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5

17 한국 신학박사 1호 남궁혁 목사의 숨겨진 생애



중앙시사매거진
201701호 (2016.12.17) [182]목차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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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한국 신학박사 1호 남궁혁 목사의 숨겨진 생애
평양은 전란 중 그의 실종에 유감을 표했다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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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교회 항일운동과 교회 일치주의 선도하고 6·25전쟁 당시 납북… 중국에 사람 보내 행방 수소문한 한시해 전 조평통 서기국장이 양해 구하기도




▎1948년 당시 서울의 남궁혁 목사와 김함라 부부.

“1993년 록펠러 재단의 고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순안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국하려던 즈음 한시해가 내게로 다가와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중국 옌볜에도 사람을 보냈는데 그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며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서 전쟁통에 폭격을 맞아 돌아가신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1934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강의 중인 남궁혁 목사.

토니 남궁 전 UC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부소장은 1990년대에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있었던 북한 고위 관료와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미국 국적의 남궁 전 부소장은 평양과 워싱턴 간의 비밀 접촉을 수없이 성사시킨 중재자(middle man)이자 미국 내 아시아문제 전문가다. 북미 막후교섭을 위해 줄잡아 60회 이상 북한을 방문했다고 알려졌다.(월간중앙 2016년 11월호 ‘토니 남궁 전 UC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부소장 인터뷰’ 참조)

그에겐 북미 교섭 중재 말고도 혼신의 힘을 쏟게 하는 숙제가 하나 더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한군에 납북된 할아버지 남궁혁(1882∼사망) 목사의 행적을 확인하는 일이다. 남궁혁 목사(이하 남궁혁)는 전쟁이 터진 1950년 8월 납북됐다. 공산당 선전에 종사하도록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함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알려졌다. 장병욱 씨가 쓴 <6·25 공산 남침과 교회>에 납북 이후 그의 행적이 일부 기술돼 있다. “전 YMCA회장을 지낸 바 있는 구자욱 씨는 용판동 근처에서 절명했으며 남궁혁은 중태에 빠졌고, 전 조선신학교 교장이던 송창근 박사와 오택관은 걸음을 잘 걷지 못하여 인민군의 등에 업혀 11월 10일 강계에 도착했다.” 남궁 전 부소장은 한국전쟁 당시 대전에서 북한군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는 윌리엄 딘 전 24보병 사단장에게도 할아버지의 행방을 물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

남궁 전 부소장은 북미 막후 접촉의 산파역으로 나서면서 교분이 두터운 북한 엘리트들에게 할아버지 문제를 넌지시 언급했던 모양이다. 이에 북한도 1990년대 들어 남궁혁의 행적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무위에 그쳤다고 한다.

납북 건으로 북한에 악의 품진 않아




▎토니 남궁 박사는 할아버지 남궁혁 목사의 유업을 받들어 남북 간 가교 역할을 하고자 한다. / 사진·김경록

당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실력자로 통하던 한시해가 할아버지의 납북과 실종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관리들을 국내는 물론 중국에까지 보내서 할아버지의 납북 후 동선(動線) 파악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했다. 굉장히 친절하고 예우를 갖춰서 말하더라.”

북한 당국이 납북과 관련해 손자인 남궁 전 부소장에게 유감이나 사과를 표명했나?

“한시해가 유감스럽다는 말은 했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다.”

할아버지의 납북은 집안의 비극이다. 그런 비극을 유발한 북한에 대한 가족들의 감정은 어땠나?

“복잡한 심정이었지만 북한에 악의를 가지거나 혐오 또는 증오를 품진 않는다. 그 시절 우리 가족뿐 아니라 많은 한국 국민이 비슷한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개인의 가족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미래다.”

도대체 남궁혁은 어떤 인물이기에 북한에 의해 강제 납북을 당하고, 훗날 그의 자손에게 유감을 표하게 된 걸까?

그는 일제강점기에 성서 번역작업을 초교파적으로 추진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공인 성서도 그가 번역작업을 주도해 1937년 발간한 신약전서 개역본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인 최초 신학박사이자, 평양장로 회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듯 교계의 촉망을 받던 신학자였다. 그런 그가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기록에서 모두 사라졌고 이제 손자가 그의 족적을 더듬는 상황이다.

남궁혁의 출생과 성장, 사회 활동, 신학자의 길은 반전과 도전으로 가득하다.

그는 188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 임형준은 평안감사를 지낸 고관으로 고종 임금을 보필한 6승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임오군란 등으로 세상이 어수선했다. 경기도 용인으로 잠시 피란을 가기도 했고, 평안감사로 보임된 외조부를 따라 일곱 살까지 평양에서 자랐다. 평양은 훗날 그가 신학자와 목사로 활동했던 주요 무대이기도 했다.

열네 살 때 서울의 배재학당에 입학한 그는 구한말 독립운동가 남궁억을 그의 멘토로 삼는다. 남궁억은 남궁혁보다 스무 살이 많은 함열 남궁 씨 집안의 어른이다. 일제강점기 유명한 선각자이자 계몽운동가인 남궁억은 황성신문의 초대 사장을 지내는 등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로 독립정신 고취에 일생을 바쳤다. 그의 사상적, 정서적 세례를 받는 남궁혁은 1939년 남궁억이 일제의 고문 끝에 숨지자 상주 노릇을 자임하기도 했다.

남궁혁은 두뇌가 비상했다고 한다. 어학에서 거의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토니 남궁 전 부소장에 따르면 “영어는 물론이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Aramaic, 예수님이 설교했던 언어), 16세기 킹 제임스 영어 등을 구사했다”면서 “할아버지의 재능을 눈여겨본 남궁억이 그의 멘토를 자임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조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 같은 훗날의 지도자들이 어린 시절 남궁혁에게서 영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들은 민족 각성의 수단으로 미국 청교도 정신을 연구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르쳤던 까닭에 그의 의식 저변에도 민족주의가 자리했을 법하다.

일제강점기 마흔 줄 나이에 미국 유학 떠나




▎1935년 결혼식을 올린 토니 남궁 박사의 부모 남궁요섭과 백영희 부부.

근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배우고자 함일까? 배재학당을 수료한 그는 인천세관의 고위 관원으로 사회에 뛰어든다. 얼마 뒤 목포세관의 책임자로 자리를 옮긴 그는 부족함을 모르는 관원으로서의 삶을 누린다. 당시 목포세관 책임자의 급료가 도지사의 그것에 필적했다는 얘기도 있다. 부와 사업적 경험은 쌓았겠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비참한 시기였을 수도 있다고 교계는 분석한다.

1907년에 결국 공직생활을 접은 그는 목포 영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목포에서 활동하는 장로회 선교사들이 남궁혁의 총명과 재질을 간파해 그를 교회로 인도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선교사들은 유서 깊은 기독교 고장인 황해도 솔내(松川) 명문가 출신 김함라를 그에게 소개했고, J.S.게일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에 이르게 된다. 김함라는 독립운동 가문 출신으로도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를 조선으로 가져와 전국에 배포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큰언니이자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으로 중국에 망명해 조선독립군의 군의관으로 활약한 김필순의 조카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은 김함라의 고모부다.

김함라를 비롯한 주변의 노력에 힘입어 남궁혁은 늦깎이 신학자의 길로 접어든다. 1917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1년 졸업과 동시에 광주 양림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여기서 그쳤다면 그의 인생 역정은 평탄했을지도 모른다.




▎1931년 평양에서 사진 촬영을 한 남궁혁 목사와 가족들.

1922년 4월 선교사들의 권유에 따라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신학교로 홀로 유학을 떠난다. 처음엔 해외 유학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인생항로를 바꾸게 하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1928년 서울 YMCA 소속 외국인 선교사들이 발행한 ‘The Korea Mission Field’에 유학 경위의 일단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로버트 녹스(Robert Knox) 목사는 ‘내 친구 남궁혁(Meet My Friend- Namkung Hyuk)’ 이란 글에서 신의 기적을 체험한 남궁혁의 인생관이 바뀐다고 서술했다. “당초 남궁혁은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유학생활에 뜻이 없었다. 어느 날 광주와 순천을 오가던 만원 버스가 협곡에서 60m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승객 대부분이 큰 부상을 당하는 사고였지만 남궁혁은 뒤집어진 차량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현장에서 즉사할 수도 있던 참사를 모면한 것이다. 생명을 부지하게 된 그는 자신에 부여된 특별한 과업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 길로 마흔 줄의 그는 유학에 나섰다.” 나중에 부인 김함라는 광주에 홀로 남아 수피아 여학교 교사로 일한다. 훗날 서울 남대문교회의 여전도회를 만들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기도 한다.

신사참배 거부와 중국 상하이 망명




▎1951년 일본 도쿄 시절의 토니 남궁의 가족들. 모두 7남매다. / 사진제공·토니 남궁

미국 유학 시기를 일러 남궁 전 부소장은 이렇게 풀이한다. “1919년 3·1운동의 실패와 함께 일제의 무단통치가 본격화되면서 조선 사람들도 하나둘씩 식민통치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교회도 이념적, 신학적, 지역적 기반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 남궁혁은 교회를 정화하고 사회에서 올바른 기능을 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을 신약성서에서 찾는다. 이의 첩경이 국민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회자들을 다수 배출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의 교회는 민족의 시련에 동참하는 방편이자 지성인들의 활동 공간이었다. 나아가 자주의식과 근대화 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의 장이었다. 주권과 인권, 민족의식의 방파제 역할을 한 곳이 바로 교회였다고 최원주 목사는 논문 ‘남궁혁의 생애와 사상: 교회 일치와 연합 사상을 중심으로’에서 평가했다.

1925년 미국 유니언신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한 남궁혁은 귀국과 동시에 모교인 평양장로회신학교에 한국인 최초의 교수로 부임하기에 이른다. 귀국 후 박사학위 논문을 유니언 신학교에 제출한 그는 1929년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에게 거는 교계의 기대도 컸을 법하다. 소기천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한국인 제 1호 미국 유학파 신학박사’ 논문에서 남궁혁을 일러 “초기 한국 교회에 눈부신 역할을 감당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직을 수행하는 동안 성서 번역 사업과 성서 주석 발간,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과 같은 많은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글을 남겼다”고 평가한다. 이때부터 본격화된 성서 개역 작업은 1937년에야 끝을 볼 정도로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성과물이었다.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유형을 설명하면서 “한국적 신학을 정초(定礎)시킨 사람은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 남궁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심성을 가지고 한국 신학을 말하므로 한국 신학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말이다. 격동의 역사는 그에게 또 한 번의 선택을 요구한다. 신사참배 거부와 중국으로의 망명이 그것이다.

1938년 평양신학교도 일제 무단통치의 수단인 신사참배를 강요당한다. 남궁혁은 신앙적 결단을 내린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그가 몸담은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가로 폐교조치를 당한다. 이후 그가 편집장으로 일하던 <신학지남>도 1940년 폐간되자 중국 상하이 망명길에 오른다. 망명시절 그는 <신학지남>을 정리하는 일과 신학 사전 발간에 주력했다고 알려졌다. 부인 김함라는 털실 공장을 운영하는 수완을 발휘해 상하이에 몰려든 한국인 망명객 상당수가 도움을 받았다. 남궁혁은 비록 총을 잡지는 않았지만 백범 김구와 같은 무장 독립투쟁을 선도한 지인을 많이 뒀다. 그에게 상하이 임시정부 참여를 요청한 사람도 백범으로 알려졌다. 1945년 남궁혁은 상하이 거류민단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남궁 전 부소장은 “할아버지는 정치인이 아닌 신학자인 까닭에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상하이 교민사회에서 영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할아버지는 김구, 김규식, 김필순과 같은 독립운동가와 친분이 두터웠지만 종교인으로 비폭력주의를 택했다”면서 “더불어 김구의 폭력주의 노선도 인정하는 등 수용적인 입장에 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광복 이후 그의 신앙생활은 교회의 연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교회일치주의(에큐메니즘)로 수렴된다는 데 큰 이견이 없다. 교파와 교회를 초월해 하나로 통합하려는 교회일치주의적 관점은 그의 오랜 신념이기도 했다. 그는 1932년 펴낸 <신학지남> 14권 6호에서 “교회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지체(肢體)이며, 교회는 영적·유기적 생명을 가진 한 몸”이라는 말로 교회 분열상을 우려하기도 했다. 또 <신학지남>에 보수주의자인 박형룡 목사와 자유주의자인 김재준 목사 등과 같이 보수와 진보 진영을 망라하는 집필진을 합류케 하는 등 신학적 논쟁을 포용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서로 다른 성향의 박형룡, 김재준 목사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추천한 것도 그의 교회 통합 의지의 표현으로 평가된다.

망명에서 돌아온 남궁혁은 교회 연합운동에는 관여했지만 활동 반경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소싯적 세관원으로 근무했던 그는 광복 후 미군정하의 관리로 활동한다. 미군정의 요청으로 적산관리처장에 부임한다. 이어 1947년 재무부 내의 세관 업무 관련 직책을 맡는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재무부 세관국장을 지냈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 재무부 직제에는 세관국이 없다는 반론도 있다. 이듬해인 1948년 관리 생활을 청산한다. 그는 1949년 11월 태국에서 열린 동남아 기독교 반공대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돼 반공주의자라는 평가도 받는다.

김일성, 강양욱 보내 북한 정부 참여 요청




▎1925년 평양장로회신학교 한국인 최초 교수로 부임한 남궁혁 목사(뒷줄 오른쪽)와 동료 교수들. / 사진제공· 토니 남궁

남궁혁은 1948년 10월부터 1950년 8월 납북될 때까지 한국기독교연합회(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 KNCC의 전신) 총무로 일하며 교회연합 사업에 주력한다. 그의 절친한 벗인 김관식 목사가 타계하자 그 후임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KNCC 총무로 활동하는 기간 동안 그는 기독 공보 발행, 기독교방송 사장 역임, 찬송가 합동 출간, 기독교세계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한국위원회 설치 등의 업적을 남긴다.

남궁 전 부소장은 지금은 100세를 넘긴 모친으로부터 전해들은 할아버지의 뒷얘기를 전한다.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할아버지는 한국교회의 보수적 풍토가 낯설기만 했다. 보수와 진보가 호각세를 이루던 1920년대 미국 교회와는 너무 달랐던 것이다. 진보는 세상을 뛰어들어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인 데 반해 보수는 신앙의 본령을 개인의 구원에 두고 있었다. 귀국을 앞둔 할아버지는 한국 교회가 진보와 보수 두 가지 조류를 모두 포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선 듯하다. 상하이 망명 시절에도 양쪽의 교리를 모두 가르치고자 노력했고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할아버지의 제자 중에는 강양욱 전 북한 국가 부주석도 있었다.”

김일성의 생모 강반석의 혈족인 강양욱 전 부주석은 광복 전까지 평양에서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다 분단 이후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내는 등 권력의 핵심부에 몸담았다. 남궁혁은 강양욱으로부터 북한 정권의 참여를 제의받았다고 남궁 전 부소장은 주장했다. 그는 “6·25 한국전쟁 직전 김일성 북한 주석이 강양욱을 보내 정권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안다”면서 “김일성의 생모 강반석은 원래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며, 김일성 본인도 나중에는 미국 목사들과 성서를 논하고 아멘이라는 말과 함께 기도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012년 토니 남궁 전 부소장은 남궁혁의 모교인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소재 유니온 신학대학원(Union Theo logical Seminary)에서 할아버지를 조명하는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남궁혁에게 기독교 신앙은 외세침략에 대한 대응”이라고 규정했다. 또 식민 통치기에 남궁혁이 신학 공부에 접어든 사실 역시 “각양각색의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악습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궁 전 부소장은 북미 접촉의 중재자로서 자기 삶이 남궁혁의 생애와도 운명적으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그는 “할아버지는 언제나 뒤에서 교회통합을 위해 묵묵히 제 역할을 했고, 나 또한 한반도 평화와 효과적인 외교를 위해 민간 또는 비공식 영역에서 침묵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북미 교섭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통일문제에까지 관여하게 됐는지 내 스스로도 의아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념적으로 갈라진 남과 북을 잇는 작업이 할아버지의 유업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한국, 아직도 완전한 독립국가 아니야




▎1953년 일본 도쿄 시절의 김함라와 네 아들. 당시 남궁혁 목사는 납북된 상태였다.

남궁 전 부소장은 할아버지 남궁혁이 직면했던 구한말, 해방 전후의 치명적인 조건들이 오늘날 한반도에도 잔존한다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조선 왕조와 양반계급의 몰락, 일제의 식민 통치, 해방 이후의 동서 양대 진영으로의 분열, 이념 대결과 같은 환경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반도와 주변 정세를 관통하는 본질적 요소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건 놀라운 사실”이라고 경각심을 불어넣는다.

북미간 비밀 접촉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본 한반도 정세가 100년 전 구한말, 70년 전 해방 후 상황과 어떤 면에서 유사한가?

“연관성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 나는 아직 완전한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반도는 아직 냉전 상황이고 완전한 독립도 성취되지 않았다. 일제의 지배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은 아직도 외부세력의 영향을 받는다. 언젠가 한 대통령 당선인의 외교·안보 참모에게 당선인의 외교 정책이 뭐냐고 물었다. 그 참모는 ‘먼저 워싱턴, 도쿄, 베이징, 모스크바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건 여행 에이전시가 하는 일이지 외교 정책이 아니지 않느냐’고 공박한 적이 있다. 아직도 한국의 외교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라는 주변 4강에 머문다.”




▎1942년 중국 상하이에서 환갑을 맞은 남궁혁 목사와 김함라. / 사진제공·토니 남궁

남궁혁의 인생유전도 드라마틱하다. 그는 어떤 인물로 와 닿는가?

“격동의 20세기를 살다간 비극적 인물 같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들에 그는 어울리지 않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리더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졌음에도 왕조체제의 몰락, 식민통치, 전쟁 등으로 인해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접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단결이라는 승산 없는 일에 매달렸고 끝내는 좌절했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역사의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에 개인적으로는 비극적 생을 살다 간 것이다.”

토니 남궁 전 부소장은 남궁혁이 못 다한 일을 떠안았다고 느낀다. 그는 북미, 북일 막후 접촉을 중재하고 성사하는 이유에 대해 “어떤 정치적 이념과 의제를 확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게 옳기 때문에 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나가고 싶다. 이념적으로 갈라진 남북 사이에서도 그 역할을 하고 싶다.”

-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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