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1

최덕효 - #상대방_입장_경청하기 한국의 역사교과서 (4) by 무명씨 (日 작가, 전직 파일럿) 6. 고려가 일본... | Facebook

최덕효 - #상대방_입장_경청하기 한국의 역사교과서 (4) by 무명씨 (日 작가, 전직 파일럿) 6. 고려가 일본... | Facebook
최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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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_입장_경청하기

한국의 역사교과서 (4)
by 무명씨 (日 작가, 전직 파일럿)

6. 고려가 일본 침략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증거
 
고려의 왕 원종(재위 1260~1274년)에게는 아들 심(諶, 후의 충렬왕)이 있었습니다. 심은 몽골 제국 원(元)나라의 황제 쿠빌라이(1215~1294년) 밑에서 오랜 시간 원나라에 거주하며,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한 후 고려로 돌아와 충렬왕(1236~1308년)으로 즉위했습니다. '충렬'이라는 이름은 원나라에서 받은 것으로, 충(忠)은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합니다. 원정 당시 고려의 왕이 바로 충렬왕이었습니다.

6-1. 자국 역사서에 있던 기록
고려사 원종 13년(1272년) 3월의 기록에 따르면, 심(후의 충렬왕)이 쿠빌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본은 아직 황제 폐하(쿠빌라이)의 덕으로 인도되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명령을 내려 군대를 정비하고 전함과 병량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이 일을 저에게 맡겨주신다면, 심력을 다하여 폐하의 군대를 조금이라도 도울 것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원나라에 강요된 것이 아니라, 명백히 고려의 충렬왕 자신이 쿠빌라이에게 일본 원정을 부추기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협력하겠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국의 역사 기록조차 왜곡하는 한국의 국정 역사 교과서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혹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한문을 읽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6-2. 이에 관한 원나라 역사서의 기록
이 사건에 대해 중국 측 원(元) 왕조의 기록을 인용하면, 원나라 역사서인 세조(쿠빌라이) 본기, 지원 19년(1279년, 즉 '홍안의 역'이 일어나기 2년 전) 7월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국왕이 직접 배 150척을 건조하여 일본 원정을 돕겠다고 요청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례만으로도
한국의 역사 교과서가 얼마나 왜곡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지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6-3. 일본에 대한 침략을 숨기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
몽골 제국은 조선과 항해 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려는 원나라를 위해 문영의 역(1274년)에서 900척의 군함을 건조하고, 고려 군인 8,000명과 수군의 선원 6,000명을 참가시켰습니다. 이들은 원나라 군대 15,000명과 함께 총 3만 명의 대군으로 일본을 침략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이키(壱岐)와 쓰시마(対馬) 섬의 주민들을 학살한 후, 하카타(博多)를 공격했습니다.
더욱이, 대규모 침략인 홍안의 역(1281년)에서는 10만 명의 병력과 3,500척의 군함을 가진 강남군(江南軍)과 4만 명의 병력과 900척의 군함을 가진 동로군(東路軍)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으로 일본 침략에 참여했습니다. 이것이 원나라와 함께 고려에 의한 일본 침략이 아니면 무엇을 침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추가로, 교과서의 연표에서 고려에 의한 일본 침략인 1274년(문영 11년)과 1281년(홍안 4년)에 발생한 원나라의 침략 사건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한국이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왜곡하는 행위의 한 예로 보입니다.
이러한 예시들은 한국의 역사 교육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적 사건을 숨기고, 자국의 침략적 행동을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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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마디
- 만화책에서도 그렇듯이 단순히 “재미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방문한 사람들이 “무언가 얻는 것이 있기를” 바랍니다.
- 다음은 수필이며, 논문이 아닙니다. 홈페이지에 인용한 문헌명, 자료, 내용 등에 관한 질문이나 주의 주장에 관한 논의에는 일절 응하지 않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 독자 중에는 먼 곳에 사는 손자와 중학생, 고등학생도 있으므로, 그들에게 조금 어려울 수 있는 한자는 괄호 안에 읽는 방법이나 의미를 추가해 두었습니다.

출처: サンデー毎日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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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정순태 (지은이)   김영사   200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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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3세기 천하정복을 꿈꾸며 전세계 60퍼센트를 복속시킨 기마민족 몽골과 40년간 그 야욕에 맞섰던 불굴의 고려. 이들 최강연합군이 난공불락의 요새 일본에 상륙했다. 결사항전하는 사무라이들을 쓰러뜨리며 승승장구하던 여몽연합군. 압도적 승리를 눈앞에 둔 순간, 연합함대는 거대한 태풍에 휘말려 천길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만다. 그 뼈아픈 패배 뒤에 가려진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여몽연합군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침략했지만 두 번 모두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는 보통 여몽연합군이 일본에 상륙하기도 전에 태풍을 만나 원정에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여몽연합군은 쓰시마 섬과 이키 섬을 초토화시키며 일본 대륙을 위협했다. 또한 1차 원정 때 김방경의 의견을 좇아 육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당시 일본의 혼란한 정세를 감안했다면 본토까지 진격하여 일본 정벌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여몽연합군의 침략은 외부로부터 받은 최초의 침입이었다. 일본은 내부의 단결을 통해 외세의 침략에 맞섰고, 이는 일본에 민족주의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가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한반도 강점으로 나타났으며 태평양 전쟁의 도발, 역사교과서 왜곡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고려가 몽골과 연합해 일본을 쳤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결코 과소평가될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일본은 자신들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로 미화하고 ‘일본불패’, ‘신국일본’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내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해왔다. 따라서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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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일본은 '신의 나라'인가
프롤로그

1장. 몽골의 예봉을 꺾은 삼별초의 항쟁
2장. 여몽연합군의 불협화음
3장. 식지 않는 일본 정벌의 욕망
4장. 태풍이 할퀴고 간 동아시아

접기
책속에서

가마쿠라 무사의 분투가 멸사봉공이 아님은 <몽고습래회사>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우선 어디에 가더라도 일본 무사들은 일족의 가문을 새겨 넣은 깃발을 세워 반드시 자신의 소재를 드러냈다. 그들은 우군이 없는 곳에서나 밤중에는 함부로 적을 향해 나아가 싸움을 걸지 않았다. 분전 장면을 목격해주는 증인이 있어야 비로소 적과 싸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슈고 및 상관의 뜻에 배치된다 할지라도 공명을 올리기 위해 무작정 적진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즉 궁시의 용기 및 충의가 은상이 목적이었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영지를 상속받아 이미 '배부른 무사들'은 은상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던 만큼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다. - 본문 175쪽에서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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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정순태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거인의 어깨 위에서>,<서울의 6000년>,<巨人의 황혼> … 총 8종 (모두보기)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부터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 1981년 한국해운정보센터 차장,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 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류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199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1999)》 《麗蒙연합군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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