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과 간디: 이뤄지지 못한 마주침?
2017. 11. 29. 12:08
레닌과 간디: 이뤄지지 못한 마주침?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 진태원 | 철학자
이 강연은 2004년 10월 2일 파리 10대학(낭테르)에서 열린 제4차 국제 마르크스주의 대회(Congrès Marx International IV)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이후 약간의 수정을 거쳐『폭력과 시민다움: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Violence et civilité)에 재수록되었다. 이 책은 2018년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완역본이 출간될 예정이다.
제가 오늘 다뤄보겠다고 제안한 주제(이 주제를 받아준 데 대해 콜로키엄 조직자 분들게 감사드립니다)는 아카데믹한 탐구의 외양을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긴 해도 이 주제가 어떻게 오늘 우리의 토론 대상인 몇 가지 주요한 역사적ㆍ인식론적ㆍ정치적 문제들과 교차하는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저는 토론을 위한 기초로, 레닌과 간디는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위대한 두 명의 혁명적 실천가-이론가였다는 점을 제기해보려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유사점과 대조점은 지난 20세기에 ‘혁명적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다면, 사회를 변혁한다는 것, 역사적 ‘세계’를 변혁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하는 데서 특권적인 접근 경로를 제시해줍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행성은 또한,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상속하고 있는 정치의 개념을 특징짓기 위한 특권적인 접근 경로인데,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정치의 개념이 이미 전화되었고 어느 정도까지 여전히 전화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시초의 정식(이러한 공리(axiome)라는 뜻입니다)은 자명하지 않은 온갖 종류의 전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중 몇몇은 논의 도중에 다시 제기되어 토론의 대상이 될 것이며, 다른 것들은 여전히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 중 몇 가지만 간략하게 제시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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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용하는 단어들 각각은 레닌과 간디 모두에게 적용되겠지만, 곧바로 양분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련의 대당들이 정확하게 상응 관계를 이루는 일종의 이원분할표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일 것입니다. 가령 폭력혁명 대 비폭력혁명, 사회주의 혁명 대 국민적 또는 국민주의적 혁명, 과학적 이데올로기 및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론에 기초를 둔 혁명 대 종교적 이데올로기 내지 종교적 바탕의 윤리에 기초를 둔 혁명 등이 그런 예가 되겠죠. 이러한 대당들이 서로 일관되게 연역되지 않으며, 이것들은 오히려 근대 혁명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유형론을 드러낸다는 점을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 대당들은 두 명의 인물로 집중되어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지속되는 한 가지 논쟁을 형성할 만큼 거대한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이 개인들 또는 그들이 주역이었던 역사적 과정들, 월러스틴 식으로 말하면 다름 아니라 20세기의 두 거대한 “반체계” 운동의 작용이 남긴 막대한 결과 때문인데, 이 두 운동 사이의 간극, 교차, 다소간 완결된 융합 내지 반대로 분기는,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고 부른 세기의 거대한 쟁점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이 운동들이 산출한 효과의 양가성 및 이 운동들을 객관적으로 괴롭힌 수많은 역설들 때문인데,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는 일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국제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영감을 받았고, 자본주의가 범세계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어서 시초의 변혁 양상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의 변혁은 사회구성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신념에 기초를 둔 볼셰비키 혁명은 ‘일국 사회주의’로 귀결되었습니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처음에는 일국 단위에서, 그 뒤에는 국가들의 블록 단위에서 생산을 조직하고 사회를 정상화하는(normalisation) 모델을 구성하려는 시도로 귀결되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스탈린이 근본적인 의미에서 레닌의 진실이라는 점인데, 비록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가면서 혁명적 실천이 그 대립물로 전도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역사는 “나쁜 방향에 의해” 전진한 셈입니다. ... 하지만 이 모델이 그 현실 및 전 세계의 대중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그려낸 그것에 관한 이상화된 표상에서 세력 관계 및 정치적 행위의 공간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 또한 사실입니다(적어도 그렇게 주장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논리는 전적으로 이 세상을 좌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모델은 [그 잠재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과 그 변혁 사이의 긴장을 유지해왔으며,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부에서 레닌주의의 반혁명적인 퇴락으로 간주된 것을 정정하고 전도시킬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레닌주의를 변형하거나 아니면 대안을 추구하도록 해준 셈입니다.
간디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어느 정도까지는 간디 자신이 지도했던 국민적 혁명의 경우는 분명 역사상 위대한 탈식민화(décolonisation)의 현상들 중 하나, 아마도 가장 위대한 현상으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동시에 탈식민화의 모델들 중 하나를 구성했습니다(물론 유일한 모델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알다시피 이 혁명 역시 그 창시자가 그렸던 전망과 본질적인 측면들에서 모순을 빚은 결과를 산출했습니다1. 모셰 루베네의 유명한 정식에 따르면, 소비에트 혁명의 국가주의적이고 치안주의적인 표류에 맞선 ‘레닌의 마지막 투쟁’2이 존재했던 것처럼, 민족적-종교적 토대에 입각한 인도의 분할과 독립의 확립에 맞선 ‘간디의 마지막 투쟁’도 존재했으며, 이 투쟁에서 그는 사망했습니다. 독립의 조건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혁명의 ‘방법’, 서양에서는 ‘비폭력’ 내지 ‘비폭력 저항’으로 알려진 이 방법은 『힌두 스와라지』가 기약했던 내용을 유지하지 못했으며, 국민주의 정치는 그 대립물, 곧 공동체주의적 폭력으로 진동하여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亞)대륙 인도의 국가들 및 사회들을 뒤엎으려는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3 하지만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매우 다른 양상을 띠고 있지만) 간디의 정치 모델―이것 역시 장소, 조건, 목표 및 담론에서 수많은 변형들을 지니고 있습니다―도, 기본권의 복원이나 획득을 목표로 삼는, 그리고 피지배자들과 지배자들의 권력 사이의 대결을 추구하는 대중운동의 조직 형태로서 보편적 효력을 얻어왔다는 점 역시 사실입니다. 이는 단지 국민의 독립투쟁이나 소수 민족의 자치 투쟁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알다시피 또한 무엇보다도 시민권 운동 및 인종 평등 운동에 대해서도 타당합니다. 평화주의는 상이한 원천을 지니고 있고 그 자체로 비폭력의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지만, 명백히 이러한 유산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레닌과 간디라는 두 인물을 대질시켜 보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러한 대질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정치와 현대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시금석으로서 끊임없이 제기되어왔으며, 명백히 독립 투쟁 기간 및 그 이후 인도에서 특히 결정적인 문제였고 아주 상세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온갖 종류의 대질 가운데 간디의 전략을 ‘진지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관심을 끄는데, 이는 더욱이 그람시 자신의 놀라운 언급에 기초를 둔 것이었습니다. 그람시는 레닌의 궁극적인 직관이 혁명 투쟁의 무게 중심을 국가권력 장악에서 시민사회 내에서 헤게모니의 구축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고 믿었으며, 이를 간디주의와 위대한 종교개혁 운동 사이의 (시대적 간격을 초월하는) 공통적인 요소와 연결시켰습니다. 클로드 마르코비치가 뛰어난 저작에서 정당하게 환기시켰던 것처럼,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대질이 단지 톨스토이와 로맹 롤랑의 제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쟁 이후 앙리 바르뷔스(Henri Barbusse) 같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소묘되었는데, 그는 반제국주의 투쟁에 결집했던 모든 세력을 조사해보려고 했습니다.4
오늘날 이러한 대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나고 있는데, 이는 세계화의 맥락에서 증대한 사회적ㆍ문화적 운동이 지닌 이론적이고 전략적인 불확실성에서 기인한 것이며, 또한 20세기의 조건과 비교해볼 때 21세기의 정치―일정한 전략들이나 조직 형식들에 특별히 얽매이지 않은 가운데 혁명의 이념이 ‘유령적인’ 방식으로 떠돌고 있는―는 정치적 공간을 구조화했던 ‘경계들’이 말소되거나 아니면 완전히 재분배되었다는 특징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경계들’은, ‘서양’과 ‘동양’ 사이의 문화적-정치적 경계이고, 지배적인 ‘중심부’ 세계와 피지배적인 ‘주변부’ 세계 사이의 경제적이고 지정학적인 경계이기도 하며, 또한 권력들의 위치 설정 및 집단 의식의 구체적 규정과 관련된 국가의 공적 영역과 사적인 사회적 영역 사이의 제도적 경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규정하는 것 또는 어쨌든 그것을 시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반화된 폭력 및 구조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폭력 형태들 사이의 순환의 환경 내지 경제 속에 정치가 불가역적인 방식은 아닐지 몰라도 분명히 지속적인 방식으로 잠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폭력은 명백히 ‘예방적 반혁명’이라는 또는 사회운동들을 무력화하고 억압하며, 필요할 경우에는 타락시키는 객관적 특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중 정치 및 간단히 말하면 민주주의 정치의 이념 자체에 대해 특히 힘겨운 문제들을 제기합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감안하면, 혁명적인 정치에 관한 퇴색한 이미지를 ‘감안하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대면해야 할 대안적인 전략들의 준거 내지 징표로서 레닌과 간디의 이름이 거론되는 토론들이 이곳저곳에서 재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5
또한 이러한 토론들이 때로는 비교의 항들을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내가 보기에 더 분석적인 작업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이점입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행동의 모델을 ‘폭력’과 ‘비폭력’ 같은 추상적인, 거의 형이상학적인 실재들로 귀착시키는 것이 그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적인 정세에서 최근의 전개과정이 산출한 충격적인 효과로 인해) 점점 더 환원과 단순화의 이중적인 계열에 따라 나아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비록 서로 과잉결정하고 서로 배가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는 해도 극히 이질적인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폭력들을 전쟁이라는 유일한 모습으로 환원하고, 전쟁 그 자체마저도 사회의 생산력들에 대한 자본의 지배가 자기파괴적이게 되거나 파국을 맞게 되는 “최종 단계”, 곧 마침내 자본의 지배가 전도되고 (다시 한 번 더 ...) 자본의 역사적 궤적의 임박한 완수가 표시될 “최종 단계”로 환원하는 것입니다.6 제가 보기에 이 질문을 제기하고 토론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이런 식으로는 오히려 더 세부적인 검토를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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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의 두 모델 사이의 대질에서 관건이 되는 쟁점을 다루기 전에, 우선 ‘혁명 운동’이라는 동일한 이름 아래 두 모델을 결합하는 것을 형식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상기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두 가지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이 두 가지 특징이 19세기의 유산, 특히 서양 사회에서 국민 독립 및 사회 변혁 같은 ‘혁명들’의 유산이라는 점을 사후에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20세기의 극적인 역사를 통해 다듬어져서, 정치 이론이 양쪽 모두에서 정치 개념과 그 국가적 형식화(특히 법적이고 헌정적인 정의(définition)에 입각한) 사이에 존재하는 메울 수 없는 간극으로 지각해온 것으로 결정(結晶)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대중운동의 자리가 구성하는 것인데, 대중운동은 ‘능동적’ 국면에서 ‘수동적’ 국면으로 또는 그 역으로 이동하게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을 유지하면서 공적인 무대에 ‘다수자’로서 자율적인 방식으로 개입하며, 따라서 제도적인 통제 및 규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특징은 레닌주의(이는 이점에서 노동자운동 및 사회적 민주주의의 계승된 전통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습니다)와 간디주의(이는 이점에서 인도 및 다른 지역에서 전개된 반식민주의 투쟁의 역사를 혁신했습니다)에 공통적입니다.7 이 특징은 자생성과 조직의 결합에 관한 매우 다양한 정식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문제가 되는 사회의 문화적 전통과 대중의 존재조건, 대중동원의 이데올로기적 자원 및 대중운동과 맞서는 기성권력의 성격에 따라 달라집니다. 대중운동은 결코 ‘대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정 반대로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이는 대표를 가능하게 하거나 기존 정치 체제가 대표에 관해 제한적이거나 허구적인 정의를 부여하는 곳에서 대표를 개조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에도 대중운동은 대표로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며,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본질은 대표가 아니라는 것, 또는 대표는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를 곧바로 레닌주의와 간디주의에 공통적인 두 번째 특징, 곧 반(反)법률주의(antinomisme)로 이끌어 가는데, 저는 이 용어를 전통적인 어원적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곧 합법성에 대한, 따라서 합법성의 원천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개인들 및 사회 집단들에 대한 통제 도구를 구성하는 법 규범을 지니고 있는 국가권력에 대한 [대중운동의] 갈등적 관계,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부르주아 독재’의 전도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것일 수 있는데, 레닌은 주권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정의들을 재활용하여 이러한 독재의 본질은 어떤 사회 계급이 사회 변혁에 관한 자신의 요구를 ‘법을 넘어서’ 설정하는 것이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는 또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에게서, 더 멀리는 ‘저항권’ 개념에서 유래한 ‘시민불복종’ 개념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는데, 간디는 국가로 하여금 자신의 헌정 원리와 명백히 모순을 빚는 지점에 도달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이러한 원리를 개혁하도록 강제하는 모든 단계의 전술적 투쟁 일체를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이 개념을 체계화했습니다. 따라서 두 경우에서 모두 합법성은 위반의 대상이 됩니다. 이는 합법성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합법성은 자신이 초월한다고 주장하던 세력 관계의 장 내부로 끌려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네그리가 프랑스혁명 및 미국혁명에서 유래한 헌정이론 전통에서 차용한 이론적 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곧 구성된 헌정권력은 구성하는 제헌권력, 다시 말해 민주주의 봉기적 요소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8 분명 두 개의 혁명은 서로 상반된 것으로 나타날 만큼 심오하게 상이한 차원에서, 그리고 상이한 양상 및 목표에 따라 전개됩니다. 사회운동 및 그것이 지닌 시민사회의 전복 능력에 관한 현재의 토론 중 상당 부분은 정확히 이러한 차이점으로 귀착되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원칙의 유사성(analogie de principe)을 찾아내려 하는 것이 차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유사성이야말로 국가적인 것을 넘어서는, 또는 갈등적인 방식으로 국가와 혁명(심지어, 국가, 혁명 그리고 반혁명까지)을 동시에 포함하는 모종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Begriff des politischen)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유사성은 우리를 곧바로 역사적 조건들에 관한 질문으로 이끌어 갑니다. 사실 합법성을 초과하는 이러한 봉기적인 또는 반법률적인 정치 개념 자체가 국가 제도의 일정한 역사적 형식들에 긴밀하게 의존해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심지어 개연성이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국가 제도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조건 및 사회적 관계에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정치 관계들이 집중된 것으로서 또는 권력관계들이 구체화되고 통합되는 지점으로서 나타났던 시기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역사들은 정당하게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레닌주의적 관점이 극히 개략적인 마르크스의 언급들을 체계화하면서 노동자 운동 및 민주주의 운동 전체와, 권위주의적이고 근본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유형 사이의 대결에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적 갈등을 표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왔습니다.9 그리고 다른 역사가들은 ‘비폭력 시민불복종’ 전략은 대중운동이 법치국가(rule of law), 곧 단순히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특히 영미 헌정의 전통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그래온 것처럼―개인적 자유를 확고하게 보장하는 전통을 지닌 국가와 대면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가능했다고 지적해왔습니다(간디 자신이 이러한 전략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이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10.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끌었던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효과에 대해서도 같은 관찰이 제시되어 왔지만, 이것이 몇몇 지방의 권력에 맞선 미국연방정부의 단순한 조작이라는 생각만은 적어도 거부해야 합니다.
따라서 합법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상이한 위반 양상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공산주의 선언의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정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인 것인지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이 양상들은 각각의 경우마다 그것들이 힘을 겨루는 국가의 역사적 형태에 또는 ‘지배’ 권력의 형식화에 긴밀하게 의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지배’라는 막스 베버의 개념을 사용했는데, 왜냐하면 저는 또한 (여기에서 제 생각을 길게 개진하지는 않지만) 막스 베버가 ‘복종을 얻을 수 있는 개연성’이라는, 따라서 또한 ‘복종 생산의 양상들’이라는 견지에서 정식화한 것과 같은 지배 형식에 대한 관점이 우리의 토론을 좀 더 진전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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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환기하고 싶은 두 가지 마지막 논점에 대해서는 더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가설적으로 두 가지 혁명적 모델 각자의 ‘중심 문제’ 또는 관건이 되는 문제(오늘날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라고 불렀던 것에 대해 언급해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혁명에 관한 레닌주의적 이론화(이것 자체가 시간에 따라 진화했습니다)와 그의 지도 아래(집단적인 지도이기는 했지만, 레닌이 거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 방향을 규정했습니다) 볼셰비키 당이 실행했던 정치 전략, 마지막으로 역사적 상황(이는 진정한 시대의 전환을 낳게 됩니다) 간의 관계를 ‘판단’하려고 시도해본다면, 우리는 아주 고전적으로, 점점 더 서로 다른 것들을 포함하게 되었던 세 가지 계기로 난점들이 집중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계기는, 사회에 대하여 ‘자율적인’ 계급독재로서의 국가권력(국가장치를 변혁하기 전에 우선 국가 권력을 획득해야 합니다)이라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혁명의 ‘탁월한’ 주체로서의 또는 사회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 이행하기 위한 특권적인 도구로서 계급 정당이라는 관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레닌이 절망적인 상황을 지배 체계와 단절하기 위한 기회로 역전시킴으로써 역사 속에 빌을 디디게 된 정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1914년 전쟁의 계기로, 그는 이때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하라”는 구호를 정식화했는데, 반역한 병사평의회의 봉기와 이것의 노동자ㆍ농민의 사회운동과의 융합으로 인해 약화된 러시아의 군사적 패배가 레닌으로 하여금 이러한 구호를 실행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계기는 [러시아혁명 이후 벌어진] 내전과 외국의 개입, 그리고 ‘신경제정책’에 입각한 소비에트 체계 개혁 실패에 이르는 조건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부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계기들 각각은 조직된 혁명적 폭력이라는 문제,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게발트(Gewalt)라는 독일어 한 단어에 내포된 두 측면, 우리가 ‘권력’과 ‘폭력’으로 분할하는 폭력의 제도적 측면과 반제도적 측면의 변증법에 대해 중심적인 위상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조건 속에서 볼 때 두 번째 계기(권력/혁명 관계)야말로 우선적으로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쟁점인 것 같습니다. 이 두 번째 계기에서 레닌과, 또한 동시에 사회주의 운동 전체가 직면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파괴적인 지배의 행사,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다면, 국가의 극단적 폭력 형식들이었습니다(많은 역사서들이 과소평가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것을 다시 만들어내야 했던 것입니다 ...
우리는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하라”는 구호가 전체주의 비판가들이 특히 겨냥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이 구호를 러시아 혁명에 특유한 ‘테러리즘’의 모체로, 따라서 적어도 혁명과 반혁명(곧 유럽의 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정치적 반대파들의 대량 학살과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파괴가 순환하게 된 가능성의 모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12 하지만 한 단어(“내전”)가 지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힘에 근거한 이러한 독해는, 레닌주의 안에 함축되어 있는 가장 거대한 해방의 힘, 가장 거대한 역량과 가장 거대한 퇴락의 위험, 심지어 가장 거대한 착각이 서로 겹쳐지는 급소 지점을 제대로 식별해내지 못합니다. 레닌의 구호의 뒷부분만이 아니라 앞부분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실로 레닌이야말로 극단적 폭력이 전개되고 시민사회 민주주의 형식들이 파괴되는 상황을 조직된 대중의 집단적 행동과 창의를 수단으로 하여 내적으로 전화하는 문제를 제안한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그리고 이점과 관련하여 레닌과는 반대로 간디의 혁명 전략은 간디 스스로 고백하듯이 근본적으로 효과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둡시다). 달리 말하면 레닌은 폭력을 숙명의 영역에 기입하지 않고 경험 그 자체에 입각하여 극단적 폭력에 대한 결정의 원인들 및 중심들에 작용을 미칠 수 있는 길을 탐색한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민주주의 혁명에 관한 어떠한 이념도 이 문제를 생략할 수 없으며, 레닌의 경우처럼 이 문제를 가장 불리한 상황 속에서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레닌은 권력 관계의 전화에 관한 가망 없는 관점에 갇혀 있었으며, 그것도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다른 교전국들에서의 혁명 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내전’의 국제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레닌은 포위된 요새인 국민적 공간 내에 갇혀 있었습니다. 둘째, 레닌은 또한 어떤 마르크스주의,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공간 내에 갇혀 있었는데, 이는 ‘국가 아닌 국가’의 역설을 무한히 변주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 국가를 강화하는 형식을 통해 국가를 소멸시키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13
이제 간디의 경우로 돌아가, [레닌의 경우와] 대칭적인 모순 내지 이중구속의 대강을 살펴보겠습니다. 알다시피 서양어로 ‘비폭력’이라고 번역되는 것은 사실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통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간디가 고안해낸 사티아그라하이며, 두 번째는 힌두교 금욕주의 전통(‘자이나교’)에서 취하여 각색한 아힘사(ahimsa)입니다. 간디 사상에서 윤리적 또는 윤리ㆍ종교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많은 논의에서 인도 내부의 해석자들을 포함한 상이한 해석자들은 양자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곧 종교적 의식으로 ‘치장한’ 정치적인 것의 우위로 해석하거나 정치적인 것의 정상적인 진행방식을 뒤흔들고 그것을 근대의 제도적 형태 이전으로 이끌어가는 영성 운동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토론은 두 용어의 의미를 둘러싸고 전개되며, 심지어 한 문화적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 동양에서 서양으로 이동하기 위해 두 용어를 분리시키고 다르게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둘러싸고 전개됩니다.14 그렇지만 이 용어들이 준거하는 문제들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서, 또한 그것들을 결합하는 일의 난점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간디 정치관의 중심을 이루는 [두 용어 사이의] ‘변증법’에 대한 완전한 표상을 만들 수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변증법이 ‘도덕적’ 요소(양심에 속하지만 그 틀을 훨씬 넘어서는)를 간디의 정치관 속에 도입하게 되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15
다소간 문자 그대로 ‘진실의 힘’으로 번역되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는 용어는 간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도인들의 시민권 투쟁을 조직한 최초의 경험에 입각하여 ‘수동적 저항’이라는 통념을 대신하여 제시한 것입니다. 이후 간디는 이 용어를 각각의 시민불복종 캠페인의 명칭으로 만들었으며 또한 동시에 폭동이나 테러 활동을 식민 지배에 맞선 인민대중의 지속적인 동원으로 대체하기 위한 합법적ㆍ비합법적 장기 투쟁 형식의 일반 개념으로 만들었습니다.
금욕을 뜻하는 전통적인 용어로서 간디가 개인의 영역에서 상호개인적인 영역으로 확장한 아힘사(ahimsa)는 비록 간디 자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친화성이 있다고 믿긴 했지만, 서양의 영성적인 어휘로는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용어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적에 대한 증오를 극복하거나 대항폭력을 억제하게 해주는 에너지의 집중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러한 ‘종교적’ 요소를 정치적인 것의 중심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제가 앞에서 언급했던 ‘변증법’을 형성하는 상반된 운동들을 그것의 아주 구체적으로 규정된 사회ㆍ정치적 측면들과 진정으로 결부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특히 비합법적인 실천을 통해 대중운동이 지배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공격적인 비폭력” 국면들과, 본질적으로 운동의 내적인 민주화 국면이라고 할 수 있는 “건설적 비폭력” 국면들이 번갈아 전개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후자의 국면에서 간디는 특히 자크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고 부른 것, 곧 불가촉 천민들, 소수 민족들, 여성들의 원칙적인 평등(여기에는 미묘한 차이들이 존재하지만, 이점은 넘어가겠습니다)이 인정되게 만들려고 애썼습니다.16 하지만 우리는 또한 간디 자신이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관념이 형성하는 ‘혁명 속의 혁명’도 이해할 수 없게 되는데(이는 헤게모니, 민주적 동맹, ‘인민 내부의 모순’ 등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 따라서 레닌주의 전통에게는 심원하게 낯선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사회세력들 간의 대결에서 사용된 수단들의 본성은 이 세력들의 정체성 자체에 반작용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운동의 목적 또는 그 의도 내지 이데올로기적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실제로 산출되는 결과에 반작용을 미치게 됩니다.17 이는 직접적으로는 간디의 유명한 ‘대화주의’18(모든 정치 투쟁은 적수에 대한 개방의 계기를 포함해야 하며, 이것이 그의 관점의 전화를 조건 짓습니다) 및 대중 행동에서 자기 한정의 실천(이는 알다시피 실행하기 매우 어려운 것인데, 왜냐하면 ‘최종 투쟁’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믿는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이는 이해 불가능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 귀착되며, 이 후자의 경우는 특히, 사티아그라하가 갑자기 비폭력에서 공동체적이거나 테러리즘적인 폭력으로 전도될 때 사티아그라하가 중단되는 것을 통해 예시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감히 간디 모델에 내적인 아포리아에 관해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해볼까 합니다(아포리아가 부조리함이나 효력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레닌주의의 아포리아와 대칭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조직과 관련된 것이며, 더 심층적으로 본다면 정치적 주체, 특히 무엇보다 혁명적 주체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관개체적인 집합적 유대의 본성 및 구성 양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유대라고 불리는 이러한 유대는 더 정확히 말하면 ‘카리스마적인’ 유대로서, 이는 공동의 사랑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투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따라서 투쟁이 함축하는 희생을 견뎌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마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지닌 것으로 가정되는 주체로서의 지도자의 인격에 의존합니다. 이는 대략 성자 같음 또는 선지자 같음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차이가 벌어져서 적대로 전환되는(암베드카드와의 관계에서 불가촉 천민들에 대한 정치적 대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경우처럼) 결정적인 계기들, 가령 국가가 양보를 거부하거나 공동체들 간의 갈등이 학살로 번져가는 경우에 간디는 자신의 소멸의 위협(심원하게 양가적인 영성적 힘의 궁극적 표현으로서 목숨을 건 단식)을 통해서만 겨우 폭력의 자기 한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19 이는 이러한 수단이 실패로 돌아간 또는 일종의 수동적 폭력에 의한 정치적 살해를 역으로 촉발한 ‘마지막 투쟁’에 이르기까지 그랬습니다. 대중의 힘과 그 저항력을 이루었던 도덕적, 주체적 유대는 ‘또 다른 무대’, 곧 지배 및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하여 전화의 방식으로, 곧 역사적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들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더욱이 모든 조건이 동등할 경우―규정하는 투쟁에서는 심원하게 양가적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러한 유대가 사랑과 죽음이 서로에게 몰입하는 강렬하게 성적인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적어도 20세기의 위대한 혁명운동이 그 모순적인 결과와 더불어 동원하고 무대화했던 의미에서 대중 및 대중운동의 시대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그런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저는 소망이나 기획 또는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정치적 행위라는 관념은 여전히, 비록 명백히 계급적 조건 및 문화적 모델에 의해 심층적으로 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개 연역이나 기획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집합적 행위자의 구성이라는 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된 채 남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어떤 정세, 특히 사회 전체의 차원에 걸쳐, 심지어 세계 전체의 차원에 걸쳐 참을 수 없는 것을 불러일으키고 혁명적 변혁에 대한 요구를 다시 제기하는 극단적 정세의 긴급함과 결부된다고 해도 그것은 겨우 한 가지 가능성만을 제시해줄 뿐입니다. 철학에서 행위 개념이 지닌 전통적 의미, 곧 단지 어떤 대상(matiére)만 전화시킬 뿐 아니라 행위자 자신들까지 ‘형성하는’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행위하는 집합체 또는 집합적 실천은 조직 내지 제도 형태를 요구하며, 정서적 투여 또는 주체적인 동일시 과정을 요구합니다. 외관상으로는 아주 단순한 이 두 항[조직과 동일시 과정] 각자가 포함하고 있는 깊은 모순을 드러내줌으로써(하지만 사후에야), 레닌과 간디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역사들은 우리가 정치적인 것의 이러한 복잡성, 역사가 우리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은 채 우리를 그 속으로 투사하는 그 복잡성을 간과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몇몇 논평자들은 종종 상반되는 전제들에 입각해 있기는 하지
레닌과 간디: 이뤄지지 못한 마주침?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 진태원 | 철학자
이 강연은 2004년 10월 2일 파리 10대학(낭테르)에서 열린 제4차 국제 마르크스주의 대회(Congrès Marx International IV)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이후 약간의 수정을 거쳐『폭력과 시민다움: 웰렉도서관 기념 강의』(Violence et civilité)에 재수록되었다. 이 책은 2018년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완역본이 출간될 예정이다.
제가 오늘 다뤄보겠다고 제안한 주제(이 주제를 받아준 데 대해 콜로키엄 조직자 분들게 감사드립니다)는 아카데믹한 탐구의 외양을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긴 해도 이 주제가 어떻게 오늘 우리의 토론 대상인 몇 가지 주요한 역사적ㆍ인식론적ㆍ정치적 문제들과 교차하는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저는 토론을 위한 기초로, 레닌과 간디는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위대한 두 명의 혁명적 실천가-이론가였다는 점을 제기해보려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유사점과 대조점은 지난 20세기에 ‘혁명적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다면, 사회를 변혁한다는 것, 역사적 ‘세계’를 변혁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하는 데서 특권적인 접근 경로를 제시해줍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행성은 또한,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상속하고 있는 정치의 개념을 특징짓기 위한 특권적인 접근 경로인데,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정치의 개념이 이미 전화되었고 어느 정도까지 여전히 전화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시초의 정식(이러한 공리(axiome)라는 뜻입니다)은 자명하지 않은 온갖 종류의 전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중 몇몇은 논의 도중에 다시 제기되어 토론의 대상이 될 것이며, 다른 것들은 여전히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 중 몇 가지만 간략하게 제시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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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용하는 단어들 각각은 레닌과 간디 모두에게 적용되겠지만, 곧바로 양분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련의 대당들이 정확하게 상응 관계를 이루는 일종의 이원분할표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일 것입니다. 가령 폭력혁명 대 비폭력혁명, 사회주의 혁명 대 국민적 또는 국민주의적 혁명, 과학적 이데올로기 및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론에 기초를 둔 혁명 대 종교적 이데올로기 내지 종교적 바탕의 윤리에 기초를 둔 혁명 등이 그런 예가 되겠죠. 이러한 대당들이 서로 일관되게 연역되지 않으며, 이것들은 오히려 근대 혁명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유형론을 드러낸다는 점을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 대당들은 두 명의 인물로 집중되어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지속되는 한 가지 논쟁을 형성할 만큼 거대한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이 개인들 또는 그들이 주역이었던 역사적 과정들, 월러스틴 식으로 말하면 다름 아니라 20세기의 두 거대한 “반체계” 운동의 작용이 남긴 막대한 결과 때문인데, 이 두 운동 사이의 간극, 교차, 다소간 완결된 융합 내지 반대로 분기는,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고 부른 세기의 거대한 쟁점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이 운동들이 산출한 효과의 양가성 및 이 운동들을 객관적으로 괴롭힌 수많은 역설들 때문인데,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는 일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국제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영감을 받았고, 자본주의가 범세계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어서 시초의 변혁 양상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의 변혁은 사회구성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신념에 기초를 둔 볼셰비키 혁명은 ‘일국 사회주의’로 귀결되었습니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처음에는 일국 단위에서, 그 뒤에는 국가들의 블록 단위에서 생산을 조직하고 사회를 정상화하는(normalisation) 모델을 구성하려는 시도로 귀결되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스탈린이 근본적인 의미에서 레닌의 진실이라는 점인데, 비록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가면서 혁명적 실천이 그 대립물로 전도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역사는 “나쁜 방향에 의해” 전진한 셈입니다. ... 하지만 이 모델이 그 현실 및 전 세계의 대중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그려낸 그것에 관한 이상화된 표상에서 세력 관계 및 정치적 행위의 공간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 또한 사실입니다(적어도 그렇게 주장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논리는 전적으로 이 세상을 좌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모델은 [그 잠재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과 그 변혁 사이의 긴장을 유지해왔으며,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부에서 레닌주의의 반혁명적인 퇴락으로 간주된 것을 정정하고 전도시킬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레닌주의를 변형하거나 아니면 대안을 추구하도록 해준 셈입니다.
간디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어느 정도까지는 간디 자신이 지도했던 국민적 혁명의 경우는 분명 역사상 위대한 탈식민화(décolonisation)의 현상들 중 하나, 아마도 가장 위대한 현상으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동시에 탈식민화의 모델들 중 하나를 구성했습니다(물론 유일한 모델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알다시피 이 혁명 역시 그 창시자가 그렸던 전망과 본질적인 측면들에서 모순을 빚은 결과를 산출했습니다1. 모셰 루베네의 유명한 정식에 따르면, 소비에트 혁명의 국가주의적이고 치안주의적인 표류에 맞선 ‘레닌의 마지막 투쟁’2이 존재했던 것처럼, 민족적-종교적 토대에 입각한 인도의 분할과 독립의 확립에 맞선 ‘간디의 마지막 투쟁’도 존재했으며, 이 투쟁에서 그는 사망했습니다. 독립의 조건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혁명의 ‘방법’, 서양에서는 ‘비폭력’ 내지 ‘비폭력 저항’으로 알려진 이 방법은 『힌두 스와라지』가 기약했던 내용을 유지하지 못했으며, 국민주의 정치는 그 대립물, 곧 공동체주의적 폭력으로 진동하여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亞)대륙 인도의 국가들 및 사회들을 뒤엎으려는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3 하지만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매우 다른 양상을 띠고 있지만) 간디의 정치 모델―이것 역시 장소, 조건, 목표 및 담론에서 수많은 변형들을 지니고 있습니다―도, 기본권의 복원이나 획득을 목표로 삼는, 그리고 피지배자들과 지배자들의 권력 사이의 대결을 추구하는 대중운동의 조직 형태로서 보편적 효력을 얻어왔다는 점 역시 사실입니다. 이는 단지 국민의 독립투쟁이나 소수 민족의 자치 투쟁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알다시피 또한 무엇보다도 시민권 운동 및 인종 평등 운동에 대해서도 타당합니다. 평화주의는 상이한 원천을 지니고 있고 그 자체로 비폭력의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지만, 명백히 이러한 유산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레닌과 간디라는 두 인물을 대질시켜 보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러한 대질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정치와 현대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시금석으로서 끊임없이 제기되어왔으며, 명백히 독립 투쟁 기간 및 그 이후 인도에서 특히 결정적인 문제였고 아주 상세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온갖 종류의 대질 가운데 간디의 전략을 ‘진지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관심을 끄는데, 이는 더욱이 그람시 자신의 놀라운 언급에 기초를 둔 것이었습니다. 그람시는 레닌의 궁극적인 직관이 혁명 투쟁의 무게 중심을 국가권력 장악에서 시민사회 내에서 헤게모니의 구축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고 믿었으며, 이를 간디주의와 위대한 종교개혁 운동 사이의 (시대적 간격을 초월하는) 공통적인 요소와 연결시켰습니다. 클로드 마르코비치가 뛰어난 저작에서 정당하게 환기시켰던 것처럼,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대질이 단지 톨스토이와 로맹 롤랑의 제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쟁 이후 앙리 바르뷔스(Henri Barbusse) 같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소묘되었는데, 그는 반제국주의 투쟁에 결집했던 모든 세력을 조사해보려고 했습니다.4
오늘날 이러한 대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나고 있는데, 이는 세계화의 맥락에서 증대한 사회적ㆍ문화적 운동이 지닌 이론적이고 전략적인 불확실성에서 기인한 것이며, 또한 20세기의 조건과 비교해볼 때 21세기의 정치―일정한 전략들이나 조직 형식들에 특별히 얽매이지 않은 가운데 혁명의 이념이 ‘유령적인’ 방식으로 떠돌고 있는―는 정치적 공간을 구조화했던 ‘경계들’이 말소되거나 아니면 완전히 재분배되었다는 특징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경계들’은, ‘서양’과 ‘동양’ 사이의 문화적-정치적 경계이고, 지배적인 ‘중심부’ 세계와 피지배적인 ‘주변부’ 세계 사이의 경제적이고 지정학적인 경계이기도 하며, 또한 권력들의 위치 설정 및 집단 의식의 구체적 규정과 관련된 국가의 공적 영역과 사적인 사회적 영역 사이의 제도적 경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규정하는 것 또는 어쨌든 그것을 시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반화된 폭력 및 구조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폭력 형태들 사이의 순환의 환경 내지 경제 속에 정치가 불가역적인 방식은 아닐지 몰라도 분명히 지속적인 방식으로 잠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폭력은 명백히 ‘예방적 반혁명’이라는 또는 사회운동들을 무력화하고 억압하며, 필요할 경우에는 타락시키는 객관적 특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중 정치 및 간단히 말하면 민주주의 정치의 이념 자체에 대해 특히 힘겨운 문제들을 제기합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감안하면, 혁명적인 정치에 관한 퇴색한 이미지를 ‘감안하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대면해야 할 대안적인 전략들의 준거 내지 징표로서 레닌과 간디의 이름이 거론되는 토론들이 이곳저곳에서 재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5
또한 이러한 토론들이 때로는 비교의 항들을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내가 보기에 더 분석적인 작업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이점입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행동의 모델을 ‘폭력’과 ‘비폭력’ 같은 추상적인, 거의 형이상학적인 실재들로 귀착시키는 것이 그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적인 정세에서 최근의 전개과정이 산출한 충격적인 효과로 인해) 점점 더 환원과 단순화의 이중적인 계열에 따라 나아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비록 서로 과잉결정하고 서로 배가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는 해도 극히 이질적인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폭력들을 전쟁이라는 유일한 모습으로 환원하고, 전쟁 그 자체마저도 사회의 생산력들에 대한 자본의 지배가 자기파괴적이게 되거나 파국을 맞게 되는 “최종 단계”, 곧 마침내 자본의 지배가 전도되고 (다시 한 번 더 ...) 자본의 역사적 궤적의 임박한 완수가 표시될 “최종 단계”로 환원하는 것입니다.6 제가 보기에 이 질문을 제기하고 토론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이런 식으로는 오히려 더 세부적인 검토를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2
회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의 두 모델 사이의 대질에서 관건이 되는 쟁점을 다루기 전에, 우선 ‘혁명 운동’이라는 동일한 이름 아래 두 모델을 결합하는 것을 형식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상기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두 가지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이 두 가지 특징이 19세기의 유산, 특히 서양 사회에서 국민 독립 및 사회 변혁 같은 ‘혁명들’의 유산이라는 점을 사후에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20세기의 극적인 역사를 통해 다듬어져서, 정치 이론이 양쪽 모두에서 정치 개념과 그 국가적 형식화(특히 법적이고 헌정적인 정의(définition)에 입각한) 사이에 존재하는 메울 수 없는 간극으로 지각해온 것으로 결정(結晶)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대중운동의 자리가 구성하는 것인데, 대중운동은 ‘능동적’ 국면에서 ‘수동적’ 국면으로 또는 그 역으로 이동하게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을 유지하면서 공적인 무대에 ‘다수자’로서 자율적인 방식으로 개입하며, 따라서 제도적인 통제 및 규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특징은 레닌주의(이는 이점에서 노동자운동 및 사회적 민주주의의 계승된 전통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습니다)와 간디주의(이는 이점에서 인도 및 다른 지역에서 전개된 반식민주의 투쟁의 역사를 혁신했습니다)에 공통적입니다.7 이 특징은 자생성과 조직의 결합에 관한 매우 다양한 정식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문제가 되는 사회의 문화적 전통과 대중의 존재조건, 대중동원의 이데올로기적 자원 및 대중운동과 맞서는 기성권력의 성격에 따라 달라집니다. 대중운동은 결코 ‘대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정 반대로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이는 대표를 가능하게 하거나 기존 정치 체제가 대표에 관해 제한적이거나 허구적인 정의를 부여하는 곳에서 대표를 개조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에도 대중운동은 대표로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며,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본질은 대표가 아니라는 것, 또는 대표는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를 곧바로 레닌주의와 간디주의에 공통적인 두 번째 특징, 곧 반(反)법률주의(antinomisme)로 이끌어 가는데, 저는 이 용어를 전통적인 어원적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곧 합법성에 대한, 따라서 합법성의 원천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개인들 및 사회 집단들에 대한 통제 도구를 구성하는 법 규범을 지니고 있는 국가권력에 대한 [대중운동의] 갈등적 관계,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부르주아 독재’의 전도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것일 수 있는데, 레닌은 주권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정의들을 재활용하여 이러한 독재의 본질은 어떤 사회 계급이 사회 변혁에 관한 자신의 요구를 ‘법을 넘어서’ 설정하는 것이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는 또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에게서, 더 멀리는 ‘저항권’ 개념에서 유래한 ‘시민불복종’ 개념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는데, 간디는 국가로 하여금 자신의 헌정 원리와 명백히 모순을 빚는 지점에 도달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이러한 원리를 개혁하도록 강제하는 모든 단계의 전술적 투쟁 일체를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이 개념을 체계화했습니다. 따라서 두 경우에서 모두 합법성은 위반의 대상이 됩니다. 이는 합법성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합법성은 자신이 초월한다고 주장하던 세력 관계의 장 내부로 끌려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네그리가 프랑스혁명 및 미국혁명에서 유래한 헌정이론 전통에서 차용한 이론적 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곧 구성된 헌정권력은 구성하는 제헌권력, 다시 말해 민주주의 봉기적 요소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8 분명 두 개의 혁명은 서로 상반된 것으로 나타날 만큼 심오하게 상이한 차원에서, 그리고 상이한 양상 및 목표에 따라 전개됩니다. 사회운동 및 그것이 지닌 시민사회의 전복 능력에 관한 현재의 토론 중 상당 부분은 정확히 이러한 차이점으로 귀착되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원칙의 유사성(analogie de principe)을 찾아내려 하는 것이 차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유사성이야말로 국가적인 것을 넘어서는, 또는 갈등적인 방식으로 국가와 혁명(심지어, 국가, 혁명 그리고 반혁명까지)을 동시에 포함하는 모종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Begriff des politischen)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유사성은 우리를 곧바로 역사적 조건들에 관한 질문으로 이끌어 갑니다. 사실 합법성을 초과하는 이러한 봉기적인 또는 반법률적인 정치 개념 자체가 국가 제도의 일정한 역사적 형식들에 긴밀하게 의존해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심지어 개연성이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국가 제도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조건 및 사회적 관계에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정치 관계들이 집중된 것으로서 또는 권력관계들이 구체화되고 통합되는 지점으로서 나타났던 시기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역사들은 정당하게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레닌주의적 관점이 극히 개략적인 마르크스의 언급들을 체계화하면서 노동자 운동 및 민주주의 운동 전체와, 권위주의적이고 근본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유형 사이의 대결에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적 갈등을 표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왔습니다.9 그리고 다른 역사가들은 ‘비폭력 시민불복종’ 전략은 대중운동이 법치국가(rule of law), 곧 단순히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특히 영미 헌정의 전통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그래온 것처럼―개인적 자유를 확고하게 보장하는 전통을 지닌 국가와 대면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가능했다고 지적해왔습니다(간디 자신이 이러한 전략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이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10.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끌었던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효과에 대해서도 같은 관찰이 제시되어 왔지만, 이것이 몇몇 지방의 권력에 맞선 미국연방정부의 단순한 조작이라는 생각만은 적어도 거부해야 합니다.
따라서 합법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상이한 위반 양상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공산주의 선언의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정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인 것인지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이 양상들은 각각의 경우마다 그것들이 힘을 겨루는 국가의 역사적 형태에 또는 ‘지배’ 권력의 형식화에 긴밀하게 의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지배’라는 막스 베버의 개념을 사용했는데, 왜냐하면 저는 또한 (여기에서 제 생각을 길게 개진하지는 않지만) 막스 베버가 ‘복종을 얻을 수 있는 개연성’이라는, 따라서 또한 ‘복종 생산의 양상들’이라는 견지에서 정식화한 것과 같은 지배 형식에 대한 관점이 우리의 토론을 좀 더 진전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11
3
제가 환기하고 싶은 두 가지 마지막 논점에 대해서는 더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가설적으로 두 가지 혁명적 모델 각자의 ‘중심 문제’ 또는 관건이 되는 문제(오늘날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라고 불렀던 것에 대해 언급해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혁명에 관한 레닌주의적 이론화(이것 자체가 시간에 따라 진화했습니다)와 그의 지도 아래(집단적인 지도이기는 했지만, 레닌이 거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 방향을 규정했습니다) 볼셰비키 당이 실행했던 정치 전략, 마지막으로 역사적 상황(이는 진정한 시대의 전환을 낳게 됩니다) 간의 관계를 ‘판단’하려고 시도해본다면, 우리는 아주 고전적으로, 점점 더 서로 다른 것들을 포함하게 되었던 세 가지 계기로 난점들이 집중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계기는, 사회에 대하여 ‘자율적인’ 계급독재로서의 국가권력(국가장치를 변혁하기 전에 우선 국가 권력을 획득해야 합니다)이라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혁명의 ‘탁월한’ 주체로서의 또는 사회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 이행하기 위한 특권적인 도구로서 계급 정당이라는 관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레닌이 절망적인 상황을 지배 체계와 단절하기 위한 기회로 역전시킴으로써 역사 속에 빌을 디디게 된 정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1914년 전쟁의 계기로, 그는 이때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하라”는 구호를 정식화했는데, 반역한 병사평의회의 봉기와 이것의 노동자ㆍ농민의 사회운동과의 융합으로 인해 약화된 러시아의 군사적 패배가 레닌으로 하여금 이러한 구호를 실행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계기는 [러시아혁명 이후 벌어진] 내전과 외국의 개입, 그리고 ‘신경제정책’에 입각한 소비에트 체계 개혁 실패에 이르는 조건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부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계기들 각각은 조직된 혁명적 폭력이라는 문제,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게발트(Gewalt)라는 독일어 한 단어에 내포된 두 측면, 우리가 ‘권력’과 ‘폭력’으로 분할하는 폭력의 제도적 측면과 반제도적 측면의 변증법에 대해 중심적인 위상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조건 속에서 볼 때 두 번째 계기(권력/혁명 관계)야말로 우선적으로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쟁점인 것 같습니다. 이 두 번째 계기에서 레닌과, 또한 동시에 사회주의 운동 전체가 직면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파괴적인 지배의 행사,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다면, 국가의 극단적 폭력 형식들이었습니다(많은 역사서들이 과소평가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것을 다시 만들어내야 했던 것입니다 ...
우리는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하라”는 구호가 전체주의 비판가들이 특히 겨냥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이 구호를 러시아 혁명에 특유한 ‘테러리즘’의 모체로, 따라서 적어도 혁명과 반혁명(곧 유럽의 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정치적 반대파들의 대량 학살과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파괴가 순환하게 된 가능성의 모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12 하지만 한 단어(“내전”)가 지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힘에 근거한 이러한 독해는, 레닌주의 안에 함축되어 있는 가장 거대한 해방의 힘, 가장 거대한 역량과 가장 거대한 퇴락의 위험, 심지어 가장 거대한 착각이 서로 겹쳐지는 급소 지점을 제대로 식별해내지 못합니다. 레닌의 구호의 뒷부분만이 아니라 앞부분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실로 레닌이야말로 극단적 폭력이 전개되고 시민사회 민주주의 형식들이 파괴되는 상황을 조직된 대중의 집단적 행동과 창의를 수단으로 하여 내적으로 전화하는 문제를 제안한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그리고 이점과 관련하여 레닌과는 반대로 간디의 혁명 전략은 간디 스스로 고백하듯이 근본적으로 효과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둡시다). 달리 말하면 레닌은 폭력을 숙명의 영역에 기입하지 않고 경험 그 자체에 입각하여 극단적 폭력에 대한 결정의 원인들 및 중심들에 작용을 미칠 수 있는 길을 탐색한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민주주의 혁명에 관한 어떠한 이념도 이 문제를 생략할 수 없으며, 레닌의 경우처럼 이 문제를 가장 불리한 상황 속에서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레닌은 권력 관계의 전화에 관한 가망 없는 관점에 갇혀 있었으며, 그것도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다른 교전국들에서의 혁명 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내전’의 국제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레닌은 포위된 요새인 국민적 공간 내에 갇혀 있었습니다. 둘째, 레닌은 또한 어떤 마르크스주의,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공간 내에 갇혀 있었는데, 이는 ‘국가 아닌 국가’의 역설을 무한히 변주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 국가를 강화하는 형식을 통해 국가를 소멸시키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13
이제 간디의 경우로 돌아가, [레닌의 경우와] 대칭적인 모순 내지 이중구속의 대강을 살펴보겠습니다. 알다시피 서양어로 ‘비폭력’이라고 번역되는 것은 사실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통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간디가 고안해낸 사티아그라하이며, 두 번째는 힌두교 금욕주의 전통(‘자이나교’)에서 취하여 각색한 아힘사(ahimsa)입니다. 간디 사상에서 윤리적 또는 윤리ㆍ종교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많은 논의에서 인도 내부의 해석자들을 포함한 상이한 해석자들은 양자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곧 종교적 의식으로 ‘치장한’ 정치적인 것의 우위로 해석하거나 정치적인 것의 정상적인 진행방식을 뒤흔들고 그것을 근대의 제도적 형태 이전으로 이끌어가는 영성 운동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토론은 두 용어의 의미를 둘러싸고 전개되며, 심지어 한 문화적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 동양에서 서양으로 이동하기 위해 두 용어를 분리시키고 다르게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둘러싸고 전개됩니다.14 그렇지만 이 용어들이 준거하는 문제들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서, 또한 그것들을 결합하는 일의 난점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간디 정치관의 중심을 이루는 [두 용어 사이의] ‘변증법’에 대한 완전한 표상을 만들 수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변증법이 ‘도덕적’ 요소(양심에 속하지만 그 틀을 훨씬 넘어서는)를 간디의 정치관 속에 도입하게 되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15
다소간 문자 그대로 ‘진실의 힘’으로 번역되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는 용어는 간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도인들의 시민권 투쟁을 조직한 최초의 경험에 입각하여 ‘수동적 저항’이라는 통념을 대신하여 제시한 것입니다. 이후 간디는 이 용어를 각각의 시민불복종 캠페인의 명칭으로 만들었으며 또한 동시에 폭동이나 테러 활동을 식민 지배에 맞선 인민대중의 지속적인 동원으로 대체하기 위한 합법적ㆍ비합법적 장기 투쟁 형식의 일반 개념으로 만들었습니다.
금욕을 뜻하는 전통적인 용어로서 간디가 개인의 영역에서 상호개인적인 영역으로 확장한 아힘사(ahimsa)는 비록 간디 자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친화성이 있다고 믿긴 했지만, 서양의 영성적인 어휘로는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용어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적에 대한 증오를 극복하거나 대항폭력을 억제하게 해주는 에너지의 집중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러한 ‘종교적’ 요소를 정치적인 것의 중심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제가 앞에서 언급했던 ‘변증법’을 형성하는 상반된 운동들을 그것의 아주 구체적으로 규정된 사회ㆍ정치적 측면들과 진정으로 결부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특히 비합법적인 실천을 통해 대중운동이 지배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공격적인 비폭력” 국면들과, 본질적으로 운동의 내적인 민주화 국면이라고 할 수 있는 “건설적 비폭력” 국면들이 번갈아 전개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후자의 국면에서 간디는 특히 자크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고 부른 것, 곧 불가촉 천민들, 소수 민족들, 여성들의 원칙적인 평등(여기에는 미묘한 차이들이 존재하지만, 이점은 넘어가겠습니다)이 인정되게 만들려고 애썼습니다.16 하지만 우리는 또한 간디 자신이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관념이 형성하는 ‘혁명 속의 혁명’도 이해할 수 없게 되는데(이는 헤게모니, 민주적 동맹, ‘인민 내부의 모순’ 등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 따라서 레닌주의 전통에게는 심원하게 낯선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사회세력들 간의 대결에서 사용된 수단들의 본성은 이 세력들의 정체성 자체에 반작용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운동의 목적 또는 그 의도 내지 이데올로기적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실제로 산출되는 결과에 반작용을 미치게 됩니다.17 이는 직접적으로는 간디의 유명한 ‘대화주의’18(모든 정치 투쟁은 적수에 대한 개방의 계기를 포함해야 하며, 이것이 그의 관점의 전화를 조건 짓습니다) 및 대중 행동에서 자기 한정의 실천(이는 알다시피 실행하기 매우 어려운 것인데, 왜냐하면 ‘최종 투쟁’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믿는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이는 이해 불가능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 귀착되며, 이 후자의 경우는 특히, 사티아그라하가 갑자기 비폭력에서 공동체적이거나 테러리즘적인 폭력으로 전도될 때 사티아그라하가 중단되는 것을 통해 예시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감히 간디 모델에 내적인 아포리아에 관해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해볼까 합니다(아포리아가 부조리함이나 효력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레닌주의의 아포리아와 대칭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조직과 관련된 것이며, 더 심층적으로 본다면 정치적 주체, 특히 무엇보다 혁명적 주체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관개체적인 집합적 유대의 본성 및 구성 양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유대라고 불리는 이러한 유대는 더 정확히 말하면 ‘카리스마적인’ 유대로서, 이는 공동의 사랑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투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따라서 투쟁이 함축하는 희생을 견뎌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마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지닌 것으로 가정되는 주체로서의 지도자의 인격에 의존합니다. 이는 대략 성자 같음 또는 선지자 같음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차이가 벌어져서 적대로 전환되는(암베드카드와의 관계에서 불가촉 천민들에 대한 정치적 대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경우처럼) 결정적인 계기들, 가령 국가가 양보를 거부하거나 공동체들 간의 갈등이 학살로 번져가는 경우에 간디는 자신의 소멸의 위협(심원하게 양가적인 영성적 힘의 궁극적 표현으로서 목숨을 건 단식)을 통해서만 겨우 폭력의 자기 한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19 이는 이러한 수단이 실패로 돌아간 또는 일종의 수동적 폭력에 의한 정치적 살해를 역으로 촉발한 ‘마지막 투쟁’에 이르기까지 그랬습니다. 대중의 힘과 그 저항력을 이루었던 도덕적, 주체적 유대는 ‘또 다른 무대’, 곧 지배 및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하여 전화의 방식으로, 곧 역사적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들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더욱이 모든 조건이 동등할 경우―규정하는 투쟁에서는 심원하게 양가적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러한 유대가 사랑과 죽음이 서로에게 몰입하는 강렬하게 성적인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적어도 20세기의 위대한 혁명운동이 그 모순적인 결과와 더불어 동원하고 무대화했던 의미에서 대중 및 대중운동의 시대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그런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저는 소망이나 기획 또는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정치적 행위라는 관념은 여전히, 비록 명백히 계급적 조건 및 문화적 모델에 의해 심층적으로 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개 연역이나 기획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집합적 행위자의 구성이라는 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된 채 남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어떤 정세, 특히 사회 전체의 차원에 걸쳐, 심지어 세계 전체의 차원에 걸쳐 참을 수 없는 것을 불러일으키고 혁명적 변혁에 대한 요구를 다시 제기하는 극단적 정세의 긴급함과 결부된다고 해도 그것은 겨우 한 가지 가능성만을 제시해줄 뿐입니다. 철학에서 행위 개념이 지닌 전통적 의미, 곧 단지 어떤 대상(matiére)만 전화시킬 뿐 아니라 행위자 자신들까지 ‘형성하는’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행위하는 집합체 또는 집합적 실천은 조직 내지 제도 형태를 요구하며, 정서적 투여 또는 주체적인 동일시 과정을 요구합니다. 외관상으로는 아주 단순한 이 두 항[조직과 동일시 과정] 각자가 포함하고 있는 깊은 모순을 드러내줌으로써(하지만 사후에야), 레닌과 간디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역사들은 우리가 정치적인 것의 이러한 복잡성, 역사가 우리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은 채 우리를 그 속으로 투사하는 그 복잡성을 간과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몇몇 논평자들은 종종 상반되는 전제들에 입각해 있기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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