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5

[한일관계] [한국사회] [박유하] "박유하가 말하는 박유하" (2016, 4월)

[한일관계] [한국사회] [박유하] "박유하가 말하는 박유하" -- 박유하 글 책을 무료공개...

Sejin Pak
5 April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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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글

책을 무료공개 하기 위한 홈피공개 후 한동안 재판이나 책 관련 일은 꼭 써야 할 때 빼고는 쓰지 않았다. 대신 내가 몸을 두고 있는 "지금 이곳"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4월 18일에 다시 형사재판이 있다. 국민재판 여부가 아마 그날 결정될 것 같다. 국민재판이 되든 아니든, 그 무렵 부터 다시 새로운 홈페이지를 공개 할 생각으로 준비 중이다.

그런데 홈페이지제작을 담당한 분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이하는 그 요청에 부응해 메모형식으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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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일문제 관심 배경

서울출생. 1남 3녀중 막내.

심신이 가장 편안했던 건 초등학교 시절. 나이가 많이 차이나는 언니들 영향을 많이 받았다. 큰언니에겐 공부를 좋아하는 성향에서, 작은언니에겐 프랑스에 대한 관심에서. 엄마에게선 자립심.

문학소녀이자 공부 잘하는 반항아였던 중학교 시절.

비발디의 사계중 겨울을 듣다가 지각하거나, "금지된 장난";을 보러 프랑스문화원에 가기 위해 수업을 빠지기도 했던 고교시절.
열 세살 위인 큰언니의 배우자가 외교관이었고 첫 부임지가 일본이었던 것이 "일본"이라는 나라와 가까워진 계기.

고교졸업직후 도일. 1년동안 일본어학교에서 입시준비. 입시를 위한 유학생시험에서 일본어 1등. 1등이라는 성적은 이 때가 마지막. 내 인생에서 일본어를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였다. 그리고 남들이 흔히 가던 곳을 피해 게이오대학에 입학.

학부시절엔 소설과 프랑스어와 서양영화와 클래식을 끼고 지냈고, 이 기간동안 만났던 선량한 `보통사람`들이 일본에 대한 인식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졸업후에는 학부에 출강 왔던 동경대 교수밑에서 연구하고자 동경대 연구생이 되었으나 결혼하게 되어 귀국.

3년후, 아이/남편과 함께 두번째 유학. 근현대문학 교수진이 충실했던 와세다로 대학원진학. 이후, 공부와 가사및 육아, 아르바이트(한국어 교사,NHK국제국에서의 한국어 아나운서, 사이말통역회사의 파견통역등이 장학금 이외의 주수입원)로 수년간을 보냈다.

그러나 무리한 탓에 유학말기에는 건강악화. 귀국이후까지 통산 15년 정도가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산 기간이었다. 그 결과로 2000년에 큰 수술. 그 때 병원에서 탈고한 책이 첫 단행본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 였다. 이 책에 담은 것은 귀국(1993)이후 몇년동안 본 한국에 대한 생각들.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에서 부지런하지 못한 것이 치명적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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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번역/활동/교류

일본근현대 문학을 전공하는이유로 `문학을 통해 일본인을 알고 싶다`고 "국문학과"선택 때 지도교수에게 말한 기억. 게이오대학에 가려 했던 이유중 하나도, 타교는 요구하지 않았던 사회과목시험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매력. 세계사를 선택해 시험을 치를 만큼 역사 역시 좋아했다.

대학원 시절, 문호 나츠메소세키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는데, 가장 많은 연구가 존재하는 대상이어서 결과적으로 첨단연구방법에 접하게 되었던 것은 행운. 또 선배들과의 이론공부와 일본을 대표하는 평론가 가라타니고진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이 이후의 지적자산. 문학론/사상론/역사론 사이 어디쯤에 있는 글을 쓰게 된 바탕은 아마도 이 때 만들어졌을 것.

박사과정때 와세다대학학회지에 실은 첫 논문은 소세키가 만주/한국을 방문하고 남긴 기행문 비판. 일본의 대표적 학회지에 실었던 첫 논문도 나츠메소세키의 "마음"을 페미니즘/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다룬 논문. 아직 일본인들 사이에 "외국인은 일본문학을 이해못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있었을 무렵이어서 약간의 자부심.

귀국후 몇년동안은 번역작업에 몰두. 당시 아직 소개가 미비했던 일본근현대문학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에서는 무명작가에 가까웠던 오에겐자부로를 포함한 <20>(웅진출판)을 기획/번역. 우연히도 시리즈가 나온 직후에 오에겐자부로가 노벨상을 수상. 당시 일반적이 아니었던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번역한 유일한 책이었기에 웅진의 인터뷰승락. 1995년 2월, 오에선생을 만나다. ("세계의 문학"게재)

1993년에는 가라타니 고진을 한일문학심포지엄(제주)에서 처음 만남. 아직 조선총독부가 남아 있을 무렵 같이 그 앞을 걸었고, 그 위치를 보고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이었다니."라고 했던 그의 말이 일본진보지식인에 대한 신뢰를 만든 또하나의 계기.

이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97 민음사)번역. 아마도 박유하의 번역서중엔 가장 많이 읽혔을 책 .가라타니가 읽은 책을 전부 읽는 것이 당시의 목표였다.

2001년, 교과서문제로 한일갈등이 본격화 되었을 때 일본에서 문제된 교과서채택 반대운동에 앞장 섰던 고모리요이치 교수 초청 강연 기획. 그러나 이 때, 같은 이야기가 공간을 달리 할 때 이해/소비되는 양상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 이후의 한일갈등론집필의 계기.

비슷한 시기에,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역사포럼"이라는 연구모임에서 김철,임지현,문부식,윤해동,김은실,황종연등과 민족주의 문제연구. 민족주의 비판이 많지 않았을 때여서 즐거웠던 한때였으나 이 때의 멤버는 현재 내 책에 대한 입장에서 견해차이를 보이고 있는 상태.

2003년 겨울, 그 해 가을에 나온 "思想"특집집필을 위한 모임에서 만나게 된 우에노치즈코와 나눔의집 방문.

2004년, 고모리요이치,와다하루키,우에노치즈코, 최원식,김철 교수등과 지식인 대화모임"한일, 연대 21"결성, 민족주의를 넘어선 대화 시도. 매년 개최했던 심포지엄 성과를 2008년에 발간.("한일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東アジア歴史認識のメターヒストリー)

이 기간동안, 2001년의 문제의식을 담은 "t;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2005. 일본어판은 2006) 발간. 한국에서는 몇몇 긍정적 서평을 얻었고 문광부의 "우수교양도서";로 선택되었으나 일반독자를 많이 얻지는 못했음. 다만 일본판이 호응을 받고 높이 평가되면서 여성/외국인으로는 처음이라는 "오사라기지로논단상"이 주어짐.

이 책에서 `업자`의 문제를 지적하게 된 계기는 2000년, 2002년에 군산 집창촌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여성들이 감금상태로 죽어간 사건. 계급과 젠더화공간에서의 폭력발동양상에 대한 고찰의 결과.

2007년, 뒤늦게 나츠메소세키론과 재일교포문학론들을 모은 일본어논문집 발간(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ーとジェンダー、2007,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나츠메소세키로 보는 일본근대,2011 문학동네) .이후,최근 몇년간은 "이동"에 대한 관심에 바탕한 식민지출신 일본인(문학)연구. "제국의 위안부"는 "국가/계급/남성의 의지로 이동하는/당하는 개인"에 대한 관심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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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관심

어렸을 때는 `작가의 부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 정서를 해 주거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 "양처"이데올로기를 제대로 내면화. 그러나 공부잘하는 학생이면서 반항아 기질이 중학교때부터 발동. 떠드는 아이들을 향해 `이 악마들아~`라고 일갈하는 선생님을 향해 `우리가 왜 악마인가요?`라고 친구들을 대표해 나서 따지기도 했으니 결코 순종적인 아이는 아니었다.

언니 책장에 있던 `폭풍의 언덕`으로 `어른들의 문학`에 눈떴고 이후 앙드레지드전집을 좋아하는 여고생이 되었다. 중고교 시절 고독할 때의 친구는 늘 음악이었고 고등학교 때 새벽 1시에 기독교 방송 시그널 뮤직으로 나왔던 드보르작 "아메리카"악장은 지금도 그 밤들의 공간이 생각나는 음악.

동물을 좋아한 건 엄마의 영향이지만 동물은 내게, 압도적 약자(언어 소통 불가/일방적 보호가 필요한 존재)에 대한 관심을 길러 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지배와 차별이 발생하는 권력관계에 민감했고 모든 폭력이 끔찍히도 싫었다. 인간의 "폭력"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준 건 주로 한국전쟁 관련 소설. 누구 작품이었는지 잊었으나 사람의 껍질을 벗겨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연장선 상에서 이른바 "양공주"가 등장하는 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이 아마도 훗날 "위안부"에 관심을 갖게 된 원점. 혹은 학부시절 우연히 가능했던 한 한국인 "술집아가씨"와의 만남.

학부때는 막 나온 정보지를 한손에 들고 영화를 보기 위해 동경거리를 배회. 좋아했던 건 비스콘티, 베르이만,그리고 루이말의 어둡고 어두운 영화도 찾아 보았다. 클래식음악동호회 멤버였고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콘서트에 다닌 시기. 아슈케나지와 알반베르크 사중주단을 좋아했다.

나이들면서 미술/건축/사진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지금도 "인간"과 "표현"이 주요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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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갈등의 시작

"화해를 위해서"일본어판이 나온 이듬해 (2007),일본 연구모임 WINC가 "화해를 위해서" 서평회 개최. 그러나 주변 일본진보지식인들이 이 책을 두고 분열.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그 해 여름, 한국에서 정대협활동을 하기도 했던 재일교포김부자의 비판이 잡지게재. 그러나 반론을 쓰는 대신, 비슷한 시기에 나온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를 보냈다. 그 책을 읽으면 박유하가 어디에 서 있는 지 이해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유하가 "일본우익과 친화적"이라고 했던 김부자와 주변인들은 이후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박유하를 일본우익과 다를 바 없는 역사 수정주의자로 비판.
2008년 가을, 이번에는 재일교포 서경식이 한겨레 신문에 "타협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이라는 제목으로 칼럼 게재. 박유하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박유하를평가한 일본의 진보지식인(일본에서는 `리버럴`로 표현)에 대한 불신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년후, 한겨레는 다시한번 재일교포 윤건차의 인터뷰에서 "화해를 위해서"를 "일본보수 지식인의 찬사"를 받은 "섣부른 화해론"이라고 비판. 연말에는 윤건차의 책을 소개하는 단신에서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은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한 책"으로 소개. 한겨레에 전화해 해당기자(한승동)와 통화, 재일교포학자들이 한 얘기를 옮긴 것임을 확인했지만, 결국 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만 받고 끝냈다.
그러나 몇년후, 고발장에 서경식/윤건차교수의 사고(박유하가 말하는 화해는 한일동맹을 강화시키는, 국가간 화해일 뿐)가 그대로 원용되어 있는 것을 발견. 고발사태가, 재일교포들의 생각이 이 기간동안 한국의 진보층 일부에 확산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고, 2009년의 미온적 처리를 깊이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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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13년 "제국의 위안부"발간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를 발간한 건 고발시점에서 10개월이나 이전 일이었다. 그리고 이 때는 조심스럽기는 해도 이 책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서평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인터뷰를 해 놓고도 직전에 게재취소한 매체가 있었고, 정대협도 고발을 검토했었다는 사실을 후에 알았다 .정대협은 요건이 되지 않는다는 변호사의 조언을 듣고 포기했다고 하는데, 사실 책에서는 나눔의 집에 대해서는 두 줄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지원단체 비판은 대부분 정대협 비판이었다.
이후, 해당 학회나 지원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공론화하는 일은 없었고 대신 침묵이 이어졌다.
2014년 4월, 몇몇 유지들과 함께 심포지엄을 개최. 그리고 책을 낸 이후 만나왔던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정대협 필요없다,직접 보상받고 싶다`는 등, 그동안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
이 심포는 한일양국의 큰 주목을 받았고, 고발사태를 만든 또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박유하는 이 심포지엄을 자비로 열었다. 이 아이러니에 답하는 일도 앞으로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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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14년 6월, 고발

2014년 6월초, 박유하가 가장 친하게 대화해 온 할머니가 작고. 그리고 불과 일주일 후에 박유하는 고발당한다.
고발장에는 "`박유하는 예전에 화해를 위해서를 썼다, 그러더니 또 제국의 위안부를 썼다, 심포지엄도 열었다. 그냥 놔두면 앞으로 또 책을 쓸 것이다. 그러니 박유하의 활동을 자제시켜야 한다" 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후 박유하는 위안부할머니를 "자발적매춘부"라 말한 몹쓸 친일파로 전국민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1년 9개월이 지났다.

(이상,2016년2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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