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매슈 B. 리지웨이 (지은이), 박권영 (옮긴이) 플래닛미디어 2023-06-16
정가
25,000원
원제 The Korean War356쪽
책소개
저자인 리지웨이 장군은 전쟁 발발부터 정전에 이르기까지 치열했던 전투 과정은 물론이고, 한반도 문제 불개입 정책을 고수하며 애치슨 선언으로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 미국이 한국에서 사전경고도 없이 전쟁이 벌어지자 전쟁에 개입하게 된 이유를 서술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공할 원자폭탄과 든든한 유엔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낸 심리적 마지노선에 안주하며 군사력 감축을 단행함으로써 전쟁 대비 태세가 전혀 되어 있는 않았던 미국의 국내 상황, 전쟁 초기 신생국가였던 대한민국에 대한 미군의 인식, 6·25전쟁으로 인해 새롭게 등장하게 된 제한전 개념, 맥아더 장군의 해임으로 촉발된 민군관계에 대한 대논쟁, 지난한 정전협상 과정, 그리고 정전협상이 2년여간 계속되면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계속된 잔혹한 고지전 양상, 골치 아픈 전쟁포로 문제, 6·25전쟁을 통해 얻은 교훈 등을 이 책에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6·25전쟁 전반을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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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의 글
저자 서문
제1장 조용한 아침의 나라: 폭풍 전야
제2장 도전과 응전: 스미스 특임부대의 용감한 저항
제3장 유엔군의 공세: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 교두보 돌파
제4장 압록강에서의 절망: 중공군의 개입과 미 해병 1사단의 후방으로의 공격
제5장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 전투의지 회복과 공세로의 전환
제6장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맥아더 장군 해임의 원인과 결과, 중공군의 후퇴
제7장 정전회담과 교착상태: 처절한 고지전과 적의 본질
제8장 전쟁의 막바지: 포로수용소 폭동, 클라크 장군과의 교대, 그리고 정전협상 서명
제9장 문제와 해답들: 맥아더 장군 관련 논쟁의 의미와 정치·군사적 시사점
제10장 얻게 된 교훈들과 얻지 못한 교훈들: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중요한 이유
한국전쟁 연표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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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오마 브래들리(Omar Bradley) (미 예비역 육군 대장, 합참의장 역임): “리지웨이는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아돌프 칼슨(Adolf Carlson) (미 예비역 육군 대령): “리지웨이의 리더십은 자기절제, 충성심, 이타심, 겸손함,
책임을 받아들이고 실수를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미 8군 장병들에게 전투의지를 불어넣고
한국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알게 했다.”
방종관 (서울대학교 미래 혁신 연구원 산학 협력 교수(예비역 소장)): “개인이든 조직이든 누구에게나 전략적 사고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주요 지휘관들의 판단·결심·실행의 사고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더욱 전략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문화일보: 문화일보 2023년 6월 23일자 '이 책'
매일신문: 매일신문 2023년 6월 22일자 '반갑다 새책'
연합뉴스: 연합뉴스 2023년 6월 22일자
세계일보: 세계일보 2023년 6월 23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 2023년 6월 24일자
중앙SUNDAY: 중앙SUNDAY 2023년 6월 24일자
한국일보: 한국일보 2023년 6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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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매슈 B. 리지웨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 총 4종 (모두보기)
1917년에 미 육군사관학교(West Point)를 졸업한 후 초급장교 시절부터 멕시코, 중국, 니카라과, 필리핀 등 다수의 해외파병지에서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미 국방성 전쟁기획국(War Plans Division)에서 작전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초대 제82공정사단장, 초대 제18공정군단장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벌지 전투, 독일 진격 작전 등에 참전하여 명성을 얻었다.
1950년 12월 23일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순직한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4 후퇴와 지평리 전투, 서울 수복 등 중공군의 공세에 대항해 미 8군의 공세적 전투의지 회복과 위력 수색, 과감한 화력 운용 등을 통해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지금의 휴전선 위치까지 전선을 회복했고 전쟁포로 관리와 정전협상 등을 통해 한반도의 적화통일 저지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1952년 5월 말 나토(NATO)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했으며 한국전쟁 정전 직후인 1953년 8월에는 미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여 약 2년간 복무 후 군에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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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박권영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현재 육군 대령으로 중부 전선 철의 삼각지대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다. 199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병과로 임관했고, 보병사단과 기계화보병사단, 연합사단을 비롯해 국방부, 합참, 육군본부에서 근무했다. 미 보병학교 고등군사반과 미 지휘참모대학을 수료했으며 작전술(operational art)과 작전기획(planning)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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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으로 8군을 이끌다가
맥아더 장군 해임 후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어 유엔군을 지휘한
리지웨이 장군이 쓴 ‘한국전쟁 징비록(懲毖錄)’
★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에 대응했는가?
아시아에서 어떻게 전면전을 피할 수 있었는가?
맥아더 장군은 왜 해임되었는가?
오늘날 전쟁 목표는 왜 제한되어야 하는가?
한국전쟁을 통해 배운 교훈은 무엇인가?”
★
올해(2023년)는 6·25전쟁 73주년, 정전협정(1953년 7월 27일 체결) 및 한미동맹(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은 정전협정 체결로 전쟁이 중단된 이후 지금까지 70년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6·25전쟁 당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5000 대 1 성공 확률로 거의 도박에 가까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데 반해, 워커 중장 순직 이후 미 8군 사령관으로서 8군을 이끌다가 맥아더 장군 해임 이후 그의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유엔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리지웨이 장군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리지웨이 장군은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 23일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순직한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중공군의 공세에 대항해 미 8군의 공세적 전투의지 회복과 위력 수색, 과감한 화력 운용 등을 통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고,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지금의 휴전선 위치까지 전선을 회복하고 전쟁포로 관리와 정전협상 등을 통해 한반도의 적화통일 저지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발판으로 북진해 압록강까지 도달해서 승리의 문턱에 거의 다다랐을 때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순간에 리지웨이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이 없었다면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미 정부가 내부적으로 출구전략을 고심하면서 한반도에서의 군대 철수를 검토하고 있을 때 리지웨이 장군의 공세 의지와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이 쓴 이 책은 6·25전쟁 당시 그가 미 8군 사령관으로서 당시 패배주의가 만연한 8군을 어떻게 이끌었고, 맥아더 장군 해임 이후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유엔군을 어떻게 지휘했으며, 전쟁을 통해 어떠한 교훈을 얻었는지 자세하게 기록한 ‘한국전쟁 징비록(懲毖錄)’이라 할 수 있다.
6·25전쟁은 전쟁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 간의 전쟁인 동시에, 미국을 비롯한 유엔 회원국 16개국이 자유 수호의 기치 아래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군과 함께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과 중공군에 맞서 싸운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간의 전쟁이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미 8군에 이어 유엔군을 지휘한 리지웨이 장군이 직접 쓴 이 책은 단순히 주요 작전이나 전투만을 다룬 책이 아니라 6·25전쟁 전반을 거시적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역사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저자인 리지웨이 장군은 전쟁 발발부터 정전에 이르기까지 치열했던 전투 과정은 물론이고, 한반도 문제 불개입 정책을 고수하며 애치슨 선언으로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 미국이 한국에서 사전경고도 없이 전쟁이 벌어지자 전쟁에 개입하게 된 이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공할 원자폭탄과 든든한 유엔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낸 심리적 마지노선에 안주하며 군사력 감축을 단행함으로써 전쟁 대비 태세가 전혀 되어 있는 않았던 미국의 국내 상황, 전쟁 초기 신생국가였던 대한민국에 대한 미군의 인식, 6·25전쟁으로 인해 새롭게 등장하게 된 제한전 개념, 맥아더 장군의 해임으로 촉발된 민군관계에 대한 대논쟁, 지난한 정전협상 과정, 그리고 정전협상이 2년여간 계속되면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계속된 잔혹한 고지전 양상, 골치 아픈 전쟁포로 문제, 6·25전쟁을 통해 얻은 교훈 등을 이 책에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6·25전쟁 전반을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한국전쟁은 앞으로 모든 전쟁이 틀림없이
제한전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핵무기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제한전은 곧 상호 공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제한전’이라는 개념에 익숙하게 되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미국이 한국에서 어떠한 노력을 했고, 그 노력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교훈을 배웠는지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은 앞으로 모든 전쟁이 틀림없이 제한전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제한전을 수행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면전을 피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현재 다수의 국가가 핵무기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제한전은 곧 상호 공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할 수조차 없다. 한국전쟁 이후 우방국이나 잠재 적국에 대한 미국의 외교 정책들은 모두 이러한 현실 의식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언급하면서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제한전’이라는 개념에 익숙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제한전은 단순히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은 소규모 전쟁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다. 제한전이란 국가이익과 현재 군사적 능력을 고려하여 목표를 분명하게 제한하는 전쟁이다”라고 규정하고, “‘승리’를 넘어서는 지리적·정치적·군사적 목표가 분명하게 기술되지 않은 끝이 없는 전쟁은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으며 한 번의 성공은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 계속해서 또 다른 성공을 요구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주장은 멋진 사나이다운 주장으로 들릴 수 있고,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외침은 우리의 피를 용솟음치게 만드는 메시아의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시대에 전면전의 최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승리를 알릴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채 우리의 문명이 수천 년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는 핵무기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완전한 승리’나 ‘무조건 항복’을 위한 전면전이나 무제한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앞으로 모든 전쟁이 국가이익과 현재 군사적 능력을 고려하여 목표를 분명하게 제한하는 제한전이 되리라는 것을 가르쳐준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물적·인적 자원을 총동원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가공할 핵무기의 위력을 절감한 미국은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어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는 지구적인 재앙을 피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이 ‘완전한 승리’나 ‘무조건 항복’을 위한 전면전이 아니라 미국에게 생소한 제한전 양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은 더 이상 군사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정치·군사·외교·경제 정책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달성해야 할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군사 지도자는 군사적 수단으로 얼마나 많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그 수단들을 가장 잘 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군사적 판단을 제공해야 한다.
최상의 결과는 정치 지도자와 군사 지도자의 긴밀한 협조에서 나온다.”
리지웨이 장군은 전쟁이 더 이상 군사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정치·군사·외교·경제 정책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미국의 국가 정책을 더 이상 백악관이나 국무부 혹은 국방부 단독으로 수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 즉 민간 정치가나 군사전문가들이 서로 협조해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최상의 결과는 군과 민간 지도자 간의 긴밀한 협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정치 지도자는 달성해야 할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군사 지도자들은 군사적 수단으로 얼마나 많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그 수단들을 가장 잘 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군사적 판단을 제공해야 하며, 이러한 협조 관계는 민간 정부 당국자와 군 당국자들이 서로 의견을 구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만 가능하다”고 조언한다. “민간 정치 지도자가 군 수뇌부의 중요한 군사적 조언을 무시하면 올바론 결정을 내리기 어려우며, 헌법 하에서는 민간인 정치 지도자들이 우위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경험 있는 군 지도자들의 조언을 구하거나 들으려 하지 않거나 그들의 의견을 경시한다면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가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참전한 전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이후 미국은 핵 억제력과 유엔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심리적 마지노선 뒤에서 편안하게 안주한 채
군대를 해체하고 거대한 전시 생산시설을 폐기하는 등
성급하게 군사력 감축을 단행해 전쟁 대비 태세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리지웨이는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은 군사력으로 무작정 전쟁에 덤비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가르쳐주었다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하고 결국에는 원자폭탄을 사용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어 완전한 승리를 거둔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가공할 원자폭탄과 든든한 유엔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심리적 마지노선 뒤에서 편안하게 안주한 채 군대를 해체하고 거대한 전시 생산시설을 용도 전환하거나 폐기하는 등 군사력 감축을 성급하게 단행함으로써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군의 중추인 수십만 명의 숙련된 유능한 부사관들과 병사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는 행복감에 사로잡혀 군복을 벗어던졌고, 미국인들은 설사 전쟁이 발생한다 해도 적대적인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도 공군력과 해군, 그리고 핵무기로 전쟁에서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다.
리지웨이는 “우리가 미래를 잘못 읽은 것은 전략적 혹은 전술적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정보를 제대로 평가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측 가능하고 예상되는 우발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계획을 소홀히 했다. 우리의 외교력이 외교를 지원하기 위해 보유한 군사력보다 더 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우리는 극동에 군대를 거의 남겨두지 않았으며 그곳에 있었던 군대는 전투보다는 일본 점령지 관리에 최적화되어 있었다”라고 비판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막 치르고 돌아온 젊은이들을 또다시 사선에 세우는 것이 공평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과연 이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과거에 그래왔던 것처럼 한국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과연 신생국 대한민국이 소멸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을까? 자문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전복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미국이 직면한 진짜 도전은 무력을 사용해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호전적인 공산주의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것을 미국의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만약 대응하지 않는다면 단계적으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참전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맥아더 장군 해임을 통해 얻은 올바른 민군관계에 대한 교훈
이 책은 올바른 민군관계와 전문직업군인의 자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리지웨이 장군은 민군관계에 대해 제6장(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과 제9장(문제와 해답들)에서 별도로 다루고 있다. 맥아더 장군의 해임 사례는 단순한 항명이나 불복종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리지웨이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6·25전쟁 확대(중국 본토 진격, 공군력을 투입해 만주 기지 폭격 등) 주장과 이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면서 “전쟁 중인 국가에서 애국심의 상징으로 떠오른 자신의 인기를 현역 장군의 의무와 혼동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의 합법적 지시를 반복적으로 무시하고 정부가 승인한 정책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출했는데도 그를 해임하지 않았다면 대통령은 자신의 직무를 유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라고까지 표현하면서 맥아더 장군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다.
올바른 민군관계는 전문직업군인들이 단순히 선출된 정치지도자와 민간 권력의 지시에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민간 정부 당국은 전쟁에 대해 달성이 가능한 목표(ends)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means)과 방법(ways)을 선택하기 위해 군 당국과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 전쟁 수행이 좌지우지될지도 모른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전쟁에서는 직업군인들이 민간 통치자가 고려 중인 정책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하고 용기 있게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리지웨이 장군의 말대로 정책이 일단 결정되면 군인들은 임관 선서 내용과 그가 선서한 대로 그 정책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이 책은 올바른 민군관계 정립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민간 정치지도자와 군 지도자들의 고민과 지속적인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전문직업군인들의 도덕적 용기의 필요성과 군의 정치적 중립성 유지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패배주의가 만연한 미 8군 장병들에게 전의를 고취시켜
절망의 순간에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리지웨이의 리더십
이 책은 리더십 측면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리지웨이 장군은 패배주의가 만연하고 제대로 싸울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군대를 어떻게 전투의지가 충만한 군대로 변모시켰는지 설명하고 있다. 리지웨이 장군은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인 1951년 1월 1일 새해 아침에 서울 북쪽에서 마주친 장병들의 모습에서 그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중공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개인 소총과 공용화기를 모두 버리고 달아나고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런 처참한 군대의 모습 외에도 도로만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편안함을 추구하고, 제대로 통신도 되지 않는 상태를 방치하며, 적과 접촉을 유지하거나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소위 ‘기본도 갖추지 못한’ 부대의 모습을 보고 개탄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미 8군의 전투의지를 회복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예하 부대 지휘소를 방문해서 장병들의 모습과 태도, 대화 내용과 행동을 통해 모든 감각으로 그들의 전투의지를 느끼고자 노력했다. 길을 가다 만난 병사들은 지휘관들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으며,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이런 군대를 다시 투지에 불타게 만들기 위해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의 기본적인 불만사항을 해결해주는 것이었다. 부대 취사장을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 따뜻하고 충분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주고, 고향에 편지를 쓸 문구류를 헬기로 공수해 지급하고, 따뜻한 손으로 전투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장갑을 즉시 보급해주었다.
또한 그는 모든 지휘관들에게 병사들의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불필요하게 생명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되며 어떤 경우라도 고립된 부대를 버려서는 안 되며 반드시 그들을 고국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특히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돈틀리스 작전 등 그 이름에서부터 자극적이어서 미 참모총장(콜린스)이 반대까지 했던 명칭을 사용하면서 전투의지를 고취했고 일련의 위력 수색과 공세 작전을 통해 38선 이북까지 전선을 회복하여 현재의 군사분계선 일대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텐트 2개를 이어붙여 만든 자신의 전방지휘소를 최전방에 설치하고 그곳에 틀어박혀 부대 작전환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형상 장애 요소나 유리한 요소를 알기 위해 많은 시간 기복지도를 보면서 연구했다.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저공비행으로 작전 지형을 직접 확인하면서 야간에도 그 지역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연구를 거듭함으로써 작전 및 통제 지역 내에 있는 모든 도로와 소로, 언덕, 하천, 능선들을 집 뒷마당처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전투의지는 상부의 강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단 병사부터 그 위 모든 장병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마음속에서 길러서 갖춰야 하는 자질이다. 리지웨이는 그것은 개인의 안전보장, 부대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좌우와 후방에 다른 아군 부대들이 버티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뿌리를 내리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그들이 어떤 위험 속에서도 자신의 충성심으로 보답해야 할 집단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1951년 1월 말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이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던 미 8군 장병들에게 하달한 “우리는 왜 이곳에 있으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라는 감동적인 지휘서신은 군의 본질과 올바른 군인의 복무 자세, 그리고 분명한 전쟁 목적을 장병들에게 인지시키는 것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이 지휘서신에서 “이것은 동맹국 한국의 자유와 국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며, 우리가 치른 희생과 앞으로도 치러야 할 희생은 다른 사람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직접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한국에서 발생한 문제의 본질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이냐, 먼 미래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도록 내버려둘 것이냐 하는 것이며, 이것들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다”라고 말함으로써 패배주의에 사로잡혔던 미 8군 전 장병들의 투지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왜 이곳에 있으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1951년 1월 21일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이 미 8군 전 장병에게 하달한 지휘서신 중에서)
내가 한국에 온 후 지난 몇 주 동안 8군 장병들의 마음속에 두 가지 질문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두 가지 질문은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사령관으로서 전 장병들이 이 두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을 1951년 1월 21일 8군 전 장병들에게 전파하도록 지시했습니다. …
첫째,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단호합니다. 우리가 여기 와 있는 것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구성된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유엔의 정치지도자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결정하는 한,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에서 군사적 대비 태세를 유지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대답이 간단한 것은 이 이상의 추가 설명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대답이 단호한 것은 우리가 맹세하고 기대하는 충성심이 이러한 명령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훨씬 더 중요하며, 8군 전 장병들은 완전하고 논리적인 답변을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 이 문제는 가장 혹독한 전투 상황에서도 충성심과 용맹함을 유지하는 동맹국인 남한의 자유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한의 자유는 다양한 문제들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안에 포함됩니다.
문제의 본질은 하느님이 축복받은 땅에 꽃을 피우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처럼 서구 문명의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물리칠 수 있느냐, 포로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시민들을 노예로 만들며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공산주의자들이 개인과 그 개인의 권리를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냐,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손길로 우리가 살아남을 것이냐 아니면 하느님이 없는 세상에서 죽은 존재로 소멸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사실이고, 도전의 가능성을 넘어선다면, 이것은 더 이상 동맹국 한국의 자유와 국가 생존만을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예롭고 독립적인 국가에 사는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치른 희생과 앞으로도 치러야 할 희생은 다른 사람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직접 지키기 위한 행동입니다.
결국 이곳 한국에서 발생한 문제의 본질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이냐, 우리가 이곳에서 보았던 겁에 질린 사람들의 대탈출을 중단시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먼 미래 언젠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ananke 202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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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순간에 전쟁 흐름 바꾼 장군 리지웨이의 6·25 '징비록'[BOOK]중앙일보입력 2023.06.23 14:30장세정 기자구독책표지책표지리지웨이의 한국전쟁매슈 B 리지웨이 지음박권영 옮김플래닛미디어기적처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장군은 6·25전쟁이 낳은 가장 걸출한 영웅이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월턴 해리스 워커(1889~1950) 미8군 사령관과 3년의 전쟁 중 2년가량을 책임졌던 매슈 벙커 리지웨이(1895~1993) 유엔군 사령관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리지웨이가 1967년에 출간한 자서전이자 6·25전쟁 징비록(懲毖錄)이다. 출간 56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됐다. 6·25 발발 73주년이자 1953년 7월 27일 정전 체제 수립 70주년의 해에 나온 점도 의미가 각별하다.ADVERTISEMENT리지웨이는 워커 장군이 1950년 12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쟁 중에 사망하자 후임으로 미8군 지휘봉을 잡았다. 1951년 4월 맥아더 사령관이 해임되자 유엔군 사령관도 맡았다. 그가 부임한 시점에 전쟁 상황은 암담했다. 1951년 1·4후퇴 이후 중공군의 대공세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수세에 몰렸다.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군대 철수를 검토하고 있을 때 리지웨이의 공세 의지와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없었을지 모른다.1951년 1ㆍ4 후퇴 직후 한강 부교에서 전황을 살펴보는 리지웨이(앞줄 왼쪽 첫번째) [사진 미 육군]1951년 1ㆍ4 후퇴 직후 한강 부교에서 전황을 살펴보는 리지웨이(앞줄 왼쪽 첫번째) [사진 미 육군]그는 "이 전쟁은 한국의 자유와 국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한국전쟁의 본질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이냐이며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라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그의 리더십과 헌신 덕분에 결국 현재의 휴전선까지 전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이 책에서 리지웨이는 미8군 사령관 부임 직후 패배주의가 만연했던 미군을 어떻게 이끌었는지, 맥아더 장군 해임 이후 어떻게 유엔군을 지휘했는지, 전쟁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를 생생하게 서술했다. 또 책에서는 2차 대전 승리 이후 전비 태세가 부족했던 당시 미군 상황, 맥아더 해임을 둘러싼 민·군 관계 논란, 신생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 등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주요 작전과 전투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6·25전쟁 전반을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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