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영화 후기.
처음엔 모든 게 낯설고 이상했다. 전두광, 이태신...명확한 인물들의 이름을 조금씩 바꾸어놓은 게 혼란스러웠다. 누군가 나올 때마다 실존했던 인물과 맞추어보느라 집중이 잘 안되기도 했다. 퍼뜩 실명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당황스러웠고.
이태신과 전두광을 우두머리로 하는 양쪽 진영의 물리적 격돌로 접어드는 장면에서부터,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감독이 무얼 그리고자 했는지. 그리고 영화에 쑥 빨려들어가 인물에 이입됐다. 아, 이 감독은 두 사람을 각각 다른 내면을 지닌 인간으로 부각시키고 싶었구나. 역사적 상황, 정치적 상황,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했던 위치와 의미, 당시 사회가 처해 있던 사회문화적 배경, 이런 것보다 사람 vs. 사람 의 구도로 가고 싶었구나.
영화는 책과 다른 매체다. 모든 요소를 아우를 수 없다. 책이라면 “그렇게 총격전이 있었다”는 한 마디로 치고 지나가면 끝이지만, 영화는 그게 안 된다. 수많은 엑스트라와 총과 탱크를 동원해 화면으로 주조해내야 한다. 당연히, 감독이 내보내고자 하는 메인 메시지 외의 다른 것들을 희생시켜야 했을 것이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을 테고, 김성수 감독에게는 두 남자의 캐릭터가 어떻게 부딪히고 승부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최종 선택지였을 것이다.
같은 사건을 소재로 책을 썼던 자로써, 너무나 흥미롭게 보았다. 내가 수많은 지면과 낡은 스틸컷들로만 접했던 정보들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나와 드라마로 전개되는 걸 보고 있으니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이 번뜩번뜩 번져갔다.
나는 영화를 잘 몰라서 이것이 잘 만든 영화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동행했던 이는 ‘완전히 상업영화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각하게 화두를 붙들고 늘어지는 주제 영화도 아닌’ 애매한 지점에 선 영화라 표현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조금 애매한 지점이 있긴 한 영화다. 그러나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두 인물, 전두환과 장태완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강렬하게 표현해내 관객이 이입하게 했다는 면에서, 압도적인 영화였다.
외모상으로 봤을 때는 전혀 닮지 않은 얼굴과 몸피(황정민은 골격이 전두환과 너무 다르다)의 배우를 쓴 것은, 초반에는 좀 ‘좀 아닌데’ 싶어 보였다. 안경을 씌우지 않은 것도 이상했고. 강력한 실존 인물의 외관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인물을 보며 자꾸 차이점과 유사점을 찾아내려 하는 ‘산만한’ 정신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초반 십오분 혹은 이십분을 넘겼을 때즈음부터, 황정민이 전두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고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인물인 전두환의 성정을 배우가 탁월하게 캐치해 이입했기에, 안경도 쓰지 않고 몸피도 실존인물에 비해 너무 호리호리한 ‘하나도 안 닮은’ 황정민을 매우 전두환으로 여기며 보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에서 ‘특별한 가벼움’이라 표현했던 특성이 화면에서 유감없이 인물의 형상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이쯤부터였다. 감독이 가명을 쓴 것, 황정민이라는 안 닮은 배우를 쓴 것, 모두 이해하고 수긍하게 된 것은. 실화에 바탕했지만 상당 부분 상상력에 바탕해 쓴 이야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가명을 계속 강조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안 닮았을지라도 황정민을 기용한 것은 전두환과의 외적 동일함보다는 내면의 싱크로율을 만들어낼 배우로 황정민만한 사람이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었겠지?
예전에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그 영화가 광주를 너무 ‘천재지변’처럼 그려놓아 맥락을 놓친 느낌이었다는 평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이 영화도 그런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1212는 철저히 두 가지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고 성사된 사건이었다. 북한과 미국이라는, 대한민국을 단단히 포박하고 있는 커다란 경고성 존재들의 숨소리를 인식하는 이들이 벌인 거대한 심리전이었다. 당시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던 지휘부를 압박한 것은 “내전이 일어나고 그 틈을 타 북한이 쳐들어오면 우리 모두 죽는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데 마지막 도장을 찍은 이가 내가 되면 큰일난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미국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기대심리 혹은 눈치 보기도 있었을 테고.
전두환은 이미 낙장불입이고 실패하면 죽은 목숨이기 때문에 모든 걸 걸었을 테고, 카운터파트였던 육군 지휘부는 북한과 미국이라는 거대상수 앞에서 제 앞길 지키기 운동에 돌입한 것이었겠지. 이 영화에서는 그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고나면 전두환과 장태완이라는 두 인물의 캐릭터와 고위 공직자들(국방부장관 등)의 개인적 비겁함에 이상한 타이밍의 ‘운빨’이 개입해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즉, 한 사람의 선하거나 악한 경향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 부분을 매우 아쉽게 생각하며 아, 이 영화는 역사적 맥락을, 아님 국제정치의 역학을 너무 소거시켰어! 그걸 짚어서 좀 더 복합적으로 드러냈어야 해! 하고 멋들어지게 비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대신 이 영화를 선택과 집중으로 잘 만든 영화라 평하게 된 것은, 내가 같은 사건을 다른 질료로 써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한 수많은 디테일을 손에 들고 주물거려 만들어본 자이기에, 다른 질료를 써서 특정한 면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지 상상해볼 수 있었고, 그 부분적이고 집중적인 작업에 감사하고 쾌감을 느꼈던 것일지도.
지면과 화면의 차이. 지면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고 화면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그것을 생생히 실감했던 관람이었다. 중간에 전화 받느라 영화관 바깥으로 나와 상당부분을 놓쳤는데, 아무래도 이 영화는 한 번, 아니 두 번 정도는 더 봐야겠다. 이 체험으로, 앞으로 영화를 볼 때 좀 더 구체적인 눈으로 그 영화만이 가진 미학을 캐치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비주얼적 질료를 주물거려야 하는 감독은 무엇을 선택했는가? 선택한 바를 어떻게 집중적으로 그려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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