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8

약자가 격리되지 않는 사회[박유하] 문화일보 2408

약자가 격리되지 않는 사회[살며 생각하며] :: 문화일보 munhwa

약자가 격리되지 않는 사회[살며 생각하며]
문화일보
입력 2024-08-16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 나이 먹는 건 약자 되는 것
  • 약자가 편안해야 좋은 사회

  • 집에서 삶 마감하길 원하는
  • 노년들의 바람과 마주할 때

  • 재택의료·간병휴직 등 필요
  • 요양사 직업 처우 높아져야

봄부터 거주하고 있는 이곳 일본 가마쿠라(鎌倉) 숙소는 오래된 민가를 리폼한 집이다. 역에서 나와 큰 거리를 하나 건너고 사람들이 오가는 절을 빠져나오면 다른 절 산문이 보이는데, 산문까지 가기 전에 나 있는, 자칫 모르고 스쳐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골목길 안에 있는 집.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려 그 골목길을 나와 절 옆에 있는 수거함까지 가곤 한다.

그러던 어떤 날은 골목길 입구에 한 노인이 가만히 땅을 내려다보며 서 있곤 했다. 처음엔 누구를 기다리나 보다 싶었는데, 같은 모습을 몇 번 보게 되면서 돌아갈 집 위치가 생각나지 않거나 집을 나오긴 했지만 가야 할 곳이 생각나지 않는 분임을 알게 됐다. 말하자면, 가벼운 치매 증상이 나타나는 분이었던 것.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 사는 분이 아니고 딸과 함께 골목길 안에 사는 분이란 사실도.

나라가 정한 공식 ‘어르신’이 되고 보니 그런 모습이 더는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먼저 솟아오른 건 부럽다는 감정. 자신에 대한 관리 능력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즉각 (노인 병동 같은 곳으로) 격리하지 않고 여전히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기’를 택한 그 여성 분의 가정과 사회가. 설사 길을 잃었다 해도 자신이 살던 곳에서의 황망함이라면 그나마 덜 불안할 테니까. ‘치매 증상인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 말 걸기/응대 방식’ 같은 책을 쉽게 볼 수 있는 사회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 또는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생각나지 않거나 쉽게 정하지 못하는 황망함은,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크고 작게 겪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그 시간을 기다려 주는 사회 만들기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몸과 마음의 기능이 ‘정상’으로 치부된 기준에서 벗어나는, 약자로의 길을 걷는 일이기도 하다. 설령 90세까지 정정했다 하더라도 종국에는 모두가 그렇다. 어느 날, 덜 보이고 덜 들리고 덜 먹게 되면서 우리는 약자의 대열로 들어선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강자들에 대한 선망이 강한 만큼 약자들에 대한 경시와 무시가 강하다. 약자들은 강자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즉각 ‘정상’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하지만 좋은 사회는 약자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사회다.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당연시되면서 언젠가부터는 자발적 ‘고려장’이 당연시되었다. 동시에, 자식들도 예전과는 달리 부모들을 실버타운이라는 이름의 격리 장소보내는 것에 더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약자들이 병원이나 집단시설 아닌 ‘집’에서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그 종국으로서의 죽음을 맞고 싶어 한다면, 더 늦기 전에 그런 ‘약자의 욕망’에 대해 제대로 논의해야 할 때가 아닐까. 돌봄이 필요한 약자로 태어나 다시 돌봄이 필요한 약자로서 생을 마치게 되는 우리 모두, 인생의 마지막 몇 년 또는 몇 개월의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사실, 이미 ‘집’에서 죽기 위한, 다시 말해 노년의 삶을 어떻게 주변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시작되었다. 2년 전엔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 교수의 ‘집에서 홀로 죽기’ 번역서가 주목받았고, 몇 달 전엔 그 우에노 교수를 중심으로 동시대 일본인들의 생각과 제도를 취재한 다큐멘터리 ‘1인 재택사’가 50만 회 이상 조회되기도 했다.

홀로든 같이든, 병원이나 집단시설이 아니라 집에서 노년과 죽음을 맞기 위해선 재택 의료 서비스(왕진 의사 시스템)가 우선 필요해 보인다. 집에서 죽으면 경찰부터 찾아오는 시스템도 바뀌고, 가족이 없는 이들을 위해 동거인이나 친인척이나 친구가 보호자 역할을 할 수도 있어야 할 것 같다.

요양사에게 의존한다 해도 관리자로서의 역할이 필요할 테니 간병휴직 제도도 필요하다, 육아휴직처럼. 부모를 위해 휴직을 해도 그/그녀의 커리어에 큰 지장이 가지 않는 제도가 있어야 부모는 자식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의 ‘희생’에 기대는 관계는 건강하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얼마 전엔 돌봄을 둘러싼 한·일의 현황을 설명하는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를 얻어 한국의 현황을 엿볼 수 있었는데, 한국의 경우 요양사 수가 너무 적은 것이 당면 과제인 듯하다. 적은 것은 물론 희망자가 적기 때문이니, 요양보호사들을 지탱할 든든한 시스템도 필요하겠다.

보호사 평균연령이 한·일 양국 모두 60세 이상이라는 건, 우선은 이른바 파출부처럼 특수 기능을 갖지 않아도 수행 가능한 직업으로 여겨져서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이상으로 돌봄의 대상인 노인층 자체가 잉여 인력으로 간주되기 때문일 듯하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돌보던 인력이 노인들을 돌볼 수 있으려면 당연할 수 있거나 당연하지 않은, 노인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따뜻한 사회란 끝없이 가치관을 바꿔 가야 가능한, 그러나 바로 그러므로 지향할 가치가 있는 것일 터. 요양보호사나 간병인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면, 그만큼 일에 대한 자부심이나 기쁨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고, 직업으로서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좋은 돌봄을 기대하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다.

골목길 앞 노인을 요즘은 보지 못했다. 말 한 번 나눈 적 없으면서 그의 행방이 신경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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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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