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리만의 부끄러운 과거 - 이영훈은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했던가?
이영훈은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했던가?조회 수 10104 추천 수 0 2011.02.07 14:45:23
하뉴녕*.114.22.71http://weirdhat.net/xe/32614
트위터 세계에 황당한 일이 있었다. 제 이름을 인지하지 못했단 이유로 주민센터 여직원을 폭행한 민주노동당 소속 시의원 이숙정에 대한 규탄이 진행되는 와중에, 누군가가 철지난 기사를 꺼내온 것이다. 그 기사는 오마이뉴스 2008년 3월 25일자에 실린,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판박이"라는 기사였다.( 해당기사 ) 이 기사를 퍼온 이들은 "신지호와 이영훈은 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요 공창제라고 주장하는데 고작 이숙정이나 비판하고 있단 말인가! 왜 신지호와 이영훈을 비판하지 않는가!!"라고 생떼를 부리고 있었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나름대로 꼼꼼히 읽어본 나로서는, 이 교과서에 대한 이런 수준의 비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이건 해석의 '질'의 문제니 그렇다고 치자. 이런 수준의 인식이 난무함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이미 단행본 한 권(<뉴라이트 사용후기>)에서 그 문제점에 대해 논박도 했는데 3년 지난 기사를 누가 퍼온다고 해서 또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신지호나 이영훈이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했다는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서만큼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비판하고 있는 해당기사에서도 대안교과서에 그런 얘기가 써있다고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들은 그런 주장을 했는데 어째서 교과서엔 그런 내용을 쓰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치고 있을 뿐이다. 해당 부분을 보자.
이영훈 교수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누린 계기는, '정신대 발언'이다. 이영훈 교수의 당시 발언을 돌아보자.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
(...)
총선에 출마한 신지호씨도 마찬가지다. 신지호씨가 2006년 11월 당시에 주도했던 '뉴라이트닷컴'은 자유주의연대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저자와의 만남'이라는 이영훈 교수의 공개강좌를 개최한 적이 있다.
신지호씨는 '도봉갑' 주민들을 향해서도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곧 죽어도 신념은 이야기하는 것, 그게 바로 학자와 정치인의 공통점이 아니던가.
즉 박형준 기자는 이영훈이 '정신대 발언'을 했는데, 그 이영훈과 신지호가 같이 놀았으니, 신지호도 도봉갑 주민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걸 주장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한동안 트윗이 돌더니 신지호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자정작용'이 일어나기는 했다. 그렇다면 이영훈은?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
적어도 기사에서 큰따옴표를 달아놨으면 뭔가에 대한 인용이어야 한다. 위에서 박형준의 기사는 이영훈 교수가 실제로 이런 발언을 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당시 그의 발언을 돌아보자."고 했다. 나는 당시 문제가 된 백분토론의 VOD와 녹취록을 꼼꼼이 훑은 사람이다. 그런 발언은 없었다. 그렇다면 위 문장은 박형준의 작문이었나? 그건 아니다. 가령 구글링해보니 한국일보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우리 국사교과서가 위안부 등 일제의 침탈상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해 물의를 빚은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는 취지의 발언으로도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지난해 9월 과거사 진상규명 논란을 주제로 열린 ‘MBC 100분 토론’에서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했다고 어느 학자가 주장하느냐”며 “정신대 보고서를 안 읽어보고 하는 말”이라고 밝혀 정신대 할머니 등으로부터 반발을 샀다.
- 기사 원문
'취지의 발언'을 '당시 발언'으로 둔갑시킨 것은 박형준의 실수겠지만 이쯤되면 이건 박형준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4년 9월 문제의 백분토론회(과거사진상규명법에 대한 찬반토론회였다.) 당시 저널리즘 그룹 전체가 이영훈의 발언을 '오해'하고 있었다. 진보언론들이 펄펄 뛴 거야 그럴법한 일이었지만, 이영훈의 주장을 옹호해야 할 보수언론들조차 이영훈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는 건 정말이지 한국 언론의 수준을 드러내는 코미디였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이영훈은 당시 과거사진상규명법을 반대하는 패널 자리에 앉아서 토론에 참여했다. 당시 그가 해당 법에 반대한 근거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자면 이랬다. 1) '인권' 문제에 대한 법적 청산은 명료한데, ('친일파'란 단어에서 드러나듯) 과거사 문제에 '민족' 잣대를 들이대면 애매한 부분이 많다.(가령 일제로부터 '효행상' 받은 사람들도 친일파인가, 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2) 연구자들이 연구를 잘 해서 당시의 인권범죄들에 참여하고 협력했던 사람들의 증언도 확보하고 자발적인 성찰까지 유도해내야 과거사 청산이 의미있게 되는 것인데, 그런 과정없이 일부 사람들만 친일파라고 법적으로 공표해버리면 그 청산을 통해 우리 사회의 도덕수준이 향상될 수 없다고 본다. 즉, 그는 과거사청산을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까진 아니었고, 그 청산의 근거와 바람직한 절차 등에 대한 이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과거사에 대한 법적인 접근에 반대했다.
그런데 토론회의 전체 맥락을 살피면 이영훈은 "지금 개정중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에서 열거하고 있는 22가지 죄목 가운데, 다른 죄목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지만,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에 적극 협력한 자"의 죄목에 관해서만은 그것이 인류 문명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반인륜의 범죄에 해당하므로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끝까지 추적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 (토론 이후 이영훈의 해명서. 해명서가 실린 프레시안 기사 ) 하였다. 왜냐하면 종군위안부 문제가 '민족'의 잣대가 개입하기 이전에도 '인권'의 차원에서 심각하고 흉악한 범죄임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이건 사건 이후에 급조해낸 변명이 아니다. 미디어오늘에 실린 조귀동의 지적처럼, "토론이 시작된 지 40여분 경에 그는 '친일청산은 반대하지만 위안부, 그러니까 전쟁 성노예 같이 보편적인 반인륜범죄는 끝까지 추적해야한다'는 발언을 분명하게 했었다." ( 원문 ) 당시 토론의 녹취록을 보면 그는 "일본군 위안부"라고 말했다가 "그러니까 전쟁 중 성노예"라 고쳐 말하고 있다. '성노예'란 말은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인권범죄를 명료하게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지만, 피해자 분들이 이렇게 불리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대체하진 못하고 있다. 이영훈은 그런 맥락을 모두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저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던가. 이영훈이 과거사진상규명법에 회의적이었던 이유 두 가지를 상기해보자. 종군위안부 문제는 명백한 인권범죄이므로 첫 번째 이유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두 번째 이유는 문제가 된다. 이영훈은 앞서 말한 두 번째 이유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토론회에서 두 가지 얘기를 하려고 했다. 첫째로, 젊은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들어가는 범죄가 조직적으로 일어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개입이 있었다. 끌고 가는데 동참한 조선사람도 있었고,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군위안소를 이용한 조선인 남성도 있었다. 이런 이들의 증언, 자기고백, 반성 및 성찰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 일률적이고 일회적인 법적 단죄는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둘째로, 과거사 청산은 과거가 현재의 우리를 규정한 모습을 함께 성찰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전쟁 중 미군과 한국군과 '위안부'를 운용했고, 한국은 성매매가 지나치게 성행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흐름을 알아보고 함께 성찰해야 진정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이 주장들은 이영훈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청산에 찬성한다는 전제 위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이영훈이 글을 썼다면 이런 견해가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 주장했다."로 요약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TV토론의 현장에 있었고, (앞에서 위안부 범죄에 대해 무슨 얘기를 했던 간에) 과거사진상규명법 반대 패널 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자신의 말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 상황이 나온다.
송영길 "지적할 게 있다. 일제 시대 정신대의 문제와 지금 미군부대의 문제를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우익이 지금도 주장하는 것은 정신대가 총독부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종의 공창의 형태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미 증거자료에 의해 정신대는 조선총독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일종의 성적 노예 상태에 놓인 것으로 근본적으로 (미군의 경우와) 차원이 다르다."
이영훈 "누가 주장했나. 어느 학자가 주장한 것인가.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동원했다는 게 명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해당 토론의 녹취록 일부가 실린 오마이뉴스 기사 )
이영훈이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와 그 이후 미군 위안부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 송영길이 그것들과 일본군 위안부의 차이를 명백히 하고자 했다. 여기서 이영훈이 "물론 나는 종군위안부가 공창제였다 생각하지 않으며, 성매매 여성이 동원된 미군/한국군 위안부와 그것의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군이 일본군을 모방하여 위안부란 것을 만든 것은 사실이고, 그런 사실을 지적하고 인정하는 것 또한 과거청산의 큰 부분이다."라고 말했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영훈은 송영길의 인식의 한 부분에 시비를 건다.
솔직히 '민간인'의 입장에야 "일제가 끌고 갔다." / "일본이 끌고 갔다." / "조선 총독부가 끌고 갔다." / "조선 총독부 권력이 끌고 갔다." / "일본군이 끌고 갔다." 사이에 뭔 구분이 있을 거라고 여기지도 않을 거다. 이중 한 방식으로 발화하면, 나중에 자신이 정확히 뭐라고 얘기했는지 기억할는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이 각각의 문장들은 역사학자 입장에선 엄연히 다른 진술이며, 사료를 통해 입증해야 할 주장들이다. 이영훈은 그런 차원에서 송영길의 진술에 시비를 걸었다.
당시 VOD나 해당 녹취록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영훈이 일본 극우파와 '같은 주장'을 했다고 오인할만도 하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알아볼 목적으로 처음부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던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송영길에게 이상한(?) 시비를 거는 저 사람이 몇십 분전에 다른 친일청산엔 반대하지만 위안부는 인권문제이므로 거기에 대해선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처벌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말했던 그 사람임을 인지하기는 어렵다.
만약 역사 문제에 있어서, 1) 일본 극우파, 2) 한국 민족주의자 들의 주장만 있는게 아니라, 그 주장 사이로 여러 견해가 있음을 인지하는 사람이라면, 이영훈 교수의 발언을 통해 그가 그 사이 어딘가에 발디디고 있는게 아닌가 추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통념과, 그 통념을 송두리채 부정하는 '나쁜' 일본 극우파 녀석들의 '역사왜곡', 이외의 견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영훈이 일본 극우파와 같은 입장을 지니고 있으며,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이므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토론회 전체 맥락을 파악해서 기사를 써야하고, 토론회에서 나온 발언만으로 이영훈의 진의가 파악되지 않을 경우 직접 그를 취재하여 입장을 들어봐야 한다. 납득이 가지 않는 얘기가 있다면 직접 물어보고 파악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당시 저널에선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조중동에서도 그런 역할을 안 한 이유는, 실제로 물어봤다가 이영훈이 정말로 일본 극우파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경우 곤란할 거라는 당파성의 발현이었을 수도 있고, 대중의 거센 분노는 일단 피해가고 보자는 기회주의적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녹취록이나 해명서를 봐서는 이영훈이 "정신대는 공창제요, 자발적 성매매였다."란 주장을 직접 한 적이 없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그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는 없다.(사실을 말하자면 정신대는 위안부와 전혀 다른 성격의 조직으로, 어떤 학자가 '정신대'를 주어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품평을 했다면 일단 뭘 잘 모르시는 분으로 취급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이영훈이 명확히 말을 안했을 따름이지 실제로는 '일본 극우파'와 입장이 같은 본심을 숨기고 있는게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2004년의 사건 당시에는 대중의 입장에서 이영훈의 견해를 쉽게 접하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이라면 간단하다. 이영훈이 2007년에 펴낸 <대한민국 이야기>를 읽으면 된다. 이 책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아무래도 학술도서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시리즈의 주제의식을 쉽게 풀어서 학생/시민들에게 전달하는게 목적인 듯 하다. 물론 이영훈의 생각은 재인식에 논문을 실은 특정 필자의 생각과 결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 문제와 관련해선 이영훈이 그날 토론회의 일까지 포함해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7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8장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참조)
이영훈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은 일본 극우파와도 사뭇 다르지만 우리들의 단순한 통념과도 어긋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지금까지의 사료를 통해 말하는 최소한의 추정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다른 학자의 설득력있는 반박을 들어본 적이 없는 고로 나는 그 주장에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간결하게, 하지만 꾸밈없이 그것을 드러내자면 다음과 같다.
1) 위안소의 형태는 대략 세종류였는데, 하나는 군이 직접 경영하는 것(소수), 둘은 민간업소를 군 전용으로 지정한 것, 셋은 군이 지정하지만 민간인도 이용하는 매춘숙이었다.
2) 전쟁 초반에는 일본인 성매매 여성들을 위안부로 데려갔는데, 전선이 넓어지면서 식민지/점령지 여성들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영훈은 언급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본 극우파들은 '성매매 여성을 데려간 것 아니냐.'라고 언급하는 게 아닌가 추정됨. 일본의 상황과 조선의 상황이 다름.) "조선인이 9할"이었다는 한국 사학계의 주장은 별다른 사료적 근거가 없다. 처음엔 분명히 일본인 여성 위주였는데다, 나중에도 가령 중국 점령지에서는 중국인 위안부가 다수였다는 증언이 있는데, 결정적으로 뒤집을 사료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쪽이 더 상식에 부합하는 것 같다.
3) 생존 위안부 175명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들이 동원된 방식은 (민간 업자들의) '협박 및 폭력', '취업사기'가 대부분이었다. 이영훈의 생각에 이 둘은 명확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 '취업사기'가 들통나는 순간 '색시장수'들은 협박 및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좋은 곳에 취직시켜 준다고 부모를 유혹하여 거액의 선대금(1천원인 경우도 있었다.)을 지불한 후 딸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이 경우엔 딸을 팔아먹은 경우나 다름이 없었다.) 어떤 여성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위안소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따라나서기도 했다. (이영훈이 송영길에 대해 문제삼은 바가 사실상 이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말단에서 관헌의 직접적인 관여를 나타내는 자료는 현재까지 나오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4) 색시장수들의 배후에 일본군과 총독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일본군 수뇌부는 위안소 설치를 명령했고 업자를 지정하여 여인들을 모으도록 지시했다.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방위청 도서관에서 이를 입증하는 문서를 찾아냈다. 총독부 자료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한국 민족주의자들도 이 사건은 중요하게 보도한다.) 당시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거나 항구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는 여행증명서가 필요했으므로, 여성을 동원하기 위해선 총독부 관헌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것은 일본군과 총독부가 공모한 인신약취의 범죄행위다. 위안소로 간 여성들에겐 행동의 자유가 없었고, 정기적인 위생검진을 받아야 했으며, 자유외출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그들이 '성노예'였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타당한 것이다.
5) 요시미 요시아키의 정리에 따르면, 일본군과 일본국가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국제법이 금하는 반인륜범죄를 저질렀다. 첫째, 매춘업을 위한 부인과 아동의 매매를 금지한 1911년 국제조약 위반, 둘째, 1907년에 체결된 강제노동을 금지한 국제협약 위반, 셋째, 노예제를 금지한 국제법 위반, 넷째, 미성년 강제노동을 금지한 국제노동 위반.(위안부 중 상당수가 21세 미만의 미성년.)
6) 위안부들의 처지는 다양했다. 선대금이 과도할 때, 악덕업자를 만났을 때, 한푼도 받지 못한 여성들도 있었다. 그러나 업자와 위안부가 5대5로 이익금을 나눈 곳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군표'를 모아놨다가 전쟁 이후 그것이 가치없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돈을 착실하게 저축하여 고향에 보내기도 하였다.
우리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대개 '민족의 순결한 딸을 강도 일본이 강제로 뺏어가 전쟁터에서 성적으로 약취하고 버렸다.'는 정도의 통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위안부 피해자 여성 중 일부가 화류계 여성이었다거나, 위안부로 가는 줄 알고 있었다거나, 위안부 운영에 있어 피해자들에게 돈이 건네졌다는 '사실'들은 필사적으로 억압하려고 한다. 이런 인식은 우리들끼리 일본 제국주의를 악마화하는데엔 편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인들 앞에서 일본인들에게 당신들의 전쟁범죄가 어째서 악랄한 것인지를 조목조목 따지는데엔 장애가 된다.
만일 어떤 일본인이 우리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악의적인 물타기를 시도한다고 하자. 위안부 문제에 대해 통념만을 알고 있는 당신은 그에 대해 별다른 답변을 하지 못하고 "피해자가 엄연히 살아 있는데!!!"라고 호통을 치며 분한 마음에 울어버리는 것 밖에 더 할일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당신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보고서를 읽어본 적이 없고, 피해자의 증언에 입각한 주장을 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런 당신을 눈앞에 둔 일본인이나 세계인은 처음에는 "아 정말 많이 억울하구나. 내가 뭘 잘못 알고 있었나 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안에 대해 좀더 공부를 하거나 자료를 찾아보면 뭔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조선반도라는 데는 솔직하지 못한 분위기가 있다. 종군위안부 건만 해도, 상당수의 일본인 여성이 위안부 노릇을 했고 위안부를 돈을 주고 샀던 남자들 가운데에는 조선인 남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말하지 않고 있다."라는 일본 우파의 주장이 그릇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일본인들이 주어진 자료를 일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픈 욕망을 지닌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당신이 할 말이 "어떻게 가해자의 자료를 믿을 수 있냐!!! 피해자의 증언을 믿어야지!!!!"라고 소리지르는 것밖에 없어서야 곤란하다. (일단 당신 역시 피해자의 증언을 읽지 않았다. 그저 통념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런 과정들을 거치다 보면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주장에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고 '반일정서'만을 감지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적다 보니 운동권들이 부실한 논증을 무한반복하여 시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리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만약 어떤 일본인과 위안부 문제로 첨예한 토론을 하고 싶다면 오히려 이영훈과 같은 사람이 정리한 자료를 숙지하고 가는 편이 훨씬 낫다. 어떤 방식으로 끌고 갔건, 중간에 돈이 오갔건 안 오갔건,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그것이 인권범죄, 전쟁범죄임이 명백하고 직접 여성을 끌고 가지 않았다 뿐이지 일본군과 관헌이 이러저러하게 개입한 증거가 있다고 명명백백하게 말하면 일본인들도 할 말이 없다. 제시하는 자료조차 거의가 일본 쪽에서 나온 것임에야. 피해자의 증언 역시 그 자료와 모순되지 않는다면, 사태의 진상은 대략적으로 파악된 셈이다.
사람들은 흔히 "일본 학자들도 인정한 위안부의 강제성을 한국인 학자가 부인하다니 그야말로 쪽바리가 아니냐."며 흥분하지만 위안부 문제의 대가인 요시미 요시아키가 밝혀낸 것들은 이영훈의 견해와 하등의 모순이 없다. 이를테면 아래 두 개의 기사를 읽어보자. 하나는 1993년의 기사인데, "조선총독부 군대위안부 직접 관여 사실 밝혀져"란 제목의 기사다. 이영훈의 발언 중 한 문장과 기사 제목을 비교해보니 이게 이영훈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으로 들리겠지? 그러나 살펴보자면,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일본 중앙대)교수 등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 센터'(민간단체)연구팀은 최근 한국을 방문,부산에 있는 정부기록보관소에서 일본군 특무기관으로부터 이동 허가증을 발급 받은 사람중 군대위안부가 다수 포함돼 있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문서를 찾아 냈다. (...) 이는 조선총독부가 위안부의 움직임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중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기사 링크
위에서 한 얘기와 뭐가 다른가? 어떤 사람들이 이런 기사를 퍼오면서 이영훈이 친일파임이 명백하다고 주장하는 건 글을 눈으로 읽는게 아니라 코로 읽기 때문인가?
1997년에 나온 "군위안부 동원에 조선총독부 관여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봐도 마찬가지다. 일단 이 기사 제목은 조금은 덜 자극적인지라 이영훈의 위안부에 대한 견해를 반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새로 밝혀낸 그 관여의 수준이란 건 어떤 것인가?
"이 논문에 따르면 관동군은 지난 41년 7월에 2만명 가량의 조선인 위안부를 징집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조선총독부에 요청, 실제로 8천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모집됐다는 사실이 관동군 후방담당 참모였던 하라(原善四郞)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는 것이다.
또 일본이 중국의 漢口를 점령한지 3개월이 지난 39년 11월 漢口의 일본총영사가 본국 외무성에 보낸 서신은 `병참, 헌병대, 영사관이 허가한 군위안소가 20개소에 이르는 포화상태인데도 한구로 몰래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으니 통제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 서신은 탁무성을 통해 조선총독부에도 전달된 만큼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군위안부의 도항을 통제.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尹씨의 분석이다."
기사 링크
잘 보면 군이 요청해서 총독부가 조치해줬다는 얘기이지 총독부 관헌이나 군인이 직접 가서 여성들을 끌고 갔다는 얘기는 없다. 농촌에서 여성들을 밀어내는 요인들이 워낙 많아서 민간업자들만 활용하면 충분했다는 이영훈의 주장과 하등 모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보다 훨씬 잘 아는 사람을 친일파라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니 얼마나 황당한가.
피해자의 증언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이영훈이 일본인들이 만든 문서만 믿고 우리 민족인 '정신대 할머니'들의 증언을 묵살한다고 비방했다. 정말로 그러한가? 이영훈은 문제의 상황에서 송영길에게 "정신대 보고서를 안 읽어보시고 하는 말인데."라고 말하고 있다.(이영훈은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를 명백하게 구별하고 있지만, 이 보고서의 이름이 정신대 보고서인 것 같다 ;;; ) 세간의 인식과 모순된다.
하지만 실제로 피해자 증언들을 찾아서 읽어보면 조선총독부가 관헌이나 군을 동원해 여성들을 끌고 갔다는 증언은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만주 쪽에선 군인이 끌고 갔다는 증언도 나오니 당연히 좀 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한 가지 재밌는 건 북한 쪽에서 제시한 증언자료에서 일본군이 직접 끌고 갔다는 얘기가 너무 많이 등장한다는 거다. 근데 이것들은 남한 쪽 자료와 내용상 차이가 너무 커서 신뢰성에 의심이 간다. 어찌보면 남한 사회보다 훨씬 더 역사왜곡과 체제 합리화가 심한 북한 체제의 특성이 낳은 자료왜곡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이건 피해자의 증언을 믿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체제의 가공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의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서 이영훈이 부정한 적은 없다. 이영훈은 당시 사건이 터진 후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란 말이냐."며 비난하자 "정신대 보고서를 읽어 보시고 나온대로 가르치면 될 것 아닙니까."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황당하게도 '친일파 이영훈'을 규탄하는 그 교사는 이에 대해 "내가 그런 걸 왜 읽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응답했다고 전해진다.(이영훈의 저서 <대한민국 이야기>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증언들을 살피면 이영훈이 말한 것처럼 취업사기나 인신매매 얘기가 많이 나오고, 원래 술집에서 일하다가 위안부가 무엇인지 알고 갔다는 사람도 있다. 알고 갔지만 그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위안부 피해자를 성매매 여성과 전적으로 단절시키고 '민족의 순결한 딸'로만 위치시키려는 욕망은, 피해자 집단 내부를 분열시키는 행동은 아닌가? 어떤 식으로 갔든 목적을 알았든 몰랐든 일본군의 전쟁범죄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데 말이다.
송영길은 자못 진지하게 "이 교수의 지적대로 고백적 성찰이 필요했지만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친일청산 상황이 없어졌고 동시에 송진우나 김구, 여운형이 암살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오히려 친일분자들이 중용되면서 국가건설이라는 측면에서 친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상황이 되고 애국자로 둔갑했다. 반성하고 싶어도 반성할 기회가 없었다. 이제야 말로 뒤늦었지만 이제는 그 때처럼 형사적 처벌이 뒤따르는 상황이 아니므로 오히려 차분하게 역사를 되돌아볼 기회가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주장은 위안부 문제에 관련해서만큼은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졌더라도 위안부 문제가 처벌대상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해방 후 한국에서도 쉬쉬 넘어가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일본과 한국의 시민운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이슈화되었다. 딸을 팔아먹은 부모들, '색시장사'를 한 아저씨들이 숱하게 남아 있는 실정에서,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성약취의 공모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덮어두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이영훈은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 중국어권에선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고 지적하는데, (그래서 위안부 범죄가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게 아니라) 이는 그 사회의 가부장 문화의 수준이 위안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네덜란드 위안부 피해자는 남편과 함께 국제사회에 나와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지만, 우리의 피해자 여성들은 가족과의 교류가 거의 끊긴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당시 부끄러운 짓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잊혀지고 사회의 여권이 어느 정도 신장되고 나서야 위안부 문제는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심각한 범죄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영훈은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과거청산이 오늘날의 사회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에 비해 도대체 무엇을 더 알고 있었던 것인가?
여기까지 적어보면 이영훈의 견해가 일본 극우파의 것과 동형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중상모략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교수를 비판할 수 있는 논거들은 있을 법하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영훈 교수가 토론회에서 조선총독부가 여성들을 끌고 갔다는 사실을 부인했지만, 맥락상으로 볼 때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송영길은 '조선 총독부 권력'이란 표현을 사용했고 사태를 잘 알지 못하는 그가 (아마도 이 사실에 이영훈은 개탄했을 것이다. 과거사진상규명법에 찬성한다고 패널로 나온 정치인이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다니!) 이 말로 "조선 총독부가 직접 사람을 보내 여성을 끌고 갔다."란 사태를 의미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이 그 말을 부정했으니 오해를 받아도 싸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비판을 수용하더라도 이 경우 이영훈의 문제는 '대중토론에 적합하지 않은 언어구사의 문제'나 '맥락적 사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 실수'가 된다. 이런 논거로 이영훈이 종군위안부가 공창제이며 자발적 성매매였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당장 오해가 있었더라도 훗날에라도 진의가 파악됐다면 그의 발언 진의를 왜곡해서 보도했던 매체에서 정정해주는게 합당하다. 사정상 그러기 어렵더라도 이영훈이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라고 발언했다는 인식이 버젓이 유통되고 확산되는 것만큼은 막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둘째로 견해야 어찌됐건 미군/한국군 위안부와 일제시대 종군위안부를 엮어서 설명한 건 오류라는 비판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비판 역시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다. 이를테면 누군가 "난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비슷한 수준의 범죄라고 생각해."라고 해서 그가 살인이 범죄가 아님을 주장했다는 견해가 성립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한국군 위안부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한 것이지 (일본군 위안부의 영향을 받아 해방 후에도 블라블라...) 양자에 대한 윤리적 평가가 '동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이영훈 자신의 설명은 이렇다. "공식 호칭이 같다고 해서 미군의 위안부를 일본군의 위안부와 동일하게 간주할 수야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의 위안부는 행동의 자유가 박탈된 성노예였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미군의 위안부는 자유로운 신분에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계약이었지요. 그 점은 확실히 그러합니다만, 그렇게 끝낼 일만도 아니라는 찜찜한 생각이 드는군요. 솔직히 말해 저는 일본군이나 미군이나 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 여성의 성을 약취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을 깡그리 부정한다면, 다시 말해 미군 위안부들의 비참했던 사정이 오로지 그녀들의 선택과 책임이라고만 치부한다면, 무언가 위선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대한민국 이야기> p152)
셋째로 이영훈의 견해가 일본 극우파와 동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견해가 일본 극우파와 일부라도 비슷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학이란 학문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주장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한국 학계에서도 "발해는 한국사라고 보기 힘들다."는 견해를 펼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이들에게 "당신은 동북공정을 찬성하는 거지! 매국노!!!"라고 규탄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환단고기>를 숭상하는 유사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주장을 부인하는 이들은 친일파"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대중의 통념을 토대로 현대사에서 같은 수준의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넷째로 이영훈의 견해는 '피해자의 증언'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문서'에 근거했기 때문에 오류라는 식의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는 앞서 이 비판이 오류임을 입증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읽어보지도 않은 이들이 피해자의 권위를 무기로 이영훈을 비방하고 있다. 그런데 비판의 형식만을 보자면 이 비판 역시 세번째 비판과 성격이 비슷하다. 사료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역사학의 방법론은 사라져버리고, 우리 입맛에 맞는 자료를 가공하여 특정한 관점을 구축하는 관변사학의 논리만 남는거다. 나는 그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이명박 정부의 원전 수주 자랑, G20 자랑, 아덴만 해적 소탕 자랑 등을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말을 따르자면야 사실이야 어찌됐든 정부가 내세우는 자료만 믿고 끄덕끄덕 하면 막 국위가 선양되는 느낌도 들고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피해자의 증언도 가해자의 문서도 사태파악에 도움을 주는 자료일 뿐이다. 그 자료들을 모으고 해석해서 진실에 근접하는 것이 역사학의 책무일 게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일제의 범죄가 잔혹하니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지, 일본인들이 처음부터 한국인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DNA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정리하자면 '이영훈 사건'은 통념적 인식에 의거한 대중적 분노를 저널이 여과없이 중개하여 반대파 지식인 하나를 매장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2004년 이 사건이 일어난지 7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도, 이영훈이 뭐라 말할 수 없을만큼 명백하게 자신의 견해를 드러보이는 책을 펴낸 2007년에서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영훈은 종군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했다."는 인식이 진실처럼 우리들 사이를 배회한다. 이영훈이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조정래 소설의 어느 에피소드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음을 비판하자 조정래는 논점에 대해서는 대꾸하지 않고 "위안부를 성매매로 보는 교수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불쌍하다."는 마타도어로 대응했다. 나는 조선일보의 그릇된 보도 때문에 멀쩡한 학자들을 (지금도) '빨갱이'로 인지할 조선일보 독자들과 우리들이 뭐가 크게 다른지 모르겠다.
주류언론의 한심함을 비판하려면 그 언론들보다 나은 의사소통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2004년 당시 이영훈의 발언이 오해를 사기 쉬운 것이었다 하더라도, 교양도서까지 펴낸지 4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그런 오해를 확대재생산하는 행동은 결코 긍정적인 일일 수 없다. 정보가 한번 단순하게 가공되면 다시는 원래의 맥락에 있는 정보값을 되찾지 못하는 이 넷세상에서, 우리는 그릇된 정보가 진실로 둔갑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이 경우에 당신이 그것에 '저항'하는 방법은, 좀 길더라도 이 글을 끝까지 읽고, 사태에 대한 진실을 깨닫고, 주위 사람들이 '잘못' 말할 때마다 그것을 교정해주는 것이다.
참고자료 :
오마이뉴스 최초 보도 기사 2004년 9월 3일 (해당 토론회의 해당 부분 녹취록 포함됨)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0050024
이영훈 교수 해명서를 비판한 2004년 9월 6일 프레시안 기사 (토론회 논란 이후 이영훈 교수의 해명서 포함됨)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13087
당시 본인이 쓴 이영훈 교수 옹호글 2004년 9월 9일
http://yhhan.tistory.com/111
여성학자 정희진의 사태 관련 글 2004년 9월 16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8&aid=0000078481
오마이뉴스 보도를 비판한 조귀동의 미디어오늘 기고문 2004년 9월 25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06&aid=0000008066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hermuseum.go.kr/main.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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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ler
2011.02.09 23:08:55
*.182.132.25
식민지근대화론이란 것이, 한국경제사학에서의 하나의 설로서 가치가 있겠지만,
일반시민들의 상식을 배양?하는 공교육의 '국사'라는 과목은 오로지 반일, 반공주의로 무장되어 있는 것같은 현실을 볼때에 "ㅎㅎㅎ"같이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해는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저희 아버지의 상식?에서 노회찬은 빨갱이다라고 생각되는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겠죠. 언론도 기름을 끼얹고. 아무튼 트위터에 그런 맥락에서 얘기가 나왔다고 하니 황당하긴 하네요;
그럼에도불구? 제가 이해가 안가는 점은, 예전에 학교에서 이영훈의 직제자?라는 강사분의 '한국경제사'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분도 또 신지호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발언을 하더라는 것이죠. 예를 들면 진보정치인들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해야한다라는 식. 수업 도중에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등,,
이렇게 보면, 이영훈과 같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정체?는 도대체 뭔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도 신앙고백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학자로서 본분을 주장한다라면, 한윤형씨가 진보진영을 비판하듯이, 뉴라이트도 우파를 비판해야하는 거잖아요. 그 쪽 진영에서 이영훈씨의 역할이 뭔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런 점이 궁금해서 <뉴라이트사용후기>라는 책을 열심히 보기도 했었습니다.ㅎ
그리고 예전에 아흐리만?이란 필명으로 이 문제에 관해 진중권씨와 논쟁하신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진중권씨는 당시 이영훈씨의 발언에 관해 "감정적으로 비난해선 안되지만, 분명 그러한 발언에는 특정한 맥락?이 있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신 듯한데,,, 잘 기억은 안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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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2011.02.10 00:16:07
*.70.215.194
안녕? 난 진중권. 내 이야기 들어줄ㄹ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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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뉴녕
2011.02.10 11:53:58
*.66.234.91
<뉴라이트 사용후기>가 좀 맥락적 서술에 부족한 면이 있어서 아쉽고 죄송합니다. ^^;;;
위에서 언급한 대로 탈민족주의자, <재인식>에 논문을 실은 역사학자, 식민지 근대화론자, 뉴라이트가 각각 다른 영역을 지닌 단어들인데 잘 구별이 안 되고 있죠.
이영훈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대충 제가 보는 수준에서 요약하자면 1) 조선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전적인 부정 2) 식민통치기간에 대한 탈민족주의적 관점,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긍정 3) (북한 체제에 비교한) 대한민국의 정통성 강조 4) 이승만, 박정희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강조 정도가 되겠죠. 이 역사인식이 대략 뉴라이트란 집단의 역사철학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입장에서 볼 때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진보'들은 대한민국의 정치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라는 혐의가 있는 거죠. 이영훈의 스승 뻘인 안병직 교수가 진보파들을 '반 대한민국 세력'이란 말로 표현했더랬죠. 이영훈 교수의 제자란 분이 수업시간에 하셨다는 말씀도 이 세계관의 발현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당연히 뉴라이트의 정치/역사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뉴라이트의 사유에 담겨 있는 모든 요소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북공정을 반대하는 사람은 <환단고기>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극단적인 사고방식이죠.
져는 뉴라이트의 사고방식 중에서 탈민족주의적 접근, 식민지 근대화론,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강조 정도는 받아들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뉴라이트 전부가 탈민족주의인지는 의심스럽다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박세일은 매번 전쟁위험 감수하고서라도 통일해야 한다고 하는데, 북과 한민족이란 인식이 없다면 무슨 근거로 통일을 해야 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영훈의 논문을 보면 사실 '통일'이란 걸 왜 해야 한단 건지 모르겠다는 회의가 묻어나지요. 내부에서 이게 정리가 안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영훈은 역사학자에 가깝고 박세일은 -경제학자이기도 했지만- 정치논객에 가까우니까요. 그리고 뉴라이트 진영의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강조는 어찌됐건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1국가 2체제론'과 같은 통일담론을 헌법적 근거에서 무력화시키는데 그 함의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한 독재자들을 긍정한다는 모순지점을 지니고 있으니, 뉴라이트의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강조'를 편협하다 부정하기 보다는 그 선택적 적용을 비판하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중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자면, 우리 학계에선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항하는 하나의 강력한 담론(혹은 주류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건 아무래도 한국에서만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듯합니다. 실제로 한국 학자들이 해외 학술대회에 나가 그 관점의 논문을 발표하면, 외국의 한국학 학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학술이론으로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제3세계의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치부한다고 하죠. 그것은 내재적 발전론의 사료적 근거가 그만큼 희박하다는 것일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등 낙성대 경제학파 사람들이 제시하는 사료를 반박하기보다는 부정하려고 하는 (그 사료는 일본에서 나온 것이라는 둥, 그보다 중요한건 역사관이라는 둥) 일부 역사학자들의 태도는 안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제 보은론'과는 다르다는 것이거든요. 일제 시기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감사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가 없죠. 그건 박정희 시기의 국가정책에 의해 경제성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박정희 독재가 정당하단 결론으로 곧바로 치달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뉴라이트 사용후기>에서도 언급한 <제국의 후예>의 저자 카트 에커트 교수같은 경우도, '식민지 근대화론자'지만 일제 보은론과는 큰 거리가 있지요. 그분은 오히려 해방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왜곡된 모습의 기원이 일제 식민통치 시절의 이식된 근대화에 있다고 설명하려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극우파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제보은론과 연결하고 있고, 뉴라이트 진영에도 약간은 그런 조류가 있죠. 하지만 이영훈조차도 저술을 보면 두 주장을 맹목적으로 연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일제시기 도입된 근대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한국인들의 역량이 20세기 대한민국의 놀라운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는 식으로 서술하려고 하죠.
당시 진중권 님은 이영훈에 대해 "역사학계의 대립항인 내재적 발전론 vs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을 위안부 문제에 무리하게 삽입했다."고 논평하셨는데, 그것이 적절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안부 문제에 한해서만큼은 이영훈이 다른 토론참여자들보다 월등하게 압도적인 인식을 보여주었거든요.(양적인 측면에서도, 질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당시 토론회에서 (진보파와 대중들이) 이영훈의 발언의 진의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모종의 불순한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왜곡된 발언을 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정당한 추론이라고 볼 수는 없죠.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오는 것인데...
그리고 이미 말한대로 '내재적 발전론'이 진중권 님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던 시절에 비해서도 훨씬 입지가 위태로워졌기 때문에도 더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내재적 발전론을 식민지 근대화론에 맞서는 나름의 근거를 가진 학술이론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저는 '조선왕조를 위해서도' 내재적 발전론은 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영훈과 진중권의 공통점은 조선왕조를 참 싫어한다는 거죠. -0-;; 진중권도 종종 "지금이 조선왕조도 아니고"라는 식의 비유를 하잖아요 ㅎㅎㅎ. 한편 충실한 내재적 발전론자는 "조선왕조는 서구 근대 문명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주장하는데....에에;;; 사실 이건 조선이 잘났다는 얘기가 아니지요.
<조선의 힘>의 저자분이 언급하셨듯, 사실 조선왕조는 근대화 따위 목표로 한 적도 없는데 '근대'를 채점기준으로 삼아 그걸 했니 못했니 하는게 참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근대문명이 무조건 좋고 역사발전의 목적이라는 것은 근대화 이후 인간들의 착각에 불과할 수가 있지요. 다만 그 시절이 근대보다 좋았건 안 좋았건 우리는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점이 문제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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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ler
2011.02.10 20:41:08
*.182.132.25
뉴라이트의 정체?가 뭐냐라는 문제를 떠나더라도, 반일민족주의를 이용하여, 이영훈 교수가 하지도 않은 말을 두고 인민재판을 벌이고 마녀사냥했던 짓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 일단 중요한 것같네요. 설혹 일제보은론의 냄새가 나더라도, 침흘리는 개가 조건반사하듯이 n명이 1/n의 린치를 가해선 안되겠죠. 예전에 지만원과 진중권이 방송에서 토론한 적이 있듯이, 어찌되었든 대화로 풀어야죠. 그래야 문제의 발언이 망언인지, 뿅망치감인지, 옳은말인지가 제대로 드러나니까요.
어쨋든 이숙정이 아닌 이영훈을 까야한다는, 그 발상은 아무리봐도 좀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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뭬이라
2011.02.11 11:04:54
*.110.172.248
기둥 뒤에 공간 있다고~!!!의 대장정 완결판을 읽은 거 같군요. 아 속시원한 느낌 (출처 밝히고 퍼~~♥가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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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뉴녕
2011.02.11 15:26:58
*.149.153.7
예, 물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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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워커
2011.02.12 13:42:50
*.234.105.202
한윤형님의 냉철한 시선이 돋보이는 글은 평소부터 잘 읽어왔습니다만, 이 글또한 좋은 글이군요.
한윤형님같은 젊은 논객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봅니다.
조금 다른 얘기일 지도 제가 일전에 '위안부는 화장실이다'라는 새역모 간부의 발언을 조사해 본 적이 있는데(http://springtree.egloos.com/3012754), 이것도 참.. '실언' 내지는 '망언'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만, 언론의 침소봉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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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11.02.13 20:09:22
*.221.101.88
이런 글이 쓰여지는군요, 이 나라에서도. 처음 왔다가 반가워서요.
호불호, 선악이 아니라 이 사람이 펼치는 '논리'를 따진 글,말,
이 나라 언론에서도 제가 발 담그고 있는 무리들(소위 문학/문화연구가들..) 사이에서도
별반 들어보지 못해서 말이죠..
섬세하고 치밀한 논의보다는 '민족'과 '국가'만 갖다 붙이면 만사 오케이인
마쵸들 틈에 산다는 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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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znor
2011.02.15 05:22:16
*.37.109.203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은 '뉴라이트'에 대한 (좌파,혹은 진보성향의 일반인)들의 통념이 사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위 글과 같은 판단오류를 우리가 범하고 있을 수 도 있다고 생각해도 될지요?
이영훈 교수가 뉴라이트를 창설한 목적이 (제가 '뉴라이트 사용후기'를 읽어보질 못했습니다.ㅈㅅ) 위 포스팅에서 언급된 100분 토론석상의 발언(주석1)과 같다면 그들이 비판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제 생각에도 친일파를 싸그리 사형시킨다고 해도 우리사회가 그러한 비극적인 과거로 부터 무엇을 얻었고, 그것으로 어떻게 현대와 미래를 실현시켜 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면 "사형 시켜야 한다. 아니다"의 논박은 아무 의미 없는것 같네요...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을거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면 뭣하러 일본의 잘잘못을 떠난 현대판 마녀사냥을 유도할려는지 도무지 알 수 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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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뉴녕
2011.02.15 05:43:12
*.149.153.7
'뉴라이트'도 여러 범주가 있는데요. 뉴라이트 소속 교수들 중에서는 그저 밥그릇 따라서 온 사람들도 있고, 활동가들 중에선 왕년에 주사파였다가 변절한 운동권들도 있죠... 아무래도 이분들은 좀 문제가 많은 케이스고요.
제가 언급한 뉴라이트는 뉴라이트 성향 역사학자들인데요. 위에 언급한 분들보다는 뜯어볼 가치가 있어요. 역사관은 일제강점기를 '근대 문명을 받아들인 시기로 보고, 이승만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들을 국가 건설과 경제성장에 일정한 공로가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는 것인데...뭐 그 관점 자체야 일리가 있지만 세밀하게 따져보면 서술에 있어 비판할 지점도 많죠.
특히 식민지기 서술의 경우 기존의 민족주의 편향을 벗어나는 부분이 있는데, 해방 이후 서술의 경우에는 독재자를 미화하기 위한 무리수들이 좀 보이는 듯합니다. 물론 이건 총평에 불과하니 각론에 들어가면 훨씬 복잡한 사정들이 있겠구요...
그와 별개로 이영훈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한해서만큼은 한국 사회의 어지간한 누구보다 식견이 높은 것 같더군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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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2011.02.16 20:49:42
*.66.49.84
여담이지만... 자발적 성매매... 참으로 오랫만에 들어보는 향수 어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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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2011.03.05 13:10:25
*.222.240.15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논란이 많던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네요. 이영훈 교수에 대한 '오해' 한 가지는 풀린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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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1.03.09 12:16:37
*.149.185.130
위안부문제에 대해서 뉴라이트적인 시각으로서 쓴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책같은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한윤형님 ? 나름대로 뭔가를 정리를 해볼려고 하는데 전 한윤형님의 글과 책, 그리고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밖에 모르겠네요. 위안부문제만 집중으로 다루지 않고 전체적으로 뉴라이트의 주장이 담겨있는 책이면 더 좋겠는데 하나만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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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뉴녕
2011.03.09 12:23:07
*.46.179.76
'위안부 문제에 대한 뉴라이트적인 시각'이라니 아마 제 얘기도 그렇다고 말씀하시려는가 봅니다. 그와 별개로 뉴라이트 진영의 근현대사 인식에 관한 책을 추천해 달란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답변드리겠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이영훈의 <대한민국 이야기>가 있겠습니다. 물론 교과서 포럼의 <대안교과서>를 읽는 것도 한 방법일테지만, 전자가 읽기가 더 쉽습니다. <재인식>에 도전하셨다니 대단한 일입니다만, 아무래도 분량이 너무 많고 내용도 전문적인 부분이 있으니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영훈의 책을 읽는 것이 제일 편하겠지요. 이걸 읽은 후 대안교과서를 읽는 것도 한 방법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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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1.03.09 20:59:58
*.190.177.69
아 읽지는 않았고요 확 보기에도 어려워보이기에 질문을 드린겁니다 하하.한윤형님이 뉴라이트를 비평하는 책을 내신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윤형님이 `똑같은`시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시겠죠, 제가 독해력이 부족해서 한윤형님의 시각이 어떻다고 정확히 알고있다고는 말 못하지만요.
제가 역사를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아주 가끔 읽는 책이란게 겨우 대담집같은것이어서 뉴라이트에 관해서 많이 아시는 한윤형님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댓글을 올린것입니다.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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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락
2011.03.19 11:38:28
*.102.96.35
글을 쓰신지가 좀 되어서 제 글을 보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뉴라이트 사용후기라는 책을 구입해서 보려고는 하고 있으나 해외에 사는지라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한윤형님의 윗글과 서평들을 종합할 때 한윤형님의 이영훈사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다지 깊이있어 보이지는 않아서 댓글을 남깁니다.
일단 이영훈사학의 뿌리는 대단히 방대합니다. 브로델, 월러스틴, 오오츠카, 포겔등의 성과들이 대단히 짜임새 있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일단 내재적발전론에 대한 비판부터 얘기해 보죠. 자본주의맹아론의 창시자는 그 이름도 유명한 김용섭입니다. 63년인가 사학연구에 발표한 논문 "속 양안의 연구"에서는 그 유명한 경영형 부농을 실증하고 있죠. 즉 농업경영의 양극분화가 일어났으며 부농들은 소유면적을 넘는 토지를 차경하여 합리적 농업경영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논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수백개가 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약 60여개의 교차표를 만드는 어마어마한 작업을 60년대 초에 하고 있다는 것이죠. 요즘같이 컴퓨터가 있다면 모를까 정말 초인적인 성과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경영형부농을 실증하는 논리는 매우 단순무식합니다. 순자작농, 순소작농보다 자작겸 소작농의 경작면적이 크다는 사실 단 하나로 경영형부농을 검출해 버린 것이죠. 이 논문의 내용은 국사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오늘날까지 권위를 인정받고 있지만 사실 그 논리적 기반은 턱없이 약합니다. 이 경영형 부농을 제대로 실증하는 것이 이영훈의 박사논문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자료(양안)을 분석해 본 결과 김용섭의 주장과는 달리 농업경영의 계층간 격차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꾸준히 줄고 있었음을 알게됩니다. 처음에는 이영훈은 논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아 한동안 방황했다고 술회합니다. 어쨋든 김용섭의 경영형부농론을 비판하는 작업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 소농사회론(즉 고만고만한 농민들이 독자적인 농업경영을 영위하는 형태)이라는 대안적 사회구성체론을 제시하는게 그의 박사논문이 됩니다. 이는 한길사에서 "조선후기사회경제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제가 보기에 현대 한국역사학계가 이룬 가장 뛰어난 성과입니다. 이 논문처럼 이전학설을 완벽하게 대체하는 장면은 학계에서 그리 쉽게 보기 힘듭니다(김용섭이 사료판독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자본주의맹아론의 발상지는 김용섭교수가 있는 연세대 사학과이며 이곳이 한국사학계의 주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상황에서 자본주의맹아론은 김용섭의 제자들도 최윤오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더 이상 곧이 곧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조선후기가 이룩한 역사적 진보성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재적발전론이죠. 하지만 내재적발전론은 어떤 뚜렷한 학설이라기 보다는 이 쪽 계열 연구자들의 심리상태, 사고방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실제로 저는 내재적발전론 계열의 논저를 뒤져 보았으나 딱히 이거다 하는 글은 찾기 힘듭니다(최윤오의 경우는 김용섭을 계속 답습하고 있는데 솔직히 좀 납득이 안가는 면이 있습니다.). 굳이 이 계열의 책을 한권 고르라고 하면 이승렬의 "제국과 상인"정도가 되겠습니다. 그 외에 왕현종, 주진오등의 글을 보시면 내재적발전론의 현재 상황이 보일겁니다. 그에 반해 낙성대학파의 학설은 수백개가 넘는 논문과 수십종의 책을 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학설이죠. 그렇기 때문에 낙성대학파와 내재적발전론을 vs로 대립시킬 수 있을 정도로 위상이 동일하지가 못합니다.
낙성대 학자들도 저마다 차이가 있는데 이영훈에 한정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판단한 이영훈사학의 특징은 소농사회론이라는 사회구성체론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브로델 식의)장기지속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죠. 즉 역사에서 단절은 없으며 조선후기가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성립시킨 시기로 파악하고 있으며 일제시대는 그 한가운데 있다고 봅니다. 또한 문명의 교류와 융합을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보고 있으며 식민지기는 서구의 근대문물이 접합하는 시기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한 외래문명이 이식되기 위해서는 이식받는 곳의 토양이 중요한데 조선후기의 소농사회는 이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이런 이론적 뼈대를 통해 20세기 후반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우 구조주의적인 냄새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적발전론자들처럼 역사에는 어떤 필연적인 경로가 있다고 가정한다기 보다 우연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들뢰즈 같은(쿨럭..) 후기구조주의와의 유사성도 보입니다. 이렇게 장대한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기 때문에 브로델처럼 사건은 먼지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죠. 박정희에 대한 비판이 보이지 않는다는 그런 불만들이 생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분 나쁘게 들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17세기 이래 400년에 이르는 한국사의 유장한 흐름에서 7년에 불과한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분명 비판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더 첨언을 하자면 이영훈 사학은 탈민족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는게 목적이라기 보다는 문명사를 중심에 두고 장기지속의 역사를 본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탈민족주의는 그 부산물에 불과한데 자꾸 이것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윤형님도 예외는 아니구요.
또한 정통성에 대해서도 말이 나오는데 이영훈교수는 정통성을 잣대로 역사를 보지 않습니다. 사실 정통성이란 개념 자체가 성리학적 역사관의 산물임을 강조하고 싶군요. 이영훈은 근대사학자이며 북한을 말할 때도 정통성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공리주의적인 차원에서 보고 있습니다.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도 보이는데 이건 학문보다는 운동이 중요한 사람들이 하는 일종의 억지라고 봅니다. 운동하는 사람한테 실증만큼 거추장스런것은 없으니까요. 내재적발전론의 입장은 학문이라기 보다는 운동입니다. 최윤오의 논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역사학의 목적은 지난 역사를 바로잡고(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현대 사회에 지침을 주는 것이 목표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운동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학자들까지도 학문과 운동을 구분을 못하는 것이죠. 이 얘기는 이미 한윤형님이 설명하셨습니다만 논문도 그런식으로 쓰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이영훈사학은 앞서 말씀 드린 바 대로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문명사를 탐구하는 것이죠. 따라서 확고한 목적과 방향성이 있는데 이는 철저한 실증이라는 벽돌로 만드는 웅장한 집입니다. 따라서 사실만 따진다고 역사가 되는게 아니라는 판에박힌 비판을 하는 분들은 이영훈의 글을 단 한줄도 안읽은 사람들이죠.
마지막으로 이영훈사학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의만 말하고 끝내겠습니다. 한국 지식인들의 특징중 하나가 자기 자신보다 유럽을 더 잘 안다는 점입니다. 항상 서양철학을 끼고 살고 맑스가 퇴조하자 프랑스철학이 대유행을 타는 등 한국 지식인들의 마음은 항상 유럽으로만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자본주의 성립 직전에 일어났던 경영형부농을 실증하려고 그 고생을 했던 것이죠. 운동권은 소련이 붕괴하니까 그 다음에는 프랑스철학을 통해서 한국사회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맹아론자들이 맑스와 모택동을 읽을 동안 이영훈은 양안과 의궤를 꼼꼼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지식인들이 푸코를 통해 프랑스적 근대를 비판하는 동안 이영훈은 한국에서의 근대가 갖는 의미를 천착했습니다. 최근 이영훈의 논문들이 철학적 주제를 논하고 있는 점에서 대단히 기대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p.s 이영훈이 조선왕조를 싫어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게 간단히 말하기 힘듭니다. 그건 2004년에 나온 수량경제사로 다시본 조선후기를 속류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논문집이 계량경제학적 테크닉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읽기가 쉽지가 않아서 이런 오해가 나오는 것 같군요.
일단 이영훈의 소농사회론은 조선후기를 세계적으로 선진적인 수준에 올라있는 사회로 파악합니다. 즉 직계 소가족 중심의 농업경영은 농민들로 하여금 근대적 경영마인드를 기르도록 하는 원동력이라고 파악하며 이로 인해 일제가 가지고온 서구문명이 매우 쉽게 이식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인도의 경우 영국이 근대적 토지제도, 즉 일물일권제를 도입하기까지 300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이 그토록 짧은 시간내에 소유권자를 사정해낼 수 있었고 근대민법체계를 도입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조선사회가 이룩한 역사적 진보가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농문명은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합니다.
위의 "수량경제사"의 내용은 그동안 블랙박스상태였던 19세기 조선사회를 복원해 냈다는 의의를 가집니다. 조선후기 상공업의 발달 등등 국사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얘기는 모두 18세기 이전 얘기였고 19세기의 상황은 역사학자들도 잘 모르던 분야였죠. 이 책에서 19세기 조선사회는 총체적인 붕괴단계로 접어들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조선왕조를 부정적으로 본다고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에커트는 식민지근대화론자가 아닙니다. 개발(발전)국가론자죠. 개발국가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은 완전히 다릅니다. 실제 논쟁은 내재적발전론vs식민지근대화론 구도가 아니라 개발국가론vs식민지근대화론입니다. 에커트의 제국의 후예와 주익종의 대군의 척후가 그 예죠. 개발국가론이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의 근원을 조선총독부의 식민지경영(에커트, 콜리, 우정은)이나 박정희의 개발독재(해거드, 문정인, 암스덴)에서 찾는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정치권력보다는 경제주체의 자발성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대중들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이고 모조리 친일파들이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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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nyrd
2011.03.19 12:54:34
*.145.61.42
우석훈 비판에서도 느꼈지만, 자기 전공분야에 대한 충실한 해설에 감사드립니다.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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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락
2011.03.19 21:20:53
*.102.96.35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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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락
2011.03.19 21:06:16
*.102.96.35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 특별법에 따라 설치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활동을 마치고 해산했는데 이들이 남긴 결과물을 참고하신다면 2004년 당시의 백분토론을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위원회가 해산하면서 제출한 보고서는 다음의 사이트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http://dlibrary.tistory.com/category/보(寶)%20보물%20자료들/온라인%20자료
5년동안 약 300억이 넘는 예산을 쏟아부어 낸 결과물 치고는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친일파를 골라 놓은 다음 약력과 신문기고문이나 연설문을 스크랩해 놓고 말미에 짤막하게 특별법의 무슨 조항을 위반했다는 식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양이 방대하다는것을 제외하면 학부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보고서, 아니 스크랩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얼 봐서 이게 학문적인 결과물인지 알 수 없군요. 고작 이걸 하려고 그 소란을 피웠는지 허탈할 뿐이죠. 차라리 그 돈으로 용역을 줬으면 수백편의 논문이 나왔을 겁니다. 저 스크랩물이 민족정기를 얼마나 살렸는지는 각자 판단에 맏깁니다.
초대위원장인 강만길의 글을 보면 더욱 황당합니다. "역사가의 시간"을 읽어보면 나이에 대한 강만길의 지독한 편견을 볼 수 있으며, 자신과 약간이라도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역사의식이 없으니까"라는 식으로 훈계하는 대목이 종종 보이는데 실망스럽다 못해 참담하기까지 하죠. 더욱이 p.522에는 더욱 황당한 문장이 나옵니다. 인용합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사업을 반대한다면 스스로 친일반민족행위자 본인이거나 그 연고인임을 자백하는 일이 될 것 같은데, 어떤 여인들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거나 연고자들인 사람들이 '날뛰는' 세상이라니 할말이 없다."
저기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빨갱이로 바꾸면 아주 익숙한 말이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진보적 역사가라고 불리는지 모르겠군요. 한국사회가 매우 변태스럽지 않습니까?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 반인륜범죄로서 접근해야한다고 주장한 이영훈 교수는 수구꼴통이고 친일파를 옹호하면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강만길은 진보지식인인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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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뉴녕
2011.03.20 16:40:59
*.169.115.33
두락// 덧글은 진작에 감사하게 읽었는데 제가 주말 일정이 바빠서 일찍 덧글을 달지 못했습니다.
일단 저의 이영훈 사학에 대한 깊이가 일천하다는 지적에 동감합니다. 저는 역사학 전공자도 아니고 하다못해 이영훈의 학술논문도 제대로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 덧글에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이를테면 자본주의 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구별하는 것이나 개발국가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구별하는 부분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뉴라이트 사용후기>는 민망하고 부끄러운 책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런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뉴라이트 역사학에 대한 기존의 민족주의적 비판들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이며(한홍구의 간헐적인 언급과 김기협의 <뉴라이트 비판>이라는 단행본이 대표적입니다. 아마 김기협의 책을 보면 님도 흥분하게 될 겁니다.) 그 허술한 비판이 '역사학'이란 이름으로 통용되면서 대중들이 '역사학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뉴라이트 잡놈들'이라고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역사학자/도들이 아마도 1) 시간이 없거나 2) 학술적인 글쓰기에만 너무 익숙해져 있거나 3) 역사학계 내부에서 나이 많은 학자들을 비판하는데 부담감을 느껴 아주 뻔한 사안에 대해서도 발언을 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치평론을 하는 처지로,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평론이 끊임없이 해방전후사를 호출하는 이상 이 문제를 그 정도의 상태로 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혼란한 방을 쓸고 닦을 정도의 역량은 안 되지만 물건들에 대한 정리정돈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논의에 끼어들게 된 것입니다. 저는 진보진영이 뉴라이트 역사학에 대해 반대할 필요가 있지만, 민족주의 사학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반대해야 할 거라는 직관적인 컨셉에 의거해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직관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었지만 그래도 윤해동 선생님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제가 오류를 덜 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저는 책을 쓰면서 이미 저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있었고, 아마도 책이 나오게 되면 많은 역사학도들이 제 무지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개입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책 자체가 별로 팔리지 않다 보니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두락 님의 지적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은 있는데, 학자의 욕망은 학술적 글쓰기보다 대중적 글쓰기나 인터뷰 등에서 더 명료하게 드러나는 면이 있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지적하신 두 가지, 이영훈이 조선사를 싫어한다고 단언하기 어렵다는 부분이나 이영훈은 정통성을 잣대로 역사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저는 쉽게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자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데 후자에 대해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충분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제가 졸저에서 주장했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이 말하는 바는, 이영훈과 뉴라이트 사학은 식민지 부분에서는 (기존의 서술보다 훨씬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미덕이 있는데 대한민국 건국기로 가면 당위론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정통성 문제에 대해서 이영훈 본인은 윤해동과의 대담 인터뷰에서 " 어느 쪽이 더 역사적으로 정통이냐 하는 문제도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이며 "정통성의 문제를 제기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역사학자는 국가의 정통성을 비판할 의무가 있지만 "정통적 이념을 부정할 권한까지 갖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021618152&code=210100)
저 역시 이영훈의 역사학 논리에서 정통성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근거를 발견하진 못했으나, 본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헌법과 매번 권력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정당성을 산출하는 체계임에도 말입니다. 이는 이영훈에게서만 발견되는 문제는 아니고, 특정한 학문적 견해에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산출해 낼 때 보여지는 어쩔 수 없는 도약(혹은 비약)인 것 같습니다.
이영훈이 조선을 싫어 한다는 견해는 이에 비하면 저의 심증에 가깝지만, 저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고 글쓰기 전략의 함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많은 대중들은 뉴라이트에 대해서 뼛속까지 일본을 추종하는 친일파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제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효과가 있는 겁니다. "그거 알아? 이영훈은 조선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걸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 무력하게 일본에 병합당했기 때문이야." (이 정서적 흐름은 이영훈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란 단행본에 수록한 짧은 글에서 추출해낸 것입니다. 이영훈은 13도 창의군의 이인영 대장이 부친상을 이유로 의병해산을 명령한 사건에서 충격을 받아 조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죠.) 이렇게 말하면 "뭐? 이영훈이 조선병합을 안타까워 해?"라는 반응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학술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지 않고, 어떤 대상에 대한 호오의 감정을 따집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접근하고 설명하는 건 비약의 측면이 있을지라도 유효한 방식으로 생각됩니다.
강만길에 대한 비판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종종 이런 식으로 말을 섞어 주시면 저에게도 제 블로그의 독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댓글
두락
2011.03.20 17:07:53
*.102.96.35
김기협의 책을 봤는데 김기협은 역사학자라고 보기 힘들죠. 꼭 논문을 써야 학자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자적인 연구성과는 없으면서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을 언론에 기고해서 먹고사는 분이 역사학자라고 보긴 힘들겠죠. 한홍구, 김기협 이 두 분은 이영훈이 역사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주진오같이 이영훈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도 이영훈을 역사학자가 아니라고는 안합니다(이영훈이 역사학자가 아니면 본인은 누구랑 논쟁한건지 알 수 없게되죠). 최소한 주진오는 논문을 읽고 쓰며 학회에 참석하는 학자지만 한홍구, 김기협 이 두 분은 논문은 아예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으며 학계의 성과와는 완전히 담쌓고 지내시는 분들이죠. 솔직히 "뉴라이트비판", "강의"같은 책들 매우 기대하는 마음으로 첫페이지를 열었는데 몇 줄을 못가서 그다지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임을 알게 됐습니다.
김기협의 책을 읽어 보면 그가 뉴라이트비판을 쓰게 된 이유와 과정이 그냥 보입니다. 평소에 이영훈의 존재도 모르다가, 자신이 기고하는 글이 이영훈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서 그제서야 부랴부랴 재인식하고 대담집 두어권 구해서 급히 읽고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급조한 책입니다. 뉴라이트에 욕을 퍼부음으로써 본인이 뉴라이트가 아님을 선언한 자기사상검증서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이걸 장정일같이 순진한 사람이 읽고 서평도 써주고 뉴라이트는 또라이트네 뭐네 하는걸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죠.
링크하신 기사는 처음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왠만큼 숙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영훈-윤해동 대담이 있었군요. 전체적으로 받은 인상은 윤해동은 후기구조주의방식으로 역사를 보려하고 있고(들뢰즈적 관점이 짙게 보입니다. 근현대사교과서는 국가로 부터 탈주하는 일종의 전쟁기계가 되야한다고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이영훈은 역사를 현재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것 같습니다. 윤해동의 여러 논문들을 보아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관점인데 일단 매력적이긴 합니다만 "근대를 다시 읽는다"에서 말하는것 처럼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한다거나 넘어서는 기획이라고 보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론이 19세기의 토지생산성의 변화에 대한 의미있는 답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죠. 다만 저렇게 대화를 주고받는것은 그림이 좋아 보입니다.
정통성 얘기가 나왔는데 이영훈이 말하는 정통성이란 단어가 성리학적 개념이 아닌건 글을 보면 드러납니다. 왜 굳이 저런 단어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명확하죠. 그 동안의 통념은 북한은 항일운동하는 사람들이 만든 나라고 남한은 친일파가 만든 나라니까 정통성은 북에 있다는것 아니었습니까? 이영훈이 말하는 정통성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유와 인권, 사유재산권에 기초한, 그런 의미에서의 정통성이란 것이죠. 이영훈이 항상 기존의 도덕주의적 정통성 관념을 비판해 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문제는 한윤형님의 글쓰기 전략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그게 단순히 전략이 아니라 정말 이영훈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영훈은 시사적 발언을 할 때도 최소 400년의 지평위에서 얘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죠. 왜냐하면 대중들, 인터넷의 세상에서는 불과 1-2년의 지평 위에서 논의가 오가거든요. 이를테면 이영훈교수가 북한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도 현재의 북한상황이 19세기 후반 망국 직전의 조선왕조와 너무나도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야기"에서도 그 얘기가 조금 나오지만 원래 "수량경제사로 다시보는 조선후기"에 실린 논문들에서 19세기 후반의 산림황폐화, 토지생산성 하락, 시장통합의 붕괴 등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나옵니다. 오늘날 북한의 상황과 정확히 동일한 현상이거든요. 이영훈의 다른 글에서도 이 얘기가 자주 나오지만 이 대목에 이르면 항상 글에서 그 안타까움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다른 글에서는 느끼기 힘든 감정이죠. 이영훈과 안병직의 북한관련 발언은 사실 이러한 학문적 근거와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이러한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영훈 교수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분일것 같다고 하셨는데 사실입니다.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한데요, 흔히 정신대 보고서라고 하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I", 정대협, 한울, 1993을 읽어 보시죠. 서문을 쓴 사람이 바로 안병직교수입니다. 게다가 연구위원 15명 중 유일한 남성분이시죠. 이영훈이 안병직의 제자인건 아실테고, 사실 이영훈이 나눔의 집에 사과하러 갔을 때 그 분들과 이교수는 개인적으로 모두 아는 사이였을겁니다. 안병직교수 그 직설화법으로 욕 많이 먹고 있지만 학문적 순수성과 진지함은 대단한 분입니다. 단지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싶어서" 50이 넘은 서울대 교수가 20,30대 여성연구자들틈에 끼어서 연구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한국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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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뉴녕
2011.03.20 17:28:54
*.149.153.7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런 맥락이 있었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김기협이 대안교과서 필자들에게 역사학자가 아니라고 일갈하는 모습은 참 그로테스크했죠. <뉴라이트 비판>의 백미는 일제하 경제성장률 3.7%가 '별 거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아니었나 합니다. 박정희 시대 고도성장률에 길들여진 그 심성으로 노무현 시대를 보면 'MB님이 언약하듯 7%는 간다고 주장해야지 4.3%가 무슨 성장이냐 후퇴지!!!'라고 일갈해야 마땅할 듯한데 신기하게도 이 분은 또 '노빠'입니다.
이영훈 교수의 문제의 2004년 토론회에서 논적인 안병훈 교수를 실수로 '안병직 선생'이라고 호칭한 적이 있죠. 웃음이 나오는 광경이었고, 학술토론에 익숙한 이 양반을 불러다놓고 자기들끼리 문구를 이상하게 해석해서 헛소동을 피우고 그게 왜 잘못인지도 깨닫지 못하는 이나라 저널의 수준이 암담했더랬습니다.
이영훈이 말하는 정통성 개념이 성리학적 개념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알고 있는 바입니다만, 소위 '북한 정통성론'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현대사 얘기하면서 그런 식의 '정통성' 얘기 할 필요없다."고 못박지 않고 '남한 정통성론'을 주장하는 것 같아 이게 올바른 전략인가 하는 생각은 듭니다. 물론 그게 이영훈의 우회로일수도 있겠지요. 조금 더 나아가 보면 주대환 같은 활동가가 '남한 정통성론'을 그대로 받아 버리되 '실은 좌우합작으로 건국되어서 정통성이 있는 거거든?'이라고 대응해 버리는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의의들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지막으로 두락 님이 정리했듯이 뻔하고 쉬운 얘기가 통용될 수 없는 정치담론의 현실이 안타까운데요. 아마 여기서 말씀하신 것처럼 얘기하면 그냥 엘리트주의자라고 공격받고 끝날 겁니다. 저같은 무지랭이한테도 엘리트주의자라고 하는데요 뭐.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의 무지를 활용(?)하여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설명을 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하는 중인데, 그러다보니 "나는 이영훈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뉴라이트 대안교과서에 동의하지는 않지만"과 같은 정서에 다가가기 위한 우회적 서술이 많아지는 것이겠죠. 다만 가끔 "사실 대안교과서는 매우 훌륭한 교과서다."라는 얘기도 하면서 거리감을 과시하기도 하죠. ㅎㅎㅎ
어쨌든 덧글 감사합니다.
P.S 아참 누리꾼들이 안병직 이영훈은 '일본 돈'으로 연구를 하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식으로 비난하지 않습니까? 처음엔 '일본 돈'이라 그러더니 요즘엔 '일본 극우파 돈'이라고 얘기가 커졌더군요. 낙성대경제학연구소를 지원하는 일본 재단의 성격에 대해 혹시 아시는 바가 있는지요? 이 문제도 FAQ처럼 정리해 둬야 할 것 같긴 한데, 저는 학계사정을 잘 모르고 일본 단체 이름을 봐도 성격파악이 잘 안 되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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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락
2011.03.20 18:24:06
*.102.96.35
일본돈 문제는 두권의 연구서 "근대조선의경제구조", 비봉출판사, 1989와 "근대조선수리조합연구", 일조각, 1992을 지칭하는 것이죠. 한일양국의 연구자들이 행한 공동연구이고 토요타재단의 연구지원금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건 대중들한테 말하기가 힘든문제인데 학자가 연구지원금을 기업으로부터 받는건 흔한 일입니다. 그 외에도 한국학술진흥재단, 대우학술진흥재단의 연구금도 받고 각각의 성과물이 이미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대우재단이 학술지원사업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대우학술총서가 600권이 넘게 나왔죠. 나온 책들 보면 거의 팔리지 않을 그런 책들 뿐입니다. 그런데 이걸 통해 대우재단이 무슨 이득을 누릴까요? 대우재단이 재벌체제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고대 러시아 문학의 시학연구에 연구비를 지원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저 위의 공동연구에는 일본학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그들의 주선으로 토요타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은 것이죠. 일본학자들이 일본기업으로부터 연구비를 받는거야 자연스런 일이고 한일 양국학자가 공동연구를 하는것도 자연스러운데 그게 합쳐지다보니 그림이 이상하게 보이는 거겠죠.
위의 두 연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낙성대쪽과 공동연구를 자주 하는 사람 중에 호리 가즈오(堀和生) 교토대 교수가 있습니다. 독도문제가 나올때마다 언론에 나오는 얘기, 태정관 지령 아시죠? 시마네현이 독도를 지도에 넣을까 말까 외무성에 문의했더니 일본과 관계없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그 유명한 얘긴데, 이걸 발견해서 논문으로 쓴 사람이 바로 호리 가즈오 교숩니다. 다음의 링크를 보시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086404
http://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4/02/001065000200402021936282.html
그런데 아래의 링크에도 나와 있듯이 호리의 책은 마치 식민지 미화론인것처럼 비판받고 있죠. 번역자는 백분토론에 나와서 박정희와 친일파를 옹호한 바로 그 주익종박사입니다. 친일파 뉴라이트가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주장한 일본학자와 연구를 하는 것이죠. 아마 낙성대까들은 떡밥은 진짜를 준다..뭐 이런 한심한 소리로 응수하겠죠.
이영훈이 대담에서 말한것 처럼 모든것을 좌파, 우파로 나눠버리면 그 안에 중요한 내용들이 모조리 묻히게 되고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낙성대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좌파적 관점이 만만치 않게 있거든요. 안병직을 세뇌시켰다고 알려져 있는 나카무라 사토루만 해도 완전 맑스계열학자구요.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이 분들이 뉴라이트라는 간판을 단게 매우 부적절한 처신이었다고 봅니다. 욕먹을 행위를 자초한거죠.
아무튼 연구비 얘기는 일반 대중들의 정서에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더군다나 일본학자들과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자연스런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 일본학자들이 좌파계열이거나 일본우익을 비판하는 사람들인데요. 제발 좌파, 우파 니편 내편을 따지기 전에 일단 내용이 뭔지는 좀 읽어보고 판단했으면 좋겠네요. 진중권이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썼듯이 한국사회가 문자문화라기 보다는 구술문화인데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것 같습니다. 인터넷이 그 구술문화를 부추기고 있죠.
근데 안병욱을 안병직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저도 쫌 웃겼습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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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뉴녕
2011.03.20 18:28:49
*.149.153.7
정리 감사합니다. :) 예전에 한참 검색할 때 안병직과 이영훈이 종속이론을 신뢰했는데 80년대 이후 대만 한국 등의 경제발전에 즈음하여 일군의 일본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길로 나아갔다는 식의 정리는 본 적이 있어요. (나카무라 사토루가 언급되었을 거에요. 분명히 책에도 썼을 건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0-;;; ) 강준만 책을 봐도 뉴라이트 역사학자들 의식이 은근히 좌파적이다라는 얘기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물론 요즘은 사람들이 강준만 책도 잘 안 읽으니까... 저 역시 안병직이나 이영훈이 뉴라이트 간판을 달게 된 데에 대해서는 비슷한 생각이고, 이영훈의 경우 괜히 2004년 토론회에서 호되게 당한 것이 오히려 이상한 오기를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나 하는 심증이 있기는 한데, 그와 별개로 두 분이 한국 현대사나 요즘 정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들으면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제가 이영훈의 탈민족주의 지향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햇볕정책이나 통일정책에 대한 이영훈의 발언들을 보면 "그들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뭐 그럴수도 있다고는 봅니다만....)라는 공리로부터 연역논증을 해서 북한인들을 배제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거야 얼마든지 납득할 만한 건데, 사람들의 통일 욕망이 근거없는 민족주의에서 기인한 것이니 후자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전자를 없애자는 식의 발본색원적 태도로 문제에 접근하시더라구요. 물론 저는 통일이 아니라 냉전체제 해체가 정답이라는 최장집 입장을 더 좋아하는 쪽이긴 합니다만, 그와 별개로 이 논리구조는 좀 위험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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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락
2011.03.20 19:21:31
*.102.96.35
북한 문제는 아마도 통일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체제로 통일을 할 것인가 고민이 있어야 하는데 체제에 대한 고민을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 안되는 이데올로기로 떼우는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체제 얘기만 나오면 케케묵은 냉전적논리라고들 비판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해갈 수는 없는 질문이거든요. 아직 그 쪽 문제는 이영훈교수 자신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은 면이 있는 것 같지만 이 정도 지적은 충분히 받아들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눈치를 보니 안읽어 보신 것 같은데 안병직-이영훈 대담집인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를 한번 읽어 보시죠. 사실 이 책을 권하기는 좀 꺼려지는 면이 있는데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나 보자는 식으로 달려드는 사람이 읽으면 역시 친일파 인증소리밖에 안나오는 책이긴 합니다. 논문을 읽은 사람들이 보면 맥락이 잡히고 빈틈이 채워져서 좋기는 한데 그렇지 않고 보면 그 맥락을 100% 이해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분들 대중서에는 완전히 아마추어 들이죠. 특히 안병직교수는 말좀 조심해서 했으면 좋겠구요.) 어쨌든 이 분들의 연구사적 배경, 맥락, 역사관 등이 상세하면서도 솔직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추천할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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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뉴녕
2011.03.21 12:16:51
*.46.33.167
체제 문제에 대해 박세일의 경우는 바로 그런 식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헌법에 의해서나 현실로 봐서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의한 통일이 합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연방제나 연합론 등의 통일방안을 반대하는 것인데, 새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영훈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통일에 대한 욕망이 민족주의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실체가 없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포지션을 취하지요.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물론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직 정리가 안 되어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문제를 대중서 위주로 정리를 했는데 하필 그 책을 빼먹었네요. 추천 감사하고 기회가 닿는대로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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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뉴녕
2011.03.20 16:46:36
*.149.153.7
두락// 아 그리고 <뉴라이트 사용후기>의 서술에는 저조차 인지할 수 있는 매우 초보적인 실수가 몇 개 포함되어 있는데요. 편집과정에서 편집자가 제 문장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장을 고치다가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후로는 편집자가 교정원고를 보내오면 표시된 부분만 읽는게 아니라 보내올 때마다 매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게 되었습니다. 그 편집자 분은 저와 관계가 괜찮았는데, 여하간 지금은 다른 곳에 가 계십니다.) 저 혼자 읽다가 발견해서 편집부에게 교정 원고를 보내드렸습니다만 2쇄를 찍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수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훗날 서술방식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통으로 다시 한번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당 주제가 두락 님의 관심사라서 읽으신다고 하면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졸저를 낸 책임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 저자입니다만, 그냥 단순히 이런 글쟁이도 있던데 뭐 어떤 걸 쓰나 한번 읽어볼까라는 생각이셨다면 최근작인 <안티조선 운동사>를 추천드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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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락
2011.03.20 17:05:36
*.102.96.35
예, 감사합니다. 조만간 꼭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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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이크
2011.05.15 17:20:12
*.234.162.87
고생하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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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y9108
2012.02.24 23:28:40
*.169.235.217
하뉴녕님의 권유를 받아 글 남깁니다.우선 이영훈에 주장에 대해 차분차분 반박해야하는데,제가 이영훈의 저서를 읽은게 별로 없기에 전반적인 반박이 거의 불가능할듯합니다.따라서 기존 주류 학계의 자본주의 맹아론 입장에서(물론 표면적으로 맹아론을 주장하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만 기존의 자본주의 맹아론을 지지하던 계열에서 이영훈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맹아론을 뒷받침할 보완을 많이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맹아론적 입장이라 표현했습니다.) 이영훈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몇가지 지적만 하겠습니다.이영훈을 비롯한 뉴라이트 계열의 주장과 민족주의 계열의 주장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서 뉴라이트를 어떻게 비판해야할지는 제가 공부를 좀 하고 마저 하겠습니다.이영훈을 옹호하시는 분은 누구나 가차없이 비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이영훈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자본주의 맹아론적 입장에서 간단하게 비판하자면 일단 이영훈이 내세운 19c 조선후기 경제사 통계의 근거는 신빙성이 "전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통계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지고 빈약한 수치를 이리저리 기워서 만든 역사상은 현실에 대한 '실증적' 분석이라보기는 힘들듯합니다.여기에 대해 이영훈조차 반박을 못하는데요.다음은 이영훈의 발언입니다.
"통계가 체계적으로 조사된 적이 없는 이른바 '전(前)통계의 시대'에 속하고(...)그 통계가 일부 지역의 자료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명제에 대해 아직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2004년의 발언이라 현재는 어떤 입장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영훈 자체도 자본주의 맹아론이 제시하는 17~18c의 농업 생산력 향상과 상업의 성장을 인정하고 있고,실제 자본주의 맹아론을 강력하게 옹호하던 강만길과 그 제자들이 내세우는 자본주의 맹아론은 17~18c의 생산력 향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 19c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열악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만 있을뿐 이영훈의 주장과 대체로 비슷합니다.말그대로 맹아만이 존재했다는 것인데,19c의 경제 상황에 대해 강만길은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고쳐쓴 근대사]와 그의 제자 김윤희 논문에서 조선왕조의 정치적 통제력이 약해짐과 동시에 기존의 반상적 신분체제를 극복하지 못해 부르주아 계층이 세력화에 실패했고 그로 인해 성장이 정체,혹은 억제되었다 주장합니다.이런 인식에 대해 이영훈은 강만길이 역사를 맑시즘적 구조틀에 맞춰 해석하려한다고 비판합니다.그 비판은 어느정도 타당하지만 맹아론을 '대체'할 정도는 아니라 사려됩니다.또 이영훈의 이 지적이 더 설득력 없어보이는 이유는 현대사 파트에서 이영훈 자체도 자본주의/사회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영훈이 1910년대 총독부의 자료를 가지고 개항과 개항 이전의 조선 농업생산력은 형편없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전반에 걸쳐 농업 생산력이 발달했다고 합니다만,1910년대의 조선총독부 자료는 총독부 자체도 통계를 몇번씩 바꿀정도로 그 신빙성이 낮습니다.[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서 나온 1910년대 총독부 자료는 제가 알기로는 그 뒤로도 몇번이나 바뀐 것으로 압니다.
개항 이전의 주장은 이정도만 비판하고 이제 식민지 근대화론 자체를 비판해야할텐데,제가 아는 주장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밖에 없어 그 틀에서만 비판하겠습니다.기존 사학계는 이영훈 교수의 3% 성장률론을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다만 메디슨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1911년 1인당 국내 총생산은 777달러였으나 1945년 616달러로 급감합니다.이는 그간의 성장이 통계적 신기루에 지나지않았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식민지 지주제 연구 논문에 보면 자세히 나와있으니 참고할 수 있을듯합니다.물론 이 주장도 크게 보면 이영훈 교수의 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이영훈 교수 또한 남한이 한국전쟁등을 겪으며 물질적 유산을 다 잃어버리고 제도적 유산만을 물려받았다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북한의 경제 성장에 있어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그 논리가 매우 빈약합니다.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쉽게 말하면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망했다는 것인데,이렇게 논증하면 사회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포함돼있는 박정희식 경재 개발에 대한 이영훈의 설명 또한 설득력을 잃습니다.
P.S 급하게 쓰느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판해야할지 감을 못잡고 그냥 주저리 주저리 썼는데 제 주장을 잘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영훈 교수가 실증적이라며 주장하는 내용 대부분이 기존 사학계 또한 숙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뉴라이트 계열이 '허수아비'를 어떻게 때리는지는 제가 공부를 좀 보충하고나서 글 올리겠습니다.잡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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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y9108
2012.02.24 23:33:01
*.169.235.217
헐 많이 썼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올리고보니 짧네요?!?!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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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락
2012.09.11 13:53:07
*.213.123.98
우연히 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얘기가 오가던 때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위에 쓴 내용을 중언부언 할 수도 있으니 그 점은 양해 바랍니다. 일단 destiny9108님의 논지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1)이영훈의 실증분석은 취약하며 통계적 오류가 많다.
2)맹아론은 여전히 건재하다.
정도가 되겠군요. 일단 하나씩 제 의견을 써보겠습니다.
1) 일단 첫번째 논지에 대해서는 좀 장황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으나 최대한 간략하게 써봅니다. 이건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비판인데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은 통계(statistic)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통계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지고"라는 말을 정확히 고치면 "데이터 수집이 어렵거나 선택편의가 강하다"정도의 의미라고 봅니다. 사학자들을 위시하여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통계라는 말은 사실은 데이터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것 같군요. 통계라는 것은 이러한 데이터를 수집해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있는 정보들을 추출해 내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학문을 통계학(statistics)라고 부르는 것이죠. 데이터는 여러 경로로 수집됩니다. 국가차원에서 데이터를 수집하여 흔히 말하는 "통계집"에 고시할 수도 있고, 민간에 보존되어 있는 장부나 여러 기록물들로부터 추출해 낼 수도 있습니다. 통계학에 대한 훈련이 없는 분들은 반드시 국가차원의 센서스(국가 차원의 "통계"를 언급하는 경우 센서스를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가 아니면 가치가 없는것 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센서스 자료는 통계학이 다루는 주요 대상이 아닙니다. 센서스는 전수조사인데 통계학은 샘플을 통해서 전체에 대한 정보를 추정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센서스 자료가 있다면 그냥 그걸 보면 되는거지 통계학적 테크닉이 나올 여지가 없는 것이죠. 민간의 장부에 있는 자료는 빈약하기 때문에 실증적 근거가 박약하다고 하시는 분들은 통계학의 학문적 근거를 뒤엎는 발언을 하시는 겁니다. 통계학은 그런거 하라고 있는거예요. (사실 경제사학에서 쓰이는 테크닉은 통계학이라기 보다는 계량경제학적 방법론인데 그 차이를 여기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쨋든...) 계량경제학계의 대가인 Takeshi Amemiya는 주로 교과서와 비선형모형으로 유명하지만 최근 그 분은 고대 그리스 경제분석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경제사학계의 가장 대표적인 학술지인 Journal of Economic History에 나오는 논문들의 거의 대두분도 그러한 논문으로 도배가 되고 있는게 최근(그래봤자 약 20-30년 전부터의 흐름)의 추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을 개발한 Robert Fogel 시카고대 교수는 이미 노벨상을 받은지 오래죠. 한국사학 연구에서 이러한 방법론을 처음으로 도입한게 바로 이영훈 교수입니다. 2000년 이후로 이러한 논문이 나오고 있으며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영훈교수도 이 분야를 전문적으로 하신 분이 아니고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쓴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학계와 대화하면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부정확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일단 기존 사학계에는 이러한 방법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실정입니다. 이건 과거에 보았던 (즉 김용섭으로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김건태에 이르기 까지) 교차표를 만드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이거든요. 어느 정도냐 하면 사학계는 자신들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비판을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사학자들이 현학으로 곡학아세 하는걸로 비쳐질 수 있는데 그걸 떠나 결국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더 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하자면 이는 아직 한국학계가 선진국의 수준과 격차가 크기 때문에 겪는 현상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군요. 매우 답답한 상황입니다.
2)이영훈과 강만길을 비교하는 것은 맥락을 잘못 잡은 것이라고 말씀드려야 겠군요. 이영훈의 학설과 강만길의 학설은 논쟁점이 없습니다. 강만길의 논문집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틈나는대로 인용을 하고 있으며 이것을 연구의 암묵적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이영훈이 주장하는 내용을 기존 사학계도 숙지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말씀하시는건 곤란합니다. 이영훈의 학자로서의 첫번째 업적은 강만길이 아닌 김용섭을 무너뜨린것이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강만길은 김용섭 정도의 논쟁적인 대담한 학설을 제시한 것도 아닙니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핵심인 경영형부농설, 광작, 양극분해설 등등이 모두 김용섭의 것이잖아요.
3)마지막으로 일제시대의 경제성장 문제입니다. 이건 허수열교수와 논쟁중인 사안인데요, 작년 12월에 허수열씨가 새로운 책을 냈었죠. 읽어 본 소감은 이렇습니다. 일단 허수열의 주장대로 1910년대의 생산량 증가는 데이터에 의한 자료라기 보다는 책상에서 줄을 긋듯 만든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허수열의 문제제가가 타당한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순전히 엉터리라고 치부하기 힘든 이유는 당시에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고 볼 만한 여러 정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새로운 품종도입이나 당시의 신문들을 통한 정황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영훈은 1910년대의 생산량 증가를 타당하다고 보는 것이죠. 이 문제는 계속 논쟁중이니 좀 더 지켜봐야 겠군요.
1945년도에 GNP가 급감해서 일제시대에 경제성장이 없었다고 주장하는것은 동의하기 힘들군요. (허수열도 이런식으로 주장을 하죠) 이를테면 내일 남북간에 전쟁이 나서 2012년 GNP가 0이 된다고 해 보죠. 그럼 글쓰신 분은 1960년 이래의 남한의 경제성장은 없었다고 주장하실 건가요? 일제시대의 경제성장이 어떠했는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 사실 그 자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마 김낙년교수는 이 이유가 가장 중요할 것이고), 둘째로 그러한 정황을 통해서 조선민족이 어떻게 근대를 받아들였는지 그 배경이 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관심은 둘째 이유에 있는 것이죠. 이렇게 볼 때 1945년에 616달러로 급감하기 때문에 그간의 성장은 신기루였다는 주장은 그 문장이 기술적으로는 맞을 수 있어도 중요한 논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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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13:11:53
*.132.80.25
계량 경제학의 기법들을 경제사 분석할 때 사용하려면 우선은 데이터가 통계 기법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신뢰할 수 있냐의 문제가 있는데, 조선시대 데이터가 과연 그 정도로 정교한지가 의문이네요. 센서스가 아니더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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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락
2012.09.13 12:42:37
*.213.123.98
정교하다는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1)데이터에 체계적인 편의(bias)가 있거나 2)데이터의 크기가 충분히 크지 않아 통계분석이 어렵다는 의미이거나 3)변수의 측정오차가 크다는 의미인것 같군요. 첫번째 문제는 통계분석을 하기 전 충분히 지적이 가능한 문제인데 이와 관련되어서 낙성대학파의 논문이 분석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할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양반가의 일기에 나타난 가격이 체계적으로 과소평가되어 있다거나 뭐 그런걸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런건 통계를 모르는 분들도 지적할 수 있는 문제죠. 이런 문제가 지적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군요. 둘째로 관찰치의 크기는 추정량의 점근분산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설검정을 잘 모르시는것 같은데 귀무가설을 기각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강력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보통 유의수준을 5%로 묶는데 그 얘기는 귀무가설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현재 데이터가 나올 확률이 5%가 안되는 경우, 즉 그 정도로 가능성이 낮을 때만 귀무가설을 기각한다는 뜻입니다. 데이터 크기가 추정할 모수의 수와 비교해서 현저히 작으면 유의수준을 넘어서는 결과가 애초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문제가 의심되시면 논문을 꼼꼼히 읽으시면 됩니다. 세번째 문제는 extenuating bias의 문제라고 하는데 이건 유의한 효과를 유의하지 않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때문에 만약 논문이 유의함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실제로는 더욱 유의하다고 추측할 수 있는것이죠. 따라서 저자가 만약 귀무가설의 기각을 주장한다면 이건 오히려 저자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사실 수량경제사 연구에 대단한 난점으로 작용합니다. 유의한 결과를 얻어내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론을 이끌어내기 힘들지만 반대로 일단 유의한 결론이 나온다면 다른 경우보다 그 설득력이 훨씬 높아집니다. 따라서 이미 공간된 연구결과에 대해서 이 문제로 비판하신다면 오히려 낙성대측이 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이영훈씨의 전(前)통계..어쩌고 얘기는 계량분석의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지 도출된 결과의 가치없음을 얘기하는게 아닙니다. 둘을 혼동하지 말길 바랍니다.
위에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솔직하게 비유하자면 이건 초딩이 "야.. 미적분 그게 말이 되냐?"고 하는거랑 별로 다르지 않아요. 옳은 비판을 하려면 1)모형지정(model specification)에 오류가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정하거나 2)모형에 누락변수가 포함되어 있어서 내생성(endogeneity)의 문제가 있다거나.. 뭐 이런 비판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런건 도외시한채 "통계 그거 숫자놀음이야"식의 반응만 하는건 대단히 유감이군요. 그래서 요즘 이영훈 교수가 외국저널에 논문을 싣는거죠.
지금 제 옆에 그 책이 없어서 확실하게 말씀드리긴 힘들고 기억을 더듬어 얘기하자면 "수량경제사로 다시본 조선후기"에 나오는 가장 대표적인 계량경제학적 논문이 아마 한편은 박기주씨가 쓴걸로 기억하고 있고(아마 임금차이에 관한 논문인것 같은데 이건 일반적인 횡단면분석을 한거고) 다른 한편이 이영훈씨의 논문으로써 이게 각 지역별 가격추이에 관한 논문입니다. 두 편이 있는데 첫번째것이 상관계수 분석만 한거구요, 정말 걸작이 두 번째 논문인데 여기서 공적분(cointegration)회귀와 Phillips-Perron test를 하고 있어요. 솔직히 굉장히 놀랐습니다. 보통 이런건 증권업계에서 많이 쓸만한 방법인데 그러한 테크닉을 동원해서 19세기 후반 각 지방간의 미가의 관련성이 와해되고 있음을 보이고 있죠. 상당히 짧은 논문으로 기억하는데 이 논문으로 인해 19세기 후반 시장붕괴는 거의 입증되었다는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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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3 18:09:07
*.132.80.25
아 물론 제가 연구자라서 그런 논문과 데이터를 접근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하지만 저는 이 분야 연구자가 아니라서요. 별로 진지하게는 받아들이시지 마시구요.
예전에 한국서 제가 통계청 통계 조사 한 적이 있는데,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한 40집 정도 인터뷰를 받아야했는데, 시간이 안맞다보니까, 보통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왔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찾으러 가면 한 1/3이나 했나... 나머지는 제가 그럴듯하게 채웠습니다. 딴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권장하더라고요. 그렇게 기록된 통계는 결국 중산층의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게되죠.
21세기 한국의 통계도 이런데 조선시대 통계가 어떤 테스팅을 할만큼 정교할까요? 이론적으로야 뭔가 데이터가 의미가 있겠지만, 실제로도 그랬냐?는 건 잘 모르겠네요. 이영훈이 현대 역사학의 주류적 방법을 쓰는 훌륭한 학자라는 것을 알겠습니다만, 그 방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잘 알아야, 이론하고 현실하고 안헷갈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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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락
2012.09.13 22:17:56
*.165.231.176
위에서도 살짝 말을 하긴 했는데 그런 이유때문에 국가차원의 센서스 보다는 관청이나 개인이 남긴 장부나 일기에 나온 기록이 더 신뢰할만하다는 겁니다. 이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실듯. 박기주 논문에서 사용하는 의궤에 나온 기록은 일종의 거래장부이기 때문에 센서스데이터보다 그 신뢰도가 높습니다. 딱히 조선시대의 것이라고해서 무시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이영훈이 사용한 미가기록은 개인의 일기, 장부등에서 뽑아낸 데이터구요. 이런 데이터들은 법률적으로도 증거능력을 갖는다는 사실만 언급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통계조사의 문제도 사실 생각하시는것 보다 그 심각성이 그다지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확한 데이터들이 체계적인 편의(bias)를 갖지 않는다면 대수의법칙 (law of large numbers)에 의해 오차들은 서로 상쇄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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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4 15:15:57
*.132.80.25
두락/
1. 우선 통계 조사의 문제를 얘기하자면, 그 통계조사에서의 편의는 사람들의 상식에서 나온만큼 체계적인 편의를 가지고 있죠. 두번째로 대수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편의를 상쇄할만큼 샘플 갯수를 크게 키워야하는데, 비용 문제 때문에 그 정도로 크게 잡지는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중요한 문제는 안되고요.
2. 관청이나 개인이 남긴 장부나 일기가 신뢰할만하다는 게 잘 이해가 안되네요. 예를 들자면 21세기의 일류 한국 기업에서 얼마나 가짜로 장부를 많이 작성하는데요. 아니면 군대 있어보셨으면 알겠지만요. 자료라는 거 자체가 자료의 엄밀한 작성이라는 윤리적인 훈련을 받는 문화 안에서만 신뢰할 수 있게 나오는데, 아쉽게도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런 문화가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통계 자료의 신뢰성에 대한 회의는 미적분이 성립하냐 하지 않냐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그건 이론상으로 공리에서 도출 가능한 거죠. 통계 자료가 제대로 현실을 반영하냐는 것은 이론과 현실을 이어주는 매개물이 단단하냐에 관련된 것이고, 이는 오차가 정규분포를 따르냐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때 오차는 자유도가 높다는 의미에서 이론적인 오차가 아닌 현실적인 오차를 의미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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