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1

임칙서 - 위키백과, Lín Zéxú

임칙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임칙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임칙서
林則徐
 청나라의 제70대 운귀총독
임기1848년-1849년
전임이성원
후임정율채
군주도광제

 청나라의 섬서순무
임기1846년-1847년
전임등정정
후임양이증
군주도광제

 청나라의 삼감총독서리
임기1845년
전임부얀타이
후임양이증
군주도광제

 청나라의 양광총독
임기1840년 1월 21일-1840년 10월 3일
전임등정정
후임보르지기트 키샨
군주도광제

 청나라의 호광총독
임기1837년 2월-1838년 12월
전임눌이경액
후임주천작
군주도광제

이름
별명자 소목(少穆), 시호 문충(文忠)
신상정보
출생일1785년 8월 30일
출생지 청나라 푸젠성 후관
사망일1850년 11월 22일(65세)
사망지 청나라 보닝
부모부 : 임빈일(林賓日)
자녀딸 : 임보청(林普晴)
친인척사위 : 심보정(沈葆楨)

임칙서(중국어 정체자: 林則徐, 병음: Lín Zéxú 린쩌쉬[*], 1785년 8월 30일 ~ 1850년 11월 22일)는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다. 자는 소목(少穆), 호는 문충(文忠)으로 청나라의 흠차대신을 두 번 역임하였다. 임칙서는 영국에 의한 아편 밀수를 강경하게 단속하여 영국과의 아편 전쟁이 일어난 계기를 만들었다. 양무운동의 중요인물인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 심보정의 장인이다.

가계

  • 아버지 : 임빈일(林賓日)

생애와 배경

관리생활

1785년 푸젠성 푸저우 민허우 현의 후관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과거에 낙방하여 궁핍한 훈장 생활을 하였다. 임칙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학문에 힘써 1811년(가경 16년), 27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베이징의 한림원에 들어간 임칙서는 많은 행정 자료를 읽으면서 연구에 힘썼다고 한다. 그 후로 지방관을 역임해, 농촌의 재건과 치수 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부정한 관리들을 처벌했다. 그의 지방 행정관으로서의 수완은 오늘날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 그의 아편 근절의 대처도 지방관으로 일하면서 쌓은 경험을 발휘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아편문제

광저우 파견

1837년(도광 17년)에 호광총독(현재의 후베이성, 후난성을 합친 지방 장관)이 된다. 이때에 관내에서의 아편 근절에 실적을 올리고 황작자(黃爵滋)의 「아편엄금론」에 동참해 글을 올렸다. 도광제는 그 실적과 논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 1838년에 임칙서를 아편 수입을 막는 흠차대신으로 임명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영국의 아편이 대량 유입되어 은이 밖으로 흘러나가 국가재정이 줄어들었다. 아편 수입을 금지했으나 효과가 없자,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삼아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아편 폐기

아편을 처분하는 임칙서

1839년 3월 10일, 임칙서는 두 달의 여정을 거쳐 광저우에 도착했다. 주 강의 양쪽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흠차대신을 맞이했다. 광저우 전역이 흠차 대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임칙서는 이튿날 두 장의 공고문을 써 붙였다. 한 장은 자신이 흠차대신의 신분으로 광저우에 온 목적은 항구를 불태운 사건을 조사한다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아편 단속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는 흠차대신인 임칙서가 광저우의 관리와 백성, 그리고 외국인에게 최초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복잡한 숙제를 풀어가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1] 광저우로 가는 도중에 임칙서는 광범위하게 조사를 했으며, 광저우에 도착해서도 6~7일의 현장 조사를 진행한 다음 3월 18일에 13행(行)의 행수를 소환해 심문을 했다. 13행이란 청 정부가 대외 무역을 특별히 허가한 13개의 상점으로, 차와 비단 무역 등을 독점했다. 이들은 대외 무역의 특권을 누리는 관료 상인으로, 흡화행의 오소영, 광주행의 노계광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3행은 외국 상인과 결탁해 아편 밀매를 돕는 외국 상인의 대리점이었다.[2]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로부터 차와 교환한 아편에 석회를 묻혀 바다로 폐기해 버렸는데(아편은 석회와 소금을 만나면 화학 반응이 일어나 못쓰게 되기 때문이다.), 이 조치에 분노한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에게 항의하였고, 결국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과의 외교분쟁

현지의 영국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서 파견된 영국의 동양함대는 광둥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가까운 톈진에 출몰하였다. 바로 코 앞에 닥친 함대를 맞이한 청의 지도부는 당황하며 임칙서를 해임하였고, 영국에 저자세로 대처하였다. 임칙서의 후임 기선(琦善)은 오로지 영국에 저자세로 일관하였고, 그 결과 청나라가 대폭 양보한 난징 조약을 맺게 된다.

러시아의 위협 확인

1840년 흠차대신에서 해임된 임칙서는 신장으로 좌천되어 그 곳에서 운귀 총독을 지냈다. 그러나 임칙서는 여기서 선정을 펴서 주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임칙서에게 있어서도 이 곳에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의 위협을 실제로 살필 수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으며, 진사 후학들에게 「장래 청나라의 최대의 위협은 영국보다 러시아일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훗날 좌종당 등이 새방파를 형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849년(도광 29년)에 은둔생활을 하던 중에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면서 난을 진압하기 위한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임지로 가는 도중에 병사했다.

평가

임칙서는 호문(虎門)의 아편 소각 사건을 주도하여 외세의 침략에 신음하던 중화민족의 호기를 만방에 떨친 정치가로 유명하다. 그는 외세에 항거하는 조직을 결성하여 아편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는 한편, 선진의 문물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낡은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세계로 시야를 넓힐 것"을 중국인들에게 외친 최초의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3] 임칙서가 해임된 이유 중 하나로 당시의 청의 관료사회는 광둥의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임칙서에 의해 그 돈이 끊긴 일을 원망하는 관료가 많았다고 한다. 만약 임칙서가 그대로 광둥에서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영국을 격퇴했었을 수도 있었다고, 후세의 중국인은 안타까워했다.

같이 보기

각주

  1. 왕페이펑 저, 차혜정 역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영웅편)》 273p 시그마북스(2010)
  2. 왕페이펑 저, 차혜정 역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영웅편)》 273~274p 시그마북스(2010)
  3. 왕샤오메이·양훼이 저, 임지영 역 《중국역사 오류사전》이룸(2005) 333쪽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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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則徐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林 則徐
林 则徐
Lín Zéxú
生年月日1785年(乾隆50年)8月30日
出生地 清 福建省閩侯県(現・福州市鼓楼区中山路)
没年月日1850年(道光30年)11月22日(満65歳没)
死没地 清 普寧
称号文忠(諡)
在任期間1850年 - 1850年11月22日
元首道光帝
在任期間1847年 - 1849年
元首道光帝
在任期間1845年 -
元首道光帝
在任期間1846年 - 1847年
元首道光帝
在任期間1840年1月21日 - 1840年10月3日
元首道光帝
その他の職歴
清国旗 大清帝国
欽差大臣(阿片禁輸担当)

(1840年4月22日 - 1840年4月22日)
清国旗 大清帝国
第3代 湖広総督

(1838年 - 1840年)
清国旗 大清帝国
江蘇巡撫

(1837年3月 - 1839年1月)
清国旗 大清帝国
東河河道総督

(1832年 - 183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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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則徐
林則徐
各種表記
繁体字:林則徐
簡体字:林则徐
拼音:Lín Zéxú
ラテン字:Lin2 Tse2-hsü2
和名表記:りんそくじ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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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 則徐(りん そくじょ、Lín Zéxú、1785年8月30日(乾隆50年7月26日) - 1850年11月22日(道光30年10月19日))は、中国清代の官僚、政治家。欽差大臣を2回務めている。

字は少穆(しょうぼく、Shǎomù)。諡は文忠(ぶんちゅう、Wénzhōng)。イギリスによる阿片密輸の取り締まりを断行した第一人者であり、これに対する制裁としてイギリスは阿片戦争を引き起こした。

経歴

福建省閩侯県(現・福州市鼓楼区中山路19号[1])に生まれる。父は科挙に挑戦してことごとく失敗したため、貧しい教師生活をしていた。林則徐はこの父の無念を晴らすべく学問に励み、1811年(嘉慶16年)、27歳の時に科挙に合格し進士となる[2]。北京の翰林院に入った林則徐は、多くの行政資料を目の当たりにしてその研究に励んだという。その後地方官を歴任し、当時問題とされてきた農村の再建と、それに欠かせない治水問題に積極的に関わるとともに、不正な官吏の大量処分を断行した。彼の地方行政官としての手腕は今日でも高く評価されている。また、彼の阿片根絶の取り組みもこの時の経験から強く意識されたものであると考えられている。

1837年(道光17年)に湖広総督(現在の湖北省と湖南省を合わせた地方の長官)になる。この時に管内での阿片根絶に実績を上げ、黄爵滋の「阿片厳禁論」に賛同し上書した。その実績と議論の精密さを道光帝は評価し、1838年に林則徐を阿片禁輸の欽差大臣に任命した[2]。

1839年(道光19年)、広東に到着した林則徐は、イギリス商人が持っている阿片を全て没収し、処分した。これに怒ったイギリス商人たちは林則徐に抗議し、最終的に阿片戦争を引き起こすことになった(詳しくは阿片戦争の項を参照)[2]。

現地のイギリス商人を支援するために派遣されたイギリスの東洋艦隊は、広東ではなく北京に近い天津に現れた。間近に艦隊を迎えた清の上層部は狼狽し、慌てて林則徐を解任し、イギリスの意を迎えることに必死になった。林則徐の後任となったキシャン(琦善)がひたすらイギリスに低姿勢で臨んだ結果、清が大幅に譲歩した南京条約を結ぶことになった[2]。

ムジャンガによって欽差大臣を解任された林則徐は西域辺境の新疆のイリに左遷された[2]。しかし、林則徐はここで農地改革を行い、善政を布いた事で住民から慕われた。林則徐にとってもこの場所で南下するロシア帝国の脅威を実見できた事は大きな収穫であり、進士の後輩に対し「将来清の最大の脅威となるのはイギリスよりもむしろロシアだろう」と言い残した。これが後の左宗棠らの塞防派を形作ることになった。(事実、イリは1871年7月にロシアに占領されている。)

1849年(道光29年)に隠棲したが、太平天国の乱が勃発すると召し出され、太平天国に対する欽差大臣に任命された。そして任地に赴く道中に普寧で病死した[2]。両広総督兼南洋大臣などをつとめた沈葆楨(1820年 - 1879年)の妻は、林則徐の娘、林普晴(1821年 - 1873年)である。

西欧についての調査・考察

林則徐は、広東でアヘン取締りの任に就くにあたり、幕僚に袁徳輝などの英文の堪能な人物を加え、さらに広州医療伝道会のアメリカ人医師ピーター・パーカーの協力も得て、英字誌や、西欧の地理書、国際法や兵器等に関する文献を翻訳し収集して研究していた[3][4]。これにより林則徐は、外国商人の来航・貿易自体を禁ずることは非現実的で不可能であるとの認識に至っており、またイギリス側が清国側の西欧事情の無知に乗じようとしても隙を与えなかった[5][6]。

欽差大臣解任後、林則徐は、転任先の新疆イリへの赴任の途上、揚州で親交のある魏源を訪ね、収集した西欧の翻訳文献等を託した[7][8]。魏源は託された文献資料をもとに『海国図志(中国語版)』を著した[9][8]。『海国図志』は日本にも伝えられ、幕末の有識者の海外情勢・国防についての認識に多大な影響を与えた[9][8]。

ロシアに関する考察

新疆イリに左遷後、林則徐は、ロシアと国境を接する現地の実情に触れ、以後陝甘総督に就任して現地を離れるまでの3年間、現地でロシアについて考察を行い、『俄羅斯国紀要』を著した[10]。林則徐は、イギリス・ロシア双方に接した経験から、イギリスよりもロシアの方が清の国防上脅威となると認識しており、この考えを交流のある要人に伝えた[10]。三女の夫である沈葆楨はこの考えを受け継いでおり、また、1849年(道光29年)、林則徐が雲貴総督を退任後、福建への帰郷途上の長沙で左宗棠の訪問を受けて会談した際には、ロシアに関する収集資料を与えている[10]。彼等をはじめとする、国防上の重点を対ロシア政策に置く指導者は、「塞防派」と呼ばれることとなる[10]。

評価

林則徐が解任された理由の一つとして、当時の清の官僚には、広東の商人から賄賂を受け取っている者が多く、林則徐によりその金が絶たれた事を、恨む者がいた事がある。もし林則徐が、そのまま広東で指揮を取り続けていれば、イギリスを撃退でき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仮定は、それほど無理なものとも言えず、後世の中国人は強く惜しんだ。また、直隷(首都圏、現在の河北省)の再開発を行い、財政・国防上に資するべきであるという長年温めてきた構想(『畿輔水利議』)を、欽差大臣就任直後に上奏したために、他の高官(当時の出世コースであった直隷総督経験者が多かった)から「自分達の直隷での仕事ぶりを怠慢だと誹謗された」との恨みを買った事も、原因の一つであるとされている。

常に清廉潔白で私事を省みず、左遷されても常に国家の事を考え続けた姿は、後世の人間から深く尊敬されている。

子息

  • 長男:林汝舟(1814年 - 1861年) - 道光18年(1838年)に科挙に合格し進士となった。同期には曽国藩がいる。
  • 三女:林普晴(1821年 - 1873年) - 沈葆楨の妻。沈葆楨は道光27年(1847年)に科挙に合格し進士となった。同期には李鴻章がいる。

林則徐の印

林則徐の印章。「林少穆珍蔵印」と刻まれている。

林則徐の印(1833年 趙之琛 刻:印譜所載)が2007年に日本国内で発見された。[11]

脚注

  1. ^ 福州市林则徐出生地
  2. ^ a b c d e f 寺岡伸章 (2009年5月14日). “【09-009】阿片戦争と林則徐”. 中国の科学技術の今を伝える Science Portal China. 科学技術振興機構. 2018年6月3日閲覧。
  3. ^ 『実録アヘン戦争』pp.147-148・153-154
  4. ^ 『中国の歴史(七)』p.91・98
  5. ^ 『実録アヘン戦争』pp.150-154・166-167
  6. ^ 『中国の歴史(七)』pp.91-95・98
  7. ^ 『実録アヘン戦争』pp.147-148・200・204
  8. ^ a b c 『中国の歴史(七)』p.250
  9. ^ a b 『実録アヘン戦争』pp.147-148
  10. ^ a b c d 『中国の歴史(七)』pp.249-251
  11. ^ Five S Corporation,Inc[1]

参考文献

演じた俳優

関連項目

ヴィクトリア女王にあてた書簡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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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 則徐(린 소쿠 조, Lin Zéxú, 1785년 8월 30일 ( 건류 50년 7월 26일) - 1850년 11월 22일 ( 도광 30년 10월 19일))는 중국 청대 의 관료 , 정치인 . 귀차 장관 을 2회 맡고 있다.

字小穆( 초롱 할 효, 쉴 현).諡諡文( 부추 우, 웡 훈). 영국 에 의한 아편 밀수 의 단속을 단행한 제1인자이며, 이에 대한 제재로서 영국은 아편전쟁 을 일으켰다.

경력

복건성 센후현 (현· 복주시 고루구 중산로 19호 [ 1 ] )에 태어난다. 아버지는 과거 에 도전하고 실패했기 때문에 가난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임칙서는 이 아버지의 무념을 맑게 하기 위해 학문에 힘쓰고 1811년 ( 가경 16년), 27세 때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다 [ 2 ] . 베이징의 하림원 에 들어간 임칙서는 많은 행정자료를 목격하고 그 연구에 힘쓰었다고 한다. 그 후 지방관을 역임하고 당시 문제로 여겨져 온 농촌의 재건과 거기에 빠뜨릴 수 없는 치수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함과 동시에 부정한 관우의 대량처분을 단행했다. 그의 지방 행정관으로서의 수완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그의 아편 근절의 대처도 이때의 경험으로부터 강하게 의식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1837년 ( 도광 17년)에 호광총독 (현재의 호북성 과 후난성 을 합친 지방의 장관)이 된다. 이때 관내에서의 아편 근절에 실적을 올리고 황작자 의 ‘아편엄금론’에 찬동해 덧붙였다. 그 실적과 논의의 정밀함을 도광제 는 평가하고, 1838년 에 임칙서를 아편금수의 함차대신 으로 임명했다 [ 2 ] .

1839년 ( 도광 19년) 광동 에 도착한 임칙서는 영국 상인이 가지고 있는 아편을 모두 몰수하고 처분 했다. 이에 화난 영국 상인들은 임칙 서서 항의하고 결국 아편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자세한 것은 아편전쟁 의 항을 참조) [ 2 ] .

현지의 영국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의 동양 함대는 광동이 아닌 베이징 에 가까운 천진 에 나타났다. 가까이에 함대를 맞이한 청의 상층부는 늑대를 당하고, 당황해 임칙서를 해임해, 영국의 뜻을 맞이하는 것에 필사적이 되었다. 임칙서의 후임이 된 키샨 (금선)이 오로지 영국에 저자세로 임한 결과, 청이 대폭 양보한 난징 조약 을 맺게 되었다 [ 2 ] .

무장가 에 의해 함차대신을 해임받은 임칙서는 서역변경의 신강 의 이리로 좌천되었다 [ 2 ] . 그러나 임칙서는 이곳에서 농지개혁을 하고 선정을 짊어진 일로 주민들에게 존경받았다. 임칙서에게도 이 곳에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 의 위협을 실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며, 진사의 후배에 대해 “미래 청의 최대의 위협이 되는 것은 영국보다 오히려 러시아일 것이다”라고 말해 남겼다. 이것이 나중에 좌 종관 들의 색방파 를 형성하게 되었다. (사실, 이리는 1871년 7월에 러시아에 점령되고 있다.)

1849년 (도광 29년)에 은거했지만, 태평천국 의 난이 발발하자 부르며 태평천국에 대한 함차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임지로 향하는 도중에 보령 으로 병사했다 [ 2 ] . 히로히로 총독 겸 남양 대신 등을 근무한 침분근 (1820년 - 1879년)의 아내는 임칙서의 딸인 하야시 보청(1821년 - 1873년)이다.

서구에 관한 조사·고찰

임림서는 광동에서 아편 단속 임무를 맡을 때, 막료에게 袁徳輝 등의 영문의 능숙한 인물을 더해, 한층 더 광저우 의료 전도회의 미국인 의사 피터 파커의 협력도 얻어, 영자지나, 서구의 지리서, 국제법이나 무기 등에 관한 문헌을 번역·수집 해 연구 하고 있었다 [ 4 ] 이에 따라 임칙서는 외국 상인의 내항·무역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이르렀으며, 또한 영국 측이 청국 측 서구 사정의 무지에 승차하려고 해도 틈을 주지 않았다 [ 5 ] [ 6 ] .

함차대신 해임 후, 임칙서는 전임처 신장 일리로의 부임 도상 양주 에서 친교가 있는 위원 을 찾아 수집한 서구의 번역문헌 등을 맡겼다 [ 7 ] [ 8 ] . 위원은 탁한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해국도지 ( 중국어판 )』를 저술했다 [ 9 ] [ 8 ] . '해국도지'는 일본에도 전해져 막부 말기의 유식자의 해외정세·국방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 9 ] [ 8 ] .

러시아에 대한 고찰

신강 일리에 좌천 후, 임칙서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는 현지의 실정을 접하고, 이후 산미 총독 에 취임하여 현지를 떠날 때까지 3년간 현지에서 러시아에 대해 고찰을 하고 『봉라재국기요』를 저술했다 [ 10 ] . 하야시 노리 서는 영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접한 경험에서 영국보다 러시아 쪽이 청나라의 국방 위협이 된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 생각을 교류가 있는 요인에게 전했다 [ 10 ] . 삼녀의 남편인 침포근은 이 생각을 계승하고 있으며, 또 1849년(도광 29년) 하야시노리 서가 운귀총독 을 퇴임한 후 복건 으로의 귀향도상 장사 에서 좌종 동 방문을 받고 회담했을 때 러시아에 관한 수집자료를 주고 있다 [ 10 ] . 그를 비롯한 국방상의 중점을 대러시아 정책에 둔 지도자는 '색방파'라고 불리게 된다 [ 10 ] .

평가

임칙서가 해임된 이유 중 하나로 당시 청의 관료에게는 광동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는 자가 많고, 임칙서에 의해 그 돈이 끊어진 것을 원망하는 자가 있었던 것이 있다. 만약 임칙서가 그대로 광동에서 지휘를 계속하고 있다면 영국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가정은 그다지 무리한 것도 말할 수 없고, 후세 중국인은 강하게 아쉬웠다. 또, 오사카 (수도권, 현재의 허베이성 )의 재개발을 실시해, 재정·국방상에 기여해야 한다고 오랜 세월 따뜻해 온 구상(『기스이 수이의』)을, 귀차 장관 취임 직후에 상주했기 때문에, 의 고관(당시의 출세 코스였던 직예 총독 경험자가 많았다)로부터 「자신들의 직예에서의 일만을 게을이라고 비방되었다」라는 원한을 샀던 것도 원인의 하나라고 여겨지고 있다.

항상 청렴결백하고 사사를 생략하지 않고 좌천되어도 항상 국가의 일을 계속 생각한 모습은 후세의 인간으로부터 깊이 존경받고 있다.

아들

  • 장남 : 임 여의 (1814년 - 1861년) - 도광 18년(1838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동기에는 소국 번이 있다.
  • 삼녀 : 하야시 보 하루 (1821년 - 1873년) - 침몰 의 아내. 침포근은 도광 27년( 1847년 )에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동기에는 이강장이 있다.

하야시 노리 서의 표시

林則徐의 인장. 「하야시 소호 진장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하야시노리 서의 표시(1833년 조노호 각 : 인보소재)가 2007년 일본 국내에서 발견되었다. [ 11 ]

각주

  1. ↑ 복주시 린도 서 출생지
  2. ^ a b c d e f 테라 오카 신장 (2009년 5월 14일). “ [09-009] 아편 전쟁과 임칙 서 ” .
  3. ↑ 『실록 아편 전쟁』 pp.147-148・153-154
  4. ↑ 『중국의 역사(칠)』p.91・98
  5. ↑ 『실록 아편 전쟁』 pp.150-154・166-167
  6. ↑ 『중국의 역사(칠)』pp.91-95・98
  7. ↑ 『실록 아편전쟁』 pp.147-148・200・204
  8. ↑ a b c 「중국의 역사(7)」p.250
  9. ↑ a b 「실록 아편 전쟁」pp.147-148
  10. ↑ a b c d 「중국의 역사(7)」pp.249-251
  11. ↑ Five S Corporation,Inc [1]

참고문헌

연기한 배우

관련 항목

빅토리아 여왕 에 대 한 서한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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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니 뜻, 어원 및 역사적 배경 - 모두피디아

몽니 뜻, 어원 및 역사적 배경 (몽니 관련 유사 표현, 현대적 사용 예시) - 모두피디아
몽니 뜻, 어원 및 역사적 배경 (몽니 관련 유사 표현, 현대적 사용 예시)
9월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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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몽니 뜻
몽니의 어원과 역사적 배경
몽니의 유사 표현
몽니의 현대적 사용
몽니의 활용 예시
몽니의 의미 변화와 문화적 수용
몽니와 관련된 현대적 사례
정리
몽니 뜻
‘몽니’라는 단어는 우리말에서 비교적 드물게 사용되는 표현으로, 그 뜻은 ‘받고자 하는 대우를 받지 못할 때 내는 심술’ 또는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을 부리는 성질’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주로 누군가가 자신의 기대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드러나는 부정적인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절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행동을 할 때 ‘몽니를 부린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몽니의 어원과 역사적 배경
‘몽니’라는 단어는 20세기 초반 이후로 사실상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일부 문어체나 노년층의 언어 속에서만 존재하던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1998년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내각제 안 하면 몽니 부리겠다”고 발언하면서 이 단어가 다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발언은 정치권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그로 인해 ‘몽니’라는 단어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종필 총리는 비록 내각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 단어를 대중에게 재조명시킨 공을 세운 셈이 되었습니다.


이후 ‘몽니’는 정치권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 되었으며, 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맥락에서 ‘몽니’는 주로 특정 인물이나 집단이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았을 때 보이는 고집스러운 태도나 반항적인 행동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법안 재의 요구에 대해 당론과는 달리 일부 의원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몽니를 부린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행동이 소신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심술이나 고집의 발현으로 비쳐질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몽니의 유사 표현

‘몽니’와 비슷한 표현으로는 ‘몽짜’, ‘야료(惹鬧)’ 등이 있습니다. ‘몽짜’는 주로 아이들이 떼를 쓰는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며, ‘야료’는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트집을 잡거나 시비를 거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어그로(aggro)’와 ‘트롤링(trolling)’이 ‘몽니’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는 누군가가 고의로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논란을 일으키려 할 때 ‘어그로를 끈다’ 또는 ‘트롤링을 한다’고 표현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진상’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는 주로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몽니의 현대적 사용
‘몽니’라는 단어는 김종필 총리의 발언 이후 정치권과 언론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나,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흔히 쓰이지 않습니다. 이는 이 단어가 특정한 맥락에서만 사용되며, 그 의미가 상당히 부정적인 감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권과 충청도 지방에서는 장년층이나 노년층 사이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표현으로 남아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몽니’의 의미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심술을 부리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으며, 이는 김종필 총리가 사용한 맥락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몽니’라는 단어는 의미가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언어의 자연스러운 변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로, 단어의 뜻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경우를 말합니다.

몽니의 활용 예시
정치적 맥락에서의 사용: 예를 들어, 국회에서 특정 법안이 통과되지 않자 일부 의원들이 계속해서 반대 의견을 피력하며, 논의에 협조하지 않는 상황이 있다면 “그 의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몽니를 부리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몽니’는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방해를 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갈등 상황에서의 사용: 직장에서 동료나 상사와의 의견 충돌이 발생했을 때, 한 사람이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다고 느껴 계속해서 회의나 업무에서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때 “그는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자 몽니를 부리며 일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정 내에서의 사용: 가족 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한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느끼고 고집을 부리며 다른 가족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협조를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몽니를 부리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몽니’는 어린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보이는 심술스러운 행동을 의미합니다.
몽니의 의미 변화와 문화적 수용

‘몽니’라는 단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조금씩 변해왔습니다. 원래의 뜻에서 벗어나 단순히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리는 행동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는 언어의 자연스러운 변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로, 사라져 가던 단어가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 다시 부활하게 되면서 의미가 확대되거나 변형되는 경우를 나타냅니다.


김종필 총리의 발언 이후 ‘몽니’는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남아 있습니다. 이는 ‘몽니’라는 단어가 특정한 맥락에서만 사용되며, 그 의미가 상당히 부정적인 감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여전히 ‘몽니’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특정 인물이나 집단의 고집스러운 태도나 반항적인 행동을 묘사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단어의 사용은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몽니’도 그 예외는 아닙니다.

몽니와 관련된 현대적 사례
‘몽니’라는 단어는 또한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2005년에 결성된 한국의 인디 밴드 ‘몽니’가 이 단어를 사용해 그들의 밴드 이름으로 정하면서, 이 단어는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밴드 ‘몽니’의 리더인 김신의는 처음에 ‘몽니’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그 뜻과는 다른 예쁘고 귀여운 소녀를 연상했다고 합니다. 이는 ‘몽니’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 새로운 이미지와 연관되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밴드는 모던 락 장르를 기반으로 하며, 특히 여성 팬층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밴드 이름이 가지는 독특한 어감과 의미 덕분에 그들은 인디 음악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으며, ‘몽니’라는 단어는 이들을 통해 다시 한 번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리
‘몽니’라는 단어는 단순히 받지 못한 대우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맥락에서부터 일상적인 상황, 그리고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이 단어는 그 의미를 확장하고 변형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거의 사어(死語)로 취급되었던 ‘몽니’는 김종필 총리의 발언을 계기로 다시 살아나면서, 현대 한국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특정한 상황에서 인간의 고집스러운 면모나 불만스러운 태도를 묘사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으며, 그 의미가 확장되고 변형되면서도 여전히 그 본질적인 의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몽니’는 또한 현대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언어가 시대와 함께 변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앞으로도 ‘몽니’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사용될지, 아니면 다시 잊혀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이 단어는 다양한 의미와 맥락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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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니
최근 수정 시각: 2026-01-28
분류순우리말1998년/사건사고국민의 정부/사건사고김종필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박문각 시사상식사전[1])

받고자 하는 대우를 받지 못할 때 내는 심술.[2](표준국어대사전[3])

비슷한 표현으로 몽짜, 야료(惹鬧)가 있으며, 트롤링, 진상이 이 표현과 비슷한 의미로 쓰일 수 있다.

2. 상세[편집]
김종필-투명
김종필
관련 문서
원래 20세기 초반 이후 사실상 일상생활에서는 사어(死語)화 되어 문어체로 남던 상태로 일부 노년층에서 사용하거나 국어사전, 문학작품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단어였으나, 1998년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내각제 안 하면 몽니 부리겠다"라고 발언한 것이 엄청난 화제가 되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김종필은 내각제는 이루지 못했지만 몽니라는 단어를 발굴해낸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후 정치권에서 인기 유행어가 되어 2010년대 중반까지도 제법 사용했고, 정치권의 영향을 받은 언론계에서도 심심찮게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일상적으로는 여전히 잘 쓰이지 않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잊힐 가능성도 높긴 하다. 그래도 수도권-충청도[4]에서는 장년층이나 노년층 이상을 중심으로 예전부터 쓰이고 있었다. 몽니라는 이름의 밴드도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었던 의미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심술을 부리는 것이고 김종필도 그런 의미로 사용했는데[5], 그냥 떼를 쓴다거나 꼬장 부린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당시 표준국어대사전 기준으로 보면 단어의 오용이라고 하기도 했는데, 애초에 사전이란 언중이 사옹하는 언어의 뜻을 기록하는 것이지 언어의 뜻을 정의하는 것은 아니고 사어가 되었다가 되살아나는 과정에서 뜻이 확대, 축소되거나 변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2005년 10월 4일 방영된 상상플러스의 세대공감 OLD&NEW에서 이 단어가 출제되었다. 참고로 힌트가 MC몽의 이빨을 뜻하는 것이라고 나왔다.

MC몽 병역비리 사건 이후 2014년 MC몽 컴백 관련 인기 검색어로 멸공의 횃불과 함께 올랐다. 기사

코믹 메이플스토리 오프라인 RPG에 등장하는 악령인 몽짜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1] 네이버 지식백과에 제공되는 사전들.
[2] 바뀌기 전에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심술을 부리는 성질."이었다.
[3] 네이버 국어사전에 제공되는 사전이며 2018년 기준으로 네이버에는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이 병용되고 있다.
[4] 김종필은 충청도 출신이다.
[5]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했다. DJP연합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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