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3

07화 일제에 맞서 총을 든 도서관장, 한빈

일제에 맞서 총을 든 도서관장, 한빈

사회주의 혁명가 한빈
by도서관여행자
Nov 01. 2020아래로


한빈韓斌은 1902년 4월 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서 한창희의 큰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한빈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을 때 작성된 일제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그의 본적이 ‘노서아露西亞(러시아) 포조사덕浦潮斯德(블라디보스토크)’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가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니 ‘러시아인’으로 살 수 있었으나, 한빈은 ‘조선인 혁명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한빈은 생애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습니다. 한빈은 한하미르, 한페츠르, 한미하일, 왕지연王志延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0대 시절 뛰어든 혁명가의 삶

중학생 때 ‘러시아 10월 혁명’을 경험한 한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동대학을 석 달 다녔습니다.

18세 때인 1920년 그는 러시아공산청년동맹에 들어가 활동했습니다. 10대 때부터 활동한 걸 보면, 한빈은 조숙한 혁명가였나 봅니다. 1923년 한빈은 고려공산청년동맹 간도총국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조선인이 많이 거주한 러시아와 중국 땅을 오가며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3년 8월 한빈은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KYTB 속성과에 입학해서 1924년 5월 졸업했습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코민테른Comintern이 극동 러시아인과 아시아인을 공산주의 지도자로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대학입니다. 학비는 무료였고, 식사와 옷가지, 학용품까지 모두 제공했습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강당, 병원, 구락부, 사무실과 함께 도서관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입학생이 러시아어를 읽을 수 있게 되면 책을 지정해서 각자 연구하도록 했고, 책은 도서관을 통해 대출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조선 공산주의자의 산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조선공산당을 이끈 권오직, 김단야, 김명시, 박헌영, 오기섭, 오성륜, 조봉암, 주덕해, 주세죽, 주영하 같은 유명한 조선 공산주의자가 공부한 학교입니다. 150명이 넘는 조선인이 이 학교를 거쳐 갔습니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과 류샤오치劉少奇,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호치민은 다산의 『목민심서』를 평생의 애독서로 삼았습니다. ‘호 아저씨’라 불리며 베트남 혁명을 이끈 그에게 『목민심서』를 선물한 사람은 박헌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빈은 러시아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러시아 말을 유창하게 잘했습니다. 해방 후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 사령관 슈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 대장이 “한빈 동지의 러시아 말을 들으면 타국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친밀감을 느낀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온 한빈은 1924년 12월 고려공산청년동맹 간도총국의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조직을 담당한 그는 고려공산청년동맹 간도총국을 만주총국으로 키웠습니다. 1925년 4월 한빈은 최창익과 함께 중국 동북 지방 영고탑寧古塔에서 북만주청년동맹을 결성했습니다

만주와 조선, 러시아를 넘나든 활동

1925년 9월 한빈은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던 코민테른 지시로 최창익崔昌益과 함께 함경북도 회령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20여 년 만에 밟은 조국 땅이었습니다.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최창익과 한빈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한빈은 서울파 공청共靑(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1926년 3월 한빈은 양명梁明을 비롯한 10여 명의 동지와 함께 ‘레닌주의동맹’을 결성했습니다. 레닌주의동맹은 ‘제3차 조선공산당’(ML당)의 모태가 됩니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한빈은 1926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습니다. 그해 여름 그는 레닌그라드Leningrad(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습니다. 같은 해 7월 레닌그라드국립대학(지금의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과에서 공부하던 한빈은 1928년 모스크바국립대학 법과로 옮겼습니다.

MSU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모스크바국립대학교는 지금도 러시아 최고 대학이자 세계적인 명문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혁명의 중심지 러시아에서 한빈이 엘리트 공산주의자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해인 1929년 5월 한빈은 지린吉林에서 ML파 동지인 한해韓海, 고광수高光洙와 함께 와해된 조선공산당 재건을 시도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연락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1928년 말 코민테른은 일국 일당 원칙에 입각해 조선 공산주의자의 파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12월 테제」를 발표합니다. 「12월 테제」는 조선에 큰 영향을 미쳐 조선공산당 해체와 신간회 해산, 조선 공산주의자의 중국 또는 일본 공산당 입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와 함께 1929년 11월 코민테른은 공산주의 운동 자문역으로 한빈과 중국인 이춘산을 상하이로 파견했습니다. 1930년 1월 한빈은 중국공산당 만주 지역 간부와 한인 공산주의 지도자 13명이 모인 하얼빈 대회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잠입 중 붙잡힌 한빈

1930년 2월 초 한빈은 한해韓海의 죽음과 고광수高光洙의 체포 소식을 접했습니다. 곧바로 조선으로 잠입한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과 부산방직공장 파업을 이끌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된 한빈은 경성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 5년 4개월 동안 수감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는 과정에서 한빈은 김니콜라이, 권오직, 최익한과 함께 “조공 만세” “조선 민족해방 운동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형기가 8개월 더 늘어났습니다. 한빈의 사진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수감된 시기 그가 찍은 사진은 다부지고 형형한 눈빛의 ‘혁명가’ 임을 느끼게 합니다.

1936년 감옥에서 나온 뒤 한빈은 최창익과 그의 아내 허정숙許貞淑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러시아와 만주, 조선을 오가던 그는 무대를 중국 대륙으로 옮겨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중일전쟁 전후로 조선과 만주 일대에서 활동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중국으로 망명해서 난징南京으로 가는 과정에서 한빈은 본의 아니게 여장女裝 차림으로 이동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난징으로 간 한빈은 약산 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한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했습니다.

대륙으로 옌안으로

한빈은 1937년부터 1938년 무렵 후베이성 강릉에 있던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 학교에서 김두봉은 한글과 조선역사를, 한빈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윤세주는 조선독립운동사를, 김홍일은 중국 혁명사를 가르쳤습니다. 군관학교 시절 한빈은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권위주의적인 엘리트라기보다 소탈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빈은 1937년 12월 항일 민족연합 전선단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정치부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1938년 10월에는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에 참여했습니다. 한빈은 노선 갈등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을 먼저 탈퇴한 최창익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타이항산太行山으로 향했습니다.

‘항산’恒山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유명한 타이항산은 오악五岳 중 북악北岳으로 꼽힙니다. 타이항산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산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협곡을 자랑합니다. 1940년대 타이항산은 팔로군과 일본군의 격전지였습니다.

타이항산 일대에서 조선의용대는 간부 양성을 위해 ‘간부훈련소’를 두었습니다. 1941년 8월부터 한빈은 무정武亭(본명 : 김병희金炳禧)이 설립한 조선의용대 간부 훈련소 교사로 활동했습니다. 1941년 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구성원 중 신분이 확인된 84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이 명단에 한빈은 ‘왕지연’王志延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습니다.

이 명단에는 문정원文贞元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문정원은 한빈의 아내로 알려져 있습니다. 혁명가 부부인 두 사람은 한빈이 타이항산 일대에 합류한 이후 결혼한 것으로 보입니다.

옌안에서 펼친 항일 무장투쟁

1942년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화북조선청년연합회(조청)는 2차 대표대회를 개최했습니다. 허베이성 세시엔涉縣 치위안춘曲原村에서 열린 이 대회를 통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반일민족통일전선 조직인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합니다. 이 자리에서 한빈은 11명의 본부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지도부가 되었습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명칭을 바꿉니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본부는 임시정부의 광복군 1지대로 편입되고,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1943년 1월 팔로군에 정식 편입됩니다. 출범 당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인원은 150여 명 정도였습니다.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석은 ‘타이항산의 호랑이’라 불린, 총을 든 한글학자 김두봉이었습니다.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축은 공산주의자였지만, 그들은 강령에 ‘공산주의’를 담지 않았습니다. 항일 투쟁을 위해 이념을 초월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942년 11월 1일 조선의용군 간부 훈련소는 ‘조선청년혁명학교’로 이름을 바꿉니다. 조선청년혁명학교는 허베이성 세시엔 치위안춘에 있는 원정보사元定寶寺 터에 있었습니다. 1943년 9월 조선청년혁명학교는 ‘조선혁명군정학교’로 다시 학교명을 바꿉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터와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일제를 잡아먹는 사자가 돼라

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4년 12월 옌안 뤄자핑춘羅家坪村으로 옮기면서 조선의용군의 사령부 역할을 합니다. 이 시기 학교 교장을 맡은 사람은 김두봉, 부교장은 박일우, 학도대장은 박효삼, 조직교육과 부과장은 주춘길, 허정숙, 정율성이 맡았습니다.

정율성은 「중국인민해방군가」와 「옌안송」, 「조선인민군가」를 만든 바로 그 사람입니다. 중국과 북한 두 나라 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의 사례는 전무후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9년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정율성은 ‘신중국 창건 100명의 영웅’ 중 한 명으로 꼽혔습니다. 주덕해는 총무과장을, 최창익과 허정숙, 한빈은 교원을 맡았습니다. 조선독립동맹 핵심 지도부가 학교에 참여해 조선의용군 간부 양성에 힘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의용군 시절 한빈의 일화를 회고로 남겼습니다. 무심코 일본 노래를 흥얼거리던 김학철의 거처에 한빈이 뛰어들어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글쎄 동무는 벌써 오륙 년의 혁명역사를 가진 노투사가 아니야? 볼셰비키. 그런 사람이 정신을 잃고 적의 노래를 부르면 어떻게 해? 일본 자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머릿속에 그렇게 남아 있어 가지고 어떻게 그놈하고 싸워? 중경 임시정부 늙은이들이 왜놈이라면 이를 갈고 왜말로 된 것이라면 혁명적 서적까지도 살라버리고 찢어버리고 하는 그걸 동무는 어떻게 생각해? 잘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우리가 옷깃을 바로 하고 대해야 할 무엇이 반드시 있는 거야. (중략) 우리는 국제주의자가 되기 전에 먼저 조선 사람이 되어야 해. 알았지? 학철! 학철은 사자가 되오, 사자가. 일본 제국주의를 잡아 뜯어먹는 사자가...”

중국에서 맞은 해방

한빈이 얼마나 투철한 조선인 혁명가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45년 8월 11일 중국공산당 팔로군 총사령 주더朱德는 「명령 제6호」를 발포합니다.

“소련 홍군의 중국 및 조선 경내 작전과 배합하여 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중략) 현지 화북에서 대일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조선의용군의 총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박일우는 즉각 소속 부대를 통솔하고 팔로군과 원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병進兵하여 적위敵僞(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 인민을 조직하여 조선해방의 임무를 달성하라.”

이 명령은 중국공산당 소속 신화사통신을 통해 라디오로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용군의 상당수가 만주 지리에 밝고, 일본어에 능통하며, 선전 활동에 능해, 이 일대에 거주하는 200만 조선인과 호응을 기대한 명령으로 해석됩니다. 주더의 명령에 따라 1945년 9월 중순 조선의용군은 만주와 조선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1945년 11월 초 선양瀋陽시 교외 고력툰에서 1천여 명의 조선의용군은 군인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무정은 자신과 김두봉, 최창익, 한빈 같은 소수의 혁명가는 조선에 먼저 들어가고, 나머지 대다수 조선의용군은 만주에 남아 조선 인민을 조직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박일우, 황신호, 이익성, 주덕해, 이상조 같은 이가 만주에서 활동하며 조선의용군은 강력한 군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조선의용군에 참여했다가 한국전쟁 때 1군단장을 지낸 김홍일은 조선의용군의 숫자가 해방 전에는 2천 명에서, 해방 후 만주 진출 시점에는 3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회고했습니다.



조선독립동맹 부위원장



1945년 해방 직전에 한빈은 조선독립동맹에서 주석 김두봉에 이어, 최창익과 함께 부주석을 맡았습니다. 조선독립동맹에서 한빈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가 몸담은 조선독립동맹은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해서 훗날 ‘연안파’로 불렸습니다. 일제강점기 옌안을 직접 방문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만난 김태준은 “우리 민족의 진실한 해방을 위하여 꾸준히 투쟁한 유일한 군대”라는 찬사를 남겼습니다. 김태준의 표현처럼 ‘연안파’는 해방 직전까지 총을 들고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인 유일한 정치집단입니다.




해방이 되자 한빈은 1945년 12월 13일 조선독립동맹 동지들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한빈과 함께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창만, 허정숙도 이날 함께 입국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끝까지 전쟁을 치렀지만 환영 인파도 없는, 쓸쓸한 귀환이었습니다.

한 달 전쯤인 11월 신의주를 통해 입국하려 했던 조선의용군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무정과 김두봉, 최창익, 한빈이 무장한 조선의용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왔다면, 북한의 정치 상황은 급변했을 겁니다. 당시 소련군은 “정부 없는 민족에 군대가 있을 수 없다”라는 이유를 들어 조선의용군의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광복군의 남한 입국을 미군정이 불허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북한에서도 전개되었습니다.

명성과 투쟁 경력, 세력을 보유한 조선독립동맹(연안파)이 군대라는 물리력까지 함께 갖추고 입국했으면, 이들은 북한의 정치권력 장악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을 겁니다. 소련군이 조선의용군의 입국을 막고 무장을 해제한 건 이런 정치 상황을 고려한 조치로 보입니다. 소련군에 의한 무장 해제에 대해 김두봉은 이렇게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기대했던 우군(소련군)에게 무슨 관계로든지 무장해제까지 당했다가 부득이 도로 출국하게 되었다.”

연안파가 권력을 잡지 못한 이유

귀국한 연안파는 정치 활동을 앞두고 의견이 나뉩니다. 무정과 박일우, 김창만, 허정숙, 윤공흠, 서휘, 이상조는 조선공산당에 참여해서 활동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김두봉과 최창익, 한빈은 독자 정당을 만들자는 입장을 폈습니다.

해방된 조선에서 연안파에 대한 기대는 컸습니다. 김두봉을 비롯한 연안파의 ‘명성’과 ‘경력’은 김일성에 못지않았고, 만주파로 불린 김일성 집단에 비해 밀리지 않을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연안파가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김일성을 비롯한 만주파가 정권을 장악한 배경에는 소련이 힘을 실어준 이유도 있지만, 만주파가 강한 결속력을 지녔다는 점도 큰 이점으로 작용했습니다.

다음 해인 1946년 1월 25일 한빈은 남한에서 조선독립동맹의 기반을 키우기 위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이때 그는 조선독립동맹 부위원장이었습니다. 그가 서울로 향하기 한 달 전 1945년 12월 23일 자 ⟪해방일보⟫는 한빈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부주석 한빈 동지. (중략) 특히 이론과 학문에 있어서 최고 수준이며 김두봉, 최창익 동지와는 이신동체적 존재라고 한다. 금년 43세이다.”

남과 북을 오가며

한빈은 ‘백마 탄 장군’이라 불린 여성 혁명가 김명시金明時와 함께 순회강연을 했습니다. 2월 5일 조선독립동맹은 경성특별위원회(위원장 백남운)를 설치했습니다. 서울에서 한빈은 조선 인민을 향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독립과 자유, 민주와 부강이 금일의 과제이며, 제 정세도 과학적으로 판단하자.”

1946년 2월 15일 결성된 통일전선 조직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서 한빈은 부의장을 맡았습니다. 1946년 3월 6일 조선독립동맹은 ‘조선신민당’으로 이름을 바꾸며 정치세력에서 정당으로 전환합니다. 한빈은 부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박헌영과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공산당 합류가 아닌 독자적인 세력화를 추구했던 그를 박헌영은 ‘분열주의자’로 공격했습니다.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북조선신민당이 합당하면서 ‘북조선노동당’이 탄생했습니다. 8월 30일 열린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때 한빈은 43명의 중앙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서열은 39위였습니다. 연안파에서 한빈의 위상을 생각할 때 그의 서열은 의아함을 갖게 합니다.

북조선노동당 창당 전후로 한빈은 최창익과 함께 서울을 오가며 조선공산당과 여운영이 이끄는 조선인민당, 백남운이 이끈 남조선신민당의 통합을 추진했습니다. 세 당은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부총장

1946년 10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이 출범하자, 한빈은 초대 총장 김두봉과 함께 부총장을 맡았습니다. 총장이 상징적인 자리라는 것을 감안하면, 북조선의 유일한 종합대학인 김일성대학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한빈이 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46년 3월 25일 북조선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한빈은 9명의 준비위원 중 한 사람으로 북조선종합대학 창설을 준비했습니다. 그가 러시아 여러 대학에서 공부한 엘리트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발탁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모택동대학, 이승만대학이 없던 시절, ‘북조선종합대학’이 ‘김일성대학’으로 명명된 사연은 뭘까요? 연안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학철은 부총장 한빈에게 직접 들은 사연을 회고로 남겼습니다.

“아 글쎄 학교 이름을 짓는 회의를 하는데 회의를 막 시작하자마자 아첨꾼 하나가 얼른 나서 가지고 ‘김일성대학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니 어떡해. 일단 말을 낸 이상은 아무도 안 된다고 반대하기는 어려운 노릇이거든. 그래 그대로 돼버린 거지.”

조소문화협회 활동

러시아문서보관소가 소장한 자료에 의하면, 한빈이 김일성대학 부총장을 맡았던 1946년 무렵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조소친선문화협회 이사회 회원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49년 3월 25일 평양 조소문화협회 중앙본부(평양특별시 중앙리 25번지 소재)가 발행한 『벨린쓰끼 - 문학활동에 대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벨린스키Vissarion Grigorievich Belinsky는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러시아 리얼리즘 미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책의 번역자가 '한빈'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한빈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는 점, 그리고 조소문화협회 이사회 멤버로 활동했다는 점에 비추어, 한빈이 직접 번역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1947년 2월 20일 북한은 초대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237명의 대의원을 선출했습니다. 이 명단에 한빈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왜 중용되지 않았을까?

앞서 한빈이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때 서열 39위로 이름을 올렸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사이에 한빈에게 어떤 일이 생긴 걸까요? 1948년 9월 9일 출범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에서도 한빈은 눈에 띄는 직책을 맡지 않았습니다.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조선신민당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을 맡았던 한빈은 연안파 중에서도 ‘거물’에 속했습니다. 일제강점기 해외와 조선을 오가며 쌓은 그의 명성과 투쟁 경력은 김일성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북조선에서 중용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김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최창익은 내각 부수상을 맡았고, 그와 동갑인 무정은 조선인민군 포병 부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허정숙이 조선로동당 선전문화상을 맡았고, 그보다 7살 어린 김창만도 조선로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부총장이었던 한빈이 이후 공식적으로 맡은 직위는 평양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입니다. 북한은 1945년 11월 5일 개관한 평양시립도서관을 1946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전환시켰습니다. 북한의 국가도서관이 된 국립중앙도서관은 1973년 ‘중앙도서관’ 시절을 거쳐 1982년 ‘인민대학습당’으로 이어집니다.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장

1947년 4월 시점에 김일성대학 부총장은 이미 소련계 한인 박일朴日로 바뀌었습니다. 초대 부총장 한빈韓斌이 취임 반년 또는 그전에 부총장 자리에서 이미 물러났음을 의미합니다. 박일은 1946년부터 1947년까지 김두봉 총장의 통역 겸 김일성대 부총장으로 일했습니다. 박일의 아내는 북한군 사령관 스티코프 아내와 함께 레닌그라드 사범대학을 다녔습니다. 이 인연으로 박일은 북한에 파견되어 김일성대학에서 일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빈은 김일성대학 부총장에서 물러난 후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가 1947년 초나 그전에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은, 1946년 출범한 북한의 국립중앙도서관 초대 관장으로 재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의미합니다.

한빈은 1953-54년 무렵까지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지낸 걸로 보입니다. 한빈은 국립중앙도서관장에 왜 임명되었을까요?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도서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1946년 시점에 사회주의 국가는 극소수였고, 북한이 모델로 삼을 수 있는 국가도서관 역시 소련 뿐이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도서관을 경험한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겁니다.

앞서 한빈이 동방노력자공산대학과 국립 레닌그라드대학과 모스크바대학을 차례로 거쳤다고 언급했습니다.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도서관을 건립하면서 러시아 대학과 도서관 경험이 있는 한빈이 적임자로 떠오른 건 아닐까 싶습니다. 한빈이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장의 초대 관장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이 출범하던 시기,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부총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친일과 항일, 남북 국가도서관장의 엇갈린 행보

1950년대 중반 남북한 국가도서관에 묘한 장면이 하나 연출됩니다. 1956년 5월부터 1957년 1월까지 남한의 국립도서관장은 정홍섭이었습니다. 정홍섭은 일제강점기 친일 관료 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 한빈과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정홍섭은 북한과 남한의 국립도서관장으로 각각 재직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남북한 국가도서관장의 과거 행적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한빈은 남북한을 통틀어 일제에 맞서 총을 든, 유일한 국가도서관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장 이후 한빈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0대 때부터 공산주의자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사로 살았던 그에게 ‘도서관’은 마지막 자취를 남긴 장소입니다. 도서관을 중시한 북한 사회에서 국가도서관의 위상이 낮지 않았을 테지만, 일제강점기 혁명가로 치열하게 살아오며 해방 조국 건설을 꿈꾼 그에게는 아쉬운 자리였을 겁니다. 북한의 국가도서관장으로 그는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요? 도서관장이 된 한빈은 그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1962년 5월 30일부터 김일성의 직속 담당기자로서 연설문과 담화문을 담당한 한재덕은 『김일성을 고발한다』에서 한빈의 숙청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한빈 같은 사람은 소련에서 나서 ‘모스크바국립대학’을 나온 본토박이 공산당원임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북한에서 하는 짓은 너무하다고 몇 마디 나무란 것을 물실호기奚失好機하고 트집 잡아서 ‘반소련론자’로 규정하여 처음에는 평양 도서관장으로 추방을 시켰다가, 그 후에는 행방조차 알 수 없이 만들었다. 연안파 숙청 제1호였다.”

1981년 중앙일보 동서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북한인명사전』은 한빈의 마지막 행적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49년 2월 반당분자로 숙청”

한빈의 숙청

한재덕과 『북한인명사전』은 한빈의 ‘숙청’ 시기를 한국전쟁 이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소련의 여러 대학을 거친 한빈은 연안파 중에 누구보다 소련 군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숙청된 이유는 뭘까요? 한빈은 독자적 노선을 통한 해방 조국의 건설을 꿈꿨던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와 만주, 조선과 중국을 오가며 일제와 맞섰던 그는 외세에 기대기보다 자주적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었을까요?

이 과정에서 그는 소련 군정과 소련을 배경으로 등장한 김일성 체제에 비판적 입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남과 북이 모두 외세에 기대어 독자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빈은 정치적 입지를 잃은 걸로 보입니다. 김일성 집단이 자신에게 위협적인 정적부터 숙청해나갔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정(1950년 12월 21일)과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1953년 7월 2일)에 이어, 남로당의 영수 박헌영이 숙청(1955년 12월 15일)되고 그 전후로 제거된 사람이 한빈입니다.

1953년 6월 중순과 1958년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종파주의’를 청산한다는 취지로 주요 행정기관과 공장에 지도그룹을 파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은 종파주의 행태로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지방당위원회 선전부 간부로 있던 김남식의 증언입니다.

“여기서 채택된 방식은 한빈이 관장으로 있던 국립도서관에 대한 집중 지도사업에서 잘 나타난다. 나중에 중앙당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된 김도만이 당시 비판 대상이 되었다. 거의 6개월간 매일 저녁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처음에는 토론이 당 조직 규율과 종파주의의 위험성에 집중되었지만 점차 비판 대상은 구체적인 문제로 좁혀졌다. 즉 도서관의 장서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이 다른 책들에 비해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배열되었고, 때때로 김일성에 관한 서적은 뒷전에 놓였는데, 이는 명백히 종파분자의 소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비판은 한빈에게 집중되어 그는 악독한 종파행위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혁명은 혁명의 이름으로 혁명을 배신한다

곧이어 남로당 계열에 대한 숙청 바람이 불면서, 남한에서 월북한 이태준, 김남천, 임화 같은 작가의 작품도 북한 도서관 서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 시기에 북한 사회가 이미 교조화, 우상화 과정에 접어들었음을 도서관 장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김남식의 증언처럼 장서의 분류와 배치를 이유로 국립중앙도서관장 한빈은 비판의 대상이 된 걸로 보입니다.

옌안에서 한빈과 함께 활동했던 김학철은 한빈의 ‘숙청’에 대해 이런 회고를 남겼습니다.

“이 무렵 한빈은 중앙도서관 관장(차관급 대우)으로 내려앉아도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소련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틀리면 아무 때고 나 한 몸 툭툭 털고 소련에 가면 고만 아니냐는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1년 후 김일성은 허울 좋은 개살구로 성대한 환송연을 베풀고 전용 찻간까지 제공해 한빈을 추방했던 것이다.”

‘혁명은 혁명의 이름으로 혁명을 배신한다’고 했던가요. 일제강점기부터 치열하게 싸워온 혁명 동지들을 간첩의 이름으로, 정적으로, 종파주의자로 제거하고 추방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의 실체였을까요.

남북 국가도서관장이 맞은 비극

김학철은 한국전쟁 정전 협정이 맺어진 1953년 7월 27일 이후에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김학철은 자신이 평양을 방문한 시점으로부터 1년 후 한빈이 김일성에 의해 추방되었다는 회고를 남겼습니다. 김학철의 회고가 정확하다면, 한빈이 김일성에게 추방된 시기는 1954년 무렵입니다. 이 시기가 맞다면 연안파의 거두 한빈은 무정에 이어 ‘연안파 숙청 2호’였던 셈입니다.

한빈이 북한 국립중앙도서관 초대 관장이라면, 남북한 국가도서관 초대 수장은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셈입니다(참고로 ‘국립중앙도서관’이라는 명칭은 남한보다 북한이 17년 먼저 사용했습니다). 남한 국립도서관(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고, 북한 국립중앙도서관(지금의 인민대학습당) 초대 관장 한빈은 한국전쟁 후 숙청되어 조국으로부터 ‘추방’ 당했으니까요.


1956년 8월 30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최창익, 윤공흠, 서휘, 이필규, 박창옥을 숙청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의 숙청자 명단에 한빈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1958년 3월 조선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에서 김일성은 김두봉을 비판하며 한빈을 함께 거론했습니다.

“김두봉은 이 10년 동안 딴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속을 안 주고 한빈과 최창익에게만 속을 주었습니다. 한빈은 우리 당의 파괴분자로서 당을 증오하는 사람인데 김두봉은 한빈을 제일 친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김두봉이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당을 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당이 미워하는 사람과 제일 친근히 하는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중략) 김두봉은 한빈한테 가서 하루 저녁만 자고 오면 무얼 하나 딴 것을 제기하곤 했습니다. 제기하는 것은 다 우리 당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해외로 추방된 도서관장

1958년 김두봉 비판 때 한빈이 거론되긴 하나 이 시점 이전에 한빈은 이미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함께 거론된 최창익 역시 1956년에 숙청된 바 있습니다. 한빈의 숙청 시기는 한국전쟁 이전이라는 설부터 1954년 설, 1958년 설까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다양한 설 중 김학철의 회고가 가장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1954년 무렵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 시기가 문제일 뿐 국립중앙도서관장이었던 그가 숙청되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남과 북을 통틀어 정권에 의해 해외로 ‘추방’된 도서관장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도서관장의 경우는 더더욱 찾기 어렵습니다. 남한에서 국립도서관 2대 관장인 조근영이 문교부장관 이선근의 사퇴 종용에 대해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하고 물러난 사례가 있긴 합니다. 조근영 관장 사례는 부당하게 ‘잘린’ 사례이긴 하나 국외로 추방당한 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중앙도서관장 한빈의 사례는 남북한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꼽을만합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신복룡 교수는 한국의 ‘분단’을 이렇게 평한 적 있습니다.

“한국의 분단은 ‘나뉨’division이 아니라 ‘갈라섬’separation이었다.”

우리의 ‘분단’은 남과 북뿐 아니라 각각의 체제 안, 정파와 정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격렬히 이뤄졌는지 모릅니다. 이런 ‘분단’을 예견해서였을까요. 1946년 2월 10일 서울 국립도서관 근처 아서원(아서원은 1925년 4월 17일 오후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곳이기도 합니다)에서 열린 조선독립동맹 인사를 위한 환영회에서 한빈은 이런 ‘답사’答辭를 했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면 다 같이 손을 잡자.”

우리가 ‘소국’인 이유

안타깝게도 ‘다 같이 손을 잡는’ 상황은 현실화되지 않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싸웠다는 그들이 끝내 손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산 김창숙은 해방 직후 ‘친일파’에 이어, ‘친미파’와 ‘친소파’가 들끓자 이렇게 개탄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소국小國인 것은 우리 땅이 작고 좁아서가 아니라 사대주의적인 소인배小人輩가 많아 소국이다.”

소련과 중국에서 활동했으나 ‘조선 혁명’의 길을 걷고자 했던 한빈의 추방은 그래서 더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소련으로 추방된 한빈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았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분투했던 그는 결국 조국으로부터 추방되었고, 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잊혔습니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 체제에 맞섰다는 이유로 잊혔습니다. 소련 군정과 김일성 체제에 맞선 ‘국립중앙도서관장’은 그렇게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북에서 숙청되고 남에서 잊힌 ‘연안파’를 가장 먼저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은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를 비롯한 일본인 학자였습니다. 총을 들고 최후까지 일본에 맞선 그들을 가장 먼저 연구한 사람이, 남한도 북한 학자도 아닌 일본인이었다는 점은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즘’

한빈


한빈을 비롯한 해외 독립운동가가 수십 년 동안 타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싸운 것이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함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잊히기 위해 싸우지도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이즘’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잊음’이라는 ‘이즘’ism 아닐까요.

영화 『암살』에서 영감(오달수 분)은 안옥윤(전지현 분)을 탈출시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잊으면 안 돼”
Brunch Book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07/10
06화대한민국 ‘사서’ 1호
07화일제에 맞서 총을 든 도서관장, 한빈현재글
08화‘퍼스트레이디’가 될 뻔한 독립운동가
09화해방 후 가장 ‘출세’한 도서관인은 누구일까?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도서관여행자brunch book

도서관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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