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선 에도시대 경제사에 뒷이은 포스팅 입니다
4.
서구의 산업혁명이 자본(=가축과 대형 농기구)을 기반으로 한 노동절약적 농업경영으로의 변화를 낳았다면 일본의 근면혁명은 반대로 17세기 급격한 인구증가와 가축이용의 감소(농경용->운반용으로 전환)를 바탕으로 쟁기(犂)와 괭이(鍬) 등의 소형농기구가 주로 활용된 자본절약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 같은 역사적 경로의 상이함을 이해하기 위해 저번에 못 다한 이야기 중 하나인 동아시아의 농업생산양식의 특징인 <소농 가족경영> 에 대해 대략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소농경영이 진행되기 이전, 중세 일본은 상대적으로 중앙의 왕권으로부터 독립적인 지방의 사사(寺社)와 귀족층을 중심으로 봉건적 성격의 토지사유제가 진행되었는데 이를 <장원경제> 라 일컫는다. 장원제 하에서는 영주가 직접 농민들로부터 현물연공(세금)을 수취했기 때문에, ‘네거티브’ 인센티브로서의 자급과 연공에 의한 생산이 주가 되었다. 이는 경제사회가 형성되지 않은 시기임을 의미한다.
<복합가족제도>라고 불리는 농촌의 구조 하에 당시 토지의 지력이나 수확량 등의 생산성은 좋지 않았고 넓은 땅을 두고 많은 인력을 동원하는 ‘광작’ 의 형태로 농업경영이 지속되었다. 가족공동체의 중심인 ‘묘슈’(名主)를 중심으로 상당한 대규모의 다수 동거친족(방계혈족)과 ‘나고’(名子), ‘게닌’(下人) 등의 예속노동력(농노와 소작인 사이 ‘중간’ 정도의 지위로 파악)을 포함한 20~30명 규모의 농민가족이 ‘묘덴’(名田)의 주가 된다. 이러한 경제공동체는 <공동생산, 공동분배> 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씨족 사회> 의 개념에 가깝다.
이러한 제도는 15세기 이후 기나이(畿内) 평야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장원제 내부에 수취되는 연공이 현물대신 <화폐>로도 납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대전납화=代錢納化). 아마 이 시기 생산물 형태의 연공운송 환경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라 추측되어지는데,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통솔력의 약화되는 와중에 무가세력의 장원침략과 이에 따른 궁핍해진 장원세력의 몰락 등이 겹치면서 연공수취가 줄어들었다.
따라서 보다 용이한 운송방법으로 연공을 취하도록 하는 방안이 고안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화폐였다. 이러한 변화는 농촌사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농민들은 어떻게든 생산량을 증대시키고 잉여분을 판매해 화폐를 얻으려 했다. 이는 화폐의 일상화와 시장을 통한 필수 재화의 거래가 정착되기 시작함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묘슈는 개간을 통한 경지면적을 확대해 생산량 향상을 꾀했고 수확량 확대를 위한 ‘포지티브’ 인센티브로서 거대한 가족세대를 몇 개의 소가족(단혼세대)으로 분할하는, 가족경영으로 전환이 시작했다. 나고나 게닌에게 토지보유를 허락하지는 않았겠지만 일종의 ‘경영권’을 부여하여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상당수준 해방시켜 줌으로써 개인생산과 축적의 유인을 높이는 <소농자립> 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상당히 장기간을 걸쳐 에도 막부시기까지 진행되었고 점차 농촌사회의 표준이 되었다. 부부가족이 경영단위가 되었고 자립된 농민은 신분적 예속에서 해방됨에 따라 농업부문의 인센티브가 올라갔다. 자연스레 출산율이 향상됨에 따라 인구증대가 이루어졌고 소농경영의 일반화에 따라 농민 상호 간의 횡적연계가 긴밀해짐으로써 농민 스스로의 규약에 의한 자치조직이 활성화되었다.
이는 서구의 농업혁명과 대비되는 분명한 발전경로의 차이이다. 특히 급격한 인구증가를 경험한 일본에서는 농기구와 가축 등을 이용해 노동절약적 방향의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이 맞지 않았다. 물론 노동을 되도록 절감시키려는 종자선별 등은 커다란 개량이었지만 대체로 가축, 대형농기구 등의 자본의 비율을 감소시키고 인간노동에 의지해 발전하는 <근면혁명> 의 생산방식이었다. 농민들은 이전보다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근로는 미덕’ 이라는 윤리의식이 가족제도를 통해 내재화하였고 맬서스 트랩에 빠지지 않은 방향으로의 점진적 1인당 GDP(생활수준)의 향상을 이루어냈다.
5.
일반적으로 경제사에서 근대를 나누는 기준 중 하나는 ‘강한’ 중앙정부의 여부이다. 이는 왜 근대 유럽이 다른 지역보다 빠른 속도로 장기 경제성장을 이루었는지를 <제도>적 측면에서 파악한 더글라스 노스의 이론에 의거한다. <근대적 경제성장> 이란 인구가 감소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향상하는 1인당 GDP 성장을 말한다. 그렇다면 경제성장의 원인은 무엇일까. 흔히들 일컬어지는 여러 요인들(기술혁신, 규모의 경제성, 인적자본-교육 혹은 물적자본-기계나 공장의 축적 등)은 사실 성장의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성장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내생성의 문제).
막스 베버가 경제발전을 서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의식에서 찾으려 했다면 노스는 <효율적인 경제조직>에서 찾고자 했다. 즉 재화의 교환에 필요한 제반비용을 가리키는 <거래비용>을 절감시키는 제도를 확립하고 집행할 수 있는 <국가>조직과 <사유재산권 보호>제도에 주목한다. 즉 근대적 정부란 개개인의 사유재산권을 타인 혹은 타국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강한 공권력을 지녀야 하며 실행을 담보할 수 있는 법과 제 3자 집행기관의 기능적 유효성을 담보해야 한다. 이는 근대정부의 여부에 있어서 중요한 척도이며 일본 경제사에서는 ‘명치정부’ 가 최초의 근대적 정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노스의 논지는 많은 이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식민지근대화론> 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아시아 4마리 용>중 하나인 한국과 대만의 근대정부의 모태는 일본제국 하의 ‘조선총독부’ 와 ‘대만총독부’ 로 경제사학계는 평가한다.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이루어짐에도 일제유산의 완전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도 총독부의 ‘근대적’ 정책노선을 조선의 박정희와 대만의 장개석 등 군부-정치 엘리트가 계승 및 지향했기 때문이다.
노스의 제도에 관한 연구는 일국의 경제사와 경제발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특히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인센티브의 문제를 과소평가하고 단순하게 자본가와 노동자의 하부 조건과 직결된 상부의식 결정방식(유물사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역사적 미래의 예측과 사회주의 비전에 대해 커다란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노스는 사적 거래의 속성에 따라 달라지는 거래를, 거래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관리(governance)하는 제도적 조합으로 가정했으며 이는 사회 내의 사람들의 특정한 상호작용을 형태 짓는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렇게 형성된 상호작용(합의와 그에 따른 제약)을 왜 지키는지, 이러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시 개입해 계약을 조정하는 국가의 역할이 부재하다면 시장거래 등의 근대적 경제활동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낳는다. 그리고 애브너 그라이프나 오카자키 데쓰지 등이 제창한 ‘비교역사제도 분석’ 이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6.
미국의 경제사학자 에브너 그라이프는 통일적인 국가권력이 나타나지 않았던, 11세기 지중해 세계에서 시장경제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증명했다. 지중해는 본래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로로 기능하는 상업과 무역의 중요한 무대였다. 하지만 7~8세기에 발생한 이슬람교도의 유럽침입은 상황을 전환시킴으로서 당시 서유럽은 세계에서 아시아와의 교역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유럽은 비상업적-자급자족적 성격의 경제사회 시스템을 발달시켜 나갔는데(중세유럽의 시작=장원제와 농노제) 11세기에 이르러 남방(베니스)과 북방(플랑드르)지역을 필두로 이슬람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지중해와 발트 해의 상업이 동시에 부활하게 된다. 이 두 무역권역을 잇는 거대한 시장과 상업루트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에브너 그라이프는 ‘상업의 부활’을 가능케 한 제도가 무엇인지 연구했다. 기본적으로 유럽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지중해의 지배권을 찾아온 것이 상업이 부활하기에는 충분조건이 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지중해 전체를 포괄하는 통일적 국가가 없었고 영주들이 외국상인과 거래를 할 때 적절히 계약을 보호할 수 있는 기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노스의 이론으로는 규명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하지만 그라이프는 당시 국가에 의한 계약집행은 불가능한 조건 하에서도 ‘마그라비’(10세기 초 바그다디에서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유대인, 지중해가 활동무대) 상인들의 <연합=카르텔>과 게임이론의 <다각적 징벌전략=multinational punishment strategy: MPS>을 통해 대리인들을 규율하고 계약집행의 불확실성(위탁한 자금이나 상품이 횡령될 가능성)을 줄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상인들의 연합조직은 계약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대리인에 대한 정보를, 결탁을 맺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집단적으로 공유 및 징벌을 행함으로써 법을 지키는 것이 대리인 본인에게 더 이득이 되도록 제도를 설계한다. 즉 피고용 대리인에게 충분히 높은 수준의 임금을 보장함으로써 부정을 저지른 경우 예상되는 미래의 손실을 더 크게 만드는 효과(부정을 저지르는 기회비용이 크다는 것을 인지시킴)를 만듦으로서 <자기구속적=self enforcing>성격의 제도가 작동한 것이었다. 이는 벌금과 형벌 등의 국가의 개입과 강제력 없이도 기능한 것이었다.
낮은 임금으로는 대리인의 성실한 행동을 이끌어내기 힘들 것이지만 부정을 저지른 경험이 없는 대리인의 경우 한 번의 부정행위 경우의 기회비용이 더 클 것이기에 부정행위 경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을 선호하는 결과가 도출될 것이고 이는 상인들이 다각적 징벌전략을 이용할 인센티브가 있다는 의미이다(게임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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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능의 부재로 규제나 처벌 등의 법 집행가능성이 결여된 상황에서도 <상호신뢰>를 창출하여 민간 내 자생적인 시장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그라이프의 이론은 근세 에도 막부를 둘러싼 성격논쟁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경제학자이지 그라이프의 제자이기도 한 오카자키 데쓰지 역시 근세 일본에도 마그리비 상인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사적인 제도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했다.
17세기 에도막부의 일본은 전국의 다이묘(일본 각지에 할거하던 대영주들)의 영국(領國)지배를 전제로 중앙집권적 막부가 지배하는 구조였다(막번체제). 그리고 약 260년 간 지속된 막부 하의 시장경제는 <병농兵農분리-상농商農분리>를 통한 신분 간 분업 관계 형성, <석고石高제>를 통한 연공미 증대와 오사카의 <도자마堂島 쌀시장> 내에서 활성화된 현물과 화폐(번찰藩札 등) 간의 교환 등이 이루어짐으로써 발전하였다.
즉 근세 일본은 각 번藩 내에 있는 지역 간의 분업(농업-공업 간의 분업)에 더해 각 번의 영역 간 분업도 발달함으로써 거점 도시들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오사카는 여러 번에 올라온 연공미의 판매시장이자 선물시장(현물과 선물 간 가격차를 이용한 효율적 거래)이었으며, 어음거래나 융자사업 등의 금융업(両替業)이 발달하였고 에도로의 원활한 물자공급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교토는 문화적 전통과 기술이 축적된 도시로, 막부의 쇄국정책으로 교역이 줄어들자 당시 첨단제품으로 평가받는 고급 섬유제품의 생산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에도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고안된 참근교대제(参勤交代制)로 다이묘들의 처자식과 수많은 수행원들이 일정기간 인질로 거주하는 곳이었다. 수도이자 정치도시이기도 한 에도는 사람들의 이동과 교류를 발판삼아 당시 인구가 100만에 달하는 대소비도시로 성장하였다.
이렇듯 근세 일본은 막부와 번 모두 잘 정비된 관료기구에 강제력이 있었고 안정된 정치체제가 있었기에 근대적 성격의 시장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지만 이 같은 틀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예컨대 근세 일본은 행정과 사법 권력이 일체화되어 있어서 민간에서 발생하는 여러 재판 역시 행정기관이 맡아 처리하였는데 그 중 민사소송 분야의 거래-계약집행과 관계있는 <데이리스지=出入り筋>의 실태가 이를 방증한다.
데이리스지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되는데 첫 번째 이자가 붙는 차입금이나 외상판매 대금 등 무담보의 금전채권에 관한 소송 <카네쿠지=金公事>, 두 번째 사적인 조직에서 구성원의 상호 간 이익분배와 관련된 소송 <나카마고토=仲間事>, 그 외의 데이리스지는 <혼쿠지=本公事> 로 분류된다.
혼쿠지는 가장 엄격하게 보호되고 원칙적으로 수리되었지만 카네쿠지와 나카마고토는 그러지 못했다. 특히 상인에게 막대한 채무에 억눌러있던 무사들의 사례가 급증하기 시작하자 카네쿠지 관련 소송이 줄을 잇기 시작했는데 막부는 <상대제령=相対済令>을 통해 당사자 간에 스스로 분쟁을 해결토록 해 채권자의 권리를 포기시키도록 했다.
이는 차입금으로 궁지에 몰린 무사들의 구제하기 위함이었겠지만 금전관계에 있어서 정부개입을 포기함으로써 시장거래의 원칙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국가에 의한 계약 집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을 의미하며 막부의 <전근대적=pre-modern>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열악한 조건 하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을 이끈 사적인 제도가 바로 일본의 상인길드 <가부나카마=株仲間> 이다. 가부나카마는 기본적으로 정부에 의해 특정지역의 특정사업에 관한 판매 및 영업독점권을 인정받은, 상인 내지 수공업자 단체이자 일종의 카르텔이다.
가부나카마에 소속된 상인 역시 마그리비 상인과 마찬가지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중개인과의 거래를 중지하고 다른 구성원들도 부정이력이 있는 중개인과의 거래를 중지한다는 측면에서 다각적 징벌전략과 일치한다. 다만 거래 상대방의 부정한 경력이 모든 구성원들에게 주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집단에 참여한 상인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는 안 되며 특정지역의 특정사업에 한정된 동업자들이 부정사실을 다른 구성원에게 알리는 공식적인 절차가 존재했다.
8.
가부나카마는 18세기 비교적 널리 보급되었지만 19세기 이후 막부에 의해 전면 금지되는 등의 부침도 겪었다. 먼저 에도 막부 말기의 경제적 상황은 어떠했을까.
막부말기는 인플레이션이 무엇보다 극심한 시기였다. 그 시작은 다이묘의 재정난으로부터 출발한다. 정치적 권력을 가진 무사들은 부의 축적 등의 경제적 기회를 쵸닌(상인)에게 넘기고 있었다. 지방의 다이묘뿐만 아니라 막부, 하타모토(旗本), 고케닌(御家人) 모두 재정의 핍박을 받고 있었다. 가족을 포함해 지나치게 큰 가신단의 규모, 태평시대에 사치와 문화교양 부문에 대한 무사들의 지출증대, 장기적인 미곡가격의 상승에 무너진 수입과 지출의 균형악화 등이 겹침에 따라 전체적인 무사층의 빈곤은 심해졌고 막부재정에도 곤란함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재정난에 대응하기 위한 막부는 <화폐개주=貨幣改鋳>를 단행해 화폐에 함유된 금의 양을 줄여 재정상의 수입을 증대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화폐가치를 떨어트리는 효과를 낳아 구매력 저하와 통화량 남발을 불러일으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경제학적으로 인플레의 발생은 ‘이득’을 보는 경제주체의 교체를 가져온다. 예컨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는 옛날과 똑같은 돈인데 앞으로 갚아야할 돈의 가치가 더 낮아지게 되기 때문에 채무자에게 이득이다. 경영자와 노동자는 임금을 매개로 계약관계를 맺는데 물가상승률을 고려한다면, 명목임금보다 인플레로 인한 실질임금이 감소한 노동자에게 불리하며 반대로 경영자에게는 임금하락 등의 비용감소로 말미암아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에도 시대 말기도 이와 마찬가지로 인플레로 인한 경제주체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특히 융자사업이 주업인 금융업자들은 장기 인플레로 인해 대출금의 가치가 하락해 상대적으로 지위가 약화되었고 지방에 있는 공장경영자(생산업자)들은 도시로의 인구유입과 더불어 노동자의 실질임금 하락(=생산자 잉여의 증가) 덕에 상대적으로 사업 확장과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전통적 호상의 몰락과 신흥 자본가의 성장, 경제주체의 세력교체를 야기 시킨 배경이기도 한다.
막부는 19세기 다가온 재정난과 정치제제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개혁조치를 남발한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에는 현대적 의미의 경제학적 개념이 전무했기에 이미 시장경제가 상당 수준으로 진전된 사회에 걸 맞는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이어온 교호(享保)개혁, 칸세이(寛政)개혁, 텐포(天保)개혁 등의 대부분의 개혁들은 재정난에 대응하기 위한 검약령과 증세 등의 긴축정책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재정궁핍으로 빚더미에 앉은 하타모토나 고케닌의 구제를 위해 채무의 탕감이나 저리에 의한 상환을 명하는 <금언령=棄捐令>의 남발로 민간의 경제주체들의 신뢰를 잃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여러 경제사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타누마 오키쯔구=田沼意次> 라는 정치가가 집권기이다. ‘뇌물장치가’ 라는 오명을 받기도 하였지만 당시 시대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발상의 전환’ 에 가까운 정책을 펼쳤기에 막부 보수 세력에게 적잖은 견제를 받았다.
예컨대 타누마는 가부나카마의 유통독점권을 오히려 국가적으로 공인-보호하여 그들의 카르텔의 결성을 장려하였다. 그 대신 그들에게 <運上金=운조킨, 冥加金=묘가킨> 등의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재정수입을 늘리고 재정난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가부나카마의 결성 이전, 조카마치 주변에 정기시의 영업독점권을 폐지하고 새로운 상인에게도 영업의 자유권을 보장한 <라쿠이치카쿠자=楽市楽座>제도 하에서는 죠닌에게 세금을 걷지 않았지만 타누마는 이를 뒤집은 것이었다.
또한 검약령 등의 긴축재정에 매달리지 않고 농민들이 상품작물을 자유롭게 재배할 수 있도록 정책적 장려를 펼쳤고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등 확대재정을 통한 경기활성화와 그에 따른 세수 증대를 꾀했다. 흔히들 ‘유효수요 창출’ 이론의 아버지로 알려진 케인스의 사고방식이 일본의 일개 사무라이 쇼군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금본위제의 추진에서 드러나듯이 타누마식 사고의 논리적 정합성이 다 들어맞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사상적 한계는 노출되었다. 예컨대 금본위제를 위해서라면 먼저 언제든 태환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충분한 양의 금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면 먼저 금을 모으는 등의 긴축정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확대재정과 상충-모순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당시 무사가 공유하는 세계관으로부터 탈피해 보다 유연한 사고를 견지할 수 있었기에 정책의 ‘발상적 전환’을 꾀했다는 것을 눈여겨보고 싶다. 현재 우리 주변에 타누마와 같이 현실에 적합한 경세적 관점에 입각한 채, 기존 관행으로부터 탈피해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지력을 가진 정치인이 몇이나 있을까.
9.
하지만 텐메이 기근과 뒷이은 ‘잇키’(=一揆, 높은 세금에 대한 농민의 반발) 와 ‘우치코와시’(=打ち壊し, 높아진 미곡가격에 대한 도시 상공업자, 무사, 일부 농민들의 폭동)으로 타누마의 집권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결국 실각되었다. 이후 가부나카마는 막부 보수세력에게 공격의 타깃이 되었고 결국 텐포개혁으로 가부나카마는 해산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막부의 예상보다 큰 시장의 혼란을 초래함으로써 정권몰락의 발화점이 된다.
막부는 물가상승의 원인으로 장기적인 인구증가 경향에 따른 수요증가와 악화발행 등의 자신들의 잘못된 정책에 있음을 직시하지 않고 가부나카마의 유통독점에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막부는 서민물가안정을 이유로 이 조직을 강제로 해산하는 조치를 내린다.
하지만 당시 가부나카마는 신용 기반의 유통망을 확립시켜 유통-물류 이동의 안정성과 확대를 견인하는 순기능이 더 컸다. 가부나카마의 해체는 오히려 유통망의 붕괴로 이어져 지리적으로 멀고 험난한 지형까지 상거래를 확장하도록 하는 유인을 감퇴시켰고 상품유통의 감소에 의해 오히려 물가가 앙등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이는 영세상공인을 포함한 서민, 빈곤층의 곤궁이 더욱 가중시킨 조치로 평가된다.
결국 사람들의 원성에 못 이겨 막부는 1851년 가부나카마를 다시 부활시켰지만 이미 민심은 이반되었다. 이후 변동된 국제질서 내 개항압력 등에 대응하는데 또다시 실력부족을 드러낸 막부에게 하급사무라이를 비롯한 일본 인민들은 더 이상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10.
막부의 몰락을 촉진시켰던 것은 세상의 변화된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과거의 세계관에 사로잡힌 지배계급의 결함에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지배계급의 교체역사는 현대에도 목도 중이다. 일본의 가부나카마의 해산사례는 한국 문재인 정권의 임대차 3법 등의 부동산 정책이 오히려 거래당사자들의 혼란을 낳아 시장의 생리를 교란시킴으로써 오히려 전-월세 주민들의 삶을 궁핍화시킨 역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예나 지금이나 경세가적 관점에서 주어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이 자명한 진리는 변하지 않는 법칙인 것 같다.

24Chee-Kwan Kim, 정승국 and 2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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