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은이)글항아리2010-04-12초판출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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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마르크스, 프로이트, 하이데거, 사르트르, 루카치, 벤야민은 라캉, 데리다, 랑시에르, 지젝, 바디우에 와서 어떻게 변형됐는가. 이 책은 ‘이론의 종언’에 맞서 ‘이론의 복원’을 요청하는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본격적인 이론적 퍼스펙티브가 담긴 저작이다.
푸코와 들뢰즈 이후 등장한 지젝과 랑시에르 같은 새로운 사상가들의 이론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에 발을 디디고 있으며 그들이 과거의 이론과 오늘의 정치 지형 속에서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분석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거시적 안목’을 마련해주고 있다.
목차
서문_이론은 근육이다
제1장 마르크스를 죽여? 살려?
1. 좌파의 위기, 바로 당신 이야기
2. 마르크스에서 출발하기
3. ‘마르크스주의’들의 싸움
4. 정신분석이라는 망치로 내려치기
간주곡① 사상지형도의 비밀
제2장 보수적인 리비스주의 비판
1. 이론의 종언?
2. 1980~90년대 이론 수용의 사회사
3. 이론의 운명, 이론의 임무
간주곡② 다시 루카치를 읽다
제3장 무언가를 교란하는 정치적 기획의 탄생
1. 프로이트주의, 실패한 정치기획
2. 아감벤의 착각
간주곡③ 나의 철학책들
제4장 벤야민, 프로이트와 손잡다
1. 비평의 탄생-아름다움에 대한 집중
2. 읽기의 정치학-아케이드 프로젝트
간주곡④ 네트워크가 인문학을 구한다
제5장 헤겔, 라캉과 사르트르의 숨어 있는 1인치
1. 응시의 욕망과 근대적 주체
2. 사르트르와 응시
3. 헤겔이 주선한 사르트르와 라캉의 만남
간주곡⑤ 냉소주의 시대의 인문학자
제6장 ‘무의식의 자식들’과 과학 쟁탈전
1. 정신분석학은 과학인가 아닌가
2. 칸트와 사드의 중요한 차이
3. 애매모호함을 떨쳐버린 라캉주의의 현전성
간주곡⑥ 라캉에 대한 비판?
제7장 지젝이 부풀린 유물론이라는 빵
1. 지젝이 프랑스로 건너간 까닭은?
2. 새로운 분석 도구, 판타지의 원리
간주곡 ⑦ 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
제8장 유령이 되어 귀환한 데리다
1. 데리다에 대한 애도
2. 차이의 정치학
3. 데리다의 마르크스 읽기
4.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성
간주곡⑧ 개념에 대하여
제9장 먹기 힘든 네그리의 비빔밥
1. 정치 이론과 예술
2. 다중과 예술
3. 예술의 반자본주의성
간주곡⑨ 시장과 학문
제10장 모든 지식은 감각이라는 DNA를 남긴다
1. 민주주의, 극장의 체제
2. 정치와 치안
3. 주체와 참여
4. 랑시에르, 반미학을 넘어서
5. 아무나 가진 능력의 현실화
6.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
간주곡⑩ 술과 말과 공부
제11장 존재의 사건을 쫓는 철학적 수사관
1. 알랭 바디우, 철학의 복권
2. 철학의 조건들과 진리의 다수성
3. 사건과 존재
간주곡⑪ 학문하는 자를 위한 처세술 5계
접기
책속에서
알랭 바디우의 말투를 빌리자면, 이론은 문제를 해설하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론은낡은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모험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론은 철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지만, 그렇다.
고 근대의 분과학문으로 기능하는 철학의 역할을 되풀이하는 것은아니다. 오히려 이론은 철학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원래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든다. 발터 벤야민이 철학과 철학하기를 대비시켰을 때, 이런 철학과 이론의 단절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을확인할 수 있다. 접기
이론은 근본적인 토대를 해명하려는 근대 철학의 기획을 가로지른다. 이론에 중요한 것은 근원이나 기원이라기보다 갈등과 모순이다. 일치나 소통보다도 불일치와 불통을 이론은 조장한다. 왜냐하면새로운 것은 언제나 합의를 깨트리는 과정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 라스티
프랑스의 이론들이 잘 보여주듯 모든 이론은 수입에서 그치는 것이아니라 수용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론은 수입의 산물이기에 수용의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당연한이야기이지만, 사회정치적 맥락이 다르다면 이론의 수용도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생적인 이론이라는 것은 수입과 수용의 결과일뿐이다. - 라스티
이런 인문학과 구분해서 나는 ‘인문좌파‘ 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문좌파는 단순하게 정치적 좌파라고 규정할 수 없는 다른 주체‘ 이다. 인문좌파는 기존의 정치 지형도에서 합의한 우파와 좌파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주체이다.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독특한 사유의 주체가 바로 인문좌파이다.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이 인문좌파의 몫이 접기
이 책은 동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론적 사유를 다루려 한다.
그렇다고 1960년대 이후 출현한 모든 이론을 망라하려는 의도는 없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구조주의라 불렸던 이론들에대한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경향들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흐름들은 주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욕망과 주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단순한 소개의 차원을 넘어서 한국의 맥락에서 이런 이론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려했다. 접기
그러므로 오직 하나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다수의 마르크스주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로수렴할 수 없는 이런 다수성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낡은 일‘ 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마르크스도 유령처럼 이를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최종적 결론이라기보다 새로운 문제를 인지하기위한 질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접기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상황이었고, 서구의 경우 많은지식인은 이미 1950년대부터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예측하고있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현한 것이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루카치의초기작 『역사와 계급의식과 칼 코르쉬의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을이론의 토대로 삼아 탄생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경향이다. 한마디로 신좌파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처음부른 이는 프랑스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로 알려져 있는데, 대개 그 구성원들은 대학에 몸담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연구가들이었다. 접기
그람시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손해를끼치는 이념과 결탁해서 이에 대한 강고한 믿음을 보여주는데, 이런착시현상은 믿음과 이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서 종교적인 은유를 만들어낼 때 가능하다. 이런 방식은 지젝이 이데올로기를 판타지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과 유사하다. 지젝의 생각은 뒤에서 다루고, 먼저 그람시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보자. 접기
이데올로기 내에서 인간은 그들 자신의 관계와 존재의 조건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 존재의 조건 사이의 관계를 ‘사는 방식을 표현한다. 이 사실은 실재의 관계와 상상의, 살아내는 관계 모두를 전제한다. 13 - 라스티
경제 형태는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파악할 수 없고 인문학적인 사유의 힘으로 분석해야 함을 마르크스는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라는 전체 몸뚱이를 분석하는 것은 쉽지만 미세한 상품이라는 세포를 분석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생각에서상품을 다루는 장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변호 하고 있다. - 라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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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택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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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영국 워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셰필드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에서 문화비평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중문화, 미술, 영화에 대해 글을 쓰며, 여러 매체에 기고한다. 지은 책으로는 『빨간 잉크』, 『철학자의 아틀리에』,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무례한 복음』,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99% 정치』 등이 있다.
최근작 :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뉴래디컬리뷰 2023.봄>,<마녀 프레임> … 총 72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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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말하라, 침묵이여>,<[큰글자도서] 나쓰메 소세키 기담집>,<[큰글자도서] 가난의 명세서>등 총 789종
대표분야 : 역사 9위 (브랜드 지수 381,977점), 철학 일반 15위 (브랜드 지수 45,328점), 고전 28위 (브랜드 지수 85,36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형성된 새로운 이론 지형 본격 해부
마르크스, 프로이트, 하이데거, 사르트르, 루카치, 벤야민은
라캉, 데리다, 랑시에르, 지젝, 바디우에 와서 어떻게 변형됐는가!
‘이론의 죽음’에 맞서 ‘이론의 복원’을 요청한다
교환가치로 전락한 ‘인문학’에 맞서 ‘인문좌파’를 요청한다
책 소개
‘가이드guide’라는 꼬리표가 붙은 다소 생뚱맞은 이 책은 ‘이론의 종언’에 맞서 ‘이론의 복원’을 요청하는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본격적인 이론적 퍼스펙티브가 담긴 저작이다. 지난 십 년 한국사회를 배회한 각종 패배주의와 냉소주의 중에서도 ‘이론 무기력증’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지성주의’와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먹고사니즘’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고 곧 전면화되었다. 저자는 이런 태도에 종지부를 찍고, 마르크스주의 비평과 정신분석 이론이 결합한 이론 공부와 이론적 글쓰기가 생산성과 비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저자는 푸코와 들뢰즈 이후 등장한 지젝과 랑시에르 같은 새로운 사상가들의 이론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에 발을 디디고 있으며 그들이 과거의 이론과 오늘의 정치 지형 속에서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분석함으로써, 2000년대 후반 이후 다시 범람하기 시작한 유럽 발 이론의 백가쟁명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독자들에게 ‘거시적 안목’을 마련해주고 있다.
특히 이 책은 동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론적 사유를 다룬다. 주로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구조주의라 불렸던 이론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경향들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흐름들은 ‘주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욕망과 주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한다. 단순한 소개의 차원을 넘어 한국의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렇다면 ‘인문좌파’란 무엇인가. 이 책이 단순히 사상가들의 소개에 머물지 않고 저자의 독특한 ‘정치적 기획’인 까닭은 바로 이 단어가 한국사회에서 의미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지젝과 랑시에르, 바디우 등이 설파해온 핵심 사유가 왜 한국 사회에 “인문좌파”라는 말로 수용되고 변형되었는가.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사회에서 ‘교환가치’를 갖는 고전적 인문학, 군주를 보필하고 관료를 양성하는 ‘동양적 인문학’의 유령이 느껴지는 이 인문학과 구분해서 나는 인문좌파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문좌파는 단순하게 ‘정치적 좌파’라고 규정할 수 없다. 기존의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이 인문좌파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개념은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필연성에 붙잡혀 있는 우발성을 풀어놓는다는 말이다. 재현체계를 벗어나는 힘을 드러내는 것이 인문좌파의 일이다. 사유가 실천이라는 명제는 여기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다르게 사유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규범을 거스르는 탈영토화를 의미한다. 이 메커니즘을 지배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백의 동요이다.”(11~12쪽)
‘인문좌파’는 저자가 철학자 김영민과 대화하던 중에 나온 개념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현재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에 속하는 기존의 지식인 유형과 다른 윤리와·정치적 실천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존재라는 점이다. 이 책은 그런 ‘다른 주체’를 구성하기 위한 ‘근육’을 키우기 위해 섭렵해야 할 기본적인 인식론, 사유의 ‘티핑포인트’들을 망라했다고 볼 수 있다.
진보운동이 진보정당이라는 합의제 민주주의에 갇혀 있고, 소통의 담론이 진보 세력의 전략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저자는 민주주의보다 정치적인 것을, 소통보다는 불통을 설파하는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갈등과 모순을 강조하고, 고정성보다 우발성에 주목하는 이론들을 통해 진보정당이나 소통의 담론으로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 정치’를 찾아내는 것이 인문좌파의 임무라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주요 내용
이론의 복원을 요청하는 저자는 먼저 마르크스를 불러온다. 마르크스가 출발점이다. 데카르트도 헤겔도 아닌 마르크스가 출발점인 이유는 그가 ‘근대 이론’의 창시자이며, 현재까지는 ‘불멸의 텍스트’라 할 만한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을 관찰하고 사유하고 추상화하는 과정을 가장 완벽하게 달성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방법론의 원형이 마르크스에게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러한 면모는 다양하게 학습되었다. 저자는 루카치, 그람시, 알튀세르를 거치며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론’이 어떻게 발전·변모되는지 살피고 스튜어트 홀에 와서 문화이론으로 출구를 찾아나가는 과정까지를 살펴보고 있다.
한편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이 왜 정신분석 이론과 만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욕망’의 문제다. 마르크스의 가장 큰 발견은 무엇인가? 교환가치다. 모든 상품은 다른 상품과 교환될 만할 때 비로소 가치를 갖는다. 교환되지 못하면 가치가 없다. 상품은 폐기되고 사람은 구조조정 된다. 상품소유자는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용가치를 갖는 다른 상품에 대해서만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려 한다. 여기서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것은 상품이고, 욕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저자는 “이 욕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자 동시에 돈에 대한 수전노의 사랑처럼, 과잉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상품을 지배하는 논리인 욕망을 다루는 학문은 정신분석학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바로 마르크스가 정신분석이론을 요청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정신분석 이론과 어떻게 만나는가. 서론을 지나 본론으로 진입하면서 이 책은 헤겔, 라캉, 프로이트, 벤야민, 사르트르를 불러온다. 이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 이론이 만나는 ‘장場’이며 ‘매개’들이다. 헤겔은 라캉과 사르트르에게 ‘숨어 있는 1인치’로 거론된다. 벤야민은 마르크스 읽기를 감행한 끝에 프로이트와 손을 잡는다. 전혀 별개의 이론가처럼 보이는 라캉과 사르트르 사이에 ‘변증법’의 창시자 헤겔의 공분모가 존재한다는 것, 마르크스가 미처 다하지 못한 정신분석 이론과의 만남을 후대에 실천하고 있는 벤야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 이론의 가교 역할을 맡은 저자가 섬세하게 다리를 놓는 장면들이다. 그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실패한 정치적 기획’으로 비판받고, 마르크스적 사유의 단초를 풍부하게 내장한 라캉과 데리다가 그 이후의 이론가들과 만나기 위해 ‘과거’에서 ‘현재’로 재호출된다.
그 과정이 제6장 ‘무의식의 자식들과 과학 쟁탈전’에서 실감나게 다뤄지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거의 종교적 역할을 하고 있는 과학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과학을 성찰의 대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이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이 정상과학에서 말하는 ‘유사과학’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과학이 아니라 “주체가 무엇인지 추측하는” 과학이며, 자연적 법칙과 다르게 작동하는 주체의 문제를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 적절하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무의식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뽑아낸다. 그렇다면 라캉과 마르크스의 차이는 무엇일까. 저자는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나 구조주의는 주체를 생산해내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보편적 이론, 다시 말해서 과학적 담론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 대한 총체화를 달성하는 순간 주체의 실천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리는 사라져버렸다. 라캉주의는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182쪽)
라캉의 후계자들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철학적 상대주의의 돌연변이가 아니며, 오히려 라캉을 통해 기존의 정치학이나 임상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슬라보예 지젝 등의 작업은 정신분석학의 정치화를 통해 기존의 이론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지적 도전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바로 라캉이 집대성한 정신분석 이론을 활용한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 등의 활약상을 다룬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적 판타지와 라캉의 변형”
★슬라보예 지젝 : 지젝의 공로는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을 대중화시킨 점이다. 라캉을 정치적으로 전유한 지젝은 주체구성의 이론을 해명하기 위한 새로운 분석 도구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를 발명했다. 이것은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집단적 판타지를 말하는데, 지젝은 이 판타지를 “거세 공포를 방어하기 위해 자아가 만들어낸 고정된 이미지”라고 정의한다. 마치 종교가 인간의 채울 수 없는 결여를 채우듯, 이 판타지가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그 사실을 은폐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 주체의 구성에 필연적인 기원이면서 동시에 실체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지젝은 “큰 주체”가 사실은 “작은 주체들”이 날조해낸 것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시차적 관점’을 통해 데리다의 ‘차연’ 개념과 접속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정치적 지평을 넓혀나간다.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은 데리다로부터 비롯되었다”
★자크 데리다 : 저자가 보여주는 데리다는 서구 철학을 해체한 전기 데리다가 아니라‘정치’와 ‘힘’에 대해 사유하는 후기 데리다이다. 알려진 것과 달리 데리다는 일관적으로 정치적 문제를 고민했고, 마르크스 다시 읽기 작업을 통해 정치경제학적인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정치철학의 영역으로 복권한다. 또한 서구 철학에 토대를 제공한 ‘존재론’을 대체하기 위해 ‘유령론’을 펼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령은 존재의 가상이 아니라 그 존재의 밑바닥에 가로놓인 더욱 근원적인 어떤 사태의 출몰”이라는 것은 데리다의 정치적인 것이 정신분석 이론과 만나는 지점이다.
“네그리의 미학 이론과 다중 개념은 들뢰즈보다 단순하고 선언적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 저자는 예술의 창조적 상상력에서 반자본주의적 정치의 원동력을 발견하는 네그리에 반대한다. 네그리는 노동에 잠재하고 있는 창조성을 구현하는 활동으로 예술을 보기 때문에 결국 노동을 통한 인간 개조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주의의 정식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하여 칸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말했고 헤겔은 ‘목적은 이미 수단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랑시에르와 아감벤이 칸트의 명제를 변주한다면 네그리는 헤겔의 생각을 계승한다고 본다. 네그리의 다중 개념을 두고 랑시에르가 “생산력 개념의 확대”라고 한 것에 저자도 동의한다. 네그리는 정치를 ‘상상의 형이상학’으로 보고, 아름다운 것이 혁명적이라는 명제를 통해 예술은 혁명적일 때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결국 이런 네그리에 대하여 저자는 “들뢰즈보다 단순하고 선언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국내 네그리주의자들과의 논쟁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미학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바꾼다”
★자크 랑시에르 : 저자는 랑시에르를 매우 주목할 만한 이론가로 상세히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랑시에르는 랑그와 파롤이라는 오래된 구조주의적 명제를 철폐하고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구분을 와해시켜 계급과 위계에 복무할 것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윤리에 반하는 새로운 주체의 철학을 제공한 이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전문가 집단의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촛불집회에 나선 십대들은 “십대는 어른들과 다르다”는 공동체의 합의를 넘어서는 감각을 서로 나누고 있다. 미학은 서로 다른 계급이 고흐의 그림을 보고 같은 언어로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는 “혼란의 공간”이며 그렇기에 민주주의와 통한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적인 공간과 민주주의 공간은 모두 “극장의 체제”로 통한다. 그 가운데 감각의 나눔이 일어나고 무정부적인 미학의 차원이 공동체의 의미로 ‘기입’되는 순간 이 차원에서 얻어진 감각은 미학적이기를 멈추고 앎의 차원으로 체계화된다는 게 바로 랑시에르의 전망이다.
민주주의는 종종 효율적인 제도와 이탈하는 것들에 대한 적절한 통제와 동일시된다. 랑시에르는 안정된 상태를 추구하는 합의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라 말하지 않는다. 그는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통치 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 거치는 주체화 양식”이라고 말이다. 저자는 촛불집회에서 이 양상을 예시로 꺼내서 보여준다. 한국사회에서 십대는 몫 없는 자들이었지만, 어느 순간 집단적으로 ‘평등’을 외치고 나섰다. 그것은 감각적인 나눔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주체화의 과정이다.
“철학자는 존재의 사건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밝혀내는 진리의 수사관이다”
★알랭 바디우 : 바디우는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무력화시킨 철학의 역할을 복원한다. 바디우에게 철학의 위기는 ‘보편주의에 대한 폐기’이다. 그가 볼 때 기존의 포스트담론(차이의 철학)은 특이성에 대한 신학적 숭배를 통해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철학의 지위를 세계로부터 퇴거시켰다. 그렇다면 바디우의 철학과 기존의 철학은 동일한가. 그렇지 않다. 시, 수학, 정치, 사랑이 있다고 하자. 바디우 이전까지 철학은 진리적 절차들을 평등한 관계로 파악하지 않았고, 네 가지 중 하나를 우월한 지위에 놓았다. 특정한 진리 생산이 다른 진리 생산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이렇게 되면 철학은 봉합된다. 즉, 닫혀버린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에 과학적 실증주의가 철학을 봉합했고,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정치와 과학에 봉합시켰다. 하이데거는 과학에 반대하여 철학을 시에 가두어버렸다. 바디우는 그동안 실증주의나 마르크스주의의 봉합은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하이데거적인 시적 봉합은 문제시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기술로 변해버린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철학의 지위를 시에 넘겨준 것은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지만, 너도나도 시를 쓰면서 시가 진리의 최종 거처라고 말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게 바디우의 입장이다.
시라는 우물에 빠진 철학을 구하기 위해 바디우가 마련한 개념이 ‘사건’이다. 그가 말하는 사건은 “다른 것이 출현하는 모든 시간과 장소”이다. 특히 그에게는 역사적인 것이 중요하다. 철학은 이 사건들에 개입해서 명명하는 작업이다. 개입과 명명을 통한 ‘조사’에서 철학은 사건에서 드러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구분해낸다. 바디우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2008년 촛불집회를 예로 들자면 이런 정치의 출현을 다시 일자의 작용으로 수렴시키는 게 아니라, 진정한 철학적 개입은 이 정치적 주체의 실체를 조사해서 그 해방적 측면을 발견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부록으로 마련된 386세대 한 이론가의 자서전
이 책에는 장과 장 사이에‘간주곡’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쉬어가기 코너가 마련돼 있다. 본문이 이론들의 대결로 팽팽하게 긴장돼 있다면, 이곳은 학문과 공부, 글쓰기와 현실 개입에 대한 저자의 자유로운 단상들이 펼쳐져 있어 이완의 기능을 한다. 대학 시절, 유학 시절 저자를 사로잡았던 책읽기를 돌아본 <사상지형도의 비밀> <다시 루카치를 읽다> <나의 철학책들>에서는 인문좌파라는 새로운 주체 이론의 모색에 나선 저자의 지적 궤적을 고백적인 문체로 만나볼 수 있다. 1990년대 붐을 이룬 ‘세미나 문화’의 배경에 “남보다 더 크고 강하게 되기 위한” 힘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는 것, 요즘 한국에서 목도되는 인문사회과학 담론의 지형도는 이때 형성된 세미나 분파들에 근거한다는 것, 용도 폐기된 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루카치에 대해 “앞으로 그와 함께할 공산이 큰 나의 유령”이라는 고백도 듣게 된다. 그 이유는 “루카치의 리얼리즘은 자연주의와 같은 사물에 대한 정밀묘사가 아니라, 그 대상과 인간의 의지 또는 서로 적대적인 힘들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그 상황 공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네트워크가 인문학을 구한다>에서는 프랑스 철학이 독일 철학을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서서 독창적인 차원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지식인 공동체 때문이었다며 에콜 노르말대학의 30년 세월을 소개한다. <냉소주의 시대의 인문학자>에서는 지식인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든 인터넷의 글쓰기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하는 대중의 냉소주의 등이 불러오는 문제를 짚었고, <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에서는 진화생물학이나 경제학이나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다분히 경쟁의 구도라는 점 등 인문학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을 통찰했다. 그 외에 <시장과 학문> <술과 말과 공부> <학문하는 자를 위한 처세술 5계>를 통해서는 이 책의 제목 “가이드”에 걸맞게 공부와 글쓰기에 대한 단상들과 경험적 충고를 담고 있다.
저자의 이런 치열한 글쓰기와 현실에 대한 분석과 통찰은 모두 이론적 토대와 고민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즉, 이 책에 개입된 <간주곡>은 단순히 쉬어가기를 넘어 이론의 복원을 요청하는 저자의 자기증명이기도 한 것이다. 접기
북플 bookple

비둘기가 오리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신 적 있으신지?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모름지기 비둘기는 비둘비둘 걸어다녀야 제맛이라고 생각했다. 참새처럼 귀엽게 콩콩 뛰는 게 아니라. 목을 앞뒤로 흔들고 상당히 고압적인 눈빛으로 인간을 쏘아보며, 직립 보행은 너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이 신발 신은 원숭이놈들아- 하는 모습이 디폴트로 설정된 비둘기의 자태였는데, 공원의 잔디밭에 서른 마리쯤 되는 비둘기들이 알 품는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리가 현현했다.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은 없다. 정하는 것은 나다. 나라는 놈은 얼마나 오만한지, 나를 정하는 것에 그쳐야 할 것을, 심지어 '너'까지 결정한다. 비둘기도 아니면서 비둘기 너희들은 항시 걸어다니고 있어야 한다고 결정한다. 여성도 아니면서 니들은 남자를 못 만나서 그래, 사랑을 못 받아서 그래, 사회 생활을 제대로 안 해봐서 그래, 하고 여성의 의식을 결정한다. 신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나 유전학적 오물로 규정해 600만이나 죽이고 나면, 결국 스스로가 인간도 아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알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원래 10일에 한 번씩 정리하던 독서목록을, 부족하지만 일주일만에 대방출 해본다. 이렇게 쉽고 얇은 책 위주로 마구잡이로 읽기보다는 몇 가지 주제를 정해서 한 번 읽어볼까 싶기도 하고, 두꺼운 책을 슬슬 피하며 도망치는 것도 한계에 봉착했다. 나도 이제는 두꺼-업하고 묵지-익한 책 읽고 폼나게 리뷰 쓸 수 있는 지식인이 되고 싶다. 자,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170831-170906 25권
문학 6권
1. 게 가공선
: 이게 소설이라고? 거짓말. 이게 100년 전이라고? 그럴 리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란 이러하고 저러한 것이다 말만 들었지, 실제로 읽어보니 현장감과 현실감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열 받는다.
2. 나무는 간다
: 책 딱 한 권 읽으며 여러 번 경탄하려면 시집만큼 좋은 게 없다. 그리고 글 딱 한 편 읽으며 와,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혀를 내둘러 보려면 시집 맨 뒤에 달린 해설만큼 좋은 게 없다.
3.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 이 정도면 거의 암호놀이다. 시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가 오롯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는 내가 소비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일단 내게 온 시는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어떻게든 소비되어야 하는데, 단편적인 정황만을 남겨둔 채 시가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결국 나는 시인의 다음 시집을 기다리지 않는다.
4. 중얼거리는 천사들
: 그러니까, 눈이다. 귀다. 손끝이다. 거기서 시작한다. 눈이 가는 자리, 귀가 향하는 자리, 손끝이 닿는 자리. 시인은 거기에 선다. 나머지 일은 시가 다 한다.
5. 인생의 일요일들
: 여행기는 우리에게 네 가지 선물을 줄 수 있다. 하나, 여행지로 데려간다. 둘, 그곳으로 가 보고 싶게 만든다. 셋, 지은이의 마음으로 데려간다. 넷, 그곳으로 가 보고 싶게 만든다. 여행기 입장에서는 둘이 가장 쉽고 넷이 가장 어렵겠다. 정혜윤이 네 번째 선물 언저리에 섰다. 그러나 한번에 다 읽어 삼키기에는 너무 진해 마음이 쉬 피로해지므로 나눠서 읽기를 권한다.
6. 동급생
: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듯, 사람 옆에선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친구를 만드는 것은 거울을 만드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거울 안의 내가 보인다. 거울 안의 나를 보고 있으면 거울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 실컷 거울 속의 나만 봐 놓고, 누가 물으면 거울을 봤다고 대답한다. 나를 봤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지도 않는다.
젠더 3권
7.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 배우는 것도 많지만, 나는 어디까지 읽어낼 수 있나를 확인하는 데도 좋다. 지식에 관해서건, 분노에 관해서건, 내 입장에서 아직 이 책에 대해 평하거나 쓰거나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읽고, 생각하고, 느껴야 할 것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8. 길 위의 인생
: 많은 사람이 걸어 온 많은 길을 읽고, 듣고, 감탄하고, 부러워해왔다. 그 중 가장 멋지고, 다른 그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은 길이 이 책 안에 있다.
9. 악어 프로젝트
: 논쟁의 철이 지난 책이고, 역시 철 지난 대답이 되겠지만, 왜 남자들을 다 악어로 표현했냐고 분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명민한 꼬맹이가 했던 말이 대답으로 맞춤한 것 같다."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이온데, 왜 홍시맛이 나냐고 물으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철학 7권
10. 현대 철학 로드맵
: 이러면 정말 곤란하다. 원제를 흘낏 보니까 "진짜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뭐 이런 식인가본데, 저자 본인도 서문에서 이런 '후려치기+우겨넣기'가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 못하거나 애당초 불가능함을 은근히 드러낸다. 일본 출판계의 고질병이다. 이 책만 읽으면 ~할 수 있다! 2시간이면 ~를 정복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천안이다. 호도하면 천안이지. 네, 무리였네요. 죄송합니다. 내용 서술은 이런 식이다. "라캉은 '차이의 체계'라는 소쉬르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시니팡의 연쇄를 '구조'로 이해했다. 라캉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이러한 시니피앙의 연쇄(언어)에 의해 구조화된다." 이러고 띡 끝이다. 아, 입문서를 읽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말이 나오면 책은 이미 실격인 것이다.
11.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 절반을 다 읽고 나서야 예전에 한 번 읽은 책이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내용도 같이 기억났으면 좋았을텐데. 심지어 당시에 리뷰도 썼었던 것 같다. 지금도 있으면 좋았을텐데. 비트겐슈타인 입문서 중에서는 정말 쉬운 편이라고 평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진짜 쉽다는 말이면 좋았을텐데.
12.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1년에 한 번 꼴로 읽으면서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 보는 측량기로 삼는 책이다. 작년에 뿌려 놓은 눈물의 냄새가 나는 걸로 보니, 별로 멀리 오지 못했군. 여전히 데리다,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이건 읽었다고 할 상황도 못 되는 셈이다. 또 한번 쓰린 눈물을 심으며 내년을 기약한다.
13.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자본론" 입문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서라는 입장에 맞게 상당히 폭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 다른 책들을 읽기에 앞서 일독하면 방황을 크게 줄일 수 있겠다.
14. 헤겔
: 이걸로 시작하기보다는 좀 더 다정하고 두꺼운 책이 좋았겠다. 그러나 헤겔은 한없이 두꺼울 수는 있어도 결코 다정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함정.
15. 한 눈에 읽는 현대 철학
: 역사에, 철학에, 뭐가 됐든 남경태의 책은 심지어 사전식이라도 어쩐지 잘 읽힌다. 최소 40년은 더 책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물론 그도 모든 방면에 달통한 만물박사는 아니었던 듯하다. "지금 상대성 이론은 양자역학에 자리를 내주고 패배한 이론이 되어 있다. 상대성이론이 뉴턴 역학을 대체했듯이 양자역학은 상대성 이론을 대체했다." 랄지, "뉴턴역학과 상대성이론의 관계처럼 서로 화합할 수 없고 정면으로 대립되는 이론이다"랄지 하는 구절을 보면 좀 의아해질밖에.
16. 프로이트 씨, 소통은 어떻게 하나요
: 청소년용을 만만히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당신, 그렇게 자신만만하다가 정말 부럽습니다. 백미는 푸코, 마르쿠제, 융, 포퍼와 프로이트가 벌이는 가상대담이다. 시리즈물로 니체와 마르크스도 절찬 판매중.
정치 / 경제 / 사회 4권
17.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 기본소득에 관한 책인 줄 알았는데, 21세기형 아나키스트의 일기장이었다. 그럴 바에는 사랑이나 하자, 집이나 불태우든지 가라오케나 가자, 하는 식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을 즐기는 듯 보인다. 재미도 꽤 있다. 마지막 꼭지인 "미친 사회를 위한 화장실 사보타주"는 압권이다.
18. 국가란 무엇인가
: 살을 붙이고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뼈대가 필요하다. 뼈대를 빚는 책으로 부족함이 없다. 부족한 건 항상 여기를 시작점으로 해서 더 깊게 더 많이 읽어나가자는 의지의 지속력이다.....
19. 자본론 이펙트
: 자본론도 자본론이지만, 자본론의 이펙트를 다루는 데 주력한 책이다. 얇아서 내용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핵심을 비껴가지 않는 눈이나, 비판적 견해의 고갱이를 저며내는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 저자의 저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20. 위대하고 찌질한 경제학의 슈퍼스타들
: 글과 만화 중 어느 것도 내 취향 아닌 것이 없는지라, 유유에서 나온 책이 아닌가 하여 출판사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러고보니 유유가 요즘 잠잠하다? 싶어서 검색해봤더니 지난 달도 두 권이 나왔다. 소홀했다. 모든 게 내 불찰이다....
인문일반 / 책 / 생활 5권
21. 장서의 괴로움
: 알라디너들이여, 우린 이제 그만 사야 합니다. 책 무게로 집이 무너지는 일을 막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미니멀리즘입니다. 그러나 미니멀리즘은 파산과 함께 오거나, 아님 최면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 결코 그냥 오지 않겠지요.....
22.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 발매된지 4년이 다 되어가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나를 포함해 5명뿐이라고 알라딘은 말한다. 그게 내가 최근 맞닥뜨린 가장 큰 미스테리다. '쓰레기 고서'라는 '얼굴'이 독자들의 간택을 막는 요인이 되는가본데, 일단 읽기만 하면 재미와 의미를 두루 갖춘 훌륭한 책임을 알게 된다.
23. 공부해서 남 주다
: 우리에겐 익숙치 않은 지식인들의 초상을 제공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에릭 호퍼나 듀랜트 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읽기 즐거웠다. 다만 이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지식의 대중화에 일획을 긋긴 한 것 같은데, 그들이 지식을 대중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식자층과 투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공부해서 남 줬지만 남 주자고 공부한 것은 아닌 셈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칭찬하기 애매할 수 있다.
24. 편안하게 따뜻하게 휘게
: 행복이 들어오는 입구는 소소한 것들을 바라보고 보듬을 줄 아는 눈과 손과 그 온기 속에 숨어 있다. 그리고 코코아와 아로마 향초와 벽난로가 필요하다..... 휘게는 어려운 것이 아니랍니다. 어느 집이나 벽난로 하나쯤 다 있잖아요.
25. 올 어바웃 러브
: 나는 벨 훅스를 정말 좋아하고 그녀가 써낸 모든 책들을 사랑하지만, 사랑론만큼은 예외로 해야겠다. 사랑을 정의할 수 없다고 보는 방식에도 단점이 있고, 그녀가 제기한 문제의식 또한 납득은 가지만, 사랑을 한 가지 정의 안에 가둘 수 있다고 보는 관점도 분명히 크고 작은 문제들을 낳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게 사랑이니? 야, 사랑 몰라? 사랑은 이거야 이거, 다 정해져 있음, 그러니까 내 건 사랑, 니 건 사랑 아님. 헐, 대박. 뭐 이런 문제랄까?
내일부터는 아마도 초심으로 돌아가 마르크스를 열심히 읽게 될 것 같다. 사실 초심 찾을만큼 어디 멀리 간 적도 없다. 그냥 마르크스 읽다가, 까먹었다가, 다시 읽다가, 다시 까먹었다가, 다시 읽.....다가 세월은 가고 허리만 굽은 것이다. 그래도 계속 읽는 거 보면 이게 끈기가 없어서 이렇게 된건지, 있어서 이렇게 된건지 막 헷갈린다. 마르크스의 '마'까지 알았다 싶으면 까먹고, '마르'까지 알았다 싶으면 또 까먹고. 그러니까 결국 마르크스 관련 책을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알지 못하고 '마마르마르마르크마르마마르큿!마마...마..마르말'뭐 이런 것을 알고 있는 셈이라 하겠다. 이번에는 꼭 '스'까지 알고 싶다.
syo 2017-09-06 공감 (44) 댓글 (4)

장서의 괴로움 / 오카자키 다케시 /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처음 이 책이 발매되고 도서관에 입고되었을 때, 한동안 서가에 꽂힐 새가 없을 정도로 불티나게 대출되더라. 처음에 나는 좀 놀랐다. 세상에, 장서의 괴로움을 공감할만큼의 고수들이 이렇게나 많단 말인가? 아니 잠깐, 그런 사람들은 책을 빌리는 게 아니라 사서 볼 텐데, 아니 잠깐잠깐, 그럼, 책을 사서 보는 사람들이 빌려 보기로 마음먹을만큼 이 책이 별로라는 말인가? 뭐 대충 이런 식의 되먹지 못한 논리의 흐름에 휩쓸려 그만 이 책에 대한 관심을 정리했던 것 같다. 3년 전이다.
엄청 재미있을 것 같은 소재(최소한 의욕적인 알라디너라면 그렇게 생각할 공산이 크다)로 쓴 책을 막상 읽어보니 그저 소소했을 때, 리뷰어는 난감하다. 칭찬하기도 부끄럽고 욕하기도 뻘쭘하고, 칭찬거리가 오히려 단점을 부각시키고 마는 희한한 상황. 게다가 남의 나라 남의 책 이야기라서 한층 더 재미없다. 문장은 더 문제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고, 쓰기도 한다는 사람의 글 치고 어쩐지 문장에 매력이 없고 재미도 없다. 몇 군데 오자를 발견하는 바람에 혹시 이게 번역가와 편집자의 문제는 아닐까 싶은 의심도 든다. 무엇도 확실하지는 않다.
내용의 절반이 책이 너무 무거워 집 무너지거나 무너질 뻔한 이야기인데, 나는 저런 막장까지는 가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과 그러나 저런 막장 인생이라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킨다.
다른 책들도 떠오른다. 윤성근의 책은 재미 면에서 이 책이 지닌 단점들을 모두 극복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은 스케일 면에서 이 책은 물론 독자까지 압도하는 데가 있다.
길 위의 인생 / 글로리아 스타이넘 / 고정아 옮김 / 학고재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양 극단의 두 우물이 있다고 치자. 한 번은 이쪽 우물에서 빨간 물을, 또 한 번은 저쪽 우물에서 파란 물을 길어야 한다면 얼마나 난망할까. 그런데 이 책은 또 그걸 한다. 그 양쪽 우물에서 빨간 물과 파란 물을 동시에 길어내는, 우리가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책들 중 하나다. 평생을 길 위에서 보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길 위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의 주옥같은 이야기들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책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결코 얻을 수 없었을 특수성의 보석이다. 또한,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 그들과의 교감과 충돌로 빚어진다는 보편적인 지혜도 들려준다.
나는 길에 오를 수 있다. 집에 올 수 있으므로. 나는 집에 올 수 있다. 자유롭게 떠날 수 있으므로. 존재의 모든 방식은 다른 사람의 현존으로 가치가 더 빛난다. 캠프 치기와 계절 따르기 사이의 이 균형은 아주 오래된 동시에 아주 새롭다. 우리 모두 두 가지 다 필요하다.
아버지는 오로지 길의 기쁨을 위해 혼자 죽는 편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는 집을 갖기 위해 자신만의 여정을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나도 그렇다. 당신도 그렇다. (414-415)
앞으로 50년이 더 지나, 내가 걸어온 길, 만나온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을 때, 내가 이 책의 절반, 혹은 그 절반의 가치라도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선,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꼼꼼히 듣고, 자세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위대하고 찌질한 경제학의 슈퍼스타들 / 브누아 시마, 뱅상 코 / 권지현 옮김, 류동민 감수 / 휴머니스트
나는 비꼬는 책을 싫어한다. 그러나 제대로 비꼬는 책은 사랑한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지식의 교수대가 있다면, 가장 먼저 마셜의 머리를 건 다음 파레토, 발라, 제번스 등 신고전학파 일당 전체에게 벌을 줄 것이다. 당시에도 이미 낡았던 가설(오늘날에는 오죽하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실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경제의 균형, 이를테면 공급이 수요에 다가가거나 수요가 공급에 다가가면서 추는 배꼽춤이라고 믿었다.
이 책을 통해 지식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는지가 채점기준이 된다면 득점에는 독자의 수준과 입장에 따라 논쟁이 붙겠지만, 일단 재밌다! 나보다 6살이나 어린 친구가 그렸다는 만화는 정말 뭐라고 칭찬해야 할지 말을 못 고를 지경이다.『자본』의 귀퉁이에 조그맣게 스마일을 그려넣고 있는 맑스의 저 표정을 좀 보라지! 그림은『자본』이 그야말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제대로 비꼬고 있다. 만화 속 맑스는 예언자다! 그의 염려대로『자본』은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만 실은 출간된 후 150년 동안 진짜로 읽은 사람은 전 세계를 탈탈 털어도 열두 명, 좋게 봐줘도 열 세명 뿐이며 향후 10년 안에 읽기만 하면 그 사람이 곧바로 열 네번째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추측되는 비운의 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저러나, 그간의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어쩐지 나는 맑스를 그린 그림에 페티시가 좀 있는 것 같다. 저 지맘대로 수염 하며, 저 결코 가려지지 않는 배 하며. 하악하악.....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 권김현영 외 / 교양인
이 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를 그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서 찾아냈다. 노동자의 임금 또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노동력이 하나의 상품이라고 하면, 그 노동력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들의 노동시간의 총량을 임금으로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 불렀고, 노동자가 노동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물적, 정신적, 교육적 여건들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로 본 것이다. 근데 이때, 아내가 제공하는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즉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가사노동의 가치를 매기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임금 전체가 낮게 책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이놈의 여편네가 집에서 빈둥빈둥 하는 것도 없으면서 서방이 왔는데 밥도 안 내놔, 라는 개소리를 할 권리가 있다는 지독한 오해를 획득한 대신 임금의 일부에 손실을 보게 된 제 발 찍기식 실책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오독일 수 있다. 거친 결론일 수도 있다. 깊이 공부해 본 적이 없으니 자신이 없다.
어쨌든 이런 생각을 친구놈에게 말했다. 친구놈은 주류경제학의 입장에서, 가사노동은 딱히 그 가치를 측정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나는 측정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측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놈은 그렇다면 책정된 가사노동의 대가는 누가 지급해야 하냐고 말했다. 나는 임금 자체가 가사노동을 배제하여 부족하게 책정되어 있으므로 임금 상승이 수반되어야겠지만 최종적으로는 가사노동이라는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놈은 그렇다면 그것이 돈이 오가는 계약관계랑 다를 것이 무엇이냐며, 가족이란, 결혼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 부셔야 할 것이 곳곳에 있다. 낭만적 결혼에 대한 가부장적 환상. 사랑은 대가가 없는 것이므로 돈이 오가면 오염된 것이라고 보는 맹목적인 헌신의 사랑관. 정신차려야 한다. 그럴 이유가 없다. 인간이 만든 모든 관습은 절대 공평하지 않다.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관습으로 고정될 이유가 없다. 관습이 전통이 되었다는 것은 보편성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통제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이다. 전통이 문화가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정해주어야 할 절대적인 가치가 발현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통제력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그들을 감추는 투명망토가 되었다는 뜻이다. 많이 읽어야 한다. 날카롭게 보아야 한다.
근육을 사용해야 걷거나 달릴 수 있듯이, 이론이 있어야 우리는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는 현실의 중력에 대항해서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다른 것이야 말로 '새로운 것'이다. 중력을 거스르기 위한 힘, 이것이 바로 근육의 쓸모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론은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찾아내는 관점을 뜻하기도 한다. (5)
syo 2017-09-02 공감 (33) 댓글 (2)

욕도 많이 먹는 교수님이시지만 나름 늦은 나이, 학문하는 자로서의 험한 길을 걸으려하는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던 책. 당시는 별 생각없이 읽었다. 몇 년 전 보았지만 다시 한번 더 읽고 싶다. 힘들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책.
인문좌파를 위한 실전 가이드는 누가 쓰실지??
옛날에 블로그에 써놓았던 글을 찾았다.
학문하는 자를 위한 처세술 5단계 http://blog.daum.net/ggozz/13756442
:Dora 2016-09-25 공감 (8) 댓글 (1)

1편 이미지 존재론
이미지라는 것은 현대사회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가 존재하느냐 아니냐에 대해 묻는다면 난감할지 모른다. 존재적인 구성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게 이미지가 아니라 관념적인 영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영상이 존재해도 그것은 만지거나 느끼거나 할 수 없다. 가상의 투영체가 현실의 인간들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왔다. 흔히 2D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 즉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지로 존재하는 캐릭터는 현실부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한다. 한편으로 파생실재(hyper real)의 존재들은 설사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해도 우리에게 과연 그들은 단 한 번이라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시절 TV 드라마를 그나마 보던 때 최고의 인기배우가 최진실이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그의 아이들은 각종 악플과 루머로 시달린다. 그러나 최진실은 육체적으로 소멸해도 영상에서는 존재한다. 그녀는 정말로 죽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반드시 그녀만이 아니라 많은 연예인조차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도 영상에 남겨 우리에게 전달된다. 영화광이라면 반드시 찾는 히로인이라면 오드리 햅번이나 마릴린 먼로 같은 배우일 것이다. 그녀들은 이미 육체적 존재는 현실은 없다. 하지만 영화광들은 그녀들의 사진을 모우고, 때로는 다른 여배우들이 그녀를 흉내 내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다. 영상은 인간의 죽음조차 죽음이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불러낸다.
이미지 존재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강사 분이 갑자기 <공각기동대>를 이야기할 때 그런 존재론적인 부분이 대략 이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실재로 있다고 여긴 게 과연 진짜였는가? 공각기동대 극장판 <Ghost in the shell>에서 인형사란 존재가 등장하여 의체를 가진 인간의 기억을 해킹한다. 어느 남자가 사진을 보며 자신의 가족이라고 동료에게 소개하나, 막상 그 사진은 강아지가 찍혀있다. 그가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기억이란 과연 사실인가? 허구인가? 가상의 존재에 대해 성행위도 마찬가지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후속 극장판 <이노센스>의 경우 어린 소녀를 납치하여 그 소녀의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를 기본 자료로 삼아 섹스로이드의 운영체계로 만든다.
인간이 아닌 기계인간을 인간과 성행위를 한다는 설정과 더불어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영상으로 가능하기 시작했다. 이미지라는 가상의 영역이 인간에게 미치는 여파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반드시 이미지는 위와 같이 배우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이나 공상과학적인 요소만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일상 그 자체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광고를 넘어가면 그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2. 섬뜩한 자본주의의 미학
현대인들에게 신용카드를 가지지 않을 자는 얼마나 있을까? 나도 보통 마트나 술집에 결재할 때 신용카드보단 현금결제를 하려고 한다.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나 사고, 술집에 가서 소주 몇 병 혹은 막걸리 몇 통 정도 마시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보단 현금을 우선하려는 이유는 카드의 이용은 물리적으로 자신의 지갑에 꽂힌 화폐의 수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통장에 있는 잔액을 소비한다. 현대인들은 화폐를 지폐나 동전으로 들고 다니겠지만, 나머지 재산을 봉건시대처럼 집에 금화나 보석으로 나두지 않는다. 유럽 봉건사회에도 은행은 있었지만, 은행 내에 화폐 역시 금화와 보석이다. 강도가 닥치거나 전쟁이 나면 그대로 사라질 존재다. 현대의 화폐는 지폐보단 은행에 기록된 사이버머니다.
공인인증서를 로그인하여 은행계좌에 보이는 금액이 나의 현재 재산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의 숫자로 보일 뿐, 자신의 손 안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다. 신용카드의 신기루란 바로 그런 식으로 작용하기에 내가 당장 어느 정도 결재해도 많이 쓴 것인지 아닌지를 잘 모르게 해준다. 하지만 1달에 1번씩 우편으로 날아오는 대금청구서는 자신의 소비생활의 비극성을 알려준다. 신용카드의 경제적 패턴이 우리 일상을 깊이 침투할수록 우리는 자본주의의 미학에 빠지게 된다. 원하는 데로 물건을 구입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자유는 오로지 그 개인의 자유이며 권리다. 그러나 뒤에 다가올 경제적 책임은 자유롭지 못한 결박이 된다. 신용카드 광고에서 모든 것이 그 카드 하나로 되는 순간, 우리는 카드로 인해 모든 것이 매개되고, 자신의 생활에 불편함까지 느끼게 된다.
예전에 내가 사람들을 내 차를 태우고 대구 팔공산에 간 적이 있었다. 팔공산에 위치한 파이데이아 인문연구소 북 카페를 가기 위해서였다. 가는 도중 같은 도서모임 한 분이 내 차를 보며 놀라듯이 말했다. “어라 중형차인데, 수동이네요. 게다가 하이패스와 네비도 모루 분리되었고요.” 개인적으로 그렇게 된 상태도 있었지만, 일부로 차량을 수동을 구매했다. 기름연료도 아끼고 구매비도 저렴하나, 더 중요한 건 운전은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지 차의 편리성에 기대기가 싫었다. 하이패스를 지날 때 단말기를 이리저리 옮기고, 일일이 하나하나 정리하는 내가 재밌게 보일지 모르나, 나는 “자동에 의존하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안 되면 엄청 불편해요.”라고 했다.
신용카드의 광고로 돌아가면 신용카드 하나가 모든 것을 통용하게 해준다. 버스지하철, 식당과 핸드폰요금 결재, 심지어 불우이웃돕기가 카드로 세금도 카드결재가 가능하다. 분리된 기능이 하나로 모이면 모일수록 편리함은 증가하나, 만약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더욱 놀란 것은 모바일 기능이었다. 모바일기능
이 작동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마트폰 단말기를 분식하고 교체하는 순간 엄청난 수고가 들인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해킹이 만연하고, 스마트폰에 금융기능은 더더욱 금융범죄를 야기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에게 편리한 도구는 인간 그 자체에게 더 불편한 족쇄를 걸게 해주는 함정이 되었다. 문명의 이기와 편리함에 빠진 인간, 결국 그런 일들은 인간 스스로 의존적이고, 시스템에 의해 사육되어가는 수동적 존재로 전략한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도구에 의존하면 할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결국 나약한 인간이 된다고 했다. 루소가 이 책을 저술할 때가 1750년 중반 정도다. 250년 훨씬 지난 지금의 문명에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광고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40대 남성, 실제 그가 찾아야 할 사람은 늦은 나이라도 같이 삶의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미래를 같이 열어갈 사랑을 찾아야 하는 게 바르다. 광고 속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다를 수 있으나, 광고에서는 신용카드의 기능이 모든 일상을 차지했다. 인간의 곁에는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 대체된 것이다. 어째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자본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의 만능을 보여주는 광고는 자본주의의 미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30초 광고는 식당에서 식사할 때 잠시 본 기억은 난다. 3분은 아니다. 3분에 나온 광고는 신용카드의 아름다움보단 차라리 소름이 돋는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였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다가가는 것처럼 말이다.
3. 아무 것도 되는 게 없어?
위 제목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책 제목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에게 다양한 문명혜택이 돌아가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불만투성이다. 실재 이 책에서는 미국의 1960~1980년대 이야기를 해준다. 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늘어나는데, 왜 불량품이 많은지, 소비자가 불량품을 구매하여 항의해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은지 말이다. 이미 우리 사회도 그런 형태로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의 중심으로 가는 점에서 소비사회에 소비자는 권리를 누리는 경제적 주권자가 아니라 단순히 기업의 이윤을 위해 소외되는 존재로 전략했다. 문제는 소비하는 주체들은 거의 대부분 많은 국민이나, 그들은 스스로의 문제를 자각하기보단 그저 그 개인의 영역으로 돌린다. 개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관계에서 자유적인 조건이 이런 식으로 전도된 게 아닌가 싶다.
신자유주의 국가 중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도 되겠지만, 우선 미국이다. 자본주의 영역은 자유주의와 함께 겹치어 갔지만, 자유의 조건은 철학에선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가깝다면, 현실의 자본의 차이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을 따라가는 것처럼 말하나, 고전경제학의 애덤 스미스나 최후의 보루인 존 스튜어트 밀까지 넘어가면서, 밀의 <자유론>을 보면 인간의 자유란 인간의 존엄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성의 절대적 판단으로 그 사람의 판단과 논리가 중요하며, 타인에 대하여 이타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아마 이런 논리라면 현대에선 보인 신자유주의라는 게 자유주의철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드러난다.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지 않고, 자본의 자유로서 움직이나, 자본의 자유에서 자본 그 자체는 자율성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문제는 자본은 자본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는 점이다.
돈을 은행에 넣고 가만히 넣고 있다면 예전에는 이윤이 제법 되었지만, 금리의 조정으로 통장의 이자가 낮아지면서 어느 누군가는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 돈을 제대로 굴리지 못한다고 여긴다. 결론은 누군가 계속 돈을 굴리는 일이 생기면, 반대로 누군가는 굴리지 못할 것이고, 돈을 굴리지 못한 사람 중에는 그나마 생계수단을 유지할 수 있는 부류도 있는 반면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류도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처음에 나온 자들은 빈민의 여성이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활보할 때 국가세금을 낭비하는 자들을 매도하고, 그들 대부분이 흑인여성이라고 미디어에서 떠들던 시기를 예를 들었다.
전에 TV를 보면서 미국의 어느 백인관료가 흑인 슬램 가를 돌면 젊은 흑인남성에게 군에 입대할 것을 제안한다. 미국은 거대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이며, 군대를 운영하려면 첨단화된 시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군인이 필요하다. 군인을 선발하려면 장군과 장교 같은 지휘관과 고급인력이 필요하나 아래로 부사관과 사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력으로 본다면 장교와 부사관보단 사병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런 병사를 충원하기 위해 가난한 흑인에게 제안한다. 그런데 흑인여성 특히 아이를 양육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각종 감시와 언론의 매도성은 그들은 계속 그 사회에서 고립 내지 또는 소모되어야 할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위직과 재벌가문의 후예들은 군에 가지 않거나 면제받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군에 가는 것은 평범한 집의 남성이다. 그런데도 그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군문제를 사회구조적인 부분보다 오히려 남녀 간의 불평등으로 전도시킨다. 특히 미디어가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두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거나 또는 문제가 터지면 그 일들을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물꼬를 돌린다. 최후에는 이상하게도 그런 문제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반드시 그런 일은 군대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아니라면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망각하게 만드는 일도 많다. 처음 주제인 이미지, 이미지는 TV의 화려한 광고와 드라마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신문잡지, 인터넷, 스마트폰, 심지어 길가에 네온간판과 전단지도 포함이다.
우리의 관심사를 우리의 생활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접해도 아무 관계없는 것들로 대체된다. 가끔 연예인 기사가 뜨면, 주변에 사람들이 화제로 삼아 입을 올린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게 나보고 뭐 어쩌라고?”, 여자연예인들이라면 “내하고 만날 거야? 데이트할 거야? 평생 나하고 손잡을 일도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언론에 접하는 비극적 소식에 대해 논하면 사람들은 “뭐 좋은 일이라고, 나와 관계없자나.”라고 한다. 아무 관계없는 일에 열을 올리는 반면, 타인의 불행한 사고에는 자신의 무관계성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이 있지만, 이제는 언론과 미디어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고가 시보다 더 철학적인 세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중들은 전체화와 개별화란 이중적인 잣대로서 서로의 영역을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어떤 A란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B라는 사람에게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 보는 나는 C라는 사람이다. 결국 B가 당하는 상황에서 D라는 인물이 무관심하게 보고, 만약 내가 A의 비극을 논하고 B의 상태를 이야기하더라도 D는 요지부동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좋지 않은 일 대신 어떤 이익에 대한 일이라면 어떨까?
4. 비판과 비판에 대한 비판, 대안은 무엇으로?
어떤 부당한 압제에 대해서도 그 압제자와 주변 무리들은 자신들의 테제가 있다. 되도 않은 논리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잘 포장한다. 그렇다면 이에 반대하는 안티테제가 있다. 안티테제들은 그들의 주장과 의도하는 바를 폭로하고 저항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관계에 있던 자들이 서로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있고, 압제자이든 아니든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무조건적으로 태클을 거는 일도 있다. 반대를 위한 게 과연 무엇을 위한 반대인가?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인가? 목적보단 집단적인 행동인가? 과거 독재자와 압제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분명 안티테제의 효과는 정당성이 있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안티테제만으로 가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무조건 하기와 안 하기의 경계선에서 나오는 것은 힘겨루기고 힘겨루기가 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 하나를 밟는 일이었다. 주로 우리나라에선 80년대까지라 보면 될 것이다. 경찰과 군인을 동원한 정치적 수단은 무력에 의한 통치다. 그러나 이제는 무력이 아니라 지식과 행정에 의한 통치로 전환되었다. 특히 지식이 무지식의 대중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식은 국가권력과 시장자본과 결탁하기 시작했고, 언론과 미디어에서 지원했다. 지식의 세분화, 관료행정의 책임보단 하위행정에 책임전가로 이어졌다. 지식과 권력은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고, 지식에 대한 폭로 역시 지식에 의해서였다.
지식이 인간을 속이는 도구로 되고, 속임수를 파헤치는 도구로 되었다. 강연자분이 말한 것과 뒤풀이에서 나온 4대강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4대강은 대통령만이 아니라 정치 관료와 국가행정기관의 합작품이다. 국토부와 환경부를 주도한 작품이다. 마치 거대하게 포장한 이 사업을 만약 우연히 하천 인근을 지나면 허구임을 알게 해준다. 문제는 당시 설계과정 시에 제대로 된 현장조사를 하지 않았고, 지도 위에 선을 긋는 수준이라고 한 점에서 현장과 설계의 관계가 전혀 맞아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국토부가 사업자와 승인권자로 되었다면 협의권자는 환경부다.
환경영향평가 협의 시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게 위에 드러나지 않은 점은 사업자와 협의부서, 그밖에 환경관련 학회조차 문제를 제대로 의문시하지 않은 것이다. 행정기관 말단은 이 일을 실제로 담당하나, 이 일에 대한 권한은 없다. 협의과정은 담당자로부터 하나, 사업에 대한 진행은 상부에서 결정한다. 관료주의적 행정은 그 문제의 해결권을 가진 자와 그 일을 수행하는 자가 분리되어 문제가 된 것이다. 말단관료는 관련규정에 따르고 결재권이 없어서 책임회피가 되고, 상부기관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지 않기에 담당자에게 문제를 제기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핑퐁게임 같은 피해보는 사람만 방황하여 결국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비단 이런 문제는 4대강만이 아닐 것이다. 그마나 4대강은 하천이 공공의 재산이고, 개인이 소유할 수 없고, 개발조차 어렵다. 하천구역은 친수구역으로 설정하여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유도하지 않은 이상 하천은 복원 및 보전구역으로 설정된다. 개발은 주로 이루어진 곳은 도시지역과 도시인근지역이다. 도시내부와 도시인근은 결국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다. 도시의 개발이 머리 아픈 것은 개인의 이익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도시의 개발은 주거환경개선, 교통소통, 공원부지로 통한 자연환경 향유라는 슬로건이 따라 붙는다. 문제는 도시의 땅은 국유지와 공유지보단 사유지에 기반 한다. 특히 부동산의 이익은 나의 영역이 아닌 옆에 있어도 영향이 온다.
대규모아파트 주거단지가 오면 모두 환영하고, 만약 혐오시설이 오면 반대를 한다. 강연에서 말한 푸코의 저항을 실현하려면 먼저 그 시설이 오는 기능적 요소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도시에서 아파트단지가 오고, 특히 재개발이 오면 땅값이 몇 배로 오른다. 집값이 오른 사람은 좋겠지만, 나중에 자기가 받은 돈으로 다른 곳에 갈 수 없으면 문제가 된다. 대규모공사는 부동산증가라는 이익과 더불어 공사 시 분진, 소음, 진동, 토사유출이 문제가 되고, 완공 후에는 교통체증, 교통소음, 일조권장해, 빛 반사 등이 문제가 된다.
환경적으로 본다면 개발은 이중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개발은 필요하나 막상 그 지역의 주민들의 입장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나 주변 이권단체와 관련단체가 사업자와 국가세력을 지지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부산에 당초 공원지역이나 공공시설이 유치되기로 한 지역에 대규모 상업시설이나 공업시설로 용도 변경된 경우가 있다. 그 일을 추진하는 자들은 자본가들이고, 그 자본가들은 정치행정과 결탁한다. 문제는 주민이 피해를 보는데도, 그 주민들은 자본가들에 대해 반발하면서 그 자본가와 결탁하고 있는 정치행정들에게 비판 없는 지지를 보여주는 일들이 있다.
강의내용에서 계몽이 새로운 억압과 차별을 만들지만, 계몽적인 요소가 배제된 경우 도시의 난잡한 개발이 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도시의 기능은 주거만이 아니라 인간생활 그 자체를 영위하는 곳이다. 도시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고, 인간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 어느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개발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파괴된다. 도시는 토지라는 개념이 사유지로 되어 있으나 토지 아래의 지하수와 암반, 토지 위의 대기층은 사유화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일정장소의 파괴는 그 장소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이어진다.
물론 도시개발이 중요한 사업이 되어 어느 지역에 큰 발전이 될 수 있겠지만, 때로는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지역의 특성과 지역주민의 입장보단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이 많다. 그래서 대안이 필요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열쇠는 개발사업자와 관료집단보단 지역주민에 의해서 유도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역주민에게 그런 지식적 배경이 없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이다. 그런다고 반대만 외쳐도 해결이 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하는 것과 어느 것이든 반대하는 것은 한계성이 다다른다. 대안의 영역은 삶에서 다른 방식을 구현하기를 바란다. 도시에 대한 예술적 기능이란 바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을 만들게 해준다.
삶의 예술성에서 과거 농촌에서 농번기에 서로 농가를 부르는 농민들은 그게 삶의 형태다. 그러나 지금은 무형문화재 내지 민속 문화로 본다. 과거 어부들이 용왕제를 지낸 것이 근대에 이르러 미신에서 다시 그 마을의 축제 내지 그 사회의 문화행사로 전환된다. 농촌과 어촌의 행사도 사실 도시화라는 이름아래 묻혀간 전통들이다. 부산은 기본적으로 농업보단 어업이 활성화되어 있고, 어항이 있는 마을에선 용왕제 외에도 다양한 민간문화가 남아있다. 그런데 만약 주변이 개발되어 어항조차 존폐위기라면 그 문화의 유지에도 치명적인 위기로 될 것이다.
공간의 파괴는 정신적 파괴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에 어느 지역의 도시개발사업에서 당산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 나무는 그 마을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나무로 민간신앙에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아마 몇 십 년 전이라면 그 나무를 베어 다양한 목공용품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환경영향조사로 나무 존치상태를 점검하여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환경영향평가 제도로 통한 지역주민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물론 반영되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마을은 원래 울산에 위치했지만, 변두리에 위치했으며, 아파트보단 주택이 많았고, 상업시설도 대규모가 아닌 소규모였고, 어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들이 즐비했다.
도시의 발전으로 대규모 주거단지로 많은 인구가 생기고, 이에 대한 인프라로 대형마트로 설립되고, 도로가 넓어진다. 이런 발전은 부동산의 증가로 되고, 세를 들어가는 영세민 입장에서는 그 지역에서 장사를 포기하게 만든다. 만약 그 지역주민에게 적정한 대안이나 혹은 그들이 안심하고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부분 현실에서 그런 상황을 외면했다. 실제 서울수도권에서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신축된 대규모 상업시설로 들어갔으나, 그곳의 임대료가 너무 비싼 나머지 결국 나오게 되었고, 그 건물은 추후에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에 매각되었다.
영세한 지역 상인들에게 고객은 필요하나, 그 고객들이 너무 대규모로 조성된 곳으로 이동하면, 결국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없다는 점이다. 강의를 들으며 전에 읽은 최병두 교수(대구대학교 지리학과)의 <환경갈등과 불평등>이 생각났다. 위천공단 조성에서 당초 경상북도가 지역자치단체에서 대구로 이전되고, 대구시는 위천공단에 대한 문제로 중앙정부와 지역주민과 갈등을 빚어왔다. 대구지역 일자리와 산업시설용지 부족은 산업단지 조성이란 정책적인 방법이 있지만, 그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대규모 단지가 조성되면 사실상 대구주민보단 입주업체에 해당되는 직종과 직렬이 들어온다. 대구지역 주민들이 기계공학 전공자나 자동차학과 전공자가 아니라면 만약 자동차공장이 와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대규모 부지조성 시 곤란한 점은 자본이 중앙정부로부터 나오면 부지공사 시 지방업체가 주도되는 게 아니라 대규모 건설사가 주도되며, 지방업체는 소외된다. 또한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이 입주하면 많은 수익이 지역주민에게 가는 것보단 수도권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부산항의 무역의 이익에서 발생하는 세금이 지방자치단체보다 오히려 중앙정부로 가듯이 기업의 이윤과 국가의 세금이 중앙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단지 오는 것으로 환영하고, 집값이 오른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삶의 질을 저하시킬 우려를 그들 스스로가 만드는 것과 같다.
도시의 기능은 뭐든지 환경과 연결된다. 공간의 배치성에는 수질, 대기, 토양, 소음진동 등과 같은 환경적 영역과 충돌한다. 공원녹지 역시 자연환경과의 배치에서 인간생활환경과 밀접한 연계가 되어 있다. 강의 도중 해운대 동해남부선 선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선로 공간부지가 광대하고, 주변지역 철도로 인해 훼손되지 않았으며, 선로구간에서 보이는 경관은 아주 탁월하다. 그런 공간을 공공재산, 즉 시민의 휴식과 여유 공간이 아닌 기업이 호시탐탐 노린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가 해운대 달맞이고개다. 1990년대 정도만 해도 그렇게 많은 가게가 입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맞이고개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가게가 입주하면 산을 깎고 길을 내어야 하고, 그러면 녹지의 축이 좁아진다. 달맞이고개 도로 밑에 작은 공연장을 만들었는데, 자연석이 아닌 콘크리트 내지 화강암 재질은 녹지의 축을 파괴한다.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던 과거의 해운대 앞바다는 자연적인 모습이 농후했으나, 현재는 점점 갈수록 부산시내의 커피숍과 고급상점이 많은 곳처럼 변했다. 게다가 주변에 아파트나 대규모 주거단지의 조성은 더욱 환경적 부담을 키운다. 모두가 보기 위해서 그곳을 보전하는 것이 바르나, 다들 개인적 소유를 하고 싶은 욕망에 자연은 파괴되고, 아름다운 환경은 점차 그 모습을 잃어간다. 공유지의 기능이 사유지화 될수록 환경적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경제적 여유를 가진 자들이고, 그에 반해 빈곤층은 나쁜 공기에 노출되고 불량한 주거환경에 의해 심신이 불편해진다. 도시에서 환경정의는 바로 이런 문제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삶의 예술이란 말은 각 개인의 삶에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민간에서 전해온 예술은 특별히 예술적인 목적이나 예술인이 모인 게 아니라 그 삶 자체가 예술로서 만들어 온 것이다. 단순히 무조건 변화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변화라는 그 자체가 무리한 시도가 아닌 하나의 흐름에 따라 온 것이다. 대안의 선택에서 무조건 시도하려는 것과 반대하는 것에서 대안의 자세에서 다른 길을 보여주거나 혹은 잠시 중단하여 후에 의론을 나누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가기 위해서는 이런 안건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예술인들이 하는 예술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나 혐오시설 신축예정지에 환경오염 피해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퍼포먼스로 하는 것 역시 예술이다.
그 예술은 특정한 세계관이 아니라 우리 삶이란 일상에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경고주의보다. 언론과 미디어는 국민의 눈과 귀를 길들여 미디어에 경제적, 정치적 권력자에게 봉사한다.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알아가는 것이다. 강의 자료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것처럼 제작은 그 지역의 자본을 투자하여 이익을 회수하려 하는 이고, 노동은 그곳에 투입되는 노동자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어느 곳을 갈취하고, 갈취당하는 곳에서는 노동으로 착취당한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행위라고 한다면 그 행위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고 해체하여야 한다. 그 행위는 일회용이 아니라 연속되는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자료 뒷부분에 르페브르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이야기가 나온다. 엉뚱하고 도발적인 행위를 하던 그들은 끊임없이 도시 안의 자본주의에 대해 조롱한다. 그들은 자신들부터 이상하게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행위에 대한 목적성을 전달한다. 그들을 접하는 대중들은 그들의 도발에 처음 그들에게 분노하겠지만, 상황주의자들은 그것이 목적이기도 하다.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틀에 갇혀 언제나 당연한 것만 받아들이려는 현대인에게 무엇보다 그 인식을 바꾸는 충격이 필요하다. 예술은 미술관에 전시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의 생활에서 삶의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계수단으로 자본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지만, 자본 그 자체에 종속당할 수만은 없다. 만약 종속당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권력자들에게 평생 소비만 하거나 노동만 하거나 또는 감시만 당할 것이다.
만화애니비평 2015-08-01 공감 (7) 댓글 (0)

이택광교수의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다. 철학을 꾸준히 공부하다보면 들뢰즈이후의 철학과 현실에서 괴리를 느낄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 이택광교수는 탁월하게 동시대 사유의 방향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소나무 2014-06-03 공감 (1) 댓글 (0)

저자는 기존의 좌우 정치 지형에 속하지 않는 ‘다른 주체’로서 ‘인문좌파’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인문좌파는 좌우 이념을 모두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는 ‘합의에 도전’하고 ‘불일치와 불통을 조장’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모험’으로서의 이론관에 부합하는 존재이다. 현실의 중력에 저항하기 위해 인문좌파는 이론이라는 근육을 키워야 한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잃을 것’이 조금씩 더 많아짐에 따라 대개 보수화되기 마련이지만, 사유의 자유를 통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도전하는 ‘인문’ 좌파는 계속해서 ‘좌파’로 남을 수 있고 남아야 한다는 것이 아마 저자의 생각인 것 같다. 그렇다면 최신 사조에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인문좌파의 숙명일 터이다. 이택광은 그러한 인문좌파에게 지금 필요한 이론으로서 포스트 구조주의의 안티테제들을 소개한다. 논의의 시작은 마르크스이다. 근대 사회의 욕망은 자본주의적 상품 교환에 그 기본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 덕에 대중화된 라캉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은 더욱 공고해지며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정치철학의 위치를 되찾는다.
그런데 저자의 이론근육론(?)이 무색하게, 이 (얇은) 책 한 권을 읽어서 10여 명의 이론가 혹은 경향들에 대한 이론근육을 제대로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책을 통해 해당 이론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자극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있는 것을 애써 찾아 읽어보려는 의사가 없는 독자에게는 변죽만 울린 셈이다. 핵심근육(을 위한 기초)은 이 책으로 어느 정도 형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잔근육은 결국 독자의 몫이다. 잔근육까지 형성된 후에라야 이론은 온전한 근육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런 류의 책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이다. 어려운 글을 쉽게, 그것도 방대한 분량을 짧게 한 권의 책 속에 담으면서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한계 말이다. 객관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는 잡기 어렵다.
이 책은 성격상 뭔가 좀 애매한 책이다. 에세이보다는 무겁고 이론서보다는 가볍다. 저자는 대중성을 다분히 의식하고 쉽게 쓰려고 했고 군데군데 주관적인 주장도 하지만, 때로는 주석을 달아 객관적인 글쓰기의 외양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책이 무거워 보이지 않도록 주석을 최소화하고 미주로 돌려서 구성을 심플하게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글의 출처가 불확실하다. 예컨대 어떤 챕터는 100% 저자의 주관적인 글이 아닌 게 분명한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석도 없고 출처도 전혀 나와 있지 않은데, 내용을 Wikipedia에서 긁어온 것이 아니라면 주석을 달아주는 게 좋았을 것이다.
‘가이드’를 통해 ‘인문좌파’의 세를 넓히고자 했다면 좀더 쉽게 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 책에서는 이론과 전문용어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쓰일 때가 많고 현학적인 학술 은어도 종종 여과 없이 쓰인다. 아마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부생(1학년 제외)들이나 최신 유럽철학에 관심과 지식을 꽤 쌓은 소수의 인문학도들에게 가장 유용한 책일 것이다. 때문에 가이드로는 큰 점수를 줄 수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정한 기획 의도 하에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해서 최신 이론들을 정리한 저자의 노고는 충분히 높이 살 만하다.
이 책은 1990년대 중후반 대학가에서 널리 읽혔던 『철학과 굴뚝청소부』(이하 ‘철굴’) 를 연상시키는데, 그 책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철굴>은 근대와 탈근대의 철학에서부터 구조주의 및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까지 살피는 반면, <인문좌파>는 “포스트구조주의라 불렸던 이론들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경향들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다.” <철굴>은 글의 어투(구어체)라든가 삽화의 조악함에서부터 이미 “이 책은 가벼운 책입니다.”라고 웅변하고 있지만, <인문좌파>는 가볍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거워 보인다. <철굴>은 과잉단수화를 의도적으로 활용하여 과감하게 객관성을 버리고(?) 저자의 시각으로 이론을 단순화시켜서 독자의 이해를 높이지만, <인문좌파>는 객관성의 외양을 (어정쩡하게) 유지하려다보니 글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가 이론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고 어디서부터가 저자의 주관적 생각인지 불분명하다. 굳이 좀더 비교를 더 해보자면, <철굴>은 근대와 탈근대라는 일관된 주제 하에 이론들을 어느 정도 직렬적으로 배치했지만, <인문좌파>는 이론들의 배치가 병렬적이다. 특히 7장 지젝 이후는 더욱 그렇다. ‘과잉단순화’ 전략과는 거리가 먼 저자의 입장 때문이기도 하고 일관된 타이틀 아래 담기 어려운 현대 철학의 다양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현재적, 잠재적 ‘인문좌파’를 타깃으로 삼아 그들을 가이드해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인문좌파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가이드하기에 이 책은 지나치게 쉽고, 잠재적 인문좌파로서 이 책을 통해 현재적 인문좌파가 되어야 할 이들을 가이드하기에는 다소 어렵다는 점에서 그 입지가 애매한 책이 되고 말았다. 마치 현대 우리 사회에서 ‘인문좌파’의 실체가 아직은 애매모호한 것처럼 말이다.
자정의책들 2013-04-05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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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교수님의 이런 저런 글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점. 사안 내지 내용의 본질적인 부분은 언급되지 않고 주변적인 내용 혹은 사소한 부분을 필요 이상으로 현학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두드러짐. 그나마 현학적인 표현이 세련되지도 않고 저자가 아는 것을 억지로 가져다 붙인 느낌.
키호 2013-06-02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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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좌파들의 론리플래닛 ! 배낭에 한권쯤 넣어두시라
알케 2010-04-15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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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moon 2010-06-30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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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뭘 해주겠다는건지...
어떻게 2011-02-24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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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교수의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다. 철학을 꾸준히 공부하다보면 들뢰즈이후의 철학과 현실에서 괴리를 느낄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 이택광교수는 탁월하게 동시대 사유의 방향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소나무 2014-06-0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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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 벗어나 세상에 발을 디딘 행동하는 인문학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는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인문 ‘좌파’라니, 세상에. 이젠 학계에서도 서로 정치 성향의 검증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물론 그런 내용은 아니다. 이택광 교수는 남한에서 협소하게 쓰이는 ‘좌파’라는 용어를 원래의 의미대로 사용했을 뿐이다. 때문에 다소 도발적인 제목과 뻘그죽죽한 표지를 보고 지레 놀랄 필요는 없을 듯하다.
(<경계도시 2> 리뷰 썼을 때도 밝혔던 이야기지만,) 난 철학과를 졸업했다. 점수에 맞춰서 지원한 게 아니라, 내 신념대로 지원한 것이기에 부끄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철학과를 지원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였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원인을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그러니까 94년에서 95년 사이에 참 많은 대형 사고들이 일어났었다. 한강 대교가 부서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가스 송수관이 폭발하고, 신문사는 연일 끔찍한 사진을 사회면에 쏟아내던 그런 시절(그러고 보니 생애 가장 화끈한 민방위 훈련도 그 때 이루어졌던 것 같다). 입신양명을 위해 사춘기마저 저당 잡히고 숨 막히게 살아갔던 시절이었지만, 너도 나도 비판만 일삼을 뿐, 대안이나 원인에 대한 고찰은 거의 없었던 답답한 시절에 새로운 사유에 대한 필요성과 그 시원은 철학에서 탐구해야한다는 내 유아적 망상은 날 철학과로 이끌게 했다. 게다가 95년 철학가 질 들뢰즈의 투신자살은 나를 더욱 더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이끌었다.
내가 철학에서 바랐던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스펙트럼 혹은 거리두기였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원한 철학은 그 자체로서의 학문이 아닌, 도구로서의 철학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너무나 세속적인 사람이어서, 지금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며 끼니를 때우는 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내게 있어 실용적인 학문으로 여겼다. 하지만, 철학과의 분위기는 달랐다.
내가 겪었던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상당히 지루했다. 철학의 역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칸트와 헤겔의 관념론은 거의 사람을 미치게 하는 학문들이었다. 나는 세기말을 살고 있는데, IMF를 겪어 세상은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의 범람으로 세상은 점점 더 개인에게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교수님들은 18세기의 독일과 20세기의 박정희에서 벗어나지를 않으셨다. 세상과 담을 쌓고 숭고하고 순결한 인식론의 우주에서 유영하는 것. 이게 철학이었고 이게 학문이었나? 너무나 속상해서 입대하기 전, 연합 엠티에서 술기운에 “왜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이론만 배워야 하는 거냐?”고 헛소리했다가 집단 다구리를 당한 경험이 있다. 뱉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 경솔하게 떠들었던 게 아닌가 반성하지만, 그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군대 제대 후, 21세기의 첫 해에 난 철학을 버리고 영문학을 택했다. 살면서 더 이상의 철학은 나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돌고 돌아 2010년을 맞았다. 그동안 내 밥벌이가 되어준 영어는 점차 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무서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고, 난 직장을 관두었다. 지옥이 되어가는 세상의 원인을 파악하길 원했던 내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해서였다. 세속적이란 표현은 때론 민만하고 때론 유치하지만, 영혼을 판다는 말은 아니다. 해방적이기도 하면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겪던 와중에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읽었다.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 그래, 바로 이 책이구나!
이택광 교수는 ‘좌파’라는 단어를 남한에서 통용되는 소위 ‘빨갱이’라는 뜻이 아닌, 비판적 시각을 가진 존재로 봤다. 그가 바라보는 인문학에서의 우파는 학문을 취업, 승진 혹은 진학의 도구로 쓰는 존재들이다. 그가 언급한 인문좌파 역시 인문학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개인적인 용도로 쓰는 게 아닌,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는 사용가치가 다 끝났다고 생각한 마르크스를 시작으로 비평과 이론을 구분해내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현대 철학가들의 이론에 비추어서 바라본다. 벤야민의 만보자(flaneur)를 통해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새로운 주체를 읽어나가기도 하고, 랑시에르와 바디우를 끌어들여 2008년 촛불을 이끈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읽어나가기도 한다. 이택광 교수가 정의하는 ‘인문좌파’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거리를 두며 바라보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동하는 양심들을 말하고, ‘이론 가이드’란 그런 인문좌파 중 한명인 그가 꾸려내는 사상의 연속을 묶어낸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책이다. 사상의 흐름과 철학가들의 반론과 주장 그리고 저자의 진단 등 설렁설렁 읽는 대신 전투적으로 읽어야 겨우 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들은풍월이 있어서 끝까지 손에 들고 읽을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끝까지 읽기는 읽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해 내 도구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는 못했더라도 읽는 것만으로도, 인문학의 효용성에 대해 회의하던 사람들이나 인문학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던 사람들이라면, 그 때 인문학에 기대했고 다가갔던 첫 마음가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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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0-06-19 공감(39)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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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시절, 힘을 사유하는 모든 청춘들에게
이론은 근육이다,라는 저자의 정의는 명쾌하다. 알기 쉽고 주저없이 동의할 수 있다. 안팎에서 대량생산하는 [판타지]를 자유롭게 [사유]하고, 특정한 [입장]을 선택하기 위해 이론은 필수조건이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이론에 [절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이론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듯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이론이 인간에게 자유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 질 나쁜 이론도 도처에 널려있다. 그렇기에, 개인이 납득하고 수용한 이론을 바탕으로 어떤 [선택]을 하고, 특정한 [행동]을 취하는 동안 발생하는 [흠결] 역시 필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흠결마저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이론이다. 따라서, 이론의 쓸모는 인간의 신체에 있어 근육의 쓸모 만큼이나 절대적이고 실용적인 것이다. 아! 현정권에 기생하는 어느 경제연구가의 실용도 실용이겠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다.
여하간, 내 자신 이론의 쓸모까지 운위할 깜냥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의 제목처럼 이론 가이드라도 어떻게 한 번 읽어보면 이 암울한 시절을 살아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속내였다. 그러니 반가울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물론, 나는 저자가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인문좌파]라는 정의가 어느 구석 어색했지만, 인문좌파가 누구인지를 설명한 그의 진정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정치적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 듣기만 해도 솔깃해지는 정의가 아닌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보기 힘들다고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아니, 앞으로 키워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저자가 책을 통해 소개한 이론가들은, 춘삼월 꽃노래처럼 나를 설레게 하지만, 어설프게 끝나버린 첫사랑 만큼, 아쉽게 내 손을 떠난 이들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나의 무지와 게으름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을 소개한 이론서들이 한국의 현실을 잘 버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낯 두껍지만 이론서들의 겉도는 느낌이 내 무지의 결과만은 아니었다고, 나는 항변하고 싶다. 좀 더 알기 쉬었으면, 좀 더 현실정치와 가까웠으면 이렇게 데면데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있는 이론들은 뭐랄까, 답답했고 오기스러워 보였다. 이 또한 나의 무지이지만 말이다. 늦었지만 그래도 올 봄에 만난 이 책은 다행이랄까, 그래 다행이었다. 매번 도망다녔던 [벤야민]과 [데리다]를 다시 찾게 했고, 대학시절 덮어버렸던 [루카치]에게서 내가 놓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책에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그람시]를 다시 찾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했다. 내게는 너무 명민해 보여 얄미웠던 [지젝]이나 뜬구름이었던 [라캉]도 어디쯤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실로 내게는 다행이고, 저자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표할 일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얻은 답이 있어,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이 다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이 책은 가이드 북이다. 나머지는 저자가 안내한 곳에서 궁금증을 느낀, 혹은 괘씸함을 느낀, 혹은 심한 현기증을 느낀 독자의 몫이다. 여행지에서 아무리 살뜰하고 총명한 가이드를 만났다고, 현지의 아름다움을 짧은 순간에 모두 체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사족이지만, 그런 가이드를 만나는 일 역시 현실세계에서는 사실 드물다.
현실로 돌아와, 시절이 하 수상하다. 결여로서 존재한다,는 라캉의 생각에 비명에 가까운 공감을 한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없다'라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여로서 존재하는 그 무엇이, 데리다가 언급한 유령,이 어떻게 현실에서 작동하는지, 나는 소름끼치게 그 장면들을 보고 있다. 지젝이 언급한 실제적 실재, 상징적 실재, 상상적 실재까지도 목도하고 있다. 이 무시무시한 코미디 앞에서 누군가를 향해 욕을 퍼붓기 이전에 내 머리를 바람벽에 찧고 싶은 심정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데,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라는 사실 앞에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그저 혼자만 깨끗한 척 하느라, 정치는, 권력은, 속물적인 것이라고, 눈 감고 귀 막아버린 덜떨어진 청춘을 어찌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 내가 힘없게 부르짖었던 [정의]도 힘을 가져야만 지켜낼 수 있는 것임을 이 험난한 시절에서야 알았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 미안함과 이 참담함을 조금이라도 씻기 위해, 나는 6월 2일 조용히 힘을 행사할 예정이다. 너무 작아 힘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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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5-27 공감(24) 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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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라고 해놓고 책 제목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인문+좌파
그럴 듯한 조합이다. 게다가 이론 가이드라니......
그러니까 제목만 보자면 인문학에 관심 있는 진보성향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이론의 세계를 안내하는 길잡이 책이란 뜻이지 않은가?
제목만으로는 딱 나를 위한 책이다.
나는 사회인문학에 관심은 많으나 잘 모르니 가이드가 있다면 안내가 절실한 사람이다.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매번 세상 현실과 상충하는 모습에 좌절하던 나 같은 인문학적 관심을 가진 우민들에게 이런 이론가이드야말로 꼭 필요한 책이었다.
막연히 인문좌파라는 말에 매력을 느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벅차다'라고 생각했다.
애써 따라가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마르크스를 소개하는 초반부를 읽지만 계속 앞장을 되돌아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생각지도 않은 공부까지 해가며 읽고 또 읽었지만 쏟아지는 옛 철학자들의 말과 이름 모를 현대 철학자들의 등장에 나는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데리다, 지젝, 랑시에르, 라캉, 바디우, 들뢰즈, 네그리, 아도르노, 프레드릭 제임슨, 벤야민......
이들이 대화하는 2010년 아테네 학당에 나 같은 인문좌파지망생은 낄 곳이 없었다. 어느 순간 가이드도 사라졌다. 아니 가이드는 처음부터 없었다. 가이드가 하는 말은 모조리 처음 듣는 말들이었고 가이드는 오히려 그걸 모를 수 있느냐며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냥 아는 척 가만히 따라가보았지만 자기기만이었다. 갑자기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났다. 모르면서 알아먹은 척하려고 애쓰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나는 용기를 내서 소년처럼 소리치고 싶어졌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다!"하고...
"이 거지 같은 철학자들아 당신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야!"
"이 가짜 가이드야 당신 때문에 저 철학자들이 나에게 다 사기꾼이 돼버렸어! 당신이 제일 나빠! 당신 때문에 나는 저 철학자들을 미워하게 되었다고!"
하하.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더니 딱 그짝이다. 무식한 놈이 가이드도 철학자들도 바보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인문좌파라던가 가이드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기를... 장담하건데 이 책은 이론 가이드가 아니다. 이 책 하단에 소개된 문장을 옮기자면,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말이 정확한 책의 소개이다. 머릿속에 이론이 차고넘쳐 쓸모를 찾는이들에게 필요한 책.
참고로 나는 이론의 쓸모를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쓸모는 커녕, 막연한 동경만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내 비참한 서평은 고백적 성격이 강하다. 혹시라도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내 쓰레기 서평을 읽었다며 무시하시길 바란다. 욕을 해도 좋다.
하지만 저 위에 열거한 철학자들의 이름도 생소한 사람은 내 말에 귀귀울여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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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좋아 2010-06-22 공감(26)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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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욕도 많이 먹는 교수님이시지만 나름 늦은 나이, 학문하는 자로서의 험한 길을 걸으려하는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던 책. 당시는 별 생각없이 읽었다. 몇 년 전 보았지만 다시 한번 더 읽고 싶다. 힘들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책.인문좌파를 위한 실전 가이드는 누가 쓰실지?? 옛날에 블로그에 써놓았던 글을 찾았다. 학문하는 자를 위한 처세술 5단계 http://blog.daum.net/ggozz/13756442
:Dora 2016-09-25 공감(8)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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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낡은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모험이다
알랭바우디의 말투를 빌리자면, 이론은 문제를 해설하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론은 낡은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모험이다. - P. 7
이택광을 세 번째 만나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에 이어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통해 저자의 문화이론에 대한 이해와 깊이를 확인했다. 책을 통해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사유의 폭을 넓히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의 내밀한 사적 공간을 기웃거리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얻는다. 그것은 물론 의도적인 저자의 책략일 수도 있고, 개별 독자가 확인하는 공감의 영역일 수도 있다. 저자가 읽은 책을 읽었던 기억과 낯선 글처럼 다시 만나는 자괴감, 생경한 개념을 내것처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오롯이 저자와의 깊은 대화를 나눈 느낌이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저녁에서 밤으로 저무는 시간을 함께 보내듯 그렇게 천천히 음미하며 읽은 책이다.
저자는 문화이론에 관한한 국내에서 누구보다도 탄탄한 내공을 갖추고 있다. 그간의 저작들과 발표된 글들을 찬찬이 읽어보면 어설프게 낯선 이론을 도입하거나 소화되지 않은 개념을 소개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은 어떤 개념을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많은 이론가들을 호출한다. 마르크스에서 지젝에 이르기까지 근대의 철학자와 문화이론에 관련된 유럽의 사상가들은 물론 그들이 주창했던 핵심 이론과 용어에 대한 개념들을 철저하게 실천과 적용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관념적이고 지적인 태도로 말장난에 불과한 소개글이 아니라 실제 이 개념들의 차이와 반복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근대 이후, 아니 정확히 19세기 이후 정치와 사상적 지도의 정점에는 항상 마르크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나치게 확고부동하여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부담스런 이념적 존재가 되어버렸고 현실 정치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과 몰락으로 20세기가 흘러가버렸지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에서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좌파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고 미래의 희망이라는 어줍잖은 변명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이론의 중심에 서 있는 마르크스에서 출발해서 프로이트, 아감벤, 벤야민, 헤겔, 라캉, 사르트르, 지젝, 데리다, 네그리, 랑시에르, 알랭 바우디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섭렵했을 법한 이론들을 총망라하여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대안도 아니고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도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정치한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이며 특히 인문학이 무엇이며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실천과 적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론은 낡아빠진 구식 동력기에 불과하다. 갈고 조이고 다듬어서 보다 상식적인 혹은 개념찬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아야겠다.
새로운 이론은 없다. 다만 '다른' 이론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같은 풍경이라도 다른 위치에 섰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던 사물을 볼수 있다. 이론은 이런 위치 변경을 가능하게 해준다. - 이택광,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14쪽
11장에 걸쳐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이론과 개념들을 소개하고 현실 적용의 문제를 고민하는 모습이 즐겁고 재밌을 수는 없다.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책이나 어렴풋하게 정리되지 않았던 개념들이 명확해지고 비교와 분석을 통해 분명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수많은 이론들을 정리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가이드’라는 제목처럼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 오히려 추천할 만하다. 의욕과 노력만 앞세울 일이 아니라 친절한 안내에 따라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노력이 단순히 이론을 모아 소개하고 해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무엇이고 인문학적 사유가 왜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면 이 책은 의미를 넘어 선 것이다. 언제든 지적 호기심과 이론적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열린 이야기들이 가득한 책이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간주곡’이다. 장과 장 사이에 놓여 있는 글들이 감칠맛 난다. 공부와 학문과 글쓰기와 과거의 책읽기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써내려간 이야기들이 오히려 이 책의 생기를 불어 넣고 현실감을 극대화한다. 뜬 구름 잡는 개념놀이가 아니라 현실과 정치 지형도의 위치를 가늠하며 인문학의 의미와 개념을 다시 한 번 고민한다. 우리에게 지식이 왜 필요하고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우리들의 현실과 맞물려 뼈아픈 충고로 들린다.
지식은 기본적으로 범용성이 있어야 한다. 범용성이 없는 지식은 아집에 가깝다. 그래서 학문은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다. 공부는 재미있지만, 학문은 지루하다. 지금 한국은 학문을 내팽개치고 각자 공부하는 분위기이지만, 이런 분위기도 오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 이택광,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265쪽
10060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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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ptic 2010-06-04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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