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1

21 [예영준] 주사파는 어떻게 진보정당을 접수하게 됐나 -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주사파는 어떻게 진보정당을 접수하게 됐나 - 중앙일보

주사파는 어떻게 진보정당을 접수하게 됐나
중앙일보
입력 2021.09.01 00:32지면보기

예영준 기자중앙일보 논설위원


1980년대부터 2005년까지 학생운동권과 범민련에서 주사파 핵심으로 활동했던 민경우 미래대안행동 대표. 장진영 기자

북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을 일컫는 종북(從北)이란 말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공안기관이나 보수 진영에서 만든 용어가 아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 당시 조승수 의원 등이 NL(민족해방) 계열의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를 비판하면서 널리 퍼진 용어다. 이석기 전 의원의 구속과 이듬해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한동안 잊힌 이 용어를 지난달 공개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사건, 세칭 ‘청주 간첩단 사건’이 다시 불러냈다. 관련자들의 구속영장에 적시된 혐의 사실에 따르면 이들은 북한의 지령대로 F35 스텔스기 도입반대 운동을 펼쳤다.

이 사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관련자들이 1980∼90년대에 대거 배출된 학생운동권 출신 주사파가 아니라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린 순수한 현장 노동자 출신이란 점이다. 노조 활동을 하다 어떤 계기 때문에, 혹은 점진적으로 노동 운동의 조류를 따라가는 동안 종북주의자가 되었고 급기야 북한공작원과 접촉하고 공작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결코 거물급이라 할 수 없는 그들의 구속은 종북주의가 운동권 리더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저변에까지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통일운동과 간첩활동 경계 불분명

민경우 미래대안행동 대표는 1980년대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지내는 등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그 이후 2005년까지 NL 주사파의 통일운동 구심체인 범민련 사무처장을 지냈다. 그래서 주사파의 발흥과 변천 과정, 북한과의 연계 동향, NL 운동권 내의 인맥을 소상하게 아는 사람이다. 2012년 운동권과 결별한 그는 조국, 윤미향 사태 등을 계기로 586 운동권, 특히 주사파의 문제점을 밝히고 비판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충북동지회 사건은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소수 일탈자의 행동일까.

“그렇지 않다. 광범위하게 종북적 사고를 가진 활동가들이 퍼져 있다. 그런데 왜 사건이 터지지 않나. 대공역량이 약화해 안 잡히고 있을 뿐이다. 종북이 광범위하게 퍼진 원인은 몇 가지 있다. 6ㆍ15 선언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친북 분위기가 생겨났고, 남북 교류의 문호가 열렸다. 인터넷 보급과 해외여행 자유화로 직간접으로 북한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급격히 늘어났다.”

-단순한 친북 성향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실행하는 건 차원이 다르지 않나.

“문제는 통일운동과 간첩행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아마도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간첩행위가 아니라 조국통일 사업의 일환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내 경우도 어느 정도 그랬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우선 지령의 형태가 바뀌었다. 과거 민혁당(김영환)이나 중부지역당(황인오) 사건 등에는 무전기나 난수표가 증거품으로 등장한다.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본인은 지령이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연중에 내린다. 가령 남북청년 회담 끝에 뒤풀이하다가 ‘다음 만날 때까지 이런 내용 좀 알아봐줘’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내가 범민련 남측본부에서 일할 때 일본 조총련에 있는 범민련 공동사무국과 연락할 일이 많았다. 어느 날 공동사무국 간부가 전화로 ‘참여연대에 대해 얘기 좀 해달라, 이왕이면 문서로 적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팩스로 보내줬는데 그게 법정에 가면 지령수수가 된다. 청주 사건도 그런 식이었을 것이다.”


1990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린 제1차 범민족 대회 북한 및 해외동포와 연계하에 열린 이 대회는 90년대 주사파 운동의 중심이었다. [중앙포토]

2001년 이후 민노당 가입 줄이어

널리 알려진 대로 주사파의 기원은 1980년대 중반의 학생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정권 반대와 민주화를 내건 학생운동 세력의 일부가 ‘반미 자주화’를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시해 주도권을 장악했다. 단파 라디오로 청취한 북한의 대남 방송 내용이 다음 날이면 대학가 대자보에 붙었다. 그 뒤 1987년 민주화와 뒤이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같은 시기에 일어난 한국 사회의 발전과 경제 성장, 과격 투쟁 노선으로 인한 대중의 이탈 등으로 학원에서의 주사파는 세력을 잃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주사파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에는 북한과의 연계하에 결성한 범민련을 통한 통일운동을 벌였고, 2000년대에는 노선을 전환해 진보정당과 노동현장을 급격히 파고 들어갔다.

그 과정에 일어난 중요한 분수령이 이른바 ‘군자산의 약속’이다. 2001년 9월 충북 괴산군 군자산에 있는 한 연수원에 자주통일 활동가 700여 명이 모여 새로운 운동 노선을 채택한 것을 말한다.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질문했더니 민경우 대표도 그 속에 있었던 한 명이라고 답했다. 그는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증언을 했다.

“90년대 주사파들은 주로 전국연합이란 조직을 중심으로 한총련을 동원해 거리투쟁에 주력했다. 민주노동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이 2000년 10월 노동당 창당 55주년 때 남측 민간단체 사람들을 초청했다. 이때 북한 통일전선부 부부장 안경호가 오종렬 전국의장을 만나 민노당에 가입하라고 요구했다. 2000년 이전 주사파의 모든 관심은 범민련 가입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내부 논의가 종식되고 민노당 가입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 뒤 전국연합 지도부가 합의하고 마지막에 이를 결의하는 자리가 바로 군자산 모임이다. 약 700명이 모였다. 거기서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사항을 결의하는 자리였다. 이후 주사파들이 민노당에 가입하기 시작하는데, 워낙 숫자가 많으니까 2004년 무렵 주사파가 민노당을 접수하게 된다. ”

논설위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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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의 민노당 ‘접수’는 진보좌파 진영에서 큰 사건이었다. 국회 의석 10석가량을 차지하던 민노당을 통해 주사파가 제도권 내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노당을 접수한 주사파의 3대 파벌이 경기동부연합과 인천파, 울산파다.

이 과정에서 민노당 내부에 큰 분란이 일어났다. 앞서 소개한 민노당 조승수 의원 등의 ‘종북’ 비판은 민노당 기존 세력과 뒤늦게 주사파와의 갈등 과정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이후 민노당은 이합집산 과정을 겪어 지금과 같이 진보정당이 몇 갈래로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통진당 해산 당시 당원 8만명 중 상당수는 현 민주당으로 가고 나머지는 현 진보당과 정의당으로 흩어졌다.

주사파 활동가들이 군자산에서 채택한 결의는 “3년 안에 민족민주전선과 민족민주정당을 건설하여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연방통일조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대업을 이루자”는 내용이다. 6ㆍ15 선언 직후 한껏 고양된 자신감이 느껴진다. 결의를 이루기 위한 방법론으로 민노당 접수를 택한 것이다. 운동권 내부에서는 이를 두고 ‘9월 태제’라고 부른다. 물론 그 결의는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정당 조직인 민노당뿐 아니라 노동 현장에도 광범하게 확산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80년대에 갇힌 정치인 위험

청주 사건 구속자들이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를 결성하고 스텔스기 도입 저지 운동을 펼친 것도 그런 흐름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충북동지회 회원이 운영한 인터넷매체인 ‘충북청년신문’에는 ‘군자산의 결의를 다시 읽는다’란 기사가 올라 있다. 다행히도 그들의 스텔스 저지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원성이 작동하는 우리 사회에 종북 세력이 존재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주체사상을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북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만으로 주사파의 정의를 한정하면 크게 위협은 안 될 것이다. 청주 사건 연루자들이 우리 사회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지식인 사회와 정치권 등 우리 사회의 영향력 있는 부분들에 주사파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많이 퍼져 있다는 점이다. 학생 시절 정말 주사파 핵심이었던 사람들은 생각을 바꿨는데 그 주변부에 있던 사람 중에 급진적 생각을 아직도 가진 사람이 많다.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하고 세운 나라여서 처음부터 정통성이 없다는 식의 역사관은 북한정통론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 주사파의 역사관인데 지금 우리 사회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 유력 정치인들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나. 이런 사고가 사상의 자유를 넘어 국가의 존립을 흔드는 상황까지 가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중앙일보 논설위원

2019년부터 논설위원으로 사설 집필과 함께 칼럼, 논설위원이 간다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yyjune@joongang.co.kr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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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oni** 25분 전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대부분의 국가가 나름 민족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았지. 물론 허수아비 정권이 만들어진 경우도 많지만... 그래서 확고한 정통성을 가진 국가들의 현재 꼬라지들을 봐라. 대표적으로 바로 위 북한 꼬라지를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자칭 항일운동한 집단이 정권을 차지했지만 그게 독재를 합리화하는 근거로만 작동했지 국민들 삶에 도움이 되었냐? 정통성은 곰탕집이나 짜장면집에서나 따질 일이지 국가 수준에서 논하는 것은 자멸행위다. 정통파가 있으면 반정통파나 비정토파는 어찌 되겠냐? 죽여야 하니? 생각들을 좀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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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kho** 1시간 전


거시기하다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주사파! 대한민국의 한 30%정도 더하기 그 자손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게 신기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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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hwn** 1시간 전


그러니까 현 집권 세력과 연대세력은 김일성 일가를 한반도 적통으로 보는 것이다. 주민등록상 대한민국 국민이지 이미 주체사상에 오염이 되어 인간 자체는 김일성 좀비라는 얘기다. 자신들은 이를 극구 부인하겠지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反대한민국 종자임은 분명한 것이다. 이런 패거리에 나라를 맡겨 놓고 대갈이가 깨져도 지지한다는 군상들이 40%라니 대한민국은 이미 우리가 알던 대한민국이 아닌 것이다. 주한 미군이 언제까지 버틸 수가 있는가에 따라 아프간 같은 환란의 시기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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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 
널리 공유하고 싶은 것은 이 말입니다.
문제는 지령을 수수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진짜 간첩 같은 자가 아니라(이들은 극소수일 뿐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도 극미하니), 조선로동당과 역사인식, 세계관, 가치관의 싱크로율이 매우 높은 자들, 즉 운동권 지진아들이 정치, 사법, 노동운동, 시민운동, 교육, 언론, 문화를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체제를 대안으로 여기지도 않으면서 대한민국을 혐오하고, 핍박받는 북한 인민은 외면하고, 북한 통치배들을 옹호하는 모순덩어리들이죠!! 문재인-화석586 연합정권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간첩인듯 간첩아닌 간첩 같은 그대들!!
그런데 의외의 효과가 있습니다. 보수-중도세력의 가장 뜨거운 세력 일부를 극단적인 공포와 분노에 휩싸이게 하여, 문정권의 수많은 시대착오적인 정책과 행태에 둔감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고(이들은 국가보안법 폐기에 엄청나게 예민합니다), 또 이들을 극우로 규정하여 야권을 분열, 반목시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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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성이 작동하는 우리 사회에 종북 세력이 존재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주체사상을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북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만으로 주사파의 정의를 한정하면 크게 위협은 안 될 것이다. 청주 사건 연루자들이 우리 사회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지식인 사회와 정치권 등 우리 사회의 영향력 있는 부분들에 주사파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많이 퍼져 있다는 점이다. 학생 시절 정말 주사파 핵심이었던 사람들은 생각을 바꿨는데 그 주변부에 있던 사람 중에 급진적 생각을 아직도 가진 사람이 많다.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하고 세운 나라여서 처음부터 정통성이 없다는 식의 역사관은 북한정통론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 주사파의 역사관인데 지금 우리 사회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 유력 정치인들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나. 이런 사고가 사상의 자유를 넘어 국가의 존립을 흔드는 상황까지 가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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