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3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일본.. : 네이버블로그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일본.. : 네이버블로그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일본인의 두 얼굴] 일제강점 / 우리역사

2011. 9. 8. 21:46



https://blog.naver.com/ohyh45/20137394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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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일본인의 두 얼굴]


1.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한국의 나무와 흙이 되다



망우리공원에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약수터가 하나 있다. 공동묘지에 웬 약수터냐 싶겠지만 이곳의 수질은 관에서 인정한 1급 식수다. 공원관리사무소 위 순환로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1.5km쯤 가면 동락천 약수터가 나오는데, 약수터에 도착하기 전에 오른쪽 위를 쳐다보면 둥근 항아리 모양의 석물(묘표)이 서 있는 산소가 보인다. 

망우리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의 묘다. 참고로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유일한 일본인 묘는 조선 고아의 아버지로 불린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1867~1962)의 것인데, 그는 아사카와가 적을 둔 경성감리교회의 전도사로 아사카와의 장례식 때 성서를 낭독한 인연이 있다.

아사카와는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 임업시험장(현 국립산림과학원)에서조선의 산림녹화에 힘썼고, 개인적으로는 조선의 민예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그가 여기 묻혀 있는 이유가 되기에 부족하다. 

당시 이 땅에서 그들만의 사회 속에서 살다 돌아간 대다수의 일본인과는 달리 그는 조선말을 하고 조선옷을 입고 조선인의 이웃으로 살며 진정으로 조선의 마음에 접한 사람이었기에 죽어서도 이 땅의 흙이 됐다.

유일한 일본인 무덤












이문동에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진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 앞에는 1994년 당시 산림청 한국임업연구원장이던 조재명 씨와 직원들이 세운 묘비가 서있다.





아사카와의 무덤 앞 상석에는 ‘삼가 유덕을 기리며 명복을 빕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는 1997년 임업연구원 퇴직자 모임인 홍림회가 아사카와의 고향인 야마나시(山梨)현 다카네초(高根町)와 함께 세운 것이고, 오른쪽 작은 비석 ‘아사카와 다쿠미 공덕지묘(淺川巧功德之墓)’는 1966년 임업시험장 직원 명의로 세운 것이다.



오른쪽의 항아리 모양 묘표는 아사카와가 생전에 좋아한 청화백자추초문각호(靑華白磁秋草文角壺)로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1884~1964)가 아사카와 타계 1주기 때 세운 조각품이다.



형 노리다카는 동생보다 먼저 조선에 와 조선의 도자기를 연구했는데, 전국 700여 곳의 가마터를 답사해 조선 도자의 역사를 정립하고 광복 후에도 조선 도자를 계속 연구한 일본 최고의 조선 도자 전문가였다.



왼쪽에 서 있는 검은 단비는 1984년 8월23일에 임업시험장 직원들이 세운 것으로 앞면에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뒷면에 ‘아사카와 다쿠미 1891.1.15 일본 야마나시현 출생,

1914-1922 조선총독부 산림과 근무,

1922-1931 임업시험장 근무,

1931.4.2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 중 순직(당시 식목일은 4월3일).

주요업적: 잣나무 종자의 노천매장발아촉진법 개발(1924), <조선의 소반>(1929), <조선의 도자명고(1931) 저술’이라고 적혀 있다.



외국인, 그것도 국치(國恥)의 시대 일본 관리를 지낸 사람의 묘지에 한국인이 직접 쓴, 그리고 두 나라의 관리가 공동으로 제작한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이채롭다. 아마 한국의 어떤 곳에도 이런 무덤은 없으리라. 과연 아사카와 다쿠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역사의 시곗바늘을 그가 살던 시대로 돌려보자.



1923년 9월 어느 날. 서울 청량리 임업시험장의 관사에는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방 안에는 ‘폐허’ 동인 오상순, 염상섭, 변영로가 보이고, 집 주인인 또 한 사람은 30대 청년이다.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미뤄 영락없는 조선인. 하지만 그는 임업시험장의 일본인 직원 아사카와 다쿠미였다.



아사카와는 ‘폐허’ 동인들뿐 아니라 많은 조선인과 교유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아사카와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일본에서 보낸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을 당시 동아일보 장덕수 주필에게 넘겨 게재하게 했고, 동아일보 김성수 사장과는 정원사를 소개하고 자기 집의 나무를 선물한 인연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1922년 4월2일).



그날 임업시험장 관사에서 아사카와와 오상순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내 야나기 가네코의 음악회 준비를 협의하고 있었다. 가네코는 일본의 유명 성악가로 1920년 5월4일 동아일보가 주최한 첫 번째 음악회를 시작으로 조선에서 음악회를 수차 열었고, 거기서 나온 수입은 주로 조선민족미술관 건립 등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했다.



‘폐허’ 동인 민태원의 ‘음악회’라는 소설은 1920년의 첫 번째 음악회와 관련된 이야기다. 그들이 협의한 1923년 11월 예정의 음악회는 가네코의 병으로 일정이 연기된 끝에 1924년 4월3일 경성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그 수익금은 1923년 9월1일의 관동대지진으로 무너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재건을 위해 기부됐다.


야나기와 아사카와



아사카와 다쿠미의 존재가 대중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다카사키 소지의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아사카와 다쿠미’가 1982년에 출간(한국에선 2005년 번역판 출간)되면서부터. 그전까지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과 조선의 민예를 사랑한 유일한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야나기는 해군 장성의 아들로 도쿄대 철학과를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부친의 후배인 사이토 조선총독의 힘을 활용해 조선민족박물관을 설립하고 조선의 민예를 이론적으로 전파하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야나기가 조선의 민예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된 계기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형 노리다카가 야나기에게 선물로 건넨 청화백자추초문각호. 직경 10.9cm, 높이 13.5cm의 이 작은 백자는 야나기가 1936년 도쿄 고바마에 설립한 일본민예관에 다른 조선 민예품과 함께 지금도 소중히 전시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12월 일본민예관에 가서 청화백자를 직접 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일본민예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2층의 방 하나에 오로지 조선의 민예품만을 상설전시하고 있어 이 민예관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쨌든 이런 계기로 조선을 찾은 야나기는 평소 존경해 마지 않던 아사카와를 알게 됐고, 이후 평생의 동지로 살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아사카와의 글 곳곳에 나타나 있다. 다음은 야나기의 저서 ‘조선과 예술’의 머리말에 나온 글이다. 

“1921년 내가 처음 도쿄에서 이조전을 기획할 무렵에는 소수 지인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뜻을 같이해 일해준 고(故) 아사카와 다쿠미를 지금 떠올리면 경모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이 교우를 기념하고자 ‘조선민족미술관’이 서울 경복궁 안 집경당에 설치됐다.”

이처럼 아사카와가 경성에 거점을 두고 조선 민예의 조사 결과를 야나기에게 전수하면 야나기는 일본에서 조선 민예의 이론을 정립하고 전파하는 노릇을 했다. 조선을 통해 민예의 미를 발견한 야나기는 후에 일본 민예로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할 때에는 장소 확보와 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야나기가 맡고, 전시품의 수집 관리 등의 실무는 아사카와가 도맡았다. 아사카와는 “미술관이 후세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된다면 그 명예는 그(야나기)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야나기는 모든 공적을 오히려 아사카와에게 돌렸다. 

언뜻 야나기와 아사카와의 관계는 정책입안자와 실무자의 그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야나기는 조선 민예에 관한 한 아사카와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야나기도 조선을 자주 방문해 조선의 민예를 연구하기는 했으나 초기에는 관조자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야나기는 일부 피상적 경험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조선의 미가 ‘비애의 미’라는 논리를 폈다. ‘조선과 예술’의 머리말에도 ‘가장 슬픈 생각을 노래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시다’라는 셀리의 시구와, 유명한 희곡은 대개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들며 조선의 미는 비애가 낳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번역된 이 책은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야나기는 이 책이 나온 지 얼마 후 아사카와의 영향을 받아 이런 생각을 바꿨다. 아사카와는 실생활에서 얻은 체감으로 조선의 낙천성, 해학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며, “많은 훌륭한 공예품은(조선의 미는) 조선의 융성 시기에 꽃핀 것”이라고 설파했다.




불후의 명저 ‘조선의 소반’




아사카와는 단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조선의 소반(朝鮮の膳)’(1929)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1931)가 그것인데, 한국에선 한 권으로 묶여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 1996)로 번역 출간됐다. 후세의 연구자와 후학이 반드시 참조하는 귀중한 자료이자 일반인에게도 조선의 민예를 알기 위해 꼭 권해지는 필독서이다. 



아사카와는 그 많은 민예품 중 왜 조선의 소반에 주목한 것일까. 그것은 소반이 온돌방에 앉아 식사하는 문화를 가진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중국에는 없는 조선 고유의 공예품이기 때문이었다. 또 소반은 사용자에 의해 아름다움이 더해가는 공예의 표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소반’ 머리말은 그의 이런 생각을 잘 반영한다.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미를 발휘하므로 사용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히 봉사하여 세월과 함께 아미(雅美)를 더해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대표라고 칭할 수 있다.”



출간 당시 평자들은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경성대 교수로 후에 문부대신까지 지낸 아베 요시시게는 “단지 학자가 문헌을 나열하며 쓴 글이 아닌, 실제 소반을 직접 사용해보고 쓴 글로, 지식뿐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담긴 책”이라 했고, 교사이자 민예연구가인 홍순혁은 동아일보(1931. 10.19)에서 “외국인 가운데는 우리의 미술, 공예를 중국, 일본과의 사이를 연락하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보는 피상적 연구도 있지만, 한걸음 나아가 이해와 동경을 가진 연구와 감상이 또한 적지 않아 그 독특한 가치를 찾고자 하는 이도 많다.… 이 책이 외인의 손으로 이만큼의 재료와 연구를 우리에게 제시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이 책의 초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맨 뒷면을 보면 도쿄 소재 공정회(工政會) 출판부 발행으로 ‘민예총서 제3편, 일본민예미술관편’으로 1929년 3월15일 발행, 저작자는 조선경성부 외 청량리 아사카와 다쿠미로 되어 있다. 맨 뒷면 오른쪽 페이지에 있는 글은 야나기의 발문 마지막 부분인데, 이 글에서도 아사카와에 대한 야나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밖에는 잔 눈발이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네. 여느 때보다 더 추운 교토의 저녁이라네. 군(君)이 있는 경성의 교외는 영도 이하 어느 정도까지 떨어졌을까. 그러나 지금쯤은 온돌방에서 조선의 소반을 둘러싸고 조선의 식기로 일가 단란한 식사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이렇게 말하는 내 가족도 매 끼니 조선의 소반을 떠난 적이 없다네. 어떠한 운명이 군과 나를 평생 조선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어준 듯하네. 가능한 한 우리 함께 조선의 일을 함세. 군의 ‘조선도기명휘’는 머지않아 완결되리라 생각하네. 나는 그 훌륭한 저작이 이 책처럼 하루라도 빨리 상재(上梓·출간)되기를 바라고 있네.”




야나기가 이처럼 하루빨리 상재되기를 바라마지 않던 ‘조선도기명휘’는 아사카와 타계 5개월 후인 1931년 9월에 ‘조선도자명고’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 책은 아사카와가 오랫동안 조선 도자기의 명칭, 형태와 기원을 조사해 정리한 책이다. 아사카와는 이 책을 집필한 이유를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혔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민족의 생활을 알고 시대의 분위기를 읽으려면 우선 그릇 본래의 올바른 이름과 쓰임새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릇을 사용하던 조선 민족의 생활상이나 마음에 대해서도 저절로 알게 되리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건 역사의 기록이 소중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조선도자명고’가 후세의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사실 소반이나 도자기가 실생활에 사용되는 물건이었지, 예술품으로 대접받으리라는 생각은 별반 없었고 또 그럴 여유도 없었다. 비록 그들의 조국이 저지른 죄는 크지만 후세의 연구자들이 야나기와 아사카와 형제의 업적에 큰 도움을 받은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만든 나라, 그리고 고려청자로 중국을 뛰어넘은 독보적 미를 창조했던 우리의 지금은 어떠한가. 손님에게 유럽제 찻잔을 자랑스럽게 내놓으며 우리 도자기는(그것도 옛날 것만) 벽장 안에 모셔놓고 있지 않은가. 우리 도자기가 생활을 떠나 과시나 관상용 골동품으로 ‘전락’할 때 새로운 미는 창조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물건의 탄생은 당시대인의 생활에서 얼마나 친숙하게 사용되느냐에 달렸다. ‘조선의 소반’에서 아사카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친 조선이여, 남의 흉내를 내는 것보다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자신에 가득 찰 날이 오리라. 이 말은 비단 공예의 길에 한한 것만은 아니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정원에는 1892년생 소나무(盤松)가 크게 가지를 뻗고 서 있다. 1922년 아사카와가 동료와 함께 인근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의 마음은 조선 민예 연구뿐 아니라 한일교류의 가지도 크게 뻗어나게 했다.



“조선 친구들과 더욱 친해지기를…”





아사카와의 삶에서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참기독교정신을 읽을 수 있으나 천성적으로 그는 덕(德)이 큰 사람이었다. 그의 덕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는 많다. 그는 월급의 상당 부분을 민예품을 수집하는 데 썼고, 그렇게 모은 민예품도 나중에 대부분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하고 집에는 깨진 물건만 남겨놨다.



어려운 직장동료의 자식이나 이웃집 학생 여러 명에게 드러내지 않고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여자 걸인에게는 가진 돈을 건네줬고, 남자 걸인에겐 일자리를 주선했다. 조선인과는 기생에서 비구니까지 신분의 차별 없이 친구로 지냈다.




그렇게 진정으로 조선인과 교유한 아사카와는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로 과로한 나머지 급성 폐렴에 걸려 만 4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전보를 받고 일본에서 달려온 야나기는 그의 형 노리다카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많은 조선인 이웃이 찾아와 곡을 했다. 평소 교분이 있던 청량사의 여승 세 명도 영전에 향을 올리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는데, 아사카와 부인이 나와 사의를 표하자 손을 붙잡고 “아이고…” 하며 통곡을 하니 지켜보던 이들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가족은 아사카와에게 조선옷을 입혀 입관했다. 상여를 내보낼 때는 30여 명의 이웃이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이장이 그중에서 10명을 골라야 했다. 이문리 묘지로 향하는 상여의 뒤로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따랐다. 아사카와는 그렇게 양국민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그날 비가 내렸다.




1937년 도로 건설로 이문리 묘지가 없어지면서 묘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됐다. 아사카와가 죽은 뒤에도 계속 경성에서 살던 아내와 딸은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야나기의 배려로 딸은 야나기의 비서로, 부인은 일본민예관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국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아사카와의 묘소는 돌보는 이 없이 덤불 속에 가려지고 묘표도 넘어져 뒹굴고 있다가 1964년에 방한한 화가 가토가 임업시험장 직원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묘를 찾았다. 그 후로 한국 쪽에서는 임업시험장이 묘 관리를 자청하고 나섰다.



1966년 만들어진 비석이 임업시험장 직원들의 이름으로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 묘의 관리자로 돼 있는 이는 임업연구원장을 지낸 조재명씨다.




그 후 아사카와를 기리는 양국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고향 야마나시현 호쿠토시(北杜市·구 다카네초)는 2001년 7월에 한국 도예가의 기증품을 받아 ‘아사카와 형제자료관’을 개설했으며, 2003년에는 경기 포천시(광릉 국립수목원 소재지)와 자매결연을 해 중학생 홈스테이와 문화교류를 하고 있다. 아사카와가 심은 나무가 자라나 한일교류의 가지를 크게 뻗은 것이다. 아사카와는 ‘조선의 소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필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견문의 기회를 주고 물음에 친절하게 답해준 조선의 친구들과 많은 도움을 준 분들에게 이 기회를 빌려 고마움을 표하고 더욱 친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필자 또한 아사카와의 묘를 돌아보는 계기를 통해 양국민이 더욱 친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아사카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그의 유고(遺稿) ‘조선소녀’를 최초로 번역했다. 조선의 민심을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조선소녀(朝鮮少女)




‘공진회(共進會·부업품 공진회)에 20여 일 다니는 사이에 간수(전시장 도우미)인 조선소녀들과 친해졌다. 내가 나타나면 모여드는 소녀들이 7, 8명 있었다. 대개 15, 16세로 20세가 된 자는 없었다.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거나 중도에서 그만둔 자가 대부분이므로 일본어도 유창했다.

그들은 종종 2, 3명씩 모여 일본인 여간수나 수위에 대한 불평을 토로했다. 실제로 일본인의 태도엔 우리가 보더라도 화가 날 만한 것이 많았다. 일본인 여간수는 대개 나이가 많았다. 그 때문인지 간수 동료이면서도 때때로 조선소녀를 야단쳤다. 수위에게 소녀들의 험담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에 소녀들의 변명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녀들은 분한 마음에 동료끼리 모이면 소곤거렸다. 

일본인 사이에 “요보(‘여보’의 일본식 발음. 조선인의 속칭으로 많이 쓰였다)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라는 정평이 굳어질 정도가 되었지만 나는 대체로 소녀들의 이야기를 더 이해하는 편이었다.





친해지고 나니 오히려 소녀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사려 없는 일본인의 태도에 대해 증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많았다. 일본인 여간수는 조선소녀들보다 대개 연상이지만 교육 정도는 낮은 듯 화장만 잘했지 하등한 생각의 소유자가 많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일본인 여간수가 사무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런 곳에서 일하는 것이 싫어요. 진열된 것은 모두 ‘요보’의 것뿐이잖아요. 좀 더 아름다운 것이 진열된 곳으로 보내주세요. ‘요보’가 와서는 이거 파는 거냐, 얼마냐 하며 말을 걸거든요. 정말 귀찮아요.”




이런 교양 없는 여자가 부업품 공진회의 간수이니 한심한 일이다. 이런 예는 적지 않다. 본래 간수라든지 수위, 순사, 소방관은 말하자면 번인(番人·지키는 사람)인데 그 번인이 너무 많다. 관내에 들어가면 기분이 나빠진다.



물건을 빼곡히 늘어놓고 도둑과 불량배 때문에 망을 보는 것이라는 느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간수 등은 관람자를 위해 편의를 도모하고 매매계약이라든지 간단한 설명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질문을 받으니 귀찮다거나 조선인이니까 싫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이런 자들이니 조선소녀를 못살게 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해 못할 일본인들




조선의 소녀들은 공진회가 끝나면 한번 청량리(아사카와의 집)로 놀러 오겠다고 했다. 나는 공진회에 갈 때마다 무료하게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는 게 매우 즐거웠다. 심사 업무로 다니는 동안에도 그들을 만나는 일과 도자기와 생활용품 진열대를 보는 것은 매일 거르지 않았다.



때때로 잣과 피스(그린피스, 청완두)를 주면 좋아했다. 그들도 누에콩 볶은 것이나 생밤 같은 것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다. 내 눈으로 보면 일본인이 으스대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오늘 저녁 삼복이가 경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진회에서 일하던 조선소녀들과 만난 이야기를 해줬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청량리 방면에서 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녀들이 천장절(天長節·천황의 생일로 당시는 8월1일)인가 일요일에 놀러 올 테니 전차 종점에 마중 나와달라고 부탁받은 것을. 




오늘은 미술관(조선민족미술관) 물품의 정리와 편지를 쓰면서 종일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전찻길에 나가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그들이 꽤 헤맸으리라 생각하니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관청의 운전수가 배려를 해주어 자동차에 태워 보내준 것으로 보여 안심했다. 그들에겐 자동차를 타는 것이 청량리에 오고 싶은 주요한 바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니절(청량사)의 식사라도 대접해 마음껏 기염을 올리게 해주었다면 얼마나 기뻐하고 신기해했을 것인가.




다음 공진회를 하게 된다면 진열이나 기타 방법상의 연구는 물론이고 직원의 훈련부터 신경 써야 할 것이라고 절실히 생각한다.


저녁에 오(상순), 염(상섭), 변(영로) 삼군(三君)이 와서 음악회에 관한 협의를 했다.…(1923.9)


[출처]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신동아

2. 조선의 흙이 된,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아사카와 다쿠미



수룡회의 일원으로 며칠간 일본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그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했고 죽어서도 한국의 흙이 되기를 원했던 식민지시대의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를 위시해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佰敎, 1884~1964)와 조선미의 절대적 찬미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99~1961)의 삶을 반추하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일로 일정이 짜여졌다.



그들은 조선의 백자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만났고, 누구보다도 앞서 조선미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깨달았으며, 그것의 학문적인 정리와 보존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행 내내 난 그들이 남긴 공과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만났던 장면 장면마다에 숨어있는 인간의 진정성과 애정을 느끼는 데 정신을 팔았다.



다쿠미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그 시대에 살았다는데 놀랐고, 그들 것이 아닌 우리 것에 대해 그처럼 사랑할 수 있었던 신념과 의지에 놀랐고, 한 번 맺은 인연을 무엇보다 소중히 한 그들의 우의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여행에 앞서 모두는 에미야 다카유키(江宮 降之)가 쓴 「백자의 나라에 살다(白磁の 人, 유한회사 수립사, 2005)」라는 다쿠미에 관한 소설을 읽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묘비번호 203363)를 참배하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여행 내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일본문화에 정통한 허 문도 전장관님의 해박한 설명을 들어야했다. 여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우리가 찾아 나선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문예동인지 「시라카바(白樺)」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민예운동을 일으켰고, 「일본민예관」을 설립한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다. 1924년, 경복궁내에 조선민족미술관(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을 설립하는데 앞장섰기도 했던 그는 일찍이 우리 민예품의 아름다움을 간파하고 이의 학문적 토대를 세웠기에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이다.



수많은 저서 중 우리와 관련하여서는 「조선과 그 예술」, 「조선을 생각한다」가 있다. 1921년, 총독부가 광화문을 철거하려하자 「없어지는 한 조선건축물을 위하여」라는 글로 여론을 일으켜 지켜낸 일은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조선의 미」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선의 예술은 피침의 역사가 낳은 「비애(悲哀)의 미」라 정의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지금도 그의 빼어난 안목과 글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야나기는 우리의 전통미술을 사랑하고 보존함은 물론 조선민예론을 주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우리 전통미술에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몰려와 우리 미술품을 약탈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는 많은 공과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을 도운 식민정책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1984년, 정부는 우리나라 미술품문화재 연구와 보존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외국인에게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여한다.


반면 아사카와형제는 그들의 업적이 야나기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건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은 일찍이 조선에 건너와 살면서 백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야나기에게 알려줌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예운동이 태동하게 한 소중한 인물이다. 아사카와형제는 야나기처럼 귀족가문도, 동경제대출신도 아니며 오피니언리더는 더더욱 아니었다.



일본열도의 중앙부에 속한 한적한 야마나시현(山梨縣)의 가부토(甲村, 현 高根町)에 터를 잡은 비교적 평범한 가정출신이다. 집안은 농사를 지으며 염색가게를 운영했으나 부친은 다쿠미가 태어나기 6개월 전,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형인 노리타카는 미술교사로 그의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이주하여 당시의 경성부 남대문 공립심상소학교의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조선도자기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옛 가마터의 조사발굴을 패전 후에까지도 계속했다.



1947년 11월, 일본으로 귀국할 때에도 그가 한국에서 수집한 고려청자, 조선백자의 완형품은 물론 파편 한 조각, 조사결과 등 조선자기에 관한 모든 자료를 고스란히 한국에 남겨두고 떠난, 진정으로 한국의 도자기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저서로는 「이조의 자기」와「이조-백자·염부(染付)· 철사(鐵砂)」가 있다.



동생인 다쿠미는 인물소설「백자의 나라에 살다」의 바로 그 주인공으로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여기는 그런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다쿠미는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임업에 종사하지만 형의 권유로 조선으로 건너온다.



그는 서울의 청량리에 살았고, 조선총독부 농상무부 산림과 임업기사로 근무하면서 형과 함께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에 관한 연구에 매진한다. 결코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그의 관심은 조선백자는 물론 밥상을 비롯한 목공예품, 민화, 민속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의 전반적인 삶으로 확장된다.



특히 그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그 심오한 멋을 즐기는 진정한 조선인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는 바지저고리를 즐겨 입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배워 그 누구보다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했고, 그가 쓴 두 권의 책, 「조선의 밥상」과 「조선의 도자명고」가 모두 한국어로 쓰여졌다는 것만 보아도 그의 조선에 대한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일제에 의해 황폐해진 산을 푸르게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조선오엽송(잣나무)의 노천매장법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다쿠미의 행적을 몇몇 문헌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확인할 뿐이지 왜 일본인들이 ‘우리는 아사카와 다쿠미를 가졌다’고 자랑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죽었을 당시 그의 관을 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고, 후에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황폐해진 그의 묘를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하고 ‘한국이 좋아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의 산과 민예에 바친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묘비에 적었다.



그리고 경성제대 교수로 있으면서 그와 교분을 맺었던, 전후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내각의 문부대신을 역임했던 철학자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는 「인간의 가치」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그를 추모했다.



다쿠미씨의 생애는 대철학자요 사상가인 이마누엘 칸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가치가 실제로 인간에 있고, 그 것보다 더 많지도 적지도 않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나는 마음으로부터 인간 아사카와 다쿠미씨의 앞에 고개를 숙인다.



이 글은 당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었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일간에는 좀처럼 해소되기 어려운 갈등이 존재하지만 이처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땅에 묻힌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갈등은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는 모두에게서 잊혀져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모두 잊지 않고 기억할 수는 없으며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를 잊는다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그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장을 꾸렸고 그 누구도 야마나시(山梨)로 가는 길이 멀다고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영혼은 시간이 흘러도 그 향기가 바래지 않는 모양이다.



뜻밖의 만남-우리 문화의 전도사 전 용복(全龍福)


동경에 도착해 이와야마칠예(岩山漆藝)미술관 관장으로 있는 전 용복을 만났다. 원래는 시부야에 있는, 한국의 뽕짝과 일본 엔카(演歌)의 원조인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의 음악박물관을 찾기로 일정이 짜여있었으나 떠나기 하루 전, 연락이 닿아 스케줄을 조정해 만나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조선을 사랑했던 세 사람의 일본인을 만나기 위해 떠난 여행의 초입에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장인을 만난 것은 우리의 여행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심장하게 하는 절묘한 장치인양 생각되었다. 우리는 그가 있어 자랑스러웠고, 그 또한 우리의 이런 거동이 자랑스러웠으리라.



장소는 그 유명한 메구로 가조엔(目黑雅敍園). 전 용복과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그런 운명적인 곳이다. 가조엔은 1931년, 호소카와 리키조(細川力藏)가 축조한 유서 깊은 곳으로 호텔과 연회장으로 구성되어있다. 호소카와가 선택한 예술은 뜻밖에도 나전칠기였으며 조선에서 많은 장인들을 불러와 어렵게 건물을 완공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1988년, 호소카와의 후손들은 가조엔을 12층의 현대식 건물로 리모델링하면서 낡을 대로 낡은 나전칠기작품의 복원을 시도하는데 전 용복은 일본의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일을 맡아 3년 만에 완성한다.



그곳의 수많은 벽과 방, 화장실, 심지어는 엘리베이터안까지 옻칠과 나전으로 꾸몄는데 기존작품의 복원은 물론 수많은 창작품을 제작해 가조엔을 새롭게 완성했다. 그런 이유로 그의 이름은 국내에서보다는 이곳 일본에서 더욱 잘 알려졌다. 문화는 만드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그들의 유연한 자세가 부럽기만 했다.



전 용복은 우리가 온다는 소식에 차로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마다않고 달려와 가조엔의 구석구석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그는 며칠 후, 이곳의 대연회실에서 세이코시계의 「옻나무 콜렉션」작품발표회를 갖는다고 했다.



현미경을 이용하여 나전을 붙인,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계는 시대의 명인이 만든 작품답게 가격이 한화로 약 5억원에 이를 것이란다. 당일에는 장관도 참석할 예정이라니 일본 내에서의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연회장은 새롭게 단장을 하느라 어수선했다. 우리는 전 용복이 있어 식비 외에도 상당한 입장료가 부과되는 금칠과 나전칠기로 꾸며진 호화로운 내실「남풍(南風)」과 「선유(仙遊)」에서 뜻밖의 호사를 누렸다.


전 용복과 난 초면이라고는 하지만 오래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또한 몇 년째 옻칠을 배우고 있기에 공통의 관심사를 가졌고, 다닌 학교만 다를 뿐이지 우린 유년시절을 부산의 가까운 곳에서 보냈다. 
함께 간 친구와 그는 오랜 친구이다 보니 나 또한 초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와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그는 고맙게도 모리오카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 한번 들려달라고 했다. 언제일지 알 순 없지만 우린 그곳에서 그의 무궁한 창작욕의 근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조선미의 찬미자-야나기 무네요시




가조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1936년에 설립된 일본 민가의 전통을 살린 창고풍의 「일본민예관」은 오키나와민예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2층의 전용전시공간에는 수십 점의 우리 민화와 도자기가 전시되고 있었다.



야나기는 약 3천점에 이르는 우리 민예품을 수집하였는데 그 중의 극히 일부다. 내가 보기에 전시품목의 면면은 수수하기 그지없었으며 국내외의 여타 사설미술관에 비해 그 질이 결코 우수하다고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명품을 수집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에 있었음에도 그는 조선의 미술품은 조선에 있어야한다는 신념을 애써 실천한 때문이 아닐까한다.



전시품 중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도자기 한 점이 눈에 띄었다. 자료에 의하면 조각가이기도 했던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로댕의 조각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조그만 도자가 한 점을 들고 지바(千葉)현의 아비코(安孫子)로 그를 찾아간다.



야나기는 도자기를 보는 순간 단번에 매료되고 마는데 지금까지도 난 그 도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던 터였다. 한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도자기라면 분명 특출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 눈앞에 있는 이 도자기가 바로 그 도자기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저 조그맣고 각이 진 도자기일 뿐이었다.



민예관의 길 건너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그의 가족이 1935년부터 1965년까지 살았던 사저가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2층으로 된, 결코 규모가 크지 않은 일본식가옥은 평소에는 개방이 되지 않지만 우리의 방문취지를 이해한 학예관은 기꺼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선각자요 대학자가 살았던 집은 일본 곳곳에 남아있는 사무라이의 고택처럼 휑하니 비어있었다. 다다미가 깔린 전통 일본식 가옥은 그 자체가 다실이나 다름없지만 가재도구가 치워진 집은 더욱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그의 실제 삶의 모습도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서재만큼은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서가에는 그의 손때가 묻은 다양한 서적들이 가지런히 꼽혀있었다. 그의 지적 넓이와 깊이를 짐작하게 했다.



난 「백자의 나라에 살다」를 다시금 떠올렸다. 소설의 서장(序章)에는 야나기의 문하에 들어간 젊은 도예가 한 사람(후에 어렵게 확인한 결과 실제인물인 도예가 스즈키 시게오(鈴木繁男)다)이 생면부지의 아사카와 다쿠미의 존재를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곳이 다름 아닌 이곳 서재였다.



서재의 벽에 걸린 사진 속 주인공에 대해 궁금해 하는 그에게 야나기는 한없이 온화한 목소리로 ‘이 분은 아사카와 다쿠미씨로서, 내가 젊었을 때 가장 존경하고 가장 신뢰한 분이셨네. 만일 이 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50%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야. 언젠가는 자네에게도 중요한 존재가 될 것으로 생각하네’라고 말해준다.



야나기에게 있어서 다쿠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인물로 가슴속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서재의 그 벽에는 다쿠미가 아닌 야나기 본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섭섭함 또한 지울 수 없었다.



야나기와 아사카와형제와의 특별한 관계에 있어 두 점의 조선도자기가 등장한다. 한 점은 앞서 언급한 청화백자추초무늬모따기항아리(面取染付秋草文壺)이고 다른 한 점은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화백자진사연꽃무늬항아리(靑華辰沙蓮花紋壺)이다.



야나기는 노리타카로부터 받은 전자의 항아리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지만 후자와는 비길 바가 못 되었다. 연꽃무늬항아리는 다쿠미가 자신을 방문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며 자랑한, 높이가 45cm가 넘는 당당한 체구에 연꽃 몇 송이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보기 드문 걸작으로 실은 형인 노리타카의 소장품이다.



얼마나 감동이 컸기에 야나기가 조선미술사를 집필하고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까. 그 도자기를 나도 몇 번 사진으로 본적이 있는데 그 자태는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1997년 5월, 「조선의 미를 가르친 형제-아사카와 노리타카와 다쿠미」를 특집으로 다룬 게이주스신초(藝術新潮)는 이 항아리를 「운명의 연꽃항아리」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야나기는 노리타카로 인하여 조선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16년 8월, 처음으로 조선에 건너간다. 경성에 도착해서 그와 함께 한여름 염천을 매일같이 골동품가게를 뒤지며 시간을 보낸다. 이때 야나기는 다쿠미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다쿠미는 이를 계기로 조선 미술품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 운명적인 만남이후 15년간에 걸쳐 지속되는데 야나기의 다쿠미에 대한 애정은 지극하고 또한 감동적이다. 다구미의 어떤 면이 대철학자인 그의 마음을 그토록 파고들었을까?



야나기는 아사카와형제로 인하여 조선의 도자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민예품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조선을 비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있은 직후, 야나기는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우리나라는 올바른 길을 밟고 있지 않다.



독립이 그들의 이상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라고 자신의 신념을 피력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922년, 「조선과 그 예술」의 서문에서 ‘조선 문제에 대한 공분(公憤)과 그 예술에 대한 사모(思慕)가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심중을 토로했다. 야나기는 귀족신분이라는 배경과 그의 다방면에 걸친 영향력으로 인하여 암암리에 식민정책을 도왔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그는 진정으로 조선을 사랑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나는 야나기가 살았던 사저의 서재를 둘러보며 그가 우리 문화재를 연구하고 보존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뭇사람들을 제치고 외국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것 이외의 다른 측면이 고려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조선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미술품을 대하는 그의 숭고한 정신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저서「수집이야기」에서 자신의 수집관을 피력했는데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든 사람이나 모든 일을 이성으로 처리하는 사람에게 수집은 어울리지 않으며, 가격이나 유명세에 너무 집착하면 수집된 물건도 생기를 잃는다’고 했다.



최근, 한 재벌의 주도하에 천문학적인 가격의 인기작가의 작품수집에 열을 올리는 몰지각한 세태에 대해 시대를 앞선 준엄한 꾸지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의 미술품은 조선 땅에 있어야한다는 지론을 펴 우리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그 어느 누가 피지배국의 미술품에 대해 이처럼 따뜻한 시선을 보내줄 수 있단 말인가. 밤을 새워가며 간신히 잡은 물고기를 아무 조건 없이 방생하는 조사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아사카와 다쿠미


이번 여행은 그 어느 여행보다도 목적이 뚜렷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정은 매우 단순해서 여행이라기보다는 성지순례를 떠난 기분이었다. 우리는 아사카와형제가 태어났고 기념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카네(高根町)로 가는 길만을 지도에 표시해놓고 있었다.



이동시간에는 허 장관님의 이런저런 해설을 듣는 것도 모자라 야나기 무네요시의 「사라지려하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와 아베 요시시게의 「인간의 가치」를 돌아가며 읽었다. 여행의 초미에 만난 전 용복도, 야나기 무네요시도 어쩌면 다쿠미에게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연어는 본능에 의해 목숨을 걸고 그가 태어낫던 곳으로 회유하고, 유대인은 몇 천 년 전의 인연을 끊지 못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지만 우린 그런 본능도 없었고 인연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 인간의 체취에 이끌려 무작정 달려갔다.



후지산을 품고 있는 야마나시현의 풍광은 아름다웠지만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를 끌어 들일만큼 특별히 매력적인 곳은 결코 아니다. 차창에 스쳐지나가는 그저 그런 막연한 풍경일 따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순례자가 되어 다카네로 향했다.



아사카와형제 자료관은 마을의 주민센터 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는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우선 자료관의 입구에는 우리일행을 환영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으며 뜻밖에도 세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백자의 나라에 살다」를 쓴 바로 그 에미야 다카유키, 아사카와형제가 태어났던 마을을 대표해서 나와 자료관을 안내해준 70이 넘은 노인, 그리고 제일교포 2세로 30년간 수집해온 672점의 귀중한 미술품을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한 하 정웅(河 正雄)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만남이었다. 조그만 인연이라도 소중히 했던 다쿠미는 우리를 위해 소중한 인연을 이처럼 곳곳에 마련해놓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그를 소재로 한 영화제작이 추진되고 있다니 하루빨리 그리되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나는 기념관을 둘러보며 줄곧 다쿠미의 인간됨을 생각했다. 일본에는 일기일회(一期一會, いち-ごいちえ)라고 해서 단 한 번의 만남이라고 할지라도 소중히 하라는 옛말이 있다. 짐작컨대 다쿠미는 40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만난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연을 결코 소홀하게 다루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진솔하고 또한 다정다감하였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단지 3년여 교분을 맺었던 아베 요시시게가 그가 죽자 인류의 손실이라며 장문의 추도사를 신문에 연재까지 했을까. 또한 민예운동을 함께 했으며 뒤에 인간국보의 칭호도, 문화훈장도 사양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인 도예가 가와이 간지로(河井寬次郞, 1890~1963)는 아사카와형제에 대해 존경심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한일합방 이래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이 그 나라사람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견딜 수 없다. 그럴 때 아사카와형제가 그러한 일들에 대해 속죄하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복자가 피지배자에 대해 저지른 잘못, 그러한 야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가운데 그들이야말로 무지에 빛을 비추어준 사람들이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야나기 무네요시, 가와이 간지로, 도예가 도미모토 겐키치(富本憲吉, 1886~1963)같은 민예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물론 수많은 조선인과도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특히 고려청자의 재현에 일생을 바친 지 순탁(地順鐸, 1912~1993)이나 유 근형(柳根灐, 1894~1993)옹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처럼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 외에도 그는 수많은 민초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 땅에서 살았다. 그랬기에 그가 죽었을 때 많은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상여를 메었다고 한다.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었으리라.



아사카와 다쿠미는 진정으로 조선사람이 되고자 우리의 말과 글을 배웠으며, 그의 저서는 놀랍게도 한글로 씌어졌다. 그의 조선사랑이 얼마나 컸냐하면 첫 저서「조선의 밥상」에서 ‘피로에 지친 조선이여! 타인의 흉내를 내는 것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면 곧 자신이 생기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또 공예의 길뿐만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뜻으로 쓴 게 틀림없는 이 글로 인하여 출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아베 요시시게의 도움으로 간신히 총독부의 검열을 피할 수가 있었다.



다쿠미는 야나기와 의기투합하여 민예운동을 주창하고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는 등 많은 일을 하지만 막상 그의 삶의 면면은 초라하기조차 하다. 18년 동안이나 산림과에 근무하지만 그의 직위는 판임관(判任官)의 기사에 불과했고, 수입 또한 많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도우는 데 쓰곤 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 본다면 어쩌면 그는 불행한 사람에 속할 것이다. 첫째 부인은 딸 하나를 낳고 병사했으며, 야나기의 소개로 결혼한 둘째부인은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그 아이는 낳은 즉시 죽고 만다. 그리고 딸 소노에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야나기가 설립한 「일본민예관」의 일을 거들다가 1967년 10월, 의붓어머니인 사쿠가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다음 달인 11월, 마치 뒤를 다르듯 6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다쿠미가 죽은 지 36년만이고, 야나기가 죽은 지 6년만이고 노리타카가 죽은지 3년만이다. 그리고 의아한 점은 유일한 혈통인 소노에는 야나기가 죽자 그가 쓴 방대한 글을 정리하는 한편 수차례에 걸쳐 그에 대한 추모의 글을 쓰지만 정작 자신의 부친인 다쿠미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절절한 사무침을 글로 표현할 수 없었는지 모르지만.


다쿠미의 생애에 있어 형 노리타카도 무시 못 할 존재지만 야나기만큼은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야나기는 자신보다 8살이 연배인 다쿠미에게서 형과 같은 애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야나기의 빈번한 조선행은 아마도 다쿠미를 만나기 위한 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다쿠미가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고는 야나기는 단 한번만이라도 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급히 조선으로 건너오지만 경성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운명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그의 슬픔은 끝이 없어 다쿠미가 죽은지 3년이 되는 1934년, 「공예」지 3월호에서 야나기는 피를 쏟는 듯 다시금 슬픔을 토로한다.



그가 죽은지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가족 중 몇몇이 죽었고, 많은 지우와도 헤어졌지만 아사카와의 죽음만큼 나의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하지는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 그는 둘도 없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특히 나에게는 덕(德) 그 자체의 존재로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 그는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만큼 자연스럽게 덕을 겸비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의 존재는 언제나 그의 주변을 따뜻하게 또 맑게 해주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를 사랑했다. 그의 마음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다쿠미가 없는 30년을 야나기는 그를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서재에 다쿠미의 사진을 걸어두고 두고두고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며, 미망인과 딸을 곁에 두고 자신의 가족인양 돌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쿠미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야나기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고, 야나기는 일찍이 다쿠미를 잃었지만 진정으로 그리워할 수 있는 상대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성인과 같은 고매한 감성을 가졌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꿰뚫어보는 훌륭한 이지력을 가졌다.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난 새삼스레 내 삶의 주위를 둘러보며 나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인연이 있었으면 하고 욕심을 부려본다. 두 사람으로 인하여 며칠간 난 참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2008년 6월,

정 찬만쓰다.



2. 조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조선의 흙이 된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 1914년 24세에 조선에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 임업 시험장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민예와 도자기 연구에 몰입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 등과 조선의 민예운동을 이끌었고, 1924년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주도. 41세 젊은 나이에 급성폐렴으로 사망.

우리 도자기와 공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 인터넷 검색창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간략한 이력이다. 아사카와 다쿠미, 그는 1980년대 말 무렵 내가 우리 고미술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마주친 이름이다.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볼수록 그는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조선 도자기와 민예품 탐구에 바친 그의 열정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너무나 이른 나이 마흔하나에 삶을 마감한 그의 일생이, 그 짧은 삶을 살면서 그가 남겨놓은 몇 편의 글이 내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나는 속으로 "아! 이렇게 한국미술을 사랑하고 헌신한 삶이 있어 지금 우리가 한국미술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한국미술은 그 생명을 잃지 않고 아름다움의 빛을 발하는구나!"하고 독백했다.






▲ 아사카와 다쿠미. 그는 1914년 조선에 건너와 1931년 급성폐렴으로 사거하기까지 17년간 오로지 조선의 도자와 민예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조선도자명고>와 같은 소중한 연구 자료를 남겼다. ⓒ한길아트



약력에서 보듯이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 시험소 용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민예품과 도자기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이다.

1914년(24세) 조선으로 오기 전까지는 그는 고향 야마나시(山梨) 현에서 소학교와 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아키다(秋田) 현의 영림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식민지 조선으로 오게 되는 것은 7살이 위인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와 깊은 관련이 있다.



7살이라는 상당한 나이 차이도 있었지만 다쿠미에게 노리다카는 형 이상의 존경 대상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먼저 조선으로 떠난 형을 늘 그리워하면서 함께 지내고 싶어 했다고 전한다.



당시 노리다카는 경성(서울)에서 남대문 공립 심상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미술에 매혹되어 조선 도자기를 수집하고 있었으며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悅 1889∼1961) 등과도 가까운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에 건너온 다쿠미는 일본에서의 영림서 근무경력을 인정받아 임업 시험소의 용원으로 자리 잡는다. 그의 업무는 조선에서 자생하는 수목과 외국에서 수입된 수종들을 재배하며 묘목 기르기에 관한 실험과 조사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다쿠미의 주 업무는 양묘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게 되어 자연히 조선 사람과 조선 문물을 많이 접촉하게 되었고, 또 그 일은 전국에 산재한 도요지를 찾아 자료를 수집하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형 노리다카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에 깊이 공감하고 함께 도자기를 찾아 조선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품에도 큰 관심을 두고 몰두하게 된다.

조선민족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진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만남

한편 조선으로 건너와 3년째 살던 중 1916년 8월, 그의 생애에 큰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찾아온다.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이 만남은 그의 형 노리다카의 소개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야나기는 직감적으로 다쿠미가 수집해놓은 조선 민예품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공예에 눈을 뜨게 된다. 결



과적으로 다쿠미는 야나기가 공예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해준 장본인이 된 셈이고, 그 후 야나기의 조선미술품 수집에 최고의 안내자 역할을 하게 된다.

또 야나기가 1920년 무렵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결심하게 만든 사람도 다쿠미였으며, 실제 그도 설립에 필요한 기금마련과 전시유물 수집에 열정을 쏟는 등 크게 기여하였다.



그 결과 1924년 4월 경복궁의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이 정식으로 개관하였고, 그 후 이 미술관은 조선 도자기와 민예품을 중심으로 봄, 가을의 정기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조선 미술, 그중에서도 공예의 아름다움과 전통을 알리고 그 맥을 잇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우리 미술과 공예의 연구와 전시가 우리 손이 아닌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된 사실에 불편해할지도 모르겠다. 또 당시 그들의 활동이 일제에 의해 저질러지는 조선 문화 파괴에 반대하고 조선 문화 보존을 바라는 몇몇 양심적 문화예술인들의 소박한 조선 문화 사랑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그런 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시대상황을 감안하고 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도미모토 켄키치(富本 憲吉, 1886∼1963) 등 당시 이 일에 관계한 사람들의 뜻과 활동내역을 잘 살펴보면 그러한 오해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믿는다.



참고로 조선민족미술관은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패전으로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으나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껏 소중한 민족문화자산으로 남았으니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그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다쿠미가 17년간의 조선 생활에서 이룬 최고의 업적은 조선민예에 대한 연구 성과다. 그는 1920년 중반부터 <시라카바(白樺)> 등의 잡지에 조선 도자와 민예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929년에 <조선의 소반(朝鮮の膳)>을, 1931년에는 <조선도자명고(朝鮮陶瓷名考)>를 잇달아 출간했다. 그는 이 두 권의 책 외에 그의 사후에 야나기 등 가까운 지인들의 주선으로 <공예>에 발표된 유고 '조선 다완'을 포함해 7편의 글을 남겼다.

바야흐로 그의 경험적 조사연구 성과가 본격적으로 발표되기 시작할 무렵 그는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한 개인으로서 지극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의 열정과 축적된 지식을 더는 볼 수 없게 된 우리로서도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보아도 그의 저작들은 경이로운 데가 많다. 특히 <조선도자명고>는 기물의 쓰임새와 종류에 따른 명칭, 도자기를 만드는 도구와 원료, 그리고 가마터의 조사 등을 세밀하게 수록한 교과서 같은 책으로 조선 도자 연구에 소중한 문헌이 되어왔다. 야나기는 이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이 저술만큼 지은이 스스로 기획해서 만들어낸 예는 드물 것이다. 아직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고 시도하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아마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가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오늘날, 만약 이 저술이 10년만 늦었더라도 여기 모아져 기록된 명칭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잃어버리게 될 인간의 기억을 교묘하게 보완해주었다. 즉 묻혀버릴 뻔한 진리를 사라지지 않는 문자로 담아둔 것이다"

당시 이 분야 연구 성과가 거의 축적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더욱이 이 분야와 관련이 없는 농림학교 졸업 학력의 일본인인 그가 이 정도의 연구 보고서를 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나는 오직 조선 도자와 민예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이유로서도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 이 땅에 묻혀 조선의 흙이 되다

조선 도자기와 민예품을 수집하고 연구한 것을 빼면 다쿠미가 조선에서 산 삶은 지극히 평범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황폐화하고 절망케 한 식민지 고위 관료나 군인 경찰도 아니었다.



총독부 산림과 용원, 임업 시험소 평직원으로 17년간 일했을 뿐이다. 그런 그가 우리가 미처 우리 전통미와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우리보다 먼저 알고 느끼고, 또 몸과 마음으로 그 아름다움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우리의 소반과 장롱을 닦고 어루만지며 조선 민예품의 고아하고 편리한 쓰임(用)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고, 전국의 흩어진 가마터를 두 발로 뒤지고 다니면서 조선 도자기의 역사를 정리하고 거기에 녹아 있는 조선 도자기의 특질을 탐구했다. 거기에는 일본도 조선도 없었다. 다만 조선 도자기와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열정이 있었을 뿐이다. 진실로 그는 조선과 조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조선 사람을 사랑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에게서 흔치 않은 사랑을 받았다.

1931년 4월, 그는 그의 유언대로 한 줌 조선의 흙이 되고자 그가 살았던 경기도 양주군 이문리 마을 뒷산에 묻혔다. 많은 조선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못다 한 일들이 많았음을 아쉬워했다. 그래서일까, 그와 함께 살아보지 못한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삶을 그가 사랑한 조선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서울 중랑구 망우동 공동묘지에 이장되어 그를 사모하는 한국인들의 손으로 관리되고 있는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 망우동 공동묘지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지. 매년 4월 초 그의 기일에는 그를 추모하는 한국인들의 모임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한길아트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출처] : 김치호 : 오래된 아름다움을 찾아서]<6>/ 오마이 뉴스







4. 일제시대 한국을 그토록 사랑했던 일본인 아사카와 망우리 묘지엔

아직도 참배객들이 늘어선다는데


총독부 산림과서 일하며 산림 녹화 사업에 전념, 현재 인공림 37%가 그의 작품
조선인들과 어울려 살며 전통 공예 문화 연구 업적
5일 학술대회 열고 韓·日 합작 영화 제작 중, 80주기 맞춰 책도 출간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 '사색의 길'은 '님의 침묵' 시인 한용운, '황소' 화가 이중섭 같은 위인의 묘소로 유명하다. 그 사이 눈길을 끄는 무덤이 하나 더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民藝)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묘비명의 주인공은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묘를 돌보는 임업연구원 책임자는 "단 하나, 한국인에 의해 보존되고 있는 일본인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그를 기리는 학술대회가 9월 5일 서울 한복판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주제는 '시대의 국경을 넘은 사랑: 아사카와 다쿠미의 임업과 한국민속공예에 관한 연구'. 서울국제친선협회 주최, 일본국제교류기금·수림문화재단 협찬,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에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축사한다. 일제시대 조선 목재 수탈을 지원했던 기관인 총독부 산림과의 한 직원을 두고 왜 이 야단일까.

1914년 24세의 나이로 조선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그는 '조선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내가 조선에 있는 것이 언젠가는 무슨 일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게 해 주소서.' 기도로 맘을 달랜 그는 '한국에 사는 한 한국인과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조선인 마을에서 온돌방에 살았고, 바지저고리 차림에 망건을 쓰고 외출했다. 그의 전기 '조선의 흙이 되다'(효형출판) 저자인 다카사키 소지는 "일본 순경들은 버스 안에서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자를 발견하면 '요보(조선인의 '여보'를 비하한 말)'라 조롱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강요했다. 그런데도 그는 한복을 고수했다"고 썼다.

그는 조선의 민둥산을 푸르게 하는 것이 소명이라 믿었다. 전국을 다니며 맞는 수종을 고르고 식목을 거듭했다. 자연 상태 흙의 힘을 이용하는 '노천매장법' 방식으로 조선오엽송 종자를 싹 틔우는 방법도 개발했다.



조재명 전 임업연구원장은 생전 "한국 잣나무는 당시 2년간 길러야 양묘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아사카와씨가 고안한 양묘법 덕분에 1년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의 인공림 37%가 다쿠미 선생이 공을 들인 나무"라고 했다.

그는 특히 조선 공예를 사랑했다. 친형이 '조선 도자기의 신' 아사카와 노리타가(1884~1964)였다. 조선 각지의 가마터에서 도자기와 파편을 구해 형에게 전하는 한편 스스로 조선의 소반문화를 연구했다. 그는 한국 문화가 중국 아류라는 다른 일본인들 주장에 맞서 조선 밥상을 들어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변론했다.



생전에 낸 책 '조선의 소반'에는 이렇게 썼다.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 흉내를 내기보다 갖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면 멀지 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후에는 조선 도자기 연구서인 '조선도자명고'도 출간됐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우리 공예와 도자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보물 같은 책"이라고 했다.

1931년 4월 2일 만 40세로 요절한 그의 장례식이 임업시험장 광장에서 치러졌을 때 억수 같은 비에도 조선인들이 서로 상여꾼을 자원해 돌아가면서 멨다. 유언에 따라 흰색 바지저고리 차림에 조선인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지금 망우동 공동묘지로 이장됐다.



포천시 광릉 국립임업연구소(구 임업시험장)에는 그가 심은 오엽송들이 우뚝하다. 그의 고향인 야마나시현 호쿠도시에는 2001년 노라다카·다쿠미 형제 기념관이 섰다. 그의 인생을 다룬 영화 '백자의 사람'도 한·일 합작으로 제작 중이다. 이달 합천과 부안 등지에서 촬영에 들어가 내년 개봉 예정이다.

망우리 묘지에도 참배객이 늘고 있다. 80주기에 맞춰 국내 출간된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부키)에는 한국 고교생들의 소감문이 실려 있다. '이웃 나라 조선을 그토록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의 나라 일본은 이제 내게 알고 싶은 나라로 다가왔다.'(청담고 2년 박세은) 이순주 서울국제친선협회 회장은 "이번 학술회의가 양국 국민이 서로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성숙한 지구촌 시민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5. “나를 한복 입힌 채 묻어 조선의 흙이 되게 하라”
한국의 美 발견에 삶을 바친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발굴하는 데 일생을 바친 뒤 한국 땅에 묻힌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80주년 추모제가 2일 오전 서울 망우리 공원묘역에서 열렸다. 참배객들이 추모제를 마친 뒤 한자리에 모였다. 최정동 기자



만해 한용운, 죽산 조봉암, 소파 방정환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역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웃해 잠들어 있는 서울 망우리 공원묘역. 그 속에 한 일본인의 묘지가 있다. 달항아리 형상의 조형물이 무덤 옆에 세워져 있는 게 눈길을 끌지만 전체적인 모양새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무덤과 다를 바 없다. 비석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2일 오전 80여 명의 참배객이 모였다. 이날 80주기를 맞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의 추모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한·일 양국의 정치인·문인·학자 등 80여 명이 쓴 글을 모은 추모 문집 한국을 사랑한 어느 일본인의 이야기도 그의 영전에 바쳐졌다. 문집에는 아사카와의 삶을 책으로 읽고 공부한 서울 청담고 학생들의 글도 담겼다.

아사카와는 식민 치하의 조선에 건너와 살던 평범한 일본인이었지만 그의 한국 사랑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40세로 마감한 짧은 인생을 한국의 미(美)를 발견하고 전파하는 데 바쳤다. 그가 심취한 대상은 귀족 취향의 화려한 예술품이 아니라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그릇, 항아리와 소반, 옷장 등 소박한 민예품이었다.



아사카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본 다도 전문가들이 극찬하는 찻잔도 알고 보면 평범한 조선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릇 가운데 골라낸 것”이라고 썼다.

아사카와는 1914년 식민 치하의 조선으로 건너왔다. 먼저 조선으로 건너와 미술교사를 하던 일곱 살 연상의 친형 노리타카(伯敎)로부터 영향을 받아 이뤄진 선택이었다. 서울 청량리에 집을 마련한 그는 한복을 즐겨 입었다.



한국 물품을 한국 사람보다 더 애용했다. 집은 온돌방이었고 방 안에는 한국식 장롱을 두고 살았다. 한국어까지 배워 구사했으니 사람들이 조선인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식민지 조선에 건너와 살던 다른 일본인들은 굳이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조차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던 때였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한복 차림으로 전차를 타고 가다 일본인 승객으로부터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강요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민예를 체계화하고 미학의 대상으로 승화시킨 사람으로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야나기를 민예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 또한 아사카와 형제였다. 야나기는 아사카와의 집을 방문해 그의 수집품을 감상한 것을 계기로 한국의 민예품에 빠져들었다.



의기투합한 아사카와와 야나기는 사재를 털고 지인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1924년 경복궁 안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아사카와는 결혼할 때 어머니가 양복을 사 입으라고 준 돈까지 털어 넣었다. 훗날 어머니가 “양복은 사 입었느냐”고 묻자 “전부 골동품이 되어 버렸어요”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이곳의 컬렉션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아사카와가 남긴 저서 조선의 소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띠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친근한 존재다.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기품이 더해 가는 것은 올바른 공예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이는 그의 독특한 예술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아사카와는 원래 공예품이란 생산자의 손을 떠나 사용자의 손을 거치면서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하게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아사카와의 눈에는 조선 민중이야말로 조선 민예품의 진정한 완성자였다.

그는 또 조선도자명고란 저서를 남겼다. 형 노리타카와 함께 조선 8도의 가마터를 답사하고 쓴 이 책은 조선 그릇의 정확한 명칭과 용도, 그릇을 빚는 도구와 원료 등을 체계화한 명저로 꼽힌다.


아사카와는 또 당시 광화문 일대의 경관이 조선신사 신축으로 무너지고 광화문이 철거 위기에 몰린 데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1922년 “아름다운 성벽이 부서지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문은 제거되고 어울리지도 않는 숭상을 강제하는 신사에 거액의 돈을 쓰려는 공무원의 속을 알 수 없다. 일본과 조선 양 민족의 융화를 꾀하기는커녕 앞으로 또 다른 문제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썼다.

아사카와는 예술 분야 외에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한국의 산림녹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일본에서 농학교를 졸업한 그는 본업이 영림서 공무원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포천에 있던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기사로 일했다.



그는 자연 상태에서의 흙의 힘을 이용해 소나무 종자를 발아시키는 이른바 ‘노천매장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당시 민둥산이 많았던 조선의 산하가 되살아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포천시 광릉의 국립수목원도 아사카와의 손길이 닿은 곳이다. 이런 인연으로 포천시와 아사카와의 고향인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토(北杜)시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그가 40세의 젊은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숨진 것도 육림 활동과 관련이 있다. 조선 각지를 돌며 묘목 기르는 법을 가르치느라 건강을 돌보지 못한 것이다. 그가 숨지자 수많은 조선인이 장례식이 치러진 청량리 일대에 모여 호곡하며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섰다. 그의 유해는 한복을 입은 채 서울에 묻혀졌다. ‘조선의 흙이 되고 싶다’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아사카와 80주기 추도 모임을 주최한 조만제 삼균학회 이사장(조소앙 선생의 조카)은 “아사카와의 인류애 넘치는 삶은 한·일 양국 국민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며 “그의 삶을 영화로 만드는 일이 일본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일·한 의원연맹 부회장인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의원은 추모 문집에서 “아사카와 형제의 인생을 그린 단행본 백자의 사람을 몇 해 전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읽었다”며 “깊은 애정과 신념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삶이 한·일 양국의 새로운 발전과 아시아의 평화로 이어져 나갈 것을 기원한다”고 썼다.

[출처] : 예영준 기자 / 중앙선데이

 







6. 일본인 아사카와 형제


















































외세의 침략을 당하면 가장 먼저 그 나라의 고미술품이 약탈당한다. 현재 대영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고대 이집트와 메스포타미아문명의 문화재를 보면 그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집트 상형 문자 해독의 열쇠가 된 로제타 스톤(대영 박물관 소장) 역시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에 의해 나일강 어귀의 로제타에서 발견된 후 1801년 아부 키르 전투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가 평화조약 대가로 영국에 넘겨준 것이다.



로제타 스톤은 고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송덕비로 재질은 현무암이며, 그리스 문자와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 그리고 속자(俗字) 등 세 가지 서체가 새겨진 세계적인 금석학 문화재이다. 이집트는 정부 채널을 통해 계속해서 이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하지만, 영국 정부는 ‘영국의 재산’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굴욕의 일제 식민지와 미․ 소 군정기를 거친 이 나라 또한 조상이 남긴 무수한 문화재를 해외로 빼앗겨야 했다. 지금까지 이 땅에 남아 있는 문화재가 오히려 행운아이고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박물관과 미술관에 진열된 국보급 문화재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를 반기는데는 그 한 점을 목숨처럼 사랑하며 지켜 낸 선각들의 자랑스런 애국심 덕분이다. 




《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에 흙이 되다》 

이 글은 서울 망우리에 있는 어느 묘 앞에 새겨진 비문(碑文)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우리의 찻그릇, 깨어진 도자기 파편, 그리고 정담이 오갔던 상(소반)을 통해 이 땅과 한국 사람을 무작정 사랑했던 한 일본인이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 우리말을 유창하게 사용하고 한복에 김치 먹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다. 자기의 장례비조차 남겨 놓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국인의 자식을 위해 장학금까지 내놓았던 우리와 가장 친한 이웃이다.



전차 안에서 한국인으로 오해한 일본인이 자리를 비워 달라고 말하자,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내 준 사람이다. 31살의 한창 나이로 폐렴이 악화되자, ‘죽어도 한국에 있을 것이오. 한국식으로 장사를 지내 주세요.’ 라고 유언을 남겨 이웃의 한국인들이 서로 상여를 메겠다며 다투었다고 한다.


동경 대학교의 하루키 교수가 ‘땅에 몸을 붙이고 어두운 밤에도 제 몸에서 빛을 내어 주위를 밝게 하는 그런 사람’이라 평한, 다쿠미는 야마나시현에서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에 23세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았다. 그가 조선에서 산 삶은 지극히 평범하였다. 이 땅을 도륙하는 높은 지위도 아니고 한국인이 벌벌 떠는 순사도 아니었다.



조선 총독부 산림과 용원, 조선임업시험소의 평직원으로 17년간 일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하여 그토록 아름다운 찬사가 내려졌을까? 

'조선도자의 귀신’이란 평을 들은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를 통해 조선 민예에 빠져 든 그는 수입을 쪼개 도자기와 소반을 틈틈이 수집했다. 우리의 소반과 장롱을 닦고 어루만지던 그는 민예품에서 고아하고 견고하고 지극히 편리한 굉장한 미를 발견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지니면서도 우리 일상에 친숙하게 봉사하고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멋을 더해 간다. 공예의 올바른 표본이라 할 것이다’ 



미처 우리가 우리 전통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남 먼저 알고, 느끼고, 또 몸과 마음으로 그 미와 하나가 된 인물이다. 그는 우리의 민예에서 받은 미적 충격을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 「조선의 소반」이란 연구 자료로 펴내어 도자 연구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것은 전국의 흩어진 가마터를 두 발로 뒤지고 다님으로 얻은 결과로, 「조선도자명고」에서는 한국 사람도 모르는 그릇 본래의 이름과 쓰임새를 자세히 정리한 책이다. 연구 논문이 나오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다쿠미의 안목을 극찬했다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눈이 활짝 뜨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한국인이고 싶어 죽어서도 한복을 벗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문동에 있었던 묘를 1942년 망우리로 이장하기 위해 묘를 팠을 때다. ‘그는 단정한 조선옷을 입고 동그란 로이드 안경을 낀 묻힐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선 근대사를 연구한 쓰다주쿠 대학의 다카사카 교수의 회고 내용이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시절, 무일푼으로 이 땅에 들어와서는 대지주로 군림하며 가난한 농민을 수탈하여 부를 쌓고, 그 부를 밑천으로 우리 문화재를 마음껏 수집해 즐긴 악명 높은 일본인들 틈에서 다쿠미의 애정 어린 넋두리는 청량수와도 같이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 준다.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남의 흉내를 내느니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이는 공예의 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출처] 문화재는 벙어리 기생 - 일본인 아사카와 형제 |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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