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억류 당한 상태에서 9명이나 비명에 돌아갔는데, 거의 다 밀린 임금을 기다리고 있었던 국내의 임금체불 상황의 피해자들이었죠. 당국의 조치는? 사실상 과실치사죄를 범한 출입국 사무소 직원들이 받은 형량은 고작 10개월이었죠. 노무현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사과하지도 않았고 한명숙 국무총리는 그 면담 요청을 거부했죠. 출입국 관리소 외국인 억류 시설은 짐도 대체로 그런 수준이라고 전해집니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찬란한 인권의 현주소….
2007 여수, 갇힌 사람들 - 절단기로 문을 열자 시체가 나왔다
[더 내러티브]전현진 기자 입력 2022. 02. 28.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외국인보호소에서 불이 난 2007년 2월11일 화재 진화가 끝난 뒤 소방관들이 현장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1. 꽃도, 구름도 없었다
동 트기 3시간 전, 그믐을 향하는 달이 아직 동쪽에 가까울 때였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조용하고 어두운 깊은 새벽, 여수소방서 출동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현 출입국외국인사무소) 화재 발생.”
24시간 2교대로 근무하는 119구조대의 갑(甲)조 근무 날이었다. 조양현 팀장(현 전남소방본부 안전보건팀장)이 팀원 2명과 급히 구조대 차량에 올랐다. 투시 랜턴, 만능 도끼, 산소호홉기, 절단기…. 구조에 필요한 장비는 모두 차에 실려있었다. 소방차도 뒤따랐다. 설을 1주일 앞둔 2007년 2월11일 일요일, 새벽 4시 4분이었다.
여수소방서가 있는 시청 앞 로터리에서 출입국사무소까지는 평일 낮이라면 차로 10분쯤 걸린다. 새벽의 도로는 한산했다. 신고 5분이 채 안 돼 출입국사무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700m쯤 떨어진 건물에선 별 다른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다. 소방 은어로 꽃은 불꽃을, 구름은 연기를 뜻한다. 조 팀장은 “우리는 농연(짙은 연기), 출화(밖으로 보이는 불꽃)라는 말을 쓴다”고 했다. 대형 화재가 나면 먼 곳에서도 연기나 불길이 보이기 마련이다. 경험 많은 대원들은 현장 도착 전 차 안에서부터 주변 상황을 살핀다. 구조대 차량이 출입국사무소 정문에 도착한 시각이 4시10분.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구조대 차량이 출입국사무소 입구에 도착하자 직원 한명이 달려왔다.
“3층에 사람이 있어요.”
그는 플라스틱판에 달린 열쇠 꾸러미를 건넸다. 겁에 질린 표정과 말투. 그것이 첫 번째 화재 징후였다.
화재 진압 대원들에 앞서 구조대인 조 팀장이 팀원들과 건물 안으로 먼저 뛰어들어갔다. 건물 구조가 이상했다. 출입국사무소 중앙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지만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복도를 급히 둘러보니 사무실 한 곳의 문이 열려있었다.
“경비과 사무실이었던 것 같은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15년 전 여수 출입국사무소 화재 참사 당시 가장 먼저 현장에 진입한 당시 여수소방서 119구조대 조양현 팀장(전남소방본부 안전보건팀장)이 지난 9일 현장 구조를 그려가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조 팀장은 1988년 12월 입사한 34년차 베테랑이다. 중앙소방학교에서 인명구조 교육을 2기로 수료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2014년 세월호 참사에도 투입됐다. 몸집은 크지 않지만 다부진 체격의 조 팀장은 15년 전 출입국사무소 건물의 구조도를 종이에 쓱쓱 그릴 만큼 기억이 생생했다.
“두꺼운 구조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3층의 출입문 손잡이를 잡자 마자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조 팀장은 두 번째 징후를 느꼈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검은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검은 연기는 앞을 비춰주는 고성능 투시 랜턴도 덮었다. 바로 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조 팀장의 구조 본능이 먼저 위험을 감지했다. 열기를 피해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낮은 자세로 팔을 뻗었다. 손으로 벽을 스치 듯 만지며 경로를 확인해 앞으로 나아갔다. 장갑 끝에 미끄럽고 끈적한 물질이 만져졌다. 얼굴을 가린 산소마스크에도 검은 물질이 묻어났다. ‘타르’의 일종인 유독물질이다. 유독가스를 내뿜는 검은 연기는 좋지 않은 신호다. 검은 연기는 화염보다 쉽게 사람을 죽인다.
3층엔 기괴한 고함소리가 메아리쳤다. 수십명의 괴성이 뒤섞여 울렸다. 살려달라. 열어달라. 출입국사무소에 수용 중인 외국인들의 목소리였다.
2년 전 조 팀장은 출입국사무소에 점검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외국인들을 강제추방하기 전 가둬두는 외국인보호소가 출입국사무소 안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우연한 계기로 외국인보호소의 존재를 알지 못 했다면, 출입국사무소 안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갇혀 있을 거란 걸 화재 현장에 진입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됐을 것이다.
화재 신고가 접수됐을 때나 현장에 도착해 열쇠꾸러미를 건넨 직원을 마주쳤을 때도 ‘외국인보호소’ 얘기는 없었다. 조 팀장은 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다른 대원들에게 무전을 남겨둔 터였다.
“출입국사무소에 외국인 수용소가 있으니 숙지하기 바람.”
낮은 자세로 복도의 벽을 짚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던 조 팀장은 열려 있던 쇠창살 문 하나를 발견해 안으로 들어갔다. 외국인들이 갇혀있는 보호소였다.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방향을 가늠했다. 철창 안에 갇힌 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외침은 유독가스를 더 많이 마시게 한다. 시간이 없었다. 철창으로 들어가는 문은 자물쇠 두 개로 잠겨있었다.
네모난 형태의 뭉치 자물쇠와 자전거나 오토바이 바퀴에 사용하는 ‘와이어 자물쇠’. 와이어 자물쇠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일정 간격 이상 문이 열리지 않도록 한다. 만일의 사태에도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한 이중 장치다.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경비계 안에 숨어있는 것도, 복잡한 철문이 여러겹 이어진 것도 도주 방지를 위해 건물이 설계되고 운영됐다는 증거다.
조 팀장은 가지고 있던 절단기로 자물쇠를 빠르게 잘라냈다.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그만 열쇠를 손으로 집어 자물쇠를 맞춰 열기 힘들다.
“절단기 더 필요하다.” 조 팀장은 무전을 쳤다.
화재 진압 대원들이 곧 뒤따라 들어왔다. 발화 지점을 찾아 불을 끄고, 움직일 수 있는 생존자들을 찾았다. 움직일 수 있는 생존자들을 찾아 서로 손이나 허리를 잡고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안내했다. 불은 끄는 일보다 자물쇠를 잘라 문을 여는 일이 더 오래 걸렸다. 애초에 불길이 센 건 아니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보호실 안에 갇힌 외국인들을 구출해 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절단기로 보호실 문을 열기 시작하자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이 나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보호실은 모두 6개였다. 불이 처음 난 곳은 304호. 거실 바닥에 깔린 우레탄 매트에 불이 붙어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천장을 타고 이동한 연기는 끝방으로 모였다. 304호와 306호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불이 난 사실을 알고 잠에서 깬 수용자들이 쇠창살을 붙잡고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다. 살려달라고 애원한 이들은 대부분 연기를 마시고 죽었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 보호실 거실의 쇠창살 앞에서 발견됐다. 조 팀장이 인명 수색을 위해 보호실 안쪽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 생존자들이 나왔다. 그들은 바닥과 변기의 배수구에 코와 입을 대고 있었다.
조 팀장이 3층에 진입해 처음 찾아 문을 연 곳은 화재가 난 보호실 맞은 편 복도였다. 조 팀장이 먼저 도착한 통로 쪽에선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화재가 난 쪽 복도로 처음 진입해 이미 쓰러진 이들 중 부상자와 사망자를 가려가며 생존자를 구출했다면 반대 쪽 복도에도 희생자들이 나왔을지 모른다.
2007년 2월12일자 경향신문 3면에 보도된 화재 당시 여수 출입국사무소를 그린 상황도. 외국인보호소는 3층 건물 내부에 이중구조로 자리잡았다. 중상자 중 한 명이 이후 숨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화재 진압이 모두 마무리 된 건 오전 4시 35분이다. 화재 경보기는 끝내 울리지 않았다. 스프링클러는 없었다. 사망자들을 수습하고 연기가 가라앉은 보호실 내부가 그제서야 분명히 보였다. 외부에서 화재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고, 실내가 검은 연기로 가득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보호소는 3층 가운데 이중구조로 돼 있었다. 이중의 벽으로 둘러쌓인 보호소 내부는 환기가 되지 않는다. 외부로 불길이나 연기가 빠져나가기 어렵다. 검은 연기로 가득했던 것도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해 불이 거세지지 않고 불완전연소를 일으켜서다.
다른 층 보호실에 있던 외국인들은 큰 부상 없이 대피했다. 당시 보호소엔 55명이 수용돼 있었다. 3층에서만 사상자가 나왔다. 사망자는 9명, 병원에 입원된 중상자는 18명이었다. 대부분이 검은 유독 연기에 숨이 막혀 죽었다. 화재 발생 보름 뒤 중상자 1명이 사망했다.
조 팀장은 구조 작업을 마친 뒤 팀원들과 곧장 경찰서로 가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이후 며칠 간은 퇴근도 하지 못했다. 대형 화재 사고가 있은 뒤에는 으레 있는 일이다. 수많은 사람을 구했지만, 죽은 이도 많았다.
화재 발생 다음 날인 2007년 2월12일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외국인보호소 건물. 3층 창문 외부에 약간 그을린 자국이 남은 것 외에는 27명의 사상자를 낸 화재 사고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지윤 기자
■#2. 예상된 재앙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기 전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여수 오동도에 있었다. 노동자들과 이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여수에 온 정병진 목사(여수솔샘교회)가 처음 오동도에 있던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은 게 2004년 무렵이다. 그는 이전까지 출입국관리사무소도, 그 안에 있던 외국인들을 구금하는 ‘보호소’라는 존재도 몰랐다.
그는 이주인권 운동가인 샤말타파(당시 32세)를 만나기 위해 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네팔에서 온 샤말타파는 이주노동자 인권 향상을 위해 농성을 벌이다 2004년 2월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붙잡혔다. 그는 곧 여수로 이송됐고, 수감된 뒤 단식농성을 벌였다.
정 목사는 샤말타파의 소식을 듣고 출입국사무소를 처음 방문했다. 당시 외국인보호소는 조립식 가건물이었다. 과거 밀항자들을 수감하기 위한 곳이라고 했다. 한눈에 봐도 열악한 시설이었다. 투명 플라스틱 판을 사이에 두고 처음 면회했다. 출입국사무소 관계자 2명이 샤말타파와 정 목사의 뒤에 앉아 그들의 말을 각각 받아적었다.
샤말타파는 정 목사와 만나 이주노동자 인권 관련 이야기를 하면서 외국인보호소의 열악한 상황을 함께 알렸다. 한국어에 능통했던 샤말타파는 자신이 곧 추방될 것을 직감했는지 정 목사에게 부탁했다.
“보호소에 있는 이들을 보살펴 주세요.”
예감은 적중했다. 얼마 뒤 그는 강제 추방됐다.
정 목사는 갑작스런 추방 소식을 듣고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샤말타파의 부탁을 떠올렸다. 그는‘종교활동을 보장한다’는 출입국관리소 관련 규정을 찾아 외국인보호소에서 예배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2004월 4월13일 첫 예배가 열렸다. 처음엔 15명이 왔고 이후에 20~30명이 참석했다. 예배 때는 곤봉을 휴대한 공익근무요원들이 사방에서 감시했다. 운동시간도 없이 비좁은 보호실에서 갇혀 지낸 외국인들에게 종교활동은 숨통이 트이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 해 6월1일 정 목사는 검은 표지로 된 수첩에 이주노동자 관리 문제점’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출입국관리소 직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그가 할 이야기들을 적어둔 것이다.
‘죄수라는 생각을 갖지 말았으면’
‘교도관의 반말행위←서로조심, 명찰 부착’ ‘
‘수갑을 채워 병원에 가는 일’
‘햇볕은 쪼일 수 있는 기회(운동시간)’
‘감시카메라 ←사생활 침해’
지난 9일 만난 정병진 목사(여수솔샘교회)가 화재 사고가 나기 전 여수 출입국사무소의 외국인보호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써둔 메모들을 보여주고 있다. 전현진 기자
어렵게 열린 간담회에서 호소했지만 직원들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상급자를 따라 그냥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질문도,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다가 가버렸다.
외국인보호소는 출입국관리법을 근거로 운영된다. 화재 시점에 적용된 구 출입국관리법(2005년 9월 시행 2008년 5월 개정)은 강제퇴거 대상으로 의심할 만한 외국인이 도주하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는 경우 ‘보호’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 법 제63조에는 강제퇴거명령을 받은 자를 즉시 대한민국 밖으로 송환할 수 없는 경우 송환이 가능할 때까지 외국인보호소 등에 보호할 수 있다고 해두었다. 기간 제한은 없다. 이런 조항들은 지금도 남아있거나 더 강화됐다.
2005년 새로 지어진 출입국관리사무소에는 종교실이 따로 마련됐다. 그나마 나아진 조치지만 첫 예배 때 보호소 외국인들은 수갑을 차고 줄지어 끌려왔다. 정 목사 항의에 출입국사무소측은 “이동구간이 있고 직원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럼 우리가 보호실 안으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지나 문안으로 들어가면 감시실과 301~306호 보호실이 나온다. 보호실은 거실과 침실, 화장실로 나뉘어졌다. 한 방에 10명 내외로 머문다. 바닥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냉기를 막기 위해 얇은 우레탄 매트가 깔렸다. 거실에 모여 앉아 예배를 드렸다. 2년 뒤 이 매트가 불에 타고, 유독가스를 내뿜었다.
2005년 5월 미국인 피츠칼 레리드는 한 언론에 편지를 보냈다. 그는 한 달 전인 4월, 여수 출입국사무소에 갇혀있었다. 편지에는 자살을 시도한 이가 있었다는 것과 러시아인 3명이 새벽에 불을 냈고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다행히 일찍 발견돼 진화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10명이 사망한 화재 사건 발생 22개월 전이었다.
미국 뉴욕에서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레리드는 지금도 그때 일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지난 8일 카카오톡을 통해 레리드는 “당시 말린 녹차잎을 말아 담배 대용으로 피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쇠 젓가락을 전기코드에 연결한 뒤 스파크를 일으켜 불을 붙였다”며 “누구도 손쉽게 불을 붙일 수 있었고 화재에는 취약했다. 직원들이 부족했고 충분히 관리할 수 없었다. 누군가 해를 입히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었고, 그런 재앙은 실제로 벌어졌다”고 했다.
■#3. 방화범의 단독 범행?
2005년 9월 한국에 밀입국해 공사현장을 돌며 일하던 김광석씨(사망 당시 39세·재중동포)는 2007년 1월9일 여수 출입국사무소에 수용된 직후부터 거친 태도를 보였다. 추방 당할 운명이었는데 아직 받지 못한 임금이 많았다. 임금체불 해결 요청은 무시당했다. 오히려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돼 감시 받는 신세가 됐다. 쇠창살을 두드리는 등 과격한 행동이 이어졌다.
그는 보호실을 24시간 비추는 감시카메라의 렌즈를 젖은 휴지와 치약으로 가렸다. 이 일로 독거실(독방)에 격리됐다. 그날 그는 정병진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1월11일 목요일 오후 3시50분이었다.
정 목사는 김명식이란 남자가 걸어온 전화가 특이해 수첩에 메모해뒀다. 굉장히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남성은 김씨였다. 나중에 실명이 밝혀졌지만 그는 당시 가명을 썼다.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이 땅바닥에 내리쳐 침도 못 넘기는 상태다.”
김씨는 병원치료를 받고 싶은데 출입국사무소에서 내보내주지 않는다며 누군가에게 소개를 받아 정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왜 그런 일이 있었나요?” 김 목사가 물었다. 하지만 “그건 알 것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뭐 이렇게 오만불손한 사람이 있지?” 정 목사는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래도 부탁을 받은 것이니 출입국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김씨가 감시카메라를 파손하려고 해 제압하는 과정에서 찰과상을 입었다고 했다. “의사에게 보여주니 이상이 없다고 한다.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보호 시설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수감 시설이었다. 종종 돌출행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 목사는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 면회나 상담 요청도 더는 없었다. 정 목사는 이후에도 보호소 안에서 예배를 진행했지만 김씨의 전화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잊고 지낸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자책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정 목사는 한 달이 지나 벌어진 대형 참사에서 김씨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됐다.
김씨는 독거실에서 일반보호실로 옮겨온 뒤 다시 감시카메라에 손을 댔다. 휴지와 치약 같은 이물질을 렌즈에 붙였다. 화재 몇 시간 전인 2월10일 밤 11시28분쯤이다. 김씨는 2월11일 새벽 3시52분까지 4차례 더 감시카메라를 촬영 불가 상태로 만들었다. 그 직후 그가 있던 304호실에서 불이 시작됐다.
화재 진화가 완료된 뒤 김씨는 곧 방화범으로 지목됐다. 외국인 중 한 명이 김씨가 불이난 곳에 우레탄 매트를 집어 넣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화재 당시 3층에는 50대 용역경비업체 직원 1명만 있었다. 이 직원은 김씨에게 “불을 끄라”며 소리를 지른 뒤 문을 열지 않고 쇠창살 밖에서 소화기를 뿌렸다. 사고 당시 야간 당직 근무를 서고 있어야 할 출입국사무소 직원 2명은 각각 2층 상황실과 1층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철창을 열어줄 열쇠는 2층에 있었다. 경비업체 직원이 상황실에 인터폰을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3층으로 올라온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열쇠꾸러미를 잊었다는 사실을 알고 되돌아갔다. 열쇠를 챙겨온 직원은 301호실 문을 먼저 열었다.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301호실 외국인 수용자들만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날 김씨도 목숨을 잃었다.
불이 시작된 304호실에서 라이터 2개가 발견됐다. 사망한 채 발견된 김씨는 내복 위에 면바지를 입고 그 위에 또 운동복을 겹쳐입었다. 왼쪽 발목 부위에는 고무줄을 이용해 현금 13만원을 묶어뒀다. 김씨의 바지에선 열변형된 탄화물의 흔적도 나왔다. 수사당국은 복장, 현금 등을 근거로 김씨가 외국인보호소를 탈출하기 위해 불을 낸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많은 정황들이 김씨를 가리킨 것이 사실이지만 대책위원회 활동을 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증거가 없다면서 김씨를 방화범으로 확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1차 감식에서 발견되지 않은 라이터가 2차 감식에서 2개나 발견됐다. 여럿이 생활하는 곳이기에 대부분 현금을 숨겨둔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옷을 껴입었을 수도 있다. 불을 붙였다는 증언자의 진술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김씨는 이미 숨진 뒤였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당시 시민대책위원회 활동을 한 김대권 화성외국인보호소방문시민모임 마중 활동가는 “그때 증거로 내세운 게 라이터였는데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것치고는 그을음도 없었고 지문도 나오지 않아 다들 의아해 했다”며 “불이 어떻게 났는지보다 쇠창살 안에 갇힌 이들이 왜 피하지도 못하고 숨졌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김씨의 방화로 화재가 났다는 일은 기정사실화 됐다. 화재 발생 직후 10여분 동안 신고도 되지 않았고, 자체적으로 대피나 화재 진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인재(人災)였다. 대형 참사가 벌어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러스트 김상민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화재 40여일이 지난 2007년 3월30일, 화재 당시 야간 근무자였던 여수출입국사무소 경비계장 A씨와 경비과 직원 B씨, 경비용역업체 C씨 등을 구속기소했다. 출입국사무소 관리과장, 경비과장 및 관리과 직원 등도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A씨와 B씨는 규정대로라면 2층 상황실과 3층 감시실에서 감시카메라를 확인하며 근무하고 있어야 했다. 경비용역업체 직원과 함께 보호실도 살폈어야 한다. 화재 직전 김씨가 감시카메라 렌즈를 가렸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A씨는 1층 숙직실에, B씨는 상황실에서 자고 있었고, C씨만 감시실에 있었다. 하지만 김씨가 감시카메라 렌즈를 가리는 행동을 따로 제지하지 않았고 불이 난 걸 알았을 때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화재 진화가 완료된 11일 오전 오히려 순찰이나 소방훈련 등을 제대로 한 것처럼 일지를 꾸몄다. 이들이 거짓으로 기록한 소방 훈련 내용 중에는 ‘보호외국인 도피방법’이라는 항목도 있었다.
재판에서 이들은 “관행에 따라 정당한 휴게시간이었다”고 하거나 “잠을 잔 것이 아니다”라고 항변했고, 방화로 외국인들이 죽거나 다칠 것을 예상할 수 없었다며 업무상 과실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피해가 컸던 것은 보호실에 설치된 2중 잠금장치와 소방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것, 소방시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때문이라며 자신들은 이런 원인들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도 폈다.
하지만 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황실과 감시실은 독자적으로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있어 경비 담당 공무원이 1명씩 근무했어야 한다고 봤다. 제대로 근무했다면 화재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조기에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법원은 “(외국인보호소가) 본국 송환 조치가 필요한 외국인을 절차 마무리까지 수용함을 목적으로 한다”며 “실질적으로 도주방지 시설에 집단 억류하기 때문에 보호 외국인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업무 수행에 가장 기본적인 주의 의무”라고 지적했다. 비극적인 참사가 애초에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법원은 화재발생 2년 전인 2005년 4월, 여수 출입국사무소에서 보호 중인 외국인들이 도주하기 위해 방화한 사건이 발생했었다는 점도 거론했다. B씨는 당시 방화 사건 때도 근무했다고 했다. 화재가 발생할 수 있고 대형화재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심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됐던 A씨와 B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10월로 감형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양형조건에 비춰보면 도무지 실형을 면하기 어려우나 다소 형량이 무겁다”고 했다. C씨는 1심의 금고 10월 집행유예 2년이 유지됐다.
소장 직무대행을 했던 관리과장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경비과장은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허위공문서 작성에 개입한 관리과 직원은 벌급 700만원이 선고됐다. 1심과 같은 형량이었다. 대법원은 2008년 6월12일 이를 확정했다. 징역형이 선고된 직원들은 출입국사무소에서 해임됐다. (현 근무지를 통해 A씨에게 인터뷰 의사를 물었지만 끝내 답이 오지 않았다.)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이 받은 처벌과는 별개로, 추방을 앞둔 외국인들을 무기한 가둬두는 현행법을 향한 논란도 커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7년 4월9일 외국인보호체계 재정립과 보호실 전반의 인권상황 개선을 권고했다. 법무부는 며칠 후인 4월13일, 순찰강화 등 근무기강확립, 스프링클러 설치 및 건축자재를 불연시설로 교체하는 방안을 화재 사고의 후속 조치로 내놨다.
■#4. 밀린 임금은 죽음 뒤 바로 입금됐다
강제퇴거(추방) 대상이 된 외국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장기간 구금된다. 대부분 체류기간이나 체류조건을 어겨 보호소에 수감된다. 돈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임금을 떼이고, 이를 해결하려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수 출입국사무소 3층에서 연기를 마시고 죽은 이들도 그랬다.
2005년 한국에 온 김성남(사망 당시 52세)씨는 중국 지린성 옌볜시 출신이다. 2005년 4월 비전문취업비자(E-9)를 얻어 한국에 왔다. 여수 인근 가두리양식장에서 일했다. 월급이 한 두번 밀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체불 임금이 1020만원까지 늘어났다. 월급을 주지 않는 양식장 주인과 드잡이가 이어졌다.
“계약 연장 안 해준다.”
주인의 말은 협박이었다. 참고 지내봐도 노동의 대가는 손에 쥘 수 없었다. 새로 일자리를 찾아 파이프 수리 업체에서 일했다. 출입국관리소에 취업과 체불임금을 신고했다가 도리어 붙잡혀 강제추방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처음 등록된 것과 다른 업종에 취업했다는 게 이유다. 그렇게 외국인보호소에 갇힌 게 불이 나기 약 10일 전이었다. 밀린 임금 중 끝내 못 받았던 700여만원은 숨진 다음 날 통장에 입금됐다.
그의 사연은 화재 직후 여러 언론에 소개됐다. 장갑 하나도 빨아쓰며 알뜰하고 성실하게 돈을 모았다. 장애가 있는 큰 딸과 공부 잘하던 작은 딸을 위해서였다. 밀항을 했거나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었다. 체류기간이 지났는데도 몰래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돈을 떼이고 다른 일자리 찾은 게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의 전부였다.
규정상 보석금을 내면 보호소에서 나갈 수 있지만, 가족들의 요청을 출입국사무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갇혀 있다 죽음을 맞이 했다. 지난 10일 연락이 닿은 김씨의 동생 김분연씨는 “15년 전 사고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2007년 2월14일 여수출입국사무소 화재사건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마려된 여수 성심병원 장례식장에 노무현 대통령이보낸 조화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사망자 대부분이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었다. 가족들을 위해 몸이 닳도록 일을 했고,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해 고생하다 출입국사무소에 갇혔다. 그리고 죽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던 에르낀씨는 1999년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8년 동안 한국에 있었다. 2001년 대구에 있던 플라스틱 가공 공장에서 일하다 월급 420만원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보호소에 갇혔다. 맏딸의 결혼을 얼마 안 남겨 두고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임금을 받지 못해 철창 신세를 지게 된 이들은 주검이 돼 가족을 만났다. 뉴스나 지인, 대사관 등을 통해 가족의 사망 소식을 안 유족들이 국내로 들어왔다. 유족들이 오랜 만에 마주한 이들은 목 아래로 꿰멘 자국을 남긴 채 벌거벗은 상태로 차가운 영안실에 누워있었다. 화재 직후인 2월11일 오후 19시50분부터 부검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유족 동의는 없었다.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들의 사정도 크게 좋지는 않았다. 화재 당시 대피한 이들은 불이 다 꺼지기도 전에 다른 층의 보호실에 수감됐다가 항의해 겨우 밖으로 나왔다. 병원에 입원하거나 다른 보호소로 이동했다. 연기를 들이마셔 병원에 입원한 이들 중에는 정신이 돌아오자 병상에 누운 채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이도 있었다. 부상이 경미했던 외국인들은 퇴원 직후 다른 지역의 외국인보호소로 이송돼 수감됐다. 부상자 16명은 가족들과 함께 위자료를 받고 한달 뒤인 3월11일 출국했다.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는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두 차례에 걸쳐 한 면담요구를 끝내 거부했다. 화재 현장을 둘러보겠다는 유족들의 요구는 몇 차례 거절된 뒤에야 어렵게 이뤄졌다. 당시 유족들의 현장 참관을 동행한 이철승 경남이주민센터 대표는 “사고 현장이 다 감옥처럼 쇠창살로 돼 있는 것을 보고 유족들이 너무 놀랐다”며 “이게 감옥이지 왜 보호시설인가, 이렇게 해놓고 보호한다고 거짓말치면 되냐며 우는 이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일러스트 김상민
■#5. 흔적 없는 화재
화재 참사 15주기였던 지난 11일에는 여수 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에서 작은 예배가 열렸다. 15년 전 새벽, 소방차가 달려 온 출입국사무소 입구 앞 도로에 테이블과 국화가 놓였다. 출입국사무소 측이 제공한 것이다. 주최 측은 출입국사무소 직원 모두 함께 추모예배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직원 2명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출입국사무소는 매년 추모 행사를 지원해 왔다고 했다. 담당 소장에 따라 전직원이 추모 예배에 참여할 때도 었었다. 이날 소장은 예배가 끝날 무렵 얼굴을 비추고 떠났다고 한다.
15년 전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난 8일 외국인보호소 방문 협조를 요청했지만 여수 출입국사무소는 “최근 오미크론 변이바이러스의 감염 전파력이 극심하여 외부인의 사무소 방문을 최소화 하고 있으니 양해하여 주기 바란다”고 회신했다.
대신 “매년 의무적으로 관할 소방서와 합동 소방훈련 및 소방시설 안전 점검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관련 법규정 등을 제·개정하여 주야간 보호실 순찰 의무화 및 보호외국인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화재사건 재발방지를 위해 보호실 내부를 불연내화재로 시공하였고 화재예방을 위해 보호동 전체에 스프링클러 및 화재감지기 설치, 보호실 출입문 제어시스템을 자동개폐방식으로 개선하고 보호외국인 전용 야외운동장 대피유도등 등을 설치하여 화재 등 재난상황에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병진 목사는 화재가 발생한 304호실이 ‘동감실’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작은 강당처럼 바뀌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에는 외부 방문이 거의 없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기 어려운 실정이다.
화재 가능성은 줄었다 하더라도 보호소에 갇힌 외국인들의 상황은 그다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지난해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됐던 한 외국인은 소란을 피운다는 이유로 양팔다리를 묶여 몸이 새우처럼 뒤로 꺾였다. 법무부는 “자해방지와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지난해 3월 수감된 그는 지난 8일 보호일시해제 조치로 풀려났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 10일 성명서를 내고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는 보호란 이름으로 사람을 함부로 가두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만든 한국 정부의 출입국 외국인 정책의 맨얼굴을 비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했다. 이어 “몇 달 전 세상에 폭로된 새우꺾기 사건은 여수 참사 이후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국내에 수감 시설을 갖춘 외국인보호소(전문보호시설)는 경기 화성, 충북 청주, 그리고 여수 출입국외국인사무소 등 세 곳에 있다. 김대권 활동가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인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12월 기준 404명이 3개 전문보호시설에 갇혀있었다. 보호기간으로 보면 1개월 미만이 211명으로 가장 많았다. 1개월 이상 3개월 미만이 74명, 3개월 이상 6개월 미만이 64명, 6개월 이상 1년 미만은 37명이었다. 1년 이상 보호소에 갇힌 이들도 18명에 달했다.
지난 9일 방문한 여수 출입국사무소. 15년 전 화재 참사로 10명이 죽고 17명이 크게 다쳤지만 화재가 났었다는 흔적은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현진 기자
지난 9일 여수 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민원업무를 보기 위해 온 외국인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화재 참사 당시 구조대가 뛰어들어갔을 정문에는 체온 확인 장비가 설치돼 있었다. 2층으로 오르는 중앙계단 옆 안내 데스크엔 청원 경찰이 근무 중이었다. 1층 로비에 설치된 게시판에는 크고 작은 행사 사진과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정문을 다시 나와 건물 옆으로 돌아가면 정면에선 보이지 않는 4층 높이의 외국인보호소를 볼 수 있다. 물론 밖에서만 보면 이곳이 외국인보호소인지, 15년 전 불이 나 10명이 죽고 17명이 다쳤던 곳인지 알 수 있는 표지는 전혀 없다.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불과 연기의 흔적을 이제는 찾을 수 없었다.
※기사 작성에는 사건 당시 언론보도, 판결문,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보도자료,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문, 법무부 종합대책 발표자료, 2007년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공동대책위원회 자료 모음집 등을 참고했다. 당시 상황을 경험한 이들 중 연락이 닿아 대화한 경우는 실명으로 적었다. 화재 사건 당시 언론 인터뷰에 나선 이들도 실명으로 표기했다. 연락이 닿지 않은 출입국사무소 관계자들은 익명으로 썼다.
■#1. 꽃도, 구름도 없었다
동 트기 3시간 전, 그믐을 향하는 달이 아직 동쪽에 가까울 때였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조용하고 어두운 깊은 새벽, 여수소방서 출동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현 출입국외국인사무소) 화재 발생.”
24시간 2교대로 근무하는 119구조대의 갑(甲)조 근무 날이었다. 조양현 팀장(현 전남소방본부 안전보건팀장)이 팀원 2명과 급히 구조대 차량에 올랐다. 투시 랜턴, 만능 도끼, 산소호홉기, 절단기…. 구조에 필요한 장비는 모두 차에 실려있었다. 소방차도 뒤따랐다. 설을 1주일 앞둔 2007년 2월11일 일요일, 새벽 4시 4분이었다.
여수소방서가 있는 시청 앞 로터리에서 출입국사무소까지는 평일 낮이라면 차로 10분쯤 걸린다. 새벽의 도로는 한산했다. 신고 5분이 채 안 돼 출입국사무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700m쯤 떨어진 건물에선 별 다른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다. 소방 은어로 꽃은 불꽃을, 구름은 연기를 뜻한다. 조 팀장은 “우리는 농연(짙은 연기), 출화(밖으로 보이는 불꽃)라는 말을 쓴다”고 했다. 대형 화재가 나면 먼 곳에서도 연기나 불길이 보이기 마련이다. 경험 많은 대원들은 현장 도착 전 차 안에서부터 주변 상황을 살핀다. 구조대 차량이 출입국사무소 정문에 도착한 시각이 4시10분.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구조대 차량이 출입국사무소 입구에 도착하자 직원 한명이 달려왔다.
“3층에 사람이 있어요.”
그는 플라스틱판에 달린 열쇠 꾸러미를 건넸다. 겁에 질린 표정과 말투. 그것이 첫 번째 화재 징후였다.
화재 진압 대원들에 앞서 구조대인 조 팀장이 팀원들과 건물 안으로 먼저 뛰어들어갔다. 건물 구조가 이상했다. 출입국사무소 중앙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지만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복도를 급히 둘러보니 사무실 한 곳의 문이 열려있었다.
“경비과 사무실이었던 것 같은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15년 전 여수 출입국사무소 화재 참사 당시 가장 먼저 현장에 진입한 당시 여수소방서 119구조대 조양현 팀장(전남소방본부 안전보건팀장)이 지난 9일 현장 구조를 그려가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조 팀장은 1988년 12월 입사한 34년차 베테랑이다. 중앙소방학교에서 인명구조 교육을 2기로 수료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2014년 세월호 참사에도 투입됐다. 몸집은 크지 않지만 다부진 체격의 조 팀장은 15년 전 출입국사무소 건물의 구조도를 종이에 쓱쓱 그릴 만큼 기억이 생생했다.
“두꺼운 구조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3층의 출입문 손잡이를 잡자 마자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조 팀장은 두 번째 징후를 느꼈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검은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검은 연기는 앞을 비춰주는 고성능 투시 랜턴도 덮었다. 바로 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조 팀장의 구조 본능이 먼저 위험을 감지했다. 열기를 피해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낮은 자세로 팔을 뻗었다. 손으로 벽을 스치 듯 만지며 경로를 확인해 앞으로 나아갔다. 장갑 끝에 미끄럽고 끈적한 물질이 만져졌다. 얼굴을 가린 산소마스크에도 검은 물질이 묻어났다. ‘타르’의 일종인 유독물질이다. 유독가스를 내뿜는 검은 연기는 좋지 않은 신호다. 검은 연기는 화염보다 쉽게 사람을 죽인다.
3층엔 기괴한 고함소리가 메아리쳤다. 수십명의 괴성이 뒤섞여 울렸다. 살려달라. 열어달라. 출입국사무소에 수용 중인 외국인들의 목소리였다.
2년 전 조 팀장은 출입국사무소에 점검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외국인들을 강제추방하기 전 가둬두는 외국인보호소가 출입국사무소 안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우연한 계기로 외국인보호소의 존재를 알지 못 했다면, 출입국사무소 안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갇혀 있을 거란 걸 화재 현장에 진입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됐을 것이다.
화재 신고가 접수됐을 때나 현장에 도착해 열쇠꾸러미를 건넨 직원을 마주쳤을 때도 ‘외국인보호소’ 얘기는 없었다. 조 팀장은 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다른 대원들에게 무전을 남겨둔 터였다.
“출입국사무소에 외국인 수용소가 있으니 숙지하기 바람.”
낮은 자세로 복도의 벽을 짚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던 조 팀장은 열려 있던 쇠창살 문 하나를 발견해 안으로 들어갔다. 외국인들이 갇혀있는 보호소였다.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방향을 가늠했다. 철창 안에 갇힌 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외침은 유독가스를 더 많이 마시게 한다. 시간이 없었다. 철창으로 들어가는 문은 자물쇠 두 개로 잠겨있었다.
네모난 형태의 뭉치 자물쇠와 자전거나 오토바이 바퀴에 사용하는 ‘와이어 자물쇠’. 와이어 자물쇠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일정 간격 이상 문이 열리지 않도록 한다. 만일의 사태에도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한 이중 장치다.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경비계 안에 숨어있는 것도, 복잡한 철문이 여러겹 이어진 것도 도주 방지를 위해 건물이 설계되고 운영됐다는 증거다.
조 팀장은 가지고 있던 절단기로 자물쇠를 빠르게 잘라냈다.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그만 열쇠를 손으로 집어 자물쇠를 맞춰 열기 힘들다.
“절단기 더 필요하다.” 조 팀장은 무전을 쳤다.
화재 진압 대원들이 곧 뒤따라 들어왔다. 발화 지점을 찾아 불을 끄고, 움직일 수 있는 생존자들을 찾았다. 움직일 수 있는 생존자들을 찾아 서로 손이나 허리를 잡고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안내했다. 불은 끄는 일보다 자물쇠를 잘라 문을 여는 일이 더 오래 걸렸다. 애초에 불길이 센 건 아니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보호실 안에 갇힌 외국인들을 구출해 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절단기로 보호실 문을 열기 시작하자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이 나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보호실은 모두 6개였다. 불이 처음 난 곳은 304호. 거실 바닥에 깔린 우레탄 매트에 불이 붙어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천장을 타고 이동한 연기는 끝방으로 모였다. 304호와 306호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불이 난 사실을 알고 잠에서 깬 수용자들이 쇠창살을 붙잡고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다. 살려달라고 애원한 이들은 대부분 연기를 마시고 죽었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 보호실 거실의 쇠창살 앞에서 발견됐다. 조 팀장이 인명 수색을 위해 보호실 안쪽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 생존자들이 나왔다. 그들은 바닥과 변기의 배수구에 코와 입을 대고 있었다.
조 팀장이 3층에 진입해 처음 찾아 문을 연 곳은 화재가 난 보호실 맞은 편 복도였다. 조 팀장이 먼저 도착한 통로 쪽에선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화재가 난 쪽 복도로 처음 진입해 이미 쓰러진 이들 중 부상자와 사망자를 가려가며 생존자를 구출했다면 반대 쪽 복도에도 희생자들이 나왔을지 모른다.
2007년 2월12일자 경향신문 3면에 보도된 화재 당시 여수 출입국사무소를 그린 상황도. 외국인보호소는 3층 건물 내부에 이중구조로 자리잡았다. 중상자 중 한 명이 이후 숨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화재 진압이 모두 마무리 된 건 오전 4시 35분이다. 화재 경보기는 끝내 울리지 않았다. 스프링클러는 없었다. 사망자들을 수습하고 연기가 가라앉은 보호실 내부가 그제서야 분명히 보였다. 외부에서 화재 징후가 포착되지 않았고, 실내가 검은 연기로 가득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보호소는 3층 가운데 이중구조로 돼 있었다. 이중의 벽으로 둘러쌓인 보호소 내부는 환기가 되지 않는다. 외부로 불길이나 연기가 빠져나가기 어렵다. 검은 연기로 가득했던 것도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해 불이 거세지지 않고 불완전연소를 일으켜서다.
다른 층 보호실에 있던 외국인들은 큰 부상 없이 대피했다. 당시 보호소엔 55명이 수용돼 있었다. 3층에서만 사상자가 나왔다. 사망자는 9명, 병원에 입원된 중상자는 18명이었다. 대부분이 검은 유독 연기에 숨이 막혀 죽었다. 화재 발생 보름 뒤 중상자 1명이 사망했다.
조 팀장은 구조 작업을 마친 뒤 팀원들과 곧장 경찰서로 가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이후 며칠 간은 퇴근도 하지 못했다. 대형 화재 사고가 있은 뒤에는 으레 있는 일이다. 수많은 사람을 구했지만, 죽은 이도 많았다.
화재 발생 다음 날인 2007년 2월12일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외국인보호소 건물. 3층 창문 외부에 약간 그을린 자국이 남은 것 외에는 27명의 사상자를 낸 화재 사고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지윤 기자
■#2. 예상된 재앙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기 전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여수 오동도에 있었다. 노동자들과 이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여수에 온 정병진 목사(여수솔샘교회)가 처음 오동도에 있던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은 게 2004년 무렵이다. 그는 이전까지 출입국관리사무소도, 그 안에 있던 외국인들을 구금하는 ‘보호소’라는 존재도 몰랐다.
그는 이주인권 운동가인 샤말타파(당시 32세)를 만나기 위해 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네팔에서 온 샤말타파는 이주노동자 인권 향상을 위해 농성을 벌이다 2004년 2월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붙잡혔다. 그는 곧 여수로 이송됐고, 수감된 뒤 단식농성을 벌였다.
정 목사는 샤말타파의 소식을 듣고 출입국사무소를 처음 방문했다. 당시 외국인보호소는 조립식 가건물이었다. 과거 밀항자들을 수감하기 위한 곳이라고 했다. 한눈에 봐도 열악한 시설이었다. 투명 플라스틱 판을 사이에 두고 처음 면회했다. 출입국사무소 관계자 2명이 샤말타파와 정 목사의 뒤에 앉아 그들의 말을 각각 받아적었다.
샤말타파는 정 목사와 만나 이주노동자 인권 관련 이야기를 하면서 외국인보호소의 열악한 상황을 함께 알렸다. 한국어에 능통했던 샤말타파는 자신이 곧 추방될 것을 직감했는지 정 목사에게 부탁했다.
“보호소에 있는 이들을 보살펴 주세요.”
예감은 적중했다. 얼마 뒤 그는 강제 추방됐다.
정 목사는 갑작스런 추방 소식을 듣고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샤말타파의 부탁을 떠올렸다. 그는‘종교활동을 보장한다’는 출입국관리소 관련 규정을 찾아 외국인보호소에서 예배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2004월 4월13일 첫 예배가 열렸다. 처음엔 15명이 왔고 이후에 20~30명이 참석했다. 예배 때는 곤봉을 휴대한 공익근무요원들이 사방에서 감시했다. 운동시간도 없이 비좁은 보호실에서 갇혀 지낸 외국인들에게 종교활동은 숨통이 트이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 해 6월1일 정 목사는 검은 표지로 된 수첩에 이주노동자 관리 문제점’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출입국관리소 직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그가 할 이야기들을 적어둔 것이다.
‘죄수라는 생각을 갖지 말았으면’
‘교도관의 반말행위←서로조심, 명찰 부착’ ‘
‘수갑을 채워 병원에 가는 일’
‘햇볕은 쪼일 수 있는 기회(운동시간)’
‘감시카메라 ←사생활 침해’
지난 9일 만난 정병진 목사(여수솔샘교회)가 화재 사고가 나기 전 여수 출입국사무소의 외국인보호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써둔 메모들을 보여주고 있다. 전현진 기자
어렵게 열린 간담회에서 호소했지만 직원들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상급자를 따라 그냥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질문도,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다가 가버렸다.
외국인보호소는 출입국관리법을 근거로 운영된다. 화재 시점에 적용된 구 출입국관리법(2005년 9월 시행 2008년 5월 개정)은 강제퇴거 대상으로 의심할 만한 외국인이 도주하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는 경우 ‘보호’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 법 제63조에는 강제퇴거명령을 받은 자를 즉시 대한민국 밖으로 송환할 수 없는 경우 송환이 가능할 때까지 외국인보호소 등에 보호할 수 있다고 해두었다. 기간 제한은 없다. 이런 조항들은 지금도 남아있거나 더 강화됐다.
2005년 새로 지어진 출입국관리사무소에는 종교실이 따로 마련됐다. 그나마 나아진 조치지만 첫 예배 때 보호소 외국인들은 수갑을 차고 줄지어 끌려왔다. 정 목사 항의에 출입국사무소측은 “이동구간이 있고 직원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럼 우리가 보호실 안으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지나 문안으로 들어가면 감시실과 301~306호 보호실이 나온다. 보호실은 거실과 침실, 화장실로 나뉘어졌다. 한 방에 10명 내외로 머문다. 바닥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냉기를 막기 위해 얇은 우레탄 매트가 깔렸다. 거실에 모여 앉아 예배를 드렸다. 2년 뒤 이 매트가 불에 타고, 유독가스를 내뿜었다.
2005년 5월 미국인 피츠칼 레리드는 한 언론에 편지를 보냈다. 그는 한 달 전인 4월, 여수 출입국사무소에 갇혀있었다. 편지에는 자살을 시도한 이가 있었다는 것과 러시아인 3명이 새벽에 불을 냈고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다행히 일찍 발견돼 진화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10명이 사망한 화재 사건 발생 22개월 전이었다.
미국 뉴욕에서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레리드는 지금도 그때 일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지난 8일 카카오톡을 통해 레리드는 “당시 말린 녹차잎을 말아 담배 대용으로 피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쇠 젓가락을 전기코드에 연결한 뒤 스파크를 일으켜 불을 붙였다”며 “누구도 손쉽게 불을 붙일 수 있었고 화재에는 취약했다. 직원들이 부족했고 충분히 관리할 수 없었다. 누군가 해를 입히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었고, 그런 재앙은 실제로 벌어졌다”고 했다.
■#3. 방화범의 단독 범행?
2005년 9월 한국에 밀입국해 공사현장을 돌며 일하던 김광석씨(사망 당시 39세·재중동포)는 2007년 1월9일 여수 출입국사무소에 수용된 직후부터 거친 태도를 보였다. 추방 당할 운명이었는데 아직 받지 못한 임금이 많았다. 임금체불 해결 요청은 무시당했다. 오히려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돼 감시 받는 신세가 됐다. 쇠창살을 두드리는 등 과격한 행동이 이어졌다.
그는 보호실을 24시간 비추는 감시카메라의 렌즈를 젖은 휴지와 치약으로 가렸다. 이 일로 독거실(독방)에 격리됐다. 그날 그는 정병진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1월11일 목요일 오후 3시50분이었다.
정 목사는 김명식이란 남자가 걸어온 전화가 특이해 수첩에 메모해뒀다. 굉장히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남성은 김씨였다. 나중에 실명이 밝혀졌지만 그는 당시 가명을 썼다.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이 땅바닥에 내리쳐 침도 못 넘기는 상태다.”
김씨는 병원치료를 받고 싶은데 출입국사무소에서 내보내주지 않는다며 누군가에게 소개를 받아 정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왜 그런 일이 있었나요?” 김 목사가 물었다. 하지만 “그건 알 것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뭐 이렇게 오만불손한 사람이 있지?” 정 목사는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래도 부탁을 받은 것이니 출입국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김씨가 감시카메라를 파손하려고 해 제압하는 과정에서 찰과상을 입었다고 했다. “의사에게 보여주니 이상이 없다고 한다.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보호 시설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수감 시설이었다. 종종 돌출행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 목사는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 면회나 상담 요청도 더는 없었다. 정 목사는 이후에도 보호소 안에서 예배를 진행했지만 김씨의 전화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잊고 지낸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자책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정 목사는 한 달이 지나 벌어진 대형 참사에서 김씨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됐다.
김씨는 독거실에서 일반보호실로 옮겨온 뒤 다시 감시카메라에 손을 댔다. 휴지와 치약 같은 이물질을 렌즈에 붙였다. 화재 몇 시간 전인 2월10일 밤 11시28분쯤이다. 김씨는 2월11일 새벽 3시52분까지 4차례 더 감시카메라를 촬영 불가 상태로 만들었다. 그 직후 그가 있던 304호실에서 불이 시작됐다.
화재 진화가 완료된 뒤 김씨는 곧 방화범으로 지목됐다. 외국인 중 한 명이 김씨가 불이난 곳에 우레탄 매트를 집어 넣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화재 당시 3층에는 50대 용역경비업체 직원 1명만 있었다. 이 직원은 김씨에게 “불을 끄라”며 소리를 지른 뒤 문을 열지 않고 쇠창살 밖에서 소화기를 뿌렸다. 사고 당시 야간 당직 근무를 서고 있어야 할 출입국사무소 직원 2명은 각각 2층 상황실과 1층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철창을 열어줄 열쇠는 2층에 있었다. 경비업체 직원이 상황실에 인터폰을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3층으로 올라온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열쇠꾸러미를 잊었다는 사실을 알고 되돌아갔다. 열쇠를 챙겨온 직원은 301호실 문을 먼저 열었다.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301호실 외국인 수용자들만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날 김씨도 목숨을 잃었다.
불이 시작된 304호실에서 라이터 2개가 발견됐다. 사망한 채 발견된 김씨는 내복 위에 면바지를 입고 그 위에 또 운동복을 겹쳐입었다. 왼쪽 발목 부위에는 고무줄을 이용해 현금 13만원을 묶어뒀다. 김씨의 바지에선 열변형된 탄화물의 흔적도 나왔다. 수사당국은 복장, 현금 등을 근거로 김씨가 외국인보호소를 탈출하기 위해 불을 낸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많은 정황들이 김씨를 가리킨 것이 사실이지만 대책위원회 활동을 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증거가 없다면서 김씨를 방화범으로 확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1차 감식에서 발견되지 않은 라이터가 2차 감식에서 2개나 발견됐다. 여럿이 생활하는 곳이기에 대부분 현금을 숨겨둔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옷을 껴입었을 수도 있다. 불을 붙였다는 증언자의 진술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김씨는 이미 숨진 뒤였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당시 시민대책위원회 활동을 한 김대권 화성외국인보호소방문시민모임 마중 활동가는 “그때 증거로 내세운 게 라이터였는데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것치고는 그을음도 없었고 지문도 나오지 않아 다들 의아해 했다”며 “불이 어떻게 났는지보다 쇠창살 안에 갇힌 이들이 왜 피하지도 못하고 숨졌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김씨의 방화로 화재가 났다는 일은 기정사실화 됐다. 화재 발생 직후 10여분 동안 신고도 되지 않았고, 자체적으로 대피나 화재 진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인재(人災)였다. 대형 참사가 벌어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러스트 김상민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화재 40여일이 지난 2007년 3월30일, 화재 당시 야간 근무자였던 여수출입국사무소 경비계장 A씨와 경비과 직원 B씨, 경비용역업체 C씨 등을 구속기소했다. 출입국사무소 관리과장, 경비과장 및 관리과 직원 등도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A씨와 B씨는 규정대로라면 2층 상황실과 3층 감시실에서 감시카메라를 확인하며 근무하고 있어야 했다. 경비용역업체 직원과 함께 보호실도 살폈어야 한다. 화재 직전 김씨가 감시카메라 렌즈를 가렸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A씨는 1층 숙직실에, B씨는 상황실에서 자고 있었고, C씨만 감시실에 있었다. 하지만 김씨가 감시카메라 렌즈를 가리는 행동을 따로 제지하지 않았고 불이 난 걸 알았을 때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화재 진화가 완료된 11일 오전 오히려 순찰이나 소방훈련 등을 제대로 한 것처럼 일지를 꾸몄다. 이들이 거짓으로 기록한 소방 훈련 내용 중에는 ‘보호외국인 도피방법’이라는 항목도 있었다.
재판에서 이들은 “관행에 따라 정당한 휴게시간이었다”고 하거나 “잠을 잔 것이 아니다”라고 항변했고, 방화로 외국인들이 죽거나 다칠 것을 예상할 수 없었다며 업무상 과실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피해가 컸던 것은 보호실에 설치된 2중 잠금장치와 소방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것, 소방시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때문이라며 자신들은 이런 원인들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도 폈다.
하지만 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황실과 감시실은 독자적으로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있어 경비 담당 공무원이 1명씩 근무했어야 한다고 봤다. 제대로 근무했다면 화재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조기에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법원은 “(외국인보호소가) 본국 송환 조치가 필요한 외국인을 절차 마무리까지 수용함을 목적으로 한다”며 “실질적으로 도주방지 시설에 집단 억류하기 때문에 보호 외국인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업무 수행에 가장 기본적인 주의 의무”라고 지적했다. 비극적인 참사가 애초에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법원은 화재발생 2년 전인 2005년 4월, 여수 출입국사무소에서 보호 중인 외국인들이 도주하기 위해 방화한 사건이 발생했었다는 점도 거론했다. B씨는 당시 방화 사건 때도 근무했다고 했다. 화재가 발생할 수 있고 대형화재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심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됐던 A씨와 B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10월로 감형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양형조건에 비춰보면 도무지 실형을 면하기 어려우나 다소 형량이 무겁다”고 했다. C씨는 1심의 금고 10월 집행유예 2년이 유지됐다.
소장 직무대행을 했던 관리과장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경비과장은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허위공문서 작성에 개입한 관리과 직원은 벌급 700만원이 선고됐다. 1심과 같은 형량이었다. 대법원은 2008년 6월12일 이를 확정했다. 징역형이 선고된 직원들은 출입국사무소에서 해임됐다. (현 근무지를 통해 A씨에게 인터뷰 의사를 물었지만 끝내 답이 오지 않았다.)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이 받은 처벌과는 별개로, 추방을 앞둔 외국인들을 무기한 가둬두는 현행법을 향한 논란도 커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7년 4월9일 외국인보호체계 재정립과 보호실 전반의 인권상황 개선을 권고했다. 법무부는 며칠 후인 4월13일, 순찰강화 등 근무기강확립, 스프링클러 설치 및 건축자재를 불연시설로 교체하는 방안을 화재 사고의 후속 조치로 내놨다.
■#4. 밀린 임금은 죽음 뒤 바로 입금됐다
강제퇴거(추방) 대상이 된 외국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장기간 구금된다. 대부분 체류기간이나 체류조건을 어겨 보호소에 수감된다. 돈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임금을 떼이고, 이를 해결하려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수 출입국사무소 3층에서 연기를 마시고 죽은 이들도 그랬다.
2005년 한국에 온 김성남(사망 당시 52세)씨는 중국 지린성 옌볜시 출신이다. 2005년 4월 비전문취업비자(E-9)를 얻어 한국에 왔다. 여수 인근 가두리양식장에서 일했다. 월급이 한 두번 밀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체불 임금이 1020만원까지 늘어났다. 월급을 주지 않는 양식장 주인과 드잡이가 이어졌다.
“계약 연장 안 해준다.”
주인의 말은 협박이었다. 참고 지내봐도 노동의 대가는 손에 쥘 수 없었다. 새로 일자리를 찾아 파이프 수리 업체에서 일했다. 출입국관리소에 취업과 체불임금을 신고했다가 도리어 붙잡혀 강제추방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처음 등록된 것과 다른 업종에 취업했다는 게 이유다. 그렇게 외국인보호소에 갇힌 게 불이 나기 약 10일 전이었다. 밀린 임금 중 끝내 못 받았던 700여만원은 숨진 다음 날 통장에 입금됐다.
그의 사연은 화재 직후 여러 언론에 소개됐다. 장갑 하나도 빨아쓰며 알뜰하고 성실하게 돈을 모았다. 장애가 있는 큰 딸과 공부 잘하던 작은 딸을 위해서였다. 밀항을 했거나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었다. 체류기간이 지났는데도 몰래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돈을 떼이고 다른 일자리 찾은 게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의 전부였다.
규정상 보석금을 내면 보호소에서 나갈 수 있지만, 가족들의 요청을 출입국사무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갇혀 있다 죽음을 맞이 했다. 지난 10일 연락이 닿은 김씨의 동생 김분연씨는 “15년 전 사고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2007년 2월14일 여수출입국사무소 화재사건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마려된 여수 성심병원 장례식장에 노무현 대통령이보낸 조화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사망자 대부분이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었다. 가족들을 위해 몸이 닳도록 일을 했고,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해 고생하다 출입국사무소에 갇혔다. 그리고 죽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던 에르낀씨는 1999년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8년 동안 한국에 있었다. 2001년 대구에 있던 플라스틱 가공 공장에서 일하다 월급 420만원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보호소에 갇혔다. 맏딸의 결혼을 얼마 안 남겨 두고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임금을 받지 못해 철창 신세를 지게 된 이들은 주검이 돼 가족을 만났다. 뉴스나 지인, 대사관 등을 통해 가족의 사망 소식을 안 유족들이 국내로 들어왔다. 유족들이 오랜 만에 마주한 이들은 목 아래로 꿰멘 자국을 남긴 채 벌거벗은 상태로 차가운 영안실에 누워있었다. 화재 직후인 2월11일 오후 19시50분부터 부검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유족 동의는 없었다.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들의 사정도 크게 좋지는 않았다. 화재 당시 대피한 이들은 불이 다 꺼지기도 전에 다른 층의 보호실에 수감됐다가 항의해 겨우 밖으로 나왔다. 병원에 입원하거나 다른 보호소로 이동했다. 연기를 들이마셔 병원에 입원한 이들 중에는 정신이 돌아오자 병상에 누운 채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이도 있었다. 부상이 경미했던 외국인들은 퇴원 직후 다른 지역의 외국인보호소로 이송돼 수감됐다. 부상자 16명은 가족들과 함께 위자료를 받고 한달 뒤인 3월11일 출국했다.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는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두 차례에 걸쳐 한 면담요구를 끝내 거부했다. 화재 현장을 둘러보겠다는 유족들의 요구는 몇 차례 거절된 뒤에야 어렵게 이뤄졌다. 당시 유족들의 현장 참관을 동행한 이철승 경남이주민센터 대표는 “사고 현장이 다 감옥처럼 쇠창살로 돼 있는 것을 보고 유족들이 너무 놀랐다”며 “이게 감옥이지 왜 보호시설인가, 이렇게 해놓고 보호한다고 거짓말치면 되냐며 우는 이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일러스트 김상민
■#5. 흔적 없는 화재
화재 참사 15주기였던 지난 11일에는 여수 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에서 작은 예배가 열렸다. 15년 전 새벽, 소방차가 달려 온 출입국사무소 입구 앞 도로에 테이블과 국화가 놓였다. 출입국사무소 측이 제공한 것이다. 주최 측은 출입국사무소 직원 모두 함께 추모예배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직원 2명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출입국사무소는 매년 추모 행사를 지원해 왔다고 했다. 담당 소장에 따라 전직원이 추모 예배에 참여할 때도 었었다. 이날 소장은 예배가 끝날 무렵 얼굴을 비추고 떠났다고 한다.
15년 전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난 8일 외국인보호소 방문 협조를 요청했지만 여수 출입국사무소는 “최근 오미크론 변이바이러스의 감염 전파력이 극심하여 외부인의 사무소 방문을 최소화 하고 있으니 양해하여 주기 바란다”고 회신했다.
대신 “매년 의무적으로 관할 소방서와 합동 소방훈련 및 소방시설 안전 점검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관련 법규정 등을 제·개정하여 주야간 보호실 순찰 의무화 및 보호외국인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화재사건 재발방지를 위해 보호실 내부를 불연내화재로 시공하였고 화재예방을 위해 보호동 전체에 스프링클러 및 화재감지기 설치, 보호실 출입문 제어시스템을 자동개폐방식으로 개선하고 보호외국인 전용 야외운동장 대피유도등 등을 설치하여 화재 등 재난상황에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병진 목사는 화재가 발생한 304호실이 ‘동감실’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작은 강당처럼 바뀌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에는 외부 방문이 거의 없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기 어려운 실정이다.
화재 가능성은 줄었다 하더라도 보호소에 갇힌 외국인들의 상황은 그다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지난해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됐던 한 외국인은 소란을 피운다는 이유로 양팔다리를 묶여 몸이 새우처럼 뒤로 꺾였다. 법무부는 “자해방지와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지난해 3월 수감된 그는 지난 8일 보호일시해제 조치로 풀려났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 10일 성명서를 내고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는 보호란 이름으로 사람을 함부로 가두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만든 한국 정부의 출입국 외국인 정책의 맨얼굴을 비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했다. 이어 “몇 달 전 세상에 폭로된 새우꺾기 사건은 여수 참사 이후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국내에 수감 시설을 갖춘 외국인보호소(전문보호시설)는 경기 화성, 충북 청주, 그리고 여수 출입국외국인사무소 등 세 곳에 있다. 김대권 활동가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인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12월 기준 404명이 3개 전문보호시설에 갇혀있었다. 보호기간으로 보면 1개월 미만이 211명으로 가장 많았다. 1개월 이상 3개월 미만이 74명, 3개월 이상 6개월 미만이 64명, 6개월 이상 1년 미만은 37명이었다. 1년 이상 보호소에 갇힌 이들도 18명에 달했다.
지난 9일 방문한 여수 출입국사무소. 15년 전 화재 참사로 10명이 죽고 17명이 크게 다쳤지만 화재가 났었다는 흔적은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현진 기자
지난 9일 여수 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민원업무를 보기 위해 온 외국인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화재 참사 당시 구조대가 뛰어들어갔을 정문에는 체온 확인 장비가 설치돼 있었다. 2층으로 오르는 중앙계단 옆 안내 데스크엔 청원 경찰이 근무 중이었다. 1층 로비에 설치된 게시판에는 크고 작은 행사 사진과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정문을 다시 나와 건물 옆으로 돌아가면 정면에선 보이지 않는 4층 높이의 외국인보호소를 볼 수 있다. 물론 밖에서만 보면 이곳이 외국인보호소인지, 15년 전 불이 나 10명이 죽고 17명이 다쳤던 곳인지 알 수 있는 표지는 전혀 없다.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불과 연기의 흔적을 이제는 찾을 수 없었다.
※기사 작성에는 사건 당시 언론보도, 판결문,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보도자료,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문, 법무부 종합대책 발표자료, 2007년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공동대책위원회 자료 모음집 등을 참고했다. 당시 상황을 경험한 이들 중 연락이 닿아 대화한 경우는 실명으로 적었다. 화재 사건 당시 언론 인터뷰에 나선 이들도 실명으로 표기했다. 연락이 닿지 않은 출입국사무소 관계자들은 익명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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