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박태원의 삶과 문학
박태상 (지은이)한국문화사2019
다음



종이책의
미리보기
입니다.































책소개
박태원의 삶과 문학을 다룬 책. 제1부 '박태원은 과연 모더니스트였는가', 제2부 '박태원은 왜 역사소설에 몰두했는가', 제3부 '박태원은 양가성.혼종성의 저항을 했는가', 제4부 '북한문학사에서 박태원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로 구성되었다.
목차
■ 책머리에 / v
제1부 박태원은 과연 모더니스트였는가
탈식민주의 담론을 통해본 지용과 구보문학의 존재방식
1. 머리말
2. ‘흉내 내기’로서의 모더니즘과 그 미학적 가치
3. ‘따라 하기’와 ‘구별 짓기’의 모순성 각성
4. ‘하위주체의 말 걸기’로서의 대안 모색과 한계
5. 맺음말
기호학적 담론을 통해 본 정지용․이상․박태원의 상관관계__43
1. 머리말
2. 구인회, 모더니즘 및 근대적 자아의 형성
3. 짐멜의 담론과 퍼스 기호학의 관점에서 풀어본 미적 체계
4. 맺음말
제2부 박태원은 왜 역사소설에 몰두했는가
고전 「홍길동전」과 박태원의 「홍길동전」의 기호학적 비교 연구
1. 머리말
2. 구보의 해방기 역사서사의 창작배경
3. 고전 「홍길동전」과 구보의 「홍길동전」의 변별성
5. 맺음말
해방 후 박태원 역사소설 연구
1. 머리말
2. 제국주의와 역사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해체담론
3. 해방 전후 역사소설의 창작동인과 구보의 역사관
4. 주변부 관찰을 통한 해체주의적 시각
5. 맺음말
박태원의 「임진조국전쟁」과 김훈의 「칼의 노래」 비교 연구
1. 머리말
2. 작가 박태원과 김훈의 세계관
3. 퍼스의 담론을 통해서 본 「임진조국전쟁」, 「칼의 노래」
4. 맺음말
제3부 박태원은 양가성․혼종성의 저항을 했는가
불안한 관찰과 불온한 전망
1. 머리말
2. 불안한 관찰의 서사
3. 불온한 전망의 서사
4. 맺음말
제4부 북한문학사에서 박태원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북한문학사에서의 박태원문학의 위상과 좌표
1. 머리말
2. 북한의 「조선문학사」에서의 변별적 특성
3. 당대 및 남북한 문학사에서의 구보문학의 평가
4. 「조선문학사」에서의 박태원의 위상
5. 맺음말
❂ 박태원 작품 연보
❂ 구보 박태원의 생애와 연보
❂ 참고 문헌
접기
책속에서
탈식민주의 담론을 통해본 지용과 구보문학의 존재방식탈식민주의 담론을 통해본 지용과 구보문학의 존재 방식 |
1. 머리말
1930년대의 가장 중요한 두 예술가인 정지용과 박태원은 1933년 구인회를 통해 만나게 된다. 물론 나이는 1902년생인 지용이 일곱 살이 많아서 선배의 위치에 있었다. 구보는 1909년생이라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24세로 약관의 나이였다. 지용은 구인회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상허 이태준과의 친교 관계로 구인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구보는 경성고보 동창이었던 조용만의 천거로 가입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인회는 애초 당시 신문사 기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이종명 김유영 조용만 등이 모여서 카프에 맞서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단체로 만들려고 했으나 이태준과 정지용이 좌장과 사회를 맡으면서 회칙도 강령도 없는 순수한 친목단체로 방향을 설정하자 이종명과 김유영이 슬그머니 탈퇴하고 그 자리에 조용만의 천거로 박태원과 이상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지용과 구보의 친교 관계에 대한 것은 기록이 많지 않아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지용이 이태준 이병기 김용준 등 문장파 문인들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던 것에 비해 구보는 이상 김유정 김기림 정인택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 었다. 지용이 술을 즐겼고 고집이 상당히 센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지용은 시를 암송하는 것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지용이 천향원이라는 요릿집에서 기생의 머리채를 잡고 호통을 치다가 요릿집 남자주인공에게 봉변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최재서가 택시를 잡아서 모윤숙과 최정희를 밀어 넣고 도망간 후에 다음날 최정희가 지용에게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물었다는 사건은 당시의 문인들 사이에 회자된다. 최정희는 지용이 북아현동에 살 때 바로 옆에 살아서 자주 만나고 술을 함께 하기도 했는데, 지용은 술에 취하면 “좋아 죽겠다”라고 두 팔을 위로 치켰다 내렸다 하면서 펄쩍펄쩍 뛰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당시 별명으로 소형차인 ‘다또상’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구보도 음주를 즐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외국을 갔다가 돌아온 김기림에게 “돌아오셨으니 반갑소. 오랜만에 서울거리를 함께 거닙시다. 술은 배우셨소? …(중략)… 그 뒤로 다시 창작 활동이 없는 것은 도시 술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인가 하오. 우리, 같이 술 좀 자시고, 누구 꺼릴 것 없이 죽은 이상이의 욕이나 한바탕 합시다.”라는 글을 여성에 실은 것에서 확인이 된다. 또 삼천리의 기자였던 최정희는 구보에 대한 추억으로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구보가 하도 자랑을 해서 둘이서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노래경연대회를 해서 그를 눌렀던 것을 기록에 남기고 있다. 구보가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그가 그치면 최정희가 부르는 식으로 반복을 해서 수 시간 뒤에 구보가 패배를 자인했다는 것이다. 지용이 시를 암송하기를 좋아했고, 구보가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는 사실을 보면 두 사람이 모두 리듬을 타면서 풍류를 즐겼던 동질성이 있다. 이러한 취향 이외에도 두 사람은 초기에 서정시를 창작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일제 강점기에 모더니스트로서 문명을 휘날리다가, 군국주의가 말기 증세를 보이던 1930년대 말부터 자신의 문학적 흐름을 변화시켜 동양적 은일의 세계로 옮겨간 것도 대동소이한 양상으로 생각된다. 또 해방 이후 한국전쟁의 시기에 두 사람 모두 자의반 타의반으로 평양으로 가게 된 것도 공통점이다.
이렇게 지용과 구보의 삶과 문학은 여러 가지 점에서 비슷한 양상을 지니고 있다. 요즈음 탈식민주의 담론으로 근대문학뿐만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 몽고족에 의해 복속을 당한 시기에 창작된 고려가요까지도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근대 시기의 문학을 분석하는 데에는 좋은 비평의 잣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지용과 구보 두 사람 모두 거의 같은 궤도의 문학적 흐름을 보여주게 된 것은 작가 개인의 개성보다는 시대적 환경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탈식민주의 담론에 따른 분석이 상당한 유효성을 띠게 될 가능성을 높여준다.
2. ‘흉내 내기’로서의 모더니즘과 그 미학적 가치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는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용어로 번역되고 있다. 그냥 포스트식민주의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고, 후기 식민주의나, 신 식민주의로 나름대로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즈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역시 ‘탈식민주의’라는 용어이다. 이 말에는 식민지 유산의 지속과 청산의 양가적 속성을 내포한 개념이 될 것이다.
식민지인 입장에서 지배 권력에 맞서는 저항은 중요한 전략이다. 식민지배자는 식민지인의 욕망과 저항을 위험한 것으로 보고 이를 항상 통제하고 억압하고 단죄하려 한다. 질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것은 일종의 ‘코드화’ 혹은 ‘영토화’이다. 들뢰즈에게는 지배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개개인의 욕망 특유의 분열적인 흐름을 ‘탈 코드화’ 혹은 ‘탈영토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탈주(선 긋기)의 흐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재코드화’ 혹은 ‘재영토화’라 부른다. 예를 들면,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탈주 욕망의 지속적 생성(과정)이 창조적이며 전복적인 삶을 지속시키는 자양분이 된다. 들뢰즈의 이런 개념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을 설명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탈식민주의란 억압과 착취를 낳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해체 혹은 전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를 위해 식민화를 지지하는 인종차별의 부당성을 알리고 지배 권력의 횡포에 제동을 걸어 종주국과 식민국 사이에 발생하는 여러 형태의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한다. 최근 모더니스트로서의 지용과 구보문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봇물 터지듯 이루어지고 있다. 소장학자로부터 제기되는 대체적인 흐름은 지용이나 구보문학을 초기의 모더니즘문학과 후기의 전통성에 근거를 둔 문학으로 획일적으로 이원화해서 구분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두 사람의 문학에는 근대성과 전통성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무래도 유학을 다녀온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조선이 처한 현실이 심각하며, 식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근대성의 표피적인 효과보다는 잠재되어 있는 문제점이 간단하지 않음을 인식한데서 비롯된다.
지용은 1920년대 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근대 도시풍경을 노래하는 모더니즘 시를 많이 창작하여 발표한다. 이 시기는 지용이 일본 유학생활을 떠나고, 일본 교토에 머물던 시기와 귀국 후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를 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1925년에 교토에서 「샛밝안 기관차」, 「황마차」를 써서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했다. 동지사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던 1926년에는 유학생 회지인 학조에 「카페 프란스」, 「슬픈 인상화」, 「파충류동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7년 2월 근대풍경 제2권 2호에 일본어로 표기된 시 「고아의 꿈」을 투고하여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인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관심을 받게 된다. 1930년에는 시문학에 「바다1」을 발표하고, 조선지광에 「아츰」을 게재한다. 1933년에는 가톨릭청년에 「시계를 죽임」, 「해협」 등을 발표하고, 1934년에는 구인회가 펴낸 순문예잡지 시와 소설(창문사)에 「유선애상」을 싣는다. 시와 소설에 이태준은 수필 「설중방란기」를 발표하고, 구보 박태원은 실험적 단편소설 「방란장주인」을 게재했다. 1935년에는 조선문단에 「다시 해협」과 「지도」를 발표한다.
이 시기에 발표한 지용의 시에는 공간으로서 바다가 많이 등장하고, 새로운 근대문물로 기차 선박 비행기가 시의 중요한 소재로 활용된다. 공간으로서 ‘바다’는 일본 근대시에도 많이 등장하는 소재이며, 일본 식민지 확대 정책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지용의 시는 이미지즘이나 모더니즘으로 평가받아왔다. 이미지즘은 에즈라 파운드(E. Pound, 1885~1972)와 그의 옛 애인 H. 두리틀 그리고 그녀의 약혼녀 리처드 올딩톤(R. Aldington)과 함께 셋이서 1912년에 런던에서 시작한 현대시의 변혁운동이다. 이미지즘이란 말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흄이지만, 이미지즘의 시는 작품 수도 적고, 볼 만한 수준의 작품도 많지 않다.... 더보기
반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3인칭 관찰자시점의 소설로 고독하고 세상의 삶에 지친 가난한 소설가 구보가 전차를 타거나 걸으면서 근대풍경을 새롭게 담아가고 있는 경성의 거리를 산책하는 여로구조의 이야기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一日」은 삽입된 소제목을 중심으로 서사구조를살펴보면 총 30여 개로 분절25) 되는데, 1) 어머니는 에서...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박태상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와 연세대 대학원에서 공부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MSU)와 듀크(Duke)대학교(2017-2018)에서 객원교수를 지냈고,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있다. 대전·충남지역대학 학장과 울산지역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대통령 자문기구 민주평통 상임위원 겸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충북 옥천의 지역축제인
<지용제> 운영위원(겸 홍보이사)을 맡았다. (사)<서울평양학회> 회장, 동아일보 <건강한 인터넷 운동> 국민운동본부장,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부회장 ... 더보기
최근작 : <박완서 노년문학의 총체적 연구>,<문화통합론과 북한문학 (워크북 포함)>,<고전소설강독 (워크북 포함)> … 총 3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박태원과 정지용은 함께 구인회에서 활동해서 그런지 닮은 점이 매우 많다. 첫째, 실험정신이 투철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모더니스트로서 진실로 다양한 창작기법과 문체를 선구적으로 실험했다. 이러한 실험정신은 우리나라의 작가들과 평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유학파로서 청년기에는 서구 과학문물에 대한 예찬에 몰두했으나, 식민지 현실을 돌아보면서 참담한 여건의 민족과 서민들의 생활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용이 후기시인 한적시(산수시)를 통해 동양적인 사유에 젖어들었다면, 구보는 자신의 가족 주변의 소시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글에 몰두하는 동시에, 고전인 『삼국지』와 『수호전』 등의 역사소설에 대한 번역에 집중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두 사람 모두 현실 상황에 의해 월북을 택한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머리말] : 역자서평
구보 박태원에 대한 책을 펴낸다. 아직 다룰 것이 많은데도 쫓기다시피 책을 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구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구보의 차남 박재영 선생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 구보에 대한 세미나에서나 정지용 문학포럼에서 자주 뵈었는데, 한두 해 사이에 뵙지를 못했다. 암 투병중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다른 하나는 필자도 정년이 많이 남지 않아서 그동안 연구한 것을 하나씩 매듭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진한 것은 후학들이 메워줄 것이다.
구보는 매우 매력이 많은 작가이다. 학창시절에 재주도 없으면서 소설 창작을 꿈꾸면서 구보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천변풍경>을 도서관에서 몇 차례나 읽었다. 이태준이 장거리 문장이라고 평한 치렁치렁한 문체와 식민지의 수도 경성을 도보와 전차로 헤집고 다니며 관찰하며 보여준 ‘다양한 시선’은 청년기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고현학적 접근은 실로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함께 구인회에서 활동해서 그런지 박태원과 정지용은 닮은 점이 매우 많다. 첫째, 실험정신이 투철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모더니스트로서 진실로 다양한 창작기법과 문체를 선구적으로 실험했다. 이러한 실험정신은 우리나라의 작가들과 평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유학파로서 청년기에는 서구 과학문물에 대한 예찬에 몰두했으나, 식민지 현실을 돌아보면서 민족과 서민의 생활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용이 후기시인 한적시(산수시)를 통해 동양적인 사유에 젖어들었다면, 구보는 자신의 가족 주변의 소시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글에 몰두하는 동시에, 고전인 <삼국지>와 <수호전> 등의 역사소설에 대한 번역에 집중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두 사람 모두 월북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한때 북한문학 연구에 심취했던 필자의 주요 관심 대상이었다. 두 사람이 6?25 한국전쟁 당시에 북으로 갔으나 삶의 궤적은 큰 차이를 보인다. 지용은 행방이 묘연했으나 구보는 인민군에 편입되어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두 사람은 1950~ 70년대 초까지 남북문학사 모두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용케도 구보는 북한문단에서 부침은 있었지만 되살아났고, 지용은 소문만 있었지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북한문학사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용은 1993년경부터 북한의 <조선문학사>에서 민족 서정 시인으로 서술되면서 부활했고, 구보는 1977~81년 사이에 나온 북한의 <조선문학사>(5권으로 구성)에서 방대한 <갑오농민소설>을 집필한 뛰어난 역사소설가로 거론되었다.
지금 서문을 쓰면서도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이 책은 2010년에 간행한 <정지용의 삶과 문학>의 쌍둥이 책으로 펴내려고 한다. 정지용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지용의 장남 정구관 선생이 대학로 연구실로 찾아와 “박교수, 우리 아버지를 연구해주고 옥천 지용제도 좀 도와주게나”라고 손을 붙잡고 당부를 해서 20여 년간 헌신적으로 지용회 이사로서 옥천 지용제가 축제로서 성장, 발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면서 연구에도 몰두했다. 구보도 마찬가지이다. 지용제에서 만난 구보의 아드님이신 박일영, 박재영 선생께서 당부의 말씀이 있었다. 박일영 선생은 곧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박재영 선생은 자주 구보세미나에서나 옥천 지용제에 참석하여 잠시나마 필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박재영 선생이 “박교수는 왜 지용만 연구하고 구보는 연구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때마다 능력이 따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라고 답을 드렸으나, 마음 한구석에 빚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2010년 지용에 관한 책을 매듭짓고 그 이후 7~8년간 구보에 관한 논문에 집중했고 미진하지만 그 성과물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서두르게 된 것은 박재영 선생의 건강상태가 심각하다는 개인적인 판단 때문이다. 박일영 선생이 <구보결혼>(서울역사박물관)에 쓰신 구보의 연보를 축약해서 이 책 부록에 넣게 해주십사하고 전화를 드렸더니 목소리에 병색이 완연해서 가슴을 아프게 했다. 쾌히 동의를 해주셔서 부록에 구보의 연보가 들어가게 되었음에 거듭 형제분께 감사함을 표한다.
이 책 서문을 탈고한 후 바로 미국 듀크(Duke) 대학에 방문교수로 떠나지만, 책이 나오면 상현동 자택으로 책을 보내드리려고 한다. 그동안 책이 나오는데, 교정을 보면서 수고해준 신희정 조교선생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열심히 문학공부에 매진하는 전국의 한국방송대 국문학과 제자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17년 2월 말
韶山書屋에서 접기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