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범수용소/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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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서 유일한 일입니다. 마오쩌둥도 이런 일을 안 했고, 스탈린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습니다. 히틀러의 경우는 시도하긴 했었죠. 제2차 세계 대전 후, 오직 북한에서만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조건은 오랫동안 인권 분야에 종사하면서 보고 겪었던 것 중 제가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에서 겪었던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문]
2004년 2월에 후지 테레비가 공개한 요덕 수용소 사진. 경비대와 보위부 주택을 돌아다니며 인분을 퍼내는 모습(좌) / 감시자들 눈을 피해 몰래 배춧잎을 먹고 있는 수감자(우).[5] 정치범수용소가 아닌 강도가 덜한 로동 교화소, 즉 북한판 일반 교도소[6]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정치범수용소는 공개 자체가 되질 않는다. 물론 당연한 소리지만 그나마 교화시키겠다며 집어넣는 일반 교도소도 이 모양인데 정치범수용소는 얼마나 최악일까? 안 봐도 뻔하다.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들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대규모로 숙청된 사람들을 가둬두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적대계층의 많은 사람들을 강제 수용하여 현재의 정치범수용소가 되었다. 북한 당국은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정식 이름을 알지 못하며, 탈북자에 따라서 정치범"관리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재입북 탈북주민의 운명.
재소자라면 모를까 북한 주민들에게조차 은폐되는 시설인 만큼 일반 주민에게 그 실체를 알려 공포심을 심어주어 체제 유지를 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다. 잡혀간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시설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완전통제구역 수감자는 평생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는데 편하게 죽는 것조차 안된다는 인식이 있으며, 서류상으로도 공민 자격이 박탈되어 "인간이 아닌 것"의 취급을 받게 된다. 혁명화구역 수감자는 "정신 개조"가 되어 출소해도 적대계층의 최하층이 되어 죽을 때까지 감시나 직업·여행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 자신이 이런 곳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발설해도 재수용된다. 게다가 적대계층 같은 성분은 원칙상 대대손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김씨 일가의 화풀이를 위한 시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려진 바로는 총 5~8개소가 존재한다. 함경남도의 요덕, 단천, 덕성군, 함경북도의 온성에 2곳, 회령, 화성, 부령군, 평안남도의 개천, 북창군, 평안북도의 천마군, 자강도의 동신군에 있었거나 지금도 있다. 총 15만 4천여 명이 수용되어 있다고 한다.[7] 북한 당국은 이를 'OO호 관리소'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주민들은 '특별독재대상구역', '정치범 집단 수용소', '유배소', '종파굴', '이주구역' 등으로 부르고 있다. 2013년 3월 6일에는 정치범수용소가 한 곳이 폐쇄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수용자가 총 12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실 북한 전체 인구인 2500만명 정도에 비추어 볼 때 '비율적'으로 본다면 적은 수치지만 공산권 국가 특성상 인구를 과대포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제 비율은 이보다 훨씬 더할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 7월의 데일리NK의 보도에 따르면 최소 23만 3천 명이 가두어졌으며 황해북도 승호리에 예전 시설을 다시 복원해서 수용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일단, 명목상 '정치범'수용소이지만,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끌려오거나 탈북을 시도했다고 잡혀오거나 김일성 및 김정일 우상화물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혔다는 이유만으로도 끌려온다. 심지어는 김일성의 목 뒤에 혹이 있다고 말해서 끌려간다거나, 국영상점에 물품이 없어서 "이거 사회주의 나라 맞아?"라고 말했다가
북한의 보안원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가고 싶지 않다면 뇌물을 내놔야 한다고 종용하기도 한다. 탈북하다 북송되거나 남한 영상을 시청하다 체포되었는데, 일부 돈 많은 사람들의 경우 조사 과정에서 뇌물 찔러주고 처벌 없이 풀려났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중.[8]
정치범 수용소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난쟁이 수용소도 있었다. '난쟁이 수용소'에서 드러나는 북한 사회의 정서가 장애인도 수용한 나치 수용소와 별 다를 바 없다. 폐쇄적인 국가답게 외국인 혐오 정서, 장애인 혐오(차별이 아니다) 정서가 매우 극심하다. 기 들릴이 평양을 방문한 뒤 낸 만화 '평양'에 의하면 작가가 한 "인구의 7~10%는 장애인인데 왜 평양에는 장애인이 없냐"는 질문에 북한 현지 안내원은 "그런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단일 민족이기 때문에 모든 북조선 인민들은 똑똑하고 건강하게 태어난다"[9]고 100%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해 그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를 경험한 탈북자들에 의해 그 실상이 조금씩 알려졌고, 현재는 북한 인권 문제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슈. 북한 지배층들과 종북주의자들은 정치범수용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겠는가. 인공위성으로 다 보이는 세상인데 말이다.
요덕군 행정지역의 무려 3분의 1이 수용소다. 게다가 이것말고 화성 수용소 같이 더 넓은 곳도 있다.
크게 '혁명화 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물론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은 '(북한 입장에서) 혁명화가 가능하느냐? 불가능하느냐?'의 차이를 갖지만, 실제로는 시대 분위기 등에 따라 그냥 무작위로 보내지는 경우가 대부분. 심지어 생계형 탈북자조차 재수 없으면 완전통제구역에 끌려갈 수 있다.
수용 시설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생지옥 그 자체. 수감자들은 하루 아침에 수용소로 끌려와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온갖 강제 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간수에 의한 고문과 구타는 말할 것도 없고, 강간과 공개처형 또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위에 상술된 것처럼 인권? 북한 사회 자체가 그런 거 없다지만 여기서는 그 극한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수용소를 관리하는 보위원이 여성 수감자를 강간하여 적발 되었을 경우, 보위원이 처벌되는 죄목은 성범죄가 아닌 '사람이 아닌 존재와 성관계를 한 풍기문란죄', 쉽게 말해 수간죄다. 이른바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법에서부터 그 대상을 사람이 아닌, 모양만 사람인 '짐승' 또는 '무생물'이라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악명은 전세계, 특히 서구권에 널리 알려졌고 많은 충격을 주었다. 미국에서는 의회가 정치범수용소의 실태에 대하여 직접 증인(물론 탈북자들)을 불러 조사하기도 하였고, 강철환의 수기 <수용소의 노래>가 <평양의 어항>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등 많은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창작물에도 쓰이기 시작하는데 미국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6시즌 17화에 에밀리 프렌티스를 괴롭히는 악당이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곳이 22호 관리소라고 소개된다.[10]
여담이지만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영어로 'NK gulag'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애당초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소련의 굴라크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
2. 형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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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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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각 용어들의 차이점[편집]
- 교화소: 일반적인 범죄, 경미한 정치범 본인이 수감되는 감옥. 즉 사람 죽이면 본인만 형기가 정해진 교화소 가고, 로동신문에 김정은 면상이 실린 부분이 훼손되면 전 가족이 관리소에 가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다. 대한민국의 교도소와 개념은 같지만 강도는 훨씬 세다. 굉장히 좁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수감 생활만을 하는 순수 교화소와 노동을 하는 로동 교화소로 나뉜다. 회령, 학포, 천진, 양덕, 성천, 회산, 개천, 덕천 등에 순수 교화소가 있고 평양, 신의주, 서흥, 함흥, 강계, 아오지 탄광 등에 로동 교화소가 있다고 한다.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5년 및 무기징역의 형기를 받은 자를 수용한다.[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범 수감 교화소와 형사범 수감 교화소가 다르다는 것. 후자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교도소에 가깝다. 그러나 전자는 정치범 본인 중에서도 스페셜 케이스만 수감하는 곳이고, 대부분 무기 로동 교화형을 때리는 만큼 악명이 더 높다. 정치범 교화소는 살아서는 거의 못 나온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일반 형사범이 수감되는 교화소 역시 정치범 교화소보다 상대적으로 낫다 뿐이지 대단히 환경이 열악하다고 한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교화소에서 3년간 복역할 경우에도 생존 확률이 반반 이라고 주장한다.#
- 관리소: 일반적으로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혼자 수감되는 곳과 가족 단위로 수감되는 곳으로 나뉜다. 독자적으로 수감되는 사람들은 정치범 본인으로 주로 10년 이상 격리 수용된다. 가족 단위로 수감되는 사람들은 교화소에 수감된 정치범들의 가족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가족 단위의 수감자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마을 형태의 집단 감옥이다. 가족 단위로 수감되기 때문에 그나마 상대적으로 생존률이 높다.[12] 정치범 수용소라고 함은 바로 이 관리소를 말하는 것이다. 다만 관리소 중에서도 화성 수용소는 예외인데, 이 수용소는 다른 관리소와 달리 청진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Top-Level 수용소로써 정치범 본인만 수감되며, 그 가족들은 14호, 15호, 22호 관리소 등으로 보내진다고 한다.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뉜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요덕 수용소 일부 또는 북창 수용소를 제외하면 역시 모조리 완전통제구역. 그나마도 현재는 있던 혁명화구역도 대폭 축소되었다고 한다.[13][14] 이 자료는 5대 관리소의 위치를 나타낸 자료이다. 5대 관리소란 관리번호 순서대로 개천 수용소(14호), 요덕 수용소(15호), 화성 수용소(16호), 북창 수용소(18호), 회령 수용소(22호)를 의미한다.
- 로동단련대(로동교양소): 경범죄자들이 수감되는 곳. 민보안부 책임자와 관할 검찰소의 확인만으로 수용한다는 점이 특징. 짧게는 3개월~ 6개월, 길어야 2년을 넘기지 않는다. 로동교화형과 차이가 나는점은 재판없이 수용되었기 때문에 비전과자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로동교화형(교도소)와 큰 차이점이 있다. 로동교화형이 선고되면 공민권이 박탈되고[15] 연좌로 가족들이 가택몰수, 평양시민인 경우 지방으로 강제 추방이지만 로동단련형은 형기만 채우면 되고 경범죄로 취급되기에 뇌물이 잘 통해서 쉽게 빠져나가는게 가능하다. 하지만 이곳도 굉장히 가혹한 중노동을 시키는 점은 똑같다.
- 로동집결소: 로동단련대에 수용할 수 없는 규정위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다.
5. 알려진 수용소[편집]
교화소 | (1) 개천 교화소 | (3) 신의주 교화소 | (4) 강동 교화소 | (8) 용담 교화소 | (12) 회령 전거리 수용소 | |||
(22) 오로 교화소 | (25) 청진 교화소 | (77) 단천 교화소 | 증산 교화소 | |||||
관리소 | (14) 개천 수용소 | (15) 요덕 수용소 | (16) 화성 수용소 | (18) 북창 수용소 | ||||
집결소 | 청진 농포 집결소 | 신의주 집결소 | 무산 집결소 | 혜산 집결소 | 온성 집결소 | |||
로동 단련대 | 온성 로동단련대 | 영광 로동단련대 | 덕원 단련대 | |||||
명칭 불명 | 대흥 수용소 | |||||||
폐지 | ||||||||
관리소 | (11) 경성 수용소 | (12) 창평 수용소 | (13) 종성 수용소 | (21) 단천 수용소 | (22) 회령 수용소 | |||
(23) 덕성 수용소 | (24) 동신 수용소 | (26) 승호 수용소 | (27) 천마 수용소 | |||||
명칭 불명 | 동림 수용소 | |||||||
() 안의 숫자는 수용소의 번호. 북창수용소의 경우 북한 인권위서 폐지로 판단했으나, 사실상 다시 부활함. |
5.1. 교화소[편집]
- 3호 교화소: 신의주 교화소
- 4호 교화소: 강동 교화소
- 8호 교화소: 용담 교화소[17]
- 12호 교화소: 회령 전거리 수용소[18]
- 22호 교화소: 오로 교화소[19]
- 77호 교화소: 단천 교화소[21]
5.2. 관리소[편집]
- 25호 관리소: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수성교화소’라고 불리나 관리소라고 한다. 통일부 북한인권포털
5.3. 집결소[편집]
- 청진 농포 집결소[26]
- 신의주 집결소
- 무산 집결소
- 혜산 집결소
- 온성 집결소
5.4. 로동단련대[편집]
- 온성 로동단련대
- 영광 로동단련대
5.5. 감옥 및 구류장[편집]
- 사회안전성 소속
- 온성 감옥
- 청진 감옥
- 혜산 감옥
- 함주 감옥
- 명천 감옥
5.6. 현존하지만 정식 명칭이 불명인 경우[편집]
5.7. 폐쇄된 수용소[편집]
- 폐지: 89년 10월 - 김일성 별장 짓기
- 폐지: 87년 5월 - 이 수용소에 있는 탄광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수감자들을 구출하지 않고 탄광 입구를 폭파시켰다. 여기에 화가 난 수감자 가족들이 폭동을 일으켜 보위부원 3~40여명이 맞아죽었고 그 가족들까지 총 200여명이 죽었다. 그러자 보위부가 보복으로 수감자 500여명을 사살했다.[29]
- 폐지: 90년 12월 - 국경과 너무 가까운 데다가 외부에 노출이 되었음.
18호 관리소: 북창 수용소- 이 문서에 나온 폐쇄된 수용소 중 가장 늦게 폐쇄되었다. 정확히는 북한인권위원회에서 이 수용소가 사실상 해체된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지만, 인공위성을 통해 이곳이 사실상 다시 부활한 것이 밝혀졌다.- 폐지: 날짜, 이유 알 수 없음
- 폐지: 2012년
- 폐지: 날짜, 이유 알 수 없음
- 폐지: 날짜, 이유 알 수 없음
- 폐지: 91년 1월 - 평양 인접, 비밀 탄로
- 폐지: 90년 11월 - 이유 알 수 없음
6. 수감자 명단[편집]
2012년 5월 수감자 명단이 공개[33]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링크를 참조할 것. 참고로 그 링크로 들어가보면 11살에 수감된 사람이 있다.[34]
2016년 8월 북한인권정보센터'북한 정치범수용소 근무자, 수감자 및 실종자 인명사전'을 통해 수감자 중 29%가 연좌제의 적용을 받아 수감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北 정치범수용소 수감자 중 29%는 연좌제 적용”
링크를 따라가 보면 알겠지만 정말로 죄를 지어서 수감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하다.[35] 범죄자라 하더라도 이런 곳에 수감시키는 행위는 문명 국가에서 존재할 수 없는 처참한 행위이다. 대부분이 대한민국의 문화에 심취했다든지, 외국에 유학 갔는데 통금 시간을 어겨서라든지, 심지어는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연좌제 때문에 들어간 사례도 있다. 연좌제도 연좌제 나름이지만 시아버지나 형수 같이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이 저지른 잘못도 연좌제라고 적용했다는 점이다. 혈연 때문에 개고생이다.[36] 여자 수감자 3분의 1이 연좌제로 수감되었다. 황장엽의 친인척들 역시 그의 탈북 후 줄줄이 잡혀 들어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 종자들이 죄라고 잡아 수감시켰다는 내용이라는 게 '옷을 야하게 입었다', '김씨왕조돼지들 관련해서 안 좋은 소리를 했다', '종교가 기독교'라는 정도가 대부분. 특히 혁명화구역의 경우 이런 케이스가 거의 100%이다.
남한과 전쟁이 발발하거나 통일이 확실시될 경우 북한 당국은 20만 명이 넘어가는 수감자를 모조리 죽일 계획이라고 한다. 즉 20만여명의 수감자가 단번에 몰살 당하는 처참한 광경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37]죽일 탄약은 있나? 이는 전쟁에서 패하거나 통일이 이뤄지거나 체제가 붕괴될 것은 거의 확실한데, 이 상황에서 청문회와 진상 규명 및 피해 보상 작업이 진행되면 김정은과 그 추종자들은[38] 사형이 집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해도[39], 최소 연쇄살인범이나 아동살인범과 동급으로 취급받아 가석방 없는 종신형 대우와 더불어 평생을 교도소에서 가장 엄격하게 관리되는 시설에 수감되어 보낼 가능성이 거의 100%이기 때문.
그러나 수용소에 관한 증언은 널려있고, 이미 뉴스까지 탄 상황이라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경우 수감자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탈북자들의 증언과 증거가 남아있어 유죄 판결이 내려질 것이고[40], 이후 김정은과 그 추종자들이 갈 곳은 오직 교도소뿐이다. 설사 당장의 형벌을 피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대량 학살을 저지른 국제 범죄자가 안심하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없다. 물론 전두환이 사면받던 예[41]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당연히 여론이 좋을 리가 없고,[42] 나치 전범들이 8, 90의 나이에도 최소 수 년의 징역을 받는다는 것[43]을 생각해 보자.
2016년 8월 북한인권정보센터'북한 정치범수용소 근무자, 수감자 및 실종자 인명사전'을 통해 수감자 중 29%가 연좌제의 적용을 받아 수감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北 정치범수용소 수감자 중 29%는 연좌제 적용”
링크를 따라가 보면 알겠지만 정말로 죄를 지어서 수감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하다.[35] 범죄자라 하더라도 이런 곳에 수감시키는 행위는 문명 국가에서 존재할 수 없는 처참한 행위이다. 대부분이 대한민국의 문화에 심취했다든지, 외국에 유학 갔는데 통금 시간을 어겨서라든지, 심지어는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연좌제 때문에 들어간 사례도 있다. 연좌제도 연좌제 나름이지만 시아버지나 형수 같이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이 저지른 잘못도 연좌제라고 적용했다는 점이다. 혈연 때문에 개고생이다.[36] 여자 수감자 3분의 1이 연좌제로 수감되었다. 황장엽의 친인척들 역시 그의 탈북 후 줄줄이 잡혀 들어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 종자들이 죄라고 잡아 수감시켰다는 내용이라는 게 '옷을 야하게 입었다', '김씨왕조
남한과 전쟁이 발발하거나 통일이 확실시될 경우 북한 당국은 20만 명이 넘어가는 수감자를 모조리 죽일 계획이라고 한다. 즉 20만여명의 수감자가 단번에 몰살 당하는 처참한 광경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37]
그러나 수용소에 관한 증언은 널려있고, 이미 뉴스까지 탄 상황이라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경우 수감자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탈북자들의 증언과 증거가 남아있어 유죄 판결이 내려질 것이고[40], 이후 김정은과 그 추종자들이 갈 곳은 오직 교도소뿐이다. 설사 당장의 형벌을 피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대량 학살을 저지른 국제 범죄자가 안심하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없다. 물론 전두환이 사면받던 예[41]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당연히 여론이 좋을 리가 없고,[42] 나치 전범들이 8, 90의 나이에도 최소 수 년의 징역을 받는다는 것[43]을 생각해 보자.
7. 난쟁이 수용소[편집]
1970년대에는 난쟁이 수용소를 만들어서 키가 특별히 작은 사람들을 잡아넣고 씨를 말렸다는 증언이 나왔다.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경남도 영광군, 양강도 후창군 그리고 함경북도 종성군, 자강도 산골에 위치한 난쟁이 수용소에 잡아넣고 씨를 말렸다고. 더구나 북한은 이곳에 잡혀온 난쟁이들이 2세를 낳을 수 없도록 생육 기능을 마비시키는 주사를 놓아서 강제로 피임을 시켰다고 한다. 지금은 수용소에서 농사를 지으며 일하던 난쟁이들이 후손도 낳지 못하고 모두 죽어버려 '난쟁이 수용소'도 사라졌다는 게 탈북자의 증언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난쟁이들이 종자를 퍼뜨리면 안 되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아두라"는 정상적인 인간의 대가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스가 고학력 무식쟁이
1960~1970년대부터 평양시를 국제도시로 꾸민다는 이유로 평양에 거주하던 장애인들을 각 지방의 연고지에 따라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 이유는 공화국의 수도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평양시 뿐 아니라 외국인들의 출입이 잦은 다른 대도시에서도 장애인들을 격리, 다른 곳에 수용한다. 평양이 장애인 없는 도시로 완벽하게 탈바꿈한 것은 1980년대 후반. 1989년 제13차 평양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맞아 1985~1986년 사이에 남아 있던 모든 장애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지방에 연고지가 있는 장애인은 부모형제와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지방에 친척이 없는 경우엔 부모도 함께 추방됐고, 간혹 평양시에 남는 경우라도 평양시의 외곽 지역에 거주하며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은둔 생활을 강요당했다. 북한 난쟁이 수용소 1.
지난 2006년 UN에서도 북한이 장애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한다는 보고가 나왔었다. 당시 UN 북한인권특별조사관인 비티 문타몬은 "평양 당국이 장애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심신 장애 정도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면서 "북한은 심신장애인들을 '49병동'으로 불리는 수용소로 보내고 있으며, 난쟁이들을 위한 다른 수용소들도 있다."고 밝혔다. 북한 난쟁이 수용소 2.
1960~1970년대부터 평양시를 국제도시로 꾸민다는 이유로 평양에 거주하던 장애인들을 각 지방의 연고지에 따라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 이유는 공화국의 수도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평양시 뿐 아니라 외국인들의 출입이 잦은 다른 대도시에서도 장애인들을 격리, 다른 곳에 수용한다. 평양이 장애인 없는 도시로 완벽하게 탈바꿈한 것은 1980년대 후반. 1989년 제13차 평양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맞아 1985~1986년 사이에 남아 있던 모든 장애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지방에 연고지가 있는 장애인은 부모형제와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지방에 친척이 없는 경우엔 부모도 함께 추방됐고, 간혹 평양시에 남는 경우라도 평양시의 외곽 지역에 거주하며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은둔 생활을 강요당했다. 북한 난쟁이 수용소 1.
지난 2006년 UN에서도 북한이 장애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한다는 보고가 나왔었다. 당시 UN 북한인권특별조사관인 비티 문타몬은 "평양 당국이 장애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심신 장애 정도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면서 "북한은 심신장애인들을 '49병동'으로 불리는 수용소로 보내고 있으며, 난쟁이들을 위한 다른 수용소들도 있다."고 밝혔다. 북한 난쟁이 수용소 2.
8. 통일 후의 미래[편집]
통일 후에는 아우슈비츠나 731 부대처럼 수용소 건물을 개조해 추모박물관으로 운영할 확률이 높다. 다만 아우슈비츠나 731부대가 정권이 무너지던 순간 최대한 증거 인멸을 시도했기 때문에, 여기도 언젠가 북한이 무너지는 상황이 가까워지면 그렇게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통일의 방식과 진행에 따라서는 이미 김씨정권이 모두 지워버려 증거가 전혀 남지 않아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일 가능성도 있다.
군대 괴담의 사례와 같이 공포 영화나 공포물 소재로 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만큼, 사연도 많고 놀라운 실화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시설이 낡고 위험할 수 있으므로 교도소로 재사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다만 개보수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사동을 개/보수하거나, 철거 후 신축하게 된다면 교정본부 산하로 들어가서 교도소나 구치소로 재개원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제 정말로 반성도 하지 않는 흉악범, 살인범, 강도들을 수용시킬 수 있을 것이나, 접근성이 그나마 좋은 곳의 경우 일반적인 남한 내 교도소처럼 북부지방에서 발생한 일반적인 잡범을 수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도 부지만큼은 무지막지하게 넓은 탓에 향후 박물관 형식으로 남겨놓을 것이 뻔한 요덕 수용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른 용도로 재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사람이 수없이 많이 죽은 장소이기 때문에 아파트를 짓는 방안은 이미지 문제로 미분양이 속출할 것이고, 그나마 공업 단지의 조성이 현실적일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합동 위령제[44]가 필수이다.
군대 괴담의 사례와 같이 공포 영화나 공포물 소재로 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만큼, 사연도 많고 놀라운 실화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시설이 낡고 위험할 수 있으므로 교도소로 재사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다만 개보수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사동을 개/보수하거나, 철거 후 신축하게 된다면 교정본부 산하로 들어가서 교도소나 구치소로 재개원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제 정말로 반성도 하지 않는 흉악범, 살인범, 강도들을 수용시킬 수 있을 것이나, 접근성이 그나마 좋은 곳의 경우 일반적인 남한 내 교도소처럼 북부지방에서 발생한 일반적인 잡범을 수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도 부지만큼은 무지막지하게 넓은 탓에 향후 박물관 형식으로 남겨놓을 것이 뻔한 요덕 수용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른 용도로 재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사람이 수없이 많이 죽은 장소이기 때문에 아파트를 짓는 방안은 이미지 문제로 미분양이 속출할 것이고, 그나마 공업 단지의 조성이 현실적일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합동 위령제[44]가 필수이다.
9. 관련 매체[편집]
- 《교화소 이야기》 - 저자: 리준하
- 《대왕의 제전》 - 저자: 강철환, 안혁 공저.
- 《북한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세상밖으로 나오다》 - 저자: 신동혁
- 《Escape from Camp 14》 - 저자: 신동혁
북한 정치범... 은 신동혁이 쓴 것이고, Escape... 는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신동혁을 인터뷰해서 쓴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수기는 죄다 이른바 천국이라는 혁명화 구역 출신들의 수기였다. 혁명화 구역은 언젠가는 출소가 가능하기 때문에 혁명화 구역 출신자들은 간간히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지옥이라는 완전통제구역은 출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단 한 명도 출소/탈주자가 없었다. 그러나 신동혁만이 완전통제구역 출신이라고 알려져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신동혁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완전통제구역 출신이라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었다. 알고 보니 정치범 18호 관리소(북창 수용소) 출신도 아닌 해제민 출신이라는것[45] 이 점을 꼬투리 잡아서 UN 측에 북한 인권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라는 요구까지 하였다.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도 "거짓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라며 신동혁을 비판하였다 현재 완전통제구역 수용자중에 탈출 한 사람은 김용(가명) 단 한사람이며 안명철은 보위부 요원으로 수감자 출신은 아니다. - 《완전통제구역》 - 저자: 안명철
정치범이 아닌 경비대원의 수기이다. 저자는 1987년 11호 관리소에서 신병교육을 받고 13호와 22호, 26호를 거쳐 1994년 9월 22호 근무 중 탈북하였다. 8년 동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집에서 문제가 생겨 그 자신도 잘못하면 정치범수용소에 갇힐 판이었기 때문이다. 탈북 과정에 대한 전설 같은 스토리도 유명한데, 자신이 입고 있던 팬티 한 장과 권총 3자루만 들고 인맥도 없이 무작정 강을 헤엄쳐서 국경을 넘었으며, 그를 잡기 위해 중국 공안들과 보위원 전부가 출동하여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 수용소에서 교도관 역할은 보위원들이 담당하며, 경비대는 일종의 경비교도대 개념으로 외곽 경비 등만 담당한다. 그리고 동정심 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경비대와 정치범은 대화 등 접촉을 일체 못하게 한다. 다만 주인공 안명철은 운전수라는 보직 때문에 수용소 안팎을 돌아다녀[46] 다른 경비대와 달리 최소한의 접촉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정치범들이 학살되었는지와 같은 정보들은 대부분 보위원과 노닥거리다가 그들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었고, 안명철이 직접 볼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감시자인 보위원과 피감시자인 정치범이 아닌, 경비대라는 제3자의 시각에서 정치범 수용소를 다룬 책. 자신이 완전통제구역에 있었던 신동혁의 주장이 구라였음이 밝혀진 지금, 완전통제구역을 다룬 유일한 책이다. - 《나는 김정일 경호원이었다》 - 저자: 이영국
저자는 김정일의 경호원으로 11년간 생활하다가, 사촌 동생이 김정일의 운전사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친척끼리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명만 근무 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에 제대한다. 평양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낙후된 고향에 돌아와 큰 실망하고 남한의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듣고 탈북 시도하다가 중국에서 붙잡혀 15호 관리소(요덕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요덕 수용소는 혁명화 구역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풀려나기 때문에 이영국도 결국 풀려났다.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다는 부분이 임팩트가 더 크고, 혁명화 구역 출신이 비교적 흔한 편이어서 그런지 수용소 이야기는 매우 짧다. - 사바카 - 주장환 저.
주사파 출신 대학생 방윤도가 월북 후 정치범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재탈북해 수용소의 실상을 알리는 얘기이다. - 요덕 스토리 - 정성산 저.
- 구금시설을 파헤치다 - 데일리NK
해당 취재에는 2021년이 2010년대 초반보다 더 수용소 시설이 확충되었다고 주장한다. 승호리와 평산에 새로 수용소가 생겼다고 한다. - 《북한 정치범수용소》(2012) - 통일연구원 보고서
10. 관련 문서[편집]
[1]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 캄보디아 지부 책임자로 일하며, 크메르 루주와 르완다 학살을 조사했다. 엠네스티 미국 지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북한 인권 위원회 선임 고문이다.[2] 원래 북한 수용소 시스템의 원조가 소련의 굴라크이다. 그리고 중국도 마오쩌둥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역과 고문이 자행되는 집단 농장 혹은 감옥에 끌려갔다. 그리고 아직도 중국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고문을 실시해서 인권 문제로 말이 많다. 자세한 건 중국/인권 탄압 참조. 그렇지만 소련이나 중국의 그것도 지금의 북한 정도는 아니었다.[3] 이란, 에리트레아 등 웬만한 독재 국가도 없는 형태의 인권 탄압인 신장 재교육 캠프의 경우 위구르족을 "중화민족"으로 만들고 살려주되 강제 불임과 강간으로 위구르인의 자손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아직까지 석방이 원천 금지되며 성범죄 등으로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만의 목적을 가진 "완전통제구역"이 없다. 서방 국가에게 상당한 변명을 하지만 북한처럼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취재는 시켜준다. # 중국은 위구르인 같은 계층도 세뇌가 된다면 살 수는 있고 그렇지 않아도 공민권을 박탈당하지는 않으나 북한은 치안대, 기독교인 같은 계층은 제도적으로 문서로도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짐승" 이하 취급을 하고 수용소에서 고통스럽게 죽였다. 북한은 원칙적으로는 거의 100% "김일성민족"이 되었으며, 근래에도 수용소가 아니라 교도소 급인 교화소에서도 중국인의 아이를 배면 낙태를 시킨다. # 이것은 중국이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북한이 미쳤다는 뜻이다.[원문] "I believe that the conditions in the North Korean prison camps are as terrible, or even worse, than those I saw and experienced in my youth in these Nazi camps and in my long professional career in the human rights field"[5] 말이 배춧잎이지 그냥 나뭇잎이나 다름없다.[6] 물론 후술할 정치범수용소보다는 나을 뿐 여기도 꽤나 처우가 열악한 것은 다를 바 없다.[7] 사실 이 수치는 탈북자들의 이야기가 한참 이슈화된 2010년도의 일로 10년 뒤인 올해 2020년에는 수용 인원이 더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8] 핵심계층도 자신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전례상 숙청 대상자의 친인척들은 전부 수용소로 직행한 것이 대부분.[9] 물론 선천적 장애에 대한 답은 될지 몰라도, 후천적 장애에 대한 답은 될 수 없다.[10] 사실 어느 정도 사실에서 따왔을 가능성은 있는 것 같다. 안명철이 쓴 책에는 수용소에서 탈출 후 중국에서 붙잡혀온 사람이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탈북자 신동혁의 경우처럼 자신이 완전 통제 구역에서 탈출했음을 주장하는 사례도 있고. 다만 신동혁은 거짓말을 많이 해서 믿기가 어렵게 됐다.[11] 참고로 10년 이상의 로동교화형을 받으면 남한이나 미국에 대대적으로 알려서 사실상 인질로 삼는 수감자를 제외하고는 죽은 목숨이다.[12] 다른 이유도 있다. 관리소의 경우 마을 형태의 수용소이고 모두 산, 고원 같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거나 둘러싸여있어서 통제가 교화소보다 약하여 들키지 않으면 먹을 것을 교화소보다 쉽게 구할 수 있다. 반면 교화소의 경우 감옥 형태의 수용소이므로 상당히 통제가 강하여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렵다. 신동혁의 수기에도 관리소가 교화소보다 일하기가 쉽다고 언급되어 있다. 물론 둘 다 생존도 어렵다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13] 굴라크는 무기형은 아니다. 즉 굴라크도 수감 생활이 끔찍하기 때문에 생환률은 극히 낮아도 버티면 일단 나올 수는 있다. 즉 소련의 굴라크가 '너는 반동이니까 여기서 죽도록 일해서 반성해라'라면, 북한은 '너는 반동이니 일가친척들도 반동놈이다. 전부 여기서 쥐어짜이다 죽어라' 이런 식이다. 애초에 전제부터가 다르다.[14] 18호인 북창 수용소도 혁명화구역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요덕 수용소에서처럼 존재 여부가 확실히 확인되지는 않는 듯.[15] 한국과 다르다면 형기 이후에도 공민권이 박탈되어 투표나 배급대상에서 제외되고 본적으로 복귀할수 없다.[16] 아래의 14호 관리소와는 직선거리만 약 20km 떨어져 있는 서로 다른 수용소다. 다른 이름은 증산교화소.[17] 이것이 바로 천내 수용소.[18] 완전통제구역의 하위호환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다른 점은 딱 하나. 살아서 나올 기회가 주어지는 것.[19] 오로는 현재의 함경남도 영광군이다.[20] 이쪽은 외국에서는 25호 교화소가 아닌 25호 관리소로 찾아야 훨씬 더 정확하게 찾을 수 있다. 2016년 확장되고 있다는 기사.[21] 위치상 대흥 수용소와 같은 곳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것은 불명이기에 적어둠.[22] 2017년 개천수용소 확장 중.[23] 2017년 요덕수용소 축소 중.[24] 2017년 북창수용소 확장 중.[25] 이순옥씨의 저서 '지하 300m의 꼬리없는 짐승들'에 나오는 발원금광일 가능성도 있다.[26] 농포집결소에 대한 탈북자의 경험담.[27] 보위성과 안전성 두 주체에서 관할하는 서로 다른 감옥이 각 관할 주체 산하 하나씩 있다.[28] 역시 각 주체당 하나씩 두 개.[29] AK 탄약이 떨어져 대공포를 끌고왔을정도로 상황이 막장이었다고한다.[30] 이쪽은 105호 관리소로 불리기도 한다.[31] 2012년 해체. 화성 수용소와 통합 중이라는 설이 돌고 있으며, 이유에 대해서도 갖가지 소문이 돌고 있다. 관리소장과 간부가 탈북해서 비밀유지를 위해 폐쇄했다거나, 화폐개혁 이후 너무 많은 수감자들이 아사해서라거나.[32] 미국의 한 민간단체는 수용소의 해체가 훼이크일 가능성을 제기했다.[33] 일부의 사람들은 옛 수인들의 수기에도 수록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세월이 상당 기간 지났음에 따라 이들이 현재까지 살아있을 지의 여부는 물론 알 수 없다.[34] 만 9세에 수감된 사람도 있다. 죄목은 "부친이 정치범으로 수감되면서 가족 수감".[35] 물론 우리나라 입장에서 봐도 중대범죄라 할 수 있는 죄로 들어온 사람 있긴 하다. 예를 들면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든가 인권유린(...)을 했다든가.[36] 한덕수라는 작자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사람들이 꽤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재일교포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철환의 할아버지인 강태휴도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한덕수는 김일성이 후계자 문제로 고민할 당시 김정일을 추천한 장본인. 김일성의 후계자 문제 관련은 김일성 혹은 김정일, 김평일 문서 참조.[37] 20만여명이라는 숫자가 어느 정돈지 감이 안 온다면, 김포시 인구의 절반 또는 군포시 인구 전체가 한번에 죽는 수준이라 보면 된다.[38] 물론 전쟁이 일어난다면 재판과 사형 선고 같은 번거로운 절차가 없어도 이 작자들은 높은 확률로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39] 한국은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라 사형수도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고, 대신 교도소에 평생을 가두어 둠으로써 사회 복귀를 영구적으로 불허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사형을 집행할 경우 대한민국 내부의 종북 세력들이 설칠 빌미를 제공하기에, 살려놓고 추악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면서 종북 세력들의 환상을 깨부수는 발언을 계속 뽑아내야 한다.[40] 무엇보다도, 수감자들을 전부 죽인다 한들 거기서 근무하던 간부 및 병사들이 있기 때문에, 수감자를 죽임으로써 진상규명을 막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41] 사면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전두환이 받은 모든 훈포장을 무효화시키긴 했다. #[42] 나치 전범들이 전쟁에서 패망하자마자 바로 저 멀리 아르헨티나까지 도주했지만 그들도 대부분 잡혔다. 요제프 멩겔레처럼 계속 숨어 다니다가 잡히지 않은 것은 드물다. 더군다나 그건 1970년대라서 그나마 도망이라도 다녔지만, 2010년대인 지금은 인터넷 때문에 도망 다녀봤자 컴퓨터만 있으면 전세계 어디라도 현상 수배 현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제보 당하면 즉각 경찰, 검찰, 군대가 잡으러 온다. 게다가 범죄자가 도망가도 인터폴의 창립으로 다른 국가의 경찰들이 잡아서 인도할 것이다. 실제로 70년대에 비해서 2000년대 이후로 나치 잔당들이 잡히는 사례가 대폭 늘어났다.[43] 고령자라는 점이 고려되어 실제 징역형을 집행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들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다.[44] 불교에선 천도재, 천주교에선 위령미사, 개신교에선 추모 예배를 할 것이다.[45] 오랜 수감생활 후 고향에서 죄인들이라는 이유나 본인이 아닌 2세라는 이유로 받아주길 거부해서 수용소 부근에 출소자 마을이 있는데 일단 죄수가 아니라 북한 공민으로 분류된다. 북한에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곳으로 이주하려해도 그곳에서 받아줘야만 갈수 있다.[46] 주로 수용소 내부의 보위원들이 자신이 정치범의 등골을 뽑아내서 만들어낸 식량 등의 물자를 몰래 자기 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를 들어주기 위해 안명철은 깊숙한 데까지 들어갔다가, (수용소 입구초소 근무자에 뇌물을 먹여놓고) 수용소 밖으로 나가 보위원의 가족이 사는 마을로 가는 일을 반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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