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넘어서지 못한 오랜 장벽 꿈을 보는 창
2012. 10. 31.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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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 Chapter 1 레슬리벤필드는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기억할까?
> 끝내 넘어서지 못한 오랜 장벽
한국을 사랑한 크기만큼 한국을 알기위해 노력했던 벤필드 씨가‘제2의 조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한국이 가까워졌을 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한국문화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잠꼬대도 한국어로 할 정도로 익숙해졌는데, 레슬리 벤필드 씨의 기대와는 달리 한국인 친구들이 하나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말 좀 잘하면 친구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없어져요. 사라져요. 영어로 얘기 안 하면……. 저한테 관심 있는 것보다는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한국에서 영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원어민 친구를 사귀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영어를 쓰는 데다 미국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벤필드 씨는 좋은 조건을 갖춘‘원어민 친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차츰 한국에 동화되어 가면서, 그리고 그녀 스스로가 한국에 동화되기 위해 영어를 자제하고 한국말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영어를 필요로 했던 한국인 친구들은 점점 멀어져 갔던 것이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영어 실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에 대한 예의를 등한시했던 그 얼굴 모르는‘한국인 친구’들이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참 부끄러웠다.
그렇게 머나먼 타지에서 사귀어 의지하던 친구들이 멀어져 갔을 때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실망감이 컸다고 했다. 그래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미국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번번이 그녀는 한국이 그리워 다시 돌아오고는 했다. 이유를 물었다.
“엉덩이가 너무 무거워서 그런가?”
레슬리 벤필드 씨는 그렇게 말해 놓고 웃어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 같은 문제로 봐도 될 것 같아요. 같이 있을 때는 안 좋은 점만 보게 되잖아요. 그런데 떨어져 있을 때는 좋은 점만 생각하게 되니까. 미국에 있을 때는 한국이 참 좋은 나라였구나, 생각해요.”
그녀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애인처럼, 다시 돌아올 때마다 한국이 더욱 좋아진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 사람들을, 한국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장벽이 있었다. 우리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좋아하는 그녀가 혹시 한국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한국 남자하고 결혼할 생각은 없으셨어요?”
취재 기간 내내 상냥하고 밝았던 벤필드 씨의 표정이 한 순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의외의 반응에 우리는 적이 당황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사회 때문에. 백인 여자하고 같이 있으면 스스로 출세했다고 생각하죠, 자랑스럽게 여기고. 백인우호주의니까 당연한 거고……. 흑인하고 있으면 인생 실패했다고 생각할 거니까, 나도 기분 나쁘고 그 사람도 기분 나쁠 것 아니에요?”
괜한 질문을 해서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상냥하고 친절한 그녀가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그 이유를 며칠 뒤에야 알았다. 레슬리 벤필드 씨의 한국인 단짝 친구인 십년지기 한귀례 씨를 만났을 때였다. 삼겹살집에서 식사를 하던 중 귀례 씨가 말했다.
“레슬리가 사실은 처음에 한국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제 생각에는 레슬리가 백인이었다면, 결혼했을 것 같거든요.”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슬리 벤필드 씨가 농담처럼 말을 받았다.
“성형수술 할까 봐. 한국 사람처럼 고쳐 가지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어쩌면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했던 레슬리 벤필드 씨의 바람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우리는 레슬리 벤필드 씨가 대단히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인품이 훌륭한 데다 지적이고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사람보다 더욱더 한국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흑인이었다. 11년째 한국에 머무는 동안 생각하는 것까지도 한국 사람이 다 되었건만, 검은 피부색은 그녀가 완전히 한국사회에 동화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녀의 한국인 친구들은 영어를 쓰는 흑인은 받아들였지만, 한국말을 하는 흑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가 푸념을 하듯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쟁을 딛고 일어나서 힘들게 살던 사람들, 그렇게 오래 지난 역사도 아닌데……. 제가 못사는 후진국에서 왔든 잘사는 미국에서 왔든 과거를 기억해서…… 그래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다 대접 받을 만하다고 생각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게 실망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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