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31

[정부수립 60주년]분단·식민 아픔 어디가고 ‘성공의 역사’만 남았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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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식민 아픔 어디가고 ‘성공의 역사’만 남았나
입력 : 2008.08.18 
신주백 | 국민대 연구교수·한국사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의 위험한 현대사 인식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광복절과 ‘건국절’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논쟁은 학문의 기능을 사실상 배제시킨 채 정치화되어 이념 갈등과 사상 검증의 차원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정치적 지형의 측면에서만 보면 2008년 8월15일의 건국절은 김구와 김규식 세력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1948년 8월15일의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지난 15일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고 있다. 뒤 전광판에 적힌 ‘위대한 국민, 기적의 역사’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건국절 논란의 불씨를 지핀 것은 1995년 1월부터 ‘거대한 생애 이승만’이란 제목의 연재기사를 게재한 조선일보였다. 논란의 불길은 2004년 한나라당 정치인들의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색깔 공세, 2005년 결성된 교과서포럼이란 신우파 단체의 현행 역사교과서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역사 인식 문제를 둘러싼 불길은 학교 교육의 영역으로 확산되었고, 한국인의 정체성 문제로까지 번져갔다. 마침내 2008년 ‘대안교과서’를 표방한 교과서포럼의 ‘한국 근·현대사’란 책이 출판되면서 논란의 불씨를 제공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 압축적으로 드러났다. ‘건국절’ 논란은 이들과 같은 인식을 갖는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표출된 하나의 사건이자 본격적인 역사논쟁의 시작에 불과하다.


‘건국절’과 광복의 과정



1945년 12월1일 임시정부 환국봉영식에 나란히 참석해 귀엣말을 나누는 김구와 이승만.

8월15일을 광복절에서 건국절로 바꾸자는 주장이 공개적인 논란거리가 된 것은 ‘한국 근·현대사’란 책의 편집을 주도한 이영훈 교과서포럼 공동대표(서울대 교수·경제사)가 2006년 8월1일자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글을 기고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기고문에서 몇 해 전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보고 느낀 광경을 회고하면서 ‘국민주권’을 선포하고 ‘신체의 자유’를 보장한 대한민국 건국의 문명사적 의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1948년 8월15일은 진정한 의미의 빛이 찾아온 날이고, 1945년 8월15일 광복은 그다지 흥분되지 않는 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영훈을 비롯한 신우파가 1945년 8월15일의 광복을 홀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의 압제로부터 우리가 벗어난 과정에 대한 인식, 달리 말하면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사에 대한 이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신우파는 미국이 일본에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가 광복할 수 있었지만, 
광복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본다.



1948년 제주 4·3 사건으로 희생된 가족의 시신 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

이들은 광복관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판한 언급은 없다. 필자가 보기에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연합국이 승리한 싸움으로 중국의 항일전쟁과 소련의 참전도 일본이 패전한 이유에 포함시켜야 한다.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미군 및 중국국민당군과 협조했고, 
  2. 조선의용군이 중국인민해방군과 협력했으며, 
  3. 만주의 유격대가 소련군의 지휘를 받았던 사실도 
연합국이 침략국과 싸운 전쟁이라는 정황과 연관지어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해외의 3대 항일무장대와 국내의 민족운동 세력은 1945년 8월15일 바로 그날에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지 몰랐을 뿐이지, 일본이 아주 가까운 장래에 패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갖고 저항을 계속했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장문의 ‘건국강령’을 제정했고, 조선의용군이 만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고자 했으며, 빨치산 유격대가 조선공작단위원회를 결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여운형이 1944년 서울에서 결성한 단체의 이름도 ‘건국동맹’이었다. 주지하듯이 건국동맹은 8월15일 직후 전국에서 결성되어 우리의 자치역량을 보여준 건국준비위원회의 모태였다. 
최소한 우리를 이끌 지도자들에게 8·15 광복은 준비 없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8월15일 광복을 우리가 주도적이고 독자적인 힘으로 쟁취한 것은 아니다. 연합국이 이탈리아, 독일, 일본이란 침략국으로부터 승리한 결과였다. 그런데 침략국의 지배를 받던 세계 민족과 국가 가운데 그들이 항복할 때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한 경우는 없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도 없다. 연합국에 의한 광복이라는 측면만을 부각시킬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민족운동 세력도 반일연합전선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건국절’과 임시정부 계승


신우파는 국민주권을 선포하고 신체의 자유를 보장한 대한민국의 건국이 한반도 역사에서 문명사적 의의가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의 출현을 문명사적 측면에서 의미를 규정한 그들의 지적은 우리 역사를 새로운 측면에서 조망하고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1948년 4월19일 통일의 꿈을 안고 북행길에 오른 김구 일행이 38선 위에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왼쪽부터 선우진·김구·김신.

하지만 비판자들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장에 이미 보장된 가치라고 본다. 실제 헌장에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양심의 자유만이 아니라 언론·출판·집회·결사·소유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다. 1919년 이후 거의 모든 독립운동 단체는 민주공화주의를 독립 이후 추구해야 할 이념으로 규정했다. ‘건국강령’은 이를 가장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규명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서명한 1948년의 제헌헌법에서도 이를 계승했다.



집권 당시 하지 미군 사령관에게 김구를 인사시키는 이승만.

이에 대해 신우파는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이므로 정신적으로 계승했다고 보면 되는 것이고, 법적 실체적으로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48년이라고 본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사실과 대한민국이란 국민국가의 실체가 1948년에 들어선 것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에 신우파의 주장이 제헌헌법의 규정을 충분히 해명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헌법의 전문에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9년에 대한민국을 ‘건립’했고, 1948년에 ‘재건’했다는 규정은, 1948년 8월15일을 ‘정부수립일’로 보아도 국가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광복과 건국을 선택적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한국의 건국일을 무조건 비교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건국절과 분단정부로서의 대한민국



박정희 전 대통령. ‘수출 100억불 달성, 한강의 기적, 세계가 놀란 눈부신 경제 성장’이라는 수식어를 얻었지만 민주주의, 자유, 인권, 통일의 가치 등은 철저히 외면했다.

재건된 대한민국은 통일정부가 아니라 분단정부다. 그런데 신우파에게 이 화두는 관심이 없다. 친북좌파세력의 역사인식이라고 공격하는 소재거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의 관심은 분단정부인가 아닌가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대한민국이란 국가 자체가 건국되었다는 데 모아져 있다. 그래서 애초 교과서포럼은 북한의 역사를 한국의 현대사 교과서에 포함시키는 것 자체를 비판했다. 문제가 제기되자 ‘한국 근·현대사’ 책에 어쩔 수 없이 ‘보론’으로 넣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거추장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사만을 강조하는 신우파의 역사인식에서 분단극복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설령 관심을 갖고 조명한다 하더라도 분열의 책임을 북한과 소련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분단의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작업도 큰 의미가 없다. 당시 국제관계의 냉험함에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보면 1948년 8월까지 3년간의 미군정 통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도 불명확하다.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미군도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왔다. 미군은 우리가 아니고 일본군처럼 외국 군대다. 그들이 38도선 이남을 3년간 통치했다. 신우파는 건국절의 의미와 모순되지 않게, 그리고 식민지 통치사와도 충돌하지 않게 3년간의 역사를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건국절과 문명화



신우파가 건국절의 문명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식민지 치하에서 경제가 개발되었고 한국인이 근대 법제도를 경험하며 시장경제의 기본적인 룰을 학습하는 등 근대 문명을 스스로 학습하고 사회적 능력을 축적했다고 보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근대화 과정을 완성한 정치 형태가 1948년 8월15일 세워진 대한민국이라고 본다.


하지만 사회적 능력을 축적하면 모든 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역사인식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식민지 시기를 기술하면서도 식민지 같지 않게 언급하고 있으니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미화론이란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민족운동을 깎아내리고 친일파를 긍정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신우파의 역사인식은, 민족운동 과정에서도 한국인의 사회적 능력이 축적되었음을 부인한다. 민족운동 세력은 타인(일본)이 강제하는 제도와 사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책임 있는 자율적인 선택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민주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일본과 싸웠다. 그들의 선언과 강령 어디에서도 자유, 인권, 재산권, 개인주의 등 문명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글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독립 이후에 민주공화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가치를 실현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것만큼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가와 민족이 간직해야 할 문명사적인 의미가 있는 역사적 가치가 또 있는가. 그래서 신우파의 역사인식을 경제결정론적, 물질만능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정부수립 60주년]2부- 국가 정체성을 묻는다 : (2)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체성과 건국신화 만들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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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국가 정체성을 묻는다 : (2)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체성과 건국신화 만들기

입력 : 2008.08.18 


친일·독재·반공으로 구성된 ‘48년 체제’는 허구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였습니다. ‘발전의 역사’였습니다.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 대한민국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1946년 6월3일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서울신문 1면 기사.

이명박 정부는 지난 15일 ‘제63주년 광복절 및 건국 60주년 중앙경축식’이라는 긴 이름의 행사를 축하하는 경축사에서 뉴라이트(신우파)의 ‘건국 신화 만들기’에 기초한 역사관을 분명히 드러냈다. 올해 8·15 경축 행사는 광복절보다 ‘건국 60주년’에 방점이 찍혔다. 뉴라이트 편향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 ‘광복절’을 앞쪽에 끼워넣긴 했지만, 관심은 ‘건국’에 있었다.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의 역사를 ‘성공의 역사’로 규정했다. 대통령이 자국의 현대사를 실패한 역사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성공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역사인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일본 우익들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자학사관이라며 승리사관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고 있듯이 한국 현대사에서 불행했던 시대를 지워버리려는 의도에 있다. 민중의 삶을 억압하고, 소외와 탄압으로 끔찍한 희생과 대가를 요구했던 역사적 교훈을 잊고, 가해자와 지배자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공을 강조한다는 의심을 사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48년 5월31일 제헌 국회 개헌식. 이승만이 사회를 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시종 경제성장, 민주화, 올림픽, 월드컵 4강 신화, 유엔 사무총장 배출 등 ‘승리의 역사’를 역설했다. 광화문 주변엔 B급 컬트영화에서나 봄직한 초대형 무궁화 조형물이 설치됐고, 광복절 행사에는 1만여명의 청소년들이 ‘동원’돼 뻥 뚫린 세종로를 행진했다. 이 일대는 곧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시킬 현대사 박물관(가칭 기적의 역사관)을 짓는 등 ‘국가의 거리’로 조성될 예정이다.





리니지M x PXG



이같이 국가를 떠받드는 정부의 사업들은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은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로 이어지는 단계론적 사고에 기초해 있다. 이들은 친일과 독립운동, 남북단절의 역사는 삭제하고 이승만을 ‘건국의 영웅’으로 승격시키려 한다. 박정희 시기를 ‘경제발전의 신화’로 치켜세우며 유신 체제는 고도의 산업화를 위해 불가피했던 일로 정당화한다.


뉴라이트와 이명박 정부의 목적은 현대사 60년 ‘성공의 역사’의 씨앗을 1948년 ‘건국’과정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건국 60주년’에 대한 대대적 기념 사업들은 이러한 역사인식의 발로다. 이들이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 공론화에 불을 켜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상 최근까지도 ‘건국’과 ‘광복’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지금 ‘건국’ 용어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그 전까지 객관적 사실 외에 다른 의미를 내포하지 않았던 ‘건국’이 뉴라이트에 의해 이념 투쟁의 장으로 끌려나왔기 때문이다. ‘건국’은 이들의 역사인식이 집적된 상징어일 뿐이다.


뉴라이트와 이명박 정부의 ‘건국신화 만들기’



1948년 5월10일 첫 총선거에서 투표를 하는 이승만.

정부의 ‘건국 60주년’ 관련 사업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뉴라이트 세력 주도로 이뤄져온 ‘건국절’ 강조의 흐름 위에 있다.


뉴라이트 진영은 지난해에도, 재작년에도 8·15 때마다 ‘건국 XX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어왔다. 처음은 2003년 노무현 정권 때 자유시민연대 등 보수단체가 주도한 ‘건국 55주년 반핵·반김 8·15 국민대회’였다.


이후 ‘건국절’을 부각시키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보수진영에선 지난해 11월 ‘새 정부’의 등장을 예견이라도 한 듯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중심엔 뉴라이트 학자들이 있다. 이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이 단체를 기반으로 지난 5월 국무총리 산하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회 출범 후 정부는 다양한 ‘건국 60주년’ 관련 사업들을 전개했다. 핵심 사업인 현대사 박물관 건립, 광화문~숭례문 ‘국가의 거리’ 조성을 비롯해 8·15를 기해선 건국 60년 기록물 전시회, 역대 정부수반 가옥 방문 등 철저히 ‘건국’에 초점을 맞춘 행사들을 준비했다. 건국 60년 기념우표, 기념주화도 만들었다. 정부의 ‘시끌벅적한’ 행사 진행을 위해 각 지자체와 시민들도 동원됐다. 정부는 각 지자체에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며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구성과 관련사업 추진을 요청했다. ‘관주도형 동원운동의 부활’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광복절 행사 때 등장한 주황색 티셔츠의 ‘국토대장정’ 청소년단은 전경련이 정부와의 교감 아래 각 기업에 할당량을 주고 ‘동원’한 직원 자녀들이었다.



1952년 7월3일 군지프를 타고 4·3사건 현장인 제주도를 순시 중인 이승만 당시 대통령.

이뿐만 아니다. 범위를 넓혀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청산’의 최소한의 보루마저 ‘청산’해 버리려 하고 있다. 지난 4월 정부는 과거사 위원회들을 정비할 방침을 밝혔다. 이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과거사 위원회들에 예산삭감을 통보했고, 인력 1만여명을 감축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에는 막말파문을 일으켰던 한나라당 인사를 ‘낙하산’ 임명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현재 각 과거사 위원회들은 정상 업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말로는 ‘예산 효율’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친일파 청산’에 대한 거부감과 큰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친일파’라는 용어조차 사용하길 거부하는 뉴라이트는 그 등장 자체가 과거사 정리 작업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됐다”며 “60년밖에 안 된 역사는 그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신화 만들기’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지난 4월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발표에 대해 “친일문제는 국민 화합 차원에서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며 사실상 ‘친일파 청산’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냈다.



1960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듣고 ‘민의의 승리’를 기뻐하고 있는 시민들.

최근 뉴라이트 학자들이 출간한 ‘건국 60년의 재인식’에는 정부와 뉴라이트의 이런 인식이 가감없이 담겼다.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이영훈 서울대 교수,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등 12명의 특강 내용을 정리한 이 책은 ‘이승만 영웅 만들기’에 집중한다. 과거사는 지우고 반공주의, 국가주의를 다시 논의의 장으로 불러들이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대안 교과서’ 등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려 안간힘을 써왔다. ‘건국절’과 ‘역사의 재구성’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다.


1948년 체제의 한계, 해방 3년의 시간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의 인식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성공적인 산업화·민주화의 근대화를 거쳐 이제 ‘선진화’로 나아가야 할 차례다. 이들은 이런 논리에 입각해 시장자유주의를 부각시키고 강력한 배제의 논리인 반공주의를 다시 불러들일 태세다.


그러나 편향된 역사인식은 독단적일 수밖에 없다. 임시정부의 법통, 사회주의 혹은 민족주의 좌파 계열 등의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은 다시 배제됐다. 진보적 시민단체, 광복회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 진보 정당 등 각종 주체들의 항의 성명이 빗발치고 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탑골 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려 끌고 다니는 학생들.

일반의 인식과도 역시 동떨어져 있다.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최근 <경향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반영한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승만을 꼽은 이는 전체의 3.6%에 불과했다. 당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에 반대했던 김구의 경우 28.3%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대해서도 3.3%만이 큰 업적을 남겼다고 답했다. 현 정부와 뉴라이트에서 ‘잃어버린 10년’으로 명명한 김대중(7.1%), 노무현(4.8%) 정권보다도 낮은 평가다.


뉴라이트의 ‘건국 신화’는 현재 사회 내 다양한 주체들에게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역사적으로도 한계를 갖는다. 이들이 강조하는 ‘1948년 체제’는 배제와 억압, 결핍을 제도화한 국가의 출발이었다. 반공, 친일파, 독재 등 오늘날 한국사회가 극복해야 할 모든 것들이 건국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현재까지 한국 민주주의에 일정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흉내낸 건국 신화 만들기가 불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48년에는 되살릴 신화가 없어


1948년 8월15일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최초의 민주주의적 선거와 헌법제정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선포했다. 근대 국민국가의 출범이자, ‘자유 민주주의’가 최초로 제도화된 것이다. 게다가 국가가 성립될 때 그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제헌헌법은 민주주의의 제도화에서 나아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노동자의 이익 분배 균점권’ 등 사회민주주의의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헌법이 제시하는 국가상을 실현해내지 못했다. 우파인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은 남한 단독정부를 구성, ‘반쪽 정부’로 출발했다. 이는 후일 냉전 체제를 고착화하는 시작이 됐다고 평가된다. 여러 집단 간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도 수용하지 못했다. 단정 수립에 반대한 김구·김규식 등 민족주의자들과 좌익·중도 우파 세력들은 국가 안에 정당하게 통합되지 못하고 모두 배제됐다.


다수의 세력을 껴안지 못하다보니 비정상적 국정 운영이 불가피했다. 그 방식은 폭력적으로 드러났다. 중도파 여운형과 김구는 암살됐고, 다른 이념의 세력은 가차 없이 처단하는 ‘반공체제 성립’이 시작됐다. 이 과정은 당시 여러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형성되던 좌우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능성을 폐쇄했다. 현 집권 세력의 자본주의·자유주의 이념에 반하는 세력은 ‘외부의 적’과 동일시해 완전히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 됐다.


이는 48년 말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법제화됐다. 많은 전문가들은 건국 당시의 이념적 기초와 실천을 담은 것은 헌법이 아닌 국가보안법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남한 자본주의 대 북한 사회주의의 편협한 대결적 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뉴라이트 진영은 이승만 정권의 건국이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모태라며 추어올리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이 외쳤던 ‘자유민주주의’는 냉전시대 ‘반공’ ‘미국’일 뿐이었다. 이것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보통선거권은 보장됐지만, 이 효과를 무력화하기 위해 관권·부정선거를 일삼았다. 이후 개인의 권리 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의 의미는 실종됐다. 이는 자유주의가 ‘친미반공’, ‘자본주의’의 동의어를 거쳐 ‘경제적 신자유주의’로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파 세력을 자신의 주요한 권력기반으로 삼아 정권을 유지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현재 우리 사회의 큰 과제인 ‘친일파 청산’이 힘에 부치는 결정적 원인을 마련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은 이미 당시 민의에 의해서도 심판을 받았다. 이승만의 독재, 부패, 선거 부정 등은 시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4·19 혁명으로 폭발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로부터 1주일이 지난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하야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민의 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억 투쟁의 굴레’


물론 48년 당시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무시할 순 없다. 전쟁과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양한 비정상적 상황이 역사를 구성했다. 그러나 뉴라이트 진영의 ‘건국절 만들기’는 역사에 대한 건강한 대응방법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들의 인식에는 북한 사회주의의 실패와 남한 자본주의의 성공이라는 이분법이 깔려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 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노선 싸움에서 남한의 선택이 옳았고, 그 결과 이만큼 ‘잘살게’ 됐다고 지금을 평가한다. 이른바 ‘승리 사관’이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에 참석한 시민들. 이날 행사를 위한 표어 모집에선 ‘오늘은 정부수립, 내일은 남북통일’이 선정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러한 역사인식은 탈근대 시기에 냉전시기 낡은 이념 논쟁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이는 남북 체제의 대립과 반공주의로 자행된 수많은 자유와 인권의 제약, 노동 탄압, 반민주적 행위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성보 연세대 교수는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억 투쟁의 굴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자학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지금으로부터 단절시키고 기만해서도 안 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원 연구원은 “탈근대의 시기에 정부가 이데올로기 투쟁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국가정체성을 규정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특정 이념이나 국가정체성의 선점이 아닌 한국사(史)를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인정하고 논의하는 게 한국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발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로사기자>
<특별취재팀 = 손제민·선근형·이로사기자>




참고자료 :

  • <한국현대사 60년>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
  • <1948년 체제와 한국 민주주의> 박찬표, 2008
  •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참여사회연구소, 한울, 2007
  •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포럼, 기파랑, 2008
  • <건국60년의 재인식> 김영호편, 기파랑, 2008

알라딘: 한국의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 - 냉전 자유주의와 보수적 민주주의의 기원 박찬표

알라딘: 한국의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


한국의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 - 냉전 자유주의와 보수적 민주주의의 기원 
 | 커리큘럼 현대사 4
박찬표
(지은이)후마니타스2007-04-17




























미리보기


이 책은 1997년 고려대 출판부에서 출간된 바 있는 지은이의 책을 수정, 증보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사실 오류의 정정과 함께 재해석이 이루어졌는데, 본문의 제3장 신탁통치 파동, 5장 5.10선거와 제헌 및 정부 수립 과정을 새로 추가하고, 서론과 결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다시 서술했다.

한국현대사 연구에서 누락되어 있는 큰 주제 분야인 한국 민주주의의 초기 제도화 과정을 끈질기게 파고들고 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국가와 정치체제로서 어떻게 이식되고 제도화되었는가 하는, 그 원형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있다면, 이 책은 그 관심을 해소하는데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다.


목차


책을 펴내면서

제1장 서론

제2장 군사점령과 점령 통치 기구의 수립(1945년 8~12월)

제1절 군사점령에 기초한 군사적 점령 통치 체제의 수립(45년 9월 8일~10월 중순)
1. 구체제의 위기와 새로운 동맹의 결성
2. 군사점령 과정과 그 의미
3. 점령 통치 체제의 수립
4. 소결
제2절 군정 부대의 진주와 국가 기구의 수립(45년 10월 하순~12월)
1. 초기 탁치 구상과 ‘기능주의적’ 대한 전략
2. 군정 부대의 진주와 국가 기구의 재건
3. 소결

제3장 반공 체제의 형성

제1절 모스크바협정과 임시정부 수립을 둘러싼 경쟁의 시작
제2절 반공 국가 기구의 완성
1. 민사 행정 체제의 분리와 중앙집권화
2. 군정의 지방 장악과 ‘대항 국가 세력’의 종식
제3절 좌파 통제 기제와 우파 국가 권력 집단의 형성
1. 좌우 대립 구도의 구축과 좌파 통제 기제의 확립
2. 남한국가의 국가 권력 집단 형성
제4절 소결

제4장 남한국가의 기반 확대 및 개혁 시도와 좌절(1946년 5월~47년 6월)

제1절 국무성의 신정책
1. 통합?개혁 노선과 비(非)공산 중도 연립정부 구상
2. 경제 안정화?부흥 구상과 좌절
제2절 국가 기구의 현지화 및 국가 기구 개혁 시도의 좌절
1. 점령 통치 기구의 현지화
2. 점령 권력 개편 시도와 국가 기구의 자유주의적 개혁 시도
제3절 국가 권력 집단의 확대 시도와 좌절
제4절 소결

제5장 반공 체제의 강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화(1947년 7월~48년 8월)

제1절 단정 노선의 확정과 단정 수립 국면의 점령 정책
제2절 반공 체제의 강화
1. 점령 통치 구조의 변화
2. 국가 기구 정비와 확대
제3절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이념의 이식
1.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이식
2.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이식
제4절 5?10선거와 정부 수립
1. 5?10선거에 대한 국내 정치 세력의 대응
2. 5?10선거와 그 결과
3. 제헌과 정부 수립
제5절 소결

제6장 결론
접기


책속에서


...임시정부에 참여할 국가 권력 집단의 구성 문제에서, 국무성은 애초 우파를 배제한 중도 및 중도 좌파 중심의 중도 정권 수립을 구상했지만 군부의 반발로 좌절되었고, 군부와 국무성의 타협의 결과 '극우 및 극좌 배제'방침이 점령 당국에 하달되었다. 그러나 점령 당국에 의해 실행되는 과정에서 이는 다시 왜곡되어 결국 중도 좌파를 ...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박찬표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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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목포대학교 정치언론홍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의회정치와 민주주의』(2002),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2007), 『한국의 48년 체제』(2010) 등이 있고, 역서로 『민주주의의 모델들』(2010)이 있다.

최근작 : <양손잡이 민주주의>,<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어떤 민주주의인가> … 총 13종 (모두보기)
박찬표(지은이)의 말
이 연구는 한국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구조적 제약을 극복하고자 하는 미래의 전망 속에서, 그것을 부과한 한국 민주주의 초기 역사 조건과 그 제도화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명제의 의미를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설명한다.

이 연구는 민주주의를 사회, 경제적 영역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미래의 방향 속에서 그에 대한 구조적 제약을 부과한 해방 3년사를 재해석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심층적인 역사 공부의 일환
시시프 2011-04-04 공감 (0) 댓글 (0)





한국의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


<짧은 소개>

학부 수업시간에 제출해야 할 레포트를 결국 능력부족으로 끝내지 못하고 서론만을 쓴 채로 남겨두게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한 추천 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 마이리뷰 첫 글을 올린다.

교수님께서 현대사에 관한 책은 기본적으로 500페이지가 넘는다고 말씀하셨는데, 거짓말처럼 이 책도 500페이지였다. 이 책은 이미 물리적인 볼륨면에서 만만하지 않고, 내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집중력이 요구되는 책이다. 저자의 박사 논문을 다듬어 출간된 책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즈음과 같은 시기,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많이 왜곡되어 전달되어 온, 몇몇 사람들을 진저리치게 만드는 자유민주주의' 기원에 대해 탐구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세워진 이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과거를 통해 확인하는 과정은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고, 이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지시할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초강대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과정에서 이미 한반도는 국내 정치 세력의 역량을 넘어 외부에 의해 체제 개혁을 위한 기본적인 규정력이 부과되었고, 따라서 초기 점령 통치 기구 수립 과정에서 구체제의 해체 정도, 민주개혁의 수행 정도는 역설적이게도 변혁 세력의 힘과 반비례했다."

-『한국의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中-

<서론 부분>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는 민주공화국으로 자유민주적 질서 위에 세워졌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념적 개방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따라서 정치사회 및 정치적 반대에 또한 개방적이다. 그러나 21세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과연 이념에 있어서 개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특히나 정치에 있어서 ‘반공’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고 있으며 최근 사드배치와 관련해서도 ‘종북’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념적 탄압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경제, 사회적 민주주의까지 제한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와 같이 규정된 사회 안에서 제한적인 민주주의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저자 박찬표는 책 서두에 “역사는 항상 앞선 역사가 남긴 유산을 그 사회적 조건으로 하여 전개된다는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한국 민주사회가 왜 민주화 이후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보여주었으며 어떻게 현재의 사회, 경제적 지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역사적 맥락으로 파악하기 위해 해방 후 3년간의 시기를 재해석한다. 즉, 현재 한국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구조적 제약을 극복하고자하는 관점에서, ‘이러한 제약을 부과한 한국 민주주의 초기 역사 조건과 그 제도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는 이 시기를 ‘한국 현대 국가의 형성기이자 정치적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동시에 한국민주주의가 넘어야 할 구조적 제약 역시 규정된 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대한 초점은 ‘민족주의적 지향에서 분단으로의 과정’이 아닌, ‘민주주의 지향의 관점에서 남한의 국가 형성과정’에 맞추어져 있다.




저자는 남한의 민주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개념이 남한의 국가형성과 초기 정치 체제 형성을 둘러싼 대내외적 배경에서 어떠한 특수성을 갖는지 일본, 독일 등과 비교한다. 이러한 비교는 미국의 주도로 남한에 ‘자유민주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에 있어서 그 특수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때 남한은 군국주의국가가 아닌 식민지 해방 국가이자, 반공블럭 형성이 최우선 사항이 된 좌우대립 국가이며 따라서 미국은 ‘반공블럭 형성’과 ‘자유민주주의의 초기 제도화’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측면을 갖고 남한을 점령하게 된다. 특히나 책에서는 두 측면에 관한 미국세력 내부의 갈등이 이 시기에 대한 기존연구들에 비해 두드러진다. 책은 소련과 미국의 대립, 조선 내 좌파·우파의 대립뿐만 아니라 ‘반공’의 하한선에 있어서 점령 본국과 점령 당국, 점령 당국 내의 강경파와 개혁파 사이의 대립 등 미군정의 권력구조와 내부 역학관계 내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대립구도를 다룬다. 미군정 점령정책 내부의 정책조류 차이는 정책방향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로서 대한정책의 성격을 해명하는데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책의 주 구성과 내용인 ‘미국의 대한정책과 정책 수단의 변화, 이에 따른 점령 통치 기구의 변화 과정 및 점령 정책의 변화에 초점을 둔 미군정기 연구’에 대한 이해는 미군정기가 한국의 초기 국가형성과 민주주의의 내재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떠한 특수성을 갖게 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특수성의 배경인 한국의 국가 형성시기부터 오랜 기간 왜곡되어 온 현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개념 확립의 가능성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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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 2017-01-0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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