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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의 정치학
임권택 감독의 1978년 作 영화 <족보>는 1941년 전북 고창에서 ‘창씨개명’ 등쌀에 자살한 설진영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하명중이 경기도청 총력1과 직원으로, 독고성이 총력1과장으로 등장합니다. 훈남 하명중과 그의 형 하길종 감독은 문화계 스타 형제였습니다. 독고성은 이제는 원로배우가 된 독고영재의 부친이지요. 전북 고창에서 벌어진 이야기에 경기도청 공무원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일본 작가 가지야마 도사유키(梶山季之)가 소설 <족보>에서 배경을 수원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하명중(극중 인물 ‘다니로쿠로, 谷六郞’)은 선전(鮮展)에 조선 풍속화를 출품하는 미대 출신 공무원입니다. 명랑한 영혼이라 거친 창씨개명 정책이 영 마땅찮습니다. 상사가 몰아치니 설진영을 찾아가서 부탁도 하고 설득도 합니다. 극중 설진영은 군량미 2만석을 기부하여 조선군 사령관 표창도 받은 인물이나, 700년 내려온 족보를 ‘혈통이자 역사이자 생명으로’ 여기는 종손(宗孫)입니다. ‘薛’씨의 일본식 발음인 ‘마사키’로 창씨 하겠다고 꾀를 내고, ‘사업상’ 창씨가 필요하다는 서울 사는 아들과도 대립합니다. 딸의 파혼까지는 무릅쓰고 버텼으나 ‘친구들은 다 일본 이름이 있다’며 소학교 다니는 손자·손녀가 졸라대니 그때는 무너집니다. 자신을 제외한 가족 전원의 창씨를 신고한 날 밤, 족보에 ‘후손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글을 남기고 자결합니다. 1978년 대종상을 휩쓸었습니다(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1909년 대한제국 시절 민적법(民籍法)으로 일본식 호적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1911년 총독부령 제124호 ‘조선인의 성명개칭에 관한 건’으로 개성개명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지만, 실제 운용에서는 일본인으로 혼동될 수 있는 이름을 호적에 올릴 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1871년 호적법 공포를 통해 홋카이도 아이누족에게 창씨개명을 실시했고,
1940년 2월 12일 기원절(건국기념일) 기념 이벤트로 조선과 대만에서도 시행합니다.
아프리카 북부 알제리는 1830년부터 132년간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식민지 정책 초기에 이미 프랑스식 성명 표기를 강제했습니다.
그래서 창씨개명은 프랑스가 알제리에 행한 식민정책의 모방이라고도 합니다(우치다 준 지음·한승동 옮김, 『제국의 브로커들』, 길, 2020, 43쪽).
‘씨’란 ‘家의 칭호’로서 통상 2字姓으로 나타납니다. 메이지 민법은 家의 우두머리인 戶主에게 큰 권한을 주고 국가가 家를 통하여 개인을 파악하도록 했습니다.
미나미(南次郞) 총독은 조선의 ‘조상중심주의’가 일본의 ‘황실중심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황실 중심주의’의 바탕인 ‘씨’를 창설하여 내선일체의 결실을 거두겠다는 것이 미나미의 의도였습니다(경성일보 1940년 6월 13일자). 창씨개명 해설서에서도 “종래는 일신이 종족에 결부되어 있었지만 앞으로는 각 가정이 직접 천황과 결부된다”고 소개했습니다(미즈노 나오키 지음·정선태 옮김, 『창씨개명』, 산처럼, 2008, 76,77쪽).
미나미는 1939년 11월과 12월에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2월 11일부터 6개월 안에 씨를 설정하여 신고할 것’을 의무로 했습니다. 총독부는 ‘조선인의 뜨거운 요망에 따라 실시한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대놓고 비판했고, <동아일보>는 아예 취급도 않고 무시했습니다.
초기 실적이 부진하자 중추원 참의 등 유지들이 압력을 받습니다. 윤치호는 문중회의가 3회나 소집되어 격론을 벌였는데 중추원 부의장 윤덕영마저 반대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 ‘모든 것을 일본 방식에 따르게 하려는 (미나미 총독의) 광기는 완전히 불필요하고 무분별한 정책’이고(1940년 1월 4일),
- ‘총독부가 조선 이름을 고집하는 자를 반일로, 게다가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며(2월 1일),
- ‘자식들을 블랙리스트에 넣고 싶지 않’고(5월 26일),
- ‘시골에서는 부동산 거래 신청서에 일본 이름이 적혀 있지 않으면 허가를 하지 않고,
- 소학교에 입학할 아이들도 곳에 따라서는 이름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까지 호적증명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한다’(5월 30일).
대표적인 협력 엘리트로서, 조선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아일랜드가 아니라, 영국에 통합된 스코틀랜드여야 한다고 믿었던 그도 미나미의 ‘창씨개명’ 드라이브를 터무니없는 짓거리로 보았던 것입니다.
1940년 3월 19일 일본 추밀원 회의에서 조선교육령 심의 중 담당고문관이 ‘내지 방식의 씨명으로 바꾸지 않으면 아동의 입학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질문하자, 척무대신(拓務大臣)은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돌려서 답했습니다(『창씨개명』, 131쪽).
전남 곡성의 류건영, 전북 고창의 설진영, 경북 영주의 이현구는 멸족을 한탄하며 목숨까지 던졌습니다. 일본 내부에서도 창씨 강제와 조선어 신문 폐간 등 미나미 총독의 무리수에 비난이 많았고, 총독 경질설까지 비등했습니다.
대구에서 성장한 어느 일본인은, 도마 크기 판자를 문패 대용으로 하여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마쿠라 시대의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같은 이름을 크게 적은 양반집이 나타났는데, 강렬한 분노의 표현을 느꼈다고 했습니다(모리사키 가즈에 지음/박승주, 마쓰이 리에 옮김,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글항아리, 2018, 218).
한편으로는, 1940년 봄 경성사범학교 부속 제2심상소학교에 입학했던 조선인은 자기 반 생도 대부분이 창씨개명을 했으나 ‘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나쁜 이야기를 들은 일은 없었다’고 회고했고(『창씨개명』, 126쪽), 소설가 박완서 선생도, ‘운수가 좋아 좋은 선생을 만났던지 창씨를 안 한 애들이 서너 명밖에 안 남았을 때도 특별히 구박하거나 무언의 압박을 받은 기억이 없다’고 썼습니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출판, 1992년, 129쪽). 그런저런 사연으로 ‘상당히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법령상의 강제는 아니었다’는 것이 교과서 수정과 관련한 일본 문부성의 방어 논리입니다.
총독부 법무국은 기획 당시 창씨 신고율을 20% 미만으로 예상하고 보수적으로 예산을 편성했다고 합니다(구체적으로는 1939년 12월 19일의 기안에서 약 12%로, 10일 후인 12월 29일의 기안에서 약 18%를 예상했습니다. 『창씨개명』, 80~82쪽). 신고 마감 전날인 8월 9일 ‘5할을 돌파할 것으로 보여 발안자인 총독을 기쁘게 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8월 10일 마감 직후 ‘약 70%의 ‘굉장히 좋은 성적’이라는 자평이 등장하더니, 최종 집계에서는 ‘80.5%’를 찍었습니다(『창씨개명』, 146~148쪽). ‘조선인은 맹렬한 기세로 씨명을 변경하고 있어서 어느 관청이나 애로를 먹고 있다’던 총독부 간부의 자랑이 허언이 아니었던 셈입니다(모던일본사편·박미경 등 번역, 『잡지 모던 일본 조선판 1940』, 어문학사, 2020, 80쪽).
80.5%라면 어떤 기준으로 보든 ‘조선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서 경질된 전북지사 손영목과 충북지사 유만겸처럼 실제로 불이익을 받은 분들도 있고, (각각의 사정으로) 인촌 선생, 박흥식 화신사장, 홍사익 장군, 일본 중의원 박춘금 등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분들도 있기는 합니다. 1946년 10월 23일 군정청 법령 제122호 ‘조선성명복구령’이 공포됩니다. 호적에 기재된 일본식 씨명 위에 ‘다시’ 붉은 선을 긋고, 신분변동 사항에 “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하여 성명복구”라고 기입함으로써 1940년 이후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던 80.5% 조선인의 옛 성명이 회복되었습니다.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힌 특별한 집안이라면 모를까, 우리네 같은 보통 집안사람은 대개 비슷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단시일 내에 창씨가 그렇게 확산됐던 것은 너무 내 경험 위주로만 생각하는 건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다.’ 박완서 선생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문장입니다(130쪽). 입장을 달리하는 반대쪽의 누구인가를 모욕하기 위하여 굳이 창씨명을 찾아서 밝히고 싶다면, 내 가족의 舊호적을 먼저 뒤져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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