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한국전쟁
한국과 세계: 제12~13주
분단과 전쟁
본 글은 한국전쟁의 원인과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그 이해의 첫걸음을 내딛고자 하며, 나아
가 한반도가 곧바로 직면하게 된 분단 문제에 대한 보다 분명한 원인에 대하여 논하고 있
다.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하여는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좌우익의 대립이 중요시되는 내
적 기원론, 해방 이후 한반도의 통치권을 호시탐탐 노린 미국과 다른 강국들의 영향에 의한
외적 기원론, 그리고 국내와 국제적 차원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먼저 한국 전쟁의 원인을 찾는 첫 번째 설은 앞서 말한 좌우익의 대립에 기초한 내적 기원
론이다. 식민지 시기에는 한국인 스스로가 활동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불가능했기에 독립운
동이나 민족해방운동으로 정치활동을 표출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지
만, 당시 좌파와 중도파, 우파 세력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집합되어 통합된 힘을 보이기는
어려운 조직이었다. 임시정부는 곧 우익 정치세력이 판을 주도하게 되었고,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재조직이 되었다. 김구는 함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조소앙의
정치노선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국국민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강한 민족주의 노선
을 가졌지만, 동시에 ‘반공’ 노선 또한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좌우익 사이 정치 테러는
그 당시에도 깊은 뿌리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익의 또다른 축은 이승만이었다. 그는
미국과의 외교활동에 주력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직제에도 없는 대통령 명함을
사용하거나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등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켜 결국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 안창호와 빚어진 갈등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다른 우익세력으로는 김성수 계열을 들 수가 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하
고 해방 이후엔 대표적 우익 정당인 한국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자신이 직접 앞에 나서지 않
고도 자본을 통한 현실적인 힘으로 우익 세력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김구를 내세운 임시정부와 이승만, 김성수 계열이 우익을 주도하는 반면 좌익은 박
헌영과 같은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항일무장 투쟁세력이 있었다. 박헌
영은 지속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지만, 오랜 감옥 생활으로 정치활동의 경험이나 연계
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힘을 발하기가 어려웠다. 김일성이 강하게 제창한 민족
주의는 현재 북한의 주체사상과 반미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더불어 좌우익 세력
중간에는 중도파 세력이 있었고, 그중 중도좌파인 여운형이라는 핵심적인 정치인이 있었다. 그는 중도적 정치노선을 걸으며 조선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다양한 좌우익
세력을 포섭하였다. 그는 민족의 독립과 자주적 국가 건설에 있어 좌우익 세력의 연합이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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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적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운형은 좌우익의 실세를 움직일 만한 충분한 조직과 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중도파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이렇게 식민지 시기와 해방 직후에 좌
우익 세력으로 대변되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난립하였고, 이러한 대립이 한국전쟁의 직접적
대립이 되었다는 것이 내적 기원론의 주장이다. 그러나 좌우익 세력의 대립으로 한국 전쟁을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론들의 근거 또한 만만
치 않다. 먼저 그들은 정치세력 간의 갈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존재해왔음을 주장한
다. 정치세력 간의 충돌은 사회적 혼란을 불러 일으키지만 결국은 새로운 정책과 사회적 흐
름을 주도하며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도 조선시대 붕당에 대한 대립
과 같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많은 대립이 있어왔다. 대립이 정도를 넘어서면 붕당
간의 대립이 당쟁이 되고 조선 사회가 몰락하듯 사회가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정치세력 간의 갈등은 전쟁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유는, 좌우
익 세력들 사이를 오직 갈등으로만 보기에는 힘든 공통분모가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가장
우익적인 한국민주당의 정책에서는 사회주의라는 정치노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
주의적 정책의 본질적인 이유는 토지국유와 같은 강령 같은 한국의 길고 긴 역사에서 비롯
된 심리적이며 관습적인 당연스러운 정책에 두 세력 모두가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좌
우익 사이의 합일점은 그들이 분열, 대립 뿐 아니라 연합 또한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전쟁의 원인에 대한 두 번째 설은 해방 이후 한국의 통치권을 주무른 미국에게 책임
을 묻는 외적 기원론이다. 한국 전쟁의 기원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주
의적 정책이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분단 또한 공산주의의 확장을 주도한 소련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전통적 해석에 대한 수정을 시도하는 수정주
의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전통적 해석이 미국은 소련 등의 공산주의 국가의 혁명에 맞서 자
유민주주의 세계를 지키고자 하였다 주장한 반면, 그들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필두로 자
유민주주의를 핑계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 노력하였음을 토로한다. 그들이 전통
적 해석을 비판할 수 있던 논거들은 무엇일까?
먼저,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스탈린의 사적인 야욕 때문이 아닌, 미국인
희생자를 줄이려 전쟁을 빨리 끝내려 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독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루
스벨트에 이어 트루먼 대통령도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일본에
소련군이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원자폭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
을 사용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소유를 벗어난 한국을 두고 소련에 38선을 중심으로 하는 남
북한 분할 점령을 제안하였고,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였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은 한국과 중
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였으나 미국은 중국국민당이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위해 이를 거부하였고, 이
는 곧 미국과 소련의 자기 맘대로의 한반도 정치를 의미하였다. 한반도는 곧 또다시 여러
복잡한 정치세력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미국은 한국인들에게 행정권을 넘기지 않기 위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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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을 설치하고 우익 정치세력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치 조작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공
산주의자들 또한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미국이 이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
들을 펼친 것이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외
적 기원론자들은 미국뿐 아니라 소련의 책임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해방 직후 북한 등지에
서 소련군은 실질적 물리적 세력을 가진 유일한 세력이었다. 게다가 최근 구소련의 문서들
은 한국전쟁 직전 스탈린과 김일성, 마오쩌동이 만나 전쟁 개전에 관해 나눈 대화록을 공개
하여 소련의 책임론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설득력 있어 보이는 외인
론 또한, 역사적으로 1945년 이후 한반도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베트남과 오스트리아와 비
교해 보았을 때 설명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보인다. 오스트리아 또한 2차 대전 후 미국과 소
련에게 공동 점령 당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곧 국민들의 자발적 의지와 더불어 국민과
정치인의 통합된 역량에 힘입어 임시정부를 성공적으로 구성하였고, 분단되지 않고 국제적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가 양극의 극단적 시스템을 유지해오며 분단을 지
속한 것은 동일한 국제 환경 속에서 국내의 원인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또한 절대
적인 외국 세력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었으나 전쟁을 겪고도 분단을 극복할 수 있었다. 결
론은, 분단과 전쟁의 결정적 요소인 외세에 의한 점령은 분단의 필요조건이지만, 동시에 외
세와 결탁하여 특정 지역에서라도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 내부의 정치적 대립이 분단의 충분
조건으로 작용한 것이다. 원인이 어떻든, 한반도가 분단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결과만 가지
고 과거에 대하여 과정에 대한 노력을 무시하는 것에 대하여 필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한반
도는 분단되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분명 분단되기까지의 과정에는 그것을 막으려는, 동시
에 촉진한 수많은 과정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조선 인민공화국과 임시
정부는 통합하려 노력하였으나, 미군정이 대한민국의 자치적 정부를 무시하자 활동을 재개
하기는 어려웠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승만의 분열주의적 정치에 불만을 표했고 그와의 합
작 대신 인공과 합작을 꾸준히 시도하였다. 두 세력 모두 독립국가 수립을 위해선 정치세력
들이 통합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가 1945년 발표되었다. 한국인에게 또다른 식민 지배와 같은 신탁통치는 절
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으나, 3상결정이 완전한 신탁통치와 외세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3상결정으로 그들의 지배를 다지는 동시에 조선인들의 참여 또한 보
장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반면, 미국은 오히려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어
찌 되었든,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3상회의는 성사되었지만, 두 국가는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에 참여할 정치세력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합일점을 찾지 못했다. 여기서도 좌익
과 우익의 대립이 심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성명에 찬성하는 정치세력이면 모두 공동
위원회에 참여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다. 3상결정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정치세력들의
역할을 통하여 한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통로로 활용할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처럼 그러한 기회를 잡기에는 한반도의 대립적 상황은 너무나 뜨거웠다. 김구는 ‘반공’을 주도하는 반탁운동을 행했고, 그러한 상황서 남북협상이 성사되기는 불가능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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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좌우익의 정치세력들은 통합이나 협상보다는 자신들의 정치를 내세우는 데 집중하
였다. 좌우익 간 정치대립과 분단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좌우합작운동
은 혼란한 정국서 좌익과 우익이 어느 정도 타협을 통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통
합을 추구하자는 약속이었다. 또한, 조선인민당의 지도자였던 여운형은 해방직후 유일하게
좌와 우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미군정, 소련군 양쪽 거기에 김일성과
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진정한 좌우합작을 위해선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도 협
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같이 좌우합작운동을 한 김규식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초기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이 지원하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위원회는 또다른 문제에 봉착하는데, 바로 좌익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었다. 미군정은 조선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두 사이는 대립관계로 틀어지게 된다. 공산당은 미국의 당
시 경제적 실패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으나, 그것은 여운형 계열의 좌파세력과 충돌하
게 된다. 더군다나 좌우합작위원회의 7개 항의 원칙 중 두 가지 항에 대하여 여운형은 좌익
의 강력한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여운형은 좌우익 통합이라는 뜻을
결국 이루지 못한 채 몇 년 후 암살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다. 좌우합작운동은 좌우익과 미
국 사이의 ‘동상이몽’ 관계 속에서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7원칙은 미군정이 한국을
이용하려 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국 내부에서 국제정세를 이용하려는 나름의 노력이
깃들어 있었음에도 말이다. 저자는 여운형이라는 중요하고 위대하였던 사회 지도자가 이처
럼 중대한 시기에 일찍 죽음을 맞이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며 그가 존재하였더라면
좌우합작운동은 성공했을 수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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