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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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 양색시(洋色氏)라 불렸던 여자들
산업화의 역사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영웅을 찾는다. 대통령, 장군, 기업가, 혹은 해외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 그러나 한 나라의 성장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이 더 많다. 빛을 등지고 서 있었기에 더 또렷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었던 이들이 있다. 한때 ‘양색시’, 혹은 더 노골적인 표현으로 ‘양갈보’라 불렸던 여성들이다.
이 이름은 존칭이 아니었다. 조롱과 멸시가 뒤엉킨 낙인이었다. 그러나 그 낙인 아래에서 살아낸 삶의 무게를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헤아린 적이 있는가.
전쟁 직후의 한국은 말 그대로 폐허였다. 일자리는 거의 없었고 먹을 것도 부족했다. 미군 기지 주변—이태원, 동두천, 송탄, 평택 같은 곳—은 전쟁 이후 형성된 또 하나의 생존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여성들이 미군 상대 업소에서 일했다. 그 선택을 도덕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처했던 조건을 떠올리면, 그 판단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들 중 상당수는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장녀였고, 가난에서 벗어날 다른 통로를 찾지 못한 이들이었다.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간 여성들도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탈출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생존 전략이었다.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차별을 견디며 일했고, 그렇게 번 돈을 고국의 부모 형제에게 송금했다. 초청장을 보내 가족을 이민시키기도 했다. 그들의 달러는 개인의 사치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집 한 채, 동생의 학비, 부모의 병원비로 쓰였다.
우리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송금을 산업화 자금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기지촌에서, 혹은 미국 땅에서 보내온 그 돈은 무엇이었는가. 통계 속에서 구분되지 않았을 뿐, 그것 역시 외화였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이 외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던 시기에 그들의 돈 또한 국가 경제의 밑바탕이 되었다. 다만 그것은 국가가 기념하지 않는 돈이었고,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외화였을 뿐이다.
더 뼈아픈 것은 국가의 태도였다. 한편으로는 기지촌을 외화 획득의 공간으로 관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여성들을 ‘타락한 존재’로 낙인찍었다. 필요할 때는 묵인하고 불편해지면 도덕으로 단죄했다. 그들의 삶은 국가의 산업화 전략과 무관하지 않았지만, 산업화의 영광에서 그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 산업화의 성과 위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여전히 “부끄러운 과거”로만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시대를 통과한 한 세대의 생존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
‘양색시’라는 말은 시대가 만들어낸 폭력적인 명칭이었다. 그 안에는 계급적 멸시와 여성에 대한 이중 잣대가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하는 이유는 비난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이름 아래에서 울고 웃고 버텼던 개인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서다.
산업화는 공장 굴뚝과 수출 실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광산에서, 누군가는 병원에서, 누군가는 재봉틀 앞에서, 그리고 누군가는 기지촌 골목에서 국가의 생존을 떠받쳤다.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가난한 시대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했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회라면 이제는 묻어두는 대신 직시해야 한다. 그들의 선택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지워버리는 것도 정의가 아니다. 산업화의 역사에서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불편한 장면까지도 함께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전체를 본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번영은 자랑스러운 노동 위에만 세워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부끄러움으로 밀려났던 삶들, 이름 없이 송금하던 손길들 위에도 세워져 있다. 양색시라 불렸던 여성들 역시 그 역사 속에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그들을 위한 사과이자, 우리 자신을 위한 성찰이다.
사진 출처: 한겨레 2017-08-24 11:50
심상신
한평생 인피 쓰고 살아가는 인생, 누군들 한두편의 흑역사가 없으리요. 양성화할 수도 없고, 바닥 연명하는 이들을 비난할 수도 없는 딜레마였지요? 예전 송파쪽에 잠시 근무할때 老모녀 가정이 있었는데, 가끔씩 당시 개인으로서는 큰 금액의 日엔화를 가져왔는데.. 그 분이 오셔서 한달씩 머물다가 간 後였습니다.
2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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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
심상신 전 미국서 공부할 때 이분들아 PX 물건 싸게 사 주셨어요. 인정있는 분들
21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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