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4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 ①] ‘피해자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은 목소리들은 묻혀야 했다



‘피해자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은 목소리들은 묻혀야 했다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 ①]

‘피해자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은 목소리들은 묻혀야 했다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 ①]
기사입력2020.06.11.

심윤지·고희진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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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 30년 피해자에 대해 우린 너무 몰랐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할매, 순악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의 생애를 다룬 영화 <보드랍게>는 그의 다양한 호칭들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위안부 피해자’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다양한 삶의 궤적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들의 발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다.

김 할머니뿐만 아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비판한 이용수 할머니의 두 차례 기자회견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위안부 문제에 몰두해 있음에도 우리는 피해자를 모른다. 소녀와 할머니 사이, 복잡하고 다면적인 피해자들의 경험을 되살리는 것은 30년 위안부 운동을 돌아보고 ‘다시 쓰기’ 위해 선행돼야 할 과제다. 

경향신문은 김복동·이용수·김순악·배봉기 할머니 등 피해자 4명의 삶을 살폈다.

‘피해자 증언’ 외에는 위안부 문제가 관심받기 어려웠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순결한 희생자’로 획일화됐다. 위안부 피해로 인해 굴절된 생애의 기록은 부차적인 것으로 남았다. 정의연을 비롯해 이들과 함께한 시민단체 운동 방식의 문제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전문가들은 여성인권보다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일제에 짓밟힌 피해자상에만 반응한 언론과 사회의 위안부 문제 소비 방식도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위안부, 같은 삶은 없다

1926년 경남 양산 출신인 김복동 할머니는 ‘정신대를 가야 한다’는 면장과 군인의 협박에 못 이겨 강제 ‘공출’됐다. 1928년 대구 출생으로 가난한 육남매 집의 고명딸로 컸던 이용수 할머니는 ‘예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친구 어머니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국민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를 따라나섰다. 둘은 1992년 피해 신고를 한 뒤 국내외를 누비며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김복동·이용수 할머니는 대표적인 위안부 활동가로 꼽혔지만, 그 행보는 같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김 할머니가 정의연과 함께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 전시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활동으로 넓히는 데 힘을 모았다면, 이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자체에 집중한 편이다. 이 할머니는 한 단체와 꾸준히 함께하기보다 정의연, 나눔의집, 대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등 다양한 단체와 활동했다. 이 할머니가 머무는 대구·경북 지역은 특히나 시민모임이 활발한 곳이라 그는 지역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원본보기그래픽 | 윤여경 기자 tigeryoonz@kyunghyang.com

기록에만 있는 존재에서
할머니들 공개증언으로
실재하는 피해자로 확장

경북 경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순악 할머니는 ‘공장 취직’ 즉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1943년, 만 15세에 위안소로 떠났다. 해방 이후 평양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지만,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이미 버린 몸’이라고 생각해 유곽 생활을 했다. 이후 기지촌 종업원, 외제 판매, 식모살이 등을 했다. 아들 두 명을 뒀지만, 남편은 없었고 가족에 대한 언급도 꺼렸다. 피해자 상당수가 1990년대 초 피해 신고를 한 것과 달리 2000년에야 피해 신고를 했다. 그는 1997년 ‘훈 할머니’로 알려진 위안부 피해자 이남이씨가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위안부’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했다. 2010년 1억800만원을 사회에 기부하며 세상을 떠났다.

다수의 피해자가 10대에 위안부 생활을 했던 것과 달리, 배봉기 할머니는 만 29세이던 1943년에 위안부에 ‘공출’됐다. 그는 ‘남쪽 섬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오키나와에 있는 위안소로 향했다.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했던 그는 1975년 일본 영주권 신청 과정에서 일본 언론을 통해 위안부임을 한국인 최초로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잊혀졌다. 배 할머니는 1991년 국내에 위안부 피해 등록을 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사망했다.

■어떻게 피해자와 괴리됐나

수요시위로 ‘치유’됐지만
일본 기금 수령 문제 등
‘방향’이 다르면 소외돼

1992년 1월 시작된 수요시위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주도한 행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고 강덕경·김순덕 할머니 등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이들은 위안부 운동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됐다.

특히 일본과 한국의 연구자들이 모두 참여하고 피해자들이 원고로 증언한 ‘2000년 법정’(일본군 성노예제와 관련된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하여 열린 모의 법정)은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수난’에서 보편적 여성인권의 문제로 확장한 계기가 됐다. 피해자들에게는 치유의 경험을 주었다. “우울증과 화병으로 술과 담배, 다툼으로 점철된” 김순악 할머니의 삶은 2000년 1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지원 대상이 되면서 달라졌다. 그는 ‘대상자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보고 또 보았다. 그에게 그것은 “나라에서 나를 ‘위안부’ 피해자라고 인정해준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준 것”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피해자의 요구와 운동의 방향이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일본 민간에서 조성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은 피해자와 피해자, 일본과 한국의 활동단체가 분열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이 기금이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며 수령을 반대했다. 기금은 ‘영혼을 더럽히는 돈’이고 이를 받으면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여론이 퍼졌다.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도 정대협 입장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심미자 할머니를 비롯해 기금 수령에 우호적이었던 피해자들도 적지 않았다.

기금 수령을 둘러싼 여론 형성 과정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피해자 합의 때에도 비슷하게 재현됐다. 정대협은 “할머니들에게 기금 수령을 막지 않았다”고 했지만, 생존 피해자 47명 중 절대 다수인 34명이 왜 기금을 수령했는지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피해자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거나 일본 정부와 가족에게 이용당했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정유진 전 도시샤대학 조교수는 “운동단체가 기금을 수령하는 이들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 사회가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피해자를 열망하기 때문”이라며 “피해자들이 국가배상금이 아닌 돈을 받으면 민족의 성원에서 배제될 것이라 우려하게 됐다”고 했다.

■다시 쓰기, 다시 피해자에서

‘소녀와 할머니’에만 초점
가난·차별로 고통받은
중간의 삶 조명받지 못해


이용수 할머니 등에 대해서는 ‘가짜 피해자’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2005년 일본군 군인군속자료에서 이름이 발견돼 강제동원 사실이 기록으로 입증된 피해자다. 그에 비해 이 할머니의 진술은 자주 바뀌어 일본 우익들의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가 피해 이후 약 40~50년이 지난 이후에야 증언에 나설 수 있었던 사회적 여건 등을 생각하면, 이들의 증언이 다소 부정확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상당수가 해방 후 50년 가까이 자신의 피해를 정의할 언어조차 갖지 못했고 1990년 이후에야 ‘위안부’를 알게 된 뒤, 인권운동가로 거듭났다는 점에서 이들의 생각이 꾸준히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연구위원은 진술 변화는 이용수 할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위안부 운동은 독립운동’이라는 설명이 유행하면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 팔려 갔다’고 진술하는 식이다. 그는 “정대협이 (시기에 따라 피해자에게) 원하는 진술을 강요했다기보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정대협이 이 과정에서 특정 피해자를 앞세운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는 “정대협 입장에서 일본의 공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피해 사실이 확실한 할머니’를 앞세우는 것”이라며 “운동의 효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할머니들은 소외되고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HK

심윤지·고희진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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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ls2****댓글모음옵션 열기
그러니까...저 할머니들을 돈벌이 수단, 정치적 수단으로 30년 동안 돌아가실때까지 부려먹고, 거기에 비판하는 할머니들은 위안부 명단에서 빼버리고, 정신 어락가락하는 치매환자, 목돈 필요해서 거짓말하는 노친네 취급했다는거지????
2020.06.1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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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mn****댓글모음옵션 열기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윤미향이 더렵혔다...우리나라의 상식과 정의가 살아있다면 구속 시키는 것이 맞다
2020.06.11.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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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y5****댓글모음옵션 열기
경향 애쓴다....깊은 논조인척 앵벌이 포주 품앗이 시민단체 입장을 교묘하게 미화 하는구나~~~
2020.06.11.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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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a Choi
11 June at 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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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악할머니 증언은 증언6집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일본군'위안부'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에 실려있다.

나는 증언4집과 증언6집에서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고 증언집으로 편집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증언6집은 다른 증언집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의의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정대협(현 정의연) 활동가들과 지역 활동가들이 직접 할머니 증언 채록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원래 증언6집을 시작할 때는 여러 학문분과의 신진 연구자들을 모아서 다양한 관점에서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고 기록하고 해석하려고 했으나 서울 시내 여러 대학원에 공지를 보내고 개인적 인맥을 동원해도 이 작업에 함께 하겠다는 연구자들이 모이지가 않아 활동가들이 직접 증언집 작업에 뛰어들수 밖에 없었다.

증언6집의 성과 중 하나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이라는 타이틀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증언1집이 나오면서부터 강제동원에 초점을 둔 증언집의 한계를 비판받았지만 증언집의 연속성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타이틀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증언4집에 신진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담론의 틀을 다양화하였지만 시리즈물로서 연속성때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기억으로 다시쓰는 역사]로 이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증언6집은 앞선 증언연구가 발전시켜 온 민족담론 틀에서 배제된 여성, 개인의 경험을 역사화하려는 시도를 과감하게 앞세우며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일본군'위안부'여성들의 경험과 기억]를 탄생시켰다. 이 논의 과정에 당시 정대협 활동가였던 윤미향의원과 2~3명의 간사들, 지역 활동가들이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쉬운 점은 '강제로 끌려간~'을 버리면서 증언6집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집 시리즈물에서 소외되는 우려가 현실화 됐다는 점이다. 지난 30년간의 운동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치열한 논쟁의 역사가 언론과 한마디 거들어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삭제되고 그야말로 납작해지는 현재의 상황들에 숨이 막혀 나도 한마디 외쳐본다.

김순악할머니 증언은 대구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대구시민모임)의 차혜영 사무국장이 맡았다.
차 국장은 대구시민모임 활동을 하면서 김순악할머니와 이미 친밀한 동지 관계였지만 할머니 증언을 자세하게 들어본 적도, 할머니 댁에 방문해 본적도 증언6집 작업 전에는 없었다.
차 국장이 1차 증언을 마치고 증언팀 회의에 와서 방언 터지듯 할머니 이야기를 펼쳐놓던 날, 팀원들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건 할머니집 벽에 액자까지 해서 걸어놓은 '위안부' 대상자결정 통지서 사진이었다. 한국사회에서 과거 '위안부'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여전히 '자랑스럽지 않아야할' 경험이었을텐데 왜 할머니는 위안부 통지서를 마치 상장이라도 받은 듯 벽에 걸어놓으셨을까. 차 국장이 전하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서 우리는 영구임대아파트와 매달 일정하게 나오는 생활지원금이 국가의 '위안부' 인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셔서가 아닐까 짐작했었다. 이후 인터뷰가 몇차례 더 진행되면서 차 국장과 우리는 위안부통지서가 그런 경제적인 의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위안부' 통지서를 받고서부터 쓸쓸하게 지내던 할머니 일상이 바뀌었다. 복지관이나 도청직원 등 소위 '나랏일'하는 사람들이 생일과 명절 때마다 할머니를 방문해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뭐 필요한 것은 없는지 보살펴 주기 시작했다. 지역 방송에서 할머니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자 많은 사람들이 인사해주고 동네 주민들과도 왕래가 많아지면서 외로움도 해소되어 갔다. 무엇보다도 대구시민모임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오는 해방감과 치유력이 할머니를 변화시켰다. "내가 갈수록 젊어진다. 버스 탈 줄 몰랐다면 말 다했지 뭐"라며 스스로 전과 달라진 당신의 모습에 기뻐하고 만족하셨다.

1991년 김학순할머니의 첫 증언에서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식민지 시대의 소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녀들의 경험을 하나의 잣대, 하나의 입장에서 서술하려고 하는 거대 담론에 맞서 할머니들을 돌보고, 인사를 건네주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끌어준 공무원들, 이웃들, 연구자들,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그녀들은 식민지, 전쟁, 산업화의 격량 속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여성들을 대변하며 지금 우리 곁에서 여성인권활동가로 서 있게 되었다.
한 두 할머니의 목소리로, 한 두 활동가의 헌신으로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을 재단하고 평가하기보다 이 운동과 연구의 역사를 보다 깊이있게 들여다보고 그 역사를 바탕으로 운동과 연구가 성장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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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wook Hwang
Jongwook Hwang 저는 6권에서 공점엽 선생님 증언과 증언 후기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우연히게 저는 6권부터 증언집을 읽기 시작해서 더, ‘위안부’ 운동이 뭐 민족주의적 도그마에 갇혔다거나 강제동원에 함몰되어 피해자들의 다양한 층위를 단순화했다거나 하는 비판들이 좀 와닿지 않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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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a Choi
Kija Choi 1집에서부터 치열하게 해 온 논의와 연구의 성과가 6집으로 이어진거죠. 사람들이 증언집을 읽고 그 논의의 역사를 파악하면 지금처럼 논쟁이 이렇게 단순해지지 않을텐데 너무 아쉽고 화가 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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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wook Hwang
Jongwook Hwang Kija Choi ‘납작해진 논의’라는 말 이상도 이하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정대협-나눔의 집-쉼터를 구분하지 않듯, 소녀상이나 증언, 기타 다른 영화매체에서의 재현 같은 것도 전혀 구분하지 않고 그냥 마구 비판을 난사하는 중입니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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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a Choi
Kija Choi Jongwook Hwang '역사를 잃은 민족'이라는 말이 새삼 와닿습니다...... 그나저나 공점엽할머니는 사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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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wook Hwang
Jongwook Hwang Kija Choi 너무나 따스하고 인간적인 와중에, 아버지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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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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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im Lee
Jae-im Lee 공유할게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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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아
양현아 4집과 6집의 연속성이나 차이 등을 잘 정리해서 글로 내면 좋을 듯 하네요 (6집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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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a Choi
Kija Choi 네~ 증언집 각각에 대한 의미부여도 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구요. 포스트피해자 시대를 앞두고 우리가 기록해놓은 증언이 점차 운동의 바탕이 되어야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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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ek Sijin
Paek Sijin 공유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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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순
이인순 순악씨는 5400만원이 아니라 1억 800만원을 남기셨고 절반은 희움역사관 씨앗기금으로 나머지 절반은 소년소녀가장의 장학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전액을 시민모임에 주시려고 하셨는데 당신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일절없이 알뜰히 모으신 것을 알면서 차마 모조리 다 받는것이 너무나
..........
해서 할매가 평소에 꿈꾸었던 거 하고 싶었던 것을 위하여, 지금이라도 할매스스로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 드렸습니다. 그래서 할매랑 이런 저런 이야기 많이 하던 중에 공부 못한게 한이라고 하셨고 더군다나 부모가 없어 공부 할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셔서 절반은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등록금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하였고 할매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암인지는모르셨지만 할매는 곧 떠날것을 알고 계셨고 남은 시간 모든 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유산문제, 장례문제,어디에 묻히면 좋겠는지 49제를 하면 좋은지..
나 죽으면 안 올 넘들이 ..라고 욕하면서 웃고..그래도 일년에 한 번은 꼭 보러갈께 하고..
이런 시간을 가질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부드럽지만 강하게 연결되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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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shin Hong
Yunshin Hong 소중한 경험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배웁니다.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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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윤
전지윤 너무 소중한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괜찮으시면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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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ja Choi
Kija Choi 전지윤 공유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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