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일본군 극비문서 입수 “일제는 한반도를 총알받이로 쓰려 했다”
입력2021.08.07.
일본 육군이 작성한 극비문서 ‘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우측 상단에 ‘극비’라고 적혀 있다./‘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 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패전을 앞두고 작성된 일본군 극비문서가 발견됐다. ‘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이라는 문서다. 제목만 보면 정례보고처럼 보인다. 하지만 총 120쪽에 달하는 내용은 모두 ‘극비’로 분류돼 있다. 전쟁 막바지 일제의 한반도 활용 계획과 침탈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문서가 다루는 지역은 현재 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마켓’, 옛 이름은 인천 일본육군조병창(부평 조병창)이다.
극비문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패전을 앞두고 작성된 일본군 극비문서가 발견됐다. ‘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이라는 문서다. 제목만 보면 정례보고처럼 보인다. 하지만 총 120쪽에 달하는 내용은 모두 ‘극비’로 분류돼 있다. 전쟁 막바지 일제의 한반도 활용 계획과 침탈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문서가 다루는 지역은 현재 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마켓’, 옛 이름은 인천 일본육군조병창(부평 조병창)이다.
극비문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조병창을 지하화한다’,
- ‘일본 도쿄 제1조병창을 부평으로 옮긴다’.
단순해 보이지만 무서운 의도가 담겼다. 일제는 부평 조병창을 지하화해 침략전쟁을 지속하려고 했다. 이와 동시에 생산시설을 부평으로 옮겨 도쿄에 집중되는 미군 폭격을 분산하고자 했다. 전쟁은 지속하되 위험은 전가하려고 한 것이다.
문서 속 계획은 실제로 진행됐다. 부평 지역 곳곳에 남은 일제시대 흔적들은 당시 계획을 그대로 반영했다. 극비문서에 첨부된 지도를 들고 부평일대를 돌면 일제 유적들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유적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 ‘무슨 용도인지’ 아무도 몰랐을 뿐이다.
원본보기극비문서에 첨부된 부평 조병창 지하화 계획 지도(왼쪽)와 현재 인천시 부평구 동일 지역의 위성사진/부평문화원 제공
문서 속 계획은 실제로 진행됐다. 부평 지역 곳곳에 남은 일제시대 흔적들은 당시 계획을 그대로 반영했다. 극비문서에 첨부된 지도를 들고 부평일대를 돌면 일제 유적들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유적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 ‘무슨 용도인지’ 아무도 몰랐을 뿐이다.
원본보기극비문서에 첨부된 부평 조병창 지하화 계획 지도(왼쪽)와 현재 인천시 부평구 동일 지역의 위성사진/부평문화원 제공
경향신문은 지난 1일 부평 조병창 유적이 철거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병원시설로 알려져 있는 일명 1780호 건물이 철거되는 이유와 그 결정과정을 밝히기 위해 부평 조병창의 역사적 가치는 후속보도로 미뤘다. 이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없는 일제시대 건물을 왜 남겨야 하느냐’는 주장도 있었다.
▶관련기사-[단독]우리 손으로 파괴하는 일제 강제동원 증거···“왜 군함도에만 분노하십니까”
지금부터는 부평 조병창 유적의 역사적 중요성을 밝힌다. 드문드문 알려진 사실들이 아닌 일제가 직접 작성한 극비문서로 확인한 내용들이다. 새롭게 공개되는 사실들은 부평 조병창 유적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다만, 현재까지 밝혀낸 사실들은 시간, 인력, 미군기지 접근성이라는 제약 속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부평에는 밝혀낸 사실보다 아직 밝혀지길 기다리는 이야기들이 더 많다.
■‘새우젓’ 토굴
지난 7월 26일, 인천 지역 한낮 날씨는 34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부평문화원 김규혁 팀장의 안내를 받아 오른 함봉산도 뜨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산 속 비탈길을 따라 걷던 김 팀장은 육군 제3보급대 뒷편이 보이는 장소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의 손가락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바위 틈 사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굳게 닫힌 철문이 있었다.
원본보기인천시 부평구 함봉산에 있는 제6호 지하호 입구/이석우 기자
---
철문을 열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이었다. 안으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시원하다”를 넘어 “쌀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굴은 별다른 전등 설비가 없었다. 김 팀장이 준비해 온 손전등을 들었다. 그는 동굴 길이는 150m 정도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왼편으로 휘어지는 구조가 특징이라고 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출구를 활짝 열어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뒷편에서 반짝이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굴 내부는 4~5명도는 나란히 걸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넓었다. 천장 높이 역시 키가 182㎝인 기자가 걷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5분쯤 더 들어가자 드디어 동굴 끝에 다다랐다. 김 팀장은 이곳에서 잠시 손전등을 끄겠다고 했다. 이내 빛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몇 초나 흘렀을까. 어느새 공간감이 사라졌다. 서 있는 곳을 가늠할 수 없자 한 발 떼는 것도 두려웠다. 제자리에 박힌 듯 가만히 서서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여기서 손전등이나 휴대폰을 놓치면 죽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잠시 후 “손전등 켜겠습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밝아졌다. “밝은 빛도, 추위를 막을 방한복도 없이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이 이곳을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원본보기제6호 지하호 내부. 왼편으로 휘어지는 구조 때문에 지하호 안으로 들어갈수록 빛은 사라진다(왼쪽), 지하호의 끝 부분/이석우 기자
이날 방문한 동굴 이름은 함봉산 제6호 지하호다. 극비문서는 이 동굴이 일제가 부평 조병창의 지하화를 위해 만든 것임을 증명한다. 함봉산 자락에는 이러한 지하호가 총 13개가 더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수치다.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제로 미군기지인 ‘캠프마켓’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발견된 지하호는 총 21개로 늘어난다. 원래 4개가 더 발견됐지만 빌라를 짓는 공사중에 파괴됐다. 만약 극비문서대로 공사가 완료됐다면 현재 확인된 것보다 3~4배 이상의 지하시설이 더 있게 된다.
---
동굴은 2016년까지 ‘새우젓’ 보관과 판매에 이용됐다. 이 때문에 지역에서는 여전히 ‘새우젓 토굴’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어른들을 중심으로 동굴이 일제와 관련됐다는 말은 있었다. 하지만 뜬소문 정도로 인식됐다. “부평 동굴이 인천항까지 연결된다”는 식의 과장된 소문은 오히려 동굴이 일제와 관련됐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낮췄다. 당시 강제동원됐던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왜 동굴을 팠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일제는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정보는 일본인들끼리 독점했던 것이다.
동굴이 일제가 만든 지하호라고 명확히 인식한 것은 2017년 무렵이다. 김 팀장이 지역 어른들과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며 조성시기를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숨겨져 있던 동굴들까지 추가로 발견했다. 하지만 정확한 용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극비문서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지하시설의 구축부터 운영까지 일제의 종합계획이 모두 담겨 있다. 문서 속 지하화 계획과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부평 조병창 건물들을 연결해 볼 때 가치는 배가된다. 전쟁 막바지, 패전에 몰린 일제의 ‘비이성적’ 구상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부평은 문서와 실제 유적이 모두 존재하는 일종의 타임캡슐과 같은 상태다.
■1945년, 본토결전 “주요 시설을 지하화하라”
오랜기간 찾을 수 없었던 자료는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서 발견됐다. 극비문서의 내용을 처음 확인한 것은 동북아역사재단 조건 연구위원이다. 그는 일본 육군일반사료 중 ‘예하부대장 회동시 병기생산 상황보고’라는 문서철 속에서 해당 문서를 찾았다. 당시 일제 병기행정본부는 관할 조병창에게 그해 생산할 군수물자의 현황과 계획, 관련 시설물 건축 등의 보고를 명령했다. 부평 조병창 역시 매년 병기행정본부에 실태 및 계획을 보고했는데 이중 1945년 3월 보고자료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조 위원은 곧바로 문서를 번역 및 분석했고, 현재 이에 관한 책과 논문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극비문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황을 살펴봐야 한다. 패전을 거듭하던 일제는 1945년 초 미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한 방어진지 구축에 나섰다. 이른바 ‘본토결전’이라는 최후의 전쟁 준비다. 일제는 방어를 위해 ‘결호작전’이라는 계획을 입안했다. 이는 작전구역을 총 7개로 나누는 것인데 이중 6개의 작전구역이 일본 본토를 둘러싸고 만들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작전구역 ‘결7호’는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 만들었다. 전쟁 막판에 이르러 한반도를 본토처럼 취급하며 전쟁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원본보기일제의 ‘결호작전’ 구역을 표시한 일본측 자료.
당시 공습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주요 시설의 지하화’였다. 이에 따라 각각의 작전 구역에서 지하화 작업이 착수됐다. 한반도에서는 미군 상륙이 예상됐던 제주도나 남서해안 일대의 지하화가 이뤄졌다. 이들 지역 산, 해안가 등에서 발견되는 인공동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한반도는 점차 커다란 벙커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되는 미군의 상륙지점과 거리가 있는 부평 조병창도 지하화가 결정됐다. 이는 부평과 제주도 일대의 지하화가 성격이 다르다는 의미다. 제주도 등이 전투가 벌어지는 진지였다면, 부평은 무기를 생산·공급하는 기지였다. 부평 조병창의 지하화는 한반도에서 계속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느냐와 직결되는 중대 사안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극비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서는 총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지하화와 관련된 항목은 네 번째 항목 제10항 ‘분산 및 방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에서 언급된다. “인천육군조병창 및 주요 민간공장의 생산 시설 중 중요한 것을 분산하고 또한 이를 지하시설로 한다”는 내용이다.
원본보기조병창 시설 지하화 계획 일정표/‘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 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극비문서에는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이는 부록에 나온다. ‘이설 분산 및 방호 등의 진척 상황’과 ‘이설 분산 방호 실시 요강’이라는 문건이다. 이곳에는 전쟁 수행을 위해 도쿄 제1조병창의 실포(탄환) 생산 설비를 부평으로 옮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제는 조선, 만주 등에서 최후까지 전투를 치르기 위해 월 150만발의 실탄 생산이 가능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부평 조병창의 생산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도쿄 제1조병창 시설을 옮기는 방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제안 수준이 아니었다. 부평으로 옮긴 도쿄 제1조병창 시설은 지하공장을 만들어 설치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월별 계획도 작성됐다. 4월 중 도쿄를 출발해 5월 중 부평에 도착하고, 연말까지 기계 설치를 마치는 일정이다. 조 위원은 “1945년 말까지 공사가 계속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8월이면 굴착공사가 마무리되는 정도였을 것”이라며 “현재 부평 지하호의 높이, 너비 등을 감안할 때 대규모 설비를 장치할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제동원으로 만든 지하호
실제로 부평 조병창을 지하화하고, 도쿄 제1조병창 시설까지 수용하려고 했다면 방대한 굴착 공사가 진행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사에 누가 참여했는지도 나와야 한다. 문서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까지 있다. 가장 중요한 지하공장 공사는 조선전업주식회사를 주축으로 가지마구미, 니시마쓰구미, 도비시마구미 등이 참여했다.
원본보기부평 조병창 시설의 지하화 계획을 각 공장별로 기재한 표/‘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 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공사에 실제 동원돼 노역을 한 것은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었다. 문서의 네 번째 항목 중 제8항 ‘근로관리’ 부분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는 조병창의 노동자 현황과 향후 동원 계획까지 상세히 기재돼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3월 1일, 부평 조병창에 소속돼 있는 전체 노동자는 총 1만1300명이었다. 이중 약 9000명이 조선인이다. 1945년도에 추가로 필요한 노동력은 제2제조소 신설에 따른 약 1500명, 지하공사 등에 따른 임시적 요원 약 3500명, 결원 보충까지 포함하면 약 8000명이다. 지하 공사 등에 필요한 임시 요원은 모두 강제동원하고, 그 외는 관 알선 및 학도 동원에 의해 충족하도록 시책 중이다. 학도 동원 이용은 다시금 활발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설제조소 요원으로 약 600명(남자 300명, 여자 300명)의 증원을 수배 중이다. 이밖에 장래는 학도로서 종업원의 반수를 확충하고자 한다. 3월 30일 현재 동원 학도 수는 약 930명으로 인천 및 경성의 주요한 중등학교는 거의 동원한 상황이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부평 조병창에는 제2제조소도 신설할 계획이었다. 건설을 위해 필요한 약 1500명과 신설제조소 요원으로 필요한 약 600명은 강제동원될 예정이었다. 지하화 공사를 위해 필요한 약 3500명은 모두 강제동원된 인원이었다. 관 알선과 학도동원도 있었다. 조 위원은 “관 알선은 총독부를 통한 모집과 소개 등의 방식을 이용한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강제동원이었다”며 “학도동원은 당시 신문에도 나왔고, 증언으로도 확인되는 바 모두 실제 실행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는 미래에 필요한 종업원 절반도 학도동원을 하기로 했다. 이미 3월 30일 당시 경성, 인천 지역 주요 중등학교 학생은 대부분 동원됐다. 이는 향후 부평 조병창에 필요한 인력을 채우기 위한 학도 동원이 다른 지방으로 확대할 것임을 암시한다. 부평 조병창이 곧 일제의 한반도 침탈사라는 것은 이곳에 전국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서는 이 사실들을 증언하고 있다.
원본보기1945년 4월부터 1946년 3월까지 조선인 강제동원 계획을 담은 표/‘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 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일제는 무엇을 노렸나
극비문서는 부평 지하호의 용도부터 이를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부평 조병창 지하화’와 ‘도쿄 제1조병창의 부평 이전’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이는 부평 조병창 지역이 미군으로부터 반환이 완료되고, 극비문서 등과 함께 추가 연구가 진행되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밝혀진 극비문서 등을 보면 일제는 전쟁 막판 한반도를 ‘총알받이’로 쓰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제가 ‘본토결전’을 외치며 쉽게 항복하지 않았던 것에는 ‘책임’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전쟁 막바지 일제와 연합군 간 협상의 주요 의제는 ‘일왕의 면책’이었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더욱 격렬한 저항이 필요했다. 신민들이 일왕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옥쇄’가 강요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키나와다. 이와 동시에 본토 밖에서 미군에게 타격을 입힐 필요가 있었다. 부평 조병창의 지하화와 무기 생산설비 보강은 한반도에서도 옥쇄와 대규모 소모전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일본 본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내세운 것이기도 하다. 일제는 19세기 후반부터 본토를 의미하는 ‘주권선’을 지키기 위해 조선 등을 일종의 방파제인 ‘이익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정립했다. 실제로 전쟁 막바지, 무기 생산시설을 한반도로 옮기고 전투를 이어나가면 방어적 측면에서 두 가지 이점이 있다. 우선 미군이 일제를 상대로 한 공격 범위가 넓어진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 집중되는 공격을 분산시켜 피해를 줄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조 위원은 한 가지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일제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연합국에 의해 영토가 분할 점령되는 최악의 순간을 모면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며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희생양으로 제공할 땅이 필요했는데 그게 한반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계획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전후 일본은 분할되지 않았지만 한반도는 연합국에 의해 분할됐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원본보기동북아역사재단 조건 연구위원. 일본육군이 작성한 극비문서를 해석 및 분석했다/박민규 선임기자
철문을 열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이었다. 안으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시원하다”를 넘어 “쌀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굴은 별다른 전등 설비가 없었다. 김 팀장이 준비해 온 손전등을 들었다. 그는 동굴 길이는 150m 정도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왼편으로 휘어지는 구조가 특징이라고 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출구를 활짝 열어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뒷편에서 반짝이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굴 내부는 4~5명도는 나란히 걸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넓었다. 천장 높이 역시 키가 182㎝인 기자가 걷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5분쯤 더 들어가자 드디어 동굴 끝에 다다랐다. 김 팀장은 이곳에서 잠시 손전등을 끄겠다고 했다. 이내 빛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몇 초나 흘렀을까. 어느새 공간감이 사라졌다. 서 있는 곳을 가늠할 수 없자 한 발 떼는 것도 두려웠다. 제자리에 박힌 듯 가만히 서서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여기서 손전등이나 휴대폰을 놓치면 죽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잠시 후 “손전등 켜겠습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밝아졌다. “밝은 빛도, 추위를 막을 방한복도 없이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이 이곳을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원본보기제6호 지하호 내부. 왼편으로 휘어지는 구조 때문에 지하호 안으로 들어갈수록 빛은 사라진다(왼쪽), 지하호의 끝 부분/이석우 기자
이날 방문한 동굴 이름은 함봉산 제6호 지하호다. 극비문서는 이 동굴이 일제가 부평 조병창의 지하화를 위해 만든 것임을 증명한다. 함봉산 자락에는 이러한 지하호가 총 13개가 더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수치다.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제로 미군기지인 ‘캠프마켓’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발견된 지하호는 총 21개로 늘어난다. 원래 4개가 더 발견됐지만 빌라를 짓는 공사중에 파괴됐다. 만약 극비문서대로 공사가 완료됐다면 현재 확인된 것보다 3~4배 이상의 지하시설이 더 있게 된다.
---
동굴은 2016년까지 ‘새우젓’ 보관과 판매에 이용됐다. 이 때문에 지역에서는 여전히 ‘새우젓 토굴’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어른들을 중심으로 동굴이 일제와 관련됐다는 말은 있었다. 하지만 뜬소문 정도로 인식됐다. “부평 동굴이 인천항까지 연결된다”는 식의 과장된 소문은 오히려 동굴이 일제와 관련됐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낮췄다. 당시 강제동원됐던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왜 동굴을 팠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일제는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정보는 일본인들끼리 독점했던 것이다.
동굴이 일제가 만든 지하호라고 명확히 인식한 것은 2017년 무렵이다. 김 팀장이 지역 어른들과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며 조성시기를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숨겨져 있던 동굴들까지 추가로 발견했다. 하지만 정확한 용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극비문서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지하시설의 구축부터 운영까지 일제의 종합계획이 모두 담겨 있다. 문서 속 지하화 계획과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부평 조병창 건물들을 연결해 볼 때 가치는 배가된다. 전쟁 막바지, 패전에 몰린 일제의 ‘비이성적’ 구상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부평은 문서와 실제 유적이 모두 존재하는 일종의 타임캡슐과 같은 상태다.
■1945년, 본토결전 “주요 시설을 지하화하라”
오랜기간 찾을 수 없었던 자료는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서 발견됐다. 극비문서의 내용을 처음 확인한 것은 동북아역사재단 조건 연구위원이다. 그는 일본 육군일반사료 중 ‘예하부대장 회동시 병기생산 상황보고’라는 문서철 속에서 해당 문서를 찾았다. 당시 일제 병기행정본부는 관할 조병창에게 그해 생산할 군수물자의 현황과 계획, 관련 시설물 건축 등의 보고를 명령했다. 부평 조병창 역시 매년 병기행정본부에 실태 및 계획을 보고했는데 이중 1945년 3월 보고자료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조 위원은 곧바로 문서를 번역 및 분석했고, 현재 이에 관한 책과 논문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극비문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황을 살펴봐야 한다. 패전을 거듭하던 일제는 1945년 초 미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한 방어진지 구축에 나섰다. 이른바 ‘본토결전’이라는 최후의 전쟁 준비다. 일제는 방어를 위해 ‘결호작전’이라는 계획을 입안했다. 이는 작전구역을 총 7개로 나누는 것인데 이중 6개의 작전구역이 일본 본토를 둘러싸고 만들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작전구역 ‘결7호’는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 만들었다. 전쟁 막판에 이르러 한반도를 본토처럼 취급하며 전쟁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원본보기일제의 ‘결호작전’ 구역을 표시한 일본측 자료.
당시 공습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주요 시설의 지하화’였다. 이에 따라 각각의 작전 구역에서 지하화 작업이 착수됐다. 한반도에서는 미군 상륙이 예상됐던 제주도나 남서해안 일대의 지하화가 이뤄졌다. 이들 지역 산, 해안가 등에서 발견되는 인공동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한반도는 점차 커다란 벙커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되는 미군의 상륙지점과 거리가 있는 부평 조병창도 지하화가 결정됐다. 이는 부평과 제주도 일대의 지하화가 성격이 다르다는 의미다. 제주도 등이 전투가 벌어지는 진지였다면, 부평은 무기를 생산·공급하는 기지였다. 부평 조병창의 지하화는 한반도에서 계속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느냐와 직결되는 중대 사안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극비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서는 총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지하화와 관련된 항목은 네 번째 항목 제10항 ‘분산 및 방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에서 언급된다. “인천육군조병창 및 주요 민간공장의 생산 시설 중 중요한 것을 분산하고 또한 이를 지하시설로 한다”는 내용이다.
원본보기조병창 시설 지하화 계획 일정표/‘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 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극비문서에는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이는 부록에 나온다. ‘이설 분산 및 방호 등의 진척 상황’과 ‘이설 분산 방호 실시 요강’이라는 문건이다. 이곳에는 전쟁 수행을 위해 도쿄 제1조병창의 실포(탄환) 생산 설비를 부평으로 옮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제는 조선, 만주 등에서 최후까지 전투를 치르기 위해 월 150만발의 실탄 생산이 가능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부평 조병창의 생산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도쿄 제1조병창 시설을 옮기는 방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제안 수준이 아니었다. 부평으로 옮긴 도쿄 제1조병창 시설은 지하공장을 만들어 설치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월별 계획도 작성됐다. 4월 중 도쿄를 출발해 5월 중 부평에 도착하고, 연말까지 기계 설치를 마치는 일정이다. 조 위원은 “1945년 말까지 공사가 계속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8월이면 굴착공사가 마무리되는 정도였을 것”이라며 “현재 부평 지하호의 높이, 너비 등을 감안할 때 대규모 설비를 장치할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제동원으로 만든 지하호
실제로 부평 조병창을 지하화하고, 도쿄 제1조병창 시설까지 수용하려고 했다면 방대한 굴착 공사가 진행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사에 누가 참여했는지도 나와야 한다. 문서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까지 있다. 가장 중요한 지하공장 공사는 조선전업주식회사를 주축으로 가지마구미, 니시마쓰구미, 도비시마구미 등이 참여했다.
원본보기부평 조병창 시설의 지하화 계획을 각 공장별로 기재한 표/‘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 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공사에 실제 동원돼 노역을 한 것은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었다. 문서의 네 번째 항목 중 제8항 ‘근로관리’ 부분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는 조병창의 노동자 현황과 향후 동원 계획까지 상세히 기재돼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3월 1일, 부평 조병창에 소속돼 있는 전체 노동자는 총 1만1300명이었다. 이중 약 9000명이 조선인이다. 1945년도에 추가로 필요한 노동력은 제2제조소 신설에 따른 약 1500명, 지하공사 등에 따른 임시적 요원 약 3500명, 결원 보충까지 포함하면 약 8000명이다. 지하 공사 등에 필요한 임시 요원은 모두 강제동원하고, 그 외는 관 알선 및 학도 동원에 의해 충족하도록 시책 중이다. 학도 동원 이용은 다시금 활발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설제조소 요원으로 약 600명(남자 300명, 여자 300명)의 증원을 수배 중이다. 이밖에 장래는 학도로서 종업원의 반수를 확충하고자 한다. 3월 30일 현재 동원 학도 수는 약 930명으로 인천 및 경성의 주요한 중등학교는 거의 동원한 상황이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부평 조병창에는 제2제조소도 신설할 계획이었다. 건설을 위해 필요한 약 1500명과 신설제조소 요원으로 필요한 약 600명은 강제동원될 예정이었다. 지하화 공사를 위해 필요한 약 3500명은 모두 강제동원된 인원이었다. 관 알선과 학도동원도 있었다. 조 위원은 “관 알선은 총독부를 통한 모집과 소개 등의 방식을 이용한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강제동원이었다”며 “학도동원은 당시 신문에도 나왔고, 증언으로도 확인되는 바 모두 실제 실행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는 미래에 필요한 종업원 절반도 학도동원을 하기로 했다. 이미 3월 30일 당시 경성, 인천 지역 주요 중등학교 학생은 대부분 동원됐다. 이는 향후 부평 조병창에 필요한 인력을 채우기 위한 학도 동원이 다른 지방으로 확대할 것임을 암시한다. 부평 조병창이 곧 일제의 한반도 침탈사라는 것은 이곳에 전국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서는 이 사실들을 증언하고 있다.
원본보기1945년 4월부터 1946년 3월까지 조선인 강제동원 계획을 담은 표/‘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 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일제는 무엇을 노렸나
극비문서는 부평 지하호의 용도부터 이를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부평 조병창 지하화’와 ‘도쿄 제1조병창의 부평 이전’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이는 부평 조병창 지역이 미군으로부터 반환이 완료되고, 극비문서 등과 함께 추가 연구가 진행되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밝혀진 극비문서 등을 보면 일제는 전쟁 막판 한반도를 ‘총알받이’로 쓰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제가 ‘본토결전’을 외치며 쉽게 항복하지 않았던 것에는 ‘책임’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전쟁 막바지 일제와 연합군 간 협상의 주요 의제는 ‘일왕의 면책’이었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더욱 격렬한 저항이 필요했다. 신민들이 일왕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옥쇄’가 강요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키나와다. 이와 동시에 본토 밖에서 미군에게 타격을 입힐 필요가 있었다. 부평 조병창의 지하화와 무기 생산설비 보강은 한반도에서도 옥쇄와 대규모 소모전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일본 본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내세운 것이기도 하다. 일제는 19세기 후반부터 본토를 의미하는 ‘주권선’을 지키기 위해 조선 등을 일종의 방파제인 ‘이익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정립했다. 실제로 전쟁 막바지, 무기 생산시설을 한반도로 옮기고 전투를 이어나가면 방어적 측면에서 두 가지 이점이 있다. 우선 미군이 일제를 상대로 한 공격 범위가 넓어진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 집중되는 공격을 분산시켜 피해를 줄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조 위원은 한 가지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일제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연합국에 의해 영토가 분할 점령되는 최악의 순간을 모면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며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희생양으로 제공할 땅이 필요했는데 그게 한반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계획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전후 일본은 분할되지 않았지만 한반도는 연합국에 의해 분할됐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원본보기동북아역사재단 조건 연구위원. 일본육군이 작성한 극비문서를 해석 및 분석했다/박민규 선임기자
--
일제가 정말 끝까지 싸우려고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도쿄 제1조병창 시설을 부평으로 옮겨 한반도에서 장기항쟁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경우 식민지 조선은 침략행위와 관계가 없음에도 일제의 전쟁책임을 떠안게 된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은 “당시 일제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한반도로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해 전력을 한반도에 집중시키려 했다”며 “일제 입장에서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전쟁에 총알받이로 던져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는 부평 조병창 지하화를 실행하며 방공부대나 방공망, 방공시설 등을 사실상 아무것도 배치하지 않았다. 당시 부평이 포함되는 인천지역에는 고사포 제151연대 1개 중대가 배치됐다. 이들이 보유한 방공 병기는 고작 고사포 6문뿐이었다. 강제동원된 노동자가 폭격으로 사망하는 경우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일제의 의도를 분석하며 마지막으로 주목해봐야 할 것은 극비문서의 제목이다. ‘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예하부대장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고 상황보고를 했을 정도로 조병창의 지하화, 도쿄 시설의 이전은 진척된 단계였다는 점이다. 최소 1945년 3월 이전에 이미 결정권자들은 관련 판단을 내렸다는 의미도 된다. 이는 일제가 패전에 대한 위기감을 언제, 어느 정도로 느끼고 있었는지를 엿보게 한다.
또 상황보고 문서가 있다는 것은 1945년 3월뿐만 아니라 4월, 5월 하는 식으로 문서가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는 전후 만행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주요 문서를 대부분 소각했다. 하지만 해당 문서처럼 평범한 제목으로 또, 문서철 속에 끼워져 보관되고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조 위원이 극비문서를 확보한 것은 그곳에 해당 문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다 사라졌겠지”라는 생각보다 증거 확보를 위한 노력이 권장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앞으로 한국은 피해 당사자 없이 일본과 역사문제를 다퉈야 한다.
■부평 조병창의 가치
지난 경향신문 보도 후 ‘부평 조병창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특히, 인터넷 부동산 카페 등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곳도 아닌데 왜 일본군 건물을 남겨두느냐’, ‘역사적 가치가 있느냐’는 논리로 비판했다. 이들은 해당 부지에 ‘호수 공원’을 만들어 이른바 ‘부평 센트럴파크’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센트럴파크’ 이야기는 이 지역 국회의원 홍영표 의원의 총선 공약이기도 하다. 하지만 홍 의원은 조병창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도 동시에 공약한 바 있다.
우선, 부평 조병창이 독립운동을 한 곳이냐는 지적이다. 조병창에는 독립투사의 흔적이 있다. 조병창 한켠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종이를 붙였던 인천공업직업학교 2학년 양재형. 조병창의 무기조작기술을 습득해 독립운동을 하려고 잠입했다가 체포된 오순환. 1943년 조병창 내에서 고려재건당을 조직하고 이듬해 권총과 실탄을 입수해 임시정부에 인도하려다 붙잡힌 황장연이 있다. 정 위원은 “조병창은 무기, 폭파 기술 등을 다루는 곳이다 보니 위장 취업을 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특히, 황장연 선생과 같이 임시정부 또는 항일독립단체와 연결된 인물이 조병창 내에서 더 활동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역사적 사실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평 조병창이 역사적 가치가 있느냐 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극비문서를 통해 밝힌 것처럼 이곳이 전쟁 막바지 일제의 한반도 활용계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특히, 문서와 관련 유적이 동시에 남아 있는 경우는 부평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병창 건물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일본 기업 대부분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건설 과정에 대한 조사가 진행된다면 향후 이들에 대한 소송도 충분히 가능하다.
부평 지역에 얽힌 안타까운 이유도 있다. 정 위원은 “일제강제동원위원회가 피해 접수를 받았던 당시, 부평지역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었다”며 “이는 스스로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다는 독특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일제는 부평지역 사람들을 조병창에 강제동원하며 “너희는 단순 노동자가 아닌 기술자”라고 주입했다. 그 결과, 스스로 피해자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조병창 역사를 밝히는 것은 늦게나마 이들의 피해사실을 객관화한다는 역사적 의미도 갖는다.
부평 조병창의 보존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모든 건물을 영원히 남겨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조병창 일대는 2019년에야 미군으로부터 일부 지역 반환이 이뤄졌다. 이마저도 환경정화 등을 이유로 제대로 조사 한번 하지 못했다. 미군으로부터 아직 반환되지 않은 곳에는 무엇이 더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들의 주장은 적어도 건물들이 온전한 상태에서 한 번이라도 조사를 해보자는 것이다.
취재 중 만난 10여명의 역사 전문가들에게 공통적으로 “건물을 철거하기 전에 기록을 하거나 향후 복원을 해서 조사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그런 식의 조사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특히, 부평 지하호와 조병창의 관계를 밝혀낸 조 위원은 “부평 조병창을 철거하고 지하호만 남겨둔다면 그게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핑퐁게임의 진실
경향신문 보도 후 문화재청은 지난 2일 부평 조병창 지역을 다시 방문했다. 문화재청은 철거가 예정된 1780호 건물을 확인하고 인천시에 ‘철거를 유예하라’고 요청했다.
원본보기철거가 예정된 1780호 건물을 확인한 문화재청은 인천시에 ‘보존 및 철거를 유예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인천시 관계자는 “문화재청 공문은 접수받았다. 딱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철거결정은 여전히 ‘인천시가 아닌 국방부 결정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주한미군 특별법) 제12조를 근거로 제시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국방부에 오염제거 책임이 있다”며 “건물철거 결정은 국방부에서 한 게 맞다”고 말했다. 또 철거 일정에 대한 물음에는 “잘 모른다. 작업일정은 환경공단과 국방부가 협의해서 진행하기 때문에 우리도 수시로 확인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에도 다시 입장을 물었다. 국방부는 서면답변으로 “존치, 철거 여부 결정 권한은 국방부에 없다. 법에 따라 오염된 지상물·지하매설물은 지자체의 활용여부에 따라 철거가 이루어지는 체계다”고 답변했다. 여기서 지자체는 인천시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국방부가 인용한 법 역시 주한미군 특별법 제12조라는 점이다. 즉, 두 기관이 똑같은 법을 방패로 “우리가 철거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경향신문은 두 기관의 끝나지 않는 ‘핑퐁게임’의 원인을 찾기 위해 각각의 기관이 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부터 되짚어 봤다. 그 결과, 차이가 발견됐다. 해당 법 제12조의 예외조항 해석이다. 이는 국방부장관은 미군으로부터 반환된 토지에서 오염 등을 제거해야 하는데 ‘사업시행자가 지상물 또는 지하매설물의 계속 활용을 희망하는 경우에는 제거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해당 조항을 두고 “법에 나와 있는대로 지자체가 건물을 계속 활용하겠다고 하는 경우 무상으로 그대로 양여하게 된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국방부 마음대로 건물을 철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결국, 인천시의 의사에 따라 철거나 존치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인천시는 ‘활용계획’이라는 제목으로 국방부에 의견을 전달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최근에 나간 활용계획은 국방부에서 건물을 존치하면서 정화가 어렵다고 하니, 시민참여위원회에서 결정한 ‘철거의견’을 반영해 활용계획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중간 정리가 필요하다. 우선, 법에는 1780호 건물을 철거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조항이 있다. 국방부는 해당 예외조항에 따라 인천시가 ‘철거하지 말라’고 한다면 무상양여 한다는 입장이다. 인천시는 시민참여위원회 의견을 반영해 ‘철거하라’는 내용의 활용계획을 보냈다. 그렇다면, 인천시는 어떻게 ‘철거결정은 우리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인천시 관계자는 “법에는 국방부가 오염을 제거해야 ‘한다’로 나오고, 건물을 계속 활용하기 희망하는 경우에는 제거하지 ‘아니할 수 있다’로 나온다”며 “아니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활용계획은 참고사항일 뿐이고 결정은 국방부가 하는 것으로 우리는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인천시는 의견만 전달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국방부는 인천시가 철거하라고 활용계획을 전달했기 때문에 결정을 인천시가 했다는 것이고, 인천시는 활용계획은 단순 참고사항일 뿐이기 때문에 결정을 국방부가 했다는 것이다. 두 기관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취재 시작 이후 양쪽 모두 “상대가 오해할까 염려스럽다”고 했다. 두 기관이 상대를 배려하는 사이 아무도 철거를 결정하지 않은 건물만 사라질 위기다. 문제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양측 입장의 차이를 경향신문이 우선 정리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1780호 건물은 여전히 철거 위험 속에 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방부는 “문화재청으로부터 ‘철거유예’ 요청을 받았고, 관련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8월 9일로 예정됐던 건물의 석면제거 작업은 연기됐고, 이에 따라 20일로 예정된 철거 일정도 유예됐다”고 밝혔다.
이같은 결정을 이끌어 낸 것은 국민들의 관심 덕분이다. 실제로 경향신문 기사가 보도되고 하루 뒤인 지난 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인천시는 조병창 건물을 철거하지 말라’는 내용의 청원이 올라왔다. 해당 글은 정식 청원으로 채택돼 현재 ‘청원진행중’인 상태다. 인천 시민들의 관심도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과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제19회 ‘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공모전을 개최했는데 인천에서 신청된 3곳 중 ‘부평미군기지 조병창 병원(1780호 건물)’이 포함됐다.
기성세대가 후세대에게 남겨줘야 할 것은 호수가 있는 공원만이 아니다. 두 번 다시 반복하지 말아야 할 침략전쟁의 증거와 교훈은 호수 이상의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국 역사를 배우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적을 보호한 해당 지역 주민들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1780호 건물은 아무도 철거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경향신문은 해당 건물의 운명을 끝까지 기록할 예정이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일제가 정말 끝까지 싸우려고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도쿄 제1조병창 시설을 부평으로 옮겨 한반도에서 장기항쟁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경우 식민지 조선은 침략행위와 관계가 없음에도 일제의 전쟁책임을 떠안게 된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은 “당시 일제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한반도로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해 전력을 한반도에 집중시키려 했다”며 “일제 입장에서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전쟁에 총알받이로 던져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는 부평 조병창 지하화를 실행하며 방공부대나 방공망, 방공시설 등을 사실상 아무것도 배치하지 않았다. 당시 부평이 포함되는 인천지역에는 고사포 제151연대 1개 중대가 배치됐다. 이들이 보유한 방공 병기는 고작 고사포 6문뿐이었다. 강제동원된 노동자가 폭격으로 사망하는 경우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일제의 의도를 분석하며 마지막으로 주목해봐야 할 것은 극비문서의 제목이다. ‘1945년 3월 예하부대장 회동시 상황보고, 인천육군조병창’.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예하부대장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고 상황보고를 했을 정도로 조병창의 지하화, 도쿄 시설의 이전은 진척된 단계였다는 점이다. 최소 1945년 3월 이전에 이미 결정권자들은 관련 판단을 내렸다는 의미도 된다. 이는 일제가 패전에 대한 위기감을 언제, 어느 정도로 느끼고 있었는지를 엿보게 한다.
또 상황보고 문서가 있다는 것은 1945년 3월뿐만 아니라 4월, 5월 하는 식으로 문서가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는 전후 만행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주요 문서를 대부분 소각했다. 하지만 해당 문서처럼 평범한 제목으로 또, 문서철 속에 끼워져 보관되고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조 위원이 극비문서를 확보한 것은 그곳에 해당 문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다 사라졌겠지”라는 생각보다 증거 확보를 위한 노력이 권장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앞으로 한국은 피해 당사자 없이 일본과 역사문제를 다퉈야 한다.
■부평 조병창의 가치
지난 경향신문 보도 후 ‘부평 조병창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특히, 인터넷 부동산 카페 등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곳도 아닌데 왜 일본군 건물을 남겨두느냐’, ‘역사적 가치가 있느냐’는 논리로 비판했다. 이들은 해당 부지에 ‘호수 공원’을 만들어 이른바 ‘부평 센트럴파크’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센트럴파크’ 이야기는 이 지역 국회의원 홍영표 의원의 총선 공약이기도 하다. 하지만 홍 의원은 조병창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도 동시에 공약한 바 있다.
우선, 부평 조병창이 독립운동을 한 곳이냐는 지적이다. 조병창에는 독립투사의 흔적이 있다. 조병창 한켠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종이를 붙였던 인천공업직업학교 2학년 양재형. 조병창의 무기조작기술을 습득해 독립운동을 하려고 잠입했다가 체포된 오순환. 1943년 조병창 내에서 고려재건당을 조직하고 이듬해 권총과 실탄을 입수해 임시정부에 인도하려다 붙잡힌 황장연이 있다. 정 위원은 “조병창은 무기, 폭파 기술 등을 다루는 곳이다 보니 위장 취업을 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특히, 황장연 선생과 같이 임시정부 또는 항일독립단체와 연결된 인물이 조병창 내에서 더 활동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역사적 사실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평 조병창이 역사적 가치가 있느냐 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극비문서를 통해 밝힌 것처럼 이곳이 전쟁 막바지 일제의 한반도 활용계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특히, 문서와 관련 유적이 동시에 남아 있는 경우는 부평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병창 건물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일본 기업 대부분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건설 과정에 대한 조사가 진행된다면 향후 이들에 대한 소송도 충분히 가능하다.
부평 지역에 얽힌 안타까운 이유도 있다. 정 위원은 “일제강제동원위원회가 피해 접수를 받았던 당시, 부평지역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었다”며 “이는 스스로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다는 독특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일제는 부평지역 사람들을 조병창에 강제동원하며 “너희는 단순 노동자가 아닌 기술자”라고 주입했다. 그 결과, 스스로 피해자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조병창 역사를 밝히는 것은 늦게나마 이들의 피해사실을 객관화한다는 역사적 의미도 갖는다.
부평 조병창의 보존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모든 건물을 영원히 남겨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조병창 일대는 2019년에야 미군으로부터 일부 지역 반환이 이뤄졌다. 이마저도 환경정화 등을 이유로 제대로 조사 한번 하지 못했다. 미군으로부터 아직 반환되지 않은 곳에는 무엇이 더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들의 주장은 적어도 건물들이 온전한 상태에서 한 번이라도 조사를 해보자는 것이다.
취재 중 만난 10여명의 역사 전문가들에게 공통적으로 “건물을 철거하기 전에 기록을 하거나 향후 복원을 해서 조사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그런 식의 조사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특히, 부평 지하호와 조병창의 관계를 밝혀낸 조 위원은 “부평 조병창을 철거하고 지하호만 남겨둔다면 그게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핑퐁게임의 진실
경향신문 보도 후 문화재청은 지난 2일 부평 조병창 지역을 다시 방문했다. 문화재청은 철거가 예정된 1780호 건물을 확인하고 인천시에 ‘철거를 유예하라’고 요청했다.
원본보기철거가 예정된 1780호 건물을 확인한 문화재청은 인천시에 ‘보존 및 철거를 유예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인천시 관계자는 “문화재청 공문은 접수받았다. 딱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철거결정은 여전히 ‘인천시가 아닌 국방부 결정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주한미군 특별법) 제12조를 근거로 제시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국방부에 오염제거 책임이 있다”며 “건물철거 결정은 국방부에서 한 게 맞다”고 말했다. 또 철거 일정에 대한 물음에는 “잘 모른다. 작업일정은 환경공단과 국방부가 협의해서 진행하기 때문에 우리도 수시로 확인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에도 다시 입장을 물었다. 국방부는 서면답변으로 “존치, 철거 여부 결정 권한은 국방부에 없다. 법에 따라 오염된 지상물·지하매설물은 지자체의 활용여부에 따라 철거가 이루어지는 체계다”고 답변했다. 여기서 지자체는 인천시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국방부가 인용한 법 역시 주한미군 특별법 제12조라는 점이다. 즉, 두 기관이 똑같은 법을 방패로 “우리가 철거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경향신문은 두 기관의 끝나지 않는 ‘핑퐁게임’의 원인을 찾기 위해 각각의 기관이 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부터 되짚어 봤다. 그 결과, 차이가 발견됐다. 해당 법 제12조의 예외조항 해석이다. 이는 국방부장관은 미군으로부터 반환된 토지에서 오염 등을 제거해야 하는데 ‘사업시행자가 지상물 또는 지하매설물의 계속 활용을 희망하는 경우에는 제거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해당 조항을 두고 “법에 나와 있는대로 지자체가 건물을 계속 활용하겠다고 하는 경우 무상으로 그대로 양여하게 된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국방부 마음대로 건물을 철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결국, 인천시의 의사에 따라 철거나 존치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인천시는 ‘활용계획’이라는 제목으로 국방부에 의견을 전달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최근에 나간 활용계획은 국방부에서 건물을 존치하면서 정화가 어렵다고 하니, 시민참여위원회에서 결정한 ‘철거의견’을 반영해 활용계획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중간 정리가 필요하다. 우선, 법에는 1780호 건물을 철거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조항이 있다. 국방부는 해당 예외조항에 따라 인천시가 ‘철거하지 말라’고 한다면 무상양여 한다는 입장이다. 인천시는 시민참여위원회 의견을 반영해 ‘철거하라’는 내용의 활용계획을 보냈다. 그렇다면, 인천시는 어떻게 ‘철거결정은 우리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인천시 관계자는 “법에는 국방부가 오염을 제거해야 ‘한다’로 나오고, 건물을 계속 활용하기 희망하는 경우에는 제거하지 ‘아니할 수 있다’로 나온다”며 “아니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활용계획은 참고사항일 뿐이고 결정은 국방부가 하는 것으로 우리는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인천시는 의견만 전달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국방부는 인천시가 철거하라고 활용계획을 전달했기 때문에 결정을 인천시가 했다는 것이고, 인천시는 활용계획은 단순 참고사항일 뿐이기 때문에 결정을 국방부가 했다는 것이다. 두 기관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취재 시작 이후 양쪽 모두 “상대가 오해할까 염려스럽다”고 했다. 두 기관이 상대를 배려하는 사이 아무도 철거를 결정하지 않은 건물만 사라질 위기다. 문제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양측 입장의 차이를 경향신문이 우선 정리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1780호 건물은 여전히 철거 위험 속에 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방부는 “문화재청으로부터 ‘철거유예’ 요청을 받았고, 관련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8월 9일로 예정됐던 건물의 석면제거 작업은 연기됐고, 이에 따라 20일로 예정된 철거 일정도 유예됐다”고 밝혔다.
이같은 결정을 이끌어 낸 것은 국민들의 관심 덕분이다. 실제로 경향신문 기사가 보도되고 하루 뒤인 지난 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인천시는 조병창 건물을 철거하지 말라’는 내용의 청원이 올라왔다. 해당 글은 정식 청원으로 채택돼 현재 ‘청원진행중’인 상태다. 인천 시민들의 관심도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과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제19회 ‘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공모전을 개최했는데 인천에서 신청된 3곳 중 ‘부평미군기지 조병창 병원(1780호 건물)’이 포함됐다.
기성세대가 후세대에게 남겨줘야 할 것은 호수가 있는 공원만이 아니다. 두 번 다시 반복하지 말아야 할 침략전쟁의 증거와 교훈은 호수 이상의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국 역사를 배우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적을 보호한 해당 지역 주민들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1780호 건물은 아무도 철거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경향신문은 해당 건물의 운명을 끝까지 기록할 예정이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