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7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유학생 연구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유학생 연구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유학생 연구
A Study on Korean Oversea Students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of Japan

한국학연구   2016, vol., no.42, pp. 451-540 (90 pages)

UCI : G704-SER000012168.2016..42.003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분야 :
인문학 >
기타인문학
정종현 /JEONG JONG HYUN 1


1인하대학교

초록 


이 글은 개교 이래 1945년 9월까지,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인 졸업생 163명의 명단을 추출하고 그들의 학부별 현황, 사회경제적 배경 및 출신지, 출신고교, 졸업 이후 식민지 사회에서의 사회적 경력과 해방 이후 남북한에서의 사회적 역할 등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정리하여 목록화하고 해제한 연구이다. 본 연구의 목록은 동경제국대학이 발간한 공식자료인 졸업생 씨명록과 동경대학동창회의 명부, 당대 조선 유학생들이 생성한 자료, 졸업생들의 다양한 회고록과 고등문관시험 합격자의 총독부 신원조회, 조선총독부 직원록, 각종 인명사전 등을 기반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이들 자료의 분석을 통해 근대 이행기 특정한 사회경제사적 배경을 지닌 계층이 교육을 통해 계급 재생산을 이룬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제국대학 출신자들의 졸업 이후 사회적 경력의 중요한 비중이 대부분 관료였다는 사실을 실증하였다. 또한, 동경제국대학 출신자들이 조선학술원 및 대학제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함으로써 제국의 지식이 해방 이후 탈식민지 사회에 지속 변용되는 양상을 고찰했다. 전체적인 이력의 조사를 통해서 식민지 및 남북한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그들이 사회적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study is what researched into 163 Korean overseas students who had graduated from Tokyo Imperial University reaching up to September 1945 since opening a school in 1877. The list and its background of 163 graduates were prepared on the basis of <List of Tokyo Imperial University Graduates>, which is official data that were issued by Tokyo Imperial University, of the list(1959) of the Tokyo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in Korea following the liberation, of graduates' diverse memoirs, of the Governor-General's inquiring into a person's background of passers in the higher civil-servant examination, of employees' list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of several kinds of biographic dictionaries. Based on the materials that were investigated in this way, it arranged the present status by academic division in graduates, the socio-economic background & native place, a graduated high school, social career in the colonial society following the graduation, and a social role in South and North Korea after the liberation. Analyzing these data could lead to confirming the truth that the classes who have the specific socio-economic background in the transition of modern times made the class reproduction through education. A fact was positively proved that the important weight of social career in the Imperial University graduates following the graduation was mostly bureaucrat. Thus, honeymoon relation could be identified between the intellect group of coming from Imperial University and the power. Also, it confirmed the status that the graduates from Tokyo Imperial University possess at Joseon Academy, ROK Academy, North Korea's science institute, and North & South Korean universities following the liberation, thereby having been able to positively prove the aspect that the knowledge of empire is continuously transformed in the post-colonial society after the liberation. In conclusion, the Tokyo Imperial University graduates could be identified to be forming the social center in all the social areas of colony and South & Nor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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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
관료지향성,
제국의 지식제도,
사회경제적 출신배경

Imperial University, Tokyo Imperial University, Bureaucratic orientation, Social capital, Socio-economic background, Class Re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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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연구 제42집|451~540쪽|2016.8.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유학생 연구*
정종현**
34)
<차 례>
1. 들어가며
2. 식민지기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의 현황
3.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 
4. 동경제국대학 조선인학생의 졸업 이후 경력의 일반적 특징 
5.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의 학부별 현황 및 졸업 후 경력 
6. 소결
[국문초록]
이 글은 개교 이래 1945년 9월까지,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인 졸업생 163명의 명단을 추 출하고 그들의 학부별 현황, 사회경제적 배경 및 출신지, 출신고교, 졸업 이후 식민지 사회 에서의 사회적 경력과 해방 이후 남북한에서의 사회적 역할 등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정리하 여 목록화하고 해제한 연구이다. 본 연구의 목록은 동경제국대학이 발간한 공식자료인 졸업 생 씨명록과 동경대학동창회의 명부, 당대 조선 유학생들이 생성한 자료, 졸업생들의 다양한 회고록과 고등문관시험 합격자의 총독부 신원조회, 조선총독부 직원록, 각종 인명사전 등을 기반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이들 자료의 분석을 통해 근대 이행기 특정한 사회경제사적 배경 을 지닌 계층이 교육을 통해 계급 재생산을 이룬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제국대학 출신 자들의 졸업 이후 사회적 경력의 중요한 비중이 대부분 관료였다는 사실을 실증하였다. 또 한, 동경제국대학 출신자들이 조선학술원 및 대학제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함으로써 제 국의 지식이 해방 이후 탈식민지 사회에 지속 변용되는 양상을 고찰했다. 전체적인 이력의 조사를 통해서 식민지 및 남북한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그들이 사회적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 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이 논문은 인하대학교의 지원 및 2007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 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7-361-AM0013)
**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교수

[주제어] 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 관료지향성, 제국의 지식제도, 사회경제적 출신배경

1. 들어가며
1936년 3월 26일자 조선중앙일보석간 기사 「고관끼고 이권운동해준다 고 부호 상인 등을 사기」1)는 당대의 흥미로운 사기 사건 하나를 전한다. 기 사에 따르면, 종로서 고등계에서 체포한 사기범 박용환은 상업가, 지주, 광산 가를 찾아다니며 ‘조선육군본부사령부 제28연대 조장 겸 고등시찰’이라는 명 함을 내놓고, 자신이 총독부를 비롯하여 군부 및 기타 각 관청의 고관들을 거의 다 잘 알고 있다고 자랑한다. 그는 노량진의 명수대 토지, 경성부의 경 마장 매수, 함남 안변군에 있는 국유림 불하 등에 관계하고 있다면서 종로 3정목의 모상점 지배인에게 현금 3백원을 사취해서 명월관, 국일관 등의 일 류 요리점을 다니며 유흥으로 탕진했다. 종로경찰서 형사대가 체포하여 취조 한 결과 박용환은 1930년에 배재고보 3학년을 마친 전과 1범의 사기범이었
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러한 사기 과정에서 자신을 ‘동경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까지 합격’한 다음 조선육군사령부의 조장으로 활동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는 대목이다. 1980년대식으로 말하자면, 박용환은 서 울대 법대를 나와서 ‘고시’를 패스하고 기무대(혹은 안기부)에서 활동하면서 청와대와 정부 부처의 권력 실세들과 줄이 닿아 있다고 호언하고 있는 셈이 다. 문제는 그의 사기에 실제로 돈을 ‘뜯긴’ 자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 마도 그 이유는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고등문관시험’을 패스했다 는 그의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2) 도대체 동경제국대학은 무엇이관대 이러
1) 「고관끼고 이권운동해준다고 부호 상인 등을 사기」, 조선중앙일보(석간), 1936. 3. 26.
2) 동경제국대학이라는 학벌이 사기에 이용된 또 다른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자칭대학출신, 부정행 위 하다가 종로서에 잡히어」(중외일보, 1930. 5. 17) “주소부정의 전과3범 김재도는 자칭 동경제 국대학 혹은 광도고등사범 출신이라고 하면서 대학정모 정복을 입고 학생 숙소를 차저다니면서 영어를 가르처준다고 살살학생들을 꼬여가지고 친한 후에는 교과서나 또는 양복등속을 몰래 움쳐 서 잡혀먹은 후 그 돈으로는 전부 유흥에 소비하였는데 더욱 그 자는 서화에 재조가 있어 춘화를 그려가지고 한 장에 삼원씩 받고 비밀히 팔던 사실까지 종로서원에게 발각되어 목하 엄중한 취조 를 받고 있다더라.” 
한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동경제국대학 졸업생 임문환의 회고는 식민지 대중들에게 동경유학생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일러주는 한 사례이다. 임문환은 방학 때 돌아온 유학 생들의 강연과 연극을 보고 동경유학을 결심한다.3) 그는 자신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연극을 60년이 지난 세월에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 연극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 청년 한 사람이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집안이 워낙 가난했으므로 그는 동경에서 인력거를 끌며 피나는 고학을 계속했다. 한데 그에게 는 어릴적부터 장래를 약속해온 애인이 있었다. 고향에 홀로 남은 애인은 어느 부 잣집으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동경에 유학중인 연인을 배반할 수 없다는 일념으 로 완강히 거절한다. 
두 사람은 동경과 고향에서 각각 상대방을 그리며 그야말로 눈물겨운 생활을 했다. 특히 처녀는 부모의 결혼 명령에 반항했기 때문에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생 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던 어느날 동경에서 공부를 마친 그녀의 애인이 일본 육군 소위의 정복을 하고 금의환향, 거칠어진 애인의 손을 어루만지며 막이 내린 다.4) 
구체적인 제목을 찾을 수 없지만, 이 연극은 1920년대에 일본 유학생들이 근대화와 계몽주의를 설파하기 위해서 순회강연 중에 했던 대중(신파)극 중 
 
3) 동경제국대학 교육학과 졸업생인 이인기 역시 유사한 회고를 남기고 있다. 대구고보에 다니던 시절 “우연히 동경유학생들의 모임인 학우회라는 것을 알게 되고 거기서 나온 잡지 학지광을 얻어보 는 기회를 가졌다. 그 잡지에 실린 유학생 간부둘의 사각모 쓴 사진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서춘, 김준연 등의 이름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러한 모임을 가져보기로 하고 회원을 모집했더니 오륙십명이 어렵지 않게 모여들었다. 단체의 이름은 학우회를 그대로 따서 붙였다. 학 우회의 본부는 우리집 사랑채였고 주요사업은 역시 강연회, 토론회 그리고 연극이었다. 토론의 경 우를 예로 들면 제목을 ‘학문이 勝於金錢’이라는 식으로 내세우고 가부 양편으로 갈라져서 격론을 벌이곤 하는 것이었다.”(이인기, 「천군원병같던 친구들」, 나의 교우록, 중앙일보출판부, 1977, 167쪽) 동경유학생학우회의 활동과 학지광이 안동 벽촌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유사 청년단체를 만들어낼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임문환, 바우덕은 나일까, 세한출판사, 1973, 36쪽. 

하나로 추정된다. 이 연극에서 동경은 식민지 청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떠나는 유학처이자 출세의 땅이다. 동경 유학은 곧 입신출세의 여로이기도 하다. 도대체 동경에서 어떤 대학을 마치면 육군 소위의 정복을 입을 수 있 는가라는 현실적인 시비는 미루어두자. 이 연극은 동경이라는 장소와 유학이 라는 형식이 지식과 권력을 획득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소년 임문환(혹은 식민지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하며 도 시샤 중학, 6高, 동경제국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 격, 총독부 관리를 거쳐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역임한 임문환의 생애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려서 본 이 연극을 삶에서 실현해간 과 정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일본의 대학들 중에서도 지식-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동경제국대 학이란 무엇이었을까? 제국대학은 제국 아카데미즘의 중추였으며 지식-권 력의 최정점에 있는 제도였다. 그 중에서도 동경제국대학은 ‘대학 중의 대학’ 으로 간주되었다. 식민지 시기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했다가 1946년 졸업한 신승복은 회고에서 이러한 동경제국대학을 선망하며 간절히 진학하고자 했 던 이유를 (1) 관료주의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과 경쟁할 수 있는 지반을 얻 기 위하여 (2) 제국대학에서의 교육의 질이 일반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라고 정리한다. 관료사회였던 일본에서 최고 엘리트를 육성하는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함으로써 식민지적 차별을 일거에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 첫째라면, 둘째는 동경제국대학이 일본의 여타 지방에 소재한 제국대학이나 식민지의 제국대학 보다 설비와 교육의 질적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신승복은 특히 경성제국대학이나 대북제국대학은 ‘대학’이라는 근대 개념에 해당한 설비가 ‘내지’에 비해 완비되어 있지 않았으며, 교수진에서도 지방 제 국대학에서 동경으로 승진하여 오는 것을 바라는 것이 보통이지 그 반대 방 향은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5) 
경성제대 출신자들에게는 이러한 신승복의 언급이 귀에 거슬릴 수도 있지만, 식민지에 설립했던 경성제국대학이 일본 내지의 국립대학과 차이가 있었 던 것은 사실이다.6) 식민지에는 내지와 같은 고등학교 제도가 부재했다. 따 라서 경성제대에서는 예과 과정을 통해 고등학교 학력을 대체했다. 또한 학 부도 법문학부의 축약된 제도로 유지되었다. 정치학, 경제학 등에 뜻을 두었 던 학생들의 학문적 욕구는 경성제대를 통해서는 해소되기 어려웠다. 경성제 대에도 ‘정치학 및 정치학사’ 강좌, 경제학 강좌 등이 개설되어 있었지만, 독 립적인 경제학부와 정치학과는 부재했다. 이를테면, 구주제국대학 출신의 경 제학자 최호진은 해방 이후 새 대학과 학과를 설립했을 때 많은 학생들이 ‘정치과, 경제과’로 몰렸다고 회고하며, 그 이유를 “굶주렸던 학문”이라는 말 로 표현하고 있다.7) 식민지 조선은 농업국가였기 때문에 식민지 사회에 대 한 분석과 전망은 ‘농업경제학’이라는 학문제도 속에서 모색될 수 있었다고 할 때, 그러한 지식을 식민지에서는 추구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식민지 에서의 농업 관련 학문은 실제적인 기술과 관련된 영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이
다. 보다 큰 학문적 비전을 갖기 위해서는 일본으로의 유학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고려해 볼 문제는 식민지 본국과 식민지에서의 억압의 강도에 대 한 감각의 차이이다. 동경제대 법학부 졸업생 조좌호의 이력은 조선유학생들 이 왜 일본으로 향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단서이다. 그는 “1931년 향리 의 남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3년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절에 항일민족운동 서클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그 해 12월 강제 퇴학당하였다. 이듬해 9월 석방되는 즉시 상경해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1936년에 졸업하였다. 그러나 항일 운동 서클사건으로 국내에서의 대학진학이 어렵게 되자 일본유학을 떠났 다”8) 이러한 사례가 조좌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동경제대 독문과

6)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진, 강좌 및 각종 설비 등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정근식 外, 식민권력과 근대지식:경성제국대학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을 참조할 것. 
7) 최호진, 「일제말 전시하에서의 학문편력과 해방 후 경제학과 창설」, 역사비평(통권15호), 역사문 제연구소, 1991.5, 260쪽.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좌호 설명대목.

를 졸업한 김사량 역시 평양고보에서의 스트라이크가 문제가 되어 더 이상 조선에서 공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친형인 김시명이 다니던 사가고등학교 로 진학했다. 이처럼, 일본 제국을 움직이는 관료 배출 기관이었던 동경제대 졸업을 통해 식민지의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향과 더불어, 최고의 설비 와 교수진을 갖춘 대학에서 학문을 성취하고자 하는 지향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동경제국대학이 지니는 위상은 당시의 입시(제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학의 예과 기능을 한 일본의 구제(舊制)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는 제 국대학 입학이 대체로 보장되어 있었다. 때문에 구주제대나 동북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경도제대까지도 대부분의 학과는 제1차 지망이면 무시험으로 들 어갈 수 있었다. ) 그러나 동경제대만큼은 입시를 거쳐야 했다. 임문환은 “다 른 제대에서는 정원 미달인 과가 수두룩 했지만 동대만은 언제나 머리가 터 지는 경쟁률을 보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그야말로 목숨을 건 입시준비가 벌어지고 더러는 이 때문에 병을 얻어 불귀의 객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수험과목은 “영(독)문 일역, 일문 영(독)역, 작문 의 셋뿐이고 점수 배정은 작문이 절반을 차지했”으며, “작문은 단순히 문장 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실력을 제외한 나머지, 즉 지리․역사․일본 고전․철학․한문․윤리학 등 요컨대 외국어 이외의 실력과 인격의 정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바로메타” )였다. 영어나 독어 문장을 일본어로 번역 하고, 일본어 문장을 영어나 독어 문장으로 번역하며, 마지막으로 일본어로 작문을 하는 방식으로 시험이 이루어졌으므로 당락의 성패는 결국 어학 실력 에서 판가름 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입시생들은 영어, 독일어, 불어 공부 에 열을 올렸다. 지망하는 학부와 학과에 따라 외국어가 달랐다. 고등학교들 은 학생들을 문과, 이과로 나누고 다시 갑류(영어), 을류(독어), 병류(불어)로 구분하여 가르쳤다. ) 이러한 입시과정을 거쳐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하는 것 은 “입신출세의 티켓을 쥐는 것” )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유학생은 얼마나 되었고, 그들은 어떤 계층 출신이었으며 졸업 이후 어떤 활동을 했을까? 이에 대한 온전한 해답을 제시하는 기존 연구는 아직까지는 없다. 이 글은 이러한 궁금증에 대 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서 개교부터 1945년 일본의 패전 직후인 9월까지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현황과 사회경제사적 출신 배경, 그들의 유학생활의 구체적 실상과 사회문화적 실천, 졸업 이후 식민지에서의 경력과 해방 이후 분단기 남북한에서의 행로 등을 추적하여 정리하고자 한
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동경제국대학이라는 일본 제국의 지식 제도가 한국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식민지기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의 현황
임문환에 따르면, 동경제대에서는 선택․필수 과목을 합해 18과목의 점수
를 따면 3년 후 자동적으로 졸업증서가 나왔다고 한다. 학년 제도라는 것도 따로 없어서 1년 때 학점을 모두 따놓으면 2, 3년은 학교에 안 나와도 됐고, 1, 2년차에 한 과목도 안 따더라도 3년째에 내리 합격하면 그것으로 졸업조 건이 충족되었다. 그리고 6년 동안 18과목을 합격하지 못하면 퇴학 처분이 내려졌다.13)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18과목의 학점을 통과한 정식 졸업생만 을 대상으로 삼았다. 연구에 활용된 명부는 (1) 東京帝國大學卒業生氏名錄
(명치 11년[1878]-소화13년[1938], 1939년 발행), (2) 東京大學卒業生氏名錄(明治 11년[1878]-昭和24년[1949], 1950년 발행) (3) 東京大學朝鮮同窓會名簿(1906-1959)이며, 이외에도 동경제대 졸업생의 각종 회고담, 국사편찬 위원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친일인명사전, 사회주 의인명사전, 각종 북한인명사전 등을 활용하여 동경제국대학 조선유학생의 졸업생 현황과 그들의 졸업 이후의 행로와 이력에 대해서 정리하여 附表로 첨부하였다.14) 첨부한 附表 “졸업생 명부”에 의거한 1945년 9월까지의 학부 별/연도별 졸업자(學士) 통계는 다음과 같다.   
13) 임문환, 앞의책, 105쪽. 
14) 附表 명부는 상술한 세 종류의 명부를 토대로 작성되었지만, (1)번 氏名錄은 1938년도까지의 졸업 생 명단만이 수록되어 있고, (3)번 동창회 명부는 부정확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2)의 1950년 발행의 동경대학 졸업생 씨명록을 기준으로 졸업생 규모를 파악하여 정리한 것이다.  
학부 학과 졸업생수 소계
법학부 법률학(영국법선수) 2 60
법률학(독일법선수) 3
법률학(신규정) 25
정치학 29
경제학 1
의학부 의학 4 6
약학 2
공학부 토목공학 1 15
기계공학 3
조선학 1
전기공학 4
응용화학 3
화약학과 1
광산 급 야금학 1
석유공학 1
문학부 철학 3 35
인도철학 범문학 1
윤리학 1
미학미술사학 1
교육학 1
사회학 4
국사학 1
동양사학 4
서양사학 1
국문학 1
영문학 8
독문학 6
불문학 2
<표 1>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현황(학부/학과별) 
언어학 1
이학부 수학 3 7
천문학 1
물리학 1
화학 1
지질학 1
농학부 농학 5 20
농예화학 1
임학 3
수산학 1
농업경제학 5
농업토목학 4
수의학 1
경제학부 경제학 14 20
상업학 6
총계 163 명
비고 : <東京大學卒業生氏名錄>(1950)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임. 

<표 2>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수(연도별)
年度 1903 1913 1914 1917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名數 1 2 1 1 1 0 2 0 0 4
年度 1926 1927 1928 1929 1930 1931 1932 1933 1934 1935
名數 2 3 5 7 6 7 8 7 4 5
年度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 1945
名數 6 8 3 1 7 14 14 20 20 4
總計 163 名
비고 : <東京大學卒業生氏名錄>(1950)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임. 
 
<표 3> 東京帝國大學 조선인 졸업생의 出身學校別 一覽表
學校 一高 二高 三高 四高 五高 六高 七高 八高 松山高 山形高 廣島高 高知高 佐賀高 水戶高 福岡高 大阪高 松江高 靜岡高 山口高 松本高
9 2 15 2 7 7 2 1 7 2 5 2 4 1 10
學校 姬路高 成城高 武藏高 富山高 浦和高 成蹊高 弘前高 廣高師 明治學院高等部 學習院 總計
2 1 1 1 1 1 1 1 85
비고 : 筆者 作成의 卒業生 名簿에 根據
<표1>, <표2>의 의미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표3>의 동경제국대학 졸 업생의 출신고교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표3>은 필자가 조사한 동경제국 대학 조선인 졸업생 명부의 출신고교를 근거로 재구성한 것이다. 총 163명의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중에서 현재까지 출신고교를 확인한 사람들은 전체 졸업생의 절반 가량인 85명에 불과하다. 경도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 들이 활발한 동창회 활동을 하며, 출신지, 출신고교를 포함하여 현재의 활동 까지를 담은 동창회보를 매년 발간한 데 비해서 동경제국대학 조선 유학생들 은 동창회 결성, 동창회보 발행 등의 집단 활동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동창 회가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이인기는 동경제대 학생들의 개성론을 들어 설명한 바 있다. 즉, 당대 최고의 수재들인 동경제대생들은 자신에게 닥친 장해물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동창회라든가 집단적 연계 등에 무감했다는 것이다.15) 그 이유가 어

15) 이인기,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친구(31)」, 경향신문 1979. 10. 31. “일본사람들의 局外評을 들으 면 동대생들은 머리가 좋고 개성이 뚜렷하지만 집단적인 단결력이 약하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면 과 나쁜 면을 아울러 지적한 것이었으나 대체로는 긍적적으로 좋게 보아 주었다. 예를 들면 동창회 의 활동이다. 어떤 대학은 자기 대학에 관계되는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동창들이 뭉쳐서 집단의 힘으로 자기들에 유리하게 해결하러 들었다. 직장에서도 자기네 학교 출신끼리 뭉쳐서 다른 이를 배척하는 일이 많았으나 동대는 그것이 없었다. 도시 동창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남들은 동대 출신은 실력이 있고 자신이 있어서 그럴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아주었

찌되었든 남아 있는 자료의 부재로 인해 기본적인 출신 지역, 출신 고교 및 졸업 직후의 이력 등은 물론이거니와 식민지 말기의 창씨개명한 졸업생을 비 롯하여 북한에서 사회적 경력을 남긴 많은 이들, 해방과 분단의 와중에 사라 진 이들의 이력을 확인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절반의 졸업생들 의 출신고교 만으로도 어떤 경향성을 추출해낼 수는 있다. 
우선, 식민지 조선의 전문학교 등에서 곧바로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하는 것 은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경도제국대학 유학생의 경우에 는 연희전문이나 경성법학전문 등 식민지의 공립, 사립 전문학교 출신들이 입학하여 졸업한 사례도 있었지만, 동경제국대학의 경우는 확인되는 모든 이 들이 ‘내지’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동경제국대 학의 경우에는 구제고등학교 중에서도 ‘넘버스쿨’ 졸업생의 비율이 높았다는 사실이다.16) ‘넘버스쿨’ 졸업생은 모두 46명으로, 확인되는 출신고교 84명의 50%를 상회한다. ‘넘버스쿨’ 중에서도 3고가 많고, 특히 다수의 1고생들의 존재를 특기할만하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표1>과 <표2>의 의미에 대해서 간략하게 검토해 
보자. 우선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인 졸업생은 여타 제국대학 졸업생에 비교하 여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2002년 구주대학 한국연구센터의 유학생조사 1차 보고서에 따르면, 개교 이래 1945년까지의 구주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은 
 
다. 그만큼 정정당당해서 좋다는 것이다.” 
16) 구제고등학교는 총 4개의 범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넘버 스쿨’이다. ‘넘버 스쿨’은 제1 고등학교(東京), 제2고등학교(仙台), 제3고등학교(京都), 제4고등학교(金澤), 제5고등학교(熊本), 제 6고등학교(岡山), 제7고등학교(鹿兒島), 제8고등학교(名古屋)의 8개교를 지칭하며, 구제고등학교의 핵심적인 제도였다. 동경과 경도 등의 이른바 미야코(古都)와 과거 유력 다이묘들의 웅거지였던 고도시들에 위치한 넘버스쿨은 일본의 대표적인 명문고등학교이다. 다음으로 ‘지명 스쿨’은 동일본 에 8개교, 서일본에 10개교의 총 18개교가 있었다. 동일본의 지명 스쿨은 弘前고등학교, 山形고등 학교, 新瀉고등학교, 水戶고등학교, 浦和고등학교, 學習院고등과, 靜岡고등학교, 松本고등학교이다. 서일본의 지명 스쿨은 大阪고등학교, 姬路고등학교, 松江고등학교, 廣島고등학교, 山口고등학교, 松山고등학교, 高知고등학교, 福岡고등학교, 佐賀고등학교, 旅順고등학교이다. 세 번째로 북해도제 국대학예과, 경성제국대학예과, 대북제국대학예과 등 3개의 제국대학예과가 있었다. 일본 내지가 아니라 근대 이후 확장된 ‘외지’ 영토에 설립된 제국대학 내에 고등학교 과정을 압축한 2년제 예과 가 설치되었다. 마지막으로 7년제 고교가 있었다. 7년제 고교는 심상과에 들어가면 ‘중학-고교-제 국대학’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학제였다. 7년제 고교는 관립학교였던 東京고등학교, 台北고등학교, 공립학교였던 府立고등학교, 富山고등학교, 浪速고등학교, 사립학교였던 武藏고등학 교, 成蹊고등학교, 成城고등학교, 甲南고등학교 등 총 9개교였다.

총 162명이다.17) 각 제국대학 유학생의 규모를 조사한 심철기에 따르면, 동 북제국대학은 106명, 북해도제국대학은 62명의 조선유학생들이 확인된다.18) 또한 필자가 2012년에 경도제국대학의 조선인 유학생의 현황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경도제국대학의 졸업생은 236+1명이었다.19) 동경제국대학의 졸업생은 동북제국대학이나 북해도제국대학에 비해서는 월등히 많고, 구주 제국대학과는 1명 차이로 거의 동일한 수준이며, 경도제국대학에 비해서는 70여명 가량 적은 규모의 인원이다. 한반도에서 가까웠던 구주제국대학과 경도제국대학에 상대적으로 많은 유학생들이 몰려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외에 어떤 까닭으로 경도제국대학에 조선인 유학생이 집중되었는가는 앞 으로 규명할 사항이다.
<표1>을 통해서 여타 학부와 비교하여 법학부와 문학부의 조선인 졸업생 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20) 특히 전체적인 졸업생에서 단연 수위를 차지하는 것은 법학부 졸업생이다. 동경제대 법학부는 법률학과와 정치학과 로 이루어졌다.21) 근대 일본은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들이 관료로 진출하여 

17) 「朝鮮半島から九州大學に學ぶ-留學生調査(第1次)報告書1911-1965」, 九州大學韓國硏究センタ-, 
2002.
18) 심철기, 「일제하 조선유학생의 일본유학 현황과 유학분야」, <한국학과 세계포럼 제2회 국제학술회 의-동아시아 근대 유학경험과 학문연구> 자료집, 2015. 7. 17, 70쪽. 
19) 鄭鍾賢․水野直樹, 「일본제국대학의 조선유학생 연구(1)-경도제국대학 조선유학생의 현황, 사회경 제적 출신 배경, 졸업 후 경력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80, 2012. 12. 236+1이라는 졸업생 숫자는 김우영이 정치경제학과와 법률학과를 두 번 졸업한 것을 표시한 것이다. 경도제국대학의 경우 졸업하지 못한 학생들까지 합치면 1945년까지 401명의 학생들이 재학했던 것이 확인된다. 
20) 이인기는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친구」(32)(동아일보 1979. 11. 1)에서 1930년대 전반경부터 법 학부의 법률학과/정치학과 후배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반면 문학부는 자기 동기들 이후 후속부대가 단절되었다고 회고하며 이것을 “文으로부터 法으로의 전환기”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이인기의 감 각은 실제 졸업생의 추이에서도 확인된다. 

1929 1930 1931 1932
법학부 0 1 1 4
문학부 4 2 4 0
1931년에 졸업한 이인기는 1929년부터 동경제대에 재학하고 있었다. 20년대 말 30년대 초에는 법 학부 학생들이 거의 없었고, 문학부 학생들이 10명 넘게 재학하다가 졸업했다. 이후 1932년부터 문학부는 졸업생이 없거나 1명 정도씩 졸업생을 배출하는 데 그치지만, 법학부 학생들은 상대적으 로 증가하다가 1940년대에는 눈에 띄게 급증하고 있다. 이인기는 이러한 현상에서 1930년대의 사 회상을 엿볼 수 있다고 언급하거니와, 식민지에서 등장한 출세지향의 기운을 암시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1) ‘경제학 전수’라는 이름으로 경제학과가 잠시 동안 법학부에 편제되어 있었는데, 법학부 ‘경제학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이끌어온 관료제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군부 파시즘을 지탱한 것도 관료체제로 그 핵심에는 동경제대 출신 엘리트들 이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기존 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마르크스주의 변 혁 운동의 수뇌부들도 동경제대 법학부 중심의 ‘신인회’ 출신들이었다. 따라 서, 동경제대 법학부는 식민지 청년에게는 일본인과 대등해지거나, 평균의 일본인 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권력의 통로로 여겨졌다. 물론 모든 법학부 진학자들을 권력 지향, 관료 지향의 야심가로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뒤에서 살펴볼 터이지만, 법학 연구를 목적으로 대학에 진학하여 고등문관시 험에 합격하고서도 관료의 길을 거부한 채 학문의 세계에 남은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자유주의적이고 마르크시즘적 성격을 띠고 있던 동경제국대학 정치 학 교수들의 영향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일생 동안 한국의 혁신운동에 매진한 인물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법학부 졸업생들이 입신출세의 지향을 가지고 제국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관료로 진로를 잡은 것 또한 사실 이다. 

다음으로 <표1>을 통해서 확인되는 것은 의학부, 이공계 계열 학생수가 소수라는 사실이다. 동경제국대학이 관료 충원을 목적으로 한 법학부 중심의 대학이었던 탓도 있지만, 일본의 조선유학생의 법경(法經) 중심주의적 경향 과도 흐름을 함께 한다. 일례로 이공계가 중시되었던 경도제국대학의 경우에 도 법학부와 경제학부에 비해 이공계열 유학생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극소수의 이공계 및 의학부 졸업생들은 해방 후 남북한의 과학과 의학 분야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표2>를 통해서는 식민지 통치의 진행과 함께 변화하는 유학생 수의 추이 를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아주 적은 수의 졸업생들만을 배출하 다가 이후 1930년대 중후반까지 해마다 5~7명의 졸업생들이 배출된다. 특히 1940년대에 들어서면 20여명 내외의 졸업생들이 배출되고 있다. 식민지로 편입된 시간이 길어지고 식민지 체제가 안정되면서 유학생이 지속적으로 늘
 
어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추세는 다른 제국대학의 졸업생 현황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여기서 1940년대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인 진 학자들의 숫자가 졸업생 숫자를 크게 상회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 다. 1942년 10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 「동대신입생에 반도인 29명」은 同年 9월에 치러진 동경제국대학 신학년 입학 시험에서 ‘반도출신 조선인 29명 이 합격’했음을 전한다.22) 이들 1942년 입학생들이 정상적으로 학업을 끝냈 다면 1945년에 졸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945년의 졸업생은 5명뿐이다. 사라진 20여명 대부분이 학병들이다. 동경제국대학 출 신자들을 조사하다가 적지 않은 학병 출신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경제학부 2년 재학 중에 학병이 된 김우근(상공부 차관 역임), 문학부 서양사 학과 재학 중에 학병이 된 역사학자 한우근(서울대학교 교수), 법학부 재학 중 중국 전장에 동원된 신상초(경희대 교수, 동아일보 논설위원), 역시 법학 부 재학 중 학병으로 중퇴한 이원경(문화공보부 장관, 체육부 장관, 외무부 장관 역임), 문학부 동양사학과 재학 중 학병이 된 정기영, 문학부 불문과 재학 중 학병으로 버마 전선에 갔던 이가형(영문학자, 국민대 교수) 등이 1944~5년에 동경제대 재학 중 학병이 되었던 인물들이다.23) 3장에서 살펴 보게 될 학병을 거부하고 숨은 최남선의 차남 최한검도 이들 졸업하지 않고 사라진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현재의 잠정적인 판단으로는 1940년대 동경 제국대학 조선유학생 급증의 사회사적 배경은 식민지 체제의 안착이라는 차 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3.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 
동경제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했다. 식민지 

22) 「동대신입생에 반도인 29명」, 매일신보 1942. 10. 29.
23) 이가형은 버마 전선에서의 학병 체험 수기 분노의 강:나의 버마전쟁1944-1945(경운출판사, 1993)을 남겼다. 이들 학병 세대의 체험과 글쓰기에 대해서는 김윤식,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 의 체험적 글쓰기론,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을 참조할 것. 

시기의 교육제도는 오늘날과는 현저히 달랐다. 우선 배우는 햇수에서 차이가 났다. 교육과정은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3년, 대학 3년(의대 4년) 이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간은 지금에 비해서 1년 적지만, 초등학교 입 학으로부터 대학 졸업까지의 기간은 17년으로 지금보다 1년이 더 길었다. 제 국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일본 ‘내지’의 고등학교나 혹은 그에 준하는 대 학예과를 거쳐야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중학과정이 필요했다. 요컨대,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를 포함하여 최소 6년, 중학과정까지 포함하면 산술적으로 11년 가량의 일본 유학생활이 필요했다. 동경제국대학 졸업생들은 따라서 그러한 장기간의 유학을 감당할만한 사회 경제적 계층의 자제들일 확률이 높다.  )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학생 전체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파악하긴 어렵지만, <첨부>한 부표의 “졸업생 명부”의 이력조사와 여러 회고들, 그리고 총독부 판/검사 임용 자료를 통해서 그 대략적인 면모를 추론해 볼 수는 있다. 먼저 눈에 띄는 유학생은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귀족 자제들이다. 김호규(문학부 사회학과 <89> ))는 자작 김성근의 養孫으로 조선귀족시국단체 東耀會의 이사를 역임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이외에도 구한 말의 대표적인 민씨척족인 자작 민영휘의 증손인 민덕기(농학부 <136>)도 눈에 띈다. 민영휘는 휘문고보의 설립자로 구한말의 귀족이 근대 자본가로 전신하는 데 성공한 드문 사례인데, 그의 서자인 은행가 민대식의 손자가 바 로 민덕기였다. 
다음으로 지주/자본가 및 관료계층의 자제들을 거론할 수 있다. 우선, 대 표적인 식민지 자본가인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의 아들인 김상협(법학부 정치 학과 <46>)을 꼽을 수 있다. 해방 이후 고려대 총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를 역임한 김상협의 이력에 더해 아버지 김연수 역시 경도제대 경제학부 출 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국대학 출신의 자본가 계층이 교육을 매개로 계급 을 재생산하는 한 양상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평양 부르주아 집안의 차 남 김시창(문학부 독문과 <113>)이 눈에 띈다. 김시창은 곧 작가 김사량의 본명으로, 그의 형인 김시명 역시 경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강원도 홍천, 평창, 강릉 군수를 역임했다. 김사량의 집안은 평양의 대 부호였다. 일본의 문인들인 히로쓰 가즈오(廣津和郞), 나라사키 쓰토무(楢崎勤) 등은 식민지 시기 북조선을 여행하던 당시 평양에서 김사량으로부터 대 동강 절경 옆의 요정에서 3일간 환대를 받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 요정 은 김사량의 모친이 운영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모친은 평양 시내 에서 백화점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그 지점망이 통화 등 멀리 만주까지 미치 고 있었다고 전한다. ) 평양 출신인 유기천(법학부 <21>)도 평양 부르주아 집안의 자제였다. 유기천의 부친인 유계준은 고당 조만식, 오긍선과 함께 평 양 산정현 교회의 3장로로 불렸으며, 한국 전쟁때 퇴각하는 북한군에 의해 처형당한 인물이다. 유계준은 중국 산동성, 톈진을 왕래하며 청염과 시탄, 장 작 등을 교역하는 무역선, 수상선 10여척의 큰 배들을 부리는 무역상이었다. 유계준 일가는 대지 500여평에 무역사무소와 창고, 숙소 등이 이어지는 대저 택에 살았으며, 그의 자식 8남매 중 7남매는 전공을 달리하는 의사와 약사가 되었고, 유기천만이 법학을 전공했다. ) 또 다른 평양 출생 최응석(의학부 <63>)의 경우 부모가 50,000평 이상의 땅을 가진 ‘소지주 겸 부농’이었다. ) 역시 평양 출신인 김동일(공학부 <76>)은 부친이 평남 강서군 성암면 면장으 로 과수원을 경영하는 등 면내의 대지주였다. ) 김성용(武宮廣明)(법학부 <49>)은 전남 담양군 청평면의 만석꾼 집안의 자제이다. 그의 부친인 김재희 는 식민지 초기 청평면장을 역임했다. ) 이외에도 김해 지주의 자제인 강종
 
무(농학부 <126>), 당진의 만석꾼 집안의 후손인 인권식(농학부 <127>) 등 이 확인된다. 

「일제하 고등문관시험 출신 조선인 판․검사의 사회경제적 배경」31)에서 전병무는 ‘사법관시보 진퇴자료’를 토대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조 선인의 사회경제적 계급에 대해서 분석해 놓았다. 이중 동경제대 출신 조선 인 유학생 중에서 우선 지주농 계급 출신들이 눈에 띈다. 이호(법학부 <18>) 의 집안은 지주농으로 경북 영천군내 굴지의 자산가였다. 자산규모는 2백만 원이다. 조부인 李基模 때부터 이미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903년 서울에 사는 김필동이 남원과 금산 양군 결전 10만량을 영천에 사는 이기모 등에게 상납차 환송하였는데, 이들이 착복하였다는 청원 서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호의 부친 이인석은 해방 후 토지개혁 때 피분배 지주로 경북 영천군 영천읍 소재에 논 61.9정보, 밭 15.7정보 등 합 77.7정보 를 소유하고 있었다.32)
장경근(법학부 <13>)의 부는 張益裕로 함경북도관찰부주사를 지낸 인물이
다. 당시 사망하여 큰형인 장최근이 호주가 되었고, 지주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경근 본인도 지주농으로 자산은 4만 5천원이다. 부가 사망할 때 재 산분할을 하였는데, 본인과 형제들의 자산을 모두 합하면 34만원이었다. 그 외 여자형제와 이복 동생들에게도 각각 독립된 자산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자산가 집안으로 생각된다.33) 
 
의 전개와 부르조아 계급 재생산의 역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회창의 조부는 충청남 도 예산의 지주로 이회창의 큰아버지가 일본 제국대학 최초의 조선인 교수인 화학자 이태규이다. 이회창의 아버지인 이홍규는 경성법전을 나와 검사국 서기를 거쳐 1943년 판검사 임용 전형시험에 합격하여 해방 이후 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의 외가는 앞서 언급한 대로 담양 청평면의 만석꾼 집안으로 그의 외삼촌인 김성용은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일본 군수성의 관료를 역임했고, 해방 이후 외삼촌 3형제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이회창의 장인인 한성수 역시 1942년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 법관을 거쳐 해방 이후 대법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예산과 담양의 지주가 의 혼인과 다시 한씨가와의 혼인으로 엮여지는 이회창가(家)의 역사는 지주 집안의 자식들이 교육 을 통해서 어떻게 신흥 지배 계층이 되고, 혼맥을 통해서 그것을 재생산해갔는가를 보여주는 전형 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1) 전병무, 「일제하 고등문관시험 출신 조선인 판․검사의 사회경제적 배경」, 한국학논총(34), 국민 대 한국학연구소, 2010. 
32) 전병무, 위의 논문, 1071~1072쪽 참조. 33) 전병무, 위의 논문, 1073쪽 참조. 
박성대(법학부<15>)의 부 朴根澤은 1937년 당시 조선운송주식회사 원산 지점 직원이었다. 박근택은 1938년에 조선운송을 사직하고 함남노동회 회계 부장으로 옮겨 1940년 현재까지 근무하였다. 그는 이전부터 운수사업을 하 였는데, 자료에 의하면 원산에서 1923년 자본금 12,500원 규모의 합자회사 인 원흥운수조를 설립하여 1931년 무렵까지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박 근택의 자산은 1만원과 약간의 부동산 수입이 적혀 있다. )

이외에도 여러 회고를 통해 동경제대 유학생들의 사회경제사적 배경을 짐 작케 해주는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인기(문학부 <88>)는 5고에 진학했 을 때 처음만난 노영빈(법학부 <9>)과의 기억을 회고하면서 그들 가정의 사 회사적 배경의 단서를 남겨 두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출신 지, 출신학교 등을 묻고 서로 부친의 성함을 확인하며 놀란다. 노영빈과 이인 기의 부친은 구한말 법관양성소의 동기동창이었기 때문이다. ) 그들의 부친 은 구한말의 개화 지식인 출신으로 법관양성소를 거쳐 식민지 체제 하에서 법관으로 활동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동경제국대학 조선유학생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안정적 이었던 것은 아니다. ‘고학’한 이도 있었고, 관비유학생 제도에 의지해서 대 학을 다녔던 이들도 있었다. 임문환(법학부 <38>)은 기울어진 가세를 뒤로 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시샤 중학, 6고, 동경제대의 코스를 거치면서 “닭 장사와 보조 교원, 공장 직공과 인력거꾼, 변소 청소부와 제초부, 그리고 가 정교사” )자리를 전전하며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 로 만주국의 관비유학생들이 존재한다. 1946년에 동경제국대학 서양철학과 를 졸업한 신승복은 만주 광명중학교 출신들의 동경유학의 경로를 기록하고 있다. 신승복과 이종민(경제학부 <157>)은 만주국의 유학생 선발시험을 거 쳐 일본에 왔는데, 유학생 선발시험 성적에 따라 1고 및 각 지방의 고등학교 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신승복과 이종민은 1고에 배치되어 수학하였는데, 동 경주재 만주국 대사관 학무과에서 1고에 이들 유학생의 기숙사비와 학비를 지불했다고 한다. 용돈은 따로 지급되지 않았으며, 신승복 등은 중학교에 다 니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공부를 지도하며 용돈을 벌어 썼다. ) 반은 관비, 반은 고학의 형태였던 셈이다.
동경제국대학 조선 유학생들의 사회경제사적 배경을 파악하다보면 일본의 민간 사회에서 다채로운 형태로 식민지 출신의 수재에 대해 지원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충영(법학부 <8>)의 경우는 한 사례이다. ‘사법 관시보 진퇴자료’에 따르면, 그의 부친 이상준은 본적지인 경북 칠곡에서 논 6두락을 경작하며 소규모로 약종상을 운영한 것 같고, 자산은 약 8백원으로 적혀 있다. 이충영의 학자금은 三井鑛山 대표 牧田環이 제공하고 있다고 기 록되어 있다. ) 이처럼 일본인 독지가가 조선인 학생을 돕는 일은 그 외에도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임문환은 파란만장한 고학의 역사를 거쳐 1932년 동경제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지만 입학금 80원이 없어서 공제부 를 찾아간다. 고학생들의 복지를 모색했던 공제부에서는 임문환에게 이와나 미 서점의 사장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를 소개해 준다. 이와나미 시게오 는 이와나미문고, 잡지 세카이(世界), 문예춘추 등을 발간하여 일본 근현대 지성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 그 또한 동경제대 철학과 졸업생이었
다. 임문환은 이와나미 사장을 찾아갔던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길로 이와나미 본사를 찾아가 유명한 자유주의자이며 사장인 岩波茂雄을 만 났다. 岩波 사장은 몇 가지 질문을 마친 뒤 소매점에서 근무할 것, 근무 시간은 오후 5시에서 9시까지이며 저녁 식사는 서점 식당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그리고 월급은, 하고 말을 끊더니 일어나서 뒤에 있는 칠판에다가 23이라고 또박또박 썼다. 
23원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바우덕은 고맙다고 인사함으로써 그의 조건에 동의 를 표했다. 이로써 바우덕은 최저 생활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때 책방
 
에서 1년간 일한 덕분에 바우덕은 지금도 책 포장 솜씨가 일류이다. 

이와나미 사장은 그 후 음양으로 바우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다. 방학 때에는 가마쿠라에 있는 별장을 공부장소로 개방했고 졸업했을 때에는 동경역 앞 에 있던 양복점으로 데려가 생전 처음 입는 세비로 양복을 선사했다. 
그러나 바우덕이 무엇보다도 감사해 하는 것은 그의 불타는 자유주의자로서의 신념이 바우덕의 인격 형성에 미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서이다. 바우덕은 이와나미 의 언행을 통해 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위대한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
이와나미 사장은 고학생인 임문환에게 단순히 동정적인 시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대가로 월급을 제공하고 있다. 더불어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만이 아니라 자신의 별장을 공부 장소로 개방하는가 하면, 식민지 청년 에게 인격적인 감화를 주고 있다.  ) 임문환이 도움을 받은 것은 이와나미 사장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학을 하던 도시샤중학 때부터 교사였던 하라 선 생으로부터 유무형의 도움을 받았거니와, 이후 그의 주선으로 고오베의 유명 한 무역회사인 다무라 상사의 사장 다무라(田村榮吉)의 지원을 받는다. 다무 라 사장은 어릴 적에 못배운 것이 한이 되어 진작부터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대어 왔지만, 어느 날 그 중의 한 학생이 캬바레에서 놀아나는 꼴 을 보고 허무한 생각이 들어 일체 장학금의 지불을 중지하고 있던 차에, 자 신이 도운 학생 중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었던 하라가 임문환의 원조를 요청 한 것을 계기로 임문환에게 동경제대 입학금을 상회하는 백원을 지원하고 있 다.42) 

이처럼, 당시 일본의 자산가와 독지가들 중에서는 식민지 출신 수재들에 
대한 경제적, 정신적 원조를 한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일본의 민간 사회에서 는 내선융화라는 식민지 정책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일본 민간 인의 입장에서 식민지 통치에 공헌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 들은 제국적 가치를 식민지인에게 적극적․조직적으로 전파하고 심어주려는 콜로니얼 미셔너리(Colonial Missionary)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활동이 종교와는 무관하고 또 식민지가 아닌 식민본국에서 이루어진 다는 점에서 콜로니얼 미셔너리와 온전하게 부합하지는 않지만, 일본 제국의 민간 유지들이 이러한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43) 여기서 이러한 민간차원의 장학 사업을 조직적․지속적으로 수행한 단체가 있어 이채를 띤다. ‘자강회’가 그것이다. 조선사상통신사 동경특파원인 박상 희는 朝鮮思想通信에 1927년 11월 7일부터 1928년 1월 18일까지 50회로 연재한 「동경조선인제단체역방기」에서 자신이 방문한 단체와 대표자들에 대 해 설명한다. 이 중 재단법인 자강회는 1924년 11월 15일 동경에서 천도교 계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일종의 유학생 지원, 장학재단으로 설명된 다. 자강회는 첫째, 고등교육 유학생을 위한 학자금 지원, 둘째, 고학생을 위 한 직업 알선이나 편의 제공을 내세운 사회사업단체를 표방하고 있다. 이사 장은 민석현(閔奭鉉), 이사는 박사직(朴思稷) 등이었는데 모두 천도교 동경 종리원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천도교와는 무관하게 개인적 차원에서 자강회 를 설립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강회가 조선인들만의 조직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본인 유력자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단체 라는 점이다. 

일본인들의 자강회에 대한 관여와 그들과 동경제국대학 유학생들과의 관
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1936년에 이루어졌던 울산 달리 농민들의 사회의학적 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학부별 인물을 살피는 장에서 최 응석을 다루며 상술하겠거니와, 여기서는 당시 조사의 경비를 전담한 시부사 와 케이조(澁澤敬三)가 그 조사의 결과물로 岩波書店에서 간행된 朝鮮の農
43) 이를테면, 박선미가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한 야나기하라 키찌베에(柳原吉兵衛)는 그 전형적인 사례 일 것이다. 그는 1920년대부터 1945년 3월 죽을 때까지 내선융화의 소명의식 아래 식민지 조선의 여자유학생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박선미, 근대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창비, 2007의 5장을 참조할 것.  
村衛生:慶尙南道蔚山邑達里の社會衛生學的調査(1940)의 발문에서 적고 있 는 자강회 및 조선유학생들과 그 자신과의 인연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을 확 인하고 넘어가자. 
자강회가 성립된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그 대지진이 계기가 되었었기 때문 에, 주로 고이시가와(小石川)구에 살고 계시던 분들, 그 중에서도 사카타니(阪谷) 남작, 카노 지고로(嘉納治伍郞) 선생님, 나가이 토오루(永井享) 박사, 시미즈쿠미 (淸水組) 부사장 시미즈 가즈오(淸水一雄)씨가 중심이 되었고, 후에 사이토(齊滕) 자작도 총독을 역임하였던 관계상 열심히 진력해 주셨다. 이 모임은 일본으로 와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돌봐주는 것이 주 목적으로서, 세상에 특별히 선전하지 않고, 아주 소박하게 일을 하고자 한 지 어언 16년이 흐르고 있다. 그동안 전술한 시미즈씨 등은 민석현(閔奭鉉) 군 등과 함께 아주 친절하게 이 모임을 돌봐 주었는데, 그 부단한 노력에 우리들도 항상 감격하고 있는 바이다. 
1925년에 나는 요코하마쇼킨 은행 런던 지점에서 도쿄로 전근의 명령을 받아 귀국하고 나서 이 모임을 알게 되었고, 특히 영국에 있던 당시 대지진의 사정을 여러 가지 듣고 난 직후였기 때문에 기꺼이 그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첫 번째로 돌봐주게 된 사람이 당시 제1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 강정택 군이었다. 그 후 이주영, 장영철, 강금복, 최응석, 한형기 등이 오게 되었다. 사람 수는 적지만 모두 훌륭한 사람들로서 기묘한 인연으로 그들과 진정한 친구가 된 것은 내게도 행운이라 생각이 들어 매우 기뻐하고 있다.44)
박상희의 견문기에는 일본 측 참여자들이 상세히 이야기되어 있지 않지만, 
자강회(自彊會)의 중요한 후원자들은 도쿄의 일본인 유력자들이었다. 자강회 는 고이시가와 구(小石川區) 오오스카(大塚) 사카시타 정(坂下町)에서 결성 되었다. 처음 명칭은 자강회(自强會)였다. 사카시타 정의 정내(町內) 회장이 가노우 지고로(嘉納治五郞, 1860~1938)였는데 그는 이곳에 사는 민석현, 박
 
사직 등과 교류를 맺고 자강회를 만들었다. 가노우 지고로는 강도관 유도를 창설하고, 동경고등사범학교 교장을 역임한 인물이었으며, 나머지 후원자들 도 모두 권세가였다. 시부사와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의 손자로 그 자신 기업가이자 민속연구자로 이름난 이 였다. 장학금의 원조는 매년 10명 내외로 이루어졌다. 이 단체는 1923년 관 동대지진 이후 조선과 일본의 친선을 목적으로 세워져서 1940년대까지 존속 되었던 사단법인이었다. 자강회의 유학생 원조를 연구한 배영미는 창립 이후 여러 문제가 생겼던 여타의 다른 지원 단체에 비해 자강회가 1940년대까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를 “조선인이 실무를 담당하고, 천도교 관 계자가 많았으며, 동경유학생 전체 중에서 평안남북도 출신의 유학생이 많았 던 당시의 상황에서 조선인 회원의 약 4할이 평북출신자인 자강회가 다른 ‘내선융화’ 단체에 비해서 조선인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웠다”고 추정하 고 있다.45) 자강회의 육영사업이란 남자유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조선인의 문화발전’을 기하기 위해서 ‘지도적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지원대상인 유학생들의 핵심은 대학의 전문부 이상의 고학력자들로 학자금을 장기간 제 공하고, 고학생에게는 일자리를, 졸업생에게는 취직을 알선했다. 자강회 유 학생의 다수가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다.46) 
시부사와 케이조는 위의 발문에서 姜鋌澤(<135>), 崔應錫, 張永哲(<124>), 韓炯琦(<129>) 등 4명의 동경제국대학 학생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단체에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동경제국대학 유학생은 보다 더 많았다. 배 영미의 연구에서 동경제국대학 학생에 대한 지원만을 따로 떼어 정리하면 다 음과 같다. 
 
<자강회 유학생 회원의 진학선 및 진로 : 동경제국대학 학생만 발췌함>47)
성명 학력 취직선 장학금
1928년도
李宗日 二高→동경제국대학 전기공학과 贊助(27년부터 武田, 연720엔)
1929년도
姜鋌澤 一高 졸업 贊助(27년, 연600엔, 渋沢)
1931년도
李宗日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전기과 졸업  
총독부체신국-총독부기사 贊助(27년, 연720엔, 武田)
張甲特 五高 自彊(30년, 연 180엔)
1932년도
姜鋌澤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졸업→동 대학원 自彊會 이사, 연구실 副手 贊助(27년, 연600엔, 渋沢)
崔應錫 一高→동경제국대학 의학부
1933년도
金南洙 동경제국대학농학부졸업 경남수리조합-철원수리조합선만척식회사 自彊(31년, 연 480엔)
金熙德 동경제국대학법학부졸업 
※재학중문관고등시험합격 경남도청산업과-총독부 사무관 贊助(33년, 武田)
1934년도
張甲特 동경제국대학농학부졸업 총독부농림국산업과 自彊(32년, 연180엔)
金志政 동경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 졸업 自彊(34년, 연360엔)
1935년도
朴成大 동경제국대학법학부졸업※재
학중문관고등시험(사법과) 합격 함흥지방법원-순천지방법원 판사, 검사 自彊(33년, 연 300~360엔)
1936년도
康明玉 동경제국대학법학부졸업※재 학중 문관고등시험(사법, 행정) 합격 총독부 함북도청, 경북 군위군수 등 贊助(武田)
崔應錫 동경제국대학의학부졸업 동 연구소연구생 自彊(32년, 연 300~360엔)  찬조(渋沢)
47) 이상은 배영미, 위의 논문, 240~248쪽의 표 중에서 동경제국대학 학생들만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
임. 원표는 自彊會 創立十周年記念誌, 自彊會經過狀況報告書 각년도판으로부터 작성된 것임. 

蔡恒錫 동경제국대학경제학부졸업 조선식산은행-동은행 원산지점 自彊(35년, 연360엔)
申鎭均 五高 문과 
졸업→동경제국대학 사회학과 自彊(35년, 연 360엔)
金守睦 山形高 문과 졸업→동경제국대학 贊助(淸水)
1938년도
崔成世 동경제국대학공학부전기과졸 업 自彊(36년, 연 300엔)
1939년도
申鎭均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사회학과 
졸업→동경제국대학도서관근 무 대학원연구생 自彊(연 300-360엔) 
1940년도
朴熙緖 二高 이과 졸업→동경제국대학 自彊(39년, 연 300엔)
졸업 사실 여부가 확실치 않거나 졸업년 불명인 자
崔三南 동경제국대학법학부 自彊(32년, 연 300엔)
金秉吉 一高 문과 졸업→동경제국대학법학부 贊助(淸水, 300엔)
韓炯琦 동경제국대학농학부 농예화학과 贊助(渋沢)
金守睦 동경제국대학법학부 贊助(淸水)
朴熙緖 동경제국대학의학부 自彊(40년, 연 300엔)
‘自彊’이라고 표시된 것은 회의 정식 장학금을 수혜받은 것을 표시하고, 
‘찬조’는 자강회에 관여하던 일본인 유지가 개인적으로 지원한 것을 의미한
다. ‘渋沢’은 시부사와 케이조, ‘淸水’는 시미즈 가즈오(淸水一雄), ‘武田’는 다케다 히데오(武田秀雄)가 지원한 것을 표시한 것이다. 자강회의 학비 지원 및 자강회 관련 일본인 유지들의 찬조를 받은 동경제국대학 유학생들은 이종 일, 강정택, 장갑득, 최응석, 김남수, 김희덕, 김지정, 박성대, 강명옥, 채항석, 신진균, 김수목, 최성세, 박희서, 최삼남, 김병길, 한형기 등 17명이었다.48) 동경제국대학 졸업생 163명에 견주자면 대략 10%의 학생들이 자강회의 원 조를 통해 고등학교, 대학 과정의 학업을 이수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4. 동경제국대학 조선인학생의 졸업 이후 경력의 일반적 특징 
<첨부>한 명부의 졸업생들의 해방 전/후의 경력은 <친일인명사전>, ‘국사 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북한인명사 전>,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및 동창생들의 각종 회고와 후손들의 회 고 등을 검색, 종합하여 작성한 것이다.49) 각 학부별 검토는 후술하고 여기 서는 졸업 이후의 이력과 관련한 전체적인 특징에 대하여 고찰하도록 한다. 일본 ‘내지’ 제국대학으로의 유학이 지니는 의미는 졸업자들이 식민지 사회 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검토해 보면 명확해진다. 
이 명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특징은 관료 지향성이다. 명부의 이 력을 종합해 본 결과 전체 졸업생의 1/3에 해당하는 64명이 조선총독부 직 속, 혹은 유관기관 및 만주국, 일본 ‘내지’의 (준)관료 및 해방 이후 남북한의 관료/정치가의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이력을 확인할 수 없는 41명을 제외한 
 
48) 이상의 숫자는 그렇지만 정확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시부사와 케이조는 자신이 인연을 맺은(지원을 한) 동경제국대학 조선학생 4명을 꼽고 있는데, 배영미의 표에서는 장영철이 빠져 있 다. 또, 배영미의 표와 본 연구의 동경제대 명부와의 차이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배영미 의 표와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張甲特의 경우 1935년에 농학부 졸업생으로 나오지만, 동경 대 졸업생 명부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식민지 시기 저널리즘에서 졸업생으로 표기하지만 실제 로 졸업하지 않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장갑득은 정식으로 졸업하지 않은 채로 총독부에 취직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김병길, 박수목, 박희서 등은 졸업생 명부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이름들이다. 중 간에 제적되었거나 아니면 창씨명으로 기록되어 있을 개연성이 있다.  
49) 이력 조사에서 겪은 고충을 토로하고 넘어가야겠다. 필자는 이번 조사 이전에 이미 경도제국대학의 조선유학생에 대한 조사를 수행한 바 있다. 경도제국대학의 경우 식민지 시기부터 ‘경도제국대학조 선인유학생회’를 조직하고 백 수십면에 이르는 동창회보를 6회에 걸쳐 간행했다. 그 안에는 당시 조선유학생 동창생들의 출신 지역, 출신 고교, 졸업 후의 진로 등이 매년 갱신되어 수록되어 있었 다. 이에 비해 동경제국대학 졸업생들은 동창회가 존재하긴 했지만 경도제대 유학생들만큼 결속력 을 보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회보 및 명부 등의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식민지 시기 동창회 관련 자료는 찾을 수 없었거니와, 해방 이후의 1959년, 1961년도에 간행된 동창회 명부가 있지만 부실하고 부정확하며, 졸업 이후의 현직이나 이력은 물론이거니와 출신교, 출신지 등이 거의 기재 되어 있지 않다. 또한, 창씨개명한 인물들을 창씨명 그대로 적어 두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 말고는 찾아내기가 힘든 실정이다. 따라서 첨부의 이력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작성된 한 계가 있는 자료임을 전제하고 참조해 주길 바란다. 

122명 중 절반 이상이 관료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일본 사회에서 동경제 국대학은 국가를 실질적으로 운용하는 관료 양성기관으로 간주된다. 동경제 국대학의 법학부 출신들은 고등문관시험의 사법과, 행정과를 통해 판검사 혹 은 군수 등 총독정치 하의 중추적인 관료로 진출했으며, 그 외에도 농학부, 문학부, 이학부, 경제학부 졸업생들이 총독부 혹은 유관 기관에 진출하고 있 다. 이들 중 조선총독부, 일본 ‘내지’, 만주국 등 일본 제국의 권역을 넘나드 는 인물들의 존재는 주목할만하다.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만주국 총영사 및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관방 참사관을 역임한 朴錫胤(법학부 <1>)을 비롯하여, 고등문관시험 외교과를 합격하고 일본 외무성에서 관료생활을 한 張澈壽(법 학부 <11>),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이후 별도로 일본 내무성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내무성에서 근무하는 崔夏永(법학부 <36>), 일본 군수성 (속) 의 직급에서 출발하여 일본기업정비총본부에 근무했던 金星鏞(법학부 <49>),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출신으로 일본 농무성 속, 생활물자국, 산림국 사무관 등을 거친 康龍玉(법학부 <53>), 만주국 간도성 성장을 역임한 尹泰東(문학부 <83>), 만주국 문교부 교학관, 간도성 시학관, 이사관 등을 역임한 李寅基(문학부 <88>), 일본 鹿兒島縣 농림기수와 기사를 역임한 李相賢(농학 부 <139>)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경제국대학 졸업생 전부가 총독부 체제를 지탱하는 역할을 했
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그들 중에는 식민지 체제를 비판하고 그 전복을 모색하는 실천을 수행하다가 투옥되거나 죽음에 이르른 인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朴華英(공학부 전기공학과 <73>)이다. 평북 맹산 출신의 박화영은 사가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동창생 임두성과 함께 교사와 선 배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에 공명하게 되었으며, 조선을 일본으로부 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게 되었 다고 한다. 이들은 1936년경 이 학교에 재학중인 다른 조선인 학생들을 동지 로 만들고, 선배 이유호와 山口正之 등의 지도를 받아 맑스주의연구회를 조 직하였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대, 경도제대 등에 진학한 뒤 에는 도시샤대학의 김옥균 등과 제3고등학교의 최상업 등을 동지로 획득하 고 협의회를 계속하였다. 그들의 운동방침은 (1) 조선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함 은 조선인테리의 사명이며 (2) 공산주의 이론의 파악에 정진하고 (3) 일반 조선인 대중의 민족, 공산주의적 계몽에 주력하고 (4) 조선어, 조선문화의 유 지에 노력하며 (5) 경도에 있는 조선인 학생학우회를 지도하며 (6) 동지획득 에 노력할 것 등이었다.50) 조직활동이 드러나 1차로 검거된 사람들이 사가 고 출신 경도제대 졸업생/재학생 임두성, 김배준, 허일희, 문재수, 김창환 등 이다. 이들과 지속적인 연락을 갖고 그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박화영 은 1940년 10월의 검거를 피해 은신했으나, 이듬해 3월 9일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4일만에 순국했다. 이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 다.51) 
金斗鎔(문학부 <86-3>)도 식민지 시기 조선유학생의 사회적 실천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그는 동경제대 재학 중 ‘신인회’에 가입하고 반제동맹에 참가 했다. 1927년 제3전선에 가담하였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동경지부 결성에도 참여한다.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기관지 편집 겸 출판위원, 무산자사 위원장,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조선공 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검거된다. 출옥 이후에도 3번의 투옥을 거쳤다. 해

50) 소화특고탄압사 中, 102-103쪽, 박찬승, 「식민지 시기 도일유학과 유학생의 민족운동」, 아시아 의 근대화와 대학의 역할,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00, 197~198쪽 재인용. 
51) 佐賀高 출신 제국대학 학생들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을 검토하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화영, 임두성을 비롯하여 그들에게 사상을 심어준 선배 이유호, 그리고 김배준, 허일희, 문재수, 김창환 등 관련자 전부가 평안도 출신이다. 제15고등학교로 명명되기도 한 구제 佐賀高의 조선유 학생을 조사한 사가대학의 永島廣紀 교수에 따르면, 1944년 9월까지의 사가고 조선인 학생(중퇴자 포함) 65명 중, ‘평양고등보통학교/평양제2중학교’ 출신자가 20명이다. 여기에 더해 이북 5도의 학 교, 혹은 이북 5도 출신인 것이 확인되는 경성 소재 학교 출신자의 수까지 합하면 39명이다. 사가 고의 6-7할의 학생들이 서북 중심의 이북 출신 학생들인 셈이다.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지방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인근의 福岡高와 구마모토의 五高는 대구고보(경북중학교) 출신자들이 많다는 점에서 반드시 부합하는 설명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 지방에 위치한 사가고에 우연히 서북 출신들이 진학하게 되고 이후 먼저 진학한 선배들을 따라가 는 경향성 등이 더해진 것이 아닌가 추론해 볼 뿐이다. 또 한 가지 짚어야 할 문제는 박화영이 관련되었던 경도제국대학 학생들의 검거사건의 후일담이다. 고문으로 죽은 박화영 이외에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학교를 졸업하여 사회에 진출하고 해방 이후 모두 북한에 재주하였다. 이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의 ‘월북’의 문제를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이 북한을 선택한 이유가 이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들은 교육의 순례를 마치고 자신의 고향으로 귀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방 이후에는 일본공산당 조선인부 부장, 정치범석방운동촉진연맹 위원장 등 을 거쳐 1948년에 북한으로 가서 당중앙위원회 20인 후보위원이 된다. 이처 럼, 동경제대 조선인 유학생들 중 민족주의 혹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일 본 제국주의와 불화하고 입신출세의 길과는 다른 경로를 선택한 이들이 여럿 존재한다. 李東華(법학부 <41>)는 함께 학교에 다녔던 불문과의 曺在洪 (<114-1>)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 있다.
“4월의 어느 날 아침, 동학(同學)의 조재홍(曺在洪) 군이 찾아왔다. 조재홍은 교토의 제3고등학교를 거쳐 두산보다 한 해 전에 도쿄제대 문학부 불문과에 입학한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1930년 봄에 어느 사건으로 잡혀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되었었다. 두산이 반갑게 대하자 그는 10일 전쯤 보석으로 출감했다고 말했다. 조재홍은 원래 개성 갑부의 아들로 세상걱정 모르고 컸는데 도다이에 들어와 독서 회에 관여하면서 마르크시즘에 젖어들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옥살이를 하기에 이르 렀다. 아들의 입신 출세에 기대를 걸던 부모는 실망한 나머지 앓아눕기도 했고 아 들을 구슬리는 방법으로 송금을 완전히 끊기도 했다. 그는 마침 일본인 예심판사가 3고 및 도다이의 2중 선배여서 자신에게 무척 유리하게 조서를 꾸몄으며 일단 보석 으로 내주었는데 10일쯤 지나면 기소․불기소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조재홍은 선배 예심판사의 도움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기소 된 뒤 유죄판결된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도쿄를 떠났다. 그뒤 어느 누구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해방이 되면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해방의 기쁨이 왔을 때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거기서 변고를 당했다는 추측만 이 친구들 사이에서 오갔을 뿐, 지금껏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다.”52)
개성갑부의 아들로 교토의 3고를 거쳐 동경제대 불문과에서 수학하던 조
재홍이 독서회의 영향으로 마르크시즘에 눈을 뜨고, 사상 관련 사건으로 1930년 봄에 투옥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예심판사가 3고와 동
 
경제대의 두 겹의 선배였던 인연으로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난다. ) 이후 그 는 사상 사건에서 자신만이 불기소로 풀려난 것이 면구스러워 중국 쪽으로 건너간 것으로 술회되거니와, 대륙에서의 그의 생활은 알려져 있지 않다. 많 은 식민지 자산가의 자제들이 성공의 길을 따라 갔지만, 그러한 자기 계급의 한계를 벗어나서 보장된 자신의 미래를 박차면서까지 식민지 민족과 소외된 계급을 위한 삶을 기획했던 청년들도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동화 자신도 식민지 말기 이른바 ‘몽양 집단’에서 활동하면서 치안유지 법 혐의로 투옥된 경력을 지니고 있다. 이동화는 ‘몽양 집단’에 함께 참여하 고 있던 동경제국대학 동문들인 崔成世(공학부 <74>)와 金光淳(경제학부 <147>)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동화의 회고에 따르면 식민지 말기에 지식인 집단 사이에 두 개의 항일연구서클이 만들어졌는데 먼저 조직된 것은 갑(甲)서클이라고 하고, 뒤에 조직된 것을 을(乙) 서클이라고 했을 때, 이 두 서클이 직접적으로 연결 되진 않았으며 그 구성원들도 각기 달랐다고 한다. 다만 이동화가 이 두 서클에 가담하고 있었기에 두 서클과 ‘몽양집단’ 사이에 간접적인 연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이 중 을서클은 이동화를 비롯해 김광 순, 최성세 및 김한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김광순은 동경제대 경제학과를 졸 업한 뒤에 어느 신문에서 경제부 기자로 일했고, 최성세는 동경제대 전기공 학과를 졸업한 뒤에 어느 회사에서 전기기사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을서 클에서는 농업경제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해 연구했다. 우선 모스크바 국립대 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소련인민경제의 발전과정을 마르크시즘 레닌이즘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총화한 소련경제학자인 ‘포트르 이바노비치 랴쉔코’의 러시아농업발전 개관을 교재로 써서 농업문제를 연구했다. 다음으로 레닌 이 시베리아 유형 때 쓴 러시아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의 발달을 읽고 러시 아 자본주의 발달의 역사와 그 특수성을 연구했다. 이 그룹은 이후 박헌영의 경성콤그룹과 연결되었으며 을그룹의 최성세는 경성콤그룹의 ‘가두 오르그’, 즉 가두 조직의 책임을 맡게 된다.54) 해방 이후 김광순은 김일성대학 경제학 부 부장을 지내며 김광진, 변낙주 등과 북한학계에서 조선사 발전론과 관련 된 논쟁을 촉발시킨 조선경제사상사(상)을 공동 집필했다. 최성세도 북한 에서 산업성 전기관리국 부국장 및 국가기술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이외에도 동경제국대학 조선유학생들 안에 잠재해 있던 민족주의/사회주
의적 저항의 기류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최남선과 그의 차남 최한검의 경우를 거론해야만 할 것이다. 신승복은 최남선/최한검 부자의 에 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동대 내에 독립사상이 잠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숨은 에피소드로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전선에 동원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勸誘團(說諭團)’을 조직하여 일본에 보낸 일이 있다.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학생들 의 존경을 받을 만한 학자들을 선발하여 조직한 ‘권유단’이었다. 동대를 졸업한 김양하 박사와 강정택 씨가 선발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였던 최남선 씨도 참가한 권유단이었다. 자기 아버지가 ‘학도권유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 에 온다는 신문보도를 읽은 최남선 씨의 둘째아들 崔漢儉 군은 수치심에 자기 아버 지가 일본에 오기 전에 종적을 감추었다. 최한검 군은 ‘삼고’로부터 동대 정치과에 진학한 사람이었다. 최한검 군과 같이 종적을 감춘 동대 조선인 학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종적을 감춘 후, 오늘까지 최한검 군의 소식은 듣지 못하였다. 1986년에 인천에서 개최된 제1회 한국학국제회의에 초대받아 참가했을 때, 전해종 교수를 만나 옛날이야기를 서로 나눈 일이 있다. 옛날에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이야기가 나왔을 때, 최한검 씨의 이름도 화제에 나왔다. 전교수는 나와 같은 고향, 룡정촌에 서 온 사람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최씨와 삼고에서 같이 공부하였다고 하며, 최씨 는 공산주의를 찬양한 학생이었다고 하였다. 전군도 종적을 감춘 최씨 소식은 80년 대 중엽까지 모르고 있었다.”55)

신승복은 자기 자신이 경험한 학도지원병 설유단의 경험을 토대로 식민지 
말기 동경에서 있었던 설유단의 방문시 종적을 감춘 최한검의 일화를 전한 다. 일본 제국주의는 점점 불리해지는 전황 속에서 병역을 천황이 하사한 권 리라고 선전하며 인적 동원에 나선다. 특히 일본에 있는 조선유학생들의 지 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먼저 졸업한 유학생 출신 명사들을 중심으로 ‘선배 격려대’를 조직하여 일본에 권유단으로 파견한다. 당시 신문기사를 확인해 보면 조선 전지역은 물론 일본유학생에게도 선배격려대를 보내고 있다. 1943년 11월 14일자 「격려대 제씨활약」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帝都’인 동경 에 파견된 선배격려대는 “金秊洙, 崔南善, 香山光郞(이광수의 창씨명-인용자
주), 金明學, 李忠榮, 金良瑕, 姜鋌澤, 金原光根(김광근의 창씨명-인용자주), 姜柄順 씨 등”56) 9명이었다. 이들은 1943년 11월 11일 동경에 모여 총독부 도쿄 사무소 장학회의 안내로 도쿄농업대학, 동경제국대학, 동양대학 등을 돌며 학병 권유를 수행하고 있었다. 격려대는 일본 유학 첫세대 격인 최남선 과 이광수를 위시하여, 3고와 경도제대를 나온 김연수, 동경제국대학 출신자 들인 이충영, 김양하, 강정택 등을 주축으로 짜여졌다. 3고 출신으로 동경제 대 정치학과에서 수학하고 있던 최한검이 아버지의 학병권유에 치욕을 느끼 고 몸을 숨겼다는 소문이 당시 유학생 사이의 화제였던 듯하다. 동시기에 동 경제대에 재학 중이던 신승복은 이러한 소문을 전하며, 최한검과 3고 동창이 며 동경제대에도 함께 진학했던 전해종 교수와 80년대에 만났지만 몸을 숨 긴 이후 그의 행적을 모른다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해방 직후의 몇몇 저널리즘 기사를 통해 최한검의 후일담을 확
인할 수 있다. 우선 여운형 주도의 근로인민당 발기를 보도하는 1947년 4월 
12일자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최한검이 중앙준비위원 중 1인으로 등장한 다. 이후 그와 관련된 기록이 사라졌다가 1950년 3월 1일자 국도신문 기
 
사 중에 「3․1절을 맞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되어 있던 최남선의 아들이 보석」이라는 기사에서 최한검은 다시 등장한다. 기사는 “기미년 3․1 운동시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인 최남선씨의 아들 崔漢儉(29)은 국가보안법위 반죄로 27일 하오 6시 서울고법 언도공판에서 징역 2년의 체형언도를 받았
다. 그런데 피고는 친부 최남선씨가 약 10년 전부터 고혈압으로 고통을 받아 오다가 근일에 와서는 특히 병세가 악화하여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어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상태임을 듣고 한번 부자상면의 기회를 달라고 법정대리인 鄭近永 변호사를 통하여 23일 보석을 신청한 바 있었는데 담당 金埈源 판사 는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특히 이를 허가하여 부자상면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 이후 최한검의 행적은 저널리즘이 나 공식적인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최근 최남선의 장손인 최학주 (최한검의 조카)의 저술에서 최한검의 후일담을 확인할 수 있다. 최한검은 보석 중이던 1950년에 경성대학 약대 출신의 이정자와 결혼한다. 이정자는 최한검이 ‘국대안 반대투쟁’ 때 지도했던 학생이었다. 이후 인민군의 서울 점 령 때 조선노동당 서울시당 고위직으로 있다가 9․28 수복 때 월북했다. 최 한검은 북으로 올라간 뒤 1957년 육당이 죽자 동경제대 일본인 친구 두 명에 게 전문을 보내 대신 조문하도록 했다. 1990년대 중앙당에서 밀려나 함경도 청진에 살면서 식량을 구하러 연변에 나와 헤어진 부인 이정자 및 조카 최학 주 등과 연락이 닿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57) 그가 북한에서 어떠한 활 동과 업적을 남겼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최한검은 1940년대 동경제대 재학 생들에게 잠재해 있던 독립운동 혹은 사상운동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고 할 것이다. 
동경제국대학 출신들의 이력에서 주목할 또 다른 측면은 식민지와 해방 
이후 남북한 지식제도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상이다. 먼저, 식민지에서 해 방된 바로 뒷날인 1945년 8월 16일 구성된 ‘조선학술원’의 기구와 위원, 임 원진을 살펴보자. 
 
學術院委員錄58)
一. 委員長 : 白南雲
書記長 : 金良瑕書記局委員
庶務科 : 尹行重 李鈞, 都逢涉, 許逵, 金桂淑
組織科 : 申南澈, 崔允植, 姜鋌澤, 安東爀, 金宅源
企劃課 : 金鳳集, 朴克采, 鄭文基, 尹行重, 金東一, 都相祿, 申南澈, 都逢涉出版科 : 都相祿, 金桂淑, 金宅源
國際文化科 : 金佑枰, 李敭河, 李源喆

二. 各學部長 
1. 理學部長 : 都相祿 
2. 工學部長 : 崔景烈 
3. 農林學部長 : 趙伯顯 
4. 水産學部長 : 鄭文基 
5. 醫學部長 : 尹日善 
6. 藥學部長 : 都逢涉 
7. 技術總本部長 : 尹日重  
8. 經濟法律學部長 : 白南雲 
9. 歷史哲學部長 : 李丙燾 
10. 文學言語學部長 : 李敭河 

三. 常任委員 
姜鋌澤(東京帝大 農學部 農業經濟科), 金桂淑(京城帝大 法文學部 哲學科), 金東一(東京帝大 工學部 應用化學科), 金良瑕(東京帝大 理學部 化學科), 金魯洙 (早稻田大 理工學部 機械科), 金鳳集(早稻田大 工學部 電氣工學科), 金晟鎭(京城帝大 醫學部), 金佑枰(오하이오주립대 經濟科), 金聲遠(미주리주립대 農學科), 金俊淵(東京帝大 法學部 獨法科), 金宅源(京城帝大 敎育學), 金浩植(九州帝大 農學部 農藝化學科), 桂應祥(東北帝大 農學部), 都逢涉(東京帝大 醫學部藥學科), 都相祿(東京帝大 理學部 物理學科), 李康國(京城帝大 法文學部 法學科), 李鈞(早稻田大 政治學科)59), 李敭河(東京帝大 英文科), 李丙燾(早稻田大史學科), 李升基(京都帝大 工學部 工業化學科), 李順鐸(京都帝大 經濟學部), 李泰圭(京都帝大 理學部 化學科), 李源喆(미시간주립대학 理學部 天文學), 朴克采(京都帝大 經濟學部), 朴東吉(東北帝大 理學部), 朴文圭(京城帝大 法文學部法學), 朴勝萬(京都帝大 農學部 農學科), 白南雲(東京商大), 申南澈(京城帝大法文學部), 安東爀(九州帝大 應用化學科), 尹日善(京都帝大 醫學部), 尹日重(東北帝大 電氣工學科), 尹行重(京都帝大 經濟學部), 趙伯顯(九州帝大 農學部 農藝化學科), 趙廣河(東北帝大 理學部 化學科), 鄭文基(東京帝大 農學部 水産學
科), 崔景烈(京都帝大 工學部 土木工學科), 崔容達(京城帝大 法文學部 法學科), 崔允植(東京帝大 理學部 數學科), 崔鉉培(京都帝大 文學部 哲學科), 崔浩英(九州帝大 工學部 冶金學科), 許逵(京城帝大 醫學部)  이상 42명

‘조선학술원’이 설립되어 위의 임원들이 구성된 시기는 좌우의 이념대립이 본격화하기 전인 해방 직후 8월 16일이었다. 따라서, 조선학술원은 신국가건 설을 위해 학술역량을 결집하겠다는 해방 직후의 열망에 따라 정치적인 이념 을 떠나 당대에 대표적인 학자를 대체적으로 망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 당하다.60) 학술원 구성원들의 출신 대학별 비율을 확인해 보면 식민지 시기 제국대학 제도가 해방 이후 한국 학술계에 이어지는 양상을 실증할 수 있다. 상임위원 42명의 출신 대학/전공을 괄호 속에 표기했거니와, 그 결과는 동경 제대 9명, 경도제대 9명, 동북제대 4명, 구주제대 4명, 경성제대 8명, 동경상 대 1명, 早稻田대 4명, 미국대학 3명이었다. 동경제대, 경도제대,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대학 출신자들을 주축으로 하며 여기에 일본의 대표적인 사학인 早稻田 출신과 미국 유학생들이 포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적구성의 비율은 제국대학의 ‘학지’가 해방 직후 한국 학술계의 주축으로 연속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학술원의 실무를 총괄하는 서기장을 金良瑕(이학 부 <122>)가 맡고 서무, 조직, 기획, 출판, 국제문화과 등의 실무 부서의 핵 심에 동경제대 출신들이 포진되어 있는 점, 대학제도의 학부에 해당하는 총 10개의 학부장 중 절반에 가까운 4명--이학부장 都相祿(이학부 물리학과 
<121>), 수산학부장 鄭文基(농학부 수산학과 <133>), 약학부장 都逢涉(의학
 
58) 學術-解放記念論文集(第一集), <學術院彙報> 3. 學術院委員錄, 서울新聞社出版局, 1946, 230쪽. 기구 및 명단은 원문 그대로이며, 상임위원의 출신대학만 필자가 조사하여 추가함.
59) 李鈞은 이종률의 다른 이름이다. 이종률은 와세다대학 재학 중인 1928년 ‘우리말연구회’ 사건으로 출학당하고, 광주학생운동 지도, 독서회 사건, 형평사 사건으로 여러차례 투옥된 바 있으며, 조선건 국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이균이라는 이름으로 백남운 주도의 조선학술원, 민족문 화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부터 61년까지 부산대 교수, 이후 ‘민자통’ 및 ‘민족일보’ 사건 으로 여러 차례 수감된 바 있다. 
60) 조선학술원의 조직의 배경, 학술원 회원의 선정과 배제 등에 대해서는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 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를 참조할 것.

부 약학과 <65>), 문학언어학부장 李敭河(문학부 영문과 <101>)--이 동경 제국대학 출신자라는 점에서 상징적으로는 당대 조선학술계의 1/2에 해당하 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61) 
그렇다면, 조선학술원의 구상과 이어지는 남북한의 학술원과 과학원의 진 용은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우선 1954년 7월 17일에 설립된 대한민국 학 술원은 회원 총 62명으로 발족하였다. 학술원의 기구와 회원․임원진은 다 음과 같다. 
1. 회장 : 윤일선   부회장 : 인문과학부 이병도 / 자연과학부 최규남
2. 부장 : 인문과학부 김두헌 / 자연과학부 조백현
3. 인문과학부 제1분과회–정원 5명, 보 1명, 철학(윤리학․논리학․미학․종교학․신학․교 육학․심리학) 회장 : 고형곤 회원 : 박종홍, 안호상, 김두헌, 김기석, 김활란 제2분과회 – 정원 6명, 보 2명, 어학․문학 회장 : 최현배 회원 : 양주동, 이숭녕, 이희승, 이양하, 권중휘, 이병기, 김윤경 제3분과회 – 정원 5명, 보 1명, 사학(고고학․인류학․민속학) 회장 : 김상기 회원 : 이병도, 신석호, 이선근, 조의설, 김재원 제4분과회 – 정원 4명, 법학
61) 회원 선발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상임위원회 42명 중에 9명이 동경제국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은 산 술적으로는 당대 조선학술계의 ‘1/3-1/4’의 위상을 점유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학술원이 현실에서 실현되어 운용되었다면 핵심적인 기능을 했을 서기국 임원과 학부장의 절반 가까운 인원 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동경제국대학의 학술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회장 : 유진오 회원, 최태영, 고병국, 이근칠 제5분과회 – 정원 3명, 보 1명, 정치학․사회학 회장 : 이상백 회원 : 신기석, 신도성, 민병태 제6분과회 – 정원 2명, 경제학 회장 : 최호진 회원 : 고승제 
4. 자연과학부 제1분과회 – 정원 9명, 보 1명, 이학(물리학․화학․생물학․수학․천문학․ 지질학․광물학․영양학․기상학) 회장 : 박철재 회원 : 최규남, 최윤식, 이태규, 정태현, 김호직, 강영선, 손치무, 박동길, 이민재 제2분과회 – 정원 7명, 보 3명, 공학(토목학․건축학․전기학․기계학) 회장 : 안동혁 회원 : 김동일, 이종일, 전풍진, 최경렬, 이균상, 원태상, 박하욱, 최방진, 이채호 제3분과회 – 정원 5명, 보 1명, 의학․약학․체육학 회장 : 이종륜 회원 : 윤일선, 이제구, 한구동, 박명진, 이재춘 제4분과회 – 정원 5명, 보 1명, 농학․수산학 회장 : 정문기 회원 : 조백현, 우장춘, 김호식, 현신규, 송재철
(제 5분과회는 제2대 회원선거에서 조정) ) 
인문과학부장의 김두헌을 비롯, 이양하, 권중휘, 고병국, 신도성 등이 각각
의 분과 학문 대표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자연과학부에서는 농학/수산학 분야 회장 정문기를 위시하여 최윤식, 김동일, 이종일 등의 수학자, 과학자들 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북한에서도 1952년 10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 화국 과학원 조직에 관하여’라는 내각결정문 제183호를 공포함으로써 과학 원이 창립되었다. 결정문은 “공화국의 과학과 문화의 전반적 발전을 도모하 며, 과학계 각 부문의 가장 우수한 학자들을 망라한 최고의 과학기관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창설에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각은 그의 기구 규정 및 예산을 다음과 같이 승인할 것을 결정한다.”고 밝히 는데, 그 핵심인 구성원은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로 구성된다. 과학원의 초 대 원사(院士), 후보원사(候補院士)로 임명된 과학자는 아래와 같다. 
1. 원사 
사회과학 : ① 김두봉(언어학) ② 홍명희(문학) ③ 백남운(경제학) ④ 박시형(력
사학) 자연과학 : ① 최삼열(화학) ② 김지정(수학) ③ 리승기(화학) ④ 도상록(물리학) 의학 : ① 최명학(외과학) 농학 : ① 계응상(잠조학) 이상 10명
2. 후보원사
사회과학 : ① 김광진(경제학) ② 도유호(고고학) ③ 리청원(력사학) ④ 최창익
(경제학) ⑤ 장주익(경제학) ⑥ 리극로(언어학) 
자연과학 : ① 신건희(물리학) ② 김인식(물리학) ③ 원흥구(생물학) ④ 려경구
(화학) 
의학 : ① 최응석(내과학) ② 리호림(이비인후과) ③ 도봉섭(생약학) 농학 : ① 김양하(농예과학) ② 김종희(축산학) 
이상 15명63)
동경제국대학 출신자들은 북한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전혀 입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자연과학, 의학, 농예과학 등의 분야에서는 상당 한 비중을 차지했다. 원사인 도상록, 김지정과 후보원사인 최응석, 도봉섭, 김양하 등은 북한의 과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대해서는 학 부별 이력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후술하도록 하겠다. 
조사한 별첨의 이력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과 일본 및 만주의 대학 및 전 문학교, 해방 이후의 남북한의 대학교수직을 거친 사람이 총 53명이다. 163 명 중 대략 1/3의 졸업생이 식민지와 남북한의 아카데미에 재직했다. 특히, 서울대 총장 劉基天(<27>), 서울대 총장 權重輝(문학부 <102>), 경희대 총장 高秉國(법학부 <12>), 고려대 총장 金相浹(법학부 <46>), 전북대와 숙명여대 총장 金斗憲(문학부 <86>), 숙명여대와 영남대 총장 李寅基(문학부 <88>), 성균관대 총장 曺佐鎬(문학부 <96>), 동국대 총장 黃壽永(경제학부 상업학과 <159>) 등의 종합대학 총장과 많은 수의 단과대학장, 북한의 김일성종합대 학의 학부장 및 북한 단과대학의 학장 등 남북한 아카데미의 중추로 동경제 대 출신 졸업생들이 자리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동경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의 학부별 현황 및 졸업 후 경력 
이번 장에서는 동경제국대학의 학부별 졸업생들의 현황과 졸업 이후의 경
력에 대해서 간단히 도해하려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단행본 분량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 동경제국대학 졸업생들의 이력을 상세히 서술하기에 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각 학부별의 종합적 특징과 더불어 이력을 짤막하게 논평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63) 김용섭 위의 책, 205~206쪽. 

1) 법학부 
법학부 졸업생은 총 60명이다. 그 중 현재까지 이력을 확인한 사람이 52명
이며, 이 중에서 식민지 시기 관료의 이력을 지닌 사람은 31명으로, 확인된 인원의 대략 3/5에 육박한다. 조선인들은 고등문관시험의 행정과, 사법과 시 험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행정관료 및 사법관료로 진출했다. 조선총독부의 사 법관료인 판/검사 경력은 그 자체로 식민지 권력의 사상검증을 통과했음을 의미한다. 조선총독부 판/검사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다시 총독부 의 신원조사를 거쳐 ‘사법관시보’에 임명되어야만 임용될 수 있었다. ) 조선 총독부의 사법관 채용 기준은 “제국대학 출신 여부도 아니고 고등문관시험 의 성적도 아니라, 바로 지원자의 사상경향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 )다. 달 리 말하면, 조선총독부 판/검사는 조선총독부가 그 신원과 사상을 확실히 보 증하는 인사들이었던 셈이다.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중 고등문관시험 사 법과 합격자는 총 12명이다. 
<표>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사법과 합격자 통계
연도 1932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명수 1 1 2 1 1 2 2 1 1 12
12명의 합격자는 중앙대학(54명), 경성제국대학(50명), 경성법전(27명), 경도제대(16명)에 이어서 다섯 번째로 많은 인원이다. ) 사법과 합격자들인 
李忠榮(<8>), 張暻根(<13>), 朴成大(<15>), 韓宓(<17>), 李澔(<18>), 崔潤模 (<19>), 廉世烈(<22>) 등이 총독부의 판/검사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장경근
 
은 내무부, 국방부 차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과 자유당 정책위원장 등을 역임 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의 핵심 인물로 4.19 직후 체포되었다가 병보 석 중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박성대는 식민지 시기 검사로 유언비어 및 불 온 언동 관련 재판의 검사로 조선인들에게 구형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 정청 판사를 거쳐 5․16 쿠데타 이후에는 혁명재판소 상소심 심판관을 지냈
다. 한복은 총독부 판사 및 이사관 등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에는 JAL, 三井, 일본대사관 등의 법률고문을 지냈다. 최윤모는 식민지 시기 경성지법 판사를 거쳐 해방 이후에는 대법관을 역임했다. 총독부 사법관료를 지낸 인물들은 총독부의 엄격한 신원 검증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총독부 체제의 간성이었다 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총독부 체제에 대한 저항자에게 실형을 구형 하고 판결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들의 역할을 동족을 위한 행위로 합리화 하는 논리도 제기되곤 한다. 이를테면, 이충영에 대한 그의 가족들과 지인들 의 논리는 한 사례이다. 이충영은 한음 이덕형 집안의 후손으로 동경제국대 학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사법관시보를 거쳐 함 흥지방법원 판사, 광주지방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다가 식민지 말기 판사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맏아들 이수성을 비롯한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교수가 되는 등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성공을 이루었으며,67) 하버드 대학의 와그너 교수는 이러한 이충영의 집안을 “한국의 명가”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충영 가족들은 사랑만한 교육없다68)에서 평양복심법원을 마지막으로 이충영이 판사직에서 사임하게 된 이유가 창씨개명을 반대했기 때문이었으며, 이로 인 해 변호사 개업 허가도 받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확인되 지 않은 주장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판사로 있으면서 각종 독립운동 및 이 념 관련 조직 사건의 재판을 맡은 판사였으며, 그들에게 실형을 언도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학병지원 선배 격려대의 연사로 동경의 후배 유학생들에게 학병 권유를 하고,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 대화동맹 심의원 등으로 
67)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은 아들들만이 아니다. 이충영의 사위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68) 이자혜 사랑만한 교육없다, 문예당, 1997. 
적극적으로 동원 독려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가족들은 이충영 이 조선인을 판결할 때 보다 동정적인 감형을 많이 내렸다고 암시하고 있으 며, 친구인 이인기는 그가 한복을 입고 식민지 법원에 출근했었던 강한 민족 정신의 소유자였다고 증언한다. 그가 지닌 조선인에 대한 동정적인 마음이나 혹은 강한 민족애 등은 어쩌면 사실일지 모르지만, 총독부 사법 관료로서 그 가 살았던 행적은 이러한 에피소드들로 가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공적 평가는 성공한 그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아니라, 그의 재판에 의해 실형을 살았던 조선인들과, 학병으로 끌려갔던 그의 후배들의 위치에서 되물 어져야만 할 것이다. 
다음으로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총독부 행정관료를 지냈던 사람들의 행적 을 검토해 보자.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중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자 는 총 18명이다. 
<표>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행정과 합격자 통계
연도 1931 1932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명수 2 1 4 1 1 2 1 2 1 2 1 18
18명의 합격자는 경성제대(45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인원이다.69) 행 정과 합격자로 군수나 사무관 이상의 직위에 오른 이들은 盧永斌(<9>), 晉焱
鍾(<10>), 康明玉(<14>), 鄭燦德(鄭民朝 <33>), 桂珖淳(<35>), 崔夏永(<36>), 金熙德(<37>), 任文桓(<38>), 安鐘年(<39>), 張壽吉(<40>), 金敬鐸(<44>), 金星鏞(<49>), 李相均(<50>) 등이다. 해방 이후 강명옥은 법제처 차장, 계광순 은 3번에 걸쳐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최하영은 심계원(현 감사원) 원장 을 역임하고 3.15 부정선거로 구속수감된 상태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 지만,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으로 의원자격을 상실한다. 친일인명사전 에 이름이 오른 반민족행위자이자 3.15 부정선거 관련 반민주행위자라는 이
69) 이상은 장신, 「일제하 조선인 고등관료의 형성과 정체성-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자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63호, 2007, 48쪽에서 인용함. 

중의 불명예가 그의 이름을 뒤따르고 있다. 임문환은 보사부 차관 및 농림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들은 왜 총독부의 행정관료가 되려 했을까? 출세 때문이었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합리화되기도 했다. 임문환은 자신의 생애를 술회하면서 동경제국 대학 진학, 고등문관시험 합격과 총독부 관료로 이어지는 식민지 시기 자기 이력을 이른바 ‘실력양성론’으로 의미화한다. 그는 도시샤 중학 시절부터 “실 력양성이, 일본인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의 배양이 우선 나의 의무이다. 우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일본 정부에 대해 고양이 가죽을 뒤집어 쓰고 얌전한 척 하라. 그리고서 제대를 졸업하고 관리가 돼서 정치적으로 우리민족을 해 방해 보자”70)는 결심을 했다고 적는다. 청년기 임문환의 이러한 고민이 사실 이었다고 믿어준다고 해도, 그가 총독부 관료가 되어서 어떻게 조선 민족의 해방을 위한 행정을 했는가를 확인할 길은 없다. 오히려 그는 식민지 말기 총독부 식산국 산금과, 광공국 서기관 등으로 재임하면서 조선에 매장된 자 원을 일본 파시즘의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하는데 그 빼어난 행정 능력을 마 음껏 발휘했으며, 이러한 유능함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기도 한다. 영화 <모던 보이>의 이해영처럼 조선의 독립에 투신하는 총독부 관료라는 것은 어쩌면 허구적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당시 “고등시 험합격이 관계 등용문의 유일한 패스포트”였고, “고등시험에 합격하면 아무 리 바보라도 내무부장까지는 보장”71)되는 분위기였으므로, 한 수험생이 솔 직하게 토로하듯이, 고등시험 합격자 명단을 보는 순간 “내 앞날의 인생이 보장된 듯한 안도의 기분”72)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문관시험과 관련하여 법률학과 張澈壽(<11>)의 경우를 특기할만하다. 그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역사상 외교과에 합격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73) 

70) 임문환, 앞의 책, 72쪽. 
71) 須麻守人, 「朝鮮官僚論(4)」, 朝鮮行政 1-4, 1937. 4, 135쪽. 
72) 金萬基, 내가 걸어온 길, 동아서적주식회사, 1988, 26쪽. 
73) 임문환에 따르면, 고등문관시험은 외교과, 행정과, 사법과의 셋이 있었는데, 어려운 순서도 앞에 적은 순서대로였다고 한다.(임문환, 앞의 책, 117쪽) 행정과 출신자의 말이기 때문에 행정과와 사법
장철수는 일본 외무성에 발령받아 벨기에와 프랑스 및 아르헨티나에 주재하 는 일본의 공사관에서 영사로 근무했으며, 이 경력이 인정돼 대한민국 정부 가 수립됐을 때 외무부의 초대 정무국장을 지냈다. 6.25때 평양으로 납북됐 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한 뒤, 대구의 경북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얻어 외교사를 가르치다가 1955년에 병사했다. 식민지 말기 졸업생으로 식민지 관료의 경 력없이 탈식민지 한국사회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李漢基(<26>)와 金相浹 <46>, 국회의원과 내무차관을 역임한 金永求(<56>) 등은 동경제국대학이 해 방된 한국 사회에서도 고위 관료의 배출처였음을 증거한다. 

그렇지만 ‘동경제대-고등문관시험-출세’라는 일반의 통념을 뒤엎은 사례 로 高秉國(<12>)의 경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의주고보와 시즈오카(靜岡)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대 법학부 법률학과를 1934년 3월에 졸업한 고병 국은 “술, 담배는 아예 입에도 안대었으며 YMCA 기숙사에서는 일본인 학 생들조차 경외의 눈길을 보냈”을 정도로 “청교도적인 생활”74)을 지킨 학생 이었다고 한다. 특히 이채로운 대목은 고병국이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및 사 법과의 양과를 모두 합격하고서도 관리의 길을 걷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 문에 합격하고도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민법학을 전공하고, 이후 동경에서 2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한다. 1937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가 이후 연희전문 교수를 역임한다. 해방 직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을 거쳐 1946년 서울대 설립과 더불어 초대 서울대 법과대 학장을 역임하고 헌 법제정기초위원회 전문위원75), 법전편찬위원 등을 거쳐 1956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고, 이후 경희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도 총독부 관리의 길을 거부한 이유를 명확하게 밝힌 바는 없다. 다만, 1970년 대 신문자료를 통해서 그 이유의 일단을 가늠해 볼 수는 있을 듯하다. 동아
 
과의 난이도에 대해서는 사법과 합격자들의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외교과 고문 패스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74) 임문환, 앞의책, 120쪽. 
75) 헌법제정기초위원회 전문위원 10인은 “유진오(兪鎭午)․권승렬(權承烈)․노용호(盧龍鎬)․윤길중 (尹吉重)․고병국(高秉國)․한근조(韓根祖)․차윤홍(車潤弘)․임문환(任文桓)․노진설(盧鎭卨)․

일보는 고병국과 그의 딸, 그리고 외손주 3인을 등장시킨 「北을 그리는 망 향삼대」라는 좌담 기사를 내보냈다. 자신의 딸과 외손주에게 고향 의주와 압 록강에 대해서 들려주는 형식의 이 좌담에서 고병국은 “내가 열 살 때 삼일 운동이 일어나서 의주에서도 만세를 불렀거든. 어릴 때 무얼 알고 그랬는지 태극기를 그려가지고 어른들을 따라 의주영상장터에 나가 만세를 부르지 않 았겠니? 그런데 갑자기 왜놈 순사들이 총을 쏘아대는 거야. 어찌나 놀랐었던 지 다리가 떨려 제대로 뛸 수가 있어야지. 나중에 들으니까 그날 장터에서 여섯명인가 왜놈순사들 총에 맞아 죽었다더군.”76)이라고 술회한다. 이어지 는 담화에서 그는 신의주가 중국 북경, 천진, 상해 등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이곳을 거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던 만큼 독립사상도 철저했다고 기 억한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3․1의 기억과 성장기 몸에 체화된 일본에 대한 저항의 기풍 등이 그가 고문 양과에 패스하고도 관료가 되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볼 뿐이다. 그는 법학을 식민지 관료라는 출세의 도 구가 아닌 학문으로 추구했던 셈이다. 
이외에도 법학부에는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있다. 朴錫胤 (<1>)77)은 최남선의 매제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총 독부 기관지 동아일보 부사장을 거쳐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간도에서 그 유명한 ‘민생단’을 조직하여 이후 중국공산 당 안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스파이 혐의로 숙청되는 원인을 제공 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석윤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총살당하는데, 중국공산 당 산하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당시 민생단 혐의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일 성이 박석윤을 직접 총살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떠돌기도 한다. 유 길준의 자식들인 유만겸, 유억겸 형제도 특기할만하다. 형인 兪萬兼(<60>)은 칙임관으로 충북도지사를 역임하다 해방 전에 죽었으며, 동생인 兪億兼(<2>) 은 연희전문 교수와 부교장 등을 거쳐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에서 문교부장
76) 「北을 그리는 망향삼대」, 동아일보, 1973. 2. 2. 
77) 미즈노 나오키는 박석윤의 삶을 재구성하며 그를 ‘식민지 시기 최고의 조선인 엘리트’로 규정한 바 있다. 水野直樹, 「朴錫胤-植民地期最高の朝鮮人エリート」, 講座 東アジアの知識人第4卷, 有志舍, 2014. 

(문교부장관 격)을 역임하며 해방기 교육제도의 밑그림을 만드는 역할을 하 다 정부 수립 직전에 죽었다. 南宮營(<32>)은 1910년대에 조선총독부 관료 이력을 시작하여 조선인 최초의 칙임관이 된 인물로 해방 전에 병사했다. 金俊淵(<3>)은 동경제국대학 졸업 후 베를린 대학에서 유학하고 귀국하여 조 선일보 기자가 된다.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소련 사정을 시찰하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7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에는 한민당 노동부장과 선전부장을 거쳐 이승만 정부의 법무부 장 관, 3, 4, 5, 6대 국회의원과 6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경력을 지니고 있 다.78) 법학부의 최초 졸업자인 朴容喜(<31>)는 김성수가 교주로 있던 중앙 고등보통학교의 운영에도 관여하고 초창기 경성방직 전무 등을 역임하였는 데, 한국 근대문학과 관련하여서도 흥미로운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유학 생들의 모임인 ‘태극학회’의 평의원을 지내면서 태극학보에 쥘 베른의 작 품을 번안한 「해저여행기담」을 위시하여 콜롬버스, 비스마르크, 크롬웰, 시 저 등의 전기를 번역 소개하였다.79)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는 일본의 핵심 엘리트를 양성하는 국가주의적 관료 의 수급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상징인 요시노 사 쿠조를 비롯한 자유주의적이고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의 교수들이 포진해 있 는 진보의 거처이기도 했다. 정치학과 졸업생 李東華(<41>)의 삶은 이러한 동경제국대학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동화는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을 연구하고, 식민지 말기 여운형 그룹과의 연계 속에서 항일지하운동사건으로 투옥된 경력이 있으며, 해방 이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조만식이 운영한 평양민보 주필, 김일성종합대학 정치학 강사를 지 내다가, 한국 전쟁 시 월남하여 경북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 고, 1950년대 이래 혁신 운동에 참여하여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으로 강령을 기초하고, 민주혁신당 정책위원장과 통일사회당 당수, 민주사회당 고
78) 김준연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회고록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6을 참조할 것. 
79) 박용희의 이력과 초창기 문필활동에 대해서는 손성준, 「근대 동아시아의 크롬웰 변주」, 대동문화 연구 78, 2012 / 「도구로서의 20세기 초 한국의 비스마르크 전기 번역」, 현대문학의 연구, 2012 등을 참조할 것. 
문 등을 역임했다. 그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 으며,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학문적 입 장은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체험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요시노 사쿠 조를 비롯한 법학부 교수 진용을 회고하며 특히 자신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학술적 연원으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한 정치학자 가와이 에이지로
(河合榮次郞) 교수의 영향을 꼽고 있다. )

2) 의학부 
의학부 졸업생은 의학과 4명, 약학과 2명으로 총 6명이다. 의학부 학생들 
중 행적이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은 최응석과 도봉섭 뿐이다. 공교롭 게도 이 둘은 모두 북한 의료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都逢涉 (<65>)은 1930년에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약학과를 졸업한 이후 경성약학전 문학교 교수로 재임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서울 약학전문학교 교장, 조선약 학회 초대 회장, 서울대 약대 학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북 한에서 평양의과대학 교수, 과학원 후보 원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 냈다. 崔應錫(<63>)은 1937년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의학과를 졸업하고 1943 년에 「猩紅熱腎炎에 關한 硏究」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최응석은 식 민지-해방기-분단기를 횡단하는 문제적 인물로, 그의 생애에는 지식의 식민 -탈식민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 앞서 살펴보았 던 자강회와 시부사와 케이조(澁澤敬三)의 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자. 앞서 시 부사와 케이조가 촉망받는 一高생 강정택과 그의 후배인 최응석을 지원한 사 실을 살펴보았다. 특히 시부사와는 이들이 수행한 식민지 조선 농촌 사회에 대한 조사를 적극 지원했다. 동경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박사과정에 있 던 강정택은 한국의 농촌 사회경제를 자세히 조사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고향인 울산 달(達)리를 조사지로 결정했다. ) 이 소식을 들은 후배 최응석 이 찾아와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최응석은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학 생 8명, 경제학부 학생 1명(李快洙(<149>)), 도쿄여의전 학생 3명 등 총 12 명 )으로 구성된 ‘조선 농촌사회위생 조사단’을 결성하여 강정택의 조선행 에 동행하게 된다. 최응석 주도의 ‘조선 농촌사회위생 조사단’의 경비 2,500 원 전액은 시부사와 케이조의 재정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최응석 등의 조선농 촌사회위생조사회 일행은 경상도 울산읍 달리에서 약 50일간 거주하며 주민 들의 건겅검진 및 인구, 경제, 주택, 체격, 질병 등에 관한 연구를 실시한 결 과물인 ‘조선의 농촌위생’(1940)을 이와나미 서점에서 발간한다. 이 조사단 의 조사 기간 중에 시부사와 케이조도 오가와 도오루(小川徹)를 비롯한 일본 의 아틱 뮤지엄(Attic Museum) 동인들과 함께 달리를 방문하여 달리 농촌마 을의 생활용구 124건을 수집했다. ) 
이 조사를 상세히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빈곤’과 ‘과로’에 시달리는 농민 들로서는 이들 조사단에 특별한 친근감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농촌 개조라 는 진보적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학생 조사단에게 기본적으로 달리 마을은 가난하고 비위생적이며 동정심을 자아내는 타자일 뿐이었다. 또한, 일본의 민속학자들에게는 식민지 농촌을 대표하는 사례이자 일본의 민속과 비교하 기 위한 과학적 조사대상일 따름이었다. ) 이러한 평가는 제국의 학지에서 훈련받은 위생학적 사회조사 방법과 민속학 등이 지니는 제국주의와 오리엔 탈리즘의 면모를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들에게 문명과 타자의 시선 이 자리하고 있는 측면도 무시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최응석 등의 작업을 일종의 의사-식민주의자의 관점으로 일괄하여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는 이 조사를 식민지 농촌의 진보를 위한 사회주의적 보건의료 실천의 원점 으로 배치한다.
1936년 일본인 맑스주의 동지 및 조선학생과 같이 경상남도 울산읍 달리에서 맑스주의적 견지에서 조선농촌의 사회위생학적 조사를 하였다. 이 보고서는 이와 나미 서점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농촌의학의 조선에서의 교시라고 볼 수 있 다고 생각한다. )
위의 진술이 이루어진 시기는 1949년으로 해방된 조선, 그 중에서도 북한
이라는 장소에서 언급된 것이기 때문에 제국의 지식 활동의 측면도 지니고 있었던 이 사회조사를 온전히 사회주의적 실천으로 의미화한 혐의가 있다. 그렇지만, 그의 진술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기의 재판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최응석은 해방 직전인 1944 년 2월 17일 ‘요코하마 사건’에 연루되어 치안유지법으로 체포되었는데, 그 는 자신의 체포 이유에 대해 ‘조선의 농촌위생’, ‘연안련락기도사건’, ‘맑스주 의 선전계몽’, ‘일본공산당 자금제공’이 문제가 되었다고 밝혔다. 1945년 3월 요코하마 재판소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언도 받고 출옥하여 4월 20 일 귀국했다.  ) 해방 이후 최응석은 경성대학 의학부 제2내과 교수로 일하며, 조선과학자 동맹에 참여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사회정책연구위원회 전문위 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국대안 사태를 겪으며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의학 부 부장 겸 병원장, 북조선 보건연맹 위원장을 맡으며 북한의 사회주의적 보 건 의료 체계 마련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그는 소련의료 체계에 바탕을 둔 의료국영화와 예방의학 체계 등을 실현하는 데 주력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러한 그의 관심이 식민지 시기 동경제국대학 시절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의학의 본격적인 출발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신인회’ 계 열의 진보적 의대생들에서 비롯되었는데, 최응석은 앞서 살펴본 울산 달리의 사회위생학적 조사 보고서의 서문을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선배이자 일본 사 회위생학/사회의학의 대부인 테루오카 키토(暉峻義等)에게 부탁했다. 최응석 은 식민지 시기 이래 모색했던 사회적 보건의료체계를 해방기 한국 사회에 펼쳐보려고 했지만, 좌익진영을 대표하는 그의 보건의료체계 구상은 사회주 의의 불법화와 더불어 좌절되고 이후 북한에서 국영의료체계의 수립으로 결 실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시도되었던 ‘국 영의료체계(혹은 협동주의 의료체계), 사회보험=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방 식’이라는 사고 경향이 심화되면서 남한에서의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논의와 상상력은 냉전적인 제한을 받게되었다.88)

3) 공학부 
공학부 졸업생은 총 15명이다. 尙灝(<71>)는 공학부만이 아니라 동경제국 대학 전체에서 첫 조선인 졸업생이다. 대한제국의 관비유학생이었던 그는 동 경유학생회 회장을 거쳐, 대한제국 농상공부 참서관, 서기관 등을 역임하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군수와 충청북도 참여관,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 등 을 역임했다. 이력이 확인되는 공학부 졸업생 대부분은 남북한의 기술관계 관료 및 학자로 활동했다. 전기공학과의 李宗日(<72>)은 조선총독부 전기과장 등의 기술직 관료를 역임하고 해방 이후 상공부 전기국장 등의 관료 생활 을 거쳐 서울대학교 공대 교수, 인하대 공대 교수 및 원자력 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했다. 전기공학과의 崔成世(<74>)는 북한의 산업성 전기관리 국 부국장, 국가기술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전기공학과 졸업생인 朴華英(<73>)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교토의 사가고 출신의 조선인학생학우회 등 을 지도하며 반일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응용화학과 졸 업생 金東一(<76>)은 한국을 대표하는 화학자의 한 사람으로 서울대학교 공 과대학장, 학술원 회원, 대한화학회 회장, 원자력 위원 등을 역임했다.89) 광 산급야금학과를 졸업한 金聖浩(<80>)는 기술관료로는 드물게 친일인명사전 에 등재된 인물이다. 그는 총독부 식산국 지질조사소 촉탁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하여 광산과 기사를 끝으로 퇴임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광 산운영에서 재능을 보이고 당시 여러 신문에 광산운영에 대한 장문의 연재를 하고 이를 엮어 광산경영법(청람사, 1938년)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후 그 는 경인기업주식회사 감사역, 중앙연료주식회사 취체역 등으로 있으며 치부 한 자신의 재산 중에 거액을 국방헌금, 대화숙 등에 기부하였다. 끝으로 석유 공학과 졸업생 趙允浩(<81>)는 一高 출신으로 북한에서 김책 공대 교수를 역임했다는 전언이 남아 있다.90) 

4) 문학부 
문학부 졸업생은 총 35명이다. 첫 졸업생 蔡弼近(<82>)과 尹泰東(<83>)은 
철학과 전공이다. 채필근은 장로교 목사로 일본 유학을 거쳐 숭실전문, 이화 여전 교수를 역임하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장을 지냈다. 식민지 말기 조선 예수교장로회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재편되는 데 이때 채필근은 초대 통리로 선임되어 신사참배, 궁성요배 등에 앞장을 선다. 해방 이후 평양 창동교회 담임목사 및 부산동광교회 담임목사(1952), 부산장로회신학교 교장, 동아대학교 및 부산대학교 교수, 서울 동숭교회 담임 목사, 숭실대학교 재단이사 등을 역임했다. 윤태동은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최초의 조선인 교수 를 거쳐 만주로 이주하여 간도성 성장을 역임했다. 이는 만주국 조선인 관료 로서는 최고위급의 직책이었다. 해방 이후 소련군에 의해 연행되어 중앙아시 아 타시켄트의 국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철학과 졸업생 金渭錫(<84>)은 해방 후 대구 교육대학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윤리학과의 金斗憲(<86>)은 해방 전 이화여전, 혜화전문, 연희전문 교수와 대동상업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지냈다. 해방 이후 에는 서울대 문리대 교수,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전북대와 숙명여대 총장을 역임했다. 미학미술사학과의 朴永仁(<87>)은 특기할만한 이력을 지닌 인물 이다. 그는 쿠니 마사미(邦正美)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세계적인 무용가로 독일에서 유학한 후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다.91) 교육학과 의 李寅基(<88>)는 경성사범 교유, 만주국 문교부 교학관, 간도성 시학관 및 이사관을 거쳐 경성경전 교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문리대 교수 및 숙대와 영남대 총장을 역임했다. 사회학과의 金虎圭(<89>)는 자작 작위를 습작하고 조선귀족단체 동요회 이사 및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과 촉탁 등을 지내고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지만 기소유예로 석방된다. 申鎭均 (<90>)은 졸업 후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근무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남로 당 상임위원을 지내다가 1950년 체포된 기록이 남아 있다. 국사학과의 李弘稙(<93>)은 식민지 시기 이왕직도서관 주임 및 연희전문, 명륜전문 강사를 역임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국립박물관 진열과장, 연세대, 고려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동양사학과 출신의 曺佐鎬(<96>는 식민지 시기 동아연구소 연구 원, 해방 이후 부산대, 동아대, 동국대, 성균관대 교수를 거쳐 성균관대 총장 을 지냈다. 국문학과(즉, 일본문학) 전공인 咸秉業(<99>)은 이하윤, 김진섭, 정인섭 등과 함께 ‘외국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해외문학을 중심으로 평론 활동을 벌였다. 중동고 교사를 지냈으며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되었다. 영문
91) 박영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서대현, 「‘세계인’을 표방한 쿠니 마사미朴永仁의 예술과 인생」1, 2, 춤 과 담론 제1호/제2호, 2006 가을/2008년 봄을 참조할 것. 
과 졸업생인 李敭河(<101>), 權重輝(<102>), 崔珽宇(<103>) 등은 한국 영문 학 형성에 대한 고찰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양하는 동경제대 영문 과 대학원을 끝내고,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하며 시인 윤동주를 가르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교수와 문리과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수필가로 유명하다. 권중휘는 만주 신경공대 교수를 역임하고 해방 이후에는 고려대학 교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및 총장을 역임했다.92) 최정우는 동경제대 졸업 이후 영국 런던대학에서 2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해방 이후에는 외무부 조사국장, 대통령 비서 실 외교담당 비서관, 국회사무총장 등의 정관계와 동국대학교 교수 겸 부총 장, 한국외국어대학 교수 겸 도서관장 등 학계에서 활동했다.93) 이외에도 저 널리즘 기사에서 창씨명을 확인할 수 있었던 영문과 졸업생으로 邊成烈 (<107>)이 있다. 매일신보의 「동대최고어학상 반도출신 도변군 획득」이라 는 기사는 동경제국대학에 학적을 둔 와다나베 히데오(渡邊秀雄)(舊名 邊成烈)이 동경제대로부터 모집하는 영문어학상(語學賞)에 당선되어 상장과 상 금을 받게 된 사실을 전한다. “동대학에서는 작년 7월 ‘대학상’ 규정을 창설 하고 매년 독, 불, 영의 현상논문을 모집키로 되었는데 이번 제1회 영어부 최우수작으로 와다나베씨의 <전쟁과 경제>를 결정”했는데, 신문에 따르면 변성렬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18년 전에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경도부립 제3중학을 거쳐 제3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시대에도 ‘관서 대학고등 전문학교 어학부 연맹’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약하였고 또 고등학교 졸업 하던 해에는 세계학생영어현상논문 2등상에 당선된 일도 있다. 그후 “동맹통 신사에 입사하여 현재 구미부차장으로 세계에 향하여 영문대의통신선전에 눈부신 활약”94)을 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92) 동경제국대학 영문학과의 분위기와 이후 한국에서의 영문학 연구 수립 관계에 대해서는 신현욱, 「한국영문학의 형성-권중휘 선생을 찾아서」, 영미문학연구 안과밖 제2호, 1997. 5를 참조할 것. 
93) 이동화의 회고에 따르면, 山口高 1년 선배였던 최정우가 일본의 저명한 사회주의자 야마가와 히토 시(山川均)의 자본주의의 수탈기구라는 책을 건네주며 독서를 권하였다고 한다.(김학준, 앞의 책, 99쪽) 이동화는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사회사상 또는 정치사상 분야의 책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으 며 이후 정치학자가 되고 혁신계 정치인이 된 셈이다. 
94) 「동대최고어학상 반도출신 渡邊군 획득」, 매일신보 1943. 8. 10. 변성렬은 1920년대 ‘조선문인
독문과 졸업생들도 한국의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徐恒錫(<108>) 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학예부장, 극예술연구회, 조선연예작가회의 이사 장 등을 역임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중앙극립극장장 및 예술원 회원, 한국연 극협회 이사장 등을 거쳤다. 曺喜淳(<109>)은 경성약학전문학교 교수로 있 으며 문예활동을 하다가 실업가로 변신하여 해방 이후에는 조선전업 부사장, 남선전기 사장 등을 지냈다.95) 李孝祥(<110>)은 대구 교남학교 교장을 거쳐 해방 이후에는 경북대 교수와 학장, 5, 6, 7, 8, 9대 국회의원(공화당), 7대 국회의장으로 박정희의 3선 개헌안 처리, 영남대학교 재단이사장 및 공화당 당의장 서리 등을 역임했다. 金三奎(<111>)는 학생 시절부터 무산자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졸업 이후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프로예맹 서울지부 책임자를 맡아 활동하며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와 ‘조선예술좌’를 설립하여 사회주의 활동 중 검거되어 전향한다. 해방 이후에는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등으로 있 으며 이승만 정권의 국민방위군 부정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비판해 미움 을 사서 동아일보사를 퇴사하게 되고, 이후 도일하여 한반도 중립화통일방안 을 제창하며 코리아 평론을 창간하여 주간으로 활동하였다. 金時昌 (<113>)은 소설가 김사량의 본명으로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작가로 활동 하면서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사로 재임 중 1944년 국민총력 조선연맹 병사후원부가 추진한 ‘재지(在支) 조선 출신 학도병 위문단’원으로 중국에 파 견되었다가 태항산 지구를 거쳐 연안으로 탈출 후 일본 패전과 함께 귀국한 다. 북한에서 작가로 활동하다 한국전쟁시 종군작가로 조선인민군과 함께 남 하했는데 미군의 인천상륙 이후 조선 인민군 후퇴시 지병인 심장병으로 강원 도 원주 인근에서 낙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문학과 졸업생인 金秉逵(<115>)는 식민지 시기 매일신보사 기자로 유진오, 여운형 등의 학병 동원 
 
사’를 결성하여 마해송, 유치진 등과 함께 활동한 인물로 검색된다. 18년전에 도일했다는 사실로 보아 1920년대 중반에 일본에 가서 고학하며 조선 유학생들과 함께 활동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해방 이후의 경력은 확인할 수 없었다. 
95) 조희순의 문학 활동에 대해서는 김봉희, 「조희순의 문학연구-생애와 문학 활동을 중심으로」, 현대 문학이론연구 55호, 2013을 참조할 것. 
관련 기사를 조작하여 게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해방 이후에는 김동리와의 좌우익 문학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북한에서 번역된 루이 아라공의 공산주의자들, 스탕달의 붉은 것과 검은 것 등의 번역자로 김병규의 이 름이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언어학과의 柳應浩(<116>)는 혜화전문, 경성제국 대학 예과 강사 등을 거쳐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언어학과 교수 로 있다가 한국전쟁 시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어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원로 언어학자인 김방한은 한 회고에서 자신이 대학 강단에 섰을 때 ‘언어학사’ 강의의 교재가 없어서, 유응호가 해방기 잡지인 학풍에 게재했던 「현대언 어학의 발달」이라는 논문을 읽고 그것을 통해 현대언어학사의 대체적인 가 닥을 잡아 강의했다고 회고하고 있다.96) 김방한이 참고한 유응호의 논문은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한국 학계에 처음 소개하는 글이었다. 
5) 이학부
이학부 졸업생은 총 7명이다. 숫자는 적지만 이학부 졸업생들은 해방 이후 
남북한의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이학부 첫 졸업생은 수학 과 崔允植(<117>)이다. 그는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 출신으로 졸업 후 경성 고공,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해방 이후 광산전문학교장을 거쳐 국립서울대학교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조선수 학물리학회 및 조선수학회 초대 회장, 학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그는 1950 년대 유명한 개헌안 사태 때 ‘사사오입’이라는 수학식의 해석을 통해 이승만 종신집권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수학과 졸업생 金志政(<118>)은 동 경제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희전문교수를 거쳐 해방 이후 경성사범대학 교 수, 경성대학 교수를 지내다가 월북하여 김일성 종합대학 수학력학부 교수, 북한 과학원 물리수학연구소 소장, 과학원 원사를 지낸 북한 과학계의 핵심 인사였다. 역시 수학과 졸업생 劉忠鎬(<119>)는 경성대학,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를 거쳐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와 해주 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했
다. 천문학과 졸업생 李樂馥(<120>)은 서울대 사범대학 물리학 전임교수를 지내다가 한국전쟁 시 월북,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및 평양천문대장을 역임했
다. 물리학과 졸업생 都相祿(<121>)은 각별히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학부 졸업 이후 개성의 송도고보 교사, 만주 신경공업대학 교수를 지냈다. 해방 이후에는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으로 대학의 좌익 핵심으로 미군정과 대립하 다가 파면된다. 이후 국립서울대학안에 대한 반대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 북 한의 종합대학 창립위원으로 김일성 종합대학 창설에 관여하고 김일성 종합 대학 물리수학 학부장을 맡았다. 1952년 과학원이 설립되면서 물리학 분야 의 유일한 원사가 되었다. 특히 그의 전공은 양자역학으로 1955년 물리수학 연구소에 ‘핵물리연구실’을 개설하여 북한의 핵개발 연구를 주도했다. 1973 년에 김일성 훈장을 서훈받고 1986년에 ‘인민과학자’ 칭호를 수여받는데 이 것은 아마도 핵 개발과 관련한 특별한 업적과 관계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 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북한 핵 과학의 아버지’로 간주되기도 한다.97) 화학 과 졸업생 金良瑕(<122>)는 졸업 후 일본 이화학연구소 연구실에 근무했으 며, 1943년 도쿄제대 농예화학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해방 이후 조선학술원 서기장을 역임하고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의 자세한 행적은 아직 확실치 않다. 지질학과 졸업생 金鍾遠(<123>)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조교수를 역임하고 해방 이후에는 경성대학 광산야 금학과 학과장을 거쳐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 및 부총장을 역임했다. 
6) 농학부
농학부 졸업생들을 언급하기 전에 동경제국대학 ‘실과’ 과정에 대해서 알 아볼 필요가 있다. 황성신문, 대한학회월보 등의 대한제국기 저널리즘에 는 1910년 이전의 동경제국대학 졸업생들이 등장한다. 가령, 동경제국대학 
 
졸업생 김성목을 강사로 초빙하여 실시하는 야학을 광고하는 내용이라든가, 졸업생 김진초가 실업을 강조하는 논설 기사 등이 그것이다. 김성목이나 김 진초 등은 동경제국대학의 정식 졸업생이 아니라 일종의 전문대학 코스였던 ‘실과’ 졸업생이다.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이름높은 우장춘도 농학 실과 출신 이며, 농림부 장관을 지낸 정재설 등도 실과 출신이다. 농업국가였던 식민지 조선에서는 농학 기술에 대한 학문적 사회적 수요가 컸고, 많은 지식인들이 이 실과를 졸업하고 사회에서 활약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동경제국대학 학부의 정식 졸업생들은 아니기에 본 연구의 대상에서는 제외했다. 
농학부의 졸업생은 총 20명이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관료로 입신했다. 조선총독부 농무과 기사를 거쳐 해방 이후 건국대학교 교수 및 축산대학장을 역임한 張永哲(<124>), 총독부 기수를 거쳐 해방 이후 농림부 농지개량국장 및 국회의원을 역임한 姜琮武(<126>), 호놀롤루 주재 일본총영사관 부영사, 경남 양산군수, 총독부 사무관 등을 역임한 揚在河(<130>), 총독부 기수를 거쳐 해방 이후 농림부 중앙임업시험장장을 역임한 閔心鉉(<132>), 총독부 기사 및 경기도 수산시험장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농림부 수산국장 및 부 산수산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鄭文基(<133>), 수원농업시험장을 거쳐 해방 이후 중앙농업기술원장 및 동국대 교수를 지낸 蔡丙錫(<134>) 일본 鹿兒島縣 농림기사를 거쳐 농림부 농지개량국장과 서울대 교수 등을 역임한 李相賢 (<139>), 총독부 기수를 거쳐 해방 이후 농림부 농지관리국 개량과장을 역임 한 韓乙出(<140>) 등 졸업생 대부분이 식민지 시기 연구직 관료를 거쳐 해방 이후 관료 혹은 대학교수로 자리잡는다. 그 중에는 김일성 종합대학 연구원 (대학원) 부원장과 김책 공대 교수를 역임한 韓炯琦(<129>)처럼 북한의 학계 에 자리잡은 인물들도 있었다. 
농학부 졸업생 중에서 강정택, 민덕기, 안익조 등은 특기할만한 이력을 지 니고 있다. 일고 출신의 수재로 소문높았던 姜鋌澤(<135>)은 졸업 후 농업경 제학연구실에서 7년간 연구조수 및 연구원 생활을 거쳐 동아농업연구소 촉 탁을 지내고 해방을 맞는다. 해방 이후 경성대학 농정학 교수를 1년간 지내 다가 국대안에 반대하여 사임한다. 이후 조선사회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민 주주의민족전선의 농업문제연구위원회에 참여하여 북한식 토지개혁을 주장 한다. 대한민국 제2대 농림부차관으로 농지개혁법을 주도적으로 입안하였으 나 무산되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의 행적은 알 수 없다. 閔德基 (<136>)는 민영휘의 증손자로 풍문여고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친 일자산가 집안의 후손인 그는 해방 이후에는 삿뽀로 맥주를 불하받아 조선맥 주주식회사(현 하이트 맥주)를 설립해 운영하는 등, 식민지와 해방 이후의 이른바 친일 자본의 연속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安益祚(<143>)는 수의학과 졸업 후 경성제대 의학부에 재입학하여 졸업했다. 콜럼비아레코드 사 문예부장을 지내다가 만주국군 軍醫 소교(소령)로 전직한다. 해방 이후에 는 경찰에 투신하여 경상북도 경찰서장을 지내다가 다시 헌병으로 특별임관 하여 2사단 헌병대장을 역임한다. 7사단 헌병대에서 근무 중 한국전쟁이 발 발,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부역자로 분류되어 총살당했다. 그는 애국가를 작 곡한 안익태의 형이기도 하다. 7) 경제학부 
경제학부는 경제학과와 상업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학과 졸업생은 14 명, 상업학과 졸업생은 6명으로 경제학부 전체 졸업생은 20명이다. 경제학과 를 졸업한 李敏求(<144>)는 조선은행 업무과 및 경성세무서 등에서 근무했 으며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영주식회사 사장, 조선전업주식회사 상무이사 등 을 역임했다. 陸芝洙(<146>)는 평양사범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지리학과를 창설하여 교수를 지냈다. 금융통 화위원, 도시계획위원회 위원, 중앙경제심의회 위원 등으로 국가 정책에도 관여하였다. 金光淳(<147>)은 북한에서 잡지 민주노선논설위원을 역임하 고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 부장을 지냈다. 蔡恒錫(<148>)은 국무총리 장택상 의 사위로 식민지 시기에는 식산은행에서 근무하고 해방 이후에는 산업은행 계리부장을 지내다 월북했다. 남로당 비밀당원이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張炳贊(<150>)은 해방 이후 이른바 ‘적산기업’인 조선도시바전기를 불하받
 
아 이천전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회장을 지냈다. 韓春燮(<153>)은 보성 전문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흥미로운 이력을 지닌 인물인 李鐘民(<157>)의 사례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광명중학교, 1고, 동경제국 대학으로 이어지는 학창생활을 함께한 신승복은 흥미로운 증언을 남겨 두고 있다. 이종민은 망명한 아버지와 인삼상가를 운영하는 개성의 상인 집안 출 신의 어머니를 두었다. 그는 부유한 외가에서 자라서 용정의 광명중학을 마 치고 만주국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의 1고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경제학과를 1944년에 졸업했다. 해방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1961년 5․16 쿠데 타 이후의 권력 쟁탈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신승복의 회고에 따르면, 제1군 군단장으로 쿠데타에 참여한 박림항은 이종민과 광명중학교 동창생으 로 역시 동창생이었던 정일권과 함께 군대내 만주인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 다. 박림항은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지만 불만을 느끼고 대권을 꿈꾸며, 신국 가 건설안을 가지고 권력 쟁탈에 나섰다. 이에 경제학자이자 중학동창인 이 종민을 영입하여 자기의 경제참모로 활용하며 경제건설안을 수립했다고 한 다. 이 경제 건설안은 미국식 뉴딜안과 유사한 것으로 일본에서 배상금을 받 아 정책 실현의 기초를 만들고, 도로 건설, 공업단지 건설 등을 중심으로 하 는 안이었다. 그렇지만, 박정희와 김종필 등의 견제 속에서 실각하고 박림항 과 이종민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이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박정희가 이종민이 수립한 경제개발안을 자신이 창안한 경제개발안인 것처럼 도용했 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 이 주장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가는 다른 검 토가 있어야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논란은 식민지 시기 일본 제국의 경제학 지식이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전유되는 한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경도제대 가와카미 하지메로부터 영향받은 이순탁 등의 경제 학자와 동경제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강정택 등이 일본 제국에서의 농업 경제적 지식을 활용하여 토지개혁을 진행하려다가 무산된 사례들과 함께 제 국 지식의 탈식민지에서의 연속과 변형을 증거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상업학과 졸업생 黃壽永(<159>)은 졸업 후 이와나미서점 편집 실무 담당 으로 취직하여 생활하다가 고향인 개성으로 귀국하여 개성박물관장으로 있 던 경성제대 미학전공 출신 우현 고유섭을 만나 삶의 진로가 바뀌게 된다. 고유섭의 영향으로 미술사를 사숙하면서 징용을 피해 만몽산업주식회사에 입사하여 만주에서 농지를 개척한다. 해방 이후 개성상업중학교 교감, 국립 박물관 박물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립중앙박물관장, 미술사학회 회장,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미술사학계의 태두가 되었다. 이외에 이력이 확인되는 상업학과 졸업생인 金善根(<161>)은 해방 이후 한국은행 외국부 차장, 한국은행 서독사무소장, 인 천지점장, 한국외환은행 이사 등을 역임했다. 
6. 소결
이상으로 개교 이래부터 1945년 9월까지 동경제국대학의 조선인 졸업생 163명의 명단을 추출하고 그들의 학부별 현황, 사회경제적 배경 및 출신지, 출신고교, 졸업 이후 식민지 사회에서의 사회적 경력과 해방 이후 남북한에 서의 사회적 역할 등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정리하여 목록화하고 해제하였
다. 본 연구의 목록은 동경제국대학이 발간한 공식자료인 졸업생 씨명록과 동경대학동창회의 명부, 당대 조선 유학생들이 생성한 자료, 졸업생들의 다 양한 회고록과 고등문관시험 합격자의 총독부 신원조회, 조선총독부 직원록, 각종 인명사전 등을 기반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이들 자료의 분석을 통해 근 대 이행기 일정한 사회경제사적 배경을 지닌 계층의 교육을 통한 계급 재생 산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졸업 이후 제국대학 출신자들의 사회적 경 력의 중요한 비중이 대부분 관료였다는 사실을 논증함으로써 제국대학 출신 지식인집단과 권력의 밀월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동경제국대학이라 는 최고학부의 지식제도 출신자들이 조선학술원 및 대학제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함으로써 제국의 지식이 해방 이후 탈식민지 사회에 지속 변용되 는 양상을 고찰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이력의 조사를 통해서 식민지 및 남 북한 사회의 제영역에서 그들이 사회적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은 말 그대로 기초적인 조사로 대략의 윤곽을 드러낸 것일 뿐이며, 향 후 구체적이고 세밀한 연구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동경제국대학 의 지식제도는 분단기 남북한에 어떻게 연결되고 변형되는가, 또한 그러한 지식제도는 이후 미국 헤게모니 하의 사회변동과 더불어 어떻게 변화하는가 등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를테면, 본 연구에서 검토한 최응석의 사회위생 조사와 보건의료 체계에 대한 문제가 해방 이후 어떤 논쟁의 과정을 거쳐 북한에서 실현되는 과정, 1944년 동경제국대학 사회학과에서 공부한 이만갑 이 1950년대 미국 연수를 통해 미국식 사회조사방법론을 습득하고 돌아와 서울대 사회학과 및 한국의 사회학을 형성해가는 과정 등은 이러한 세밀한 연구를 기다리는 사례들이다. 동경제국대학 정치학의 세례를 받고, 평생 혁 신운동에 투신한 이동화의 정치사상 등의 문제도 이러한 제국 지식의 연속/ 단절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동된 것이다. 제도와 사람, 학문 방법론의 다양한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를 차후 숙고해 가고자 한다. 이 거칠고 소박한 기본적 정리 작업을 딛고 더 큰 문제를 논의해주기를 바라면서 논의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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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Korean Oversea Students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of Japan
Jeong, Jong-Hyun
This study is what researched into 163 Korean overseas students who had graduated from Tokyo Imperial University reaching up to September 1945 since opening a school in 1877. The list and its background of 163 graduates were prepared on the basis of <List of Tokyo Imperial University Graduates>, which is official data that were issued by Tokyo Imperial University, of the list(1959) of the Tokyo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in Korea following the liberation, of graduates' diverse memoirs, of the Governor-General's inquiring into a person's background of passers in the higher civil-servant examination, of employees' list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of several kinds of biographic dictionaries. Based on the materials that were investigated in this way, it arranged the present status by academic division in graduates, the socio-economic background & native place, a graduated high school, social career in the colonial society following the graduation, and a social role in South and North Korea after the liberation. Analyzing these data could lead to confirming the truth that the classes who have the specific socio-economic background in the transition of modern times made the class reproduction through education. A fact was positively proved that the important weight of social career in the Imperial University graduates following the graduation was mostly bureaucrat. Thus, honeymoon relation could be identified between the intellect group of coming from Imperial University and the power. Also, it confirmed the status that the graduates from Tokyo Imperial University possess at Joseon Academy, ROK Academy, North Korea's science institute, and North & South Korean universities following the liberation, thereby having been able to positively prove the aspect that the knowledge of empire is continuously transformed in the post-colonial society after the liberation. In conclusion, the Tokyo Imperial University graduates could be identified to be forming the social center in all the social areas of colony and South & North Korea. 

Key words:Imperial University, Tokyo Imperial University, Bureaucratic orientation, Social capital, Socio-economic background, Class 
Re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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