제이며, 소년의 의무교육·징병제 실시와 더불어 소년에 대한 형사정책은 3대 소년정책이라 할 수 있으니, 좀 더 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주기 바란다.”(허일태, 2007, 73쪽에서 재인용???) 청소년 범죄가 사회문제의 일환이라는 김홍섭의 생각은 1946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쓴 그의 글 <검사정 제4호>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자신의 판사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 분명한 이 소설의 얼개는 다음과 같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피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6-7세가량 된 소년과 30세 전후의 청년이 그들이다. 소년은 국유림에서 불법으로 나무 두 그루를 베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그런데 소년의 가정형편은 극히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는 북해도로 징용을 갔다가 해방을 맞아 돌아왔으나, 몸져 누워있는 딱한 형편이었다. 한편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된 청년은, 문제의 소년이 놓인 가엾은 처지를 동정한 나머지 산감독을 만나 사건자체를 무마시키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자, 화가 나서 그를 폭행한 혐의로 붙잡혀 왔다. 사건을 조사한 작중의 H검사는 그들 두 사람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여 경미한 사건으로 취급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동료인 차석 검사만 해도 전혀 다른 입장이었다. 차석 검사는 동정심 많은 H검사를 비판한다. “우리 검사국에서 H검사의 구형이 제일 헐하단 말이오. 글쎄 형을 통일해야하지 않소.” 검찰국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중벌에 처하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차석의 주장은 동료 검사들의 공통된 의견을 대변하는 것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H 검사의 소신에 위배되는 일이다. “같은 정도의 범죄라도 그 동기라든지 정상은 천태만상인데, 그런 것을 참작 않고 일률로 처단하는 것도 법의 위신에 관계되지 않나 해서” 감형을 결정했다. 이것이 H검사의 변명이다. 그의 자기변호는 또 있다. “인간의 조직이 근본[적으로] 완전한 것이 못 되고, 게다가 사회의 제도는 또한 어떠한가.” H 검사는 차석에게 이렇게 항변하고 싶지만, 그는 이미 동료들의 눈 밖에 난 처지라서 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김홍섭은 작중의 H검사와 동일 인물이다. 다만 그 검사의 입을 빌려, 법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한 셈이다. “법률은 소년 때부터 나의 성미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학문으로서의 법률에 여전히 불만을 가진다. 역사와 특히 철학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학과였다. 대학 생활 4년을 나는 이, 내가 사랑하고 내 욕구를 채워주는 학과에 바쳤던 것이다. (중략) ‘6법전서’를 가리켜서 악마의 성전이라고 혹평한 것은, 법학사 변호사 하이네 씨의 술회이었다.” 김홍섭은 자신이 법조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 자신의 판단에 따르면, 그는 인문학도래야 좋았을 사람이다. 그는 법학이라는 것이 도무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러한 생각은 다음의 독백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그[H검사]의 책상 위에는 ‘6법전서’가 놓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동료 중에서도 유난하게 냄새를 피우는 법률가를 H는 습관적으로 경원한다. (중략) 법학에 대해서는 큰 기대는 말아야 하오. (중략) 소위 ‘해석 법학’이란 일종의 처세기술이어서, 이상에 타는 청년학도에게는 건조하고 천박한 감이 없지 않을 거요.” (김홍섭, 1946, ???쪽) 건조하고 천박한 것이, 당시 유행하던 ‘해석 법학’이었다. 그는 아마도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재판정에 설 수밖에 없었으니, 그때마다 김홍섭의 심정은 더욱 무거워졌을 것이다. 망설이던 끝에 그는 드디어 판사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1948년 전반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점은 기왕의 전기 자료와 연보에 명확히 언급된 적이 없었다. 법원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그는, 서울의 뚝섬 부근으로 아예 거처를 옮겼다.(최종고, 1985, 49쪽) 그는 당분간 농사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사법부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계기로 큰 좌절을 맛보았고, 청소년 사건을 전담하면서 범죄의 사회적 원인을 더욱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김홍섭이었다. 그래서 법조계를 떠나 농업으로 전업을 꾀하였건마는, 오래 전부터 그가 품고 있던 법의 기능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어쩔 수 없는 법조인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 김홍섭은 1948년 경 자신의 사정을 담담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재독하면서 몇 차례나 이 문제에 부닥쳐 (중략) 나는 ‘작자’와 더불어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같은 작자의 다른 소설 속의 한 주인공을 모방하여, ‘땅’을 벗 삼아 살 수 있는 지대에로 물러날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말 그대로, “흙으로 된 인간은 흙과 더불어, 흙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생각이 판사 김홍섭을 농부로 만들어 놓았다. 그이 뚝섬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무렵에 쓴 그의 수필 <전원(田園)>에서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간 김홍섭의 삶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는 농사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된 농부가 아니었다. 그가 계획한 농사일은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돼지를 치려고 벼르고 별렀지만, 그는 밭에서 퇴비를 주다가 거름독이 올랐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된 김홍섭. 그런 몸으로는 도저히 약속된 날, 약속된 장소에 가서 돼지를 데려올 수조차 없었다. 농업은 김홍섭의 천직이 아니었다. 그는 밭 천여 평을 빌려 채소를 가꾸고, 닭을 치고 나중에는 돼지도 길러 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감당하지 못했다. “오류의 하나는, 건강에 대한 지나친 불(不) 고려요, 다른 하나는 농자(農資)에 대한 무계획이었다.”(김홍섭, <한 법관의 심정>; 최종고, 1985, 262쪽) 농사에 몰두하기에는 그의 건강도 허락하지 않았다. 농사자금 역시 태부족이었다. 미련은 남았지만 그는, 이태 동안의 농사일을 접었다. 1950년경 김홍섭은 다시 법조계로 되돌아왔다. 김홍섭이 언제 뚝섬으로 들어갔는지를 두고, 연구자들 사이에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다. 혹자는 1946년 가을, 그가 검사직을 포기한 다음 바로 뚝섬에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1946년 12월, 그는 서울지방법원 소년지원장에 임명되었고, 한 동안 그 일에 전념하였다. 그가 뚝섬으로 옮긴 것은, 아무래도 그 지원장 직책을 버린 다음의 일로 봐야 사리에 맞다. 그럼 지원장을 그만 둔 것은 언제였을까? 그것은 1948년 2월 이전이었다. 그때부터 김홍섭은 변호사로서, 중앙대학교에 출강하여 법철학을 가르쳤다. 연구자들은 뚝섬 시절의 김홍섭이 농업에만 진력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지 않았을까. 그 당시 김홍섭은 변호사 등록을 마친 상태였다. 비록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개업을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농업만으로는 호구지책이 어려웠기 때문에, 생계유지에 다소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대학에도 출강하였던 것이다. 중앙대학에서 그가 담당했던 과목은 ‘법리학’이었다. 평소 그는 법 이론에 대해서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장영수, 2007, 181쪽) 법리학이란 과목은 그 본질에 있어 법철학(Rechtsphilosophie)과 동일하였다. 법의 존재근거, 법의 효력원인, 법의 이념구조 등을 다루는 학문이란 말이다.(허일태, 2007, 73쪽) 요컨대, 법에 관한 김홍섭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철학적인 것이었다. 그로부터 십년 쯤 지난 뒤, 그는 <형(刑)의 양정(量定)에 관한 소고(小考)>란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법사회학적 관심 역시 상당히 컸다는 증거일 것이다.(최종고, 1985, 53쪽) 이밖에 그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법률>이란 논문 하나를 더 남겼다. 이러한 글들을 종합해 보면, 김홍섭의 법철학적 사고의 윤곽을 대강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김홍섭이었다. 아직은 그가 법에 관하여 하나의 체계적인 이해에 도달하기는 어려운 시점이었다. 일제 식민지시기와 해방공간의 분열과 혼란을 거치면서, 그의 내면에는 지적 좌절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강한 의지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김홍섭이 체험한 인지적 확산과 숙성은 해방 뒤에 쓴 그의 수필과 시, 소설 등에서 단편적으로나마 확인된다. 그 당시 그는 극도의 자괴감과 당혹이 점철되는 가운데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김홍섭은 검사직도 사직하였고, 소년지원장이라는 직책도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따라, 톨스토이마냥 전원으로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번 맺어진 법과의 깊은 인연은 쉽사리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혼란 끝에 그는, 해방된 조국의 재판정에 한 사람의 법관으로 다시 출정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법관 임용 시기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뚝섬 생활이 이태 동안 이어졌다는 그 자신의 진술로 보아, 그의 복직은 대략 1949년경에 이뤄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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