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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Sep 2019 · #반일종족주의_비판_1회 클릭 #반일종족주의_비판_2회 클릭
강성현's post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398346271
#반일종족주의_비판_3회 (연재 넘버링을 단순하게 바꿨습니다.)
1.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 측의 이해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단정한다. 그는 “사실 인식에 관한 한 엄밀히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한국 측의 우수한 학술서는 단 한 권이 없을 지경”이라고 단언한다. 이영훈은 관련 연구가 단 한 권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정리하고 있는 연구 목록만 수십 페이지다. 컴퓨터를 켜고 누리미디어(DBIPA), 한국학술정보(KISS), RISS에 가서 ‘위안부’ 키워드를 입력하고, 검색되는 학위논문, 학술지 논문, 단행본 목록만 봐도 바로 확인된다. 이영훈도 교수 연구자이니 그걸 모르진 않을 거다. 백번 양보해서 그가 의도한 바는 이런 걸 거다. “우수한 학술서”란 이영훈 본인이 인정하는, 자신이 보기에 거짓말 하지 않는 연구일거다. 내가 보니 이영훈이 인정하고 거의 복제하듯 참조하는 연구자는 일본의 하타 이쿠히코였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정도를 제외하면, 이영훈이 자신의 책에서 참고문헌으로 밝힌 2차 연구서는 대부분 그가 거짓말이라고 판정내리는 연구물들이었다. 그에겐 한국에선 정진성, 박정애 등이, 일본에선 요시미 요시아키, 송연옥, 김부자, 김영 등이 거짓말 학자들이다. 이영훈이 하타 이쿠히코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하야시 히로후미나 나가이 카즈 선생님을 언급하지 않는 건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우선 이영훈에게 두 분은 비판해 넘어서기 어려운 상대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야시 선생은 미국과 영국 자료까지 능숙하게 폭과 깊이를 확보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왔고, 나가이 카즈 선생은 일본 자료를 발굴하고 역사적 방법에 입각해 꼼꼼히 해석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설마 이런 분들을 이영훈이 듣보잡 취급한 건 아닐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2000년대 이후 진행된 성과들에 대한 공부가 전혀 안된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1999년 하타의 <위안부와 전장의 성>의 내용과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영훈의 글들을 보면, 그런 것 같다.
2. 이영훈이 하타보다 공부(?)를 한 부분이 더 있다면, 일본의 ‘내지(본토) 공창제’가 이식된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대좌부창기취체규칙 등으로 제도화된)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왕조의 기생제를 계보적으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이영훈 주장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그 의도가 너무 뻔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오수창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기고를 해가며 점잖게 비판하셨다. 더 언급하지 않겠다. “기생이 위안부 원류? 이영훈 전 교수는 춘향전을 거꾸로 읽었다”(한겨레 신문, 2019.8.24) 공창제의 성립과 시행과 관련해서 이영훈은 일본 공창제에서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조선풍의 공창제”란 표현까지 쓴다. 그는 공창제의 법적 근거인 “대좌부창기취체규칙”을 잠깐 살펴보고 창기, 예기, 작부 통계 수치를 간단히 시계열적으로 제시하면서 조선의 공창제가 예기를 매개로 전통 기생업에서 일본식 공창제로, 더 나아가 조선도 1930년대가 되면 “대중 매춘사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세세하게 비판할 대목이 많은데 여기선 넘어가겠다. 다만 이영훈은 이보다 이 조선풍 공창제로 흘러들어온 여성, 사실은 그 배후의 “호주제 가족”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할애하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런 거다. 공창제는 합법이고, 성매매업은 일종의 노동시장이며, 주선업(자)는 모집한 여성을 지역 내, 지역 간, 국경 밖 외국으로까지 “송출”하였다. 이 때 여성이 창기로 취업하려면 보호자의 취업승낙서가 필요했는데, 아버지, 어머니, 오빠나 다른 친족이 “호주”의 자격으로 했고, 이를 증명하는 호적등본과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아 관할 경찰서장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호주권력”의 책임 아래에 “딸은 울면서 주선업자 손에 끌려갔다. 이것이 공창제를 둘러싼 이른바 인신매매의 실태다.” 그러면서 이영훈은 조선시대에는 그런 류의 인신매매는 없었다고 첨언한다. “아버지가 딸을 주선업자에게 창기나 예기로 넘기는 것은 단순히 빈곤에 쫓겨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양육하고 보호할 가부장의 의무가 빈곤 계층의 가정윤리로 성숙해 있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이영훈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은가? 이승만 TV를 봐서인지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기분나쁘게 들린다. ‘위안부’ 제도도 공창제입니다. ‘위안부’도 이렇게 합법적으로 모집되었는데, 여기서 문제를 따진다면, 여성의 아버지 등 호주의 문제입니다. (이건 이영훈 인용이 아니라 내가 빙의해서~) 군 ‘위안부’ 제도를 기획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한 일본 군과 정부는 온데 간데 없고, 모든 책임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을 “방매”한 아버지 호주에게 전적으로 돌려진다. 게다가 이영훈은 매일신보에 난 김초향이라는 기생의 사연을 소개하며, 딸이 공부하고 싶어 몰래 학교에 간 걸 아버지가 끌어내 죽어라고 두들겨 패고 학대한 것이 가부장이었다며, 결국 그 소녀는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사람의 꾐에 빠져 가출을 감행했는데, 이 길로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소개한다. 이 사연은 여러 정보를 담고 있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이영훈은 아주 단순하게 이렇게 정리한다. “무지막지한 가부장의 폭력이 신여성으로서 자아실현을 꿈꾼 한 소녀를 위안부로 내몬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수준의 자료 선별과 일방의 비틀린 해석, 왜곡에 가까운 단순한 주장을 보고 있다보면, 왜!!! 내가 자료들을 찾아서 전체를 보여주고 다른 분명한 자료도 읽어주고 친절하게 논리적으로 해석해서 여러 풍부한 함의를 담은 논의를 정리해줘야 할까 깊은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3.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제는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편성된 것”이라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전쟁/점령 지역의 확대된 공창제도/시설로 바라보는 하타의 시각에 절대적으로 영향 받았다고 판단한다. 하타의 주장은 학자연 하는 역사수정주의/부정론 입장의 우익 연구자 및 저널리스트에게 전시 위안소가 “확대된 공창제이고 합법”이라는 무기를 심어준 자다. 그러니까 그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공창제의 시각에서 보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이 그러하다는 주장 이면에 이것이 “합법”이었고 “과연 성노예였나”를 주장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그는 강제연행에 대해서도 노예사냥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걸 입증한답시고 “원 위안부의 증언”도 조작에 취약하다고 강조하면서 역사학자들은 그걸 자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용감무식한 발언까지 한다. (이쯤되면 실증주의 역사학이 이영훈한테서 질색하고 도망가겠다.) 이영훈이 비판하는 일본군 ‘위안부’ 연구자들도 일본 (내지) 공창제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공창제의 유형, 구조, 역사를 연구한다. 제도의 공시성, 통시성, 연속 속 단절(또는 단절 속 연속)을 비교역사적인 시야에서, 또는 비교사회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한다. 이영훈은 모든 ‘위안부’ 연구자들이 군 ‘위안부’ 제도를 공창제와 절대 비교하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위안부’ 연구자들이 ‘위안부’를 순결, 소녀, 민족주의로 진공 포장하고 마치 공창의 창기, 예기, 작부, 여급을 차별하는 것처럼 왜곡되게 주장하려는 듯하다. 세간에 그런 인식이 전혀 없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영훈이 이름을 호명한, 또는 본인의 참고문헌에 올려놓은 연구자들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영훈이 짧게 언급하면서 비판한 송연옥 교수의 논의도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자. 송연옥은 공창제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연결해서 분석하는 대표적인 연구자 중 한 명이다. 송연옥에 따르면 공창제도 다 똑같지 않다. 연속과 단절이 있다. 당연히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 사이의 비교도 그런 시각을 견지한다. 다시 말해 내 식대로 표현하면, 일종의 계보적 분석인 것이다. 예컨대 그녀는 일본 공창제와 식민지 공창제의 구조와 특성을 비교하면서 “폐업” 규정의 차이를 주목하고 설명한다. 그녀는 일본 공창제와 달리 식민지 공창제 하의 창기는 자유의지에 따라 폐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이영훈의 반론 방법은 참 단순하다. 자유의지에 따른 폐업 사례가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여성이 업주나 업소로부터 도망친 사례도 자유의지의 폐업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반론 방법은 문제가 있다. 구조와 규칙은 여성이 스스로 폐업을 할 수 없게 했더라도, 현실에서는 백프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걸 두고 현실이 그러니까 구조와 규칙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구조의 구속이나 제약이 작동하지만 행위는 전적으로 구조에 종속되지 않을 때가 있다. 굳이 사회학에서 말하는 구조와 행위의 이중화 이론을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이야기와 제도, 장치, 구조를 오가는 방식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라면 다 알 거라고 생각한다. 송연옥이 볼 때, 일본 내지 공창제보다 그것의 식민지적 변형태인 식민지 공창제가, 식민지 공창제의 전시적 변형태인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더 억압적이고 노예적이다. 어떤 제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당연히 의도와 취지에 맞게 참고하는 모델이 있다. 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는 짧게는 중일전쟁, 더 길게는 상해사변(여기까지 주류 연구의 공통된 입장),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서는 러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데, 당연히 군과 공창제의 관계가 주목된다. 그래서 이것들을 공창제 계보에 위치시키고 일별할 수 있다. 그러나 하타나 이영훈처럼 그게 다 똑같은 거고, 특히 공창제가 당시 합법이었으니 ‘위안부’ 제도가 합법이고, 따라서 성노예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가도 한참 나갔다. 특히 이영훈은 ‘위안부’가 하나의 직업적 특성으로 볼 때 업자, 포주, 위안부와의 계약 문제로 환원시켜서 보자고 말한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또는 일정한 조건을 충족할 때 그녀들은 돌아갈 수 없었습니까”라고 묻는다. 또한 계약에 근거해 있고 자발적이고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성노예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영훈은 노예적 상황을 어떻게 상상하는 걸까? 국제법 상의 노예 용법을 알고 있는 걸까? 좁디 좁은 감옥 같은 장소에 쇠사슬에 묶여 감금당했다고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 채찍으로 맞고, 밥도 잘 못 먹고, 옷도 잘 못 입고, 강제로 관계를 강요 당하고… 꼭 이런 걸 다 충족시켜야 노예적이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사실 강제연행 또는 강제동원 용법도 마찬가지다. 이영훈이 집중 공격하는 요시다 세이지 증언이나 영화 <귀향> 또는 소설 <아리랑>의 재현처럼 제복을 입은 헌병이나 경찰이 총칼을 차고 저고리를 입은 소녀의 머리채를 붙들어 끌고 가야만 강제연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제법에서 말하는 강제성의 용법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예컨대 그도 ‘취업사기’를 말한다. 그건 강제동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무엇보다 모든 ‘위안부’ 동원이 그런 형태의 강제연행은 분명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례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들이 있다. 이에 대해 이영훈은 기억의 특성을 이유로 들어 증언을 역사 자료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다. 위에서 말했듯 용감무식한 발언이다. 아베 정부가 고노 담화를 검증한다고 나서면서 산케이신문이 전위대로 나서서 증언의 신빙성 검증을 정치적으로 공세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
#반일종족주의 비판 4회에서는 이영훈이 동원하는 “미군의 심문기록”과 “어느 위안소 조바의 일기”, “문옥주” 사례를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려 한다. 미군의 심문기록은 전시정보국(OWI) 버마인도중국 방면 미육군에 배속되었던 ‘레도(Ledo)팀’의 일본계 미군 정보병사 알렉스 요리치가 작성한 보고서다. 일본군 포로 심문 제49호라는 제목의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집, 이동, 위안소 생활, 전쟁 상황, 일본군에 의해 어떻게 버려졌고, 죽었고, 생존자들이 어떻게 포로가 되었는지 비교적 소상하게 정리한 자료라 매우 중요한 문서다. 다만, 요리치가 워싱턴 상부에 선정적으로 읽을 만한 것으로 의도돼 작성된 것이라, 무엇보다 요리치 본인의 선입견이 투영된 보고서라 분석할 때에는 자료의 생산 맥락을 철저히 고려해가며 다른 자료와 교차분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이 보고서는 버마 미치나에서 교에이 위안소에 소속되었던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대상으로 심문한 내용을 요리치가 재구성해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위안부들의 업자인 기타무라 부부를 심문한 또다른 보고서가 있다. 인도 델리 소재 동남아번역심문센터(SEATIC)의 번역심문 정보병사들이 작성한 1차 심문 자료다. 요리치 보고서와 비교하면 매우 중요한 대목에서 정반대의 진술들이 있고,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추적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실마리들이 있다. 흥미로운 건 SEATIC 병사들이 요리치 보고서를 그 당시에 검토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자료들은 영화 또는 소설의 소재가 될만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기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도 마찬가지로 이영훈처럼 자기 주장에 부합하는 것만 뽑아내듯 읽으면 위험하다. 자료가 품고 있는 내용들은 균질적이지 않다. 서로 상충하고 갈등적일 때도 있다. 제일 열받은 것은 문옥주 사례에 대한 왜곡이었다. 이걸 쓰다보면 이 글을 이쯤에서 끝맺을 수 없을 듯하여… 나중에… ------- #반일종족주의_비판_1회 클릭 #반일종족주의_비판_2회 클릭
Hyuk Bom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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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 측의 이해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단정한다. 그는 “사실 인식에 관한 한 엄밀히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한국 측의 우수한 학술서는 단 한 권이 없을 지경”이라고 단언한다. 이영훈은 관련 연구가 단 한 권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정리하고 있는 연구 목록만 수십 페이지다. 컴퓨터를 켜고 누리미디어(DBIPA), 한국학술정보(KISS), RISS에 가서 ‘위안부’ 키워드를 입력하고, 검색되는 학위논문, 학술지 논문, 단행본 목록만 봐도 바로 확인된다. 이영훈도 교수 연구자이니 그걸 모르진 않을 거다. 백번 양보해서 그가 의도한 바는 이런 걸 거다. “우수한 학술서”란 이영훈 본인이 인정하는, 자신이 보기에 거짓말 하지 않는 연구일거다. 내가 보니 이영훈이 인정하고 거의 복제하듯 참조하는 연구자는 일본의 하타 이쿠히코였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정도를 제외하면, 이영훈이 자신의 책에서 참고문헌으로 밝힌 2차 연구서는 대부분 그가 거짓말이라고 판정내리는 연구물들이었다. 그에겐 한국에선 정진성, 박정애 등이, 일본에선 요시미 요시아키, 송연옥, 김부자, 김영 등이 거짓말 학자들이다. 이영훈이 하타 이쿠히코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하야시 히로후미나 나가이 카즈 선생님을 언급하지 않는 건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우선 이영훈에게 두 분은 비판해 넘어서기 어려운 상대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야시 선생은 미국과 영국 자료까지 능숙하게 폭과 깊이를 확보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왔고, 나가이 카즈 선생은 일본 자료를 발굴하고 역사적 방법에 입각해 꼼꼼히 해석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설마 이런 분들을 이영훈이 듣보잡 취급한 건 아닐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2000년대 이후 진행된 성과들에 대한 공부가 전혀 안된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1999년 하타의 <위안부와 전장의 성>의 내용과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영훈의 글들을 보면, 그런 것 같다.
2. 이영훈이 하타보다 공부(?)를 한 부분이 더 있다면, 일본의 ‘내지(본토) 공창제’가 이식된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대좌부창기취체규칙 등으로 제도화된)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왕조의 기생제를 계보적으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이영훈 주장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그 의도가 너무 뻔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오수창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기고를 해가며 점잖게 비판하셨다. 더 언급하지 않겠다. “기생이 위안부 원류? 이영훈 전 교수는 춘향전을 거꾸로 읽었다”(한겨레 신문, 2019.8.24) 공창제의 성립과 시행과 관련해서 이영훈은 일본 공창제에서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조선풍의 공창제”란 표현까지 쓴다. 그는 공창제의 법적 근거인 “대좌부창기취체규칙”을 잠깐 살펴보고 창기, 예기, 작부 통계 수치를 간단히 시계열적으로 제시하면서 조선의 공창제가 예기를 매개로 전통 기생업에서 일본식 공창제로, 더 나아가 조선도 1930년대가 되면 “대중 매춘사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세세하게 비판할 대목이 많은데 여기선 넘어가겠다. 다만 이영훈은 이보다 이 조선풍 공창제로 흘러들어온 여성, 사실은 그 배후의 “호주제 가족”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할애하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런 거다. 공창제는 합법이고, 성매매업은 일종의 노동시장이며, 주선업(자)는 모집한 여성을 지역 내, 지역 간, 국경 밖 외국으로까지 “송출”하였다. 이 때 여성이 창기로 취업하려면 보호자의 취업승낙서가 필요했는데, 아버지, 어머니, 오빠나 다른 친족이 “호주”의 자격으로 했고, 이를 증명하는 호적등본과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아 관할 경찰서장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호주권력”의 책임 아래에 “딸은 울면서 주선업자 손에 끌려갔다. 이것이 공창제를 둘러싼 이른바 인신매매의 실태다.” 그러면서 이영훈은 조선시대에는 그런 류의 인신매매는 없었다고 첨언한다. “아버지가 딸을 주선업자에게 창기나 예기로 넘기는 것은 단순히 빈곤에 쫓겨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양육하고 보호할 가부장의 의무가 빈곤 계층의 가정윤리로 성숙해 있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이영훈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은가? 이승만 TV를 봐서인지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기분나쁘게 들린다. ‘위안부’ 제도도 공창제입니다. ‘위안부’도 이렇게 합법적으로 모집되었는데, 여기서 문제를 따진다면, 여성의 아버지 등 호주의 문제입니다. (이건 이영훈 인용이 아니라 내가 빙의해서~) 군 ‘위안부’ 제도를 기획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한 일본 군과 정부는 온데 간데 없고, 모든 책임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을 “방매”한 아버지 호주에게 전적으로 돌려진다. 게다가 이영훈은 매일신보에 난 김초향이라는 기생의 사연을 소개하며, 딸이 공부하고 싶어 몰래 학교에 간 걸 아버지가 끌어내 죽어라고 두들겨 패고 학대한 것이 가부장이었다며, 결국 그 소녀는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사람의 꾐에 빠져 가출을 감행했는데, 이 길로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소개한다. 이 사연은 여러 정보를 담고 있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이영훈은 아주 단순하게 이렇게 정리한다. “무지막지한 가부장의 폭력이 신여성으로서 자아실현을 꿈꾼 한 소녀를 위안부로 내몬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수준의 자료 선별과 일방의 비틀린 해석, 왜곡에 가까운 단순한 주장을 보고 있다보면, 왜!!! 내가 자료들을 찾아서 전체를 보여주고 다른 분명한 자료도 읽어주고 친절하게 논리적으로 해석해서 여러 풍부한 함의를 담은 논의를 정리해줘야 할까 깊은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3.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제는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편성된 것”이라 주장한다.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전쟁/점령 지역의 확대된 공창제도/시설로 바라보는 하타의 시각에 절대적으로 영향 받았다고 판단한다. 하타의 주장은 학자연 하는 역사수정주의/부정론 입장의 우익 연구자 및 저널리스트에게 전시 위안소가 “확대된 공창제이고 합법”이라는 무기를 심어준 자다. 그러니까 그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공창제의 시각에서 보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이 그러하다는 주장 이면에 이것이 “합법”이었고 “과연 성노예였나”를 주장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그는 강제연행에 대해서도 노예사냥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걸 입증한답시고 “원 위안부의 증언”도 조작에 취약하다고 강조하면서 역사학자들은 그걸 자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용감무식한 발언까지 한다. (이쯤되면 실증주의 역사학이 이영훈한테서 질색하고 도망가겠다.) 이영훈이 비판하는 일본군 ‘위안부’ 연구자들도 일본 (내지) 공창제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공창제의 유형, 구조, 역사를 연구한다. 제도의 공시성, 통시성, 연속 속 단절(또는 단절 속 연속)을 비교역사적인 시야에서, 또는 비교사회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한다. 이영훈은 모든 ‘위안부’ 연구자들이 군 ‘위안부’ 제도를 공창제와 절대 비교하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위안부’ 연구자들이 ‘위안부’를 순결, 소녀, 민족주의로 진공 포장하고 마치 공창의 창기, 예기, 작부, 여급을 차별하는 것처럼 왜곡되게 주장하려는 듯하다. 세간에 그런 인식이 전혀 없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영훈이 이름을 호명한, 또는 본인의 참고문헌에 올려놓은 연구자들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영훈이 짧게 언급하면서 비판한 송연옥 교수의 논의도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자. 송연옥은 공창제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연결해서 분석하는 대표적인 연구자 중 한 명이다. 송연옥에 따르면 공창제도 다 똑같지 않다. 연속과 단절이 있다. 당연히 공창제와 ‘위안부’ 제도 사이의 비교도 그런 시각을 견지한다. 다시 말해 내 식대로 표현하면, 일종의 계보적 분석인 것이다. 예컨대 그녀는 일본 공창제와 식민지 공창제의 구조와 특성을 비교하면서 “폐업” 규정의 차이를 주목하고 설명한다. 그녀는 일본 공창제와 달리 식민지 공창제 하의 창기는 자유의지에 따라 폐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이영훈의 반론 방법은 참 단순하다. 자유의지에 따른 폐업 사례가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여성이 업주나 업소로부터 도망친 사례도 자유의지의 폐업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반론 방법은 문제가 있다. 구조와 규칙은 여성이 스스로 폐업을 할 수 없게 했더라도, 현실에서는 백프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걸 두고 현실이 그러니까 구조와 규칙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구조의 구속이나 제약이 작동하지만 행위는 전적으로 구조에 종속되지 않을 때가 있다. 굳이 사회학에서 말하는 구조와 행위의 이중화 이론을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이야기와 제도, 장치, 구조를 오가는 방식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라면 다 알 거라고 생각한다. 송연옥이 볼 때, 일본 내지 공창제보다 그것의 식민지적 변형태인 식민지 공창제가, 식민지 공창제의 전시적 변형태인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더 억압적이고 노예적이다. 어떤 제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당연히 의도와 취지에 맞게 참고하는 모델이 있다. 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는 짧게는 중일전쟁, 더 길게는 상해사변(여기까지 주류 연구의 공통된 입장),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서는 러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데, 당연히 군과 공창제의 관계가 주목된다. 그래서 이것들을 공창제 계보에 위치시키고 일별할 수 있다. 그러나 하타나 이영훈처럼 그게 다 똑같은 거고, 특히 공창제가 당시 합법이었으니 ‘위안부’ 제도가 합법이고, 따라서 성노예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가도 한참 나갔다. 특히 이영훈은 ‘위안부’가 하나의 직업적 특성으로 볼 때 업자, 포주, 위안부와의 계약 문제로 환원시켜서 보자고 말한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또는 일정한 조건을 충족할 때 그녀들은 돌아갈 수 없었습니까”라고 묻는다. 또한 계약에 근거해 있고 자발적이고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성노예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영훈은 노예적 상황을 어떻게 상상하는 걸까? 국제법 상의 노예 용법을 알고 있는 걸까? 좁디 좁은 감옥 같은 장소에 쇠사슬에 묶여 감금당했다고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 채찍으로 맞고, 밥도 잘 못 먹고, 옷도 잘 못 입고, 강제로 관계를 강요 당하고… 꼭 이런 걸 다 충족시켜야 노예적이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사실 강제연행 또는 강제동원 용법도 마찬가지다. 이영훈이 집중 공격하는 요시다 세이지 증언이나 영화 <귀향> 또는 소설 <아리랑>의 재현처럼 제복을 입은 헌병이나 경찰이 총칼을 차고 저고리를 입은 소녀의 머리채를 붙들어 끌고 가야만 강제연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제법에서 말하는 강제성의 용법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예컨대 그도 ‘취업사기’를 말한다. 그건 강제동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무엇보다 모든 ‘위안부’ 동원이 그런 형태의 강제연행은 분명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례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들이 있다. 이에 대해 이영훈은 기억의 특성을 이유로 들어 증언을 역사 자료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다. 위에서 말했듯 용감무식한 발언이다. 아베 정부가 고노 담화를 검증한다고 나서면서 산케이신문이 전위대로 나서서 증언의 신빙성 검증을 정치적으로 공세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
#반일종족주의 비판 4회에서는 이영훈이 동원하는 “미군의 심문기록”과 “어느 위안소 조바의 일기”, “문옥주” 사례를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려 한다. 미군의 심문기록은 전시정보국(OWI) 버마인도중국 방면 미육군에 배속되었던 ‘레도(Ledo)팀’의 일본계 미군 정보병사 알렉스 요리치가 작성한 보고서다. 일본군 포로 심문 제49호라는 제목의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집, 이동, 위안소 생활, 전쟁 상황, 일본군에 의해 어떻게 버려졌고, 죽었고, 생존자들이 어떻게 포로가 되었는지 비교적 소상하게 정리한 자료라 매우 중요한 문서다. 다만, 요리치가 워싱턴 상부에 선정적으로 읽을 만한 것으로 의도돼 작성된 것이라, 무엇보다 요리치 본인의 선입견이 투영된 보고서라 분석할 때에는 자료의 생산 맥락을 철저히 고려해가며 다른 자료와 교차분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이 보고서는 버마 미치나에서 교에이 위안소에 소속되었던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대상으로 심문한 내용을 요리치가 재구성해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위안부들의 업자인 기타무라 부부를 심문한 또다른 보고서가 있다. 인도 델리 소재 동남아번역심문센터(SEATIC)의 번역심문 정보병사들이 작성한 1차 심문 자료다. 요리치 보고서와 비교하면 매우 중요한 대목에서 정반대의 진술들이 있고,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추적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실마리들이 있다. 흥미로운 건 SEATIC 병사들이 요리치 보고서를 그 당시에 검토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자료들은 영화 또는 소설의 소재가 될만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기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도 마찬가지로 이영훈처럼 자기 주장에 부합하는 것만 뽑아내듯 읽으면 위험하다. 자료가 품고 있는 내용들은 균질적이지 않다. 서로 상충하고 갈등적일 때도 있다. 제일 열받은 것은 문옥주 사례에 대한 왜곡이었다. 이걸 쓰다보면 이 글을 이쯤에서 끝맺을 수 없을 듯하여… 나중에… ------- #반일종족주의_비판_1회 클릭 #반일종족주의_비판_2회 클릭
Hyuk Bom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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