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항쟁’은 ‘동학난’으로 표기되어야 합니다.>
- “근대에의 거부와 저항”을 위한 서사조작을 비판하며
먼저 Park Yuha선생님께서 “일제강점기”용어에 대한 저의 제안과 비판에 공감해주시고 반론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봉준이 들고 일어난 것은 당시 백성의 고혈을 짜내던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을 징취하자는 것이었지만 봉건제도 개혁과 같은 청사진은 제시되지 못했습니다. 전봉준이 썼다고 하는 <무장창의문茂長倡義文>은 전형적인 유교 관념에 입각한 “나쁜 놈들을 임금이 처단해주시오” 하는 내용이며, 이는 기원전 202년에 세워진 중국 한나라 문경의 치세를 바라는, 당시 선비와 유학자의 전형적인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근거일 뿐입니다. 동학난을 동학농민운동과 항쟁으로 날조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또한 1940년 오지영(吳知泳) 쓴 <동학사>에 나오는 내용으로 소설에 등장한 것을 마치 사실처럼 착각하게 하는 대표적인 거짓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초 평안도에서의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조선의 통치질서는 뚜렷하게 무너지며 왕조체제의 모순이 극한에 다다랐고, 백성들이 저항하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동학 이전부터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크고 작은 민란이 대략 100차례 이상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동학은 그 마지막 임계점이었습니다. 고종이 청나라에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을 보내달라는 요청으로 온 스물 세살의 원세개가 총독으로서 부임한 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에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 12년의 청나라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 각지에서 자원이 수탈되고 내부적으로 어떤 개혁도 추진하지 못했던 시기에 참고 참아왔던 농민들의 분노가 응축되어 터져나온 민란이 동학난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중앙군인 경군이 동학 농민들의 민란을 진압하지 못해 고종이 청에 파병을 요청했을 때, 고종은 당시 국제정세에서 이 판단의 결과가 무엇을 초래할지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이나 숙고를 했었을까요? 제가 보기에 이때의 결정으로 인한 결과는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당시 조선이 이제는 청나라만이 아니라 일본제국, 러시아제국, 대영제국 등 열강들의 전략적 이익과 패권다툼을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끌어들인 상황을 촉발시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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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에서 식민지가 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에 왔던 3000명의 청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납치하고 간 이후에 1894년 일청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총 12년 동안입니다. 이 기간 동안 청나라가 조공국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억지 차관으로 빚을 지게 하고 온갖 이권을 빼앗아가고 양민을 괴롭히고 강간하는 내용들이 많은데 저에게 의문은, 왜 우리는 부전 조약이나 국제연합의 보편적 인권수호 개념이 생기기 전에 일어난 어떠한 국제법적 근거나 담론으로도 불법성을 주장할 수 없는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만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대체 어떤 국가의 관점에서 당시 일본제국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까? 왜 청나라 식민 치하의 원세개 총독(監國大臣)이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고 벌였던 끔찍했던 행위들은 말하지 않고 왜 청나라와 러시아제국의 관점에서 일본제국을 바라봤던 그 관점과 정서에 이입해서 당시 상황을 해석하고 있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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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밀려오는 1894년 11월 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동학난은 이렇게 청나라의 파병 소식을 알고 먼저 들어온 조일연합군에게 죽창과 농기구를 들고 저항하며 이로인해 총 3만 6천 명이 공주 우금치에서 미국제 신식화기 앞에 도륙당함으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이때 사망한 일본군은 단 1명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우금치 전투”로 평가하기 보다는 사실 동학 농민군 지도부가 조선 경군의 기관총 앞으로 농민들을 유인 학살한 사건이자 일방적인 도륙으로 보는 것이 맞다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안타깝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에 저항하고 전근대적 지배질서와 엘리트들의 거짓 선동에 세뇌당한 백성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비극이자 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거짓과 선동은 2021년의 한국에서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일본이 구축하고 남긴 적산과 일제시대에 국제화된 교육을 받은 인적자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바탕에서 기적과도 같은 경제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모던, 근대화, 산업화에 대한 상식적인 개념의 긍정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반일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근대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 386운동권을 중심으로 사회, 교육, 시민단체 등을 통해 꾸준히 세뇌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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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현재의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개념으로 볼 때는 동상을 세워 기릴 영웅이 아닙니다. 일본과 서구의 근대적 무기체계를 이해하지 못한채 현실의 모순에 분노하며 봉기한 농민들을 대량 학살로 유인한 어리석은 학살의 유인자(collaborator)일 뿐입니다. 청나라의 졸개에 불과한 고종과 민비를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이 배후에서 전봉준을 이용해 획책한 기획된 민란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동학난은 전근대 의식구조에 기인한 봉기가 가진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었던 사건으로서, 현재의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는 전근대 민란으로 규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권이 선동하는 독립운동 이미지 표상도 문제가 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과거 3·1절을 맞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독립문 앞에서 (일제로부터의)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재현했던 그 모습 말입니다. 마치 일본 순사가 든 근대 무기 앞에 태극기를 든 인민들이 궐기하는 모습으로 재현되었었죠. 그것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과 팽창적 국제질서 속에서, 독립문을 세운 사상과 이념이었던 근대국가와 시민 공화정을 꿈꾸고 추구했다는 차원의 비전을 모으는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본 제국근대로 표상되는 근대에 대한 저항과 거부를 촉구하며 근대화기 앞에 목숨을 걸고 죽음을 선동하는 듯한 위험한 표상조작의 프로파간다였다라는 것을 저는 밝히고 이것이 매우 대단히 위험하며 잘못된 선동이라고 비판하고 싶습니다.
죽창과 농기구를 들고 참전한 농민들은 전봉준, 김개남 등 지도부가 말한 대로 동학 부적을 가슴팍에 붙였습니다. 총탄이 날아와도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고 주문을 외우며 돌격하면 총알도 피해갈 것이라는 동학 지도부의 말을 농민들은 믿었습니다. 농민들은 주문을 외우며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제 기관총인 '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앞에서 모조리 학살당했습니다. 우리가 막연히 연상하거나 알고 있는 바대로 일본 제국군대가 사살한 것이 아닙니다. 조일 연합군 편성에서 후비보병을 맡고 있던 일본제국 군대가 아니라, 조선 경군이 운용한 미국제 기관총에 의해 조선인들이 조선 경군에 의해 사살된 것입니다. 동학난과 고종의 전근대적 위기대응 ‘감정’은 외세를 끌여들여 자기 백성들을 죽이고 한반도를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동학난을 설명하고 있지만, 동시에 현재의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한반도를 가리키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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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종전 후에 유럽과 미국은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부전조약(Renunciation of War Treaty, Anti-War Treaty, 不戰條約)’을 체결하고 방어전쟁(국가의 정당방위권)은 유보되어도 ‘국가의 정책수단으로서 조약 당사국 국민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모든 전쟁을 규탄·포기한다’는 취지로 국제법을 통해 침략전쟁과 전쟁발발을 방지하자고 합의합니다. 이것이 최초로 국제법적으로 침략전쟁과 전쟁을 막자는 취지의 개념이자 합의였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승전국이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의 제안에 주요 열강인 영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이 동의함에 따라 같은 해 15개국의 서명으로 파리에서 1928년에 부전조약이 체결됩니다. 제가 부전조약을 말씀드리는 까닭은, 고도화된 첨단기술 무기와 대량살상, 인명피해를 초래하는 현대 전쟁에서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자는 의미의 이러한 부전 조약이나 국제연합의 보편적 인권수호 개념이 생기기 전의 세계에서는 국가의 합법적인 수단으로서의 전쟁 수행이나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공권력에 의한 팽창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한 그 지배는 모두 불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위안부문제며 징용문제에서 나온 판결들이 다 ‘불법지배’와 ’강제점령’을 전제로 한 판결들”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미 설명드린대로 저는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을 불법이며 강제라고 하는 전제자체가 잘못된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앞선 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국제법적으로도 이러한 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병합이 불법이 아니었다는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부전 조약이나 보편적 인권 수호에 대한 개념을 이러한 개념이 없던 시기로 소급할 수 없다는 소급효 금지의 원칙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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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선생님께서 물어보신 <근대화 자체가 갖는 문제점>을 논하기 전에, 저는 위의 우금치 학살, 동학 지도부에 대한 우상화 조작과 항쟁으로서의 서사 조작, 컴플렉스와 정서에 기반한 혁명 및 저항 서사 조작을 먼저 “근대적” 관점에서 사실관계를 정리하며 반성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 사회에서 민감하고 예민한 문제인 일제시대와 반일 민족주의 등에 반성적 성찰을 제안하는 포스팅을 한 까닭은, 이러한 친일파니 위안부니 하는 문제가 한반도 주변 4대 열강과 급변하는 국제정세속에서 미래 한국의 비전을 위한 개방된 사고와 비전을 모으기는 커녕, 고립되고 폐쇄적인 내파와 자폐적 과거 소비에만 매몰되어 소모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위태롭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 사회에서 민감하고 예민한 문제인 일제와 관련한 얘기를 최대한 국제법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잘못된 사실관계를 지금부터라도 바로 잡고 나아가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저의 글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과 근거를 말씀해주시기 보다는, 마치 판결처럼 제 글의 내용에 대해 분류와 평가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일본 문제에 대해 새로운 견해와 시야를 제시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제안이 나올때마다 친일파니 식민지 근대화론이니 기존의 이분법적인 틀로 분류하여 사회적 낙인과 신뢰성credivility을 무너뜨려 온 기존의 악습이 그대로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닌가요?
제가 일제강점기를 쓰지 말고 일제시대를 써야 한다는 관점에서 펼쳤던 논점을 <최재원님식 ‘근대화 인정론’>으로 규정하고 저의 제안을 단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규정하려 하신다면 최소한 그렇게 규정하신 이유를 말씀해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선생님 지인과 페친들이 모인 플랫폼에 제 글의 일부분을 충분한 전후 맥락 설명없이 발췌하여 인민앞에 재판하듯 비판하신다면 토론자에 대한 수평적인 태도와 존중은 아닌것 같습니다. 제 글을 대상화하여 페친 분들과 한 마디씩 평가하시는 건가요? 고백드리자면 저는 조금 불쾌함을 느낍니다. 뉘앙스가 아니라, 명확하게 긍정해주시던가 근거를 제시해주시며 비판을 해주시면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생산적인 담론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제안이 “용어를 바꾸려면 먼저 해야 될 일은 그런 담론 자체에 대한 검증이자 비판”그 자체의 행위가 아닌가요? 제가 제도권 역사학계로 들어가 논문이라도 써야 그런 담론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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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문제며 징용문제에서 나온 판결들이 다 ‘불법지배’, ’강제점령’을 전제로 한 판결들이기 때문”이라면 국민감정과 한국 국내의 사투리로 ‘불법지배’, ’강제점령’을 규정해 왔던 근본적인 사실관계와 담론을 엄격한 사실과 국제적 보편성과 맞게 바꾸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담론이 87체제 30년동안 정착된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면 지금 제가 제안하고 있는 담론들 바탕에서든 어디에서든 토론을 시작하고 논의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잘못된 전제와 정치적 목적에 종속된 학자들의 논문 양산으로 이뤄진 담론이었다면 그런 담론 자체를 검증하고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관점의 제시와 담론 또한 중요합니다. 전체적인 패러다임 설정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든 사실과 국제적 보편성에 근거해서 바라보려는 저의 노력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추종”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이시는지요?
저에게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자본주의 맹아론>이라는 틀 자체도 흥미롭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폐쇄적인 학자들의 이분법적인 정치 논쟁이 아니라 철저히 사실과 국제적 보편성에 근거해 시민들과 토론속에서 집단지능을 증대시키면서 역사적 스펙트럼을 조망하는 작업이 훨씬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그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한국의 학자들이 철저히 정치권력과 돈의 논리에 종속되어 민족주의 선동에 이념자원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미 정치적 진영의 시녀들로서 정치선동에 필요한 논거와 자원을 납품하는 행위자인 학자들이 일제의 ‘불법지배’, ’강제점령’의 관념을 형성해 온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있나요? 그러한 관점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 그러한 이유는 일제가 남긴 적산과 인적자산의 바탕에서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미래의 국제정세를 통찰력있게 사고하는 젊은이들의 제안이 석박사 논문 지도와 심사과정에서 충분히 배제되거나 묵살되어 왔을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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