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고난을 치유한다…김경재 목사 인터뷰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고난이 고난을 치유한다…김경재 목사 인터뷰
등록 :2021-03-17
‘코로나’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코로나는 엎친 데 덮친 충격이다. 이 충격은 일시적 재앙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코로나가 좀 더 근본적인 변화의 시발이 될 수 있다. 이 전환의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선각자들의 혜안을 듣기 위해 휴심정이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인생 멘토에게 코로나 이후의 길을 묻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연재하는 시리즈의 일곱번째 멘토는 크리스천 아카데미원장을 지낸 한신대 명예교수이자 삭개오작은교회 원로인 김경재 목사(81)다.
장공 김재준과 신천 함석헌의 애제자였던 김경재 목사. 사진 조현 기자
부활절(4월4일)을 앞둔 사순절 40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며, 회개와 기도, 절제와 금식, 깊은 명상과 경건의 생활을 보내는 시기다. 인류는 이미 사순절보다 10배나 더 긴 400여일간 팬데믹으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현대사에서 고난을 피하지 않았던 장공 김재준(1901~1987)과 신천 함석헌(1901~1989)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던 김경재 교수를 지난 10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자택에서 만났다. 지난 몇년 동안 심장병 등을 앓았던 그는 비록 핼쑥하지만 동토를 뚫고 봄날의 부활을 예비하는 새순처럼 해사했다.
장공 김재준은 진보 신학자이자 목회자, 민주화 지도자로 기독교장로회를 설립했으며, 오늘의 한신대학교를 만든 주역이다. 김 목사의 안방엔 김재준이 졸업식 날 손수 써준 한문 ‘산상수훈’과 ‘범애중이친인’(凡愛衆而親仁·공평하게 사람을 사랑하고 인덕 있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라)이라는 <논어> 글귀까지 편액 두개가 걸려 있다. 김 목사는 스승의 사후 안병무와 함께 김재준 전집 18권을 편집했고, 장공기념사업회장을 지냈다. 그의 거실 책장엔 함석헌의 사진도 놓여 있다. 김 목사는 함석헌이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만들자 편집위원으로 함께했고, 함석헌이 외로운 처지였던 1980년대에도 몇몇 사람과 함께 잡지를 발간했다. 함석헌은 김 목사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1982년 은진교회를 개척할 때, 1년간 강의를 해줄 만큼 각별히 챙겼고, 그는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두 스승을 말할 때마다 떨리는 음성으로 ‘우리가 그 스승들을 담아낼 그릇이 못 됨’을 애통해했다. 그러면서 권력의 우상과 교리적 도그마에 안주하지 않고, 진리와 하나님의 세계와 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 두 스승의 정신에서 한국 혼의 위대한 전진을 희망했다. 싸구려 축복과 은혜에 잠들지 말고, 깨어나 강고한 우상에 맞서는 것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더 높고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고난의 풀무질을 견뎌낸 인간과 나라와 역사만이 제련된 금처럼 빛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진보 신학자이자 목회자이자 기독교장로회 설립자이자 오늘의 한신대를 일군 민주화운동지도자 장공 김재준
씨알사상가이자 비폭력평화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함석헌이 독재에 맞서 강연하던 모습
-코로나19를 어떻게 보는가.
“인류의 오만으로 인한 자업자득이다. 지구촌엔 이 불행이 도리어 다행이 아닌가. 갑자기 빙하시대같은 기후위기나 생태계 몰락으로 인류가 멸종되는것보다 미리 경고해주는게 다행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진지하게 ‘뉴노멀’은 생각하지않고, 백신만 맞으면 호시절 돌아오겠지하는 낙관적인 생각이다. 모두가 경제와 실업문제에 집중해서 환경과 과소비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과 단순한 삶으로 전환을 도외시하는게 문제다. 표피적인데만 집중한 종교계의 책임이 크다. 종교계는 대형예배나 집회를 재연하려는 망상을 버리고, 지금이야말로 지구촌에서 함께 살기위한 뉴노멀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때다.
-김 목사에게 스승인 김재준과 함석헌은
“갈수록 두 어른에 대한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수많은 선생을 만났지만 두분이야말로 인격의 핵에 항구적인 영향을 준분들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두분의 진가를 모른다. 기독교에서조차 제대로 평가를 못한다. 개신교가 이땅에서 140년간 빛과 그림자를 남겼고, 요즘은 개독이란 소리까지 듣게 됐지만, 두 분의 존재야말로 온갖 수모와 배신을 속량하고 남을 정도다. 두분은 모두 동양의 노장과 불교와 유학과 서양의 기독교를 섭렵해서 동서의 세계관을 아우르는 통전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드문 인물들이었다. 두분 다 개인적으로는 수줍어할 정도로 내성적이면서도 우상타파 정신은 투철했다. 절대적인게 될 수 없는,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이 이래라 저래라 부리는 것은 못참았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지키기 위해 평생 매진한것이 공통점이다. 두분은 현실에 안주할 줄을 몰랐다. 끊임없이 개혁적이고 허물을 벗었다.
나도 한신대에서 평생 밥을 먹었지만, 한신대나 기독교장로회가 김재준을 담을만한 그릇이 못됨을 솔직히 고백하지않을 수 없다. 또한 함석헌기념사업회도 함석헌을 담을 만한 그릇이 못된다. 함석헌은 기존 교리적 도그마에 안주하지않고, 끊임없이 진리와 하나님의 세계와 참을 향해 높이 높이 위로 오르고, 앞으로 전진하는데서 김재준과 통한다.
함석헌은 평안도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의 파도 물결이 밀어닥치고 가는 것을 보고 자란 바다사람이다. 김재준은 함경북도 울창한 숲에서 조용하게 자라는 거목을 본 산사람이다. 함석헌은 한의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는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다. 김재준은 아오지탄광 인근의 궁진 벽촌에서 어렵게 자랐고, 유학시절 내내 노동을 하며 고학을 했다. 함석헌은 하얀 두루마기 힌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그렇게 입으려면 뒷바라지 해줄 분이 있어야한다. 김재준은 그런 뒷바라지를 받을 처지가 못됐다.
개신교의 조상인 루터와 캘빈가운데 함석헌이 영원자 앞에서 단독자로 자기를 들여다보며 몸부림쳤던 루터와 가깝다면, 김재준은 매음굴과 착취가 넘치는 곳을 사람다운 도시로 만들려는, 사회윤리적 실천에 관심이 강했던 캘빈에 가깝다. 함석헌은 세상과 기독교는 짝짜꿍을 할수 없다고 보았다. 김재준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역사와 대지에 뿌려진 이상, 역사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원하는 진리와 공의로 바꿔가는 역사 변혁설에 더 관심을 둬 교단과 대학에 관심을 뒀다. 함석헌도 얼마든지 대학도 교단도 세울 수 있었지만, 그런데는 관심이 없이 순수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끊임없는 비판정신을 잃지않았지만, 김재준이 수필가라면 함석헌은 시인이었다.”
김경재 목사의 서울 강북구 수유동 자택 거실. 왼쪽 사진이 함석헌이고, 오른쪽은 한신대 졸업식 때 스승 김재준과 함께한 사진이다. 사진 조현 기자
-함석헌은 3·1운동의 기독교지도자인 남강 이승훈이 평안도 정주에 설립하고 조만식과 유영모 등이 가르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역사교사를 하며 혼을 길렀다. 김재준은 유학자에서 목사가 되어 명동학교를 설립한 북만주 독립운동의 지도자 규암 김약연 (1868~1942)이 이사장을 한 은진중학교에서 교사를 하며, 문익환 문동환 형제와 윤동주. 안병무, 강원룡 등을 길러냈다. 오산학교와 명동·은진중학교의 의미는
“한국의 교육사와 종교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거점이다. 함석헌과 김재준은 큰눈으로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교육자였다. 진정한 교육자가 말이나 글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실천으로 보여줄 때 사자새끼들이 길러진다. 함석헌이 남강의 지도를 받던 것을 회고한 것을 보면 눈물 난다. 스승을 기리는 이로 함석헌만한 이를 본 적이 없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분이 지인들이 마련해준 (서울) 원효로에 있는 집한채를 남강문화재단에 기증하고 자기는 쌍문동 아들집으로 들어갈 정도로 스승에 대한 존경이 눈물겨웠다.
북간도의 은진중학교는 캐나다연합선교회가 세운 미션스쿨이었다. 평양에 상주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달리 후진국을 얏보고 후원금으로 영향력을 미치려하지않았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조선민족을 동역자로 여기고 육성시키려했다. 그런 캐나다연합교회는 훗날 김재준이 장로교단에서 파문을 당하자 한국의 조용한 선비를 도와야한다며 10만불의 후원금을 보내 한신대를 짓게 도와주었다.
함석헌과 김재준 모두 일제시대 때부터 선교사들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복음적 진리를 증언하고, 책임적인 선교를 해야한다고 한데서 상통했다.”
-함석헌 전기를 보면, 함석헌이 1960년대 박정희 군부독재에 맞서 전면에 나서게 된것은 독일에서 안병무 교수의 적극적인 독려와 <사상계> 장준하 등이 시민회관에서 함석헌의 강연회 등을 마련한 것이 상당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김재준도 학자였는데 어떻게 민주화운동 지도자가 되었나.
“두분을 연결시키고 뗄레야뗄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 1960,70년대 민주화운동의 쌍두마차로 내세운 것은 광복군 출신 장준하와 민중신학의 태두 안병무와 문익환 등 한신대에서 의기투합한 세명이다. 이 셋은 김재준과 함석헌을 지극한 스승으로 모셨다.
세명은 나이가 비슷했다. 장준하는 <돌베개>에 나온대로 일제때 광복군을 하느라 대학을 다니지못했다. 문익환이 대학 진학을 권유하며, 이왕 갈바에야 김재준 같은 스승다운 스승이 있는 곳에 다니라고 해서 장준하가 해방후 한신대에 적을 두었다. 문익환은 김약연과 문재린의 영향으로 자주독립사상은 지녔지만 순수한 구약학자로서 가톨릭과 개신교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한 성서번역실장을 맡은 뛰어난 구약학자였다. 그러다 친구 장준하가 유신독재때 의문사 당하니, 장준하를 대신해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함석헌과 안병무가 가르친 중앙신학교에도 그 스승들을 중심으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함석헌을 사상계에 데뷔시켜 글을 쓰게 한 이가 장준하다.김재준도 세 제자가 없었다면 군사정권에 의해 60세에 쫓겨난 이후 쌍문동 국민주택에서 글이나 쓰고 한을 품으며 일생을 마쳤을지 모른다.
장준하와 안병무와 문익환은 이 사회를 앞으로 이끌어나가려면 함석헌과 김재준 같은 어른들을 모셔야한다고 여겨 두분을 만나게 했다. 두 분이 만나보니, 사람이 사람을 알아봤다. 둘 다 한시가 통하고, 깊은 세계를 아니, 하루아침에 백년지기가 되었다.
함석헌과 김재준은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고, 지성이 맑고, 역사를 꿰뚫어보는 안목이 투철했기에 장준하, 안병무, 문익환이 이들 스승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이들은 두 스승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그들이 스승을 모신 것에 비하면 우리는 개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함석헌이 1970년 창간한 월간지 <씨알의 소리> 초기 편집위원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에서 해직됐던 송건호 <한겨레>초대 사장, 법정스님, 김동길 연세대 교수, 안병무 한신대 교수, 김용준 고려대 교수 등이 참여했을 때 함께 했는데, 그 때 기억은
“당시는 함석헌의 3대제자로 김용준, 김동길, 안병무가 꼽혔는데 주로 연희동 김동길 교수댁에서 모였다. 그집 평양냉면맛이 일품이었다. 송건호의 말이 기억난다. 자기는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대한민국 모든 기자를 합친 것보다 무서운 글을 쓰는 함선생님을 존경하기에 이 자리에 왔다’고 했다. 법정스님은 종교는 다르지만 높은 차원에서는 서로 통한다는 것을 느꼈기에 함께 했을 것이다. 노동계를 대표한 계훈제도 고무신 신고 끝까지 함석헌 곁을 지켰다. 함석헌의 말년엔 초기에 함께 했던 이들도 길이 달라지거나 떠나서 외로웠다. 함석헌의 거처도 원효로에서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 아들집에 있을 때 <씨알의소리> 발행 책임을 김용준 교수가 맡았던 1년간 박선균 목사와 박영자 간사와 나 넷이서 만들었는데, 쌍문동 어북쟁반집에서 편집회의를 했다. 함석헌을 모시고 오순도순 지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예전에 함석헌의 씨알사상과 고난철학을 언급하며, ‘예수 믿으면 부자되고 건강해지고 천국까지 가는 축복을 얻고 고난은 면죄해준다는 것은 가짜고, 종교는 고난을 얼렁뚱땅 넘어가자는 게 아니라, 제대로 돌파하는 힘과 지혜를 얻자는 것이고, 약자들의 고난을 외면하고 자기 희생이 없는 종교는 사회악이 될뿐’이라고 했는데, 함석헌의 씨알사상과 고난철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1월1일 세배하러 아들을 데리고 세배를 가자 말년의 함석헌이 ‘오르십시오, 오르십시오. 높이 높이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어려서 유교적 가풍에서 자라서 어른들 앞에서 잘 여쭤보지도 못해 말뜻을 묻지도 못하고 지나치고 말았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풍진 세상에 집착하거나 성공 실패에 연연하지 말고, 정신적으로 초연해서, 높이높이 살라’는 의미였던듯하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생(삶) 즉 고’라고 봤다.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기계면 모를까. 인간생명은 고가 있으니 이를 제1명제를 받아들이라고 했다. 함석헌이 고난 찬미주의자도 아니고, 비관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나 고난에 져버리면 패배자가 되니, 고난과 겨룬 것이다. 함석헌은 개인뿐 아니라 역사도 고난이 인간을 정화하고 승화시킨다고 보았다. 관념이 아니라 일제와 한국전쟁, 독재를 거치며 체험적으로 나온 것이다. 외부의 핍박이나 질병, 전쟁같은 풀무불에서 이겨 나오면 제련된 금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만해도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가 모두 강이 흐르고 조건이 좋아서 문명이 생겼다고 했지만, 역사학자 토인비가 현지 조사를 해보니, 홍수도 많고 재앙이 많았는데도 이런 고난과 도전을 이겨낸 곳에서 새 문명이 싹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도전과 응전의 법칙이다. 함석헌도 일제 시대, 평양에서 주도적으로 3·1만세운동을 하고 이후 일제의 만행을 경험하면서 고난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고난에 짓눌리지않고 이겨 나오는 곳에 예술과 철학, 사상의 꽃이 피는 것이라면서 고난을 회피하는 싸구려에 혹하지 말도록 했다. 그 말이 대학 때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난을 면죄 받기 위해 교회 다닌다는 고정관념을 확 뒤집어 놓았다. 불교, 유교, 노장사상, 소크라테스 등 성인들 가운데서도 지독한 고난의 극치를 경험한 분이 바로 예수다. 그 점이 다른 성인들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예수교를 알려면 고난의 신비를 알아야 한다. 이를 모르면, 예수교를 모르고, 고난을 회피하고 면죄해준다는 축복이나 받으려드는 싸구려 신앙인이 되고만다. 최종 목표가 내 마음 편하게 된다는 수준과 기독교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함석헌이나 김재준의 고난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제 개인을 놓고 볼 때도 10남매중 하나로 태어나 고생을 거치지않았더라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도 없는 시골의 조그만 개척교회 전도사로 갔다. 1년이 지났을 때 가난한 행상을 하던 신자의 아이가 동네에서 놀다가 맨홀에 빠져 죽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 부모에에 위로가 못됐다. 아이를 묻어야하는데 부모는 아이를 내어주지않았다. 새벽이 되어 ‘예수도 죽었다’는 이야기에 부모는 정신이 번쩍 든듯 아이를 내어주었다. 전남 고흥 소록도에 온 한센씨병 환자들은 자신을 버린 세상과 사회와 가족을 원망하며 한서린 울부짖음을 그치지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소록도 대강당에 걸린 예수의 십자고상을 보는 순간 그 한맺힌 눈물을 그친다고 한다. 고난이 그들의 고난을 치유하는 것이다.”
-함석헌은 어려서 마을에서 숙부 함일형 목사가 설립한 교회에 다니며, 근본주의 기독교신앙으로 출발해 일본 유학중 우치무라간조의 무교회주의에 심취했다가 해방전 서대문형무소에서 노자 장자 불경 등을 보고, 모든 경전의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는 다원주의가 됐다가, 기독교로부터 이단으로 배타당하고 고립되면서, 결국 퀘이커로 생을 마감했다. 하나의 교리주의에 매몰되지않고 끊임없이 참을 찾는 거의 열린 구도와 열정과 용기를 보인 그는 불교의 참선이 개인적인 반면 퀘이커들이 함께 앉아 묵상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집단적, 전체적이라고 말하며 신앙의 목적을 개인구원이 아닌 전체구원이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신앙적으로 깊은 요소다. 핵심을 정리하면 퀘이커가 함석헌의 신앙순례지 마지막이다. 그것이 순례의 끝이라고는 보지않지만. 거기까지 왔다. 퀘이커가 영국의 조지 폭스로부터 내면의 빛의 체험해 일체 우상으로부터 자유하자는 영혼의 자유의 정신이다. 우지무라 간조 무교회주의까지는 성서에 닺을 내렸다. 성직의 직제로부터는 자유하지만. 성서가 위대한 계시적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도 하나님 자체일 수는 없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으니, 또한번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나도 퀘이커 모임에도 몇번 가보고 미국의 퀘이커공동체 펜들힐에도 있어봤는데, 퀘이커 명상과 참선이 비슷하고 통하는 점이 있고, 그들도 이를 인정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묘한 차이가 있다. 불교도 대승불교에 이르면 개인 해탈이 전부가 아니다. 만인이 함께 타고가는 대승을 추구한다. 전체를 살리지못하면 가짜라는 것이다. 그 점에선 기독교와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교는 제법무아설이 핵심이어서 나라고 하는 아상을 없애기 위해서 총력을 다하고, 나의 해탈을 먼저 중시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함석헌은 개인 구원과 전체구원을 선후로 보지않고, 동전의 양면이자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다. 불교에서 하나의 티끌속에 우주가 들어있다고 하지만, 그건 이론이고, 삶으로 그걸 보여줘야 한다. 그럼 한국사회에서도 낙오돼 굶주린 거지와 실업자들, 살인자들을 나의 일부, 또는 내 책임이라고 인정하느냐. 함석헌은 그래보려고 애쓴 사람이다. 강간하고, 도둑질하는 이들의 잘못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한 사람이다. 양심적으로 살았다는 것만으로 진정한 종교인이 될 수는 없다. 나만 잘 산다고 모두를 살릴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주체성과 책임성을 지키면서 전체구원을 말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함석헌은 어떤 불교 고승보다 대승적이었다고 본다.”
스승 장공 김재준이 김경재 목사에게 써준 <논어> 글귀. ‘범애중이친인’(凡愛衆而親仁·공평하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덕 있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라). 김 목사의 안방에 걸려 있다. 사진 조현 기자
-함석헌은 일제 때도, 해방 뒤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도, 남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치하에서까지 항거해 8번이나 감옥을 가면서 의기의 삶을 살았지만 1960년초 20대 여성과 스캔들 때문에 스승 유영모 등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고, 고립되었는데. 이를 어떻게 보는가
“회피하고싶지도않고 길게 말하고 싶지않다. 그 관계는 권위를 이용한 강요나 겁탈이 아니었다고 본다. 여성인권을 무시하며 못된 짓을 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그로인해 지옥 밑바닥에 떨어진 경험을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함석헌을 성자나 천사나 신이나 종교교주로 섬기지않고, 똑같은 연약한 인간으로 모실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오히려 편하고 좋았다. 기독교도 예수의 인간과 신성으로 끊임없는 논쟁이 됐는데, 함석헌은 인간이었다, 함석헌이라는 호가 하느님을 믿는자라는 뜻이다. 한국 사상사속에서 그가 민초들과 함께 이룬 업적이나 공적에 비하면 태산의 한줌 흙에 불과한데, 이를 통해 함석헌을 죽일 놈을 만들었다.당시 독재권력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함석헌과 장준하였다. 그 일을 세상에 광고한게 중앙정보부의 개입때문인지는 알수 없다. 그로 인해 그 분을 존경하는 나의 마음엔 티끌만큼도 금이 가지 않았다.”
-과거 쌀을 훔친적이 있다고 고백하며, 그런 도둑질 경험이 있어서서 도둑질을 정죄할 수 없다고 했는데.
“간디의 전집을 읽고, 간디가 자랄 때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금화를 도둑한 것을 회개한것을보고 회개한 적이 있다. 광주에서 전도사를 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모래내 단칸방에서 신접사림을 차리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첫아이를 낳았는데, 먹을 식량이 동나고, 간장 한병을 사 먹을 돈이 없었다. 그 때 충정로에 있는 처형댁에 가서 처조카들을 과외공부시키며 고학을 했는데, 그집 창고엔 쌀이 썩어나고, 쥐들이 살이 올라있었다. 단칸방에서 끼니를 못잇는 아내와 배고파 우는 아이를 생각하니 속이 떨리고 아찔했다. 처형 집에서 쌀 한자루를 훔쳐 가지고 나왔다. 배고파 쌀을 훔쳐보니,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의 처지가 실감이 났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해서는 안될 짓이었지만, 그 뒤로는 생존의 극한 상황에 몰려서 한 범죄자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었다. 그 고난이 빈자들과 낙오자들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한세상 같이 사는데, 한번 시험을 잘봐 판검사되고, 의사되고, 교수되고, 공무원 됐다고 자신에게만 세상을 누릴 권리가 당연하고, 동료 인간들을 나몰라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1960~70년대 재야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쌍두마차였던 함석헌(왼쪽에서 네번째)와 장공 김재준(가운데)가 법정 스님, 한승헌변호사(오른쪽에서 두번째, 김지하(맨오른쪽)등과 함께 하고 있다.
-김재준은 동양 고전은 물론이고 한시까지 외워서 칠판에 한문 원문으로 줄줄 써내려갈 정도로 한문실력이 탁월했다. 함석헌은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교회에 나가고, 그 시대에도 서당에 안다니고 보통학교에 가서 신식교육을 받아 어려서 동양고전을 익히지못하고, 해방 전 감옥에 가서 동양고전과 불경 등을 접한 반면 김재준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부친으로부터 다섯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아홉살 될 때 벌써, 통감과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통독했다. 회령군청과 금융조합에 근무하다가 서울로 유학해 승동교회에서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크리스찬이 된 김재준은 일본으로 유학해 야오야마학원에서 진보신학을 배우고, 다시 미국에 유학해서는 미국에서도 보수신학의 총본산인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해 근본주의 신학의 총사령관인 그레셤 매천 교수의 강의를 주로 들으며 보수와 진보 신학을 두루 섭렵하고 돌아와 한국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성서비평학을 도입했다가 근본주의신학자들로부터 정죄를 당하고 쫓겨나는 고난을 당했는데, 성서비평의 의미는
“성경도 필사와 전승과정 편집 과정에서 여러 제약과 과정이 있으니 검불을 걷어내고 알짬을 찾아내자는 경전연구의 방법이 성서비평이다 종교개혁과 계몽시대라는 시대에 맞서면서 발전해온 것이다. 루터가 로마 교황권의 제도적 직제는 허물었지만, 마지막 은신처로 성서를 강조했다. 루터의 의도는 그런것이 아니었는데도, 프로테스텐트가 얻은 것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성경 숭배주의에 빠져버렸다. 성경을 문자적으로까지 신봉하지않으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변질 되어버리면서 기독교라는 위대한 자유와 영혼의 공의와 진리, 그리고 생명이 활활 타오르는 종교가 책에 갇혀 버렸다. 김재준은 성서 비평학을 가르치며 성서를 비판하거나, 성서의 권위를 손상시키려한 것이 아니라 성서를 살려내기 위해서 비평하고 가르친다고 했다.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고소당할 때 그런 양심선언을 했다. 참된 복음이 삶은 사라지고 책종교가 되고 책 우상숭배에 빠져 반예수교가 되고 만 것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당시에도 타협주의자들은 많았다. 어차피 교권이란게 그렇고 그런 것이니 타협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일제시대 고향에서 군서기를 하던 김재준을 깨워 신학을 하게한 송창근 목사가 납북되지않았다면 그가 김재준을 영국 같은데 몇년 보내 피신시켰다면 장로교가 분리되지않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김재준이 타협할 줄 몰라서 안한게 아니다. 복음이 생명의 종교로 살아나느냐. 경전 우상숭배의 종교로 떨어지느냐,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고 생각해서 ‘죽이려면 죽여라. 다시 부활하리라’고 나선 것이고, 결국 교권주의자들이 김재준을 파문했다. 캐나다연합교회가 김재준의 진의를 알기에 김재준을 도와 살려내지않았다면, 이 나라가 어찌 됐을까. 김재준이 키운 장준하, 문익환, 안병무가 없었을 것이고, 김재준과 함석헌과 함께한 그런 의인들이 강고한 독재의 시대에도 독재에 맞서지않았다면, 민초를 개돼지쯤으로 여기는 군사독재의 시대에 살 것이고, 한국도 미얀마와 다름이 없이 지금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1960~70년대 재야민주화운동의 쌍두마차였던 장공 김재준(가운데)와 함석헌(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계훈제(맨왼쪽), 장준하(왼쪽에서 두번째) 이병린(맨오른쪽)과 함께 하고 있다.
-성서근본주의자들이 근본주의적 교리만 강조하는 것과 달리 김재준은 ‘기독교는 예수를 닮으려는 종교’라고 했는데, 근본주의 신앙과 현재 한국교회의 기복과 돈중심, 세습, 타락, 부정부패 등과 연관이 있는가.
“연관이 있다. 성경을 절대화하는 성경 무오류설에서 5가지 근본주의 교리가 나왔고, 5가지 교리만 지키면 다른 모든 것은 면죄된다는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 자기 위로, 자기 책임 회피로 이어졌다. 무책임을 은폐의 도구가 바로 근본주의 교리다. 책임을 지지않으려니, 새로운 진리와 사조, 사상에 겸손하게 문을 열고, 새로운 공기를 마실려는 것을 두려워해는 자폐증상을 보인다. 자신이 없으니 교리로서 자신은 은폐하려는 것이다. 지구촌 전체로보면 근본주의자들은 한국와 미국 유럽 일부에만 남아있고, 한국 보수 교단 중에서도 극히 일부다.”
-김재준은 북간도 명동에서 은진중학교 교사를 할 때도 끼니를 걱정해야할 처지이면서도 월급 70환중 최소한의 금액인 22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데 썼으며, 평생 다음과 같은 ‘10가지 생활 좌우명’을 붙여놓고 실천했다고 하는데.
하나,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둘, 대인 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셋,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넷,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다섯,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여섯, 평생 학도로서 지낸다. 일곱,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여덟, 사건 처리에는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아홉, 산하(山河)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열,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통상 청장년시절 인격이 형성될때 자기를 돌아보고 자나깨나 자기를 되돌아보려고 각오를 책상앞에 붙여놓기 나름인데, 나이 60,70,80이 넘으면서도 좌우명을 붙여놓고,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 자신을 봐도 그렇게 안되는데 김재준은 8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기 좌우명을 책상 앞에 놓고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스스로 절제하는 삶의 자세가 다 존경스럽지만, 가장 감동은 ‘예와 아니오를 똑똑히 하라. 그 다음이 중요하다. ‘하느님에게 맡겨라’라는 대목이다. 어떤 것에도 찬반에 일리가 있고, 한쪽으로 가면 이런 부작용과 반발과 혼란이 있다. 그래서 어설픈 중도와 회색지대로 피신하는 이들이 많다. 김재준은 ‘예스면 예스, 노우면 노우’하고, ‘그 다음은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다’고 했다. 김재준의 말씀을 다 따르며 살지 못했지만. 이 만큼이나마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그 분의 영향이다. 이웃 종교도 배려하고 존중해야한다는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 여전히 이상한 눈으로 보는 크리스천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김재준이 생각 나 크리스찬으로서 해야할 것과 해서는 안될 짓을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더 이상 걱정하지않는다.”
-김재준은 교회를 교회건물로 한정하지 않고,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천국운동이란 것은 사후의 천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도 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천당 지옥 지상 3층구조는 바티칸의 성당 벽화에도 나와있지만, 그것은 옛날 사람들, 즉 고대의 세계관이 그랬던 것이다. 이제는 허불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는 시대다. 과거의 천국관은 죽어서 우리 영혼들이 하늘 위의 천당으로 올라가 영원한 나라에 산다는 것이니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과객의 여관방쯤으로 별로 중요시하지않았다. 그렇게 여기면 현세와 역사에 대한 책임감이 나올 수 없다. 구원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체를 돌보는 것이다. 죽어서 가는 하늘만이 아니라 땅위에서 정의 평의 번성 평화가 햇빛처럼 내리 쬐는 곳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면 왜 독생자를 지상에 보냈겠는가. 김재준은 역사 현실을 천국의 한부분이라고 확대해석했는데, 교권주의자들은 그걸 이해 못해서 이단으로 내쳤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들이라면 어느 쪽의 해석이 옳은지 알수 있다.”
-서남동 안병무의 민중신학도 함석헌의 씨알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그 탄생 동기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의 아들로서 민중신학이 출현했다고 본다. 애초 유영모가 <대학>의 ‘친민’(親民)이라는 말을 씨알로 번역해 씨알이라는 말이 세상에 나왔는데, 그 씨알에 혼을 불어놓어 씨알이 역사의 주체라고 보고, 한국역사를 씨알의 역사로 꿰뚫어 해석한 사람은 함석헌이다. 사회 계층구조의 바닥으로만 씨알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제일 하층 계층 중에서도 예수를 잡아 죽여라고 부화뇌동하는 민중들이 얼마든지 있을수 있다. 그래서 무리보다는 개체들 하나하나의 개인속에 들어있는 우주성과 영성을 발전시켜 움을 트게 전심전력을 다하는 이가 함석헌이다.
민중신학이 태동한 1960년대 중반은 군부독재가 인간을 옴쌀달싹 못하게 한 때다. 특별히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병무나 서남동도 관념적으로는 위민사상을 배웠지만, 전태일이 분신하기까지 목사와 신학자는 도무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뼈아픈 자성을 하게 된다. 이들이 그 충격 속에서 성경을 다시 보면서, 예수의 죽음을 후대에 전해준 것이 엘리트나 지성인이 아닌 갈릴리의 힘없는 이들과 여성들이었다는 것에 새롭게 눈을 떴다. 이름없는 이들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승해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서에 새롭게 눈을 뜬 것이다. 서구신학이 2천년간 성서해석학에서 정치 경제적 시각은 커트해버리고, 문헌적이고 훈고학적인 연구에만 매진해왔는데, 성서의 문맥을 제대로 보려면 정치적 바닥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조명을 비춰볼 때만 제대로 보인다고 하니, 서양인들이 깜짝 놀랐다. 자기들이 모르고 잊어버렸던 것을 후진국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니, 독일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을 높이 평가했다. 민중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거의 동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나타났다.”
김경재 목사가 자신의 대학 졸업식 날 장공 김재준이 손수 먹을 갈아 써준 한문 ‘산상수훈’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조현 기자
-한국 개신교는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만큼 부흥했던 평양에서 해방뒤 공산당에 의해 박해를 당해 목사들이 죽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고 월남한 이래, 미군정과 독재정권과 결탁해서 반공 멸공을 내세우며, 남북 화해를 가장 앞장서 막는 대표적인 집단이 되었고, 지금도 태극기부대의 선봉에 서있는데, 김목사님도 한국전쟁 때 군에 간 형이 전사한 아픔을 겪지않았나.
“맞다. 역사라는게 아이러니고 비극이다. 남한의 개신교의 반공지상주의, 극우 이데올로기의 발단은 일제다. 일제를 극복하는 방법에서 좌우가 갈등하기 시작했고, 해방후 3·8선이 그어지면서 소련과 미국이 냉전시대의 안전핀으로 한국을 이용했다. 자기들이 직접 싸우면 아프니, 베어링을 끼워놓은 것이 한반도다. 북한의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하려는 이들이 맑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훈련받아서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며 크리스찬들을 박해하고, 재산을 몰수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다. 북한의 기독교는 유럽에서 막스 레닌이 비판한, 프로레타리아를 착취한 브루주아가 아니라 이제 막 양심적 부를 위해 노력하는 건강한 이들이었다. 북에서도 사회주의 이념의 좋은 점을 처음엔 함석헌 김재준 한경직 여운형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종교 말살을 몸으로 체험한 이들이 남에 내려와 공산당과는 하늘 아래서 같이 못살겠다는 극단의 반공주의가 형성됐다. 그러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 미국의 자본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라는 자유이데올로기와 너무 밀착하고, 6.25를 거치면서, 미국의 크리스찬들의 구호품과 같은 물질적 혜택도 많이 받아 한국기독교는 외눈박이가 되어버렸다. 미국이라는 실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모습의 얼굴중에서 우리를 지켜준 선한 나라라는 숭미주의, 반공주의만이 자리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민족의 주체적인 화해를 거절하는데서 한발도 변화되지 못하는 것은 ‘날씨는 분별할줄 알면서 왜 때를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예수의 꾸중을 들을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용서와 화해를 끝내 거절하는 것은 기독교 십자가 정신과 정반대로 가는 짓이다.
오히려 자기 부모와 가족들이 북에서 핍박을 받았는데도 북과 화해를 이끌려 한 이들은 서광선, 문익환, 함석헌같은 진보적 기독교인들이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협의회(WCC)에서 칼바르트등 세계 지성들이 모여 ‘그리스도교란 종교는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와도 동일시 할 수 없다. 기독교는 세상의 특정 이데올로기와 동일시 할 수 없다. 둘을 동시에 보면서 장점을 취해, 지지도 하고, 받아들이지만, 동일시할 수 없다’고 한 그 선언. 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전쟁을 전후, 남북 양쪽이 민간인을 살육한 것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다시 되새기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일을 월남에 파병해서 이민족에게까지 저질렀다. 나는 한경직 목사를 존경하지만 부산에도 월남 파병을 축도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 정신은 생명의 값이 우주를 두고도 갚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사람의 목숨을 대신할 수는 없다. 전쟁은 합법적인 살인의 과정인데. 정직한 기독교의 신앙의 관점에서는 전쟁을 축복할 수는 없다.”
-10년 넘게 개신교 목사, 가톨릭 신부, 불교 스님, 원불교 교무, 종교학자와 함께 환희당포럼에서 한달에 한번씩 공부를 했는데,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다양한 종교인, 종교학자, 경제학자와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공부하다보니, 생각의 지평이 넓어졌다. 보는 지평이 넓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넓어지고 멀리 본다는 것이다. 이론으로만 막연히 짐작했던 생각들이 내 스스로가 지평이 넓어지면서 그러면 그렇지, 새가 공중으로 높이 날아가는 것 같다는 자유와 해방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 신앙이 더 좁아지는 것이 아니고, 더 뚜렷하게 보이고, 공통점과 차이점도 보이고, 학문적으로 틀린게 아니구나 실증해주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론을 다 떠나서 신부님 스님을 만나서 막걸리도 한잔씩 나누니, 벌거벗은 인간대 인간으로 만나는 친교의 자유가 느껴져 30년 근무하면서 동고동락한 동료교수들보다 인간적인 친근감이 느껴졌다.”
-몇년새 수술도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시지않았나. 늙어가고, 병이 들어가는 것. 또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인간도 하나의 생물체라서 생노병사하는 대자연의 법칙을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순리에 적응하려는 마음이 얼마전부터 자연스럽게 온다. 삶과 죽음이 대립적인 두세계에 대한 개념이 점차 없어지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생명의 존재방식이 느껴진다. 특히 80살이 넘어가니, 조그만 꽃과 비둘기 문양도 너무나 신기하게 다가온다. 구상시인의 시인 <말씀의 실상>에 ‘내 영혼의 문명의 백태가 벗겨지면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만유일체가 기적처럼 보인다. 어머니 아버지의 난자 정자가 결합한 뒤로, 내 장기 간 쓸개 허파가 어떻게 설계되느냐. 과학이 다 설명 안된다. 과학자가 생명의 신비에 대해 납득해주는 것은 궁금증의 100분의 1, 1천분의 1도 안된다. 죽음과 삶은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인, 더 큰 생명의 변화다. 성경적으로보면 로마서 11장 36절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란 구절대로 신비로운 동산에서 마음껏 놀다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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