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①] 일본의 위안부 강제연행,정녕 없었는가? 일본이 강제성을 부인하는 이유는? (2016, 3,19 기사)
2016.03.19 10: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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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부과학성은 18일 고등학교 1학년이 사용할 교과서에 대한 검정 결과를 발표하였다. 일부 교과서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위안부 징집을 ‘모집’ 혹은 ‘위안부로 보내졌다’는 표현으로 바꾸어, 일본 정부의 징집의 강제성을 모호하게 하였다.
이러한 위안부 강제성과 관련한 모호한 표현은 일본정부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 즉 군이 강제적으로 어린여성을 끌고 간적은 없다는 일본 정부와 우익의 주장이 교과서에 그대로 실린 것이다.
아베총리도 NHK에 출연해 “일본 병사가 남의 집에 들어가 납치하듯이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위안부로 삼았다는 기사를 보면 모두 분노하게 된다.”고 말했다.(도시환)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위안부의 모집, 이송 그리고 위안소 설치· 관리 경영등의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일본 정부는 군의 모집에서의 강제연행과 강제이송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군이 모집, 이송 그리고 위안소의 설치 관리에 관여했지만, 모집의 강제성은 없었다는 것이다. 모집은 위안부 모집에 대한 군의 요청으로 모집업자가 행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징집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일본의 위안부 강제연행과 강제이송은 없었는가? 그리고 일본이 강제성을 부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일본 정부가 위안부 징집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근거와 이에 대한 반박
일본정부가 강제연행에 대해 자신 있게 부인하게 된 배경은 아사히 신문의 위안부 관련 보도의 취소와 관련되어 있다.
지난 2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스기야마 신스케 일본대표는 “위안부가 강제 연행되었다는 견해가 폭넓게 유포된 것은 요시다 세이지의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에서 한국 제주도에서 많은 여성들을 사냥했다는 허위의 사실을 날조해 보도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보도란 아사히 신문의 요시미 세이지(태평양 전쟁 당시 야마구치 현 동원부장) 증언에 대한 1982년 기사를 말한다. 하지만 신문은 결국 2014년 8월 5일 관련보도를 취소하게 된다.
이러한 아사히신문의 보도취소가 일본정부의 위안부 모집의 강제연행을 부인하게 된 강력한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학연구회는 2014년 10월 15일, 일본정부의 논리적 모순점을 지적한다. 1982년 요시다 증언과 위안부 강제연행(징집)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한 1993년 고노담화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도시환)
고노담화는 위안부가 된 과정의 강제성을 적시하고 있다. ‘위안부 모집은 군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업자들이 주도했는데, 경우에 따라 관헌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고 밝혔다.
일본의 역사학 연구회는 아사히 신문의 기사취소로 인해 고노담화의 근거, 즉 일본정부의 강제연행 인정에 대한 근거가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연구회는 강제동원의 범위에 본인의 뜻에 반한 연행도 포함하여한다고 지적한다.
연구회는 성명에서 “위안부로의 강제동원에는 위안부로의 가택 난입후 연행한 경우를 비롯하여 감언과 사기, 협박, 인신매매가 동반된 본인의 의사에 반해 이루어진 모든 연행이 포함된다”며 “위안부 강제동원은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하여 자행한 반인도적 범죄”라고 밝혔다.
일본정부의 이러한 주장은 고노담화의 계승을 부인하겠다는 뜻이다.
◆ 일본정부의 위안부 강제연행과 강제이송
그렇다면 일본이 주장하듯이, 일본의 위안부 강제연행과 강제이송은 정녕 없었단 말인가? 일본정부의 강변과는 달리, 군위안부 피해자들은 강제연행을 증언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징집(일본정부는 이를 모집이라 칭한다)의 구분과 위안소 관여자들의 분류가 필요하다. (윤명숙)
징집의 형태는 헌병· 경찰· 군등 일본정부에 의한 강제연행과 징집업자 (혹은 징집업자의 하청인)에 의한 징집으로 구분할 수 있다. 후자는 군이 선정한 징집업자가 있고 그 아래로 조직된 하청업자가 있는 피라미드 형태였다. 징집업자의 징집은 주로 취업사기형태가 압도적이었다.
또한 징집→ 인솔→ 위안소도착까지 관여자들의 유형별 분류를 ①~ ④로 구분해 보자. (윤명숙)
①징집인이 헌병 경찰이다. 동시에 인솔자도 군인과 헌병이다. 이 유형에는 일본에서의 징집도 포함된다. 즉 근로정신대에서 일하다 군인이나 헌병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간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②징집인이 징집업자이지만, 인솔자는 군인이다.
③징집인과 인솔자가 모두 징집업자이다. 이 징집업자는 위안소를 경영하기도 하였다.
④징집인은 징집업자의 하청업자이다. 마지막 인솔자는 위안소 경영자이다.
각각의 유형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①번사례를 보자. 징집인은 군인이며, 인솔자도 군인이나 헌병인 경우이다.
최일례(징집 당시 15세)는 물을 길러 가던 중 일본 군인 복장의 2명에게 납치되었다. 진경팽(당시 16세)은 어머니의 농가 날품팔이 일을 돕고 있을 때 일본 헌병4명에게 납치되었다.
여복실(당시17세)은 조선인 순사1명과 군인 4,5명에 의해 납치되었다. 일본인이 여자들을 끌고 간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여복실은 병든 아버지를 위해 집에 있었다. 집에 온 조선 일본인 순사와 군인들이 총검을 들이대며 연행하였다. 다른 여성들은 모두 숨어 있었기에 마을에서는 본인만 연행되었다.
강무자(당시 13세)의 경우, 순사1명과 헌병3명이 집에 와서 아버지의 반항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그녀를 끌고 갔다. 마치 이는 영화<귀향>을 떠올리게 하는 처녀공출이었다.
13세 강무자는 처녀들을 끌고 간다는 소문이 있어 화장장에 숨어 지냈다. 조모가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지 못해 배급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남동생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무자의 나이가 어려 일본군이 끌고 가지 않을 거라 했지만, 배급을 받은 며칠 후 순사 1명과 헌병3명이 집으로 와서 무자를 폭력적으로 연행하였다. 이송도 군에 의한 강제이송이다. 군인헌병 혹은 군인이 부산(헌병5명)→ 히로시마(헌병15명)→ 위안소(군인)로 그녀를 이송하였다.
아베수상은 이러한 폭력 연행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 ‘남의 집에 들어가 납치하듯이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위안부로 삼았다는 기사를 보면 모두 분노하게 된다’고 말한 아베 수상은 이 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것인가?
여자근로정신대로 끌려 간 후 힘든 생활로 인해 도망치다 위안소로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 강덕경이 이 경우이다.
그녀는 담임의 권유로 정신근로대에 지원하였다. 요시노국민학교 고등과 1학년의 덕경의 담임은 정신대로 가면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했다. 도야마의 후지코시 공장에서 일하던 덕경은 공장일이 힘들어 도주 중 헌병에게 체포, 위안소로 끌려갔다.
이처럼 여자근로정신대의 징집은 학교의 담임이나 교장의 ‘권유’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지원자들은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말에 정신대에 지원하게 되었으나, 실제로 하루 10시간 이상의 노동을 강제 당하였다. 공부할 기회도 없었다. 귀국할 때 손에 돈을 들고 온 사람도 없었다.
또는 담임권유로 여자근로정신대로 지원하였으나, 일본에 도착하자 처음부터 공장에서 일하지 않고 군위안소로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 박순이는 국민학교 6학년의 담임에게서 일본에서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지원하였으나, 일본의 도야마에서 보름동안 훈련을 받았으나 공장대신 위안소로 끌려갔다.
②의 경우는 징집업자가 징집한 후, 군인이 위안소로 끌고 간 유형이다. 이 경우는 주로 감언과 취업사기로 징집된 경우다. 전금화는 같은 마을의 여성이 청진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따라 갔으나, 청진역에 도착하자 일본군이 칼로 위협하여 청진역에서 위안소로 끌려갔다.
황금주는 사기와 강제로 징집된 경우이다. 반장의 아내는 황금주가 식모로 일하는 집의 여주인(양모)에게 각 세대에서 1명은 군수공장에 가야한다며 딸을 보낼 것을 강요하였다. 아버지의 약값으로 진 빚을 갚아야 하는 황금주는 일본의 군수공장에 3년 계약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양모의 딸 대신 지원하였다.
③의 경우는 징집인과 인솔자가 모두 동일인이다. 김복동은 취업사기에 해당된다. 마을의 구장과 반장은 아들이 없으면 정신대에 딸을 내놓으라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마을에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이들은 정신대는 군복 공장에서 3년간 일하는 것이라며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였다. 김복동은 징집인에 의해 위안소로 끌려갔다.
◆ 일본이 강제연행을 부인하는 이유 – 국제법 위반
일본정부가 위안부 강제연행을 강력히 부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강제연행이 국제법 위반을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일부 지식인은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동원되지 않았고 민간인 징집업자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은 위안부에 대한 행위에 대해 국가가 책임질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포주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국가의 책임은 국제법에 근거한 범죄와 손해에 대한 배상을 말한다. 일본정부는 줄곧 국제 인도법 위반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윤명숙)
이에 대해 일본의 국가책임과 국제법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자.
△여성 및 아동의 매매금지조약(1921)
일본정부의 위안부 관련 행위는 여성 및 아동의 매매금지조약(1921)의 위반에 해당된다.
이 조약의 1조에 의하면 21세미만의 미성년 여성의 매춘은 본인의 승낙여하에 상관없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2조는 성년여성의 경우에도 사기나 폭행, 협박, 권력남용, 그 밖의 모든 강제적 수단이 개입되었다면 형사 처벌을 묻는다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조선위안부에 대한 징집· 이송· 위안소관리등에서 일본정부 혹은 군이 사기나 폭행 혹은 권력남용, 강제수단을 가한다면 이 조약이 적용 가능하다.
또한 일본정부는 군이 위안부 모집을 요청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데, 설령 일본군 혹은 조선총독부가 직접 강제동원을 하지 않은 경우에도 일본정부는 징집업자들을 통한 위법행위를 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이 조약이 적용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윤명숙)
즉 일본군은 징집업자의 선정과 통제를 감독해야 할 책임자로서, 이러한 범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에서 활동하는 모든 징집업자의 범죄를 방치 묵인하고 있었다. 이는 징집업자가 일본정부의 대리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강정숙)
조선에서의 징집업자의 약취와 유괴 그리고 이에 대한 경찰의 묵인 사례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하윤명의 기사로 파악할 수 있다. (강정숙)
하윤명은 유괴범으로 체포되었다. 이 남자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각 농촌을 돌면서 농부의 딸들에게 경성에 가면 좋은 직장이 있다고 속이고, 베이징· 텐진등으로 조선 처녀들을 창기로 팔아넘겼다.
그런데 경찰이 이 자를 검거는 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언급이 없다. 조선총독부가 이들을 처벌하였다는 내용은 찾아봐도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윤명은 다시 인신매매로 검거되었다는 기사가 나오나, 엄정한 취조를 받고 석방이 되어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다. 이는 하윤명이 검거되었을 뿐,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하윤명은 싱가포르에서 위안소를 경영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결국 일본정부는 하윤명의 불법행위를 묵인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정부가 징집업자의 불법행위를 알고 방치한 것은 ‘여성 및 아동의 매매금지조약’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단 이 조약의 적용에 걸림돌이 되는 부분은 일본이 조약 체결 시 내건 유보조항이다. 일본은 1925년 이 조약을 체결할 당시, 유보조항으로 식민지를 효력범위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정부의 강제성과 불법성의 인지와 방치가 이 법에 적용되어도 유보조항으로 처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인 군위안부가 일본국적의 선박이나 철도를 통해 이송되었는데, 선박이나 철도는 해당국 영토로 취급된다. 따라서 조약은 일본의 불법행위에 적용 될 수 있다. (윤명숙)
또한 징집뿐만 아니라 이동과 위안소에서의 노예화까지 고려하면, 일본의 조약위반에 대한 책임이 부과된다. (도시환) 즉 식민지 여성으로서의 한국인 피해자들은 강제동원, 이동, 노예화가 한국 외의 지역에서 발생하여 조약상의 범죄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이 강제연행을 부인하는 이유 – 국민적 자존심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연행과 성 노예화를 강력히 부인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국민적 자존심과 관련 있다는 분석이다. (우에노 지즈코)
즉 자기惡役 史觀에서 벗어나 자국에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正史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미래 세대인 학생들에게 自虐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전쟁과 학살이라는 어두운 면은 가르쳐도 성에 대한 어두운 면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국가 자긍심의 관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인식한다.
이러한 사관은 18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일본 교과서의 검정 결과에도 발견된다. 일본 고교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한 서술에서 일본정부의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 표현이 모호해진 것이다.
일본의 교과서 채택 점유율 2위 출판사의 경우, 기존교과서의 “위안부로 끌려갔다”에서 “위안부로 전지로 보내졌다”로 표현이 바뀌었다. 또 다른 출판사는 “일본군에 연행되어”를 “식민지에서 모집된 여성들”로 바꾸어 강제 연행의 표현을 삭제하였다.
이처럼 미래세대의 학생들에게 국가가 관여한 강제 성노예화라는 不淨의 역사를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국가의 위안부 강제성이 일본의 어린 학생들에게 性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도 일본이 위안부 강제성을 부인하는 이유가 된다.
일본 중학교교과서의 위안부 기술은 0.5%점유율을 보이는 출판사 한곳을 제외하고 모두 삭제되어 있다. 현재 중학생들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처녀들과 비슷한 또래여서, 어린 학생들에게 역사교과서의 성노예등을 가르치면 원조교제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우에노 지즈코는 일본의 여자 중고생들은 이미 원조교제등 성적 접근에 노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일본 청소년으로부터 일본군 위안부에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한다고 해서 어떤 교육적인 효과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오히려 우에노는 正史라는 단 하나의 정통화된 국사(national history)를 만들어냄으로써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사관의 대립을 감추어 버린다고 비판한다.
◆ 일본위안부의 프레임 전환 필요
일본은 지난 12월 한일 간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에서 군의 관여를 표명하였음에도, 지속적으로 군의 위안부 강제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는 아베 정부가 역사수정주의의 난폭한 역주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실증이 없다면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강제연행을 언급하는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본정부와 우익은 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군위안부 자료를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비판한다. (윤명숙)
일본 정부는 경찰 자료, 척무성(식민지 통치 사업 담당) ·내무성의 식민지 관련 자료, 방위청에 있는 방대한 업무 일지와 종군 일지, 법무성과 외무성의 전범 재판자료, 후생성의 복원관계자료등을 지금까지 내놓지 않고 있다.
일본이 위안부 강제성을 역사적 실증으로 부인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모든 자료를 공개하여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또한 우리는 위안부와 관련한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우리는 일본정부와 우익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징집의 강제연행 프레임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협의의 강제성이라 불리는 강제연행 유무의 프레임에서 총체적 강제성의 프레임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정현) 이는 위안소 운영과정에서의 강제성과 관련된 ‘성노예’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이러한 프레임을 선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정부가 위안부 강제성을 부인하는 주장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연상하게 한다. 일본은 국가적으로 性과 관련된 부정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관념을 상정하고, 이러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국제법에 위배되는 위안부 강제연행이 없었다는 주장을 눕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끝없는 일본의 역사주행과 억지 논리에 제동을 걸고 민족의 자긍심과 강제된 여성의 인권회복이라는 동시적인 목표를 향하여 우리나라가 위안부 프레임을 선도할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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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윤명숙, 최민순 옮김 (2015),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도시환(2015),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법적 과제”
우에노 지즈코(2014),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강정숙(2010), 「일본군 위안부제의 식민성 연구 : 조선인 위안부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조정현(2014),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국제법적 검토”,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
김관원(2015),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대한 일고”, 동북아역사재단
조시현(2014),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역사와 법적 책임”
요시미 요시아키외, 김경원외 옮김(2014), 「그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를 공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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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규기자 ondol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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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성노예) ② ] 일본군 조선인 위안부가 매춘부? (2016 3 22기사)
2017.12.28 00: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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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와 우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논리의 하나로 매춘패러다임을 내걸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해외에서 일하는 창기인 ‘가라유키상’의 일종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돈벌이를 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본군 위안부들은 성노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7년 6월 14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더 팩츠’라는 제목의 글에 이러한 주장이 펼쳐진다. “일본군에 편입된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가를 받은 흔하디 흔한 공창제도에서 일하던 여성들이었다. 위안부 대부분을 영관급 장교보다 훨씬 수입이 많았으며 위안부의 대우는 양호했다는 증언도 많다.”
정말 그럴까?
◆ 성노예란?
성노예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노예는 상품과 다름없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서, 소유자의 통제에 놓이게 되된다. 그러므로 노예의 노동과 행동은 자유의사와는 무관하게 소유자의 강압에 의해 결정된다.
대표적인 노예의 예가 상품노예이다. 1787년 노예를 실은 배가 항로를 이탈하여 선박의 물이 부족하게 되자, 선주는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후 선주는 노예를 잃은 것에 대해 보험금을 청구한다. 즉 노예는 화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오승진)
최근 노예의 정의는 상품노예의 개념을 넘어, 소유권과 통제권의 개념을 뜻한다. 1926년 「노예제금지협약」에서 “노예제는 소유권에 속하는 권한의 일부 혹은 전부가 그 사람에게 행사되어지는 그러한 사람의 지위 또는 조건”으로 정의된다. (조정현) 즉 노예제를 규정하는 핵심은 소유권한의 행사, 통제권한 행사이다.
노예화의 판단 요소를 좀 더 살펴보자. 통제권한이 행사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자기 결정권이 제한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자기결정권 박탈이란 물리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뿐만 아니라 강력한 심리적인 구속을 당하는 경우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혹은 아내가 남편을 일거수일투족 감시 통제한다면, 감시당하는 쪽은 곧 노예이다. 사람들은 가끔 이러한 구속과 통제를 사랑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성노예의 판단 근거는 무엇일까? 국제재판소에서 노예화로 기소한 이유가 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구유고국제형사재판소(ICTY)의 포카(Foca)사건이 그 예이다. 보스니아의 포카 지역에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휘관들은 보스니아계 이슬람 여성들에 대하여 행한 사건으로 기소되었다. 감금, 성적학대가 기소의 이유였다.
또한 ICTY는 노예화 여부를 판단하는 요소로 “이동의 자유에 대한 통제, 물리적 환경의 통제, 심리적 통제, 도망을 방지하는 조치, 배타적 지배를 위한 힘의 사용, 잔혹한 대우, 性과 노동에 대한 착취 및 통제”등을 들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은 상품노예처럼 극단적인 소유권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에게 행사된 통제는 관습국제법상 인도에 반하는 범죄인 노예화에 해당한다고 하였다.(오승진)
◆일본군 조선인 위안부 = 성노예
노예화를 일본군 위안부에 적용해 보자. 강제수단에 의한 징집, 감시 하 이송, 나아가 위안소에서의 감금, ‘性 노동’에 의한 자기 결정권의 결여, ‘성 노동’의 중단에 대한 자유의 박탈등이 성노예와 관련한 자기결정권의 박탈에 속할 수 있다.
위안부의 자기결정권의 박탈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살펴보자.
먼저 징집은 강제징집과 취업사기가 주를 이루어, 본인의 의사에 반한 강제연행이었다.
고노 담화에 밝혀진 것처럼 관헌이 직접 징집에 가담하거나, 군에 의해 선별된 징집업자가 부상병 간호· 여공 모집등의 미끼를 던지고 농촌 여성들을 유혹하였다.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미리 받고, 이에 대한 대가로 상이군인을 간호하게 된다는 감언에 속아 종군위안부가 된 사례도 있었다.(강만길) 자유결정권이 상실된 성노예가 된 것이다.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감금과 강제로 특징 지워진다.
군인들에게 ‘위안’을 제공하는데 있어, 군 위안부는 신체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윤명숙) 군위안부는 하루 최저 15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하고 공휴일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 위안부는 외출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들은 거의 감금상태였다. (강만길) 군기밀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군위안부의 위안소 외출이 엄중 단속된 것이다. 군 통제의 위안소 설치도 군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군위안부의 산책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구역으로만 산책할 수 있었다. 외출은 병참장교의 허가 없이는 지정장소를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위안소는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감금해두고 군인들의 폭행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군위안부의 실태는 참혹하였다.(윤명숙)
허약해진 여성은 감금하고 식사도 제공하지 않았다. 성병을 치료할 수 없는 여성은 군인이 끌고 가 산에 버렸다.(이옥분 증언) 도망친 여성이 끌려 돌아오기도 하고 군인에게 폭행당하기도 하였다.(김순덕 증언) 술 마신 군위안부는 경영자가 군에 통고하여 군인이 구타하였다.(이순옥 증언). 투신자살 미수로 부상당하는 경우고 있었다.(문옥주 본인 경험 증언) 정신이상으로 입원하기도 하였다.(임금아 본인경험 증언)
이러한 잔혹한 대우와 ‘노동’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진 위안소는 성노예화에 해당되었다.
또한 위안부들은 최 일선 전투에서 ‘전사’하기도 하였다. 일본군들은 전투가 개시되면 위안부들을 임시 간호부로 이용하다, 퇴각하면서 위안부들이 들어 있는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고 도망갔다. 위안부들이 포로가 되어 군사 비밀이 누설될 것을 막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강만길)
그렇다고 위안부들은 ‘노동’에 대한 보수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군인들은 위안소를 이용하기 위해 군표를 구입하여 위안부에 주어야 한다. 하지만 군표는 경영자가 회수하였다. 경영자는 전쟁이 끝나면 돈을 지급하겠다고 설명하였으나 경영자는 군인 수를 장부에 기재만 할 뿐이었다.(김복동증언)
“아침마다 표 계산을 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난 계산을 하거나 말거나 표만 갖다 주고 왔다. 하루에 한 번씩 정산을 했는데, 주인을 우리에게 돈을 조금 주고 나머지 돈은 저금했다고 했지만 얼마나 저금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는 증언도 있다.(강만길)
그렇다고 급여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경영자를 두고 형식은 매춘업이나, 그 이익은 경영자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한 위안부는 “우리 여자들은 돈을 받지 않았다. 위안소는 산 속에 있었는데 돈을 쓸데도 없었고 쓸 일 도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강만길)
이처럼 ‘노동’으로 번 돈은 업주가 저금등으로 보관하였으나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게 되자 무일푼으로 귀국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강만길)
결국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는 위안소에서 실질적으로 감금되었고, 결과적으로 무보수 인 채로 노동하다, 병으로 죽거나 전세가 악화되어 전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본우익들은 위안부를 자발적으로 돈을 버는 자라 불렀지만, 그들의 실상은 자기결정권이 박탈된 성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출신 위안부 VS 조선출신 위안부
일본 우익과 정부의 일부 관료들이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닌 가라유키상이라 강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주장의 일부는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는 출신국 별로 구분되었다. 즉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 출신 위안부와 식민지 출신 위안부로 나눌 수 있다.
일본 출신 위안부는 일본 우익들의 주장처럼 본의의 의사에 따라 돈을 벌기위해 종군위안부가 된 경우였다.
이들은 21세 이상의 성인 중 매춘 경험이 있는 자가 지원하였고, 종전 후에 빚을 갚고도 상당한 돈을 모은 이도 있었다.
일본인 위안부는 이를 증언하고 있다.(오노자와) 1925년 태어난 야마우치 게이코는 만 10세에 가난으로 동경의 게이샤 포주에게 300엔의 전차금을 받고 팔려간다. 그녀는 게이샤 친구로부터 남양의 전선 기지에서 일하면 포주에게서 빌린 돈인 전차금을 갚아준다는 말을 듣는다. 게다가 ‘나라를 위하는 일’이며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 된다’는 말에 위안부로 지원하였다.
1942년 3월, 추크섬과 토노와스섬에 건너간 그녀는 현지에서 장교 위안부가 되었고, 귀국할 때 1만엔 이나 되는 돈을 벌었다. 하지만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번 돈의 가치가 없어졌다.
반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징집과정에서 본인의사에 반하여 위안소로 끌려간 경우이다.
관헌· 군의 강제연행과 군과 연계된 징집업자들의 취업사기로 징집된 것이다. 게다가 매춘 경험과 성경험이 없는 미성년자들이 위안부에 다수 섞여 있었다.
또한 여성들이 군의 허가 없이 자유의사로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처럼 폭력과 사기로 징집되어 감금된 상태에서 ‘노동’을 그만 둘 자유조차 빼앗겼다.
그러므로 일본출신 위안부와 조선출신 위안부는 위안부가 되는 배경, 노동의 강도, 노동의 대가등이 달랐다. 전자는 매춘부이나, 후자는 성노예인 것이다.
◆ 일본 출신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징집의 모습을 달리한 이유
이렇게 일본 출신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징집의 모습을 달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에는 미성년자 강제 징집, 취업사기가 왜 이렇게 성행했을까?
이는 일본정부가 일본 내의 불법 위안부 모집을 강력히 통제하였으나 식민지에는 예외를 두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인신매매, 유괴(기만, 유혹등을 이용), 약취(폭행, 협박등을 사용)등을 단속하기 위해, 1938년 내무성 통첩과 육군성 통첩을 시달한다. 이 통첩들은 일본에는 나왔으나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1937년 말부터 일본 각지에서 군위안부 징집에 있어 유괴와 약취가 성행하자, 내무성과 육군성은 이 문제가 사회질서를 어지럽게 할 뿐만 아니라 국제법을 위배한다는 사실에 주의하였다.
여기서 국제법은 일본이 1921년 가입한 「부인 및 아동의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을 말한다.
이 조약은 21세미만의 여성에게는 본인의 승낙이 있어도 성매매를 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또한 21세 이상의 여성에게 사기 및 강제의 수단으로 성매매를 권유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유괴· 약취· 21세 미만에 대한 징집을 엄격히 통제하여 위안부 징집이 국제법을 어기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내무성은 1938년 2월 증명서 없이 유괴 약취로 징집하는 업자들을 단속하도록 각 현에 지시를 내리고, 중국으로 도항하는 접객부를 21세 이상의 매춘 경험자로 제한하였다.
내무성 통첩이 나온 며칠 후, 3월에 육군성 통첩이 일본에 시달되었다. 징집업자들의 인선이 적절하지 못해 유괴가 벌어지고 있어, 각 파견군의 통제 감독 아래 징집인 선정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동시에 징집업자는 각 징집지역의 경찰 및 헌병과 긴밀히 협력해 나가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내무성과 육군성의 이러한 통첩들은 조선에는 시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징집에 엄격한 제한을 둔 반면, 조선등의 식민지에는 징집에 유괴 약취의 제한이 없었다.
이렇게 양성의 통첩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은 배경은 조선이 국제법 예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21년 조약에 가입 시, 유보조항으로 식민지를 조약 적용 제외 지역으로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아 조선은 취업사기, 강제 연행, 미성년자 징집등이 난무하는 최적의 징집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출신 위안부는 자유의지에 의해 해외매춘을 하는 가라유키상인 반면, 조선출신 위안부는 사기와 강제 징집, 미성년자 징집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가 된 경우이다. 그러므로 일본군 조선 위안부는 자유의지로 돈 벌기 위해 상행위를 하는 매춘부가 아니었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피해자의 울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의 성격이 성노예인 점에 비추어, 위안부라는 용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오승진)
위안부는 가해자 입장에서의 표현이어서 피해자입장에서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제법의 적용을 위한 법적인 개념으로 성노예라는 표현과 위안부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또한 일본이 지난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해도 불구하고 고노회담 계승을 부인하는 발언을 지속한다면, 국제법 위반에 대한 추궁의 필요성 검토도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군 성노예에 어떠한 국제법이 적용될 수 있을까?
먼저 일본군 위안부는 인도에 반하는 죄가 적용될 수 있다. 즉 이는 “전쟁전 또는 전쟁 중에 민간인에 대한 살인, 절멸, 노예적 혹사, 추방, 기타의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근거한 박해행위”를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와 관련된 국제법으로 헤이그의 육전조약(1926)위반이 있다. 일본은 1912년 이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의 46조는 국제관습법으로 점령지에서 “집안의 명예와 권리, 개인의 생명, 사유재산”등을 존중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1907년 헤이그 협약 규정에도 “가족의 명예와 권리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의 조항이 있다. 또한 동 조약은 “여성의 명예에 대한 여하한 공격 특히 강제 매춘등 여하한 형태의 외설적 공격으로부터 여성을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조례 제6조 c항, 그리고 연합국 통제 위원회법 제10호, 그리고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 조례 제5조도 노예화를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성노예)는 국제노동기구 ILO협약 29호, 즉 강제노동금지규약에도 위배될 수 있다.
일본은 1932년 이 협약에 비준하였다. ILO 협약 권고 적용에 관한 전문가 위원회는 수차례(1996, 1997, 2001~2005,2007)에 걸쳐 일본의 ILO 강제노동협약 위반여부에 대해 개별 사안별 검토의견서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제도가 제 29호 협약이 금지되는 강제노동행위이며,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행위는 ILO강제노동협약상 의무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하였다. (조정현)
이어 일본은 1925년에 비준한 1904년의 ‘醜業을 행하기 위한 여성매매규제 협정’, 1910년 ‘추업을 행하기 위한 부녀매매금지협정’, 1921년 ‘여성과 아동의 매매금지조약’을 위반하였다.
특히 강제노동조약과 추업조약을 일본이 위반 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는 일본사법부의 판결도 나와 있다.
이 재판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으로, 1991년 12월 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최초의 소송이다. 2003년 7월 2심판결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입법의 필요성을 명시하고 일본 국가의 행위와 책임을 인정하였다. (김관원)
일본군 위안부 실태에 대해 “노예상태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가 있었다고 추인할 수가 있다.”고 재판부는 인정하였다. 하지만 개인보상의무는 없다고 하였다.
재판부는 “강제노동조약 및 추업조약에 위반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피항소인에게는 이런 조약상의 의무위반에 따른 국제법상 국가책임의 해제 방법으로서 일본 국내의 보상입법을 하는 것도 하나의 시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단 이는 국회의 재량에 속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일본 사법부의 판단처럼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는 입법 정책적 해결방안을 모색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불신과 울분을 누그러뜨려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관원)
<참고 문헌>
윤명숙, 최민순 옮김 (2015),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오승진(2013), “국제법상 노예제의 금지-위안부와 관련하여”
도시환(2015),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법적 과제”
조정현(2014),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국제법적 검토”,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
김관원(2015),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대한 일고”, 동북아역사재단
오노자와 아키네(2014),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공창제도”, 「그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를 공격하는가」
강만길(2008), “일본군 위안부의 개념과 호칭문제”, 「한국민족운동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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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② ] 민족담론과 페미니즘담론의 대립과 이들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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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규기자
[일본군 위안부① ]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지휘에 의한 현대판 성노예
2014.03.10 07:02
조성규기자
[일본군 위안부① ]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지휘에 의한 현대판 성노예
2014.03.10 0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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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 정부는 군국주의의 “커밍아웃”을 벌이고 있다.
일본 정부가 지난달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증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 장관은 “일본정부의 기본입장은 고노담화를 계승하는 것”이나, “기밀을 유지하는 가운데 검증은 필요하다”며 우회적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고노담화의 검증은 결국 이의 무력화를 위한 포석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베정부는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부인하는 와중에, 집단자위권 도입, 최종적으로 일본평화헌법 9조 개정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일본전문가들은 일본의 우경화 확산은 경제적 침체와 외교적 지위의 하락 등으로 추락하는 일본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전략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사회가 국가주의 우경화속에서 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대응은 우리나라의 민족의 자존심 문제를 넘어서 여성인권과 인종주의 폭압성에 대한 반격으로 이해되고 있다.
일본정부가 부인하고자 하는 고노담화의 핵심인 강제성 문제와 성노예제를 검토해본다.
◆ 강제성
일본과 한국등과의 일본군 위안부 논쟁의 핵심은 2차 대전 기간 중의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강제성여부이다.
전통적인 강제성은 다른 사람의 소유 또는 통제 아래에서 그 권위에 복종하여, 강압에 의해 잉여가치 착취나 최소한의 생계를 꾸려 갈 생산물을 제외한 전 가치를 착취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생산물의 착취라는 현상적인 문제보다 강제성의 본질은 본인의 의사에 반한다는 전제 하에 착취가 이루어지는 노예화의 전 과정으로 이해되어진다.
강제성에 근거한 노예의 여부가 노동력의 착취에 주목하기보다 자기결정권의 박탈이라는 “지위나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결정권 박탈은 착취의 전 과정에 진행되게 된다. 착취의 시초 단계인 전통적인 매매나 거래 혹은 징집에서 뿐만 아니라 이송, 노동과정등에서 이 결정권 박탈이라는 지위가 유지된다면 이는 곧 강제성에 의한 노예화를 뜻하게 된다.
이를 테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낯선 장소로 놓이게 됨으로써 자기 결정권을 상실 당하거나, 물리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지 않는 경우에도 강력한 심리적인 구속을 당한 상태에서 착취를 당하는 경우도 노예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이라는 전체 흐름 가운데, 전자는 여성들이 징집되는 시점의 강제성를 의미하고, 후자는 위안소 생활에서의 강제성을 나타내게 된다.
◆ 일본군에는 위안부가 왜 필요했나?
일본제국주의 군대가 그 군인들의 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안소’를 처음으로 설치한 것은 대체로 1932년의 상하이사변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군인이나 민간인을 막론하고 일본인 남자들의 해외 진출에는 여성들이 동행하였다.
1907년의 경우 당시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여자가 총 4만 2332명이었는데 그중 창기와 작부가 2562명이었다. 전체 여성의 6%가 창기나 작부였던 것이다.
1870년대 이후 일본의 태평양지역의 교두보였던 싱가포르에 낭자군이라 불리는 일본인 매매춘여성들이 각 지역에 존재하였다.
메이지시대의 최고의 지식인으로써 脫亞入歐론을 주창한 후쿠자와 유키치도 ‘일본국 인민의 해외이주 식민사업의 발전에 따라 단신 부임하는 남성에게 쾌락을 주기 위해 창부가 필요하다.’거나 ‘해외 주둔하는 병사의 氣를 和하게 하기 위해서 창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두고 여성들로 하여금 군인들을 ‘위안’하게 한 것은 점령지구 안에서 주민에 대한 일본군의 강간을 방지하고 군인들의 성병감염을 방지하며 군사기밀의 누설을 막기 위함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위안부로서 포로가 된 여성들을 심문한 미국 군인이 ‘위안부라는 용어는 일본군 특유의 것이다. 전투가 필요한 곳에는 어디든지 위안부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보고가 있다.’고 말했다. 위안부를 데리고 전투를 치렀다는 사실은 일본군에만 있는 특수현상이라는 것이다.
◆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나?
1993년 일본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담화를 통해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고 감언에 의하거나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또 관헌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음이 명백해졌다.’고 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시인하였다.
이러한 군의 요청에 의해 일본군대의 특수현상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즉 침략전쟁의 전선이 확대되자 일본 매매춘 여성들로만 수요를 충당 할 수가 없게 되어, 군이 업자들을 동원해 여러 방법으로 조선여성들을 일본군의 품에 안기게 하였다.
▶ 유괴와 인신매매
일본이 도발한 중일 전쟁의 전선이 확대되어 위안부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조선에서는 대규모의 처녀 유괴단이 생겼다.
1939년의 한 신문기사에 의하면, 농촌의 처녀 65명을 유인하여 창기로 팔아먹은 처녀 유괴범 부부가 붙잡혔다. 이 유괴단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회에 나가고 싶어하는 농촌여자들을 유괴하여 중국 각지에 700원부터 1000원까지 창기로 팔아먹었다.
이처럼 유괴에는 사기가 일반적으로 따라다녔다. 유괴범들은 16세 정도의 소녀들을 상대로 서울 가서 좋은 직업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속여 팔아먹었다. 유괴단들은 유괴한 소녀들을 일단 서울시내의 유곽에 팔았다가 가족의 추적을 피해 다시 중국 등지의 위안소를 전매하였다.
또한 가난한 농촌의 부모들에게는 부유한 집의 수양딸로 알선해준다고 속인 후 1년 이상 서울에 데려다 두고 부모들을 안심시킨 후 백지위임장을 받아 중국등에 팔아 넘겼다. 대표적으로 배명준부자가 소녀유괴단을 이끌었다.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로 1942년에 귀국한 조선 주재 미국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특히 언더우드 보고서에는 ‘수많은 한인 처녀들을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조달하여 중국등에 보내고 있는데 대하여 심대한 원한을 심어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대일 증오심의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인신매매
위안부를 동원하는 또 다른 방법은 농촌 소녀들을 일정한 금액을 미리 주고 사는 방법이다. 인신매매를 뜻한다. 물론 처음부터 위안부로 동원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내세우는 경우는 없고, 부상병 간호등 그럴듯한 업무를 내세웠다.
이처럼 서비스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고, 조선의 젊은 여성들이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미리 받고, 상이군인 간호등의 감언에 속아 전선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들은 채무에 의해 성노예의 처지에 빠졌다.
▶ 취업알선 사기
농촌여성들은 취업해 주겠다는 말에 속거나, 실제 근로정신대로 소집 된 후 위안부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식민지지배의 결과로 빚어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의 농촌지역의 소녀들을 공장 여공으로 취직 시켜 준다고 속여 위안부로 팔려나간 경우와, 근로정신대로 소집되어 갔다가 굶주림을 못 이겨 도망했으니 잡혀서 위안부가 된 경우인 것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992년에 조사한 위안부 출신 19명의 증언에 의하면, 그중 12명이 ‘일본 공장에서 일할 여자들을 모집하러 온 사람에게’, ‘취직을 시켜준다는 사람이 있으니 일본으로 같이 가자고 해서’ ‘일본의 군수공장에 3년 계약으로 일을 하러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해서’등등으로 따라갔다가 결국 위안부가 되고 말았다.
◆ 위안소의 생활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설치된 위안소는 대개 세 가지 형태이다. 우선 일본군이 직접 경영한 위안소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의 감독과 통제 아래 있는 군인과 군속 전용의 위안소이며, 또 다른 하나는 군대가 민간의 매매춘시설을 일정한 기간 군대용으로 지정하여 이용하는 위안소였다.
위안소의 위안부는 일본군인의 성노예였다. 위안부는 군인을 위안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많은 경우 40~50명의 군인의 성의 노예가 되었다. 만약 거절하면 매를 맞거나 전기고문을 받았다.
또한 위안부들은 군대의 작전 지역 안에서 군인들의 상대가 되었기 때문에 거의 감금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병참장교의 허가 없이는 지정장소를 떠날 수 없었다.
위안부들의 산책도 매일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로 제한하고, 산책구역도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들은 감금된 죄수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심지어 최전방 전투지구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위안행위를 시킴으로서 위안부들이 군인과 전사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버마전선에 참가했던 한 일본장교는 ‘ 한국인 정신대원들은 일본제국의 위대한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투 지역에 까지 자원해서 들어와 장병들을 위안하고 잠자리를 같이 했다. 정신대의 봉사는 가장 큰 사기 앙양이었다.’라고 증언하였다.
▶위안의 대가
위안부들의 위안행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 보수를 받는 행위였다. 군인들이 위안을 받으려면 돈이나 군표를 주고 위안권을 사야 했다.
실제로 위안부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보수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표를 받았다. 설령 돈들 받아도 위안소가 산속에 있는 경우에는 돈을 쓸데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처럼 표를 받았거나 대개 업주가 저금등으로 보관한 경우,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 무일푼으로 귀국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위안소의 생활은 실질적으로 감금상태였고, 군인들과 함께 전사하는 경우도 있었고, 무보수로 철저히 노동착취를 당했다. 곧 전형적인 성노예였다.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이라는 전체 흐름에서, 조선여성들은 자기결정권의 박탈이라는 강제성의 전형에 놓여있었다. 그 강제성은 정의에 적합한 노예였다.
징집시점의 강제성은 식민지배하의 가난한 조선 농촌 농민들과 그의 딸들에게 진실을 은폐하는 기망으로 조선의 처자들을 위안부로 만들었다.
조선 여성들은 감언등으로 유괴, 인신매매, 취업사기를 당해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들을 징집하는 업자들은 일본군의 요청에 의해 조선처녀들을 포획하였다. 자신의 의사에 철저히 반하는 기만이었다.
위안소 생활에서의 강제성은 자기결정권이 박탈된 감금된 죄수의 삶이었다. 여기에 인간성의 유린과 육체적 수탈로 이어졌다. 게다가 해방 후 무일푼으로 고국에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자신의 노동의 가치는 완전히 착취당하였다. 이는 정확히 노예의 요건에 들어맞았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지휘에 의한 현대판 성노예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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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② ] 민족담론과 페미니즘담론의 대립과 이들의 연합
2014.03.11 09: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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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윤병세 외교부장관이 유엔 인권이사회의 기조연설에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해야 한다고 발언한데 대해, 오카다 다카시 주 제네바 일본 차석대사는 6일 같은 장소에서 위안부 문제는 이미 배상을 통해 법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굽혀지지 않는 왜곡된 시각은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 책임자 처벌이라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법의 종착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인식의 심화와 이에 바탕을 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해결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는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위안부에 대한 내재적 인식의 보유는 실천의 영역에서 흔들림 없고 유효한 문제 해법을 제시해 준다. 특히 인식에 대한 카오스적 혼돈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 시급성이 요구되어진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시각은 통일되지 못하고, 치열하게 사상투쟁처럼 진행되어 왔다.
일본군 위안부 논쟁의 두 기축은 위안부의 존재가 상대주의에 기초한 식민지하의 민족 억압이라는 견해와 보편주의에 근거한 성차별의 여성 억압이라는 관점이다.
조시현교수는 이와 같은 민족의 아픔에 의존한 내셔널리즘 담론과 여성의 인권과 평화주의에 기댄 페미니즘 담론의 대립은 과거 80년대 한국운동권의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의 노선투쟁과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각 진영들의 담론은 무엇이며, 이러한 갈등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 민족담론
국가적 민족 차원의 접근에 의하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폭력은 일본 군국주의의 조선 식민지에 대한 억압구조로 이해한다. 민족중심주의 이론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미시적 접근에 국가정책의 거시적 안목이 중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민족 간의 억압이 성적억압에 어떻게 더해지고 여성에게 작용했는가, 민족 간의 착취가 어떻게 국가기구를 이용하여 행해졌는가라는 민족의 특수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러한 시각에 기초하여 일본이라는 국가의 법적 배상 책임과 사과를 일관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는 국가적 배상이 아닌, 도의적으로 개인별 위로금 전달에 주 목적을 둔 ‘여성을 위한 1995년의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가 국가에 의한 조직적 성범죄라는 것을 은폐하고 국가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본정부의 술책이라고 말한다.
◆가부장적 사회하의 페미니즘 담론
보편적 정치를 추구하는 이 담론은 전쟁의 비인간성과 여성착취를 확인함으로써 대중의 평화 의식을 높이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범위를 넘어서, 전 세계의 전쟁으로 비롯된 남성의 여성폭력의 총체성에 집중한다.
이러한 논리로 페미니스트 담론은 한국인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피해자 개개인을 둘러싼 존엄에 관심을 두고, 일본국가적 차원의 배상대신 개인별 위로에 관심을 둔다. 피해자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병을 고치는 인도적 접근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국민기금의 개인별 지원을 적극 수용한다.
◆ 민족담론과 여성담론간의 격돌
제국주의의 메카니즘 속에서의 민족에 대한 관심과 세계적 페미니즘운동속의 인권에 대한 집중은 서로 상대를 향해 노골적인 비판을 가하게 한다.
민족담론은 페미니스트들을 향해, 그들이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하에 스스로 평화의 사도로 나섰다고 지적하며,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 찬 반전주의도 실상 철학적 통찰에 의한 결정물이 아닌, 단지 감성적 체험의 산물이라고 저평가한다.
또한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조선여성에 대한 착취를 도외시하여, 젠더 담론이라는 그럴듯한 추상의 늪 속에서 빠져,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의 전위대의 역할을 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감성에 대한 비판은 페미니즘이 구조에 대한 관심을 도외시한다는 공격으로 연결된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지위 향상에만 관심을 둘 뿐, 이 틀을 만들어 낸 권력구조에 대한 탐구에는 의도적 회피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 결과 현행 구조를 추인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지적한다.
한편 페미니즘의 남성중심 가부장론은 가부장제적 압력으로부터의 여성의 해방을 강조한다.
1991년 피해자 김학순씨의 최초 공개증언에 의해 위안부의 폭력성이 국제사회에 알려진데 대해, 일본의 페미니스트 학자인 우에노 치즈코는 한국 남성들의 압력에 의해 50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점에 충격적이었다고 말한다.
피해자 여성이 이처럼 침묵을 지킨 것은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민족의 수치를 드러내지 말라’는 가부장제적 압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안부 여성에 가해진 성폭력을 거론하는 것은 한국 남성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부장적 이론에 대한 페미니즘은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당위를 강조한다. 민족의 강조가 다른 민족 피해자와 한국 여성 사이의 분단의 벽을 쌓아 올리는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의 위안부론자들은 위안부 문제는 한국 여성들에게 억압민족에 의한 여성차별이나 민족차별과의 투쟁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민족의 이름으로 은폐되고 때로는 정당화되어왔던 자국 내의 가부장적인 체제와도 투쟁할 것을 요구한다.
이들은 특히 주관적인 구조적 강제에 매달림은 남성 지배의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 수탈이라는 객관적인 사회적 강제에 접근하기 힘들게 한다고 식민론자들을 비판한다. 특히 한국의 해외 아동수출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차별과 무시는 한국 내면에 지배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의 또 다른 폭력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론자들은 이러한 순혈주의는 한국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나가기 위한 큰 장애로 파악한다. 결국 내셔널리즘의 방벽을 부수지 않는 한 여성인권과 보편적 평화의 쟁취는 까마득히 먼 날의 일이라고 말한다.
◆ 횡단과 정반합
민족과 여성은 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대립항으로만 파악해야할까?
조교수는 이에 대해 이 둘의 관계는 택일적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선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일제의 강점기에 발생하고, 식민지배하에 벌어졌으므로, 위안부문제는 반제국주의 반식민지를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일제가 제국주의전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파시즘에 대한 거부, 저항을 상징한다. 이는 민족의 엄연한 존재의 인정이다.
또한 위안부문제는 여기에 덧붙여 반폭력 운동이고, 여성운동이며 인권운동의 차원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변증법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즉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메커니즘에 있어서, 일본이 서구문명의 계승자를 자처하고 한국을 지배하는 인종주의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인종주의가 여성의 노동가치의 전면적 수탈과 맞물리는 합주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결국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적 메커니즘 속에서 민족이라는 특수성을 배제 할 수 없게 된다. 동시에 여성인권의 관점을 도외시하는 것은 여성지위 회복이라는 보편성을 무시하게 된다. 게다가 인권이라는 보편성의 부재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식민지 지배라는 트라우마의 치유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의 범위를 결정하게 되고, 인권의 회복은 위안부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의 민족의 관심은 피해자의 배상문제가 자연히 개인별 보상이 아닌 국가라는 기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당위와 인권측면에의 집중은 이의 해법으로 피해자중심주의라는 접근에 도달하게 된다는 현실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러므로 여성으로서 ‘나는 조국이 없다’라는 관념과 ‘조국 안에 내가 있다’라는 이론은 이분법적 귀머거리의 대화이다. 이제 상대주의와 보편주의라는 다툼대신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관심보다 우리가 함께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뿌리내리기’와 ‘옮기기’가 등장하게 된다. 각 주체들은 자신의 정체성 속에서 ‘뿌리내리기’를 한다. 동시에 자신을 다른 정체성을 지닌 자들과의 교류를 위해 ‘옮기기’를 시도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횡단’하는 것이다.
②이러한 ‘횡단’에 의한 연합과 합주를 통해 정반합의 새로운 질서가 이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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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③ ] 한일 청구권 협정과 아시아 평화기금2014.03.13 20:27:03
일본이 식민지 지배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내년은 한일 청구권 협정 50주년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한 장애인 동시에, 이 해법에 대한 실마리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일본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배상책임 종결 주장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근거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를 내세워 한일간의 청구권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주장하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기대어 일본정부는 법적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한일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한일 청구권협정’ 제 2조에는 양국간의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 문제가 이 협정으로 최종적으로 소멸된다고 규정되어있다.
일본의 우경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올해 들어서도, 주미 일본대사관은 홈페이지에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위안부 보상을 마쳤다"며 책임 없음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한일 협정의 해석에 대해, 우리나라는 영토의 분리에서 오는 재정상 및 민사상의 청구권이 해결되었을 뿐 개인의 청구권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등 일본정부와 군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 협정에 의하여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정부의 법적책임이 남아 있다고 인지하고 있다.
일본이 일본군위안부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근거인 한일청구권협정과 아시아여성기금의 성격과 본질을 검토해본다. 또한 아시아 각국의 지식인들이 함께 모여 일본식민지하의 성노예 문제를 다룬 2000년 법정의 한계도 파악해본다.
▣ 일본의 위안부 책임의 종결 주장 근거
일본이 위안부 책임을 이행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1995년 시작되어 2007년 종결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
한국과 일본 양국이 식민지문제의 불법성을 해결하고자 한 시도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공여와 2억 달러의 저리의 차관을 받고 두 나라 사이와 국민들 간의 재산, 권리, 이익, 그리고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합의하였다.
청구권협정은 전체 4개조로 이루어진 조약이다. 위의 내용처럼 제1조는 위의 자금공여내용이고, 제2조는 청구권문제가 완전 해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제3조는 양국의 분쟁은 외교상 경로를 통하고, 이에 의해 해결 할 수 없으면 중재절차에 회부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제 4조는 일반적인 비준 및 효력의 발생시기와 관련된 조항이다.
이 중 제2조가 다양한 해석의 소지를 남기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한일간에 해석논쟁에 직면해 있다. 일본은 동 규정을 근거로 한 국민이 가지는 모든 청구권이 해결된 것으로 보고, 개인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우선 2조의 ‘재산,권리 및 이익’이라 함은 재산적 가치가 인정되는 모든 종류의 실체적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양해되었다. 하지만 ‘청구권’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고 있다.
▶한일 청구권은 미확정권리
이에 대해서 일본정부의 국회답변은 그 실마리를 던지고 있다. 탄바(丹波) 조약국장은 국회의 답변에서 “‘재산 권리 이익’은 법률상의 근거에 의거하여 재산적 가치가 인정되는 모든 종류의 실체적 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청구권협정에서 말하는 ‘청구권’은 이러한 재산 권리 및 이익에 해당하지 않는, 법률적 근거의 유무 자체가 문제가 되어 있다고 하는, 클레임을 제기 할 수 있는 지위를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타케우치 외무대신 관방심의관도 국회 중의원에서 “일본의 국내법상의 처리에 관하여 한국이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 조약상의 메커니즘”이라면서 “개인의 청구권에 관해서는, 개인으로서의 청구를 법원에 제기한다고 하는 권리까지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여기서 ‘재산 권리 이익’의 예는 채권, 담보권등이, 그리고 ‘청구권’의 구체적인 예로는 증거가 확실하지 않는 손해배상청구권, 위자료 청구권, 임금청구권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므로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자와 후자는 구별되어야 하고, 전자는 법적 근거가 확실한 권리인데 반해, 후자는 법적 근거에 다툼의 여지가 있는 미확정의 권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청구권과 관련, 개인의 청구가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 직후 일본 국내에서 한국민의 일본 및 일본인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내용의 144조를 시행하였다.
일본법률 144조는 한국 또는 국민의 재산 중 한일청구권 협정 2조 3항의 ‘재산, 권리 및 이익에 해당하는 것’을 소멸시키는 조치로써, 이 144조에는 ‘청구권’에 대한 소멸은 규정되어있지 않다. 이는 청구권이 미확정권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구권의 불확실성과 타협은 미국이 일정 책임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미국은 미소냉전구조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을 일차로 고려하면서 일본의 범죄 단죄를 소홀히 했고, 아시아에 자본주의를 정착시키는데 일본의 역할을 중시하여 아시아 국가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보장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미국은 일본을 냉전체제의 동반자이자 공산권 봉쇄의 일원으로 재편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미국은 한일관계의 최대쟁점이 되고 있는 청구권 문제의 처리에 정치적 타협을 권유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한일 청구권에 대한 한국의 시각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는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를 통해, 청구권협정이 일본의 식민지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양국간의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일본정부가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일제 강제징용피해 배상 판결과 관련하여, 2012년 5월 대법원도 한일청구권협정의 본질을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국민 개개인의 청구권까지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시하였다.
또한 소멸시효완성과 관련하여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 시점이 1944년이나, 국내에서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2000년 이전에는 소송권 행사가 불가능한 장애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시효는 존속하고 소멸시효는 완성되지않았다고 결정하였다.
덧붙여 대법원은 일본이 청구권 협정 직후 일본법률 제144호를 제정한 조치는 청구권 협정으로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됨으로써 외교적 보호수단을 상실하게 되었을 뿐,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일본은 1995년 일본정부가 운영비용을 대고 위안부에 대한 위문금은 국민으로부터 모금하기로 하고 설립된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활동을 들어 일본은 ‘도의적 입장’에서 이미 사죄와 보상을 했으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정부와 국민기금의 논리는 법적책임은 없으므로 ‘도덕적 의무’에 입각하여 사죄와 보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기금의 활동은 피해 여성들과 여러나라들의 연대단체들에 의해 강력하게 항의되었다. 나아가 국민기금의 선의를 밀어붙이려는 듯한 국민기금의 오만방자함을 성토하였다.
야마시타영애는 국민기금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한다. 우선 국민기금의 모호함이다, 국가도 돈을 일부 내지만 공식적인 배상이 아니라 국민의 기금을 통한 보상금이며 도의적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애매모호함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발언과 연결된다.
야마시타영애는 또한 국민기금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참여했으나,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맥락에서 술수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한국여성들은 일관되게 진상규명,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 재발방지를 위해 교과서에 기재하고 교육할 것을 요청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정책추진주체가 정부인지 민간인지도 불분명한 단체를 만들어 본질을 호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인도주의 주장은 법적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조시현교수는 인도주의에 의존한다면 의무는 실종되고 일종의 자선의 문제만이 남는다고 지적한다.
▣ 아시아연대를 통한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해결 : 2000년 법정
2000년 12월 아시아 시민단체들이 국제법정을 개최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은 일본의 법적책임은 명확하게 확인되었으나, 실제로 일본에 의무를 촉구 할 강제력은 없었다. 또한 2000년 법정은 보편적 인권에 집중하여 특수한 민족문제를 도외시하였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2000년 법정의 큰 성과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전문가들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일제와 개인들의 행위가 국제법상 인도에 반하는 범죄와 전쟁범죄를 구성하며, 일본의 국가책임이 인정된다는 판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일본의 행위는 국제법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는 확신을 강화하게 되었다.
하지만 보편성의 문제가 두드러져 민족이 강조되지 못하였다. 2000년 법정이 끝난 뒤, 한국 측 대표를 맡았던 윤정옥은 민족문제가 경시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조시현교수도 2000년 법정이 위안부 문제를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바라봄으로써 민족이 소외되었다고 지적한다. “2000년 법정이 보편적인 민족주의라는 관념을 상정하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한국의 민족주의를 눕힌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한일 청구권 협정, 아시아 평화기금, 그리고 2000년 법정 모두 우리나라 위안부 문제에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격이 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해결책은 위안부 문제를 회피하고자하는 술수로 이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해법이 요구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④ ] 한일 청구권 협정의 재검토 : 협상과 중재위원회 설치해야2014.03.13 20: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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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일 청구권 협정의 덫에 걸려, 한 발자국의 진보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 청구권의 정체라는 덫에 벗어나는 열쇠는 그 덫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지금 둔감하다.
즉 인권이라는 보편성과 민족이라는 특수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해법은 일본의 주장 근거인 한일 청구권협정의 재검토이다. 일본의 청구권으로 식민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이 해결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정면 도전하여, 해석상의 모호함을 없애야하는 것이다.
청구권 협정을 통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는가에 대한 해석상의 분쟁이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일본이 전가의 보도로 쓰고 있는 한일청구권의 해석 분쟁을 조속히 마무리하는 것이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낸 헌법소원에서 이들의 배상청구권과 관련한 해석 분쟁이 존재함을 판단하고, 이러한 분쟁을 해결하지 않고 있는 정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고 판시하였다. 한국정부가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에 근거하여, 일본에 위안부 문제 관련 양자협의를 제안하고, 나아가 중재절차에 들어갈 것을 주문한 것이다.
양국 간 분쟁해결 방법을 규정한 한일 청구권 제3조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과의 관계를 검토해 본다.
▶청구권 3조의 분쟁해결규정과 정부의 부작위
한일 청구권협정 3조에는 분쟁이 발생하였을 경우,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간의 분쟁은 외교상의 경로와 중재위원회에 회부를 통해서 해결한다고 규정되어있다.
이러한 한일간의 청구권 해석과 관련,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청구권협정3조의 ‘협정의 해석에 있어 양국간에 분쟁’이 있다고 판단하고, 청구권3조에 근거하여 우리나라 정부가 작위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서 이는 헌법 위반이라고 판정하였다.
헌재의 결정이 나온 후, 2011년 9월, 한국 정부는 청구권협정 3조 제1항에 근거하여 일본정부에 양자협의를 제안하는 口上書를 주한 일본대사관에 전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헌재의 판결처럼 청구권3조에 근거한 적극적인 조치, 즉 중재절차에 돌입해야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일본이 법적책임을 부인하는 일본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청구권협정 제3조의 중재절차이기 때문이다.
▶헌재의 결정의 의의
2006년 7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109명이 외교통상부장관을 피청구인으로 하여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 2011년 8월 헌재는 위안부피해자들의 한일청구권협정상의 배상청구권과 관련하여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우선헌재는 이들의 배상청구권이 65년 청구권협상에 의하여 소멸되었는지에 관하여 한일간에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한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이러한 분쟁을 이 협정 제3조가 정한 절차에 따라 협상과 중재등의 해결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정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정부의 이러한 작위의무의 태만이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배상청구권을 실현하도록 협력하고 보호하여야 할 정부의 의무는 헌법적 요청이며, 이러한 의무의 이행이 없다면 결국 청구인들의 기본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정부가 청구권협정상의 청구권에 대한 내용을 명확히 하지 않고 모든 청구권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협정을 체결한 점이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의 실현에 대한 장애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헌재는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그 장애상태를 제거하는 행위로 나아가야 할 구체적 의무가 정부에 존재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헌재의 결정은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에 의거한 한일간의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결국 헌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일본과 외교적으로 협상하고, 그럼에도 성과가 도출되지 않으면 중재위원회에 넘길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한일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중재절차
제 3조의 분쟁해결절차는 두 단계로 나뉘어 제1항에서 규정하는 외교상의 경로를 통한 해결과, 이를 통해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 적용되는 제2항 이하의 중재절차로 이루어져 있다.
조시현교수는 제1항의 외교상의 경로는 양자협의를 뜻하고, 이외의 조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중재위원회는 국제법상 중재(arbitration), 즉 중재재판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제1항의 외교적 해결이 실패 한 경우, 중재절차에 돌입할 수 있다.
중재절차의 개시는 한국정부가 작성한 ‘분쟁 중재 요청 공한’을 일본 정부가 접수한 시점부터 이루어진다.
이날부터 30일 이내에 한일 정부는 각각 1인의 중재위원을 임명하고, 접수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양국의 중재위원들은 합의하여 제3의 중재위원을 임명하거나 이를 지정할 제3국을 정하여야 한다.
중재위원들이 임명되지 않을 경우, 다시 30일의 기간 내에 각 정부가 한일 이외의 국가를 각각 선정하여, 선정된 두 나라가 2인의 중재위원을 선정하게 하여, 중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두 나라가 따를 것을 규정하여 구속력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중재의 핵심은 중재위원회의 구성이다.
이러한 내용을 규정한 청구권 협정 제3조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1.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
2. 1의 규정에 의하여 해결 할 수 없었던 분쟁은 어느 일방 체약국의 정부가 타방 체약국의 정부로부터 분쟁의 중재를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한 날로부터 30일간의 기간내에, 각 체약국 정부가 임명하는 1인의 중재위원과 이와 같이 선정된 2인의 중재위원이 당해 기간 후의 30일의 기간 내에 합의하는 제 3의 중재위원 또는 당해 기간내에 이들 2인의 중재위원이 합의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과의, 3인의 중재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에, 결정을 위하여 회부한다. 단 제3의 중재위원은 양 체약국 중의 어느 편의 국민이어서는 아니된다.
3.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당해 기간 내에 중재위원을 임명하지 아니하였을 때, 또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제3국에 대하여 당해 기간 내에 합의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중재위원회는 양 체약국 정부가 각각 30일의 기간 내에 선정하는 국가의 정부가 지명하는 각 1인의 중재위원과 이들 정부가 협의에 의하여 결정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으로 구성한다.
4.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에 의거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복한다.
또한 제3조에 의하면, 별도의 합의 없이 어느 한 쪽, 즉 한국정부의 일방적인 중재 신청에 따라 어떤 의미에서는 강제적으로 중재절차가 개시될 수 있게 된다.
▶중재위원회의 구성에 있어서 일본의 협력
일본이 만약 중재위원회의 구성을 거부하는 경우 중재는 불가능 해지는 걸까?
청구권협정 제3조 제2항과 3항은 중재위원회 구성에 일본정부의 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제 2항에 의해 일본은 중재위원 1인을 선임해야 하고, 이 중재위원은 한국이 선임한 중재위원과 합의하여 제 3의 중재위원 또는 이를 지정할 제3국을 정하여야한다.
일본이 이러한 선임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제3항은 다시 한국·일본 이외의 국가를 각각 선정하여, 선정된 두 나라로 하여금 2인의 중재위원과 제3의 중재위원을 지명할 제3국을 정하여 중재위원회를 설립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이 중재위원을 선임하거나, 위원을 선임할 국가를 선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제 3항의 국가선정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중재위원회의 구성을 거부 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중재위원회 구성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에 대하여 조교수는 일본이 협정 제3조의 협력의무를 다하지 않는 경우, 한국 정부는 조약 자체를 종료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고, 미해결 권리로 주장되는 문제들은 원점에서 다시 논의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일본이 중재재판을 모면하기 위해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갈 경우 일본은 국가의 신뢰를 상실하게 되는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조교수는 이러한 진통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결국 협력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중재위원회 회부 내용 : 공한 내용
한국정부가 중재신청을 할 경우, 국내 재판의 소장에 해당하는 공한에 담을 내용은 무엇일까?
일본군 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중재위원회에서 다투게 되는 핵심 의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가 청구권 협정 제2조에 포함되는가라는 것이다.
제2조는 한일간의 재산, 권리등의 청구권 문제가 65년 협정으로 최종적으로 해결된다고 규정되어 있는 청구권 협정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도 포함되는가라는 문제이다.
만약 위안부들의 권리가 2조에 포함된다고 판결이 내려지면, 위안부의 일본에 대한 개별청구권은 소멸된다. 그러나 중재위원회가 위안부의 권리가 한일협정 2조와 별개라고 판정한다면, 한국은 승소하게 되고, 일본정부의 위안부에 대한 배상책임문제가 대두되게 된다.
여기서 승소가 우리나라에서 기대하는 일본정부의 배상에 이를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중재판정으로 명확히 획득되는 성과물은 청구권협정 체결 이전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중재위원회의 판정이 일본을 법적 배상으로 구속하지 않는 권고에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조교수는 다시 백지상태에서 일본군 위안부 배상을 해결하기 위한 한일간의 기구를 설립하거나, 국제사법재판소에 배상관련 재판을 의뢰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중재의 접근 방법
국제인권분야에서 피해자의 배상받을 권리의 확립은 2005년 12월 16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침해와 국제인도주의법의 중대한 위반행위의 피해자를 위한 구제와 배상에 대한 권리에 관한 기본원칙과 지침’과 2006년 12월 2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강제실종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위한 국제협약’이 그것이다.
‘반 보벤-바시오니 기준’으로도 알려져 있는 2005년 ‘피해자의 인권장전’에서 주목할 부분은 ‘피해자 중심의 시각 (victim-oriented perspective)’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진술을 우선적으로 사건의 맥락으로 고려하는 원칙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성폭력사건에는 피해자중심주의가 사건구성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성폭력은 물리적·신체적 증거가 없는 한 당사자의 기억과 진술에 의존하여 사건이 구성되는 만큼, 당사자들의 진술이 엇갈릴 때 누구의 기억과 진술을 객관적인 사실로 여길 것인가라는 논란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성폭력사건의 경우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원칙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가 구성하는 사건의 맥락을 존중하고 이를 주요 판단기준으로 삼는다.
이는 남성중심적인 사회 통념이나 불합리한 법제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적적할 대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유엔 인권위원회의 ‘피해자의 인권장전’의 피해자 중심의 시각은 국제인권법과 그 피해자들과의 인간적 연대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연대 정신 속에서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주의법을 준수 할 국가의 의무를 재확인하고, 이러한 의무의 범위로서 1)침해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할 의무 2)침해 행위를 조사 수사하고 책임자에 대한 행동을 취할 의무 3)피해자에 대하여 재판을 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의무, 4)피해자에게 배상를 포함한 실효적인 구제수단 (effective remedies including reparation)을 제공할 의무를 들고 있다.
특히 배상에 관련하여 적절성, 실효성, 신속성과 완전성이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사안에 따라 원상회복 (restitution),금전배상(compensation), 재활(rehibilitation), 만족, 재발방지의 보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한다.
어떤 행위가 법을 위반하여 손해를 끼쳤다면 배상해야 하고, 범죄에 해당하면 처벌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명제이다.
이처럼 유엔인권위에서 채택한 피해자중심주의가 중재위원회에서도 적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 정부의 당당한 접근 요망
이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시민운동만의 몫이 아니다. 정부가 한일간의 식민지 청구권 분쟁에 대한 적극적 참여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정부가 위안부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손상시키는 헌법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한일 협정의 제3조에 의거하여 일본과 청구권 협상을 벌이고, 합의점에 이르지 못할 경우 중재위원회를 구성하여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여야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령을 고려해 볼 때, 일본의 도발적 발언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태도 대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 사회에서 재검토 받아야 한다.
이제 누구의 눈치를 보는 소심함에서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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