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가 된 태극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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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논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친일파다 아니다 두부 자르듯 일도양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예 조선을 떠나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한 분들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경우 악질 친일파를 솎아낸다면 몰라도 ‘친일파’라는 범용적인 표현을 들이대자면 애매한 부분이 불거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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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을 지은 이원수의 경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고 아동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고향의 봄>이 삭제된 적이 있습니다. 일제 말기 금융조합에 입사했고, 그 사보같은 곳에 쓴 친일 글 3편 때문에 친일파로 몰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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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런 식의 ‘친일척결’에는 반대합니다. 이원수의 이름이 박혀있을망정 그걸 본인이 썼는지 아니면 누가 쓰고서 이름만 박았는지 모를 글 몇 편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규정하고, 또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노래마저 ‘친일파의 작품’으로 규정한다면 이건 저강도의 문화혁명 같은 과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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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에 언급한 바, 민망할 정도의 친일 행각을 보였고 그게 일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그에 대한 참회와 반성 없이 대한민국 역사 내내 잘나갔던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고, 그들을 보자면 이 때늦은 친일척결 ‘문화혁명’의 열기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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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그래도 친일파들의 작품을 배제하고 멸절하고 우리 눈 앞에서 치우는 것보다는 그들의 친일행각과 그 후 독재와의 유착을 냉엄히 공유하되 그들의 문학 작품도 함께 기억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엄연한 우리 역사고, 그들의 작품과 성취 또한 그러할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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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시인은 그 중 하나일 테죠. 그녀의 삶을 한 번 돌아봤습니다.
구독 눌러 주시면 감사하고.... 주변의 구독도 권해 주시면 두 번 감사합니다...... 만사가 형통하고 만나는 이마다 귀인이실 것이며 손대는 것마다 대박이 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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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그녀의 시를 찾아 읽은 적은 없으나 흘러들은 <렌의 애가>는 무척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명시였고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6.25에 참전했던 한국군 용사라면 눈물을 줄줄 흘리게 만들 수 있는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굳이 그걸 폐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시도 역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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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읽은 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겠지요. <렌의 애가>를 읽으면 가증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그런 작업들이 오히려 우리 문학과 역사의 품을 넓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윤숙의 걸작, 걸레같은 작품들입니다. 유튜브에 등장하는 태극소녀 모윤숙의 시와 비교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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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치마 모르고 /
연지분도 다 버린 채 /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온갖 꾸밈에서 /
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 /
풀렸습니다 벗어났습니다 들어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 /
미래를 창조하는 /
우렁찬 고함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
산 발자욱 소리를 우리는 새날의 딸 /
동방의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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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친일 시 -2.
소남도 2월 15일 밤! /
대아시아의 거화! 대화혼의 칼을 번득이자 /
사슬은 끊이고 네 몸은 /
한 번에 풀려 나왔다 처녀야! 소남도(昭南島)의 처녀야! 거리엔 전승의 축배가 넘치는 이 밤 /
환호소리 음악소리 천지를 흔든다 소남도! /
대양의 심장! /
문화의 중심지! 여기 너는 아세아의 인종을 담은 채 /
길이길이 행복되라 길이길이 잘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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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친일 시 3.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 날아라 맑은 하늘 사이로 /
억센 가슴 힘껏 내밀어 산에 들에 네 날개 쫙 펼쳐라. /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 아름드리 희망에 팔을 벌리고 /
큰 뜻 큰 세움에 네 혼을 타올라 바다로 광야로 나는 곳마다 /
승리의 태양이 너를 맞으리. 고운 피에 고운 뼈에 /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
솟아솟아 날아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
험준한 산협에도 네가 날아가는 곳엔 /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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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이판능을 둘러싼 일본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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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만화 카페’가 있지만 아빠의 청소년 시절 ‘만화방’은 저렴하고 시간 때우기에 최적인 공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한 대목이 있어. 산더미처럼 쌓인 만화 중 상당 부분이 재일교포가 주인공인 스토리였다는 거야. 재일교포가 ‘민족적 자긍심’을 간직하고 살다가 특출한 능력을 발휘해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천편일률의 만화가 많았어. 해방 이후 30~40년이 지났음에도 일본의 한국인 차별은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댕기고 시련을 극복한 영웅 서사의 뼈대로 삼기에 좋은 소재였던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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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일제강점기 당시에야 오죽했겠니. 먹고살기 위해 신흥 자본주의 강국 일본에 밀려든 조선인들은 극심한 차별과 홀대를 경험해야 했지. 일본 사회 밑바닥을 쓸고 다니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조선인 가운데 도쿄에서 전차 차장, 즉 운전사로 근무하던 이판능(1894~1955)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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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운전사라면 웬만큼 기술과 지식이 필요한 직업이었으니 일용직 노동자나 날품팔이로 연명하는 조선인보다는 신세가 나았을 거야. 직장에서도 온순하다는 평이었고 결혼도 해서 아이를 둔 사람이었단다. 이 사람의 인생에 끔찍한 폭풍이 몰아친 건 1921년 6월2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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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이판능은 집에 있던 수건이 석 장씩이나 없어진 걸 발견한다. 요즘과 달리 당시는 수건이 무척 귀했고 집집마다 숫자를 세며 확인할 정도의 물건이었던 모양이지. 이판능은 무슨 이유에선지 일본인 하숙집 주인이 그 수건을 가져갔다고 의심했어. 그런데 ‘조센징’으로부터 수건 도둑 혐의를 받은 일본인 이웃은 부부가 합세하여 이판능을 두들겨 패버린다. 그들의 입에선 별별 소리가 다 나왔겠지. “조센징이 생사람을 잡네. 조센징들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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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피해를 당한 이판능은 경찰서로 가봤지만 일본 경찰이 조선인 편을 들 리는 만무했다. “도둑놈은 사람을 패고, 경찰은 조센징이라고 도둑놈을 옹호하고!” 마침내 이판능의 분노는 비이성적으로 그리고 비인간적으로 폭발하고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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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인집으로 들이닥쳐 칼을 휘둘렀지. 일본인 주인 부부와 그 아들 하나까지 모두 이판능의 칼에 거꾸러졌다. 이후 이판능은 칼을 든 채 거리로 뛰쳐나가서 지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찔러버렸다. 무고한 사람이 무려 17명이나 목숨을 잃었어. 희생자 가운데에는 지나던 조선인도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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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능은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어. “수건 세 개를 훔쳐 갔기에 도로 달라 했더니 되레 저를 구타하고 그 처까지 저를 때렸는데 이 말을 경찰서에 고소해봐야 저는 조선 사람인고로 돌아보지도 아니하니 이와 같이 불공평한 경찰에 고소한대야 쓸데없겠으니 드디어 죽일 마음을 내었습니다(〈동아일보〉 1921년 10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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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사 말미에는 이런 글귀가 덧붙여져 있다. “감정이 치밀어 눈물을 흘리고 만장이 동정하는 속에서 진술을 마치었다더라.” 뭔가 온정적인 시선이 엿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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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능은 혹심한 차별을 경험하던 조선인들 사이에서 동정을 얻고 있었다. 살인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정신줄을 놓게 만든 상황에 대해서는 공감했다고나 할까. 사건 2년 뒤인 1923년 열린 공판에서 방청객은 조선 사람들뿐이었다고 해(〈동아일보〉 1923년 1월11일). 3·1항쟁을 가까스로 무력화했던 일제도 조선 사람들의 정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즈음은 일본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의 기운이 만연해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던 시기이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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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건 속에서 일본은 이판능 사건에 꽤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다. 변호인들은 이판능이 정신착란 상태에서 범죄를 벌였기에 무죄로 봐야 한다는 변론을 펼쳤고, 재판부는 도쿄제국대학 의사들에게 정신감정을 의뢰한다. 의사들의 의견은 대체로 “지각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나 범행 당시 정신착란 상태에 이르기는 했다”라는 쪽으로 모아졌다. 1심에서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지만 2심 재판부는 징역 7년6개월이라는 파격적인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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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통치의 잔악함과는 별도로 아빠는 이판능 사건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놀라게 된다. 17명의 인명을 묻지 마 살해한 사람에게 당시로서는 최선의 정신감정을 하고 그 감정을 냉철하게 받아들여 형을 선고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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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 만한 사건은 또 있어. 하숙집 주인 가족의 장례식장에서, 그곳에 모인 일본인들은 이렇게 결정한다. “유족을 위하여 동정금(부조금)을 모으는 동시에 이판능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고인을 찔러 죽인 것은 정신에 이상이 생겨 그리한 것이요, 고의가 아닌즉, 이판능의 유족(가족)에 대해서도 그대로 있을 수 없다 하여 또한 돈을 걷어 주기로 하였고 기타 피해자에게도 성금을 분배한다더라(〈조선일보〉 1921년 6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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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사건 이후에도 이판능이 분노로 정신줄을 놓았을 뿐 고의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그 가족까지 챙기는 일본인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양면적인 면모를 엿보게 된다. 일본에 사는 조선인에게 차별과 경멸은 일종의 상수(常數)였고 많은 일본인들이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고 살았다. 한편으로 일본 법정은 국적과 무관하게 냉철한 판단을 내렸고, 어떤 일본인들은 범인의 가족까지 살피는 휴머니즘 또한 간직하고 있었지. 그리고 이어진 사건은 인간의 양면성을 처절한 형태로 드러내게 돼.
이판능의 행각과 이름은 널리 알려졌고 판결과 상관없이 ‘잔인한 조선인’의 이미지를 더해갔어. 여러 명을 죽인 살인자가 나타나면 ‘제2의 이판능’ ‘제3의 이판능’으로 불렸다. 친일파 민원식이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인 유학생에 의해 처단되는 일이 벌어지고, 각종 시위에 조선인들이 앞장서면서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는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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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1923년 9월1일 간토(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라는 헛소문 속에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괴물로 현신하고 만다. 몇 명인지도 모를 조선인이 길바닥에서, 집 안에서 죽창에 찔리고 칼에 맞아 죽어갔지. 공포와 혐오로 미쳐버린 일본인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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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판화 작품 속에 남긴 메모를 떠올리게 된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을 뜬다.” 이판능은 성실하고 온순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지지만 민족 차별의 모멸감에 정신을 놓아버렸고 무고한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극악한 살인자의 인권을 챙기고 살인자의 가족까지 보살피는 선량한 여유를 미미하게나마 머금고 있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일본은 불과 몇 달 뒤 글자 그대로 미쳐 날뛰는 광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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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인간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의 선을 긋고 해야 할 일을 위해 떨쳐나서는 이성을 지닌 존재지만, 그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는 광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지속적으로 ‘깨어 있도록’, 즉 이성이 잠들지 않도록 경계를 늦춰선 안 되지. 이는 특정 국가, 특정 시대에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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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오늘날 한국의 경제적 위상은 재일교포 차별을 주제로 한 만화에 분노하던 아빠의 청소년 시절보다는 이판능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살던 1920년대 일본에 가깝다고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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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느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 사장의 학대에 분노한 나머지 그 사장 가족을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길거리에 뛰쳐나와 오가는 한국인들을 무차별로 살해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이판능 사건 후 그의 가족까지 챙겨준 일본인들과 간토대지진 이후 죽창을 들고 조센징을 죽이라고 부르짖던 일본인들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답을 한번 상상해보기 바란다. 아울러 그 사이에서 재삼재사 다짐하고 경계하고 깨달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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