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2

파격의 고전 | 이진경 | 2016

파격의 고전 | 이진경 | 알라딘


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지은이)글항아리201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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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격을 깨고 평가의 척도를 부수며 파격의 독법으로 읽은 고전소설들. 저자는 오늘날 고전소설이 지루한 소설로 인식되는 건 너무나 엄숙한 해석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거기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파격의 독해를 시도하고, '다른 해석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고전 작품들을 가능한 한 뜻밖의 작품으로 만나게 하고, 약간의 당혹 속에서 정말인지 확인하고자 그 작품을 다시 찾아 읽게 하고, 그 작품들이 독자의 사유 속, 혹은 삶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르게 사고하고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파격의 힘을 갖게 하고 싶었다고 전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심청, 마조히스트?: 윤리적 소설과 ‘반인륜적’ 독서
작품을 어떻게 ‘절단’할 것인가?│고전소설, 잃어버린 매력을 찾아서│〈심청전〉과 소설의 윤리│심청, 마조히스트?: 〈심청전〉의 역설적 전략│연꽃 속의 심청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심청전의 ‘반인륜적’ 윤리학

제2장 콩쥐의 신발과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환원론적 해석과 내재적 분석
콩쥐와 신데렐라는 같은 인물인가?: 환원론적 해석의 문제│콩쥐의 능력과 팥쥐의 음모: 내재적 분석│숙향전=바리공주?: 유비적 해석을 넘어서

제3장 천상의 숙향과 지상의 숙향: 이중적 사건화와 ‘모른다고 가정된 주체’
상이한 세계의 연계│신화적 사건화: 〈숙향전〉의 경우│두 세계의 비대칭성과 암묵적 서사 규약

제4장 구미호와 용왕의 대결: 동물과 인간의 경계, 혹은 왕의 자리에 대하여
두 가지 변신술│용과 구미호는 무엇을 두고 싸우나?: 〈왕수재전〉│인간화된 동물과 인간을 침범하는 동물│변신능력과 왕의 권력

제5장 전우치 대 홍길동: 변신술과 도술의 상이한 유형들
동물적 도술과 인간적 도술│전우치는 어디에서 변신하는가?: 변신술의 위상학│인간의 도술과 물질성의 도술: 〈박씨부인전〉과 〈금방울전〉│유희적-반국가적 도술: 〈전우치전〉│도구적 도술과 국가적 도술: 〈홍길동전〉과 〈박씨부인전〉│술법의 유형들

제6장 동냥하는 심청과 날품 파는 흥부: 공동체의 능력과 무능력
공동체와 돈│공동체의 힘: 〈심청전〉│공동체가 줄 수 없는 것│축장과 잉여인간: 〈흥부전〉│생명의 순환계와 탕진의 경제학│〈흥부전〉의 ‘근대성’과 놀부의 ‘진보성

제7장 〈허생전〉의 경제학과 〈토끼전〉의 생태학: 경제적 순환계와 생명의 순환계
공동체와 돈: 〈허생전〉│잉여들의 공동체│개체의 신체는 모두 공동체다│속임수의 교환: 〈토끼전〉│생명의 평등성│토끼는 어떻게 ‘삼강’을 능멸했는가?│공동체의 두 가지 외부

제8장 장화·홍련은 보았으나 사정옥은 끝내 보지 못한 것: 가족, 혹은 인륜 속의 구멍
‘계모’, 가족 내부의 적?│낙장불입의 ‘이념 소설’: 〈옥낭자전〉│윤리에 의한 윤리의 파탄: 〈사씨남정기〉│반복과 변복: 〈김씨열행록〉│가족 안의 구멍: 〈장화홍련전〉

제9장 운영의 사랑과 양소유의 사랑: 사랑의 매혹, 담장 너머로 이끌다
사랑과 매혹│때아닌 욕망은 더 멀리 간다: 〈옥소선〉│매혹과 휘말림의 힘: 〈운영전〉│가족을 초과하는 사랑의 욕망: 〈구운몽〉

제10장 변강쇠의 죽음과 숙영낭자의 죽음: 죽어서도 넘지 못한 것과 넘어서기 위해 죽는 것
담을 넘는 성욕의 흐름: 〈환관의 아내〉와 〈변강쇠가〉│자유로운 성욕의 추방과 유랑하는 삶에 대한 저주: 옹녀와 변강쇠│‘잡놈’ 변강쇠마저 옹녀의 정절을 요구하다!│‘운명’의 명령마저 위반하게 하는 것: 〈숙영낭자전〉│의심의 시선과 치울 수 없는 주검│구멍과 심연

제11장 〈금오신화〉와 〈최고운전〉: 이계와의 만남, 혹은 외부를 본 자의 고독
세계의 외부, 혹은 외부세계│은둔자와 외부: 〈유우춘전〉과 〈설생전〉│다른 세계를 본 자의 고독: 〈금오신화〉│다른 세계로부터의 탄생: 〈최고운전〉│매혹과 두려움 사이의 동요│황제의 수수께끼, 혹은 비밀의 세 유형│반어의 논리학, 외부자의 정치학

제12장 홍길동의 분신들과 허생의 ‘잉여’들: 상징적 전쟁과 탈주의 정치학
‘사회소설’과 저항?│호칭의 문제와 인정욕망: 〈홍길동전〉│증상적 기호의 상징적 전쟁│상징적 전쟁의 귀착점│침입의 정치학과 진입의 기호학│허생의 경제학적 실험: 〈허생전〉│이탈의 정치학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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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년을 뒀다가는 황해도 평안도에 좇 단 놈들 다시 없고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쫓을밖에 수가 없다˝
여인들이 합세하여 집을 헐고 쫓아내니 옹녀가 할 수 없이 쫓기어 가는 구나.그러한 처지에도 당당하기 그지없네.
(...)
˝어허 인심 한번 흉악하다. 황해.평안 양서 아니면 살 데가 없겠느냐.(...)/30~31쪽 접기 - 우주



저자 및 역자소개
이진경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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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공동체 수유너머 파랑 연구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인문사회교양학부 교수.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시작으로,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이중의 혁명을 꿈꾸며 쓴 책들이 『맑스주의와 근대성』,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철학의 모험』,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등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새로운 혁명의 꿈속에서 니체, 마르크스, 푸코, 들뢰즈·과타리 등과 함께 사유하며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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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분야 : 역사 9위 (브랜드 지수 379,797점), 철학 일반 15위 (브랜드 지수 45,254점), 고전 28위 (브랜드 지수 85,201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격格이라는 틀을 깨고 평가의 척도를 부수며
파격破格의 독법으로 읽은 고전소설들
효심 깊은 심청이 아닌 ‘반인륜적’ 심청,
다른 세상을 꿈꾼 길동이 아닌 기존 세계 질서 속으로 들어가길 꿈꾸었던 길동,
신데렐라의 미모가 아닌 ‘탈영토화 능력’을 가졌던 콩쥐…….
‘고전’이라는 확고한 자리로부터 끌어내려 다시 읽다

고전소설, 잃어버린 매력을 찾아서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했던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은 우리 고전소설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한국의 고전소설은 두세 권만 읽으면 전부 읽은 거나 다름없다. (…) 그러하니 우리네 아동용 우화 가운데 가장 졸작보다도 오히려 재미가 없다.”
정말 그런가요? 한번 봅시다. <심청전> <콩쥐팥쥐전> <홍길동전> <허생전> <장화홍련전> <흥부전> <숙향전> <전우치전> 등 우리에게는 익히 들어온 수많은 고전소설이 있습니다. 이들을 읽을 때 어떻던가요? 재미있던가요? 아닐 겁니다. 저 자신의 경험도 그랬으니까요.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만, ‘고전교양’이라며 주어졌던 소설들은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딘 소설이라면 인기가 있었던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수많은 이본異本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인쇄술은 물론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잘 알려진 텍스트를 새로 찍거나 필사하는 과정에서 개작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지요. 이리 개작되고 저리 개작되어 널리 유통되었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전소설이 지루한 소설로 인식되는 건 너무나 엄숙한 해석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가령 <심청전>을 보지요.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에게는 해석지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심청이 제 몸을 던진 것은 눈먼 아비를 위함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심청전>은 제 한 몸 아끼지 않는 효孝를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것이지요. 허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제 몸을 던지는 것이 과연 효인가요? 작품에서 보듯이 공양미 삼백 석을 다른 방법으로 얻을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홍길동전>도, <콩쥐팥쥐전>도, <허생전>도, <흥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는 고정된 해석지가 있지요. ‘도덕’이나 ‘윤리’와 연결지은 해석지 말입니다. 효나 충·열을 강조하는 권선징악적 도덕이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겹도록 듣는 이야기이고 다들 잘 아는 내용이니 재미있다고 느끼긴 어려운데, 작품이 그걸 명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해석 역시 그러하니 흥미를 가지기 힘들지요. 저는 거기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독해를 시도해볼 작정입니다. 가령 <심청전>을 ‘반인륜적’ 텍스트로 읽을 것이고, <홍길동전>을 혁명적인 텍스트가 아닌 보수적인 텍스트로 읽을 것이며, 그 작품들을 ‘고전’으로 만든 틀을 깨고, 그 틀을 직조하는 의미와 가치의 격자를 찢을 겁니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이 파격破格, 즉 격을 깨는 것, 기존의 해석 틀을 부수는 것입니다.

심청전에서부터 왕수재전, 금방울전, 옥소선전, 유우춘전, 최고운전까지
이 책은 크게 12장으로 구성됩니다. 각 장은 5-7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지요. 장마다 <심청전>이나 <숙영낭자전> 등 한두 편의 중심 텍스트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소제목에서 다른 텍스트를 끌어다가 논의를 보충했습니다. <왕수재전> <금방울전> <환관의 아내> <옥소선전> 등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소설을 주로 썼고, 이름부터 낯선 소설들인지라 내용도 함께 요약했습니다. 읽다 보면 이런 소설이 다 있었던가 싶어 놀랄 겁니다. 가령 <환관의 아내>는 17세기 야담집인 『천예록』 저자의 손자인 임매가 쓴 것인데, 그 내용이 우리가 익히 아는 ‘고전소설’과는 많이 다릅니다. 짧게 요약해보지요. 양갓집 규수였으나 조실부모하여 외숙모와 함께 살던 주인공은 환관에게 시집을 갑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야밤에 담을 넘습니다. 운영과 김진사가 그러했듯(<운영전>),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성욕 때문이지요. 집을 나온 그녀는 결심합니다. 첩이 되어 정실과 다투는 처지가 되기는 싫으니 중을 골라 따라가야겠다고. 그것도 무조건 처음 만난 중을 말이지요. 이처럼 사랑은 내게 다가온 누군가로 인해 담을 넘게 하지만, 성욕은 아직 누가 다가오지 않았는데도 담을 넘게 합니다. 사랑과 달리 대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녀는 바로 그렇게 합니다. 도망치려는 중을 “아내도 얻고 재산도 얻게 되니 좋은 일 아니냐”며 붙잡아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교합하지요. 여기까지만 봐도 흥미진진하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더합니다. 이제 그녀의 남편이 된 중이 절에 가 사정을 털어놓자 놀란 스승이 집으로 쫓아와 소리 지릅니다. 그러자 그녀는 스승의 뺨을 후려치며 이 사람은 본래 자기 남편이라고 욕을 하지요. 연신 뺨을 치자 애처롭게도 그 스승은 “이 여자 사납구나! 이 여자 못됐구나! 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하며 도망쳐버립니다. 어떻습니까? 『삼강행실도』며 『열녀전』을 철저히 따르는 소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지요? 심지어 이 작품은 이런 성욕을 부정하지 않으며, 부정적 결과로 저주하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국가가 “환관의 집에 둔 여인들을 모두 풀어주어 젊은 승려의 배필로 삼게 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 책에서 하려는 것은 ‘숨은 고전소설 찾기’가 아닙니다. 인지도가 낮은 고전소설을 소개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익히 알려진 고전소설들을 중심 텍스트로 삼지 않았을 겁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저는 기존 해석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독서를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고전소설 속 인물들이 갑갑한 해석 틀에서 뛰쳐나오게 만들 겁니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했던 <환관의 아내>는 제10장에 나옵니다. 제10장은 <변강쇠가>를 중심으로 풀어간 장입니다. 옹녀나 변강쇠라는 이름이 익숙하시지요? 이 중에서도 옹녀는 좀 독특한 인물입니다. 같이 잔 남자가 수없이 죽어나가는데도 남자와 자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말 그대로 ‘성욕의 화신’이지요. 옹녀와 변강쇠가 음란하게 노래하는 장면을 보면 성욕을 익살스럽게 긍정하는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자기만 하면 남자를 죽게 하는 옹녀를 보면 실은 그런 성욕에 대해 저주를 내리는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작품이 표면적으로는 성욕, 특히 옹녀로 상징되는 여성의 성욕에 대해 처음부터 ‘청상살’이라는 저주를 들씌워놓고 시작하여 가족이니 남편이니 구분 없이 넘나드는 성욕을 남성적이며 가부장적인 양식에 따라 익살스레 조롱하는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변강쇠라는 부랑하는 ‘잡놈’을 비난하는 텍스트로 보입니다. 이는 <변강쇠가>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과 상반되는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 읽었는지는 <심청전>을 어떻게 읽었는지 답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심청전>이든 <변강쇠가>든 기존 해석 방식에서 어떻게 다른 독해를 이끌어냈는가/이끌어낼 수 있는가가 이 책의 주제이니까요.

연꽃 속의 심청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다시 <심청전>을 보지요. 앞서 제가 던졌던 질문을 기억하시겠지요. ‘아비를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 진정 효인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여기서 먼저 지적할 점은,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간다는 소식을 들은 장승상 댁 부인이(심청을 수양딸로 삼고 싶어했던 분이지요) “쌀 삼백 석을 이제라도 다시 내어줄 것이니 뱃사람들 도로 주고 당치 않은 말 다시는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심청입니다. 한데 거절하는 이유가 더 이상합니다. “부모를 위해 공을 드릴 양이면 어찌 남의 명분 없는 재물을 바라며, 쌀 삼백 석을 도로 내어주면 뱃사람들 일이 낭패이니 그 또한 어렵고, 남에게 몸을 허락하여 약속을 정한 뒤에 다시 약속을 어기[는 것은]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니, 그 말씀을 따르지 못하겠”답니다. 승상 부인이 먼저 말 꺼내는 것을 보면 쌀 삼백 석을 내어주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뱃사람들과의 약속이 중하다는 이유로 거절하다니요! 더욱이 “늙으신 아버지를 홀로 두고 죽는 것이 불효인 줄” 잘 알면서도 또 자신이 죽은 뒤 아버지가 죄책감에 시달릴 것을 알면서도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심청은 왜 피할 수도 있었고, 효를 위해서라면 피하는 게 좋았을 자신의 죽음을 향해 고집스레 밀고 나갔을까요? 아니, <심청전>은 왜 심청을 그런 방향으로 밀고 갔던 것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쩌면 <심청전>은 절대적 명령(효)에 순종하는 심청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그 명령의 지고함이 아닌 황당함을 드러내는 역설적 텍스트가 아닐까요? 자식을 야단치다 '나가 죽어!'라고 했는데 그놈이 정말 나가 죽는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 경우 ‘절대적 복종’은 항의입니다. 죽음을 불사하는 극단의 항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 명령의 부당성을 드러내는 항의 말입니다. 이것이 과한 해석처럼 보인다면, 또 하나 지적할 점이 있습니다. 연꽃 속의 심청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효심이 깊었던 심청이라면 용궁을 빠져나오자마자 집에 가 심봉사를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심청은 그렇게 하지 않지요. 임당수에 몸을 던진 순간 절대적 명령에 복종하던 심청은 죽어버렸으니까요. 용궁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심청 안의 다른 누군가가 다시 태어났으니까요. 그렇게 다시 태어난 심청은 눈먼 아버지와 눈먼 도덕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눈먼’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심청전>은 맹목적 효를 설파하고 강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효이기를 중단한 효'를 통해 효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텍스트입니다.
덧붙여서 <홍길동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풀어놓을까요. 부제가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이니 심청이 이야기만 들으면 반쪽만 들은 셈이 아닙니까. 이미 말했듯 심청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본 게죠, 자신이 따랐던 맹목적인 효가 실은 눈먼 효였음을. 눈을 뜬 겁니다. 그렇지만 길동은 어떤가요? <홍길동전>은 흔히 서얼로 태어나 이 세계의 질서에 불만을 품은 길동이 활빈당 활동을 펼쳐나가고 ‘율도국’을 세우기까지 하는 가히 혁명적인 텍스트로 해석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런가요? 길동은 끝끝내 ‘호부호형’할 수 있는 지위를 원하지, 자신의 처지가 부당함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부당하다 느꼈다면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 신분제를 철폐했어야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지요. 그는 오히려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도 기존 질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그는 ‘왕’이 되길 원했던 것이지, 신분제로 뒤덮인 이 나라를 뒤엎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길동은 끝끝내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호부호형’할 수 없었던 한恨의 진짜 이유를.

팽팽한 긴장 속에서 고전소설 읽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요. <심청전>을 읽을 때 단 하나밖에 없었던 해석지가 이제는 어떻게 보이시나요. 저는 제 해석만이 옳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고전소설은 제가 공부하던 사회과학이나 철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고,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책과 논문을 참고했습니다. 그것들은 고전소설을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읽게 해주었지요. 저는 다만 ‘다른 해석지’를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작품들을 가능한 한 뜻밖의 작품으로 만나게 하고, 약간의 당혹 속에서 정말인지 확인하고자 그 작품을 다시 찾아 읽게 하고 싶었습니다. 감히 흥분이라고는 못 해도 어떤 최소한의 흥미를 통해 그 작품들이 여러분의 사유 속, 혹은 삶 속으로 들어가길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르게 사고하고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파격의 힘을 갖게 하고 싶었습니다. 또 다른 파격의 시도들이 그 작품들을 찾아가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그 작품들이 여전히 ‘고전’의 자리 주변을 맴돌게 된다면, 그것이 파격의 힘을 가동시키는 ‘파격의 고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효심 깊은 심청이 아닌 반인륜적 심청,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길동이 아닌 기존 세계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했던 길동을 보러 함께 가지 않으시렵니까.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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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책..이진경의 탈주의 철학의 눈으로 고전을 해석 ...특히 콩쥐 팥쥐 해석이 볼 만함.
보빠 2017-03-12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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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글만큼 명쾌하게 인문학적인 세계, 그리고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도 없다. 이번 책도 재밌다. 무엇보다 유용하다. 인문학이란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오월의시 2016-03-20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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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이면 두말 할 것 없다.콜! `전을 범하다 (웅진 지식하우스,이정원 저)`와 더불어 봐도 무척 재밌을 것.
Ajna 2016-02-29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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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결국 들뢰즈적 설명. 파격을 얘기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실질적 분석이 없이 들뢰즈적인 내재적 해석에 근거함. 동양 철학에 강신주, 고전 문학에 고미숙, 역사에 이덕일, 사회학에 이진경. 독자 대중은 끌어모으나 학계에서는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사람들
pak018 2016-03-19 공감 (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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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댓글에서 실질적인 분석이 없다는 말. 솔직히 이해가 안됩니다. 책을 제대로 읽어보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네요. 국어교사로서 저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틀로 더 풍부하게 분석하는게 우리 고전을 위해 좋다고 느꼈습니다.
mkkweon 2016-04-19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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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기쁨



책을 읽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고전소설이 몇 편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뻔한 고전을 가지고 이토록 풍성하면서도 심도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이 놀랍다. 문학이론은 물론이고, 철학과 사회학을 넘나드는 지적 향연이 펼쳐진다. 인문학에 관심은 있으나, 아직 그 내공이 깊지 않은 독자가 택한다면 쉽게 빠져들 책이다. 내가 그러했다. 오랜만에 괜찮은 책을 만났다. 아직 독서를 마치진 못했지만, 저자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고전은 아무래도 <심청전>인 것 같다. 그리고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 저자의 평가가 가장 박한 것은 <홍길동전>이다. 그러고 보니 표지에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심청전>은 효를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텍스트다.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을 향해 끝까지 밀고나간 심청은 '효에 대한 요구를 과도하게 준수함으로써 그런 요구 자체를 어이없는 명령으로 만들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저자는 그 증거를 되살아난 심청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에서 찾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효녀 심청은 눈 먼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심청은 아버지를 포함한 맹인들을 집 밖으로 불러낸다. 심청의 아버지는 '집 밖'에서 눈을 뜬다. 저자는 여기서 '탈영토화'를 읽고, 나는 '살림'을 읽는다. 되살아난 심청이 아버지에게 전과는 다른 삶을 주었음을 읽는다. 오래 전에 보았던 신영복 선생의 <나무야 나무야>를 다시 읽어본다.




당신은 평강공주의 삶이 남편의 입신이라는 가부장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산다는 것은 살리는 것입니다. 살림(生)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공주가 아니기 때문에 평강공주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살림이란 <뜻의 살림>입니다. 세속적 성취와는 상관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한 여인의 사랑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삶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다른 맹인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 심청과 달리 홍길동은 그 어떤 새로운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길동을 움직이게 한 것은 신분제에 대한 반감이었으나, 그는 기존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왕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할 뿐이다. 왕이 병조판서 자리를 준다고 하니 냉큼 와서 받는다. '율도국'도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기존의 멀쩡한 나라를 침략해서 빼앗은 것이다. 무엇보다 홍길동은 '살생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자신을 죽이려던 자객과 그 공모자를 죽인다. 활빈당을 만들어 탐관오리들의 목을 벤다. 나중에는 죽일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자들을 몰살하기도 한다. 홍길동은 원하는 바가 분명하다. 그것은 체제에 자신을 편입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죽이고 또 죽인다. 다시 <나무야 나무야>를 읽는다.




단종은 국왕이란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어린이입니다. 상왕이란 칭호는 더욱 그렇습니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고아나 다름없었습니다. 어린이를 왕좌에 앉히고 끌어내리고 다시 복위를 도모하고 유배와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세조의 왕권찬탈은 흔히 부도덕한 것으로 매도되고 단종복위를 모의하다 주륙당한 집현전 학사들은 선왕의 고명을 받든 충절의 사람들로서 추모됩니다. 그러나 세조의 주변에 결집한 세력의 사회적 성격은 무엇이며 그처럼 살벌한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기어이 복위를 도모했던 집현전 학사들의 충절과 명분은 얼마만큼 정의로운 것인가 하는 의문을 금치 못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심청은 살리고 길동은 죽인다. 내가 보기에 <심청전>의 전반부는 공동체(이 책은 '효'와 '공동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심청전>을 읽는다.)가 그냥 두면 죽었을 심청이네를 살리는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심청이 눈 먼 자들을 살리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반면 <홍길동전>은 길동의 일방통행 식 욕망이 뻗어나갈 뿐이다. 홍길동에게 타인은 자신을 인정해줄 자가 아니면, 그 인정을 위해 자신이 수단으로 삼는 자로 등장할 뿐이다. 신영복 선생이 집현전 학사들의 충절에 제기한 의문을 홍길동의 활빈당 활동에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청은 타인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다. 심청이 맹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것,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용맹한 장군으로 일어서게 만든 것, 나는 이것이 '살림'이라고 생각한다.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살림의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기쁨을 맛볼 때, 사람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심청이 진정으로 다시 태어난 지점은 인당수에서 연꽃으로 떠오른 때가 아니라, 아버지와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한 때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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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속밖 2017-07-08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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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파격의 고전

`동화 독법`, `전을 범하다` 이란 책들이 좋다. 흔히 알고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를 비틀어 보는 시각들. 두 책들은 사 놓고 읽지 않고 사지 않은 파격의 고전은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 읽는 내내 흥미 진진했고 많은 해석들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LetterFromEarth 2016-07-0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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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知所終˝ :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不知所終" :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 [파격의 고전], 이진경, <글항아리>, 2016.


"수많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不知所處)'나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不知所終)'는 말은 이 '은거'라는 선택을 표현한 것인데, 대부분의 해석자는 이 말을 현실을 등지는 소극적인 도피나 심지어는 현실에서 패배한 자들의 소외로 이해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은거'란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외부')를 찾아가는 것, '다른 세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외부'란 누구에겐 가까이 있어도 더없이 멀고, 누구에겐 멀리 있는 듯 보여도 더없이 가까이 있는 것,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 [파격의 고전], <11장. '금오신화'와 '최고운전' : 이계와의 만남, 혹은 외부를 본 자의 고독>, 이진경, 2016.


1.

내가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이십대에,
당시 나의 주제는 '부재(不在)'였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허생전'의 마지막처럼 한바탕 놀다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 그 '부재'의 현장을 멍하니 쳐다보는 어영대장 이완처럼.

불평등한 세계를 뒤집어 엎겠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다가 '90년대라는 세기말에 들어서자 갑자기 '변신술'을 부리며 '부재'하던 자들이 '허생'이었다면, 그들을 쫓다가 어느 순간 그 '부재' 앞에서 멍때리고 있는 나는 '이완'이었다.

여기서도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
주인공이 아닌 구경꾼이었다.


2.

"특히 현실에 '부재'하지만 강력한 능력을 갖는 기이한 동물은 인간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며, 그런 동물의 형상으로 자연에 투영된 인간적 '소망의 표현'입니다... 홍길동의 도술과 박씨 부인의 도술 모두 국가나 임금에 대한 도덕적 충실성, 가정에 대한 도덕적 충실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와 달리 유희적인 방식으로 쓰였던 전우치의 도술이 오히려 통치에 반(反)하는 '반(反)국가적' 도술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적 성격의 도술과 동물적 성격의 도술이라는 차이가 이와 무관하지 않음도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습니다."
- [파격의 고전], <5장. 전우치 대 홍길동 : 변신술과 도술의 상이한 유형들>, 이진경, 2016.


'80년대 '사구체 논쟁', 즉 남한체제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고 유행시킨 철학자 이진경 선생은 운동권의 전통과 같은 'NL'식 '식민지반봉건' 체제론에 대항한 'PD'식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론의 선봉이었다. 그러다가 한때의 남한체제 변혁론이 사그라진 '90년대 초반에 '사구체 논쟁'은 갑자기 사라지고 혁명의 '부재'로 남았다.

이진경 선생은 '90년대 중후반에 철학의 '탈주'를 통해 '외부'를 돌다가, 21세기에 들어서자 칼 마르크스의 '고전' [자본론]을 다시 들고 자본주의 '너머'인 '외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이다.

한때 '부재'한 듯 했던 철학자 이진경의 주제는 '외부'다.

그런 그가 2016년에는 우리의 고전소설들을 대상으로 두고 텍스트의 '내재적' 의미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적 독해를 했는데, 이 작업을 정리한 책이 [파격의 고전](<글항아리>, 2016)이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파격(破格)'이란... 평가의 척도를 깨는 것이며, 사물을 보고 '바로잡는' 틀을 깨는 것이다. 사물과 '겨루는' 대신 '틀(格)'과 겨루는 것이다"(같은책, <머리말>)라고 정의하면서 시작한다. 즉, 일반적인 통념을 깨는 우리의 '고전' 읽기다.

이 책의 부제는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이다.
통념적으로 조선의 '반역자'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은 적서자 차별에 대항한 '사회소설'로 알려져 있다. 이진경 또한 여태 그렇게 생각했지만 '파격'의 눈으로 다시 독해하니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홍길동이나 전우치나 도술을 익히고 국가권력에 대항한 '반(反)국가적' 변신술을 부리지만 이 둘의 변신술은 다르다.
'호부호형',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얼자의 한을 반복적으로 소환하며 국가를 상대로 '주역' 등을 통해 익힌 도술과 변신술을 부리는 홍길동은 자신의 꿈이었던 병조판서에 제수되자 마자 도망쳐 남경 제도와 율도국 건설의 '외부'로 이탈하지만, 결국 서얼자 차별의 신분제의 체제 '내부'를 벗어나지 못하고 율도국의 원주민 학살을 통해 '왕'이 되고 마는 체제 '내부' 종속자에 불과하다.
반면, 구미호 같은 암컷 여우와 동침하고 도술을 배운 전우치는 끊임없이 체제 '외부'로 탈주하고 이탈한다. 국가권력에 대한 전우치의 도술과 변신술은 다분히 '동물'적이고 체제 '내부'에는 없는 다분히 유희적인 어떤 것이다. 홍길동처럼 체제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호부호형'의 몸부림과는 다르다. 전우치의 변신술은 목적이 없다. 억압적 권력에 대항한 한없는 조롱이다. 이에 대항하여 당시 조선 후기의 선비들은 서화담에 의해 사로잡히는 전우치를 그린 한문판 '반(反)전우치전'을 지어서 퍼뜨리기도 했단다.

홍길동의 도술과 변신술은 '인간적'이기에 체제 '내부'에 철저히 종속되고,
전우치의 그것은 '동물적'인만큼 언제까지나 체제 '외부'로 탈주하고 있다.


"... '심청전'은 통상적으로 이해되듯이 목숨을 건 '효(孝)'를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라는 도덕적 명령에 대한 지나친 복종을 통해 그 명령 자체를 당혹 속으로 모는 역설적 비판의 텍스트이고, 효로 되돌아가지 않는 비인칭적 죽음을 통해 거기서 열리는 다른 잠재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텍스트요, 그럼으로써 아버지나 맹인들, 눈먼 도덕적 명령을 '집'에서 벗어나 '밖'('외부')으로, 다른 넓은 세계로 끌어내는 텍스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심청전'은 '효'라는 잘 알려진 '답'을 엽기적 사례로써 설파하고 강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효이기를 중단한 효, 집 밖으로 끌려 나간 효를 통해 효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텍스트, 효에 대한 다른 관념을 제안하는 텍스트라고 해야 할 겁니다."
- [파격의 고전], <1장. 심청, 마조히스트? : 윤리적 소설과 '반인륜적' 독서>, 이진경, 2016.


율도국이라는 체제 '외부'를 향했음에도 실질적으로는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 '홍길동전'은 역시, 체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는 '심청전'과도 대비된다.

보통 우리는 '심청전'이 '효(孝)'를 강조하는 소설 또는 판소리로 알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를 '파격'적으로 독해하면, 정반대의 '반윤리적' 이야기가 된다.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와 심청은 마을 공동체의 '부조'를 통해 살아간다. 여기서 '동냥'이 아니라 공동체의 적극적 시주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에 의하면 '공동체(community 또는 commune)'는 '선물(munus)'을 '공유(com-)'하는 단위의 어원을 갖는다고 한다(같은책, <6장>). '공동체'는 '선물 의해 결합된 관계'(같은책, 같은곳)라는 것이다.
조선 말 우리의 동학혁명 소단위로서 상부상조하는 바로 그 마을 공동체다. 마르크스가 만년에 주목한 러시아의 '미르공동체'나 게르만의 '마르크공동체' 같은 유럽의 시골공동체와 같은 '생태적' 공동체인 것인데, 근대적 자본과 화폐적 교환관계 이전에 모두가 '함께 살자'는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던 그런 삶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조선왕조의 권력은 부모에게 허벅지살 고기나 손가락뼈 사골국을 바치는 극단적 '삼강행실'의 유교적 윤리를 강조하면서 이 민중적 공동체의 자율성을 통제하고 억압한다.

여기서 굳이 임당수에 몸을 던지지 않아도 공양미 3백석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보란듯이 선원들과의 '교환' 또는 '계약' 관계를 들먹이며 결국 목숨을 내던지는 심청의 행적은 '효도'가 아니었다는 거다. 오히려 반대로 극단적 '삼강행실' 윤리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다. 부모가 '나가 죽어'라 한다고 '네. 알겠습니다'며 진짜로 즉시 나가 죽는 게 효도일 수 없는 것처럼. 심봉사의 초반 실수로 공양미 3백석에 몸을 판다고 진심 팔려가는 것이 결코 효도일 수는 없다. 강단있는 심청의 저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용왕이라는 '다른 세계'('외부')를 만나 부활한 심청은 가정이라는 체제로 다시는 복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높은 귀한 신분이 되어 아버지 심봉사를 찾는 게 아니라 전국 봉사모임을 개최하여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한다.
심청은 끝까지 자기를 죽음으로 내몬 가정의 체제 '내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심청은 체제 '외부'의 힘으로 '내부'를 끌어낸다.

[파격의 고전]의 부제가 말하는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체제 '너머', 즉 체제의 '외부'인 것이다.


"홍길동이 자신에게 없는 '귀함'을 찾아 아버지와 임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그들이 줄 수 있는 인정의 기호를 얻고자 자신을 버린 체제의 '내부'로 들어가고자 했던 것과 달리, '허생전'에서 허생은 '내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외부'를 향해 나아가며, '외부'적인 것의 작동을 실험하고, '외부'적인 것의 세계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언행은 앞서 말한 '이탈의 정치학'이라는 개념에 부합합니다."
- [파격의 고전], <12장. 홍길동의 분신들과 허생의 '잉여'들 : 상징적 전쟁과 탈주의 정치학>, 이진경, 2016.


이제 다시, [파격의 고전]에서 제일의 비판적 텍스트, '홍길동전'은 '허생전'과도 비교된다.

일반적으로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 '허생전'은 근대적 자본 증식 또는 화폐 교환 체제에 대한 실학적이고 긍정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도 그렇게 배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파격'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허생전' 텍스트는 근대로의 전환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과거시험도 보지 않고 주구장창 글이나 '충분히' 읽으려는 몰락양반 선비 허생에게 아내는 '도둑질이라도 해서 돈이나 벌어오라'는 지극히 생계적이고 현실적인 요구를 하는데, 알고보니 근대적 경제관념의 천재 허생은 조선 경제에 폐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점매석을 통해 수백배의 이익을 얻고 군산의 도적단을 찾아가 도적질의 근원인 생계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작은 섬을 얻고는 체제 '외부'의 대안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한다.

여기서 홍길동과의 차이점은 허생이 '외부' 체제의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점이다. 허생은 그 작은 섬에서 통용되지도 못할 50만냥을 바다에 버리고 '글줄 아는 선비들'을 데리고 나온다. '잉여'는 계급 차별을 낳는다는 점을 간파했고 '문자'는 권력의 생성과 강화에 복무하는 주요기제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체제 '외부'에서 '내부'로 돌아와 애초 1만냥을 빌린 변씨에게 매점매석과 나카사키 구휼의 '해외투자' 등으로 불려서 남은 돈을 전부 되갚는 과정에서, 원리금만 받겠다는 변씨에게 했던 그 유명한 일갈은 매우 인상적이다. "내가 장사치인 줄 아는가?"라는 바로 그 말이다.

허생의 비범함에 놀란 부자 변씨가 연결해준 어영대장 이완에게 관직을 추천받았지만, 허생은 당시 조선 관료사회에서 관철될 수 없는 요구사항을 제안하면서 예상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골방의 뒷문으로 '탈주'한다.

'허생전'의 결말인 '부지소종(不知所終)'이 그의 '부재'를 표현한 방식이다. 즉, 허생이 '부재'를 남기고 사라진 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사라진 허생이 간 곳은 아마도 체제 '너머'인 체제의 '외부' 어딘가로 추정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만큼 우리가 체제를 넘어서 멈추지 않고 찾아야 할 미지의 대안세계이자 '외부'일 것이라는 변함없는 결론만이 대대로 이어진다.


3.

젊었던 내게 '부재(不在)'는 무책임한 체제 '내부'의 변신술로만 보였을지 모른다.
그랬기에 지금껏 나는 어영대장 이완처럼 멍때리고 있었던 거였을 지도.

이제 이진경 선생을 따라 '파격'의 관점에서 본 우리의 고전은 '부재'로 남은 그 선배들이 '부지소종(不知所終)'을 통해 체제 '외부'로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중년이 된 나의 사고를 확장케 한다.

아니,
모르겠다.
어느새 기성세대가 된 내가,
더 이상 멍때리는 어영대장 이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부재'를 남기는 허생이 되고 말았을는지도.

***

1. [파격의 고전 :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이진경, <글항아리>, 2016.
2.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7), 이진경, <그린비>, 2008.
3.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그린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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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rice1007 2023-12-3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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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파격의 고전


daram 2019-10-1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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