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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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촘스키와 엡스타인의 모습을 보며 박노자 선생이 계급과 자리에 대한 인간 취약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계급과 자리만의 문제일까?
조금 돌려 말해 보면, 광화문 촛불 혁명이 ‘내면화된 이기심’에 의한 것이기에 진정한 혁명은 아니라고 나는 언급한 바 있다.
두 지점인데,
먼저 세월호 아이들의 무고한 희생에서는 분노했을지언정 거리에 나오지 않았지만,
최순실 딸 대학 부정입학에 있어서는 모두 거리로 뛰쳐나왔다.
또 무엇보다 광화문 거리에서 공공성을 외치고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직장과 일터에서 부당한 갑질과 문화에 대해서는 침묵 했다.
이해할 수 있지만 스스로를 미화할 수는 없다. 윤석열 정부가 탄생했다.
공공성을 외치고 사회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공공시설이더라도 불쾌한 시설은 정작 자기 자리에 오지 말라는 ‘님비‘ 역시 전형적이다.
자신에게 영향이 없을 때는 정의와, 착함과 올바름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자신 이해관계가 얽히면 철저하게 이기적 입장에 서는 것.
앱스타인 연루된 촘스키나 빌 게이트도 그렇고 그들 모습이 우리 주변에 흔히 보는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
물론 사회 층위와, 특정 집단이나 개인 층위의 간극에서 집단과 개인이 자신 이해 관계 민감한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충분히 자연스럽다.
물론 사회 층위와, 특정 집단이나 개인 층위의 간극에서 집단과 개인이 자신 이해 관계 민감한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충분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최소한 두 층이 충돌 할 때 어디까지 양측의 균형점을 찾아 가야 할 것인가는 언제나 중요하고 필요하다.
대외적으로 혹은 공공장소에서 얼마든지 정의와 올바름을 얘기할 수 있지만
대외적으로 혹은 공공장소에서 얼마든지 정의와 올바름을 얘기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내 삶에서, 내 개인의 모습에서 얼마나 사회적 가치와 공공성과 나 자신의 이해 관계에 균형점을 가지고 있는가 늘 되돌아 보지 않으면 우리는 촘스키나 빌 게이트 모습이 된다.
수직적 계급만이 아니라 수평적 공간으로도.
인간 나약함을 인정한다
인간 나약함을 인정한다
할 때 그것이 철저하게 개인 이해 관계나 이득만을 위한 나약함이라면
우리는 조금 더 내면화된 이기심과 함께 성숙한 공적 가치에 대한 자세를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진정 선량한 사람임은 권력을 주었을 때 나타난다는 말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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